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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셤 메이첸 교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그리스도의_능동적순종
제49강, 635~646
지난 주일 오후,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성경적인 가르침의 개요를 말하면서, 저는 그 사역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 한 가지에 대해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합당한 값을 지불하셨음을 지적했지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다른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조금 더 진도를 나가기 전에 개요에서 그 부분을 채우고 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말씀드린 것이 그리스도가 행하신 전부라고 가정해 보지요. 즉 그분이 단지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한 형벌의 값을 지불하시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지요. 그렇다면우리가 어디에 가 있을까요? 생각 속에서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분리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죗값을 지불하셨을 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최선의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을 행위의 언약 아래 두셨던 그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행위의 언약은 유예적이었습니다. 만일 아담이 일정 기간 동안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면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었고 불순종하면 죽어야했습니다. 그는 불순종했고 죽음의 형벌이 그와 후손들에게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해 죗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전부라면 우리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어야 함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리스도가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은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에 영생을 소유함은 다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우리의 완전한 순종에 달려 있게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다시 유예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원래 아담이 처했던 상황보다 훨씬 덜 희망적인 상태에서 유예 기간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 유예 중일 때는 모든것이 아담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는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되었고 아주 선하게 창조되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타락했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이 단지 과거의 죄책을 거두어 가신 일이라면,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노력만 가지고 하나님이 완전한 순종에 선고하신 보상을 얻어야 한다면, 우리가 실패할 가능성이얼마나 더 높겠습니까? 아니 얼마나 확실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하신 일보다 덜 하셨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을지 더 나아가 상상하는 것은 그만두어야겠습니다. 사실 그분은 아담의 첫 번째 죄와 우리가 개별적으로 범한 죄의 값을 지불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받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은 형벌의 값을 치러 주신 우리의 대표이자 유예 기간을 지켜 주신 우리의 대표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죗값을 치르셨고 우리를 위하여 유예를 마치셨습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이 타락하기 전 아담보다 훨씬 축복된 상태에 있게 된 이유입니다. 타락 이전에 아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의해질 수 있는 가능성 아래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울 뿐만 아니라 불의해질 가능성도 뛰어넘었습니다. 그들의 유예는 끝났습니다. 그들이 성공적으로 잘 마쳤기 때문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순종의 상태에 약속하신 확정된 축복의 보상을 그들이 스스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여 그들을 위해 보상을 받아 주셨기에 끝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 사이의 대화를 한번 상상해 본다면 이 문제를 쉽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말합니다. "인간이여, 나의 명령들을 지켰는가?"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이 대답합니다. “나의 대표인 아담의 첫번째 죄뿐 아니라 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도 죄를 지음으로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말합니다. "죄인이여, 당신은 내가 불순종을 향해 내린 형벌의 값을 지불했는가?" 죄인들이 대답합니다. “아니요. 나는 스스로 그 값을 지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나의 대표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죗값에 관해서는 이제 깨끗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말하지요. "그렇다면 죄인이여, 확정된 축복을 위해 하나님이 선언하신 조건에서는 어떠한가? 그 시험을 이겼는가? 유예 기간 동안 영생을 위해 온전히 순종했는가?"
죄인은 말합니다. "아니요 나는 완전한 순종으로는 영생을 보상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양심을 아시는 바, 나는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순종에 의해서는 영생을 받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을 통해 저를 위해 그것을 받아 주셨습니다. 주 자신은 율법에 매여 있지 않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주인이셨으므로 자신을 위한 순종이 요구되지 않았지만 그분이 이 땅에 계신 동안 율법에 순종하신 것은 저의 대표로서 나를 위한 순종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의는 아무것도 없지만, 저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온전한 의를 입고,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적어도 그 유예기간을 마쳤고, 하나님의 진실하심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취하신 영광스러운 보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찬양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단순하지만 대담하게 기록된 이것이 모든 기독교인과 하나님의 율법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영광스럽게 이 구원을 완성하셨는지요! 그리스도는 형벌의 값을 지불하시고, 보상을 받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두 가지 일입니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구속 사역을 수동적 순종과 능동적 순종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는 데 익숙합니다. 수동적 순종에 의해서, 즉우리를 대신한 고난에 의해서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능동적 순종에 의해서, 즉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행하심으로 그분은 우리를 위한 보상을 얻어 주셨습니다.
