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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최초의 발도르프 학교 개교 100주년, 사회적 삼지성 100주년, 오이리트미 100주년 등등,
최근에 인지학계에서 100주년을 기념한게 꽤 된다.
나는 그런거에 좀 심드렁하다.
뭐 하나 제대로 한게 없는데 무슨 100주년 기념인가 말이다.
발도르프 학교는 껍데기라 해도 숫자가 꽤 되니 그런다 해도,
사회적 삼지성은 제일 앞에 'ㅅ'자 하나도 감히 그리지 못한 주제에 그런거는 이미 극복되었다 주장하는 얼치기가 판치고,
오이리트미는 거의 표현무용으로 전락했다 해도 별 무리가 없는데 말이다.
나는 그런 것보다는 1922년 12월 31일을 깊이 기려야한다는 생각이다.
첫 번째 괴테아눔이 불에 타 사라진 그 날.
'괴테아눔 화재가 일어난 날', 이렇게 단어로만 읽지 말고 그 정황에 온마음으로 들어가보려고 노력해 보자.
첫 번째 괴테아눔은 어떤 건축 회사에 맡겨서 한두 해 걸려 지어진게 아니다.
원래는 괴테아눔이 독일 뮌헨에 지어질 예정이었다.
그 진짜 첫 번째 괴테아눔은 언덕 위와는 정반대로 땅 속에 들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잊어먹었는데, 뮌헨 시가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가 어쨌던가, 계획이 무산되었고,
얼마 후 도르나흐에 부지를 기증받게 되어 그곳에 완전히 다른 모양의 집을 지은 것이다.
1913년에 건축을 시작했는데, 나무로 지은 것도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엄청 많은 목재를 기증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보통 건축 방식으로 나무를 쓰지않고 얇은 목재판을 겹겹이 덧붙인 덩어리를 쌓아올리는 식으로 일했다.
평평한 면만 있다면 목재를 네모나게 잘라서 그대로 쌓아올리면 되는데,
괴테아눔 건물 자체가 어디도 평평한 면이 없었던 터라 나무덩이마다 일일이 손으로 조각해서 쌓는,
그야말로 1센티미터도 잔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는 공사였던 것이다.
기부 받은 것은 돈이나 목재, 석재, 유리 등 물질 뿐 아니었다.
단순한 공사일부터 조각과 그림 등 예술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두 인지학 협회 회원들의 손으로 마감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일어나 생활하기 조차 힘든 시기에
유럽 뿐 아니라 미국 등에서 모여든 사람들에 의해 10년 동안 공사가 이어졌다.
물론 누구나 10년 내내 그곳에 육체적으로 머물지 않았다 해도,
괴테아눔은 인지학 협회 회원들의 피와 땀이 어린 집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어느 날 하룻밤 만에 재로 변했다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라.
나무로 된 집인데다 언덕 위에 덩그라니 서 있으니 스위스 산촌의 겨울 바람을 맞아 훨훨 타올라
슈타이너와 그 측근들은 속수무책으로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는 그 정황.
...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그치지만 않았다.
범상한 인간들이 늘 그렇듯이 그런 것을 보면서 인지학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왜 선한 정신들은 우리를 떠났는가?
왜 전능하신 우리 박사님은 이런 것을 예견해서 방지하지 못했는가?
인지학이 그렇게 영험한게 아닌가 보다." 등등.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는데도 루돌프 슈타이너는 바로 다음 날이 1923년 1월 1일부터
도르나흐와 슈투트가르트를 오가며 협회 괴테아눔과 발도르프 학교 일 뿐 아니라 강의까지 모두 예정대로 진행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 보험 회사와의 교섭, 괴테아눔 재건축 등에 관한 사항도 협회 간부들과 논의해야 했다.
1923년 6월 15일 삼백몇십만 프랑켄 되는 보험금이 지불되었다.
(이게 요즘 돈으로 얼마 되는지 모르겠는데... 요즘 1프랑켄이 1400원 정도 하니까... 4,200,000,000 이게 42억 원인가...
