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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대학의 "釋格物致知"
間嘗竊取程子之意하여 以補之하니 曰 所謂致知在格物者는 言 欲致吾之知인댄 在卽物而窮其理也라 蓋人心之靈이 莫不有知요 而天下之物이 莫不有理언마는 惟於理에 有未窮이라 故로 其知有不盡也니 是以로 大學始敎에 必使學者로 卽凡天下之物하여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하여 以求至乎其極하나니 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이면 則衆物之表裏精粗가 無不到하고 而吾心之全體大用이 無不明矣리니 此謂物格이며 此謂知之至也니라.
근간에 내 일찍이 정자(程子)의 뜻을 속으로 취하여 빠진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이른바 지식을 지극히 함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는 것은, 나의 지식을 지극히 하고자 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인심(人心)의 영특함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은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건마는 오직 이치에 대하여 궁구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앎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大學)에서 처음 가르칠 때에 반드시 배우는 이들이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미 알고 있는 이치로 인하여 더욱 궁구해서 그 극(極)에 이름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 아침에 활연(豁然)히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표리(表裏)와 정조(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요, 내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격물(格物)>이라 이르며, 이것을 지지지(知之至)라 이른다.”
(나) 전경의 [제생1장43절]
상제께서 전주 이 치안의 집에 「고견 원려 왈지(高見遠慮曰智)」의 글을 써 놓으셨도다.
智者 與天地同 有春夏秋冬之氣 每事 任意用之 謂之智慧勇力
大智 與天地同 有春夏秋冬之氣
其次 與日月同 有弦望晦朔之理
又其次 與鬼神同 有吉凶禍福之道
萬事起於陰 以布陽 先察陰晦 以觀陽明 每事先觀始發處
陰起事而陽明 陽起事而陰匿 要須先察陰陽 陰陽則水火而已
日用事物起居動靜 在於耳目口鼻聰明道理 耳屬水 目屬火 明白然後萬事可知
水生於火 火生於水 金生於木 木生於金 其用可知然後 方可謂神人也
陰殺陽生 陽殺陰生 生殺之道 在於陰陽 人可用陰陽然後 方可謂人生也
人爲陽 神爲陰 陰陽相合然後 有變化之道也
不測變化之術 都在於神明 感通神明然後 事其事則謂之大仁大義也
事有決斷然後 有變化之道也
春夏秋冬秋爲義 義則決斷也
六用三德 三德則天德地德人德也 統合謂之大德也
德義有生殺之權 生殺則陰陽 知此兩端而已
天用地用 人用之 調理綱紀 統制乾坤 此之謂造化手段也
理雖高 出於太極无極之表 不離乎日用事物之間
年月日時分刻輪廻 皆是元亨利貞天地之道也
天地之用 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而已
養則收藏處 藏則出用處 觀其收藏出用之物 以致出也
人而用之之道 捨此而何以也
入而養中 出而形外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自然心自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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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를 보여드림으로써 (가) 의 글과 (나)의 글이 성격이 같은 글임을 이야기했었다. 2개의 글이 같은 성격의 글이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은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가 두 개의 글에 똑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글의 성격에 관해 대강을 알고나면 관점이 바뀐다.
이 비슷한 글이 또 있다
(1) 비슷한 글
오직 우리 대순진리회는 성(誠)ㆍ경(敬)ㆍ신(信) 삼법언(三法言)으로 수도(修道)의 요체를 삼고 안심(安心)ㆍ안신(安身) 이율령(二律令)으로 수행(修行)의 훈전(訓典)을 삼는다. 또한, 삼강오륜을 근본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국법을 준수하여 사회도덕을 준행하며,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인간 본래의 청정한 본질로 환원토록 수심연성(修心煉性), 세기연질(洗氣煉質)한다. 이를 바탕으로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대순진리를 면이수지(勉而修之)하고 성지우성(誠之又誠)하여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를 정각(正覺)하게 된다. 그래서 일단 활연관통(豁然貫通)하면 삼계를 밝게 들여다보고 삼라만상의 세세한 부분을 모두 이해함에 무소불능(無所不能)하게 되니, 이것이 영통(靈通)이며 도통(道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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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같은 성격의 글인지는 이제 독자분들도 알 수 있다.
