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마’와 '팔마자립생활센터'
순천팔마장애인자립생활센터
왜 우리는 ‘팔마’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
이야기는 고려시대로 넘어간다.
당시 순천은 '승평(昇平)'이라 불렸는데, 벼슬아치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지금의 시장격인
태수 부사(府使)에게는 말 8필, 부시장격인 부사(副使)는 7필, 국장급인 법조(法曹)는 6필을 마음대로 고르도록 해
선물하는 관례가 있었다. 승평의 부사(府使) 최석이 1281년 12월에 비서랑으로 임명돼 돌아가게 됐다.
이에 8필을 고르라 청하니 '개경까지만 타고 갈 수 있으면 되니 굳이 고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도착하자 말을 돌려보내려 하니 고을 사람이 받질 않았다.
그러자 최석은 "당시 고을에 있을 때 내 암말이 새끼를 낳아 데려왔는데 이것이 탐욕이었다. 이를 알고서 겉으로만
사양한다 여기는 것이 아닌가?"라며, 승평 주민에게 받은 말 8필에, 승평에 근무할 때 개인 소유의 암말이 낳은
망아지까지 더하여 총 9필을 돌려줬다. 이후에는 말을 바치는 폐단이 끊겼고,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해
팔마비를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팔마비가 훼손되었으나, 1616년 ‘지봉유설’을 집필했던 이수광이 승주부사로 부임하여
최석의 높고 숭고한 뜻을 기려 팔마비를 복원했다.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21,00760000,36&pageNo=1_1_1_0
[예로부터 산천이 얼마나 바뀌었던가.
비가 터가 없어져 매몰된 지 오래네.
성명을 다시 돌에 새길 필요는 없으니
좋은 일은 서로 전해 입이 곧 비석이기 때문이라오.]라고
고려 공민왕 때 승평부사 최원우의 시를 차운하여
이수광이 ‘중건 팔마비 음기(重建 八馬碑 陰記)’를 남겼다.
원래 팔마비는 순천부읍성 남문 앞에 세워졌는데 3.1 만세운동을 하였던 곳이라 하여 시가지 정비를 빌미로
1930년 일제가 지금의 순천시 행동우체국 바로 옆으로 옮겼다.
순천 팔마비는 우리나라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과 청덕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의 효시이자
최초의 정덕비(貞德碑)로 순천시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순천에서는 팔마로 333에 있는 팔마체육관, 팔마초·중·고등학교, 팔마대교, 팔마탑, 팔마비,
팔마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 다양한 곳에 팔마라는 이름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또한 시에서는 팔마문화제, 팔마를 활용한 캐릭터 공모전을 진행하며 최석의 청백리 정신을 기르고 있다.
팔마문화제
순천글로벌웹툰센터에서 진행한 '팔마'를 소재로 한 공모전
출처: 순천시청, 순천글로벌웹툰센터, 오마이뉴스 배주연, 네이버지식백과, 두산백과, 광주 봉추니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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