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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기] - 이팔청춘 리자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새로운 풍경과 이색적인 냄새가 나를 체감하게 했다. 내가 유럽에 있다니! 파리에 있는 숙소 가는 차 안에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한참을 멍 때렸다. 파리는 건강하고 인간적인 도시였다. 사람 냄새가,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건강하고 활기찼다.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당당 선생님의 담담하고 당돌한 말씀 하나하나가 나를 두렵지 않게 해주었다. 죽기야 하겠어라는 마음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어떻게든 숙소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파리에서 떠나기 전 마지막 밤에 우리는 배를 타고 강물을 타며 파리의 주요 명소를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그 곳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중이였다. 역시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겼다. 서현이가 배탈이 나 화장실을 가는 바람에 두 팀으로 분리되어 가야했고, 우리는 환승을 하기 위해 지하철을 옮겨 타는 도중 티켓을 검사하는 관리자들에게 붙잡혔다. 방심한 우리는 티켓 두장이 없었고 총 50유로를 뺏기듯 지불했다. 그러나마나 우리는 도착지에 가야 하니 다시 지하철을 탔다. 나는 무사히 가고 있다는 생각에 또 방심했고, 옆에서 하진이는 계속 의심의 눈초리로 지하철역 노선을 보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노선도를 확인을 한 나는 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다. 몇분 후 우리는 다시 환승했다. 이리저리 멘탈을 잡기 힘든 상황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후 아이들은 모두 지쳐있었고 우리는 배를 타기 위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당당쌤이 알려준대로 구글 지도를 키고 아이들을 이끌고 뛰었다. 당당쌤을 만나 간신히 배에 탔고 우리는 천천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지하철 티켓을 잃어버렸던 의진이는 멘탈이 훌훌 날아가 버린 듯 했고 나는 그런 의진이에게 셀카를 찍자고 했다. 여기까지가 파리에서의 내 기억이다.
우리는 다음날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기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역시나 예상하지 못했던대로 갑자기 기차가 어느 역에서 멈추더니 몇시간 동안 출발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기찻길인지 기찻길 주변인지 화재 때문에 진입할 수가 없는 상황이였고, 우리는 몇시간을 버텨야했다. 하지만 재밌었다. 미안하다고 준 키트에 들어있던 샐러드가 정말 맛이 없었는데, 당당쌤은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이런것도 다 먹어야한다면서 돌아가면서 먹지로 먹였다. 별거 아닌 일인데도 그저 재미있었다. 그렇게 거의 자정이 돼서 이룬에 도착한 우리는 아랫층에 바가 있는 모텔에 묵었다. 들어가자마자 씻고 짐 정리도 하지 못한채 잠들었다. 다음날 우리의 운명을 전혀 모르는채로..
순례길 첫날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힘차게 걸었다. 솔직히 처음부터 좀 버거웠다. 나 이제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지배했다. 걷다가 걷다가 오르막을 엄청나게 올랐다. 힘들었지만 땀이 나서 기분이 좋았다, 아직까진. 잠깐 쉴 수 있는 공간에서 배를 채우면서 반 정도 오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까미노를 과소평가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클라이밍을 했다. 미친 짓이었다. 올라가서 이제 정말 반은 왔겠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었다. 끝이 없는 언덕을 넘고 넘고 또 넘어도 언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햇빛이 적당했고 길바닥에 동물들의 똥 덕분에 깔깔 웃으면서 가기도 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인사하는 것이 재밌었고 설레어 할 여유까지 있었다. 하지만 몇시간 후에, 우리는 거의 기어 가듯이 울면서 걸었다. 내리막길에서 한걸음마다 나의 내성발톱이 원망스러웠다. 힘 없는 발을 간신히 디딜때마다 돌에 찧었다. 그렇게 아름답던 주변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안중에도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한계를 느꼈고, 집에 돌아가게 되면 아빠랑 싸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악을 품고 가다가도 이건 아니라고 현실을 부정했다. 그렇게 한 두시간을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내려가다가 앞에 먼저 가던 애들을 발견하여 안심했고, 방심한 나는 발목을 제대로 접질렀다. 그렇게 이제는 정말 못걷겠다 싶을 때, 우리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그 날은 살면서 내 체력적인 한계와 정신적인 한계를 동시에 처음 시험해본 날이였다. 잠이 들 때까지 믿기지 않았다. 그 날이 순례 첫날이라는게..