100년 지났으니 한 50배 인플레를 가산하면 210,000,000,000 2조원인가.... 흠... 어렵다... )
어쨌든 엄청난 보험금을 받았으니 범상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
...
그렇다.
"드디어 새 괴테아눔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하며 기쁨에 들떠 서로 축하하고 난리를 칠 것이다.
바로 이것을 그 이틀 후인 6월 17일자 괴테아눔 정기 총회에서 에밀 그로스하인츠가 한 말에서 알아볼 수 있다.
에밀 그로스하인츠(Emil Grosheintz, 1867-1946)는 신지학 협회 시절부터 슈타이너를 따른
가장 오래 되었고 가장 충직한 회원이었다.
이 사람이 괴테아눔 부지를 기증했으며 괴테아눔 건축 위원장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로스하인츠가 6월 17일 총회에서 루돌프 슈타이너 바로 앞에 연설했다.
먼저 화재로 인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계속 이어온 용기를 칭찬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는 친구들, 우리는 숙명의 그 날 이후 이어 온 그 수동적인 용기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능동적인 용기를 키워야 합니다! 괴테아눔이 파괴된 것은 행동하라는 구호입니다!"
그런 다음에 '새 괴테아눔 건축을 위한 자신의 의지'를 공표하고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면서 말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의지라면,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총회 기록에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고 되어 있다.
...
그리고 루돌프 슈타이너의 연설이 이어진다.
찬물 확 부어서 진심으로 잠 깨우는 분. ^^;;
사실은 12월 31일에 이 연설을 올리려했는데...
특히 현재 사회 상황을 감안하면, 그리고 이로 인해 인지학계와 발도르프 교육계에 일어나는 사건을 보니,
너무나 폐부를 찌르는 내용이라 모두들 읽어보고 반성 좀 해야 하는거 아닌가 해서
어제부터 밤잠 덜 자고 번역해서 올린다.
스크랩과 복사를 허용하니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선물로 받아 명상 주제로 삼기 바란다.
굵은 글씨체는 내가 강조한거다.
괴테아눔 정기 총회 연설
1923년 6월 17일
도르나흐
1.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흘러간 세월동안 이 총회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른 것을, 그리고 다른 근거로 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중한 인지학적 건물 괴테아눔이 사라진 사건에 아직 짓눌려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에 대해서는 제가 반복해서 거론할 필요가 더이상 없습니다. 회장님(에밀 그로스하인츠Emil Grosheintz 박사)이 오늘 그것을 훌륭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회장님의 말이 여러분 모두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특정 정도를 넘어서는 불행은 근본적으로 침묵하는 말로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괴테아눔과 더불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표현하기에 말은 실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2. 스위스 인지학 협회 총회와 괴테아눔 이사진 총회 사이에, 그리고 두 모임의 끝에 해야 한 강의에서 제가 언급할 의무가 있는 모든 것에 관해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3.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말해야 하는 것 중에 근본적으로 아주 많은 것을 우리에게 덮친 거대한 숙명적 사건을 주시하며 이미 말했습니다. 인지학 협회 회원들 사이에 공통적 느낌이 실로 대단하다는 것을 그 숙명적 사건이 얼마나 뼈저리게 보여주었는지 당연히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4. 단, 사랑하는 여러분, 괴테아눔-화재가 일어나서 직접적으로 그에 짓눌린 상태에 있었던 당시 우리를 위해 자명한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 정신생활의 작업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언제나 생기를 불어넣고 우리를 고무해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히 특별하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제가 어제 이야기한 의미에서 실제로 행동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의 중심을 근거로 해서 일 하기,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 해도, 외부 세계에서 어떤 압력이 가해진다 해도 중심에서 솟아나는 사실상의 내적인 일과 의향에 있어 절대 혼란에 빠지지 않기. 바로 이것에 인지학적 운동의 실제적 전망이 달려있습니다. 인지학적 운동의 전망은 숙명적 사건이 어떤 종류로 얼마나 많이 외부에서 닥쳐오는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닥치는 사건은 인지학적 인생관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의향으로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숙명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유리해 보이는 모든 숙명적 사건에도 불구하고 정신생활의 중심에서 작업해내면서 내적인 기운이 마비되지 않도록 하기, 바로 이에 인지학적 운동으로 도달해야 하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달려있습니다.
