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의 천국/ 한정숙
당숙께서 집에 있느냐고 전화를 하셨다. 숙모가 올봄에 들에 나가 뜯은 쑥으로 떡을 했는데 몇 집이 나누어 먹는다며 나에게 전해주러 오신다는 것이다. 열흘 전 자식을 보내고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하셨을 텐데, 팔순 어른을 오시라고 하는 것이 민망하여 두 집의 중간 지점까지 마중을 나갔다.
신호등 건너편에 서 계시는 작은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야구모자에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깨끗한 운동화를 신으셨다. 손엔 조카에게 전해줄 종이가방이 들려 있다. “두 분 마음이 좀 편안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찾아뵈려고 했어요. 필요하면 저를 부르시지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이 언제 편해질까 마는 어버이날 즈음에 뵈러 가야지 했었다.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오래된 나는 어릴 적에 유난히 조카들에게 다정했던 두 분이 가까이 살고 계셔서 자주 찾고 있다.
마침 저녁 먹기 좋을 시간이어서 숙모님을 불러 함께 식사라도 하시자고 여쭈자 손사래를 치신다. 근방에서 따뜻한 차 한잔하자는 청도 마다하신다. 그래, 아직은 편한 곳에 앉는 것도 따끈한 차 한 모금 입에 넣은 것도 죄스러우리라 싶어 배웅 차 숙부님 댁 방향으로 발을 맞춰 걸었다.
“내가 왜 그리 지혜가 없었는지 모르겄어야, 그 아이가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데..., 그래서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은 약을 먹여서 재웠거든? 그런데 그날은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했단 말이지.” 같이 살고 있는 아들이 술을 마시면 발작이 일어나는데 놓쳤다는 이야기다. 밤새 고통으로 몸부림쳤을 아들은 다음 날 아침 문을 열어 확인해 보니 의식이 없었고, 서서히 맥을 놓더란다. 맞장구를 치며 애태우는 나와는 달리 덤덤하게 당시를 말씀하시던 숙부님은 내 인사를 등뒤로 무심하게 신호등을 건넜다. ‘그래도 나이가 예순이 금방인 장년인데 본인 스스로 관리를 못하였을까?’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는 없었다.
4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였다. 친정 형제 대화방에 오빠가 6촌 동생 인수가 타계하였다는 소식을 올렸다. 시간을 맞춰 함께 조문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웃어른이 가신 것도 아니고 손아래 동생의 영정을 보러 가는 길이니 아무래도 혼자 가는 것이 뻘쭘하기도 했었다. 어떤 말로도 상주들에게 위로가 안 될 테니까 말이다. 이튿날, 장례식장 가는 공원길의 철쭉은 여전히 화사했고 4월을 마감하는 햇살은 뜨거워 검정 옷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아야, 나는 무슨 죄가 이리 많을꺼나, 이것이 무슨 일인지 모르겄다. 아이들 셋을 앞세우다니 이러고도 어미라고 할 수 있을 끄나?” 맥없이 하소연하는 작은 어머니와 가족을 달래고 고인에게 인사를 한 후 작은 아버지께 그 아이의 일생을 전해 들었다.
“참, 인수는 평생 고생만 했다. 어쩌면 그런 인생이 있을까 모르겄다.” 한숨을 토하듯 이야기를 풀어내는 숙부님의 갈라진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동생이 어렸을 때 작은댁은 진도의 ㄱ면에서 살았는데 그이는 다섯 살부터 심한 아토피를 앓았다. 전라도 전역에서 약을 쓰고 병원을 다녀도 소용이 없어 서울의 큰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했는데 어린 아들의 아토피는 완전히 나은 것도 아니면서 심한 항생제 후유증으로 잔병이 그칠 날이 없었다. 온 몸은 긁어 헤집은 흉터로 보기가 딱했고, 손톱은 뭉개졌으며 표정은 늘 찡그렸다. 언젠가 나에게 “누나, 혹시 아이들이 가렵다고 긁으면 그냥 놔두세요. 장갑 끼워 묶어서 못 긁게 하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거든요. 성질도 나빠져요.” 하면서 하소연 하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아토피를 달고 지내던 동생은 고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목포에 왔는데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었다. 머리를 다쳐 목포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치료하고자 했으나 사진을 본 의사들은 큰 병원으로 가길 권했고, 다행히 전남대 병원의 권위 있는 의사선생님께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수술하신 분이 미리 예고한 후유증이 왔다. 수술 3일 후 부터 일주일 정도 머리와 온몸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아팠다가 서서히 좋아지더니 일주일에 한 번 주기로 뇌전증이 발작하는 것이다.
“인수가 그 징그런 병을 40년을 앓다가 갔다. 그 병이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데 직장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동료들 보기가 얼마나 민망했겠냐? 또 회사 사람들은 매주 그런 일을 볼 때마다 얼마나 심란했겠냐? 발작 기색이 있으면 본인 스스로 한쪽으로 가서 대처를 했겠지만 갑자기 일어날 때는 여기저기 다쳐서 얼굴이고 몸이고 흉 투성이었다.” 하시는 숙부님의 얼굴은 처연했다.
