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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65
4월14일 [부활 팔일 축제 화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bZzK3zh5hSw?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
(방송 미사 리스트)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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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단 세 명이라도>
지난 사순절 몇 군데 특강을 다니면서 든 생각입니다. 우선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을 무릅써야만 했습니다.
‘별 영양가도 없는 내 강의,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그럴듯한 이야기들을 신나게 떠드는 나를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신자들께서 별 것도 없는 내 이야기를 듣고 비웃지나 않을까?’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께서는 한 자리에서 삼천 명이나 회심시키셨다는데, 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삼천 명은 어림도 없고, 삼백 명? 아니 삼십 명?’
그러면서 이런 기도를 꼭 바쳤습니다.
“주님, 많이도 말고, 단 세 명이라도...”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있었던 베드로 사도의 설교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완고하고 콧대 높기로 소문난 이스라엘의 본산 예루살렘에서 공개적으로 설교를 펼칩니다. 설교 장소인 예루살렘에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당시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총독은 물론 왕, 고위층 관료들이 대거 몰려있는 수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 예수님께서 처형되신 곳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도들에게 있어 기억조차 하기 싫은 장소, 끔찍한 장소, 피하고 싶은 장소, 두려운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께서는 바로 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어쩌면 목숨을 걸고 시작한 설교였습니다.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심기를 엄청 불편하게 하는 일종의 도전과도 같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마치도 쌍날칼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꿰찔리듯 아팠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던지는 사자후와 같은 설교였기에 마치 유언과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을 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패가 아니냐’는 물음에 세 번씩이나 거듭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 사도였는데, 지금은 아주 담대하게, 너무도 당당히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약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겁내지도 않습니다. 자랑스럽게, 용기 백배 해서 예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 사도의 변화, 그 배경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요? 예수님 부활에 대한 생생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개별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만남을 통해 베드로 사도의 내면에서는 죽음으로부터 부활로 건너가는 강렬한 파스카 체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 사도는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제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헤로데도, 빌라도도, 최고의회도, 사악한 바리사이들도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관심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전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에게서처럼 우리 삶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나날을 보다 쇄신시키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상승하길 바랍니다.
그 결과 우리도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는 외침은 아마도 이런 신앙고백을 내포하고 있겠지요.
“그분은 구하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찾아가는 누구에게나 구원을 선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 평화와 참 위로를 건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결국 우리가 사천년 동안이나 기다려왔던 참 메시아이십니다. 이제 우리, 그 오랜 방황을 매듭지읍시다. 서둘러 그분께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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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을 만나면 다리가 된다>
오늘 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내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서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것을 확인하고 돌아간 뒤, 마리아는 여전히 무덤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사 둘이 나타나고 그다음엔 예수님께서 정원지기로 착각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버지께 가야 하니 마리아에게는 당신 제자들에게 가서 이 모든 것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직접 전하면 될 터인데 왜 마리아에게 이 일을 시키시는 것일까요?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유리조각’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일화입니다.
태수는 집을 나와 지하철에서 남의 지갑을 훔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년입니다. 그러나 가끔 남동생과 통화는 하고 지냈는데, 어느 날 남동생으로부터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도 병원 앞까지 와서는 막상 엄마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병원을 한 차례 올려다보고는 그냥 병원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태수가 지하철역으로 향할 때 한 젊은 여자가 현금인출기에서 많은 돈을 뽑아 핸드백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은 다시 매섭게 변했고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하도 계단을 내려갈 때 뒤에서 부딪히는 척을 하며 핸드백을 순식간에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어느 날 태수가 사람들의 얼굴을 째려보다가 싸움이 붙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모두 연행이 되었습니다. 태수는 결국 그들에게 합의금을 주어야만 풀려날 수 있었지만 당장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동생에게 전화했습니다.
동생은 전화를 받고 곧바로 달려왔습니다.
“이런 일로 불러서 정말 미안하다. 합의금을 마련하지 않으면 형사 입건되거든. 너 말고는 연락할 데가 없었어.”
“형은 왜 그동안 엄마에게 한 번도 오질 않았어?”