5. 그런데 그런 작업을 하는데 필수적인 것, 이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해서 우리 영혼 앞에 세워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심각하기 짝이 없는 현상황에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6. 이와 관련해 말하고 싶은게 한 가지 있습니다. 인지학 운동같은 정신적 운동을 하면서 올바른 길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성공이나 실패는 근본적으로 보아 사실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 주제 자체의 내적인 힘과 내적인 자극에서 생성되는 것만 유일하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정말로 진지하고 신중한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아주 많은 것들이 인지학 협회 내부에 일치된 것을 의식하는데 달려있습니다.
7. 다음 사실을 반드시 숙고해야 합니다. 의향, 의식의 자극, 이런 것은 오늘 내일 당장에 실현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께의 의향과 의식의 자극에서 오늘 생겨난 결과가 어느 것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지학적 항로가 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길에 들어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외적인 방식으로 주제를 다룬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운에 맡기겠다.” 그리고 행운이 상상한 방식으로 생겨나지 않으면,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용기를 잃어버렸어. 기운이 없어.”
8. 끔찍한 불행이 우리를 덮친 당시 우리 인지학 협회 회원들 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영혼도 역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가 예상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니, 왜 선한 정신 세력들은 이런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선한 정신들이 버린 운동의 타력을 믿을 수 있는가?”
9. 그런 것은 외적인 상황에 연결된 생각입니다. 외적인 것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고 주제의 내적 중심에서 생겨나는 것을 굳건하게 고수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의향, 생각, 특히 의식의 자극이 실재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의식의 자극을, 생각을, 느낌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도움이 아니라 그런 의향과 생각 자체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런 자극에서 건져올린 것이 외관상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올바른 목표에, 더 정확히 말해 정신세계에서 그것에 예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해도 됩니다. 심지어 어느 날 외적인 상황으로 인해 외적인 세계에서 완전히 파괴된다 해도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10. 올바르게 원해지는 정신적인 것이 외부 세계의 어떤 것을 통해서 완전히 파괴될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비록 그 파괴가 외적인 마야에 들어있다고 해도 정신적인 자극의 타력을, 정신적인 기운의 타력을 실제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외적인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라지는 순간에도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면으로부터 원해지는 것에는 성공이 따르도록 되어 있다.” 단 성공에 관해 말할 때 내적인 자극과 생각의 의미에, 의식이 의도하는 것의 의미에 들어있는 것을 주장하는 식으로 해야 합니다. 외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수십 년이 지나야, 심지어는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 비로소 규명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정신적인 세계의 정부라 말할 수도 있겠는데, 그 정부를 현순간의 정세에 따라 판단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세계를 당당하게 대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신적인 세계는 그 자체에 강도와 타력을 부여합니다. 지구 상에서 아무리 둘러봐도 그 타력이 집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 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운 모양이든 보기 흉한 모양이든, 정신에서 솟아나서 정말로 원해지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든 반박하는 것이든, 조직이나 기관은 그 타력이 절대 집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11. 정신적인 것의 진실이나 거짓을 외적인 것으로 증명하거나 반박하려는 사람은 잘못된 길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정신적 자극의 중심 내부가 아니라 그 외부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자극의 중심에서 주제가 되는 것을 판단하기 위한 유일한 기준은 인간 마음 가장 깊은 부분이지 외적인 관계는 절대 아닙니다.
12. 이 사실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정신적 운동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적으로 강해지도록 점점 더 많이 애를 쓰고, 정신적 운동의 내적인 중심을 근거로 해서 일을 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쪽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13. 그런데 그렇게 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완벽하게 의식하는 것이 바로 이 순간에 저한테 절대적으로 불가피해 보입니다. 흔히 “나는 인지학적 의향이 있다, 나는 인지학적 의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는 그것을 절대로 충분히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14. 이에 있어 제가 괴테아눔 화재가 일어난 이래 자주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저는 그 말이 실제로, 진정 근본적으로 이해되기 바랍니다. “건물로 있었던 인지학의 집, 첫 번째 괴테아눔, 그 첫 번째 괴테아눔의 형태는 다시 세워질 수 없다, 그것은 다시 지어질 수 없다.”고 제가 자주 말했습니다.
