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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부른 찬양은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양이고 우리가 들을 때마다 늘 깊은 은혜를 저희들에게 전해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이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그냥 누가 이 찬양 가사를 상상을 해서 써낸 것이 아니고 나지 시절에 이제 나찌가 무너지기 바로 전에 보네포 목사님이 처형 되게 되는데 그전에 신앙고백적으로 만들어낸 가사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 가사 하나하나에 그 당시에 목사님과 그리고 성도들의 신앙 고백이 있기 때문에 더 은혜로운 것입니다. 이 찬양을 또 주중에도 많이 들으시고 마음에 새기시고 함께 부르시면 또 큰 은혜가 되고 결단이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모임을 가진 후에 작별을 하고 예루살렘길에 올랐습니다.
곧 로도 바다라 두로, 돌레마이, 가이세라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중에서 두로와 가이샤랴 물론 돌레마이도 들리지만 큰 사건은 이 두 군데 두로와 가이샤라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내용이고 또 흔들리지 않는 바울의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두로에서 바울이 제자들을 만난 일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이 두로에 상륙해서 여기에 7일간을 머무르게 됩니다. 이래 7일이죠. 이곳에 바울의 제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을 만나야 됐어요. 그래서 찾아갔습니다. 제자들에 대한 사도바울의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이라는 그 감정이 없었다면 구태어 그 바쁜 여정에서 거기 가서 제자들을 찾을 이유가 없고 또 바울이 왔다고 해서 제자들이 달려나올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있었어요.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 이 그리움이라는 것은 매우 숭고하고 아름다운 감정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 그리움이 있어야 진정한 관계가 맺어져요. 형제 간의 그리움, 연인 사이의 그리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그리움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성도 안에서의 그리움 일주일 동안 우리가 헤어져 살지만 그냥 무심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집사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실까 지금 어떤 상황일까?
어서 주일이 왔으면 좋겠다. 주일이 왔는데 벌써 주일이 왔어. 그게 아니고 금요일부터 기다려지는 거예요. 왜 이렇게 주일이 왜 이렇게 기른 거야? 일주일이 왜 이렇게 길은 거야? 하면서 주일을 기다리는 마음 성도가 성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목회자와 성도 간의 그리움 그런 공동체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그리움은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멀리 있어도 우리를 가깝게 만드는 자석과 같습니다. 거리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그 거리를 넘어서서 우리는 가까이 지낼 수 있습니다.
그리움은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에요. 크리스천이 뭐냐? 주일 예배 드리는 사람이에요. 물론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이 뭐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에요. 선교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본질은 아니죠. 그것은 액션일 뿐이에요. 더 중요한 게 뭐냐 우리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느냐는 거지요. 주님은 우리를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근데 우리가 그 그리움의 감정을 잃어버렸어요. 그리고 하는 모든 선교 봉사 헌신 그 모든 것은 그냥 기계적인 활동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없어 그냥 신앙 행위를 하는 거예요. 그게 문제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건 아주 심플한 거예요. 주님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그리워하다가 그분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에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하고 선교도 하고 전도도 하다가 어느 날 그분이 부르셨을 때 그토록 우리가 그리워하던 그 주님을 얼굴과 면대면으로 밟는 사건이 신앙 사건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크리스천인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저 자신을 돌아봤어요.
너는 그리움이 있는가
반성도 많이 되고 회개도 많이 됐어요. 처음 제가 거듭나고 뜨거웠을 때 날마다 정말 하루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어요. 고향에 내려가서 그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 한국의 가을 하늘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뭉게구름 뒤에 주님이 계실 것 같고, 우리 옛날 성도들이 먼 하늘 조그만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봐. 저 뒤에 주님이 계시겠지. 언젠가 그분이 재림하실 때 나도 영광스럽게 만나야 되겠다. 막 그런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신학을 하고 지금까지 달려왔는데 어느 날 보니까 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내가 그런 그리움을 다 잃어버린 거예요. 진짜 열심히 살고 목회자로서 선교사로서 하나님 내게 주신 일은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액션이 있었어요. 신앙인 같아요. 그런데 크리스천은 주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는 이 명제를 정해놓고 나를 돌아보니까 그리움이 없는 거예요. 주님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새 그냥 안개 사라지듯이 사라진 거예요. 그래서 막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침에 일어날 때 또 누워서 잘 때 막 주님을 생각을 했어요.
그때 일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주님 내가 이러다가 주님 만나면 얼마나 어색하겠어요 어느 날 갑자기 그리워하다가 만나면 반가워서 비즈도 하고 끌어안고 이럴 텐데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 어느 날 길 가다가 갑자기 그 사람을 만나봐요. 얼마나 당황스러워 예수님 만날 때 그럴 것 같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하는데 생각은 돼요.
