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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허균(許筠, 1569년 ~ 161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다.
생애
강릉 출신.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惹起)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였으나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되었다.
《홍길동전》(洪吉童傳)과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는 동인이었으며 북인, 대북으로 활동하였다.
초당 허엽의 아들로, 허성의 이복제(異腹弟)이자 허봉, 허난설헌의 친제(親弟)이다.
우성전은 그의 이복 매부였다.
손곡 이달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의 사위이다.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배경
허균은 1569년(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강릉 초당동에서 군수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초당(草堂)과 둘째 부인인 강릉 김 씨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은 그의 이복형이고 우성전의 처가 그의 이복 누나이며, 후에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송응개 등과 함께 계미삼찬으로 몰려 축출된 허봉과 난설헌(蘭雪軒) 허초희가 각각 동복 형과 누나이다.
그의 부친 초당(草堂)은 사림파의 일원으로, 서경덕의 문하와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한 인물이었다.
초당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동인의 영수(領袖)가 되었던 인물로, 한때 강릉의 맑은 물로 초당 두부를 만들었다.
강릉의 물맛으로 특이한 두부를 만들어 초당 두부의 명성은 한성부까지 전래되었으나 초당은 관료로서 장사한다고 하여 탄핵받기도 했다.
부친 초당은 동인을 창당한 일원 중 한 사람으로, 후일 허균은 동인에서 분리된 북인의 일원이고 북인의 강경파인 대북의 일인으로 활동했다.
허균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초당이 상주에 있는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은 류성룡에게 배우다가, 나중에 둘째 형의 벗인 이달에게서 배웠다.
서자 출신으로 출세가 어려웠던 이달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
허균도 재취 부인의 소생으로 서자와 다름없는 형편이라서 이달의 불우(不遇)한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유년기
어릴 적부터 그의 기억력은 비상하였고, 10세 이전의 소년기 때 글을 잘 지어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면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칭찬(稱讚)하며, ‘이 아이는나중에 마땅히 문장 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추연(秋淵)만은 그 시를 보고 ‘후일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대 명사였던 추연(秋淵)이 어린아이의 시에서 ‘허씨 문중을 뒤엎을’ 그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허균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허균 자신도 ‘운명을 풀이하는 글’[解命文]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기사년(己巳年·1569, 선조 2년) 병자월(丙子月·11월) 임신일(壬申日·3일)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사주, 관상가)가 이를 보고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害)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厄)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여러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는 고(故)로 수명이 짧지 않겠고 강수가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하리라’라고 말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년에서 18년 이래 전패(顚沛)와 총욕(寵辱)이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隱然中)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5세 때부터 형 허봉의 벗인 손곡(蓀谷)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9세 때 이미 묘사를 잘하여 시를 잘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외로움을 달래려 더욱 시문 공부에 전념하였다.
첫 스승인 이달은 둘째 형의 벗으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았는데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승 서애 류성룡 후에 이달에게 시와 글을 배우다가 매부추연(秋淵)의 추천으로, 당대 대학자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글을 배웠다.
청년기
일찍 부친을 여의었으나 20세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 형 허성의 집과, 강릉의 외가를 오가며 풍족하지는 않았으나 어렵지 않은 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안동 김씨 김대섭(金大涉)의 차녀와 혼인한다.
안동 김씨 부인의 친정어머니는 청송 심씨 심전(沈銓)의 딸로, 좌의정 심통원과 영의정 심연원의 종손녀이자 인순왕후, 심의겸의 6촌 여동생이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하나 열다섯 살 때 그와 가까웠던 친형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고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한 누이 난설헌은 시댁과 불화를 겪고 자식들은 잇달아 세상을 떠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허균이 스무 살 때인 1588년(선조 21년) 허봉은 끝내 서울 땅을 밟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병사했다.
생전에 허봉은 허균에게 “온갖 일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어서 높은 재주로도 영락(零落)하여 초망(草莽)을 떠도는구나”(‘아우에게 보냄’, 편지 「하곡집(荷谷集)」을 보냈는데, 형 허봉은 곧 금강산에서 객사하고 만다.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하던 와중에 부인 안동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하고 어린 아들도 전란 중에 병사한다.
가족을 잃은 허균은 이후 집필에 몰두했는데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호 교산(蛟山)을 사용한다.
