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 경제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문제점
월러스틴은 아시아로 간 귀금속은 대체로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금고 속에 보관되거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으며 무역수지는 언제나 아시아에 불리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만약 이 주장대로라면, 영국이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늘 적자를 본 나머지 화가 나서 아편을 팔기로 마음먹었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 옮긴이 아사달. 아래 ‘옮긴이’). 아시아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아시아 경제는 유럽 세계 – 체제의 바깥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해묵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19세기부터 아시아 경제를 보통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통제경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경제 논리가 아니라 통치자의 정치적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 바치는 세금까지도 ‘공납 모드’라는 묘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최근(2000년대 – 옮긴이)의 연구들에 따르면 아시아의 전근대 국가들에도 사(私)기업가가 이끄는 상당한 규모의 활력 있는 상업 부문이나 금융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규모도 유럽의 기업들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므로 같은 은이 유럽에서는 투자로 이어져 자본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고, 아시아에서는 금고 속에 처박히거나 귀족들의 사치로 낭비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어 보인다.
위에서 말했지만 1500 ~ 1800년 사이에 유럽에서 아시아로 유입된 금, 은은 엄청난 양이다. 그 가운데 중국(제하[諸夏]. 정확히는 진짜 제하 왕조인 명나라와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 – 옮긴이)의 경우만을 보자. 중국이 이 사이에 무역을 통해 얻은 은은 유럽과 서아시아, 인도(바라트. 정확히는 무굴 제국 – 옮긴이)에서 들어온 양에다 일본에서 유입된 8,000 ~ 9,000톤, 멕시코(메히코 – 옮긴이)와의 직접 교역에 의한 1,000톤을 합쳐 약 6만 ~ 6만 8,000톤에 달한다(다다른다 – 옮긴이). 유럽이 아메리카(거북섬 – 옮긴이)에서 얻은 은의 절반(가봇 – 옮긴이)을 넘어선다.
그러면 왜 이 엄청난 양의 귀금속이 300년 동안이나 계속 아시아로 흘러 들어갔을까? 이것은 아시아에서 은의 가치가 유럽보다 높기도 했으나 주로 무역 적자의 결과이다. 번영하는 아시아에 대해(‘대해’는 빼야 한다 – 옮긴이) 유럽인들이 갖다 팔 물건이 별로 없었으므로 거의 유일한 수출품이 은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1660 ~ 1720년 사이에 아시아에 판 상품의 87퍼센트가 은이었고, 나머지만이 유럽산 상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정확히는 잉글랜드 – 옮긴이)의 동인도회사도 아시아로 수출하는 상품의 10퍼센트를 영국 제품으로 채우도록 규정했었다. 그러나 그 적은 양도 잘 지킬 수 없었다. 은이 아시아 상품의 수입을 위한 결제 수단으로 결정적인 비중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중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나
일부 서양 역사가들은 중국 경제가 유럽에서와 같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생태계에 대한 인구 압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인구의 증가로 목재나 연료(예를 들면, 석탄 – 옮긴이) 등 자연자원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간할 땅도 부족하고(모자라고 – 옮긴이) 지력(땅 힘 – 옮긴이)도 소모되었으므로, 중국인들(‘한족[漢族]’들 – 옮긴이)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단위 경작에 더 많은 노동력을 쏟아 부음으로써 생산량을 늘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노동력을 계속 더 늘려도 생산량의 증가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그들은 ‘안으로 말려들어 간다.’는 의미의(뜻인 – 옮긴이) ‘인벌루션(involution)’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한다. 종이를 안쪽으로 계속 말면 어느 정도는 말려들어 가나 어느 한계를 넘으면 더 이상 말리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중국 경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약간 성장하는 것 같아도 내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어느 시점에 가서는 정체하여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산업화(공업화 – 옮긴이)의 문턱에서 좌절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근대에 들어와 중국 경제와 유럽 경제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생겨난 이유라는(까닭이라는 – 옮긴이) 설명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아시아 경제에 대한 재평가는 이런 과거의 주장을 불식시키고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 학파로 불리는 미국 연구자들이 주목할 만한데, 그 가운데에는 『 변화된 중국 』 을 쓴 중국계 학자 ‘R. B. 웡’, 『 거대한 분기점 』 을 쓴 ‘케네스 포머런츠’, 『 리오리엔트 』 를 쓴 ‘안드레 프랑크’ 등 많은 사람들이 포함된다.