15. 정신에서 나온 것을 의미하는 그런 문장이 일단 말해지면, 반드시 그것을 실재로서 감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외적인 세계의 실재를 온갖 방면에서 관찰하는 것과 똑같이 가능한 한 많은 방면에서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런 문장은 대부분의 경우 일단 특정 조망점에서 출발해야 올바른 시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문장은 우선 정신적인 의무를 근거로 해서 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신적인 의무를 근거로 해서 발설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육체적인 손에 이리저리 건내지면 안 되는 이유가, 그런 말을 위해 제시된 이른바 이유가 전적으로 필요합니다.
16. 오늘 이 시간에 외적인 상황에 관해서 말하는 것은 제 의무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오늘 특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첫 번째 괴테아눔은 다시 지어질 수 없다.’ 하는 문장의 내적인 자극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에 관해 모든 진지함을 다해서 말하도록 먼저 허락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재건축 과제를 대하는 이 진지함만 여러분께 올바른 위치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 여러분도 보다시피 현재 이미 외적 사실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그 외적 사실이란 괴테아눔 화재에 이어진 법적 조사가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사가 끝나서 당국은 우리한테 삼백몇십만 프랑켄을 지불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미 지불했습니다. 삼백 몇십만 프랑켄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오늘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6월 15일부터 삼백여만 프랑켄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18. 사랑하는 여러분, 건축비로 삼백여만 프랑켄이 있고, 이제 우리 친구들의 희생 정신으로 기껏해야 삼백만 프랑켄 정도 더 모금하면 된다는 사실에 영혼이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이 6월 15일을 인지학적 운동의 발달에서 아주 특별하게 기쁜 날로 기록할 수도 있겠지요.
19.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완전히 인지학적 생활의 의미로 생각된 방면에서 이 문제를 여러분께 조명해 보여주어야 한다면, 다르게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마도 이곳이나 저곳에서는 대단히 기쁜 소식으로 기록될 이 사실이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괴테아눔 화재 이래 제가 겪은 고통 중에서도 이것은 완전히 특별하게 고통스러운 것에 속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일어난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최상의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인지학적 운동의 중심과 사실상 전혀 관계가 없는 어떤 것, 이 운동의 중심적 작용과 무관하게 완전히 그 외부에 놓인 어떤 것이 초래되는 것이다.”
20. 첫 번째 괴테아눔은 다시 지어질 수 없다는 의견은 미학적 배경만 있는게 아닙니다. 편의주의적 배경, 외적-역사적 배경만 아니라 인지학적-도덕적 배경도 있습니다. 이제 이 인지학적-도덕적 배경에 관해 제가 몇 마디 하도록 허락하십시오.
21. 1913년, 1914년 경을 한번 되돌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봅시다. “당시 어떤 근거로 괴테아눔을 짓기로 결정하고 건축을 시작했는가? 그 당시부터 1922년 12월 31일까지, 경우에 따라서는 1923년 1월 1일까지 추구되어 온 것은 괴테아눔 건축에 들어간 한푼한푼 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지학적 운동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희생 정신에서 흘러나왔다는 바탕이 있습니다. 괴테아눔은 전적으로 내적인 이해를 근거로 해서 지어졌습니다.
22. 한푼한푼이 일 자체를 위한 내적인 이해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은 문제의 내면성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음 사항이 진정한 진실입니다. “괴테아눔에서 마지막 강의를 했던 그 순간에 우리는 인지학을 위한 고향집이 있었다.” 그 집은 가장 깊은 내적인 이해로 일 자체에 바친 한푼한푼으로 지어졌습니다. 한 덩어리 나무 속에도, 한 덩어리 돌 속에도 인지학적 의지가, 인지학적 희생 의지가 박힌 건축물이 도르나흐 언덕 위에 은은히 빛났습니다. 이 도덕적 성분이 첫 번째 괴테아눔에 박혀있었습니다.
