매서운 초겨울 한파를 훈훈하게 녹이는 아름다운 보시행이 대불련총동문회에서 이루어졌다. 고(故) 김익권(金益權, 1922-2006) 장군의 미망인 한정희 여사가 5억 원이라는 거액의 장학기금을 대학생불교연합회 총동문회(회장 윤제철, 이하 대불련총동문회)에 지난 11월 19일 쾌척한 것이다. 이번 기증은 고 김익권 장군과 한 여사의 둘째 딸인 김형인 교수(외국어대)의 적극적인 주선과 권유로 이루어졌다.
생전 불심이 남달랐던 고 김익권 장군의 딸인 김형렬, 김형인, 김형의 세 자매는 부모님의 불심을 이어받아 돈독한 불심으로 보살행을 펼치고 있는 아름다운 보살들이다. 이들은 대불련총동문회 군포교지원단이 추진한 호국안국사, 호국석불사외 최근 깡통법당으로 잘 알려진 수색대대 영축사 등의 군법당 건립불사에도 크게 후원한 바 있는 신심 깊은 불자이기도 하다. 호국석불사에는 고 김 장군이 모시고 있던 원불인 석불을 옮겨 봉안했으며, 영축사 신축불사에는 둘째 딸 형인씨가 1천만 원을 보시해 불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고 김익권 장군이 시곡농장에 모셔놓고 매일 기도하고 정진했던 원불인 석불. 이 석불은 박호석 법사의 주선으로 군법당인 호국석불사로 이운돼 여법하게 봉안됐다.
한정희 여사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김 장군과 한 여사의 돈독한 불심과 보살 원력이 대를 이어 계승되기 어려워지자 세 딸과, 어머니 한정희 여사는 ‘늘 정진하고 기도하며, 보살행을 다하라’는 아버지와 남편의 유훈을 대불련총동문회에 장학금 전달을 통해 이어가기로 뜻을 모은 것이다.
고 김익권 장군의 가족이 대불련동문회와 이처럼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된 데는 고 김 장군이 중경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당시 제자였던 전명철 동문의 역할이 컸다.
특히 김익권 장군의 세 딸은 지난 10월 29일 9사단 백마수색대대 깡통법당에서 새로 지은 영축사로 부처님을 이운하는 의식을 지켜보면서 크게 감동한 후, 젊은이 포교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당초 1억 수준에서 쾌척하려 했던 장학기금을 5억으로 대폭 늘려 전달하게 되었다. 박호석 법사를 중심으로 한 대불련총동문회 군포교지원단의 헌신적인 활동이 세 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김익권 장군의 가족은 앞으로도 젊은이들 포교를 위한 장학기금을 계속해서 출연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불련총동문회는 한정희 여사와 세 딸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이 장학기금을 사단법인 대불에서 조성하고 있는 ‘젊은 불자 육성기금’의 제1호로 접수해 소중히 사용할 예정이다. 장학기금의 명칭은 고 김익권 장군의 호를 따서 ‘시곡(枾谷)장학기금’으로 명명했다. 대불련총동문회는 규정에 따라 곧 기금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기금의 공정한 관리와 운용에 착수할 예정이다.
이 장학기금은 지난 11월 8일에 대불련총동문회 통장으로 입금되었고, 지난 11월 19일 개최된 열린법회에서 기증 및 고불식을 봉행한 것이다. 이날의 뜻깊은 자리에는 김익권 장군의 세 딸 형렬, 형인, 형의 씨를 비롯해 대불련총동문회 150여 회원들이 대거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날 어머니 한정희 여사를 대신해 고 김익권 장군의 세 딸로부터 장학기금 5억 원을 전달받은 윤제철 대불련총동문회 회장은 고불문을 통해 “고 김익권 장군과 한정희 여사, 그리고 그 가족의 소중한 뜻이 담긴 장학기금을 지혜롭고 여법하게 운영하여 젊은 세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따르게 할 것”이라며 “한정희 여사님과 그 가족 분들의 시주 공덕으로 일체중생이 업장을 소멸하고 서로 돕고 화합하는 사회가 되도록 정진하겠다”고 고했다.