둘쨋날에 나는 발목이 부워 걷지 못했다. 열심히 걸어서 도착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동시에 이것은 내 선택인데 내가 왜 미안해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고 혼란스러웠다. 알베르게에 들어가기 위해 여권을 제출하려는데, 용환이와 여권이 바뀌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권 하나 확인하지 않은 나에게 화가 났고, 여러가지로 나의 나약한 멘탈에 실망한 날이였다. 내가 끝까지 이 팀원들과 순탄하게 이 길을 끝낼 수 있을지 생각이 많은 둘쨋날이였다.
순례길 10일차까지는 너무 버거웠다. 걸을때마다 발목과 발톱이 고통스러웠고 이렇게 해서 순례 어떻게 끝내지 싶을 정도로 내 몸은 생각보다 약했다. 언제는 잘가다가도 처음부터 무리해서 걸었는지 갈수록 계속 뒤쳐졌다가, 어느날은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양말을 벗다가 펑펑 울기도 하고, 또 어느날은 뒤쳐져서 걷다가 갑자기 혼자 앞서서 미친듯이 걸은적도 있다. 언제는 내 페이스에 맞춰 혼자서만 몇시간을 체념하고 걸은적도 있다. 언제는 폐가에서 노숙을 하고, 하루는 거의 도착해서 산을 내려가는 길에 발목이 아파 용환이에게 가방을 부탁하고 혼자 천천히 가다 길을 잃어서 방황한 적도 있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해질수록 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없었다.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하였고, 내가 굳이 요청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했다.
혼자 힘겹게 걷고 있을 때면 지나가는 할아버지가 나를 붙잡고 조금만 더 가면 숙소와 쉴 수 있는 카페가 있다고 온 몸으로 알려주었다. 길을 잃었을 때는 처음보는 순례자가 나와 같이 길을 걸어주었고, 인포 센터에 계셨던 직원은 퇴근시간이 되었는데도 친구들이 내 위치를 확인할 때까지 옆에서 같이 기다려주었다.
제일 감사했던 당당 선생님께서는 항상 내가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뒤에서 짠하고 나타나셔서 짐을 나눠 들어주시거나, 혼자 드시려고 아껴두었던 디저트를 나눠 주셨다.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은 갈수록 단단해졌다.
순례길을 걷고 알베르게에서 쉴 때, 그렇게 감사하고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루하루 소중함을 느꼈고, 첫날 아빠랑 싸우고 싶었던 나는 감사한 마음이 커져갔다.
갈수록 걷는것이 여유가 생기고 어떤 상황이 닥치던 두렵지 않았다.
그러던 11일째 구에메스로 넘어가는 날, 당당쌤께서 일주일 동안 고생했으니 발목이 쉴 때가 되었다고 버스를 타고 알아서 가라고 하셨다. 나처럼 상태가 좋지 않던 의진이와 수찬이를 데리고 구에메스에서 가까운 동네에 가기 위해 두번 환승했다. 첫번째로 탄 버스는 무사히 통과했고, 그 다음 버스를 타고 내려서 5키로 정도 걸어서 구에메스에 가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였다.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렸어야 하는데 떠들다가 정신이 팔려서 산탄데르까지 갈 뻔했다. 중간에 내려서 한시간을 기다려서 다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정보는 없는지 불안해서 안절부절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무서운 순간이였다. 서로의 연대감이 쌓이면 쌓일수록 혼자일 때에 두렵지 않게 한다고 배웠는데,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침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심히 안도했고, 별 일 없었다는 듯이 당연하지 게임을 하며 신나게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당당쌤이 제일 기대하시던 구에메스에 있는 알베르게는 규모가 굉장히 컸다. 도네이션제로 운영을 하고 있어서 그 다음날 출발하기 전에 알아서 돈을 내고 가면 되는 풍요로운 곳이였다. 그 알베르게에서는 모든 순례자들과 다같이 미팅을 하는데, 이 알베르게에 대한 모든 것과 우리를 어떤 마음으로 반겨주는지 소개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인 청소년 단체가 왔다고 우리를 다같이 환영해주기도 하였고, 미팅하는 중간에 리누쌤에게 통역할 기회를 주었다. 우리를 존중해주고 배려해주는게 느껴져서 감사했다. 미팅이 끝나고 다같이 한 공간에서 식사를 할 때, 누가 먼저 나서는거 없이 다같이 서로를 도와주는 분위기가 나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같은 길을 걷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언어로 소통하고 어울리는 따뜻한 공기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할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때에 일어나서 도와드리지 못한게 마음에 걸린다. 