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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원이 행좌.
행좌(1903년?~1915년) 1904년 영화가 처음 상영된 극장 행좌는 부산영화의 모태가 된 곳이다. 극장 행좌를 건축 경영한 좌주는 하사마였다. 그는 일본 池田村에서 출생,오사카 오백정 상점에 취직하여 1880년 5월 부산지점 지배인으로 부임하였다 부산에서 무역을 시작한 이후 개인으로 계속 이 업에 종사하는 한편 우리나라 여러 곳에 적지 않은 토지와 가옥을 소유하고 부동산 경영을 본업으로 하였다 또한 그는 오오이께 (부산좌좌주) 등과 갈이 부산의 초창기에 부두를 축조하는데 힘이 되었고 그의 최전성 시대엔 부산항 수출입 총무역고의 2할 분을 그가 차지하였다 1907년 이래 거류민단의원 부산상업회의소 의원,부협의원,경상남도 도의원 등의 공직을 거쳐 부산 상업은행의 은행장이 되고 부산 공동창고회사장 부산수산회사,경남은행 등의 각 취제역을 역임,1906년 4월 러일전쟁 때 그의 공적을 치하하는 제국 일본의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다음은 1930년 당시 이들 3대 재벌의 부산시 공과금부담액을 살펴보면 1위에 하사마 2위에 가시 이 겐타로,3위에 오오이께의 순으로서 이들은 재력뿐만 아니라 관선 경상남도 평의원 부산부협의회원 등 공직을 위시하여 부산시내 대표적 회사의 7할에 상당하는 중역을 겸하고 있었던 독점적 사업가 들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이와 같이 치부하여 부산의 실권을 쥐게 된 경위에 대하여 당시 일본인 이노우에 기요마로는 그의 자술에서 다음과 갈이 비판하였다 부산개항 당시에 이 3대 재벌의 주인공들은 단신 빈손으로 건너와서 어리석은 한국인들에게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기한이 되어 돈을 갚지 못하면 곧 저당된 땅을 빼앗아 버렸다. 또 한국 군수를 농락하여 이권을 획득하고 한국정부납세 보관금을 한 군에서 6-7만에서 12만원까지 여러 군의 것을 지정받아 수 십 만원의 공금을 무이자로 내어 고리대 자금 미곡 자금에 유용하였다. 이렇게 이익을 취하면서 막대한 수송 요금까지 편취하였다 그 밖에 특산물의 판매권 해운과 어장의 이권을 얻어서 거부가 되었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기회를 악용해서 오늘의 부산 산업계를 그들 3대 재벌이 독점하게 된 것이다.(개항 90년,1966, 박원표)
행관 하사마는 1915 년 노후한 행좌를 철거 후 동 위치에 활동사 진 상설관인 행관을 신축 개관하였다
할매집이 행좌 자리다. 송정좌(松井座: 미츠이자) (1903년?~1911년?) 좌주는 마츠이 고지로(供幸次郞)였다.
사안교(思案橋) 다리 앞에 위치했던 송정좌는 남빈정과 행정 거리에 이웃해 있던 행좌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송정좌는 1903년 12월 “부산항시가 및 부근지도에 처음 나타났으며 1907년 8월 1일 “한국부산항 시가명세도”에 행좌와, 동년 7월 15일 개관된 부산좌와 자리하여 송정좌의 실체를 재확인해 주었다. 1911년 7월 발행 “부산시가 전도초량부속,,지도는 송정본점이 변천정으로 이전됐으나 주업종인 여관업만 표기되고 극장 표기가 제외돼 있어 폐관 시기는 불명확하다. 좌주 마츠이는 개항 이듬해 4월 나셰사키에서 건너와 선원을 상대로 여관업과 도매업을 시작하여 거류지 여관업계 제 1인자로 자리잡은 자(伯鮮通交史附해史 1916)로 송정 본점을 중심으로 한 여관업과 상설극장인 송정좌를 경영했다.