그 뒤 허균은 선산 김씨로 동인의 초대 당수인 김효원의 딸과 재혼한다.
김효원의 동생이자 후처의 숙부인 김이원은 북인의 중진이었다.
이때 그는 광해군을 수행했는데 그 공로로 후에 위성원종공신 2등에 책록된다.
허균의 저서들은 정조 이전까지 금서(禁書), 불온서적으로 지정, 언급조차 금기시되었다.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592년 당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싸운 공로로 훗날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느 전투에 출정한 공로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1593년(선조 26년) 그의 나이 25세 때 한반도 최초 시평론집인 《학산초담》을 지었고 이듬해인 1594년(선조 27년)에는 정시문과(庭試文科)의 을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 사관(史官)으로 벼슬길에 오른 후 명(明) 사신을 접견하는 접반사(接伴使)로 파견된 심희수와 형 허봉에 이어 그해 4월 접반사로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고 되돌아왔다.
그해 5월 다시 명나라 사신 접견에 파견된 원접사의 수행원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바로 설서(說書)를 지냈고 얼마 뒤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승진했다.
1597년 3월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를 하여 종3품으로 승진하였다.
중시에 합격한 관료는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陞進)이 관례였으나 그에게는 인사 불이익이 가해져 종3품 직책이 부여된다.
1598년 황해도 도사(都事)로 부임하였다.
이때 한성부에 있던 그의 애첩인 기녀가 황해도 임지로 와서 그의 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한성부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하여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98년 10월 병조정랑이 되었다.
정치 활동
임진왜란 직후 1599년 5월 다시 황해도 도사로 나갔다.
그러나 그해 12월 한성부의 기생을 데리고 간 일로 사헌부와 사간원에게 계속 탄핵받고 파직당하고 만다.
1600년 복직,
춘추관기주관(記注官)과 세자시강원의 낭관과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그해 말 장생전(長生殿) 낭청이 되어 의인왕후의 국장도감(國葬都監)과 빈전 행사에 참여하였다.
의인왕후의 국장에 참여한 공로로 1601년 5월, 특별히 가자(加資)되었다.
1601년(선조 34년) 충청·전라 지방의 세금을 걷는 전운판관으로 부임한다.
전운판관이 되었을 때는 부안의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梅窓)과 교류한다.
둘은 정신상 일에 중점을 두는 관계였다는 설과 매창이 그의 첩이었다는 설이 전한다.
후일 허균은 1609년(광해군 1년) 매창에게 쓴 편지에 “그대는 성성옹(惺惺翁)이 속세를 떠나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분명히 웃을 걸세”라고 쓴다.
매창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겠다는 약속한 사정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약속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그만큼 위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허균은 이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한다.
1601년 11월 형조정랑이 되어 내직으로 되돌아왔고 1602년초 병조정랑이 되었다.
그해 5월, 전에 세자시강원으로 있을 때 종1품 대신인 좌찬성 심희수를 시강원의 낭관인 그가 물러가라고 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지평 윤경(尹絅)에게 탄핵받고 추고당했다.
1602년 성균관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으며, 동년 명나라에서 파견되는 사신을 맞는 명사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외교관들을 상대하였다.
탄핵과 파면, 복직
이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1604년(선조 37년)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1604년(선조 37년) 7월에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같은 해 9월 수안군수(遂安郡守)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고 암행어사에게 다시 탄핵받아 벼슬에서 사퇴하였다.
1606년 4월에 원접사 유근(柳根)의 추천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에 임명되자 종사관으로 주지번을 만나 사서육경과 고전을 막힘없이 대화하며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주지번에게 그동안 보관하던 누이 난설헌의 시선집을 명 사신으로 온 주지번에게 주어 그녀의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출간된다.
1607년(선조 40년)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그해 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
1606년 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가 출간되자 조선의 문화를 명나라에 알린 공로로 특별히 삼척부사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재직 중 부청 근처의 법당에 출입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목격되어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하고 참선한다는 이유로 1607년 5월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받았다.
그러나 선조는 듣지 않다가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탄핵이 계속되자 쫓겨났다.
그해 음력 5월 6일 숭불(崇佛)했다 하여 파직되었으나 얼마 뒤 종삼품 내자시정(內資寺正)으로 임명되었다.
1607년 7월 복직하여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고 그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12월 공주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국조시산》을 편찬한다.