그 날 리누쌤을 따라 순례길 처음으로 제대로 일기를 썻다. 펜으로 내 생각을 쓰는게 너무 오랜만인지라 어려웠지만 그 순간을 남기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을 알기에 미래에 나를 위해서 끝까지 쓰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한 일주일 정도를 더 걸었다. 일찍 출발하고 일찍 도착해서 숙소를 구하지 못할까봐 마음 조리는 일이 점점 없어졌다. 걷는 기계가 되어서 쉬는 횟수가 적어졌고, 더 신나게 웃으면서 걸었다. 걷다가도 바다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힐링을 했고 사람들을 관찰하는게 재미있었다. 그들의 여유가 부러웠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으며 발바닥의 부드러운 감촉과 발등에 일렁이는 바닷물이 나를 괜히 설레이게 만들었다. 알베르게에서 낮잠을 자다가 바다가 있으면 헤엄치고 언덕이 있으면 뛰어놀고 아무것도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뛰어 놀았다. 걷는 길마다 새롭고 예쁘니까, 눈과 마음이 즐거웠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나만 있고 나만 즐기는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 미안했고 너무 보고싶었다. 어떤 곳이던 항상 함께였던 가족들과 그 순간 같이 있지 않다는 사실이 마음을 허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항상 뾰족하게 신경이 서 있어서 예민하고 피곤했던 내가 부드러운 마시멜로우가 되는 것 같았다. 일기를 쓰는 것도 못쓰면 아쉬울 정도로 익숙해졌고 펜을 쥐고 생각하는 시간조차 감사했다. 고되지만 알찬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소중했다.
하지만 우리는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조정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갈등이 꼭 생기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울분이 쌓였고 누군가는 그 울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누구는 관심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관심과 이해, 그리고 소통이 필요했다. 당당쌤은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계셨고 우리의 상황과 기분을 모두 존중하며 융통성 있게 이끌어 나가셨다.
이 곳에 와서 나는 걷는 것만을 배운게 아니다.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방법과 그래야 하는 이유를 뼈저리게 체득했다. 이런 것이 한국에서 평소에 잘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생기는 갈등과 오해 때문에 그 중간에서 많이 지쳐있었던 나는, 공동체에 대한 반감과 두려움까지 많이 극복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산티아고까지 전방 100km를 남기기 위해 버스를 타고 넘어가는 시점에 우리는 루고에서 노숙을 했다. 사실 이 얘기는 그저 재밌어서 하는 얘긴데, 이런 경험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그 날은 정말 특별했다. 내가 각성한 날이였다. 도쿄구울의 카네키가 된 것 같았다(무리수). 평소 시속 4키로였던 내가, 버스 시간에 맞추기 위해 18키로를 5.5키로의 속력으로 걸었다. 걸으면서도 나 지금 뛰고 있는 거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는 에너지로 걸었다. 3키로 남았을 때 다리가 부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 멈추지 않았다. 일부로 뛰기도 했다. 다들 지쳐 있어서 조금 달리는 것이 엄청난 부스터 역할을 했다. 11시 반까지 도착해야 했던 우리는 11시 27분에 도착했다.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키혼으로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 원카드를 하다가 다들 잠들었고 혼자 창문 밖 울창하고 거대한 산길 사이에서 풍경을 즐겼다. 엄청난 장관에 놀란 나는 옆자리 의진이를 깨워 함께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잠에 들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는 다 같이 눈을 뜨고 말 없이 창 밖을 바라보았다.