송정좌가 있던 곳. 부귀좌(富貴座 : 후끼자) (1905 ? ~ 1907) 부귀좌는 행좌, 송정좌에 이어 부산에 세 번째 세워진 극장으로 1905년에 상존, 경영되었던 곳이다. 이 극 장의 흔적은 1906년 3월 15일 부산에서 발행된「 조선실업」제 10호에 계제된“ 극장 부산좌(釜山座)신축” 관련 보도에서 처음 나 타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부산에 극장으로는 행좌, 송정좌, 부귀좌 세 극장이 있었으나 당시처럼 부산이 발전하기 이전 의 설계라면 현재에 비하면 좀 비좁다는 느낌이 있고, 또한 극장에서 음식물의 매매 등이 약간 불완전을 면치 못하였으며 가끔 도쿄나 오사카 등지에서 상당히 평판이 있는 대 배우가 와서도 무대의 각종 대, 소도구 관계로 충분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일한교통(日韓交通)의 친밀도를 더해서 현재와 같이 일본과의 빈번한 연락과 이주자가 급증하는 현재에 있어서는, 상업발전에 진력하고, 부산의 번영책으로서는 대규모의 극장 신축을 필요로 하게 되어 이미 작년(필자주:1905년) 봄 무렵 유지들이 있다라 그 뜻을 밝히어 이 분야 건축에 경험있는 기술자를 초대하여 운동장의 설치부터 장내 정원의 구조를 설계 한 바 있었으며 비용 1만 5천 원으로 완성하기로 정해졌으나 연말이기도 하고 하여 중지하고 가까운 날 적지를 선정해서 기공할 것으로 모임을 가져 숙의하고 있다.「 조선실업」에 보도된 원고의 작성시기는 1905년 12월로 극장 부귀좌는 1903년“ 부산항시가 및 부근 지도”에 나타나는 행좌, 송정좌에 이어 1907년 개관된 부산좌를 세 번째 극장으로 정의해 왔으나, 앞의 기록에서 확인 된 바와 같이 1905년 12월 현재 극장 부귀좌가 현존했음을 규명하게 되어 부귀좌는 부산좌에 앞서 상존했던 극장으로 확인된 것 이다. 거류지 내에 있었던 극장 부귀좌에 대한 개폐관 시기와 위치, 좌주 전경 사진자료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부산좌(1907~1923)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에 있던 일제 강점기의 극장. 1907년 개관 부산 지역에 대중문화 공간인 상설 극장이 설립된 계기는 1876년의 부산 개항이었다. 서양은 극장 문화가 일찍이 꽃피웠던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연극 형식의 탈춤, 꼭두각시놀음 등을 보여 주던 남사당패가 떠돌며 임시 무대를 사용하는 무형 극장 수준이었다. 개화기 부산에서 태동되는 극장을 알아보려면 일본인 전관 거류지(全管居留地) 형성과 정착 단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부산좌(釜山座)가 개관된 중구 부평동에 개항 이후에 일본 거류민이 상주하면서 상권 및 주거 지역으로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1904년에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 등이 개관되었고, 이어 부산좌가 1907년 7월 15일 일본인 대지충조(大池忠助)의 합자로 개관하였다. 앞선 행좌, 송정좌, 부귀좌는 100~150석 정도의 적은 극장으로 추정되며 이들 극장에 서는 일본의 도쿄,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서 온 꽤 알려진 배우들이 공연하기에는 무대가 협소했던 나머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여 좀 큰 극장인 부산좌를 세우려 계획 한 것이다. 극장 부산좌가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던 규모를 짐작케 할 수 있는 기록 으로는 1915년 4월 23, 24일 이틀 간 3회 상영한 2만 5천 석짜리 대작영화“ 아무정”(원제 레미제라블) 경우에서 비교되고 있다. 총 2,372명이 관람, 만원을 이루었음을 미루어 계산상으로는 회당 800명이 유치되었으므로 부산좌는 행좌, 송정좌, 부귀좌보다 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커다란 극장이었다. 산좌의 관객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공연 내용 또한 일본의 신극과 가부끼 위주였다. 활동사진의 시대가 열리면서 일본의 연쇄극[키노 드라마]을 비롯한 영화 상영도 빈번해졌다. 한국에 연쇄극이 처음 들어온 것은 1915년 10월 16일에 미즈노 강게쓰 일행의 「짝사랑」이 부산좌에서 개연하면서부터였다. 1923년 3월 22일에 부산좌가 화재로 소실된 후에 재건축 논의가 수차례 쟁점화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욱관 부산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욱관은 1912년에 행정 1정목[현 중구 창선동]에서 연극 공연장으로 개관되었다. 