“사실은 전에 한 번 병원에 가긴 갔었어. 차마 들어갈 수 없어서 그냥 돌아왔지만. 엄마는 좀 어떠시냐?”
“놀라지마, 형. 엄마, 돌아가셨어. 장례식 끝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돼.”
“뭐? 왜 돌아가신 거야? 왜?”
“왜는 왜야? 결국은 병원비 때문에 돌아가신 거지.”
“아니, 병원비 없다고 사람을 죽게 해? 그게 병원이야?”
“워낙에 많은 수술비가 들어서 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었나 봐. 그래도 병원 측에서 많이 도와줬어. 나중엔 할 수 없이 엄마를 집으로 모셔갔지 뭐. 그러고 나서 한 달도 못 돼서 돌아가셨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죽을 줄 알면서도 그대로 내친다는 게 말이 되냐?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딨어? 이러니까 내가 세상에 정 붙이지 못하고 벌레처럼 사는 거야. 아니 그렇게 돈 구할 데가 없었냐? 내게라도 연락을 했어야지.”
“언제 형이 나한테 연락처 같은 거 가르쳐준 일 있어? 형이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해? 얼마 전 내 여자 친구가 정말 어렵게 엄마 수술비를 마련했었어. 그런데 그걸 내게 갖다 주려고 병원으로 오다가 어떤 놈한테 소매치기 당했대.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놈을 잡지도 못했어. 그놈의 소매치기만 없었어도.”
태수는 갑자기 온몸이 굳어짐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게 틀리기를 바라며 더듬더듬 물었습니다.
“그 돈 어디에서 소매치기 당했어?”
“엄마 있던 병원 바로 앞에 있는 지하도 계단에서.”
태수는 동생과 그의 여자 친구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어머니를 죽인 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한없는 후회와 죄송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된 이유가 어머니에게도 있다고 믿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화해하게 된 것입니다. 둘의 사이가 너무 멀면 중간에서 둘을 화해시켜 줄 희생이 필요합니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란 노래 제목도 있듯, 이 세상에는 이런 중재자들이 요구됩니다.
교부들은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마치 아담에게서 하와가 태어나는 장면과 같게 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것이든 이름은 태어날 때 받습니다. 예수님은 새 아담으로서 새 하와에게 ‘마리아’란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 태어나면 ‘소명’을 받습니다. 아기가 부모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이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부모가 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두 발로 걸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말을 하기 위해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면 하느님 자녀로서의 일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일이 ‘다리’가 되어주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사다리가 되어 하늘과 땅을 이어주시는 사다리입니다. 천사 둘이 그분이 뉘어져 있던 자리의 머리와 발의 위치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시는 야곱의 사다리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을 ‘왕직’이라 한다면, 당신과 제자들을 이어주는 마리아의 역할은 ‘사제직’이 됩니다. 이 사제직은 복음을 전하는 ‘예언자직’을 통해 완성됩니다.
수원교구에서 근래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신자들의 ‘선교’에 대한 의식이 개인적 신심보다 매우 낮게 나왔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신심은 선교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교의식이 없으면 개인 신심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주교님으로부터 사제로 서품을 받고 지금은 꾸르실료라는 단체의 지도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일정을 조율해야 할 때 꾸르실료와 주교님 사이에서 중개를 해 주어야 하는 역할도 있습니다. 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임명을 받았으면 그 자리에서 다리 역할을 해 주어야만 하는 소명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재키 로빈슨’은 미국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야구 선수였습니다. 수많은 인종 차별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느 날 로빈슨이 브루클린 구장에서 경기할 때, 쉬운 볼을 놓치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많은 사람, 특히 백인 관중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그에게 야유를 보내고 욕을 해댔습니다. 그때 백인 선수인 리즈가 로빈슨에게 다가가서 그를 끌어안고 청중을 쳐다보았습니다. 갑자기 관중석이 조용해졌습니다. 나중에 로빈슨은 그의 어깨를 감싸준 동료의 팔이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 주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예수님은 아버지와 마리아를, 마리아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와 비신자들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선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누구나 다 다리가 되기 때문에, 다리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DvhiN7XV8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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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20,11-18 : 누구를 찾고 있느냐?
