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36번째 시간으로서 “선물의 의미” 賜物の意味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본래 로마서 5장 15절~17절까지 살펴보려고 했습니다만,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두 세 번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15절~17절까지의 세 구절을 보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각각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 15절은 선물의 의미, 16절은 선물의 능력, 그리고 17절은 선물을 받은 자의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15절 선물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명을 어긴 아담과 하와로 인하여 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축복,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크나큰 기쁨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수 있었던 축복은 한 순간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요. 표면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즉 선악과를 먹어버린 죄 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엄마가 아이들한테, 냉장고 안에 있는 케익을 먹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 엄마 말을 어기고 아이들이 몰래
먹어버렸어요. 그랬더니 엄마가 화를 내서 어떻게 했냐 하면, 아이들을 심한 말로 혼냈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에서 영원히
내쫓았다고 해보세요. 이게 정상이에요? 요즘 같았으면 뉴스에 날 정도로 너무나 심한 처사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에 대한 내용은 한낱 냉장고 안에 든 케익 정도로 끝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던 이유는, 그 선악과가 아까워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은 단순히 거기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람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세상에 사는 주민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고 크나큰 부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전세계를 지배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많은 영토를 지배했던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더나 나폴레옹이라
하더라도 결국 전세계의 일부만 지배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세계의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습니다. 이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왕권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이 크고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9절과 3장 3절에 의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 동산 중앙에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에덴
어디에 있든지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가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저 절벽 위나 높은 산 꼭대기에 있어서 도무지 먹으려고 해 봤자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안 먹었다고 해도,
이는 잘한 것이 없지요. 어기고 싶어도 어길 수가 없었는데 이를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었어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어길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안 먹었어요. 안 어겼어요.
왜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기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안 먹었어요.
이렇게 되면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바로 <순종>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권리와 의무를 주셨습니다. 권리라고 하는 것은 행사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선거에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국민에게 주어진 권리입니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선거에서 투표를 할 수 있지만, 투표를 안 한다고 해서 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가 바로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이는 권리이지요.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습니다. 땅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 나라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는 것은 권리이지요. 일부 나라에서는 출산 제한을 두고 있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만,
한국이나 일본을 본다고 하면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얼마든지 낳고 기를 수도 있는 반면에, 그렇다면 아이를 안 낳으면 벌을
받나요? 아니요.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출산이나 양육이라고 하는 것은 의무가 아닌 권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이 권리를 누리기 위한 의무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을 받지는 않습니다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여기에는 처벌이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납세, 세금을 내는 의무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은 남자의 경우를 본다면 병역의무가 있지요. 세금을 내지
않는다거나 아니면 병역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권리가 아닌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에도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느냐 하면, 바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고 에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어진 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무를 반드시 이행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의무, 즉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저버렸습니다.
제가 방금 의무에 대해서 납세나 병역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실 이것과 선악과를 서로 비교하는 것은 좀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형벌 때문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았거나 하물며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어긴 그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전에 결혼하고 자녀를 둔 분들이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결혼하고 아이를 갖기 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했대요. 그런데 아이를 갖고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 하셨는지를 알 것만 같다는 거예요.
자기는 그렇게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알 것 만 같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음. 그래요. 뭐, 좋은 말씀처럼 들리기는 합니다. 하지만 정말 아이 몇을 길러봤다고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5장 15절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ローマ人への手紙 5章15節
“15.しかし、恵みの賜物は違反の場合と違います。もし一人の違反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んだのな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による賜物は、なおいっそう、多くの人に満ちあふれるのです。”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에서는 흔히들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두고 한량없는 은혜라고 하지요? 한량없는 은혜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는 은혜,
가늠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이 몇을 두었다고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을
것만 같다면, 하나님의 은혜나 예수님의 은혜는, 분명 큰 은혜이긴 합니다만 한량없는 은혜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납세나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많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또는 군대를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까지 시키지는 않지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형벌은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죽음, 사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느냐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지난 주에 공부 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은혜가 어느 정도로 큰 은혜인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현재 한국이나 일본에서 재판을 보면 이른바 양형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재판을 하는 판사마다 특정 형벌에 대해서 내리는 판결이 큰 차이가 나면 혼란이 있을 수 있으니까, 대략적으로 이 정도의 범죄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형벌을 내리도록 하자 하는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좀 무서운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범죄에 있어서 대표적인 흉악범죄라고 할 수 있는 살인에 대한 규정은,