그런데 그때 그 감정 그 그리움이 없는 거예요. 목사가 예수님을 억지로 생각을 해야 돼. 한 달이 그런 자연스럽게 주님에 대한 팍 사무치는 감정이 사라졌다니 끔찍한 일이더라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주님 앞에 설 때는 똑같은 신문으로 쓰는 거예요. 그때 주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사무치게 보고 싶었어요. 하다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억지로 저처럼 생각하다가 그 그리움을 한번 떠올려보려고 애쓰는 그런 상태가 되지 않았는가?
차라리 그럴 거면 그때 막 뜨거울 때 갔어야 되는데 너무 오래 살은 것 같아 주님을 잊어버릴 만큼 우리가 오래 살았어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저런 저 나름대로 생각도 하고 회개도 하고 고민도 하면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살다가 신앙은 간단한 거예요. 어느 날 그리운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주님 또 그 본향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바로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바울과 제자들 사이에는 그런 그리움이 있었어요. 초대교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하여튼 그들은 서로 만나고 싶었어요. 바울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모였어요. 에베소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밀레도에서도 일주일을 지내면서 그동안 못 다한 얘기꽃을 피웠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제자들이 스승을 향해서 진지한 말을 꺼냅니다. 4절에 보면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렀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하더라.
성령이 이 제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말씀하신 거예요. 앞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잡혀서 결박돼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서 죽게 될 것이다. 죽음을 예고하신 거예요. 사실 이건 바울에게도 계속하셨어요. 사도행전 20장에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자꾸 말씀하신다 이거예요. 예루살렘에 가면 죽음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하시나.
그러나 나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이 은혜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려 하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 이런 고백하잖아요. 바울에게 말씀하신 성령께서 바울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 거예요.
너희 스승 바울이 예루살렘 가면 잡혀서 죽는다. 이 사실을 이 계시를 받은 제자들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얼마나 초조하고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그래서 스승에게 고민 가운데 얘기하는 겁니다.
선생님 올라가시면 안 될 것 같아요. 가시면 죽습니다. 올라가지 마세요.
정말 사랑으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어요. 가시면 죽는다고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에요. 하실 일이 많이 있어요. 선생님 사실 그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어요. 맞는 말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성령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바울은 가서 잡혀서 죽는다. 제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 바울의 길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충정의 마음, 사랑의 마음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을 전달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그 길은 비록 고통의 길이고 죽는 길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환란과 죽음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씀하시지만 주 예수께 받은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는 올라가서 잡혀서 죽을 망정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다.
바울은 이미 결단했어요. 그래서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사랑의 충고도 거절하는 용기가 있어야 되고 제자들이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제자들이 없는 말한 것도 아니에요.
마음을 가지고 얘기하는 거예요. 사랑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그 충정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만약에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시시때때로 흔들리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룰 수 없어요. 또 성령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유가 뭐냐 우리가 생각해 봐야 돼요. 똑같은 계시, 계시가 똑같잖아요. 바울이나 제자들에게나 가서 잡혀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 죽는다. 뭐가 다르냐 해석이 다른 거예요.
제자들은 아 이것은 바울을 위기에서 건지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제자들의 마음도 잘못된 건 아니에요. 바울은 다르게 생각했어요. 그 길을 내가 가야만 포기하지 않고 가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결의를 하고 출발하는 바울에게 사실은 제자들은 다른 태도를 보여야 했어요. 아마 그것이 성령의 뜻이었을 겁니다. 바울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는 못 가지만 여기서 기도하겠습니다. 끝까지 그 길을 가주십시오.
주기철 목사님의 사모님이 그랬다잖아요. 감옥에서 주 목사님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 굳게 잡수시고 거기서 순교하시라 이거예요. 요즘 그런 부인들 만나면 무섭습니다. 그 마음을 잡아줬기 때문에 기독교의 한 페이지가 만들어진 거예요. 바울을 격려하고 기도하라고 성령이 주신 메시지였어요.
바울은 그래도 그들의 그 사랑의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길을 가게 됩니다. 가이샤라로 갔어요. 두루에서 제자들과 작별한 후에 돌레마이에 가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하루를 만났습니다. 아마 여기서도 이런 얘기가 오갔을 거예요. 그리고 가이디사엘 가서 거기서 빌립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18절에 보면
이튿날 떠나 가이샤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니라.
이 빌립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하나였어요. 나중에는 전도자가 됐어요. 여기저기 전도하다가 이 가이샤라라고 하는 곳에 와서 정착을 하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여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빌립 집사에게 4명의 딸이 있었어요. 4명 모두 처녀로서 예언하는 자들이었어요.
그들에게 어떤 예언이 나왔겠어요?
