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어느 날 / 양선례
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골목 어귀에서 만나는 당산나무 긴 그림자는 늘 무서웠어. 괜찮아. 나무의 영혼이 날 지켜 줄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져도 큰 위안은 되지 못했어.
친정을 떠나고서는 거긴 엄마와의 약속 장소였어. “아이, 김치 담아 놨다. 갖고 가라.” 지인들과 노느라고 약속 시간보다 늦게 갈 때가 많았어. 밤 아홉 시, 혹은 그보다 늦을 때도 있었어. 헤드라이트 불빛 따라 엄마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어. 내 차인 줄 알고 몇 발짝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어. 간혹 엄마의 허술한 옷을 타박했어. “엄마, 아무리 밤이라도 누굴 만날지도 모르는데 이런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어?” 친정에는 들르지도 않고 둥근 바퀴가 있는 이동 장바구니에 담긴 걸 트렁크에 싣기에 바빴어.
토요일에 ‘교직자 배구대회’가 있었어. 주차하고 보니 바로 그 당산나무 아래였어. 김치통을 든 엄마가 거기에 서 계셨어. 가슴에 쏴아 바람이 불었어. 고개를 들고 당산나무를 올려다봤어. 그때보다 키도 커지고 가지도 풍성했어. 느티나무 이파리에 단풍이 들었더라. 아주 오래된 고목인 줄 알았는데 안내판을 보니 이제 겨우 110년이 되었더라. 느티나무는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데, 엄마는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어.
오늘 경기가 열리는 학교는 내 모교야. 20년도 더 전에 4년간 근무한 적이 있어. 모양이 이쁜 키 작은 소나무와 두 그루의 향나무는 내가 학교 다닐 때도 있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을 끼고 있어 아름드리 우람한 고목이 많았어. 그 나무에 단풍이 들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라. 2층 교실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어. 장날이면 내기 장기를 두는 사람들의 왁자한 고함 소리와 좌판 상인의 호객 행위가 수업을 방해하긴 했지만 그곳의 4년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
학교라는 게 그래. 한번 떠나면 남의 집이야. 간혹 초등학교 교정에서 열리는 총동문회에 얼굴을 내밀기는 했지만 오늘 배구 경기장인 체육관에 들어가 본 건 처음이야. 내가 근무하던 시절에는 급식실로 쓰고 있었거든.
그땐 지금처럼 체육관이 없었어. 배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어.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운동장 한쪽에다 네트를 치고 소위 말하는 ‘마당 배구’를 했어. 모자를 쓰면 머리 위로 오는 공이 잘 안 보이니 맨머리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어. 땡볕에 얼굴이 벌겋게 익었지. 운동장 구석까지 굴러간 공을 잡아 오느라고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어. 건물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어서 얼굴 보기 어려운 교직원이 배구공 따라다니며 깔깔거렸어. 체력도 다지고 웃음꽃도 피어나니 일석이조였지. 지금은 수도가 놓인 그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
체육관 앞 주차장은 이미 만차였어. 그런데 다른 차와 달리 장애인 주차 구역에 댄 차에 창문이 활짝 열려 있더라. 운전석 옆자리에는 잘 생기고 늠름한 큰 개가, 뒷자리에는 털이 복슬복슬한 중간 크기의 귀여운 애완견이 오가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어. 윤기가 반짝반짝 흐르는 게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개가 분명했어. “어머, 개가 있네.” 무심코 한마디 했는데 큰 개가 “컹.” 하고 짖더라. 덩치만큼이나 소리도 우렁차서 깜짝 놀라고 말았어. 개한테 물린 적이 있어서 아주 작은 강아지도 무서워하거든.
우리 학교는 두 번째 경기부터 시작이야. 네 팀이 돌아가면서 시합하기에 남의 경기를 보고 공격의 방향을 가늠해 보는 것도 중요해. 첫 경기를 구경하며 상대 팀 전력을 분석했어. 연두색으로 유니폼을 맞춰 입은 팀의 전력이 조금 우세했어. 한참을 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선생님이 그러는 거야. “저 7번 선수, 오른팔이 의수인가 봐요.” 아무렴, 그러려고? 두 팔이 다 있어도 하기 어려운 게 배군데. 그런데 진짜였어. 어깨부터 오른팔 전체가 부자연스럽더라고. 주 공격수는 아니지만 오른쪽 공격수 자리에 서서 세터가 토스한 공을 치기도 하고, 왼손으로 공을 높이 띄우고 왼손으로 내리꽂는 스카이 서브도 넣더라. 또 의수 낀 팔로 강약을 조절하여 수비도 했어. 놀라웠어. 이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땀방울을 많이 흘렸을까. 계속 그녀만 쫓았어. 스카이 서브는커녕, 간간이 네트를 넘기지도 못하게 서브 실수하는 나도 있는데. 잘 만든 한 편의 작품을 보는 듯 그녀는 경이로웠어.
옆에서 함께 지켜보던 교무부장이 그러는 거야. “저 선생님, 내 동창 같아요. 어릴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어요. 초등학생 때 보고 처음 보는 거지만 얼굴도 닮았어요.” 경기가 끝나자, 인사를 나누고 온 교무가 자신의 예상이 맞다고 말했어. 이야기를 나눠 보니 초등학교는 물론, 고등학교까지 동창이더래. 광주 금남로에 있는 학생이 수천 명이 넘는 학교인데도 기억하는 건 당시만 해도 장애인의 인권 감수성이 낮을 때라서 짓궂은 남학생들이 많이 놀렸대. 그런데도 기죽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는 당당한 학생이었대. 공부도 잘하고. 아참, 앞에서 말한 개 두 마리의 주인이더래. 이제는 자신의 가족이라며 쉬는 시간에 밥을 주는 걸 보고 알았대. 차마 결혼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더라.
배구는 끝났어. 그녀는 두 번은 이겼지만 우리 팀에겐 졌어. 괜히 미안하더라. 멋진 그녀의 모습을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대학에서 특수 교육을 전공하고 우리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특수 학교 선생님이 된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어.
11월 첫 주 주말이 바쁘게 흘러갔어. 배구 대회에서 우리 팀이 몇 등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결승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어. 클럽에서 뛰는 선수가 80%나 되는 팀을 어찌 이기겠어? 여섯 경기를 뛰고 나니 급피곤이 몰려오더라. 도전은 준우승에서 멈췄지만 충분히 멋진 하루였어.
첫댓글 11월 그 어느 날이 환하게 그려집니다. 엄마 생각을 불러 일으킨 당산나무, 응원 소리에 시끌벅적 했을 경기장, 왼쪽 팔 하나로도 멋진 실력을 보여 준 선생님…. 아름다운 날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