"一旦豁然貫通焉" 이라는 글자가 눈에 보이면 누구나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교운1장32절] 상제께서 김 경학의 집에 대학교를 정하시고 “학교는 이 학교가 크니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였으니 천한 사람에게 먼저 교를 전하리라” 하시고 경학을 시켜 무당 여섯 명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의 관건을 벗기고 각자 앞에 청수를 떠 놓고 그것을 향하여 사배를 하게 하고 시천주 세 번을 제각기 따라 읽게 하셨도다. 이것을 끝내고 그들의 이름을 물은 다음에 각자로 하여금 청수를 마시게 하니 이것이 곧 복록이로다. 이것이 해원시대에 접어들어 맨 먼저 천한 사람들에게 교를 전하신 것이었도다.
[예시1장46절] 상제께서 하루는 “천지 대팔문(天地大八門) 일월 대어명(日月大御命) 금수 대도술(禽獸大道術) 인간 대적선(人間大積善) 시호 시호 귀신 세계(時乎時乎鬼神世界)”라 써서 신 경수의 집에 함께 살고 있는 공우(公又)를 주어 경수의 집 벽에 붙이게 하시고 가라사대 “경수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정하노니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장점만 취하고 혹 단점이 보일지라도 잘 용서하여 미워하지 말라” 하셨도다. 이때에 또 형렬(亨烈)에게 가라사대 “법(法)이란 것은 서울로부터 비롯하여 만방(萬方)에 펼쳐 나가는 것이므로 서울 경(京) 자 이름 가진 사람의 기운을 써야 할지로다. 그러므로 경수(京洙)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경학(京學)의 집에 대학교를, 경원(京元)의 집에 복록소(福祿所)를 각각 정하노라”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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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되면 성사께서 정하신 "대학교" 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大綱(대강) 을 알고나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일은 없다. 그래야 사천에서 비행기를 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 대학교를 정하다
"대학교를 정하다" 를 다시 쓰면 이렇게 된다.
"대학교를 定하다"
수도인들이 이 "定" 이라는 글자를 쉬운 글자로 보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영통이나 도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단 예문 하나를 보자.
신(信)
한마음을 정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僻)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經過)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가 있어 정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期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또 다른 예문은 "담마 주우" 님의 답글 속에도 있다.
현무경 20면에
宙宇詠歌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
宙宇壽命
至氣今至願爲大降
天地誠敬信二十面
虛靈符(反書體)
武夷九曲(符圖中)
그리고 이 定 은 아주 유명한 글 속에 들어가 있다.
(2) 대학 우경일장
大學之道在明明德在新民在止於至善知止而后有定定而後能靜靜而后能安安而后能慮慮而后能得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欲治其國者先齊其家欲齊其家者先修其身欲修其身者先正其心欲正其心者先誠其意欲誠其意者先致其知致知在格物物格而后知至知至而后意誠意誠而后心正心正而后身修身修而后家齊家齊而后國治國治而后天下平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修身爲本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
대학의 도는 (목표가)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고[新民], 지극한 선에 머무르는 데[止於至善] 있다. 머물 줄 안[知止] 후에야 (목표를) 정립할[定] 수 있고, 정립한 후에야 평정할[靜] 수 있고, 평정한 후에야 안정할[安] 수 있고, 안정한 후에야 사려할[慮] 수 있고, 사려한 후에야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得] 수 있다. 사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그 선후를 가릴 줄 안다면 곧 도에 가깝다. 옛날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려는[明明德於天下] 자는 우선 자기 나라를 다스렸고[治國],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는 우선 자기 가정을 다스렸고[齊家], 가정을 다스리려는 자는 우선 자기를 닦았고[修身], 자기를 닦으려는 자는 우선 마음을 바르게 했고[正心],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우선 뜻을 참되게 했고[誠意], 뜻을 참되게 하려는 자는 우선 올바른 앎에 도달했다[致知]. 올바른 앎에의 도달은 격물(格物)에 달려 있다[致知在格物].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끝까지 따지고 파고들어 궁극에 도달하면(격물을 하면) 그 연후에 올바른 앎에 이르고[物格而後知至], 앎에 도래한 연후에 뜻이 참되어지고, 뜻이 참되어진 연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연후에 수신이 되고, 수신이 된 연후에 가정이 다스려지고, 가정이 다스려진 연후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연후에 천하가 태평해진다.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 같이 수신(修身)이 근본이다. 근본[本]이 바르지 못한 데 말(末)이 잘된 경우란 없다. 중시해야 할 것을 경시하고 경시해야 할 것을 중시하고서 잘된 경우란 아직 없었다. 이러한 이해가 바로 근본을 ‘아는 것[知本]’이고, 바로 ‘올바른 앎이 이르렀다[知之至]’는 말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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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定" 이라는 단어에 관해 모르면 그 끝자락에 해당되는 慮 와 得 을 할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넘어갔으면 싶다.