23.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삼백여만 프랑켄으로 건축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 중 대부분의 돈이 괴테아눔에 아무 관심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괴테아눔이 없어지는데 더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입니다. 괴테아눔이 다시 도르나흐 언덕에서 은은히 빛을 내면, 그러면 인지학적 희생 의지만 거기에 박혀있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지학적인 것 외부에 있는 현 세계 구조에서 보통인 것이 박혀있을 것입니다.
24.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되면 내적, 정신적인 관점에 보아 완전히 다른 건물이 도르나흐 언덕에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어쨌든 존재하는 사회적 연관성에 따라 지갑에서 돈을 꺼내 괴테아눔 건축에 집어넣기는 해도 깊이 동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일종의 저주를 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25. 제가 자주 말했습니다. 인지학같은 종류의 운동을 할 때는 잠이 들어서는 안 되고 깨어있는게 중점이라고. 제가 지금 말한 것은 잠자는 상태에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축복, 인간 정서의 아름다운 성격과 축복의 관계, 이런 단어가 우리에게는 상투어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실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첫 번째 괴테아눔 건축은 내적인 느낌으로 이루어졌고, 그로써 올바른 동기 자체를 근거로 해서 길을 더 나아가 결국 그 길이 동기 자체가 되는 어떤 것을 해냈습니다.
26. 이제 우리가 괴테아눔을 새로 짓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방향에서 짓습니다. 비극적으로 지어진 괴테아눔은 우리가 1913년, 1914년에 건축을 시작할 수 있었던 괴테아눔과 다른 것입니다.
27. 인지학은 너무 지적이라는 비난을 자주 받아왔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지학은 그 진정한 자극에 들어있는 것을 통해서 인간성의 더 깊은 느낌으로 인도합니다.
28. 1913년에는 기쁨에 찬 마음으로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시작한다면, 거의 불가피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써 저는 다름 아니라 정신적인 사고의 내적 중심에서 나오는 묘사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 묘사는 외적 사실에서 자극을 얻는 사고와 완전히 본질적으로 구분됩니다.
29. 외적인 사실과 연결된 사고는 제가 방금 한 말을 아마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6월 15일에 우리에게 삼백여만 프랑켄이 생겼다고 기뻐하며 들뜰 것입니다.
30.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중 다수에게는 부당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가 자주 언급했습니다. 인지학 협회 내부에 제가 인지학의 중심에서 건져내서 대리하는 것에 저항하는 내적인 적이 있다고. 저는 한 가지만 질문하고 싶습니다. “괴테아눔 화재가 일어난 이래 지난 몇 달이 흐르는 동안 제가 조금 전에 명백하게 말한 그 느낌이 어디에나 있었던가? 만일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내적인 적의 한 예입니다.
31. 그것은 인지학적 운동이 현존의 세 단계를 거친 현재 사실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는 느낌입니다.
32. 화재가 일어난 후 첫날 우리가 고통에 꺾인채 여기 도르나흐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저 건너편에는 여전히 불이 훨훨 타고 있었습니다. 적잖은 회원들이 불타는 건물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이러저러한 것을 말했습니다.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사실상의 영성적 근저를 위해 언제나 증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끔찍한 불행이 일어난 후 첫날 이야기된 것이 두 가지 관점에서 구분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괴테아눔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마음 속에 짓고자 한다.” 이 말은 운동의 중심과 조금은 관계하는 기본적인 느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다른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말했습니다. “괴테아눔은 보험을 들었어. 보험금으로 다시 건축할 수 있지 않겠어?”
33.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생활의 어떤 점에서도 여러분을 비실용적이 되도록 오도할 의도는 당연히 아닙니다. 이 문제를 가능한 한 실용적으로 보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중점은 의도에 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것과 지금 어쩔수없이 건축해야 하는 것 사이에 차이를 알아보는가? 이것이 중점입니다. 왜냐하면 인지학적 영역에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이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 의향이 어떤지가 무슨 상관이래요? 괴테아눔이 다시 지어지면 되는거지.”