무덤을 본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다. 마리아가 혼자 무덤에 남아 울고 있다. 그것은 그분께 대한 사랑이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이 무덤을 떠난 뒤에도 그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리아는 그분을 사방으로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마리아가 이미 들여다 본 무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것은 이러한 사랑이었다. 사랑의 힘이 배가된 그 갈망은 어떠한 결과로 나타났는가?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의 머리맡과 발치에 있는 천사들을 만난다.
천사들은 “여인아, 왜 우느냐?”하고 묻는다.(13절)마리아가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을 시켜 당신의 신비를 알려주신다.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이것은 울 일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마리아는 크게 기뻐해야할 일을 슬픈 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일은 아가에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네.”(아가 3,1)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13절)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고 한다. 아마 천사들은 마리아의 뒤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천사들의 시선을 보고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을 안 마리아는 뒤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15절)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15절)고 하였다. 마리아의 눈은 닫혀 있어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마리아야!”(16절) 하고 이름을 부르신다. 처음에는 여인이라고 부르시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셨다. ‘너를 알아보는 이를 알아보아라.’는 말씀이다. 마리아는 즉시“라뿌니!”(16절) 즉 ‘스승님’으로 알아본다. 그분은 마리아가 지금까지 찾고 있던 분인 동시에 마리아가 당신을 찾도록 내적으로 인도하신 분이었다. 마리아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17절)고 말씀하신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17절)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이 모든 지체로 만들어지신 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분, 죽음 이후에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 건너가심의 첫 열매를 당신 안에 지니고 계신 인간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우리가 하늘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결국 그분이 계시는 곳에 그분의 삶들도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 주시면서 두려움을 없애 주신다.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하였다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살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는 삶으로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 부활절의 삶이 이렇게 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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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성서못자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복된 하느님의 애인’이라 불리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네 복음사가는 모두 주님 부활 이야기의 첫 장면과 그 중심에 등장시킵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모 성인은 이처럼 부활의 첫 증인인 그를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대 선택된 여인이여, 사랑 가득한 선택자여!”
무덤 밖에 선 채로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적막한 이른 아침에, 비록 돌아가셨을지라도 곁에 있고 싶어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존경을 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도 슬픈데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그 실망과 허탈감이 끝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 뒤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잇달아 큰일이 닥치면 넋을 잃고 하염없이 울다가 끝내 실신까지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마리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한처음에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을 만들어 이름을 주셨고, 사람에게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눈물이 주님 부활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눈물 대신 응답해야 합니다. “라뿌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이에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부활의 신비는 사랑의 관계로 거듭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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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루카 24,17)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루카 24,19-2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침통한 심정’이 된 것은, 예수님에게 ‘큰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가 ‘너무 큰 실망’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라는 말은, “우리는 그분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분은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사람들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믿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두 제자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으니 너무 허망하게 되어버렸습니다. (두 제자는 자기들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즉 그들은 메시아가 아닌 사람을 메시아로 잘못 믿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메시아께서 왜 그런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돌아가셔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 꼭 그런 방식으로 하셨어야 했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있더라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파스카의 신비’라고 부릅니다. (‘신비’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5-27)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구약성경에 있는 메시아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과, 그 수난의 의미와 이유 등을 설명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 뒤에 부활이 있음도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어린양으로) 바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에 대한 설명이고, “왜 꼭 그런 방식이어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두 제자가 예수님에게서 들은 설명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떻든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서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깨달았고, 실망감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는 두 제자의 마음이 열렸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에는 눈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의 마음과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님의 인도로 그들이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직후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 또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초월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어도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라는 말은, 그들이 어떤 감동에 사로잡혔음을 뜻합니다. 그 감동을 ‘영적 은혜의 충만함’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자기 눈에 예수님의 모습이 안 보여도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고, 그 믿음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미사 전례 중에, 또는 기도 중에, 또는 성경 묵상 중에, 또는 사랑 실천을 통해서,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살아계신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 가운데에, 또는 우리 곁에 존재하십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만난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루카 24,35)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엠마오 사이의 길을 상징으로 생각한다면, ‘엠마오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에게서 떠나가는 길이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다 보면 중간에 십자가를 만나기도 하겠지만, 끝까지 잘 걸어가면 부활과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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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산사람을 산 사람 안에 찾아야한다.>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전하였다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산사람 안에 살고 계시며 산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지난 일에 너무나 신경을 쓰며 애착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주님이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례를 치르게 하라하셨습니다.