이 가운데 특히 웡이나 포머런츠 같은 사람들은 일본이나 중국 연구자들의 기존 연구와 함께 원사료를 통해 중국(사실은 명/청이므로 ‘제하[諸夏]와 만주’라는 말을 써야 한다 – 옮긴이) 경제를 재평가하고 있고, 그 점에서 강한 설득력을 보여 준다.
이들에 의하면(따르면 – 옮긴이) 18세기의 중국(청나라 – 옮긴이)은 인구가 엄청났음에도 생태학적 압력은 유럽의 선진 지역보다 덜 받고 있었다. 삼림의 황폐화나 연료의 고갈, 건축재의 부족이라는 점에서 중국이 유럽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또 유럽인들이 인구를 조절한 데 비해 중국인(‘한족[漢族]’ - 옮긴이)은 그러지 못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인도 산아제한을 통해 인구 조절을 했다는 것이다.
또 18세기 중국에서 경제가 발전한 양자강(장강 – 옮긴이) 하류 지역의 생활수준이나 소비수준은 지금까지 서양 학자들이 주장해 온 것과는 다르다.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칼로리(열량 – 옮긴이) 섭취, 설탕, 직물, 가구 등의 소비수준에서 잉글랜드 남부와 같은 유럽의 발전된 지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1800년경까지의 중국(사실은 청나라 – 옮긴이) 양자강 하류 지역, 일본과 인도(무굴 제국 – 옮긴이)의 선진 지역을 영국과 비교해 보면 인구, 임금, 기술, 법적 제도, 신용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9세기에 와서 유럽이 산업화(공업화 – 옮긴이)를 통해 큰 차이를 만들어 냈지만, 그것은 똑같이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한 유럽이 (목재를 대신할 – 옮긴이) 석탄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식민 착취를 통해 아메리카 등 해외의 막대한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19세기에 나타난 차이는 중국 경제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유럽 경제 성장의 가속화 때문이고, 그것은 특히 영국에서 철과 석탄 자원을 결합하고 아메리카의 자원을 이용함으로써 산업혁명(공업혁명 – 옮긴이)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18세기 이전의 상황을 보면, 1500 ~ 1750년 사이에 중국(명/청 – 옮긴이)의 인구는 1억 2,500만 명에서 2억 5,000만 명으로 약 100퍼센트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 인구가 230만 명에서 370만 명으로 증가한 것보다 증가율이 더 높다. 이는 은이 대량으로 들어와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며(활성화<하며> - 옮긴이) 경작지가 증가하고(늘어나고 – 옮긴이) 이모작의 도입으로 식량 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중국 경제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그 뒤를 잇는(사실은 청나라가 순[順]나라와 남명[南明]을 점령하고 식민 지배를 시작한 – 옮긴이) 정치적 혼란 때문에 17세기에 잠시 침체했으나 17세기 말에 다시 회복되었다. 양자강 유역에서는 면직물/견직물 산업이 크게 성장했고 그 밖에 자기, 담배, 연료인 인디고, 종이 등의 산업도 발전했다. 특히 광동성 등(같은 – 옮긴이) 남부 지역의 산업은 해외 무역의 증가로 크게 자극을 받았다.
이에 따라 농업(여름지이 – 옮긴이)이 점차 상업화하고 도시화도 빨라졌다. 그리하여 프랑크 같은 사람은 당시에 세계 경제가 여러 중심을 가지고 있었을 수는 있으나 어느 하나가 가장 중요했다면 그것은 유럽이 아니라 중국 경제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 당시 세계 경제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 아시아 경제에 편승한 유럽
일본 경제도 16 ~ 17세기에 막대한 은의 생산과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국제 무역이 크게 증대하여 말라카까지 진출했고, 중국(명나라 – 옮긴이)과는 직접 무역이 불가능했으므로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개무역을 했다. 국내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여 (에도 시대인 – 옮긴이) 1658년에는 중국으로부터 자기 수입을 중단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 생산한 유명한 이마리 자기를 유럽에까지 수출할 정도가 되었다.