34. 의향, 사고내용의 자극, 특히 의식의 자극은 오늘내일만 작용하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세계의 흐름 속에서 계속 움직입니다. 단순한 외적 사실에 따라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외적인 사실은 그에 대한 증상일 뿐 직접적인 실재가 아닙니다.
35. 지금까지 저는 화재 후에 반드시 일어나야 했던 모든 것과 관련해 불가피한 사실의 영향 하에서 가능한대로 주제의 중심을 근거로 해서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첫날부터 예를 들어 보험 협상을 할 때 우리의 실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친구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저는 인지학적 운동의 핵심 자체에서 솟아나지 않는 모든 것을 가능한 한 우리 교섭에서 제외하고자 노력했습니다.
36. 그로써 제가 그 친구들에 대한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6월 15일 결과가 나빴다면, 사람들이 당연히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있는 변호사한테 일을 맡겼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거야.” 하지만 인지학적 작용의 중심에서 건져낸 고차적 의무에 관한 경우에는 그런 책임을 짊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진지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7. 그리고 구체적인 경우에 가능한 한 그 중심 내부에 서있지 않는다면, 그것을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회원들이 개별적인 질문에 있어 답을 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보면, 자신의 과제라 해도 인지학적 자극의 중심에서 퍼내서 처리할 수 없으면, 즉시 자신이 무력하다고 말합니다.
38. 저는 사실상 가장 과격한 것으로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삼백몇십만 프랑켄을 자선적 용도로 어디에 기증하고 괴테아눔은 친구들의 희생 정신을 근거로 해서 다시 짓기로 하자. 물론 우리는 오늘 이런 결정을 절대 내릴 수 없습니다.
39. 앞에 말했듯이 저는 여러분을 비실용적인 길로 오도하고자 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지만 현재 제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외적인 사실만 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점은, 의향을 형성하면서 우리 사이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말을 한번쯤은 숨김 없이, 솔직하게 모두 발설하는데 있습니다. 그런 말을 의향을 형성하는 것으로 만들면, 그러면 그 말이 고귀한 의미에서 올바른 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40.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옳지 않습니다. “그래, 삼백몇십만 프랑켄은 자선금으로 기부하고 희생 정신으로 다시 건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일어나야 할 것과 이기적이고 야심적인 의도에 부합하는 것을 다른 방향에서 혼동할 것이다. 기운과 힘은 가장 편안한 길을 선택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가장 편안한 길이 가장 이기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도덕적인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기운과 힘은 길이 아무리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해도 — 다음과 같이 표현해도 된다면, — 사람이 스스로 바로 그 비극에 빠져드는데에서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잠을 자면서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비극에 빠져야 합니다. 순수하게 인지학적인 것을 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지학적인 것이 아니라도 어쩔수없이 해야하는 것을 다른 쪽에서 훨씬 더 강한 인지학적 현존을 통해서 균형 잡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무조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울로 어떤 것을 잴 때 물건이 담긴 접시에서 어떤 것을 덜어내지 않고, 다른 쪽에 재야하는 무게의 추를 더해서 균형을 잡아줍니다.
41. 바로 이것을 우리가 필요로합니다. 우리가 비극적인 방식으로 들어서게 될 것에, 대부분은, 아마도 절반 정도는 비인지학적으로 일어나는 수밖에 없는 것에 균형을 잡기 위해 훨씬 더 강한 인지학적 현존을 통해 평형추를 만들어야 합니다. 저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아마도 제일 편할 것입니다. “보험금으로 받은 삼백몇십만 프랑켄을 모두 자선 용도로 기부하고 건축비는 다시 기부금으로 완전히 충당해야 괴테아눔 재건축을 축복할 것이다.” 이것이 저한테 고통을 덜 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 영역에서 일을 하고자 한다면, 고통을 마다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겠다고 잠이 들어서도 안 됩니다. 언제까지나 다음과 같은 말만 해서도 안 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 최상의 것을 이루겠다!” 지상 세계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특히 현시대에 그렇게 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기소침해서 “용기가 없어졌어…” 하고 말한다면, 역시 안 됩니다. 신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면, 신들이 더이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인류가 버려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들이 숨어있는 바로 그곳에서 제대로 찾아보려는 자극을 얻어야 하는게 신들의 지혜입니다. 신들이 사라졌다고, 신들이 더이상 활동하지 않는다고 슬퍼하고 불평하는 것은 신들의 지혜가 아닙니다. 지구를 포근한 침대로 여기고 싶다면, 지구가 사람이 바라는 것에 언제나 부합하는 식으로 드러날 때만 신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것은 정신적 운동의 의향을 절대로 형성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힘이 아니라 무기력이기 때문입니다.