평생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고, 여러가지 복잡미묘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아빠의 추진으로 왔지만, 내가 끝까지 고집부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이 곳에서의 이 행복을 예상하지도 못했을것이다. 그 생각에 너무 고맙고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이 곳에서 생각치도 못한 사람들을 만나 한달동안 잘 지내고 거의 끝나간다는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이런 경험을 한 내 자신이 대견했고 경험을 할 기회를 주신 부모님에게 너무 감사했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는 사실이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별 생각을 다 하다가 키혼에 도착했고, 키혼에서는 숙소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도심 한 가운데서 우리를 위해 저리뛰고 이리뛰는 선생님들을 기다리기만 할 뿐이였다. 키혼은 도시에 길게 뻗은 만이 있어서 도심 안에서 사람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공원같은 곳에 앉아 장관을 앞에 두고 바닥에 앉아서 원카드를 했다. 처음 느끼는 영화같은 분위기에 취해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먹구름을 보고도 별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또 넘어가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30분 안에 갑자기 영화의 장르가 바뀌었다. 난리통에 레인커버를 힘겹게 씌우면서 달렸다. 가다가 순례길 스탬프도 놓치지 않았다. 급하게 장을 보고 버거킹에 가서 치킨버거를 급하게 먹고 바로 버스를 탔다. 몇시간을 가다가 내려서 터미널에서 도넛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주구장창 기다리다 11시에 또 버스를 타고 루고로 넘어가니 12시가 넘어있었다. 당연히 숙소는 없었다. 날씨도 전보다 훨씬 추웠고, 배고팠다. 우리는 그 날 대놓고 노숙자였다. 당당쌤이 유럽은 12시가 넘으면 조용히 해야 한다고 살금살금 도둑 흉내를 내며 노숙할 곳을 찾았다. 공원에서 우리가 잘 곳을 찾으러 떠나신 당당쌤을 기다리며 아이들이랑 점심에 쟁겨두었던 오렌지와 또띠아를 나눠먹었다.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다. 벤치 9개가 있는 공원에서 자기로 했다.
선생님들은 언덕에 누워서 주무시기로 하고 애들은 벤치에서 자기로 했다. 자기 전에 파인애플 통조림으로 허기를 달래고 당장 누워서 자려고 했으나 너무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꺼내보지도 않았던 경량패딩의 존재가 너무 고마웠다. 새벽 5시에 소리가 들려서 잠이 깼다. 침낭 밖으로 힘겹게 얼굴을 내밀었는데, 놀랍게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당연히 죽은 줄 알았다. 소리가 들려서 잠에 깬 것은 너무 추워서 무의식에 내가 나에게 살아있냐고 물어본게 아닐까...? 분명 다같이 일어나서 인디언처럼 뛰어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허무하게 다시 침낭에 들어가서 가만히 누워있는데 의진이랑 하진이가 나를 불렀다. 역시 다들 추워서 제대로 잠들지 못한 모양이였다. 의진이가 춥다고 번데기처럼 침낭을 입은채로 콩콩 뛰어와서 껴앉고 있었는데, 하진이도 오더니 셋이 뭉쳐서 만두가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언덕에서 잔 당당쌤과 리누쌤은 새벽에 스프링쿨러가 돌아가는 바람에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자던 남자애들은 비가 오는 줄 알고 피하지도 않고 그저 물을 맞으며 잤다. 일어나자마자 주변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따뜻한 우유와 빵을 먹으며 몇시간을 몸을 녹였다. 부족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루고는 산티아고에서부터 전방 100km를 남긴 곳이였다. 걸으면서 화살표 아래에 몇키로가 남아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산티아고 입성까지 5일을 남겨두고 온전히 까미노를 걷기 위해 집중했다.
산티아고부터 100키로 남겨두니 한국인들이 자주 보였다. 멜리다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순례길 처음으로 한국인을 만났는데, 학교 선생님과 부모님이라고 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의진이랑 리누랑 하진이랑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대용량을 사와서 다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그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처음 먹어봤다. 인생에서 길이 남을 아이스크림이다.
빨래를 하고 쉬다가 리누쌤이 뽈뽀(문어)먹고 싶은 사람 나오라고 해서, 뛰쳐 나가서 한국에서부터 먹고 싶었던 뽈뽀를 드디어 먹었다. 문어라기엔 식감이 너무 부드러웠다. 당당쌤이 자주 사주셨던 통조림 뽈뽀와는 차원이 달랐다. 아직도 생각나는 맛이다.