또 바울 얘기가 나왔을 겁니다. 가면 예루살렘에 가면 이런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다. 아마 구체적으로 나왔겠죠. 그것도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또 내려왔어요. 유대로부터 이 사람은 사도행전 11장에 나오는 인물이에요. 이 사람이 유대로부터 안디옥교회에 와가지고 예언을 하는데 어떤 예언을 하느냐 큰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 그랬더니 실제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 큰 기근이 일어나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굶어 죽게 생겼어요.
그때 안디옥교회가 헌금을 걷어가지고 지도자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로 보내 구제를 해서 위기를 넘기게 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가 연대하게 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돼요.
여러분 이런 어려움 위기 전쟁 기근 이런 어려움들 있잖아요. 이런 어려움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의 연대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일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 예언이 얼마나 정확했겠어요 그 시대적인 예언을 했으니까 이 사람은 굉장히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이에요.
근데 이 사람이 와서 바울이 입고 왔던 옷에 둘렀던 이 띠를 갖다가 가져오더니 바울 앞에서 자기 손과 발을 묶는 거예요. 묻고는 하는 말이 11절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처럼 이때의 임자를 결박해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겠다.
이때 임자가 누구예요?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을 앞에 두고 이 예언을 합니다. 이런 식의 예언을 실물 예언이라고 해 실물 예언 설교도 실물 설교가 있어요. 말로만 하는 게 아니고 뭔가 실물을 가져와서 어떤 행위를 통해서 설교하는 게 있는데 그런 경우는 대개 이제 어린이들한테 설교할 때 실물 설교를 많이 합니다.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 실물 예언은 강력하고 생생한 메시지 전달법이에요.
예언자가 입으로 예언해도 되지만 하나님께서 실물 예언을 하게 하셔가지고 그 메시지를 확증하는 겁니다. 강력하게 아주 생생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예레미야 에스겔서에 보면 이런 예언이 많이 나와요.
한 예로 예레미야 27장에 보면 예레미야 유다가 망하는 그 시점에서 예레미야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소 멍에 있잖아요. 이렇게 꺾어진 멍에 이게 소가 멍에를 메고 이제 뒤에 있는 물건들을 이제 당기는 거예요.
이게 멍해 그러면 인생의 멍예 그러면 무거운 짐 이런 의미를 갖지 않습니까? 이 멍예를 예언자가 가지고 와가지고 이 명예를 메고 다니면서 예언을 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보니까 예언자 예레미야가 저거 뭐 하는 거야? 집중하게 되고 그 모습을 그 이미지가 사람들 머릿속에 딱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서 유다와 주변 나라들이 앞으로 이렇게 멸망당해서 바벨론에 끌려가는데 여러분들은 그 포로의 멍예를 벗어버리지 말고 매고 있어야 된다.
이거 하나님의 뜻이다. 사실 굉장히 어려운 예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이 예레미야가 정말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패망하는 유대인들이 입장에서 볼 때는 이건 완전 매국로죠.
만약에 우리나라가 한참 망해가는데 일본에게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가서 그냥 순종하고 45년을 살아라. 36년을 살아라 그러면 저런 죽일 놈이 어딨어 그래가지고 아마 수많은 공격을 받았을 거예요. 그게 이제 뭐 그건 잘못된 거지만 이 예레미야는 그런 상황에서 예언을 해야 되는 그러니까 굉장히 예언자의 삶이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도 멍에를 메고 다니면서 예언을 합니다. 에스겔서 5장에 보면 에스겔이 또 자기 수염과 머리카락을 잘라가지고 세 부분으로 나눠 그 다음에 하나는 불에 태워버려 하나는 칼로 막 잘라버려요.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리고 하나는 바람에 날려버립니다. 그러면서 무슨 예언을 하느냐 앞으로 예루살렘이 이렇게 망한다. 불의 살림을 받고 또 칼에 찔리고 그리고 흩어질 것이다. 실물 예언은 그 일이 분명히 일어난다는 강력하고 생생한 메시지 전달법이에요.
여러분 바울은 구약에 정통한 사람이에요. 지금 이 아가오 선지자가 자기 앞에 와서 하는 이 예언법을 왜 모르겠어요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난다. 나는 가면 100% 잡혀서 결박돼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졌다가 죽는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이다. 그걸 바울은 깨달은 거예요. 한 번, 두 번, 세 번 예언이 확정됐어요. 피할 길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주위의 간곡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간곡한 권고가 있어요. 울며 불며 말한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선생님 가면 절대 안 돼요. 내가 정말 선생님 사랑해서 하는 말씀인데 가면 안 돼요.
우리 가서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가신다는 겁니까?
앞으로 해야 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가 수없이 오고 갔을 거예요. 바울도 인간이잖아요. 바울은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성경 읽기가 너무 힘들어요.
바울도 인간이에요. 예수님도 고민하셨어요 십자가를 앞에 두고 바울도 십자가와 같은 이 미래를 앞에 두고 지금 고민했을 것입니다. 걱정이 됐고 때로는 마음이 흔들렸을 거예요. 번민했을 거예요. 13절에 보면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마음이 흔들렸다는 거예요.
