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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시여, 높이금 돋으사 아, 멀리금 비치시라 아아, 질척한 곳을 디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아아, 내 가는 곳 저물세라 (두려워라) 사진 권오철
2024년 5월 31일(금) 오후 1시 30분에서 5시 30분까지 국회 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주최 정읍시(시장 이학수) .국회의원 운준병, 주관 동학학회(회장 임형진)으로 「고부봉기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인사말에서 ‘갑오년 1월 10일의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첫출발이었고 1893년 11월에 준비했던 사발통문의 계획대로 전봉준 장군의 지휘하에 고부 군민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난 혁명적 의거 였습니다. 고부 군민들은 폭정의 상징이었던 만석보를 허물고 탐관오리 조병갑을 치고자 고부 관아를 점령하였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고부는 동학정신이 꽃피는 대동 세상이 되었고 백성들은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고부봉기는 2004년 동학농민혁명특별법에서 제외되어 그 혁명의 의의와 가치가 훼손되고 심지어는 왜곡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고부봉기가 없었다면 동학농민혁명은 불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도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듯이
고부에서의 의거가 없었다면 갑오년의 자랑스러운 기록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읍시와 동학학회는 이 문제를 감정이 아닌 냉철한 이성적 판단으로 근본적으로 재조명해보고자 하는 학술대회를 마련하였습니다.
과연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은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학술대회의 목적입니다.’ 라고 역설하였다.
발표는 박세준(고려대)교수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기조강연: 동학농민혁명에서 고부봉기의 의의 - 김삼웅(전 독립기념관 관장)
제1주제: 사발통문과 고부봉기의 상관성 연구 - 조광환(동학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제2주제: 고부동학농민혁명은 봉기인가 기포인가 - 성강현(동의대)
제3주제: 동학농민혁명과 고부봉기의 단절성과 연계성 연구 - 조극훈(경기대)
제4주제: 고부봉기에 관한 기존 연구 성과와 과제 - 김영진(경희대)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2. 무기 창고와 화약고를 점령할 것./3.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탐관오리들을 처단할 것./4.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직행할 것. 사진 국사편찬위
갑오동학혁명과 전봉준 장군실기의 사료적 가치는 사발통문은 20명 모두가 각자 서명한 원본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 지금의 사발통문이 위작이란 말은 아니다. 지금처럼 복사기가 없던 시절의 (1893년) 전봉준을 비롯한 사발통문 서명자들이 작성한 사발통문 원본을 돌려볼 수 있도록 여러 사람들이 모여 수십 장을 필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가 현존하는 사발통문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사발통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급하게 짙은 흔적 때. 이것은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급히 걸어 전달했 희미하며 후일에 여유롭게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또 당시 고부 개의 마음이 있어, 처음 작성한 초본 사발통문은 각각 참여자 자필로 서명 200여장 이상을 옮겨 쓰면서는 한사람이 동일 필체로 썼을 것이다.
이것이 동학혁명의 준비성과 그 봉기적인 요소의 증거인 것이며 후손들은 이 피끓는 동학농민군의 이기를 증언하는 생생한 자료이다.
여기서 웃지 못할 서글프면서도 한심한 현대사의 한 단면은 고부 동학 의기의 원인 제공자인조병갑의 그 다음 행적이다.
동학혁명 발발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탐관오리의 상징 고부군수 조병갑이 처벌되기는 커녕 고등재판소 예비판사가 되어 동학혁명의 최고 지도자를 심판하게 된 것이다. '예비판사'는 유고시에 대타로 나서게 하는 자리가 아닌 권력층에서 파견한 일종의 감시병이었다.
멀리 고부 두승산을 배경으로 너른 들판 한가운데 나지막하나 거연히 솟은 백산을 대지에 몸을 반쯤 담근 농민으로 형상했다. 치켜든 팔 뚝 주위에 파랑새가 날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대회를 열고 '백산 격문'을 만방에 날렸다. 재백산(在白山), 2018, 30×60cm, 목 판화
조병갑의 최시형 재판은 해방 후 친일ㆍ분단ㆍ외세를 등에 업은 이승만세력이 1급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를 암살하고, 일본군장교 출신 권력자들이 광복군장교 출신의 민주화지도자 장준하를 암살한 사건처럼, 민족모순과역사반역의 상징적인 비극에 속한다고 하겠다.
아직도 미완의 혁명은 150년의 한을 안고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래종교와 외세에 빌 붙은 반민족, 비민주, 몰민생의 매국 매족 세력의 발본색원 만이 민족의 앞길을 열어가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이 고부 전봉준의 실천적 행위는 이론으로 머물던 동학을 전면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역사에 지나가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 같은 것이었다.
예기 잡기에는 군자삼환(君子三患)이라고 돼 있다. "듣지 못했을 때에는 듣지 못함을 근심하고 이미 들었을 때에는 배우지 못함을 근심하며 이미 배웠을 때에는 행하지 못함을 근심한다.”[未之聞 患弗得聞也 旣聞之 患弗得學也 旣學之 患弗能行也] 라는 것이 절실한 시대이다.
(글 권오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