저는 이 용어에 만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두 면을 인간의 언어로 아주 잘 드러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사역의 두 부분이 서로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수동적 순종에서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그분이 삶으로 능동적 순종을 성취하시고 죽음으로 수동적 순종을 성취하셨다고 말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땅에서의 삶 매 순간에 그리스도는 수동적인 순종을 이행하셨습니다. 그 삶 자체가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 삶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그 삶 자체가 죄의 형벌을 위한 값을 지불함이었습니다. 반면에 그분의 죽음이 수동적인 순종이지만 능동적인 순종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능동적 순종의 면류관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한 영생을얻어 내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한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진상이 보이십니까?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사역이란, 그분이 지상에 계실 때 일어난 어떤 사건은 능동적 순종이고, 어떤 사건은 수동적 순종인 것처럼 그렇게 둘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든 사건이 죄의 형벌을 치르는 값의 일부였고, 그분의 삶의 모든 사건이 백성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심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의 사역의 이 두 가지 면은 설명이 불가능하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 없이 다른 하나는 불가능했습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가 행하신 아름답고 완전한 구원의 구성 요소가 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에 관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형벌의 값을 지불하셨고 율법의 명령에 순종하셨으니까요. 그분은 우리를 지옥에서 건지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분에게 진 빚뿐 입니다.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것 말고 다른 복은 없습니다.
지금 이 말을 하면서 저의 설명이 그리 적합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 보려고 했지만 인간의 요약이 얼마나 건조하고 차가운지요. 설령 저보다 훨씬 탁월하게 요약한다고 해도 성경 자체의 따뜻함과 풍성함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 오후에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 자체로 돌아가 보자고 요청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각 부분을 다른 부분과의 합당한 관계에서 이해하도록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고자 했다면, 이제 다음 주일에는 성경의 구절들을 직접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이 스스로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알리신 것을 가지고 우리의 개요가 맞는지, 혹은 다른 개요가 맞는지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이 우리 영혼을 얼마나 상쾌하게 하는지요! 그 가르침을 요약하려는 모든 시도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더 무한히 우월한지요? 물론 그런 시도는 필요합니다. 그것들 없이는 안 됩니다. 말씀에 진실한 이들은 전정으로 그런 시도를 할 겁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만지는 것은 오직 말씀이고, 우리가 성경의 요약에서 말하는 모든 것, 아니 최고의 신학자들이 말하는 모든 것도 성경 자체에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다음 주일에 성경에 대한 탐구가 가장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오후에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해 주장된 두 가지 다른 입장을 잠깐 살펴볼 것을 권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정통적인 입장은 이미 요약을 해드렸습니다. 그 입장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이 입장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 드리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원하신다면이 입장을 혐오스러운 입장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입장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어린아이도 이를 이해하고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대속적인 입장을 거부하면서 많은 이들이 다른 입장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속죄에는 많은 이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론들이 몇 개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의 혼란스러운 다양함도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론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인간에게 도덕적인 영향만 준다는 이론입니다. 이 입장을 지지는 사람들에 의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불행히도 그의 소중한 특권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서운 자기 비하에 빠졌고, 그렇게 자기 비하에 빠짐으로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습니다. 더 이상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대로 하나님과아들 됨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지 못하는 겁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이 분리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다루는이 입장의 변호인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저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온전히 사용하라고 설득할 겁니다. 하나님편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인간의 어리석고 악한 마음에만 장애물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 장애물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입니다. 사람의 돌 같은 마음을 한 번만 만져 주어서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심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면, 마치 사람이 용서받기를 원해도하나님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 양 하나님에게 품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사람의 진정한 관계가 즉각적으로 회복될 것이며 사람은 그의 거룩한 삶에서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의 고귀한 특권을 기쁨으로 사용하며 나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혜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만질 수 있을까요? 위 입의 변호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함으로 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유일한(the)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분을 십자가 위에서 죽도록내주셨을 때, 그리고 그분이 자신을 기꺼이 죽음에 내주셨을 때, 그것은 실수하고 범죄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인간의 마음에 있는 모든 적대는 다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이 진정으로 그의 아버지이심을 깨달아야 하고, 그렇게 깨달음으로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혜택을 누리는고귀한 특권을 사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도덕적 감화론이라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정말 다양한 형태로 주장되는데,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에 의해서도 주장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했던 어떤 이들은 그 주장과 함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참된 믿음 비슷한 것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면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신이 선물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위대한 증거가 된다는 거지요. 하지만 엄밀히 속죄의 도덕적 감화론을 주장하는 거의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버렸습니다. 이들은 단지십자가의 예수가 자기희생의 위대한 본이 되었다고만 주장하며, 그렇게 본이 되심으로 우리도 그렇게 행하도록 감화하신다고 주장합니다.그래서 거룩한 목적을 위한 실제적인 순교나 혹은 자기희생을 통해 삶을 헌신하도록 감화됩니다. 우리는 삶을 희생함으로 전보다 훨씬 더고귀한 삶을 소유함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런 도덕적 수준에 이르도록 하는 길이 됩니다.