공주 목사로 기용되었을 때는 양반가의 서자 무리와 얼손(孽孫)들과도 호형호제하면서 가까이 터놓고 지냈고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고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1608년(선조 41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누나인 난설헌(蘭雪軒)의 시를 명나라 문인, 작가들에게 보여주었는데 문인들은 난설헌의 작품성에 찬탄(讚嘆)하여 특별히 출간하고 인쇄하는 비용을 대주기도 하였다.
그해 광해군이 재위에 오르자 대북이 집권하면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경연장에 들었다.
이듬해 1609년(광해군 1년) 행사직으로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해 형조 참의(參議)가 되고 명나라에서 국왕 책봉사(冊封使)가 왔을 때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해 명나라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베이징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그러나 귀국 후 1610년 2월 명에 파견될 천추사로 다시 연경에 다녀왔다.
그해 4월 부호군에 제수된 뒤 명나라에 다시 갈 천추사에 임명되자 병을 핑계로 여러 번 상소를 올려 거절했다.
이 일로 탄핵당하고 부호군직에서 파직되었다.
이어 사헌부에서 여러 번 그를 탄핵하였으나 광해군이 이를 듣지 않았다.
1610년 10월 전시(殿試)의 대독관(對讀官)의 한 사람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자신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사헌부에서 탄핵당하였다.
그러나 왕이 듣지 않았으나 11월 내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수십 차례 탄핵받고 42일간 의금부에 갇혀 지내다가 그해 12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咸悅)로 유배됐는데 이때 허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여론도 있었다.
1610년(광해군 2년)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에 유배됐고 유배지에 간 뒤에도 양사(兩司)를 비롯해서 재야 각처에서 그의 위리안치(圍籬安置) 등을 원하는 탄핵과 비난이 계속되었으나 그가 북인 당원인 탓에 무사하였다.
배소에서 그는 학동들을 데려다 가르치는 한편 글을 써서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한다.
『성소부부고』는 당대의 용사, 충신, 명사들에 대한 인물평이 담겨 있고 『홍길동전』은 조선 초 실존한 인물인 도적 홍길동을 동기(動機)로 하여 이상향을 표현하였다.
허균은 당시 『홍길동전』의 저자를 밝히지 않았으나 북인계 인사 유몽인이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라고 외부에 알리면서 그의 작품인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10년 5월에는 명나라의 주지번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의 내용이 화제가 되어 조정에 들기도 했다.
1612년 『홍길동전』을 완성한 뒤 바로 석방되었으며, 그 뒤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다.
1612년 12월 진주사(陳奏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3년(광해군 5년) 초 귀국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 때 진술자 명단에 언급이 되어 화를 입을 뻔했으나 그는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왔으므로 다행히도 피화(避禍)하였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 명가 출신의 서자 7명이 여주 남한강변에 토굴을 파고 무륜당(無倫堂)이라 명명하고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자칭하였다.
허균은 이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이들이 노상에서 강도 등의 행동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강도짓을 한다는 것을 관아(官衙)에 신고하지도 않았다.
이 중 박응서가 한 은상(銀商)을 살해했다가 체포되는데 북인 모사(謀士) 이이첨이 이를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을 제거하려는 ‘계축옥사’(癸丑獄事)로 확대했다.
살인강도 사건이 역모로 확대된 것이다.
칠서의 변 관련자인 서자들인 박응서, 서양갑 등은 그와 평소 친분이 있었다.
그중에는 그의 처조부 심전의 서자인 심우영 형제도 있었다.
또한 허균의 형 허봉의 친구가 이달로 서자 출신이었던 점까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건 이후 그는 동조하고 가담했다고 의심받았으나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연루(連累)된 김응벽이 “허균이 김제남의 집에 드나들며 날마다 상의했습니다”라고 자백했다고 전하는데 이덕일은 후일 '실제로 이 서자들과 친하게 지낸 허균이 큰 공포를 느낀 것은 당연했다.'고 봤다.
한편 7서로 지목된 서자들 중 심우영은 심전의 서자인데 심전의 딸이 그의 본부인(本夫人) 안동 김 씨의 친정어머니였다. 심우영은 그에게 서(庶) 처외삼촌뻘 되는 인물이었다.
작서의 고변으로 김제남과 서자들은 모두 사형됐지만 허균은 안전했는데 <광해군일기>를 보면, 사관은 이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피하려고 이이첨에게 접근한 덕분이라 한다.