대불련총동문회는 내년 2월 18일 ‘젊은불자 육성을 위한 미래비전 발원대회’를 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불교문화공연장에서 개최할 예정이며, 장학기금 조성사업의 지속적인 전개와 이의 장학금 지원, 군포교 지원, 중고등생 템플스테이 지원 등에 활용할 방침이다.
고 김익권 장군과 부인 한정희 여사, 이번 장학기금 쾌척에 큰 역할을 한 둘째 딸 김형인 교수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김익권 장군(1922-2006) 프로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4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1회로 졸업하면서 육군사관학교(5기, 당시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지원하여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59년 장군 진급 후 육이오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연락장교로 참전했으며, 육군본부 작전과장, 육군대학 교수단장, 육군정훈학교 교장, 육사 생도대장, 육군 제37사단장과 5사단장, 6군단 부군단장 등을 거쳐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다가 1972년 1월 24년 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예편했다. 그 해 4월 중경고등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5년 간 근무하고 1977년 3월 퇴임했다.
은퇴 후에는 경기도 광주에 마련한 시곡(枾谷)농장에서 농사를 지내며 불교공부와 수행 및 기도를 하며 노년을 보내다가 2006년 10월 1일 별세했다. 생전에 집필했던 자서전은 둘째 딸인 김형인 교수가 마무리해 지난 2009년 9월 열화당에서 출판되었다. 제1권은 김익권(金益權, 1922-2006)의 자전적 유고(遺稿)를 엮은 <참군인을 향한 나의 길>, 제2권은 김익권이 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한 추억을 기록하여 생전에 출판했던 <우리 아버지>를 새로이 편집한 <우리 아버지 이야기>, 제3권은 사진을 통해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꾸민 <사진 앨범>이다.
고 김익권 장군
*김익권 장군은 누구?
콧수염에 강인한 인상의 김익권 장군은 참 군인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늘 부하들에게 간결하면서도 차가운 음성으로 교훈이 되는 가르침을 주어 많은 부하들이 그 가르침을 가슴에 각인하고 있다.
김 장군의 말은 듣기에는 차갑지만, 가르침 속에는 따뜻하고 온유한 철학과 아버지 같은 인자함이 배어 있었다. 그와의 대면을 한 장병들은 대부분 김 장군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존경했다.
그는 독농가(篤農家)의 아들이었고, 참된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말’과 ‘글’, ‘문자’의 존귀함을 철저히 배웠다. 책으로써 공부하고 인격을 닦는 방법을 알았으며, 사서삼경과 불경 등의 고전(古典)으로써 오늘의 삶을 살았다. 그런 탄탄한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그는 참군인이 되었고, 위대한 장군이 되었다. 일제 때 학병으로 중국에 강제 종군했다가 해방을 맞았다. 서울대 법대 1회 졸업생이었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군 소령으로 내내 치열했던 전장에 있었다.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의 그의 역사는 현대사 바로 그것이었다.
김익권 장군은 일생을 참군인의 길을 걸었던 우리 시대 군인의 표본이었다.
그의 자서전은 일생을 참군인의 길을 걸었던 시곡(柿谷) 김익권의 진실한 기록이다. 아직도 분단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군(軍) 문제로 어수선했던 요즘 한국사회를 볼 때, 고전에서 피어난 김익권 장군의 삶은 이 시대 군인이 지녀야 할 생각과 자세의 올곧은 사표(師表)로서 많은 깨달음을 준다.
법대를 졸업한 그는 한 나라의 기본적 생존권을 지켜 주는 국군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군인의 길을 택했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뒤 조선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한정희 여사
*한정희 여사 프로필
배화여고를 수석 졸업하고 공주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했다. 공등학교를 기독교 선교사 장학금으로 다닌 인연으로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김익권 장군과 결혼 후 남편의 영향을 받아 불교공부를 하면서 불자가 되었다. 한정희 여사는 학창시절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던 은혜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불연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장학기금 쾌척을 결심했다. 한정희 여사는 평생을 김 장군과 해로하였으며, 1998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현재는 둘째 딸 김형인 교수와 함께 살며 요양 중이다.
*김형인 교수 프로필
숙명여고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뉴멕시코대학교에서 미국사를 전공, 극동사를 부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고려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등에서 가르쳤고,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미국의 정체성> <현대미국사의 흐름>, 역서로는 <한국전쟁의 국제사> 등이 있고, 그 외의 다수의 칼럼과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