동생은 30대 후반에 외국인 신부를 맞아 결혼을 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다. 결혼식장에서나 보았겠지만 나는 그 올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아이가 어렸을 때 이혼을 하였다고 한다.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자 불교신도였던 작은댁은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참 알 수 없는 분들이라고 생각했으나, 세월이 갈수록 어떻게든 악운에서 벗어나보려고 발버둥치는 그분들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친정아버지는 사촌 동생의 부탁으로 붓으로 쓴 반야심경을 선물하였다가 개종하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을 써 주시면서 반야심경을 가져가셨다고 한다. 작은 아버지께서는 ‘불자이시고 한 때 절에서 사셨던 형님이 어떻게 시편은 찾아서 그리 써오셨는지 참 대단한 분이시다.‘고 여러 번 되 뇌이셨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었다.
숙부님은 암울한 흔적이 많은 고향을 떠나 가족을 데리고 울산에서 살다가 목포로 옮겨와 교회에 터전을 잡고 사신다. 인수의 아내가 두고 간 어린 아들은 목사님이 키우셨는데 가족의 사랑과 신앙의 힘으로 건강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다. 수산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조카손자는 지금 태평양에서 실습중이라 연락이 안 된다고 한다. 상주인데도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 또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크지는 않으나 또렷하게 전해오는 작은 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빈소에서 기도와 찬송가가 이어진다. 눈물에 젖은 목소리와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하는 몸짓도 보인다. 고인을 찾은 신도들이 요단강을 건너 천국으로 안내하는 뜨거운 사랑의 표식이다. 그 아이, 사랑만 받기에도 부족할 예쁜 나이 다섯 살부터 몸과 마음에 상처를 놓지 못하고 살았던 동생 인수의 천국은 어떤 곳일까?
두 노인 양반이 한숨과 눈물을 섞어 만든 떡 봉지를 받고 ‘부모는 자식이 어리든 나이가 들든 탈이 붙이면 본인들 업이라 생각하지.’ 하며 발길을 돌렸다. 10여 년 전 공사현장에서 큰 아들을 보내고, 5년 전엔 맏딸이 암 투병 중 세상을 뜨더니, 이번엔 차남인 인수의 가는 길을 봐야 하는 여든을 넘긴 어른들의 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래도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목숨 붙여 살고 있는 이곳이 천국일까?
빈 거실 식탁에 떡 봉지를 올려두고 멀뚱히 내려다보다가 고소하고 향이 좋은 쑥떡을 잘라 한 입 문다. 가슴이 아리고 눈이 까끌까끌하다.
첫댓글 아이고, 안타깝네요.
작은아버지댁이 이제는 평온하길 바랍니다.
늘 기도하시고 나누며 사시니 평온해지시겠지요. 내가 맞는 평범한 일상이 천국임에는 틀립없어요. 그렇지요?
세 아이를 낳아 키웠는데 왜 좋은 기억이 없겠어요? 먼저 보낸 아픔도 있겠지만 쑥을 캐고 떡을 해서 조카를 챙기는 아름다운 분들이니 떠오는 추억 매만지며 또 살아가시리라 믿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아이를 다섯 두었어요. 다행히 아들 하나, 딸 하나가 남아 있으니 감사하며 잘 살아야지요. 저도 더 자주 찾아 뵐 테이구요. 유일하게 초등학교 때 용돈을 주셨던 분이라 저에겐 더욱 귀한 분이랍니다.
@풀피리 우와. 다행이네요. 의지할 자식들이 남아 있으니 더 힘내서 살아가실 거예요.
아...
!!;;
참 가슴 아픈 이야기네요. 그런 중에도 쑥을 캐서 떡을 나눠 주시는 어르신들이 안타깝네요.
동생 분이 아픔이 없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당숙님, 숙모님에게도 위로의 은혜가 있기를 빕니다.
글쎄요. 자식을 가슴에 두고 떡을 나누다니, 참 아이러니지요?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집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게 하루를 잘 지낼 수 있는 것, 먼저 보내는 자식이 없는 것 이 모든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해 주시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식을 걱정거리라 아니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인 나이로 접어듭니다. 밥보다 하루 세번 걷기로 일용할 양식을 삼습니다. 하하, 천국에 길게 있고 싶은 모양입니다.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목포 분들 한번 봬어야 하는데, 조만간 자리 한번 마련하겠습니다. 글도 잘 읽었어요.
안부인사 받기가 부끄럽습니다. 늘 생각이 많아 움직임이 더딥니다. 하늘 보듯 글벗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원기소(하하-아시는지?) 랍니다.
동생 분 이야기가 참 가슴 아픕니다. 위로하기도 힘든 상황. 저도 4월에 갑자기 사촌 동생을 잃었는데 같은 시기였네요. '뭣이 중헌디.'에 깊이 빠져 우울했는데, 금세 또 잊어버리고 살고 있어요.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당숙님, 숙모님께서 마음이 편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천국이 있다면, 평생 아토피와 뇌전증으로 고생한 동생분이 그곳에서는 마냥 행복하기를 빕니다.
아픔 가득한 글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천국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떡을 나눠 주시는 어르신들은 참 따뜻한 분들이십니다. 더 이상 아픔과 슬픔이 없는 당숙님댁이시길요.
자식 앞세운 게 가장 큰 고통이라는데 숙부님이 그러시네요.
아토피에 뇌전증으로 고생한 동생 분이 천국에서는 평안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