나도 괴롭다는 거예요. 세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 사실 맞는 얘기입니다. 자꾸 얘기 듣다 보면 그런가 이게 하나님 뜻이 아닌가 내가 그때 좀 뭔가 착각했나 쉬운 길을 찾을 수가 있어요.
그들은 좋은 의도로 말했지만 사실은 바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바울 마음만 괴로운 거예요. 바울의 마음만 상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최종 결정했어요. 그는 흔들리지 않았어요.
바울이 어떤 사람이냐?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죽을 각오도 했노라 다시 선언해버린 거예요.
그러자 바울의 그 말투와 눈빛에서 이 사람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고 주위 사람들이 생각한 거예요.
딱 포기하게 만들어야 돼.
왜 사람들이 자꾸 처음에는 얘기할 수 있어? 그래도 자꾸 얘기하냐 내 눈빛이 흔들리기 때문에 막 고민하면 눈이 왔다 갔다 갔다 갔다 막 불안하고 이 사람 흔들리는구나. 그럼 마귀도 역사하고 또 진짜 좋은 마음으로 또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사람들은 바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보내줬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에요?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이것이 바울의 장엄하고 순고한 바울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착한 사람이었다.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성경은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바울보다 바나바가 더 부드러운 사람이었어요. 더 착한 사람이었어요.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 어쩌면 좀 성격이 별로 안 좋았을 수도 있어요. 대개 이런 사람들이 확고합니다. 한 번 가면 우리는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아요. 저도 여러분도 산들바람만 불어도 이리 흔들저리 흔들 막 태풍이 몰아쳐서 갈대가 한 번 꺾어줄 수는 있어.
그럼 다시 일으켜 세우면 돼요. 근데 미풍만 불어도 바람이 부는 채만 해도 벌써 알아서 누워 무슨 말 한마디만 들어도 흔들리고, 무슨 조금 어려운 일 조금만 있어도 신앙이 흔들리고 하나님이 계시니 안 계시니 주님께 헌신했다가 말았다가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처음 은혜 받고 감격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주님 앞에 결단하고 헌신했어요. 다 한 번씩은 했을 거예요. 저도 처음 은혜 받고 20살에 정말 인생이 거듭났을 때 이대로 주님을 위해 순교할 것 같은 그런 결단과 각오가 있었어요. 실제로. 근데 너무 오래 살았어. 그때 확 순교했으면 진짜 바울 같았을 텐데 이렇게 10년, 20년, 40년 살다 보니까 이렇게 흔들리고 저렇게 흔들리고 아마 바울도 그러시지 않았을까 몰라요.
이렇게 이런 시대를 살았으면 여러분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 마음을 지금까지 가지고 계십니까? 그 마음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그 마음을 오랫동안 10년 20년 유지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가 시시로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야 됩니다. 이 시대는 그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흔들리지 않는 사람 내 우리가 흔들려 신앙인도 흔들리고 사역자들도 흔들리고, 조금 좋은 조건에 흔들리고 조금 어려움에 흔들리고, 누구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누가 비난하면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마음이 막 상하고 또 흔들리고 그러나 역사는 그 순간을 극복하고 끝까지 걸어가는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쓰여집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보름스 국회에서 결정되면 죽는 거예요.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어? 밤잠을 자지 못하고 보름 속 국회의 출두 날을 기다렸어요.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잡고 그 국회에 나가서 자기 양심을 선언했어요. 흔들리지 않았어요. 장깔뱅 즈빈글리 기독교 역사를 만들어낸 수많은 일꾼들이 우리와 더 똑같은 성적을 가졌지만 똑같은 위협을 받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들을 통해서 역사의 한 챕터가 완성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특별히 지금 이 시대는 뭔가 큰 역사의 전환기예요. 이러다가 주님이 오실 수도 있어요. 핵 전쟁이라도 일어나가지고 지금 3차 대전이라는 게 아주 간단해요. 지금 여기 일어났지 우크라이나 일어났지 또 이스라엘 저렇게 난리 났지. 지금 안 일어난 데가 한국밖에 없어. 북한에 있는 김 씨가 갑자기 헷까닥 해가지고 술을 잘못 먹고 열받아가지고 한 번 눌러버리면 일어나는 거예요.
안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어요. 앞으로 미래가 불투명합니다. 어떤 시대가 올지 몰라요. 3차 대전이 일어나서 종말이 올 수도 있고 아니면 이걸 계기로 세계에 새로운 질서가 열릴 수도 있어요. 시대의 전환기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 어떤 사람을 찾고 계실 수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이 시대를 열어갈 그 한 사람, 흔들리지 않는 그 한 사람 저와 여러분 가운데 그런 인물이 나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