개관 이후에 욱관은 부산에서는 가장 먼저 상설 영화관으로 구조를 변경하여, 1914년 3월 12일부터 영화를 상영하여 본격적인 활동사진 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욱관이 상설관으로 경영을 개시한 1년 후인 1915년 3월 9일에 보래관(寶來館)이, 같은 해 12월 19일에는 행관(幸館)이, 1916년 1월부터는 동양좌가 대흑좌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가세하면서 4개의 영화관이 경쟁 경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1916년 1월 11일 이후부터 욱관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폐관된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폐관 사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욱관은 지나치게 흥행을 겨냥한 과다한 경쟁과 공연물, 영화의 프로그램 수급 불균형 등의 운영 미숙으로 경영난을 겪었다. 그 결과 욱관은 영화 상설관으로 2년 남짓 경영되다가 화재 사고로 폐관되었다. 욱관에 관한 자료는 1914년에 경상남도청이 편찬하고 조선시보사가 발행한 『경상남도 안내』에 나와 있다. 같은 해 부산에 소재하고 있던 극장 행좌[남빈정]부터 부평정의 부산좌(釜山座)와 동양좌, 초량동의 초량좌, 절영도의 질자좌 5개소와 기석식 공연장인 행정의 욱관과 보래관, 본정의 변천좌 3개소 포함, 총 8개 극장의 현황이 수록되어 있는데, 욱관과 보래관은 각각 독립된 극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18년 3월 10일에 박문당이 발행한 지도인 「부산 시가 전도」에서도 역시 행좌, 부산좌, 동양좌, 보래관과 함께 욱관이 상존하여 이를 재입증해 주고 있다. 『경상남도 안내』 마지막 장에는 변천좌, 보래관과 함께 욱관 광고가 소개되었고, 1915년부터 『부산 일보』와 『조선 시보』 영화 광고에 나란히 게재되어 있다.
보래관 1914년부터 1973년까지 부산광역시 중구 창선동에 있던 영화관. 보래관은 1914년 행정 1정목 16[현 중구 창선동, 국민은행 광복동점 자리]에 신축 개관하여 신극, 가부끼 등을 공연하다, 1915년 3월 9일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개관되었다. 욱관(旭館)이 폐관된 후, 부산 영화계는 행정에 보래관[1914년~1973년], 초량정에 초량좌[1914년~1917년], 남빈정에 행관(幸館)[1915년~1930년], 본정에 상생관(相生館)[1916년~1976년] 등이 세워지면서, 다른 극장의 퇴진과 함께 보래관, 행관, 상생관의 삼두 체제로 압축되고 이들 극장은 선의의 경쟁으로 공존해 나갔다. 보래관은 천연색활동사진, 행관은 하야카와 연예부, 상생관은 일본활동사진 특약점으로 각각 일본 배급사와 맺은 계약을 앞세워 흥행 우위권을 다투었다. 당시 흥행 기록에 의하면 보래관과 행관, 상생관을 합한 통계로, 무성 영화가 1915년에 18만 930명, 1916년에 24만 3657명을 기록하고, 신파극은 1915년에 2만 5360명, 1916년에 1만 3627명에 그쳐 무성 영화의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1937년에 보래관이 노후되어 철거되었고, 1938년 10월 5일 현대식 극장으로 재개관하였다. 총공사비 30만 원을 투입하여 3층 현대식 극장으로 보래관이 재건축됨으로써 부산은 제작, 배급 흥행의 조건을 두루 갖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8·15 광복 이후에 국제 영화 극장[1946년 1월 1일]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이승만의 모습이 보인다. 한때 미군 전용 극장으로 운영되어 오다 국립 극장[1949년 1월 18일], 문화 극장[1950년 6월 18일]으로 명칭을 바꾸다가 1973년 8월 27일 폐관하였다
광복동 국민은행 지점. 외형이 놀랍게도 같다.
이 계단이 옛 극장의 흔적이라고 한다. 부민관 1948년 '부민관'으로 이름이 달라졌다. 시민관 1953년 8월 '시민관'으로 개명됐다. 시설의 노후화로 1976년 문을 닫았다.
현재 한국투자증권 건물.
소화관 1931년 개관. 조선 최초의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 극장. 조선 첫 토키영화인 '춘향전'이 부산에서 처음 상영된 곳도 이곳이다. 광복과 함께 조선극장으로 바뀌고 1949년 동아극장이 됐다. 1968년 폐관.