그러나 대북 계열에서는 그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게 된다.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 출신의 서양갑·심우영이 처형당하자 그는 본심을 숨기고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대북당(大北黨)에 참여하였다.
1613년 12월 예조참의가 되었다.
예조참의에 임명되자 바로 사간원이 '사람됨이 경박하여 본디 행신에 검속이 없고 이단을 숭봉해서 명교(名敎)에 죄를 졌다'며 파면하고 임용하지 말 것을 건의했지만 광해군은 이를 듣지 않고 허균을 신뢰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행사직(行司直)을 거쳐 호조참의가 되었다.
1614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1614년 12월 명나라에 파견되는 천추사(千秋使)의 한 사람으로 선발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천추사로 갔을 때 조선왕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원인이 된 기록을 입수하여 1615년 1월 조선으로 보냈다.
그 뒤로도 명나라의 각처와 고서점을 다니며 진귀한 책과 유교, 불교 경전을 입수하여 조정으로 보냈고, 광해군은 그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1615년 2월에는 《학해(學海)》 《임거만록(林居漫錄)》을 조선으로 보내고, 이어 몇권의 서적을 다시 조선으로 보냈다.
1615년 2월 귀국하였으며, 2월 중순 승문원 부제조가 되었다.
그해 5월 문신들을 상대로 한 정시 문과에서 인정전이란 주제로 시를 지었는데 수석을 차지하였다.
5월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6월에는 전년도 천추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서책(書冊)을 많이 들여온 공로와 종계 변무사(辨誣事)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입수해서 보냈고 또한 명나라 세종 황제(世宗皇帝)가 친히 지은 잠(箴)과 어필(御筆)을 구해온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히 종2품으로 가자의 명이 내려졌다. 그해 6월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1615년 8월 우승지, 좌승지 등을 지내고 그해 말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다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그는 많은 베이징 체류 중 명나라 학자들과 시문으로 교류, 그의 수려한 문장력에 많은 명나라 문인들과 사귀게 됐다.
명나라 문인들과 사귀면서 그들을 통해 각종 서적을 입수, 귀국할 때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 중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1614년(광해군 6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승정원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그해에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천추사(千秋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1615년에도 문신 정시에서 1등을 하고,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으며, 다시 그 해 동지 겸 진주사가 파견될 때 동지 겸 진주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1616년(광해군 8년) 사직 제조(社稷提調)를 거쳐 자헌대부로 승진, 형조판서가 되고, 그해 역모로 몰린 인사들 중 유찬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어 파직당했으나 곧 복직했다.
그해 10월 정헌대부로 승진했다.
1616년 말 진주사(陳奏使) 민형남(閔馨男)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진주부사로 연경에 가 공빈 김씨의 추숭을 건의하고 되돌아왔다.
이듬해 1617년에는 정2품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러나 흉격 사건에 연루되어 길주에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1617년 2월 부사직(副司直)으로 강등당했고 흉격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을 해명한다.
그해 3월 아무 관련이 없음으로 드러나 문제는 종결된다.
그러나 그 뒤로도 계속 이런 저런 역모와 흉서 사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려 곤경에 처하게 된다.
몰락과 죽음
탄핵과 사형
1617년 12월 12일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가 그해 12월 26일 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기준격 등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가 역모를 꾸민다고 공격한다.
1618년 1월 기준격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했고, 1618년 1월 좌참찬이 되고 그 역시 자신이 역모와 무관하다며 해명을 한다.
결국 그해 2월 우의정 한효순 등이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이끌고 허균과 기자헌을 추국하고 문제를 종결시킬 것을 청한다.
허균도 자신을 변호하는 맞상소를 올리는데 광해군은 웬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 와중에 허균은 이이첨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이 무렵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허균의 딸은 소훈이 되어 입궐하였다.
허균에 대한 이이첨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그를 제거하기로 기도한다.
그런데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에 광해군 10년(1618) 8월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 대장군인 정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1618년 8월 남대문 격문은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고 한다.
1618년 기준격이 상소를 올려 허균이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을 계획한다고 모함하고, 허균이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허균에게는 계속 국문이 열렸고 그때마다 무수한 고문이 가해졌다.
결국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고 응하게 되고, 그의 심복들과 함께 능지처참형을 당해 생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