경제 발전으로 인구도 급증하여 1500년의 1,600만 명에서 1750년의 3,2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경제가 급속히 상업화하고 도시화하며 18세기의 도시 인구 비율은 중국(사실은 청나라 – 옮긴이)이나 유럽보다 높다. 이것은 결코 정체되고 폐쇄되어 있는 사회라고는 할 수 없다.
인도도 마찬가지이다. 인도는 무굴제국 성립 이전에도 세계 직물 산업을 지배했었는데, 제국의 성립으로 인도가 하나로 통합되며(사실은 케랄라와 타밀나두의 작은 나라들이 독립을 유지했다 – 옮긴이) 도시화와 상업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인도의 전체 인구는 1500년의 약 5,400 ~ 7,900만에서 1750년에는 약 1억 3,000만 명에서 2억 정도로 크게 증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아그라, 델리, 라호르 같은 도시는 17세기에 인구 수십만의 대도시로 번성했다.
17세기는 인도 해양 무역의 황금기로서 인도는 유럽에 대해 큰 무역 흑자를 냈고, 서아시아(흔히 ‘중동’이라고 불리는 곳의 바른 이름 – 옮긴이)에 대해서도 약간의 흑자를 냈다. 이는 주로 보다 효율적인 생산으로 가격 경쟁력이 있는 직물과 특산품인 후추 등의 향신료 때문이었다.
그래서 프랑크는 1750년 세계 총생산량은 1,480억 달러인데, 그 가운데 세계 인구의 3분의 2인 아시아 인구가 5분의 4를 생산했고, 세계 인구의 5분의 1인 유럽인이 아프리카/아메리카인과 함께 나머지 5분의 1을 생산했다고 추산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16~18세기 동안 유럽은 아시아에 대해 300년간 무역역조(일정 기간 수입액이 수출액을 초과해 생기는 결손액. 무역 적자 – 옮긴이)를 냈는데, 이렇게 막대한 무역역조는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메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은이야말로 유럽 경제를 아시아 경제에 연결시키는 중요한 끈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랑크는 근대 초 유럽에 가장 영향을 준 것은 아메리카의 귀금속이 공급된 것이며, 이것 때문에 유럽인들은 이미 잘 확립된 유라시아 경제에 ‘올라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세계 경제체제나 자본주의를 직접 창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월러스틴이 주장하는 유럽 세계 – 체제가 탄생하기 오래전에, 그리고 그것이 나타난 한참 후에도, 실제의 세계 경제는 광범한(폭넓은 – 옮긴이) 노동 분업과 정교한 무역 체계를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것이었으며, 그 한가운데 중국(명/청 – 옮긴이)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크가 중국 중심적인 경향을 강하게 보이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아시아의 이런 상황과 당시 아시아에 대한 유럽의 의존을 고려하면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다고 하겠다.
당시의 아시아 경제 상황에 대해서는 1776년에『 국부론 』을 쓴 애덤 스미스의 관찰이 적절해 보인다. ‘중국(청나라 – 옮긴이)과 이집트(미스르 – 옮긴이), 인도(무굴 제국 – 옮긴이)는 세계의 어떤 나라들보다 부유하다.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부유한 나라’라는 것이다.
사실 18세기까지, 아시아 경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그것이 달라지는 것은 유럽인들이 산업혁명(공업혁명 – 옮긴이)에 성공한 이후이다. 그러니까 19세기에 와서 아시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여 보자.
“아메리카 발견(아메리카 도착 – 옮긴이) 후에 유럽의 대부분이 잘살게 되었다. 이는 잉글랜드,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도이칠란트 – 옮긴이)뿐이 아니다. 스웨덴, 덴마크, 러시아까지도 농업과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 아메리카의 발견이 가장 중요하다. 새로운 광대한 시장이 생김으로써 새로운 노동 분업, 기술의 발전이 가능했는데 이는 과거의 좁은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동생산성이 높아지고 유럽 모든 나라에서 생산량이 증가했다. 이와 함께 유럽인들은 부유해졌다. 동인도는 아메리카 은의 새로운 시장이었다. 금, 은은 항상,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에서 인도로 가져갈 매우 이익이 많이 나는 상품이다. 은이야말로 두 극단의 대륙을 하나로 잇는 주된 상품이다. 이것으로 이 먼 지역이 서로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