놀랍게도 건물 외형이 비슷하게 남아있다. 동아데파트 건물. 건물 상단부 원형 창문이 그대로 남아있다. 불켜진 건물이 부산극장. 부산극장 밑은 바로 해안가였다. 부산극장 1934년 개관한 지역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부산의 향토 극장. 1934년 11월 5일에 『남선 일보』 대표 오가와요시조[小川好藏]가 10만 원을 투입, 동경 가부끼좌[가부끼座]를 본떠 부산부 서정 1정목 9번지[현재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5가]에 개관하였다. 처음에는 연극 전용관으로 출범하였으나 1937년에 보래관이 재건축에 들어가자 닛카츠 및 워드사 등의 영화를 배급받아 영화 전용관으로 변신하였다. 이후에 부산 영화 극장[1944년 1월 1일], 항도 극장[1946년 1월 1일], 부산 극장[1947년 5월 11일], 도립 부산 극장[1947년 8월 29일] 등으로 명칭이 개칭되었다. 1950년 1월에 다시 부산 극장으로 명칭을 개칭하여 사용하였다. 6·25 전쟁 중에는 임시 수도 국회 의사당이 되기도 하였다. 1958년 3월 27일에 부일 영화제 우수 국산 영화 상영 극장상을 수상하였다. 1976년에 연재흠이 인수, 1982년 12월 24일에 현대식 극장으로 재신축하고, 1993년에 멀티플렉스 시설로 재탄생하였다. 2009년 4월에 시너스가 부산 극장을 인수하고, 2011년 5월 20일에 시너스가 메가박스에 합병 완료되어 현재 메가박스 부산 극장으로 불리고 있다.
1959년 1968년 1974년 1982년 1998년 2009년 대지 면적은 1,072.5㎡이고, 연면적은 1,564.2㎡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무대는 247.5㎡이며, 총 1,011석의 부산 최초의 대형 극장이다. 1955년에 「양산도」[김기명 감독]를 시작으로 외화 상영 비율을 줄여나가다가 1959년부터는 한국 영화 상영 전용관으로 정착되었다. 7개관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7m X 7.5m 대형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부산 극장은 BIFF 거리의 중심 극장이며, 대영 시네마와 함께 남포동 극장가를 지켜내고 있다. 현재 부산극장
1987년 대영극장 1999년 대영시네마
대영시네마 1957년 용사회관에서 출발했다. 6·25 전쟁 이후 군인들이 모여 행사를 하던 곳을 개조해 '대영극장'을 만들었다. 이후 30년 동안 단관극장으로 운영된다.남포동 극장가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멀티플렉스 등장으로 사양길을 걷다가 1994년 폐관했다. 1999년 옆 혜성극장과 합쳐 8개 상영관을 갖춘 복합 상영관의 시대를 이끌었지만 2016년 5월 18일 폐관하고 만다. 마지막 상영작은 ‘곡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흔적들 동명극장 61년 개관 1,030석 삼성 디지털 프라자 광복점 자리. 부영극장 68개관 1,650석 1969년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 2가에 세워진 영화관. 1960년대는 한 해 20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되던 시대였다. 호황기에 때맞춰 부영 극장[대표 김인동]이 1969년 9월 25일 부산광역시 서구 충무동 2가에서 개관하였다. 부산에서 가장 많은 좌석수인 1,650석을 자랑하였던 대형 개봉관이었고[3층 구조], 바로 옆의 부산 극장과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흥행성이 높은 영화를 독점하였다. 1996년에는 대우에 의해 인수되어 3년간 임대 운영 계약을 맺고 내부 수리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1998년에는 좌석 간격을 넓히고 음향도 디지털로 바꾸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였으나 극장의 중심이 서면으로 옮겨가고, 2000년대 복합 영화관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 명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2000년 11월 6일 「글래디에이터(Gladiator)」를 마지막 상영작으로 폐관하였다. 남포동 극장가 있었던 부영 극장은 1,730석을 가진 남포동의 핵심 극장이었다. 처음 개관 때에 상영한 작품이 「007 두 번 산다」였는데, 이 개관 특선작이 1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부영 극장은 단숨에 부산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2000년 초 부영 극장은 부산 극장에 매각되었다. 매각될 때는 멀티플렉스(multiplex)를 구상하였으나 남포동 극장가에 관객이 줄어들자 한때 부산 최고의 영화관으로 명성을 날리던 부영 극장은 상가 건물로 재건축되어 쇼핑몰로 변신하였다. 부영극장 자리 보림극장
지금 마트가 되었다고 한다. 대한극장. 삼성극장
중앙극장
제일극장
현대극장
국제극장
온천극장 자리
동보극장 삼일극장 아카데미극장
미군 하야리아 부대 안에 있던 극장 [출처] 부산의 극장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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