그 날 밤에 숙소에 돌아와서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휴게실에서 놀고 있는데, 그 한국인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시끄럽다고 혼내셨다. 충분히 다그칠 수 있는 상황이였지만, 그 분은 우리를 전혀 존중하지 않고 몰아세웠다. 당황한 우리는 일단 사과를 드렸다. 카페에 내려가서 다같이 일기를 쓰다가 여러 이야기가 오가고, 그 분에 태도에 충격을 먹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니 다들 동감했다. 한국에서의 스트레스와 현실을 온 몸으로 체감한 기분이였다. 내가 까미노를 걸으면서 당당쌤과 리누쌤께 사람으로서 존중 받았던 것이 한국에서는 당연하지 않았고 그 현실을 자각해버린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급히 들어가 자려고 일어서니 리누쌤이 다시 앉혀서 위로해줬다. 정말 고마웠다. 기분이 좋지 않게 잠든 날이였다.
그 다음날은 혼자서 걷는 날이였다. 처음에는 조금 두려워서 안하려고 했는데, 나중에 혼자 걷는 것을 도전하지 않은게 아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걷겠다고 나섰다. 그 날은 몸 상태가 꽤 좋았다. 신나게 걷다보니 처음으로 출발한 하진이를 따라잡고 한참을 같이 걸었다. 중간에 도시에서 리누쌤을 만났고 쌤을 따라 숙소에 갔는데 남은 자리가 없었다. 길을 계속 잘못 들기도 했고 쉬지 않고 걸어서 더 걸어야 한다는게 너무 힘겨웠다. 고작 3키로지만 너무 힘드니까 화가 났다. 아무말도 안하고 체념하고 걷고 있는데 그런 나를 눈치챈(못챌리가 없을 정도로 말이 없었다)리누쌤이 장난을 걸었다. 갈수록 기분이 풀렸고 나중엔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 더 걸어서 도착한 숙소도 너무 좋았고 밥도 맛있게 먹었다. 애들이랑 2시간을 앉아서 수다를 떨었다. 그 날 밤에 뜬 보름달은 크고 알찼다. 다들 잠들 때까지 떠들고 놀았다. 기분이 좋아서 인스타 업로드를 하느라 늦게까지 몰래 폰을 했다.
산티아고 전방 10키로 남은 곳에 가는 날이다. 하진이랑 둘이 제일 먼저 출발했다. 어두컴컴한 시골길이라 바닥이 하나도 안보였는데, 그냥 저냥 재밌다고 심령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분명 출발할땐 찐노랑색의 달이 바닥에 있었는데, 좀 걸으니까 반대쪽에서 해가 뜨고 있었다. 달과 해의 반을 동시에 보는 것은 처음이였다. 걷다가 배고프고 졸려서 쉼터에서 요거트와 바게트로 배를 채우며 쉬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나머지 일원들이 보였다. 왠지 모를 위협을 느낀 하진이와 나는 우리를 따라잡은 리누쌤이랑 힘차게 걸었다. 가다가 배가 고파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파니니를 먹었는데, 진짜 맛있었다. 냉동을 구웠을뿐인데 생각보다 꽤 그리운 맛이다. 남은 거리 6km부터 정강이가 아팠다.