오늘날 종교에 관한 여러 대중적인 책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이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바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책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해 말하고, 심지어 어떤 책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redemptive)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이지만 우리의 고난도 구속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그들의 의미하는 것은 결국 갈보리의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희생의 길을 거룩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영혼의 더 고귀한 삶을 얻기 위해 그 길을따라갑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다루는 대부분의 현대 서적에 편만하고 핵심적인엄청난 왜곡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순히 자기희생을위한 일반적 원칙의 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구원을 말한다면 이는 단지 십자가의 길을 걸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입장에 따르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길, 즉 자기희생의 길을 걸어갈수 있도록 큰 감화를 주었지만,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행하심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셈이죠. 이는 죄인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생각이며,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도덕적 감화론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통치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통치론 역시 얼마나 이상하고 타협적이고끔찍한 것인지 모릅니다!
통치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족되어야 할 하나님의 신적성품인 영원한 공의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통치론을 말하는 이들과 도덕적 감화론을 말하는 이들이 같습니다. 하지만 통치론은 세상에서 좋은 권징(discipline)이 유지되도록 하는 데 그리스도의 죽음이 필요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죄인들에게 죄을 지어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용납된다면 죄로부터 합당하게돌이킴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죄로부터 돌이키기보다는 계속 죄를 지을 것이고, 세상은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도덕적 혼돈에 빠지는 것은 최대 다수를 위한 최선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죄로부터 돌이키고 세상이 보전되게 하고자,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보여 주려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시하셨다는 겁니다.
통치론에 따르면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은원래보다 훨씬 쉽게 구원을 제공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원래 완전한 순종에 근거해서 구원을 제공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믿음에 근거해서 구원을 제공하십니다. 이제 그것을 좀 더 쉽게 제공하실 수 있게 되었고, 본래 선언했던 형벌을 안전하게 면제시킬 수 있게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심각한 범죄이며 만일 죄를 범한다면 우주의 좋은 질서를 보전하기 위해서 무언가가 행해져야 함을 그리스도의십자가의 그 끔찍한 장면이 충분히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통치론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십니까? 결국 그 저변에있는 것은 도덕적 감화론의 한 형태에 불과합니다. 도덕적 감화론과마찬가지로, 이 이론도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에서 유일한 장애물은 인간의 의지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합니다. 도덕적 감화론과 마찬가지로, 이 이론도 그의 존재에 뿌리를 둔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가 있음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는 죄의 형벌을 요구함을 부인합니다. 도덕적 감화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함부로 대하며,덧붙이자면 도덕적 감화론과 마찬가지로 이 이론도 하나님 사랑의 참된 깊이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합니다. 인간이 만든 이론에 나타나는죄에 대한 이런 가벼운 입장을 취하는 이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저주의 나무에서 우리의 자리를 취하셨을 때 어떤 값을 치르셨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속죄 이론을 주장하든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아! 친구 여러분!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여러분은 현대 이론가들처럼 "이 얼마나 훌륭한 자기희생의 본입니까! 나도 그렇게 자기를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면 성경의 가르침대로 "그분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주셨고 내 자리에서 내가 받을 저주를 받으셨고,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나를 사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은 인간의 영혼에 임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이고 좋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 다음 주일 오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열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바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