지난 일에 마음을 빼있기고 과거에 매여달린 사람은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희망을 잃은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돌아가신 주님만 생각하고 울기만 하지 말고 살아 계신 주님을 찾아 기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어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끝장이 난 것 같이 절망 속에 사는 사람보다 모든 것을 툭 떨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느님이 하느님으로 돌아가시어 우리를 하느님을 살게 하시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에게 올라가신 분은 바로 알파와 오메가이신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근본적 삶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과의 긴밀한 친교의 삶입니다. 산 사람 안에 분명이 현존하시는 주님은 만나고 알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어제 많은 사람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엠마우스를 다녀왔습니다, 저도 아빠스님과 함께 길을 떠나면서 우리는 이미 주님을 만나고 함께 가고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길을 떠나 그래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안동에 식사를 위하여 식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 기쁨을 나누었는데 안동교구 주교님이 계셨습니다.
삭사 끝에 계산 하려니 주인이 주교님이 우리식사대 까지 계산하시고 떠나셨다고 하기에 이렇게 주님을 만나게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수도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주님은 어디나 계시고 나 자신이 주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결심하면서 어디서나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서 기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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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문화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를 통해서 인류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를 보여 주었습니다. 상상력, 신뢰, 신화는 인류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코로나19를 대하는 방법과 해결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두 가지의 대처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중국식 방법입니다. 전제주의적인 방법입니다. 강압적으로 봉쇄하고,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국가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주민은 그 통제를 따르는 방법입니다. 효율적이었고, 지금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고 있으며, 진정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체제이기에 가능한 방법입니다. 모든 나라가 이런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인격과 개인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독점한 정권은 권력의 독재에 저항하고, 불의에 항의하는 사람에게도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한국식 방법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한국식 방법의 특징은 투명성과 정보의 공개입니다. 유증상자 뿐만 아니라, 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선제적인 검사를 하였습니다. 이는 체계적인 의료 지원과 신속한 인터넷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바이러스의 전파는 확진자의 격리와 치료를 통해서 막을 수 있습니다. 성숙한 시민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불편하지만 마스크를 착용하고, 정부의 정책을 신뢰하는 겁니다. 신속한 검사로 인해 비용이 증가하고, 확진자가 다수 발생했지만 바이러스의 전파를 지연시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모든 정보를 공개하면서 시민들의 불안을 덜어 주었습니다. 한국의 투명성과 공개는 바이러스를 대하는 정책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처럼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은 인류의 생명, 경제,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두 가지의 해결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입니다. 입국을 제한하고, 국경을 폐쇄하고, 지역을 봉쇄하는 겁니다. 이는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는데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여권도 없고, 국경도 없고, 지역도 없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을 때는 제한과 폐쇄와 봉쇄로는 막기 어렵습니다. 국가와 국가의 이동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과 공포로 인한 심리적인 위축도 크지만, 경제적인 손실이 막대합니다. 세계경제 역시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도생은 이미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부상조(相扶相助)’입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지역으로 의료진과 물품을 지원하는 겁니다. 가난한 나라의 공공의료 시설을 지원하는 겁니다. 폐쇄하고 봉쇄하고 제한하는 대신에 파견하고 도와주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감염병이 발생한 다음에 대책을 세우기보다는 감염병이 생기는 원인을 미연에 방지하는 겁니다. 마스크, 방호복, 약품을 함께 나누는 겁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이러스의 확산과 전파는 강 건너 불구경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정보의 공유와 투명한 공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몸에 함께 살아야 하는 지체입니다. 연대와 협력만이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있습니다. 