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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0장
1. 큰 전쟁(1-9)
사람들에게는 종교적인 욕구라는 것이 있는데, 종교적인 욕구라는 것은, 자기의 종교를 통해서, 종교성을 발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기도를 할 때도, 그냥 혼자서 묵상으로 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재미가 없고, 기도한 것 같지도 않기 때문에, 멀리 기도원을 찾아가거나, 부흥회를 통해서 그러한 기도에 대한 욕구를 발산시키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의 종교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종교적인 욕구를 교회가 적당하게 발산시켜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당장 ‘교회가 재미없다, 교회가 은혜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종교적인 욕구를 적당히 채워주고, 발산시켜줄 교회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한 번 찾아온 사람들을 놓치지 않고 붙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종교 형태가 무엇인가를 연구해서, 그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교회는 커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은, 교인들에게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흥미를 통해서, 사람들을 붙들어 두려고 하는 것은, 주님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붙들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다른 사람의 성공담이나, 목회 전략이라는 것, 또는 여러 가지의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을 복음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교회 키워주는 것은 모두 복음이고,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는 결론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참된 복음은 사라지고, 거짓된 복음만이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곧 사탄이 하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커지지 않고, 재정이 늘어가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곧 주님이 아닌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모습이고, 그것이 사탄이 하는 일이 됩니다.
본문은 다니엘이 자기가 환상 중에 본 것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4-6절 “첫째 달 이십사일에,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 가에 있었는데,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순금 띠를 띠었더라. 또 그의 몸은 황옥 같고, 그의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의 눈은 횃불 같고, 그의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의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
그런데 다니엘이 본 이 분의 모습을 본 자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13-16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여기에 보면 사도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다니엘이 본 한 사람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통해서, 다니엘이 본 한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모습은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의 인자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곧 사도 요한이 본 모습은 심판주의 모습이고, 따라서 다니엘이 본 한 사람의 모습도, 심판주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니엘에게 심판주의 모습을 보이셨느냐가 궁금한 점입니다.
1절 “바사 왕 고레스 제삼년에, 한 일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다니엘에게 나타났는데, 그 일이 참되니 곧 큰 전쟁에 관한 것이라. 다니엘이 그 일을 분명히 알았고 그 환상을 깨달으니라.”
큰 전쟁이라는 것은 다니엘 8장에서, 다니엘이 환상으로 본 수양과 수염소의 전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뿔 가진 수양은 메대 바사를 가리키고, 수염소는 헬라를 가리키는데, 메대 바사가 헬라에 의해서 망하는 것을 이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다니엘은 무서워 한 것입니다.
2-3절 “그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다니엘은 자기가 속해 있는 나라가, 헬라에 의해서 멸망당한다는 것이 근심되었던 것입니다. 입맛을 다 잃어버릴 정도로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다니엘에게 심판주의 모습을 한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에게 근심하지 말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에서 당하는 일가지고 무서워하고,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일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 믿음이 없습니다. 조그만일 가지고도 세상을 다 산 것처럼, 한숨을 쉬며 걱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세상일이 다 하나님의 주관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바른 태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은 장차 주어질 나라에서 얻을, 승리가 약속된 인생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어떤 삶이 주어져도, 괜찮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남에게 져도 괜찮은 것은, 영원한 승리가 우리에게 약속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꾸 영원한 것을 제시하시는데, 우리는 기껏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시한 세상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두려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근심 걱정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세상일이란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할 필요 없이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주어진 환경과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바른 태도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내쪽에서 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쪽에서 결과를 원한다는 것은, 결국 내 욕심을 들고 나오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결과는 하나님 소관입니다. 우리는 다만 어떤 일이든, 그 일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고, 은혜를 깨달아 가기를 소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의 시시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영원히 존재하는 귀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속한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사라지고, 오직 주님께 속한 것만이 남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죄악의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담대한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권세는 주님의 권세 앞에 무너질 운명입니다. 주님 권세 외에 그 어떤 권세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평안할 것입니다. 9절에 보면 환상을 깨달은 다니엘이,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평안이 여러분의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