법조문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단순히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만으로는 사형판결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물론 각 사안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이 양형기준으로 볼 때 사형이 확정되는 경우에는 살인사건에서 피해자가 3인 이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5명 있었어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뭐, 꼭 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또 유독 남녀평등에 대해서 예민하신 분들도 계시기 때문에 굳이 말씀 드린다면 뭐
5자매라도 괜찮습니다. 남매라도 괜찮아요. 하지만 편의상 오늘은 그냥 아들 5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중에서 첫째 아들이 제일 우수했습니다. 공부도 잘 하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그리고 졸업해서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돈도
제일 잘 벌어옵니다. 그리고 제일 못난 것이 막내였습니다. 이 놈은 공부는 고사하고 학교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을 했습니다만, 일도 열심히 하지 않아요. 어쩌다 취직 했나 하면 금방 때려치우고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부모님 말도
듣지도 않아요. 맨날 부모님 속만 썩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다섯 형제들을 모두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막내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섯째 막내가 둘째, 셋째, 넷째 형들을 모두
살해해버렸어요. 이게 보통 일입니까. 자식이 다섯 명이 있었는데, 막내 아들에 의해 순식간에 세 아들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양형기준에 의한다 하면 변명의 여지 없이 사형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졌겠습니까. 자신의 세 아들이 죽었는데, 그런데 그들을 죽인 것이 또한 자기 아들이에요. 참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제 그런 무서운 죄를 저지른 아들은 사형에 처해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부릅니다. 평소에 제일 우수하고 착했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그 첫째 아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내가 너에게 긴히 부탁할 말이 있다. 저 못난 다섯째 아들이 이처럼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아서 이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나는 그 못난 막내 아들을 살리고 싶구나. 그래서 말인데, 예, 첫째야, 네가 막내아들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 있겠냐.
여러분,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이런 영화나 드라마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께서 만약에 첫째 아들이었다면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버지, 막내놈은 지금 사람을 셋이나 죽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한데 그 죽인 사람 셋이 모두 아버지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놈을 살리기 위해서 저더러 대신 죽으라고요? 아버지, 지금 제정신입니까.
이런 말이 안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첫째 아들은 어떻게 했냐 하면, 알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무거운 죄를 짓고, 그것도 그 죄로 인해서
아버지에게 그토록 큰 상처를 준 그 막내아들을 살리기 위해 제가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첫째 아들, 그리고 막내아들이 누구겠습니까.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요, 첫째 아들은 예수님이시고, 그리고 그 흉악한
죄,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막내아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39.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それからイエスは少し進んで行って、ひれ伏して祈られた。「わが父よ、できること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過ぎ去らせ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が望むようにではなく、あなたが望まれるままに、なさってください。」
마태복음 26장 42절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イエスは再び二度目に離れて行って、「わが父よ。わたしが飲まなければこの杯が過ぎ去らないのであれば、あなたのみこころがなりますように」と祈られた。
이 은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를 아이 몇 키워봤다고 알 수가 있어요? 아니요.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못난 막내아들, 그것도 모자라서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에 대한 죄가 아니라 자기 아버지에 대한
죄,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를 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첫째 아들을 죽이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만약에 하늘 나라에서 이를 투표에 붙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다 소집합니다. 막내아들이 죽어 마땅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하는 첫째 아들을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여야만 한다.
죄 많은 막내아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죄 많은 막내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하는 첫째 아들을 죽일 것인가.
투표를 했다면 결과는 뻔하겠지요. 하나님,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죄 많은 막내아들 저 백성들을 모두 심판 하셔야 마땅한데 어찌
첫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확고 하셨습니다. 죄 많은 백성들, 나에게 그토록 많은 죄를 저지른 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의 복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은혜, 한량없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 놀랍고도 크나큰 선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그런 말씀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본래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구약에서는 그 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2천년 전에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지금은 성령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이른바 양태론적 단일신론, 또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합니다만,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성경을
왜곡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삼위일체라고 함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같다는 뜻이니까,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성자 하나님의 모습으로, 그리고 지금은 성령 하나님의 모습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이에요.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진정한 삼위일체인가요?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도 성부 하나님이세요. 같은 분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니까 말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와 같은 양태론의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 자신한테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됩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 기도는 예수님이 자기한테
드리는 기도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인가요. 이 양태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순종>이 없다는 것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에는 반드시 순종하는 입장과 순종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이는 불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순종하는 입장과 불순종하는 대상이 있는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순종해야 하는 입장이었고, 아버지 하나님은 순종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누구에
대해서냐 하면 바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불순종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회복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보다도 멀어졌던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회복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양태론에 의하면 순종하는 입장과 순종하는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사라지고, 말하자면 하나님의
자작극이라는 뜻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물리치는 방법은 오로지 성경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성경을 관철하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상징입니다. 순종의 회복에 대한 상징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순종의 회복이라고 하는 선물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 인하여, 이제부터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와 찬송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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