지키기 힘든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첫 번째는 하루의 시작과 마침을 기도로 하는 겁니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잠시 기도를 한다면 하루가 은총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면 우리는 집안의 문을 잘 잠그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을 악의 세력이 들어오지 못하게 잘 잠그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에게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그날 신자가 된 사람은 삼천 명이 넘었습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를 따르는 삶이었다면 진실과 정의를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욕망과 교만을 따르는 삶이었다면 비움과 겸손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웃과 나누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매일 신선한 공기를 받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준다면, 우리가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즐겨했던 오락, 취미, 만남이 뒤로 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와 선교 그리고 나눔의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이제 내 삶의 우선순위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살도록 결심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끊어 버릴 수 있다면, 주님 부활의 의미를, 주님 부활의 기쁨을 보다 진실 되게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주님의 영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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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활>
요한 20,11-18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다)
그때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부활>
제 목숨보다 소중했던
사랑하는 이를 빼앗기고
그의 주검마저 찾을 수 없는
짓밟히고 버림받은 착한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는 영원히 살아있고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다시는 그를 빼앗을 수 없다
제 목숨보다 소중했던
사랑하는 이를 빼앗기면서
그저 피눈물 삼킬 뿐
저항이라고는 함께 죽는 것밖에
할 수 없던 힘없는 이들의
여전히 뜨거운 심장 안에
사랑하는 이는 영원히 불을 지른다
제 목숨보다 소중했던
사랑하는 이를 빼앗기고
불러도 소용없는 그 이름을 향한
타들어 가는 목소리마저 금지당한
서러운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때로 부드럽게 때론 격렬하게
사랑하는 이가 늘 그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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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때, 집이 이사 가서 다니던 학교를 옮겨야만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바뀐 환경은 너무나 어색했고 누구와도 어울리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셨는지, 담임선생님께서는 늘 관심을 써주셨고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선생님 덕에 학교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 많은 친구도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하는 날, 펑펑 울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만날 수 없는데도, 헤어짐 그 자체가 너무나 슬펐던 것 같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명연이는 산수와 과학을 잘하니까 커서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야.” 이 말씀을 들은 뒤, 제게 제일 자신 있는 과목은 산수와 과학이 되었습니다. 좋아하던 선생님이 인정해주신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생님 말씀처럼 과학자가 아니라 이렇게 신부가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 뒤로 선생님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얼굴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길에서 마주쳐도 선생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벌써 40년도 더 지난 일이었지만, 기억나는 것은 선생님의 목소리입니다. 제게 힘을 주셨던 목소리, 따뜻한 손길이 중년에 들어선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무덤 안을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사랑을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 다시 한번 무덤 안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사랑하기에 무덤까지 찾아간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으로는 에수님의 부활을 알아보는 눈이 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때문이었습니다. 착한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처럼 사랑으로 가득 찬 마리아는 비록 의심의 마음 때문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라뿌니"(스승님)라고 외치게 됩니다. 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이 지금 “짠~~”하고 직접 나타나셔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죄로 얼룩지어져 있고, 일상 안에서 많은 의심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마리아처럼 “라뿌니”라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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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마비 걸릴 일>
실제로 일어난 황당한 이야기라는 제목을 가진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글쎄 장례식 도중에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가 관뚜껑을 열고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기뻐해야 할 상황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 어머니의 딸이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 어머니는 다시 살아나서 기뻤을까요? 아니면 자신으로 인해 딸이 죽었다고 괴로워했을까요?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의 부활 사건도 깜짝 놀라 심장마비에 걸릴 일이 아니었을까요? 더군다나 제자들은 주님을 모른다고 부정했고, 자기도 죽을지 몰라 무서워 다락방에 숨어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께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심장마비 걸리지 않도록 배려하십니다. 조금씩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배려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나의 이웃에게 어떤 배려를 하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만 받는 배려가 아니라, 내가 베푸는 배려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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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여정>
-사랑, 만남, 회개-
통상적으로 부활대축일 다음날 월요일은 엠마오 산보날이라 칭하며 파공입니다. 코로나로 엠마오 산보는 생략됬지만 오랜만에 예약된 병원진료차 외출했습니다. 수도원 배밭의 배꽃들이 만개滿開하여 참 황홀한 주님 부활 축제를 연상케 했습니다.