2. 평안하라, 강건하라(10-21)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것은, 사람이 자기 영역이라는 것을 버리지 못하면,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다니엘이 큰 전쟁이 일어난다는 일에 대해서 깨달았을 때, 그 일이 다니엘에게 근심이 되고 슬픔이 된 것은, 당시 다니엘이 바사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가 속한 바사가, 헬라라는 나라에 의해서 점령된다는 것을, 환상을 보고 깨달았을 때 두려움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이어서 한 사람에 대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모습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심판주의 모습과 같았고, 다니엘에게 심판주의 모습을 한 분이 나타난 이유는, 결국 모든 세상은 힘이 세건 약하건 상관없이, 심판주에 의해서 멸망당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전쟁은 네편 내편이 있습니다. 내편은 내가 속해있는 것은 모두 내편이 됩니다. 그리고 내편이 항상 잘되고 커지기를 바랍니다. 또 내편이 잘되기 위해서는, 다른 편을 눌러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전쟁이라고 하고 요새 말로는 경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네편 내편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 세상 편으로 구분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도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간단히 말하면 ‘세상을 누구 편으로 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물음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들이야 성도로서 당연하게, ‘하나님 편으로 살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지만, 성도가 세상을 하나님 편으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이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할 때 화를 내면서, 하나님의 역성을 들어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편으로 살고 있는지, 아니면 진짜 하나님 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말씀 드린대로 다니엘은 바사왕 고레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와 바사가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다니엘은 바사가 망할 것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니엘에게 사람의 모양을 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다니엘을 만지면서 말을 합니다.
19절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여,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하라. 강건하라. 강건하라. 그가 이같이 내게 말하매, 내가 곧 힘이 나서 이르되, 내 주께서 나를 강건하게 하셨사오니 말씀하옵소서.”
이 말씀에서 생각할 것은 평안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평안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누가 평안하라고 말했다고 해서, 평안해질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 평안이라는 것은 어떤 근심거리가 있는데, 그 근심거리가 해결됨으로 평안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근심거리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단지 그 중에서 가장 큰 문젯거리에 대한 근심 때문에, 다른 근심은 잠시 잊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어떤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근심거리로 등장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큰 근심거리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만 해결되면 평안해질 것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이라는 것은, 어떤 문제가 해결돼서 얻어지는 평안이 아닌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가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전혀 엉뚱한 문을 두드리고 있는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안이라는 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결국 평안이라는 것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안을 마음 편하게 세상을 사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람이 마음편하게 세상을 살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한평생을 근심 걱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평안은 이 땅에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자기 살기 위한 전쟁입니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살 수 있는 세상인데,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살면서 평안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길은 하나입니다. 평안이 없는 세상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안에서’라고 말합니다.
평안은 주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서는, 평안은 결단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일이 해결됐을 때 잠시 평안했다가, 또 다시 다른 근심과 걱정에 빠져드는 삶이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말은 곧 내 것을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것을 주장하는 이상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것을 주장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남의 것보다 커지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의 것보다 작은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고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평안을 위해서 나의 것이라는 사슬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자기 울타리를 포기하고, 주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평안을 얻는 길입니다.
나의 것을 끊는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것이 아니다는 것을 위해서는, 주인이 누구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내것인줄로만 알았는데, 주인이 따로 있음을 발견할 때, 우리는 내것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에는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조주의 것을 가지고 내것인양 여겼고, 그것을 내 마음대로 키우고자 애를 쓰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내 사업, 내 교회, 내 가정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업이고,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단지 맡은 자로서 열심히 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것을 남기라고 맡기지 않았습니다. 단지 맡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하실 뿐입니다.
물질적으로 성장하든 성장하지 않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가 성장하는 쪽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면,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벗어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장해야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 때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내 이름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내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해도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지시대로 살 뿐입니다. 망하게 하든 흥하게 하든,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평안이 없다는 것은, 아직까지 내것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세상의 힘을 의존하고자 합니다. 평안과 강건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에게 속한 자냐는 것을, 제대로 알 때 주어지는 현상입니다. 두려움은 내것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러나 내것을 버리면, 평안이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나라 사람으로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사에도 헬라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성도에게는 평안이요, 강건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평안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