그리고 이 慮 는 "高見遠慮曰智" 에서도 사용되고 있어서 智 를 설명하는 4개의 글자 중 하나라는 것도 머리 속에 넣어두면 좋다.
(3) (表裏 와) 精粗
(가) 대학의 "釋格物致知"
間嘗竊取程子之意하여 以補之하니 曰 所謂致知在格物者는 言 欲致吾之知인댄 在卽物而窮其理也라 蓋人心之靈이 莫不有知요 而天下之物이 莫不有理언마는 惟於理에 有未窮이라 故로 其知有不盡也니 是以로 大學始敎에 必使學者로 卽凡天下之物하여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하여 以求至乎其極하나니 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이면 則衆物之表裏精粗가 無不到하고 而吾心之全體大用이 無不明矣리니 此謂物格이며 此謂知之至也니라.
근간에 내 일찍이 정자(程子)의 뜻을 속으로 취하여 빠진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이른바 지식을 지극히 함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는 것은, 나의 지식을 지극히 하고자 한다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인심(人心)의 영특함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은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건마는 오직 이치에 대하여 궁구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앎이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大學)에서 처음 가르칠 때에 반드시 배우는 이들이 모든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서 그 이미 알고 있는 이치로 인하여 더욱 궁구해서 그 극(極)에 이름을 구하지 않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힘쓰기를 오래해서 하루 아침에 활연(豁然)히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표리(表裏)와 정조(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을 것이요, 내 마음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을 <격물(格物)>이라 이르며, 이것을 지지지(知之至)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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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 글은 "致知在格物" 로부터 시작해서 "此謂物格이며 此謂知之至也" 로 끝난다. 즉, 대학의 8조목의 선후를 이야기하는 문장에서 반환점인 "致知-格物" 과 "物格-知至"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성사께서는 자신의 글에서 "致知-格物" 부분을 이야기할 때 入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物格-知至" 부분을 이야기할 때는 "出"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글을 써가는 방식은 粗 하다고 볼 수 있다. 가끔은 精 한 방식을 채택하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표리관계만 이야기하면 될 것 같다.
이 관계의 예는 성사의 글 속에 있다.
(4) 表裏 (와 精粗)
理雖高 出於太極无極之表 不離乎日用事物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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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雖高 出於太極无極之表" 는 理 는 "太極无極" 의 表(=겉)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太極无極" 은 理 의 속(=裏)이다. >>
결국 理 를 알고 싶은 자, 그 속까지 들어가서 太極无極 을 만져보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 같은 성격의 글을 모아놓고 명상에 젖어들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때는 해석글에 집착하다보면 삼천포로 빠질 수 있으니 원문만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가)
間嘗竊取程子之意하여 以補之하니 曰 所謂致知在格物者는 言 欲致吾之知인댄 在卽物而窮其理也라 蓋人心之靈이 莫不有知요 而天下之物이 莫不有理언마는 惟於理에 有未窮이라 故로 其知有不盡也니 是以로 大學始敎에 必使學者로 卽凡天下之物하여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하여 以求至乎其極하나니 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이면 則衆物之表裏精粗가 無不到하고 而吾心之全體大用이 無不明矣리니 此謂物格이며 此謂知之至也니라.