마침 배꽃을 구경하러 온 낯선 자매 세분도 만나 고백성사를 요청하기에 예수 부활상 아래서 성사도 드리고 함께 사진도 찍었습니다. 참 순박한 신심을 지닌 착한 자매님들이었습니다.
“오늘 만남은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보속은 제가 예수님 부활상 아래서 함께 찍은 사진을 전송해드리니 이 사진을 보며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오늘을 사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선하고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었습니다. 여러 지인知人들에게도 불암산 배경의 배꽃 만발한 배밭을 주님 부활 선물로 전송했습니다.
“만개한 배꽃들, 주님 부활 축제 선물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행복중의 행복이, 영원한 생명의 행복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선거운동원들의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끝까지 간절해야 한다”, “끝까지 겸손해야 한다.”, 어디 선거뿐입니까? 사랑도 똑같습니다. 끝까지 간절한 사랑, 겸손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이 있어 주님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간절한 사랑으로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막달레나의 사랑에 감동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먼저 막달레나에게 접근하십니다. 이어지는 두분의 만남의 장면이 참으로 살아있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말합니다. 그순간 막달레나의 사랑에 감격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부르시자,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스승님!)” 하고 부릅니다.-
참 의미심장합니다. 영혼과 영혼의, 사랑과 사랑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정원안에 있었고,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정원이 상징하는바 에덴 동산의 정원지기임이 맞습니다. 명실공히 에덴동산의 정원지기가 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정확히 맞춘 막달레나입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평소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였기에 착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막달레나입니다.
돌아서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회개의 순간, 막달레나도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불안과 두려움에서 평화로 부활했습니다. 바로 이런 회개는 이렇게 긍정적인 ‘전환(conversion)’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가능케 하는 회개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부활한 막달레나는 옛 막달레나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오른 마리아 막달레나요, 사랑, 만남, 회개의 일련의 과정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이제 내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날로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사랑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영원한 생명의 실현입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믿는 이들의 영원한 롤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살아 계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의 여정에 회개의 사랑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고 다음 베드로의 답변은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여정과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세례성사는 이미 받았으니, 평생성사이자 일상성사인 성체성사와 고백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끊임없이 성령의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에 이은 참 좋은 선물이 성령입니다. 사랑의 성령이 끊임없는 회개를 가능하게 하고 우리를 참으로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형제가 되어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주신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늘 하느님 곁에 영광스럽게 되신 분이십니다. 이제 붙잡지 않아도 늘 당신의 형제들인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곁에 초월超越해 계시고 동시에 우리와 함께 내재內在해 계시면서 공동체 일치의 중심이 되어 주시고, 중재라로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깊이 해 주시는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에 우리의 주님이자 스승이며 친구이자 형제이신 주님과의 우정友情과 우애友愛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사랑-만남-회개’의 일련의 영적 삶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파스카의 예수님과 우정의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개함으로 성령 선물을 받아 날마다 새롭게 파스카의 삶을 살게 된 복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고백하시며 하루를 시작하기시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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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 많이 사랑합시다>
우리는 너무도 큰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을 보고는 ‘넋이 나갔다.’ 또는 ‘혼이 나갔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이른 아침 무덤을 찾아왔는데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너무도 놀라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추수 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빈 무덤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꽉 차있으니 다른 어떤 것도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하나봅니다. 자기 안에 갇히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넋이 나갔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직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20,16)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부활에 때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리아는 “라뿌니!”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고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은총을 입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직접 보여주기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분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20,17)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사명을 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님의 하느님이 곧 나의 하느님이시니 나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20,18)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듯이 우리도 그 아들과 딸로서 주님을 전해야 할 소명을 일깨워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뵙고 전하였듯이 우리도 더욱 간절한 사랑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리아가 절망의 어둠 속에 '서서 울던' 사람에서 제자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되었듯이 우리도 복음의 선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분을 만날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사랑이 주님께로부터 나오지 않고서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지 않고는 부활하신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많이 사랑합시다.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합시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이사55,6)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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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1)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랑을 감지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요한 20,11)
마리아를 따라 무덤에 달려왔던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이내 "다시 집으로 돌아"(요한 20,10)갑니다. 지금 무덤가에는 다시 마리아만 홀로 남아 있지요.