42. 우리는 무기력으로 비극적-색채의 괴테아눔을 지어낼 수 없습니다. 신들이 은둔한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신들이 외관상 숨어있는 곳에서 비로소 제대로 찾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야만, 힘의 발달을 통해서만 그런 괴테아눔을 건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43.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괴테아눔 재건축에 대한 생각을 발달시키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행간에 표현하기는 상당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몇 마디 말 자체에 몇 가지를 끼워넣었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그렇게 했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몇 마디에 끼워넣은 것은 괴테아눔 재건축을 위해, 그리고 역시 다른 문제를 위해 앞으로 우리가 올바른 의향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경우에 정말로 필요한 것입니다. 자장가를 들으며 이러저러한 착각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실을, 이 경우에는 인지학의 도덕적인 측면에서 흘러나오는 내적인 진실을 직시하며 마주 대하는 것만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44. 만일 그것이 일어난다면, 사실상 들어서야 하는 것이 들어설 것입니다. 세계 사건 한복판에서 인지학 협회가 오늘날 사람들이 모두 빠져서 살고 있는 착각에 한번쯤은 빠지지 않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지학 협회가 현재 일어나는 많은 것에 대한 착각을 폭로할 수 있습니다. 1914년 이래 인류가 착각에 빠져 사는데, 심지어 그것을 특정 쾌락으로 즐깁니다. 진실을 고백하기에 내적으로 충분히 용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착각을 보듬고 사는 세계 한복판에서 인지학 협회가, 괴테아눔 협회가 깨어나는 영혼힘을 발달시키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가 현재 서있는 이 비극적 상황에, 절대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이 비극적 상황에 모든 진정한 비극에 박혀있는 것을 더할 것입니다.
45. 모든 시대의 비극을 연구해 보십시오. 비극은 외적인 모든 것이 무너지고 파멸을 극복해 나갈 힘은 내면 자체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보게 됩니다.
46. 비록 요즘에는 비극이 더이상 애호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많다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적잖은 사람들이 예술로 무대에 올려지는 비극을 즐겨 관람합니다. 비극이 현실에 들어서면, 제가 설명한 것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인지학 협회가, 괴테아눔 이사회가 정신적인 것을 근거로 삼아 내적으로 형성하는 의향으로 착각 위에 지어진 세계에서 일종의 섬처럼 작용하도록 만드는 어떤 것이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힘인 것이 착각 위에 지어진 세계를 비출 수 있습니다.
47.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께 불가피하게 말해야 한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면, 현재 우리가 처한 것과는 다른 상태의 많은 의도가, 많은 계획이, 많은 추구가 우리 느낌에 들어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만족으로, 특히 자기만족으로 그리 심하게 눈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충족되고 싶다는 생각, 자기만족에 대한 생각을 우리에게서 몰아내고, 주제를 순수하게 정신적으로 관조할 때 생겨날 수 있는 생각을 우리 내면에서 고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신에서 올바른 건축에 대한 생각을 건져내게 됩니다.
48. 가장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그러나 모든 객관성을 다해 바로 오늘 여러분께 이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괴테아눔의 숙명에, 과거의 괴테아눔과 어쩌면 앞으로 생겨날 괴테아눔의 숙명에 깊이 연결된 것에 관해 이렇게 말을 할 기회를 준 괴테아눔 이사진한테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최혜경 선생님 글입니다.
함께 읽어보길 권합니다.
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나누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