아무래도 좀 무리해서 걸었나보다. 통증이 컸지만 굴복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걸으면서 내가 드디어 걷는 맛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고 산티아고 길이 끝나기 전에 이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는게 다행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나가는 다른 순례자들을 재치는게 너무 재밌어서 타오르는 정강이를 무시한채 걸었다. 마을로 들어와서 숙소로부터 500m 남았을때, 다 왔다는 생각에 안도를 해서 그런가 갑자기 정강이가 너무 간지럽고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다리를 절면서 걷는 내 자신이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하진이와 리누의 드디어 정신을 놓은거냐는 등의 질타를 받으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12시 반이였고 아무도 없었다. 체크인은 2시였고 뜨거운 햇빛 아래의 우리는 오징어 구이처럼 따뜻하고 나른하게 한시간 반을 쉬었다. 땀에 절여진 가방도 햇빛에 소독해주었다. 뽀송뽀송하니 기분이 좋았다. 숙소는 겉으로 보인 것보다 훨씬 거대했고, 뒷마당이 매우 영화같은 곳이였다. 수압이 엄청났던 샤워실도 완벽했다. 리누쌤과 당당쌤의 밥을 당당하고 뻔뻔하게 얻어 먹었다. 역시 남이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다. 빨래를 하고 쉬다가 또 저녁으로 피자를 시켜 먹었다. 역시 파인애플 피자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자기 직전까지 뒷마당에서 별 수다를 다 떨었다. 역시 남의 연애가 제일 재밌다. 자기 전 일기를 쓰면서 이 곳에서의 일기 쓰는 시간이 끝나가는게 아쉽다고 생각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에 가는 날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어제의 정강이가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중반까지는 거의 평지여서 고통없이 걸었는데, 한 4키로 남았을때 꽤 긴 내리막길에서 뒤쳐졌다. 맨 뒤에서 혼자 우울해하면서 걸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끝으로 콤포스텔라 성당에 가고싶지 않아서 멘탈을 부여 잡으며 힘겹게 걸었다. 울고싶었다. 괜한 심술이 났다. 한 2키로 남았을때 당당쌤이 다같이 들어가야 한다면서 일원들을 기다렸다. 다같이 걸으면서 의진이한테 심술을 부렸다. 같이 걷다가 나를 버리고 갔다는 생각에 미울뻔했는데, 생각하다보니 쓸데없는 생각인걸 알았다. 계속 나에게 미안하다면서 애교를 부리고 안절부절하는 의진이가 웃겨서 더 삐진 척을 했다. 의진이한테 참 미안하고 고맙다. 나보다 더 성숙한 아이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내가 미웠지만 외롭지 않았기에 괜찮았다. 다같이 성당 앞 광장에 들어가는데, 실감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성당도 생각보다 웅장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같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순례길은 끝이 났다. 성당보다 더 큰 것 같은 숙소에 갔다. 그 날은 기분이 이상했다. 슬픈 감정을 그대로 일기에 썻다. 혼자 일기를 쓰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다들 아쉬운듯 자기 싫어 버티고 있었다. 다들 얼굴에 피곤함과 기쁨 아쉬움이 서려있었다. 떠들다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든 것 같다.
순례 후 약 5일동안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한국에서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을 샀고 나를 위한 선물도 샀다. 포르투갈에서의 3일은 정말 원없이 행복했다. 마지막날 리스본 밤바다 앞에서 버스킹을 듣고 야경을 보며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음의 정리를 했다. 그렇게 34일의 일정이 모두 끝이 났다.
오기 전에는 내가 와도 되는걸까 두려웠다. 나 자신에게 확신도 없었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선택에 앞에서누가 나를 강제로 보낸다면 후회할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주변사람들에게 내가 한달동안 한국 고등학생의 일정을 접어두고 길을 걷는다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었다. 한참 고민하고 있을때, 아빠가 내가 한달동안 그림 못그리고 공부 못한다고 해서 대학을 못가는건 아니라고 순례길을 걷고 온 나를 상상해보라고 했다. 인생에 있어 엄청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눈 앞에 있는데 포기해놓고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찔한 고민을 했다고 생각한다. 평범하고 반복된 일상을 보냈더라면 산티아고에서의 행복을 모르고 있었을것이다. 한달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을 유럽에서 보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내가 한단계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여행에 열광하는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며 언제, 무엇에 행복을 느끼는지 나에 대한 것들을 깨달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하고 싶은게 딱히 없었던 난 항상 끈기와 희망과는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살아있고 살아가는것에 의미를 두니, 하고 싶은게 많아졌고 자잘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터득했다. 자잘한 것 뿐만 아니라 큰 꿈을 꿔도 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있어서 의미없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다. 막연하지만, 내 미래가 기대된다. 엄청난 멋진 미래를 바라는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두렵지가 않다. 그래서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나는 지금을 즐기면서 열심히 사는게 미래의 나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절대 미래를 위해 지금의 즐거움과 행복을 아껴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첫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용기와 희망을 준 경험이였다. 나의 산티아고 까미노는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이어질 까미노를 위해 나의 지금에 충실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