그녀의 울음은 깊은 상실감을 드러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이 첫 번째 상실이었다면, 시신마저 사라진 빈 무덤으로 재차 처절한 상실감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덤가를 쉽게 떠나지 못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들이 확인 차원에서 무덤에 왔다면 마리아는 사랑의 차원에서 왔기에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실 귀한 것을 잃은 이는 그 현장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미련과 기대가 존재 대신 그 자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요한 20,13)
저의 주님! 마리아는 예수님을 스스럼없이 "저의 주님"이라 부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은 뜨겁고 각별하지요. 예수님은 모든 이의 주님이신 동시에 그분과 인격적으로 사랑 관계를 맺은 모든 개인들 각자의 님이십니다. 우리의 주님이기도 하시고 나의 주님이기도 하신 주님과의 관계는 보편성과 개별성을 동시에 지닙니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요한 20,15)
진정으로 사랑하니까 이미 영혼의 자취를 벗은 시신이라 하더라도 힘껏 예를 갖추고 싶은 겁니다. 새벽 아직 어두울 때 향료를 챙겨 집을 나섰던 그녀는 한시라도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 돌보아 드리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녀는 사랑하기에 차지하려 합니다. 욕정과 탐욕에서가 아니라 진정 그분을 위하고픈 마음에서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계속됩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사도 2,37)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유다인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메시아이심을 역설하자 그들이 마음의 통증을 느낍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완고하고 냉담했던 그들이 마음에 아픔을 느낄 만큼 변한 것입니다. 사실 마음을 바꾸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지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마음이 길을 묻습니다. 여태까지 고수해 온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귀와 마음이 깨우쳐 주었습니다. 이제라도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꿰찔리듯 아픈 마음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나 의무에서가 아니라 마음이 회개를 촉구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와 "세례"의 처방을 내리면서, "용서"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 장담합니다. 베드로의 "간곡한 타이름"을 받아들인 이들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지요.
사랑하는 벗님! 사랑이 일보다 마음의 영역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이 머리보다 마음에서 차오를 때 진정으로 믿게 됩니다. 마음이 답을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길을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도 마음이, 사랑이 시키는 대로 무덤가에 머물렀다가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벗님에게도 마음으로 더 깊이 사랑하고 마음으로 더 충실히 믿는 부활 축제의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성전도 제사도 번제물도 없던 유배 시기에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지켜내려 마음을 다했던 이스라엘 예언자들처럼, 우리도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부활을 경축합시다. 홀로이나 영 안에서 함께 바치는 우리의 기도를 주님은 즐겨 받으실 것입니다. 따로이나 연대 안에 결속된 우리의 사랑도 그분을 흡족하게 해드릴 겁니다. 그때 우리도 마리아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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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답은 본인이 찾아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2,37)
많은 사람들이 저같은 사람에게 묻습니다.
"신부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실 저도 어떻게 해야 할 지답을 못 찾을 때가 많은데 다른 사람의 문제에 명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수도자요 성직자라고 뭔가 답이 있겠지 하고 물어오면 참으로 난감합니다.
사실 답은 본인이 찾아야 합니다. 저는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는 다른 길을 제안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사도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회개하시고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앵~ 그런 원론적인 답 말고 구체적인 해결책 말이예요!!"
사실 사도들이 답을 찾는 방법론을 제시한 겁니다. 회개하라! 이 말은 당신이 생각해 온 것과 반대되는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회개는 내 중심의 생각에서 너 중심의 생각으로, 세상 중심의 사고에서 하느님 중심의 사고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보통 자기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서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해법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것은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사고로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답을 찾지 못하였다는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나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이기적인 사고의 잘못을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이제 스스로정답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아무도, 하느님도 정답을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다. 다만 그 길을 가르쳐 줄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고백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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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사랑은 언제나 기적을 믿는다.
마르코와 루카는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이른 아침 무덤으로 갔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분께 드릴 마지막 향료로 향기 좋은 기름을 직접 만들었다. 예수께 대한 여인들의 사랑은 그분의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의 시신을 붙잡았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기적을 믿는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여성은 그것을 몸으로 체험한다. 여인들은 예수의 시신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을 만났다. 예수는 살아 계신다. 이렇듯 여인들의 사랑은 헛되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사랑하시는 분께로 향하고 있다. ‘바보적인 사랑이 기적을 만든다.’
- <부활의 기쁨 100배 맛보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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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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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부활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 마리아의 사랑이야기 2탄입니다. 사랑의 장소는 동산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 처음 준비되고 이루어진 곳도 동산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산에서 사랑으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 또 다시 동산에서 사랑으로 부활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에덴동산을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소명을 주십니다.
두 제자는 이미 돌아갔건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차마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울다”의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큰소리로 통곡하여 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곧 사랑이 그만큼 컸던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무덤을 들여다보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두 천사를 봅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습니다.”(요한 20,12)
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해줍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낯선 이’로 다가와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라야, 그분의 그분을 알아보고 ‘눈이 열리어’(루카 24,31) 기쁨으로 전환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알고 계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이집트에서 불러내듯, 동굴에서 불러내듯 나를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는 당신이 더 이상 육신의 손으로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손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만지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자신이 모르는 낮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죽지 않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결국, 부활은 다름 아닌 사랑의 승리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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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주님!
이제는 당신을 놓게 하소서!
붙들고 있는 것은 제 마음일 뿐, 당신은 붙들 수도 붙들려지지도 않으시는 분!
제가 붙들면 속박이 되지만 당신이 붙드시면 자유이오니,
제가 붙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제가 만들어 놓은 제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신 당신께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은 멈춤이 없사오니, 사랑하는 일에 붙들리어 멈춤이 없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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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내가 체험한 주님>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
주위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드디어
빛이나는 날입니다.
용기있는 여인
늘 사랑하고 갈망했기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기쁨.
세상의 행복과 기쁨이 아무리 크다 해도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사는 행복과
기쁨에 비하면 모래알보다 더 작습니다.
"내가 체험한 주님이 계셔 나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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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요한 20, 16)
부활은
강렬하고
사랑은
뜨겁습니다.
사랑으로
공명되는
부활의 맑은
감동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알 턱이
없는 사랑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사랑한
사람의
것입니다.
저마다의
역사를 안고
우리는 부활을
뜨겁게 체험합니다.
뜨거운 울음과
깊어진 슬픔까지
쓸어 담으시는
주님의 따뜻한
부활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기억하시는
사랑이 있습니다.
죽음까지 뛰어넘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은 뜨거운
기다림과 간절한
기도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고 가며
주고 받는
사랑이 부활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떠나보내는
이별도 부활의
사랑임을
믿습니다.
부활의 언어는
짧고 간결합니다.
처음부터
소중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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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웃들의 부활>
떠난 이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우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가장 진실 된 사랑의 눈물로 가장 아픈 사랑을 이 시간 처절히 고백합니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아픈 것입니다. 너무나 소중했기에 무너져 내려도 다 타들어 가도 결코 포기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야!"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함께 닦아줄 이웃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함께 울어줄 이웃들의 부활입니다. 남겨진 아픔을 이제 우리가 나누어야합니다. 아픈 이들이 맘껏 아픔을 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합니다.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눈물은 왜곡되어서는 안됩니다. 눈물을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 떠났다고 생각한 날에 사랑은 부활처럼 다시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라뿌니!"
사랑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분명 사랑했던 날들은 선물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아프게 떠난 이들을 우리가 사랑해야할 날들이 부활만큼 주어졌습니다.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소중한 빈자리 우리의 사랑을 보태는 사랑의 부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사랑 때문에 웁니다. 사랑을 찾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이 고백이 "우리가 사랑을 뵈었습니다."라는 강렬한 부활고백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웃들의 사랑이 부활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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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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