(나)
상제께서 전주 이 치안의 집에 「고견 원려 왈지(高見遠慮曰智)」의 글을 써 놓으셨도다.
智者 與天地同 有春夏秋冬之氣 每事 任意用之 謂之智慧勇力
大智 與天地同 有春夏秋冬之氣
其次 與日月同 有弦望晦朔之理
又其次 與鬼神同 有吉凶禍福之道
萬事起於陰 以布陽 先察陰晦 以觀陽明 每事先觀始發處
陰起事而陽明 陽起事而陰匿 要須先察陰陽 陰陽則水火而已
日用事物起居動靜 在於耳目口鼻聰明道理 耳屬水 目屬火 明白然後萬事可知
水生於火 火生於水 金生於木 木生於金 其用可知然後 方可謂神人也
陰殺陽生 陽殺陰生 生殺之道 在於陰陽 人可用陰陽然後 方可謂人生也
人爲陽 神爲陰 陰陽相合然後 有變化之道也
不測變化之術 都在於神明 感通神明然後 事其事則謂之大仁大義也
事有決斷然後 有變化之道也
春夏秋冬秋爲義 義則決斷也
六用三德 三德則天德地德人德也 統合謂之大德也
德義有生殺之權 生殺則陰陽 知此兩端而已
天用地用 人用之 調理綱紀 統制乾坤 此之謂造化手段也
理雖高 出於太極无極之表 不離乎日用事物之間
年月日時分刻輪廻 皆是元亨利貞天地之道也
天地之用 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而已
養則收藏處 藏則出用處 觀其收藏出用之物 以致出也
人而用之之道 捨此而何以也
入而養中 出而形外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自然心自開也
(다)
오직 우리 대순진리회는 성(誠)ㆍ경(敬)ㆍ신(信) 삼법언(三法言)으로 수도(修道)의 요체를 삼고 안심(安心)ㆍ안신(安身) 이율령(二律令)으로 수행(修行)의 훈전(訓典)을 삼는다. 또한, 삼강오륜을 근본으로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국법을 준수하여 사회도덕을 준행하며, 무자기(無自欺)를 근본으로 인간 본래의 청정한 본질로 환원토록 수심연성(修心煉性), 세기연질(洗氣煉質)한다. 이를 바탕으로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대순진리를 면이수지(勉而修之)하고 성지우성(誠之又誠)하여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를 정각(正覺)하게 된다. 그래서 일단 활연관통(豁然貫通)하면 삼계를 밝게 들여다보고 삼라만상의 세세한 부분을 모두 이해함에 무소불능(無所不能)하게 되니, 이것이 영통(靈通)이며 도통(道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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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sSAwefjdK4
성사께서 "高見遠慮曰智" 의 글을 (李)致安 의 집에 써놓으셨다는 이야기를 미처 못했다.
安心 과 安身 을 하고 싶다면, 필히 "高見遠慮" 를 得해야 한다. 그 전까지는 언제든지 不安 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
(=언제든지 시험에 들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없다. 명덕관음도 있고 관성제군도 있으니까...다만 中道 만 걸으면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jMx16nkE3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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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粗에 관련해 알고 싶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님이 한참 인용하고 해설하는 듯 했던 서전서문의 '惟精惟一' '精一執中' 에서 이미 精一을, 즉 精을 알아보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질문, 즉 의문을 떠넘기지 말고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실제 해보면 그 방법(담마) 밖에 없습니다.
이걸 이른바 '무지의 지'라고 합니다.
다른 분들과 달리 님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기의 대다수 분들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성사께선 '공부'라고 한 것입니다.
공부해서 실력을 쌓아 도통할 자격을 얻으려 하지 않고, 도통이라는 권력을 얻으려 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자격에는 인간성이 관련됩니다.
인간성이 갖춰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다른 방식이 있다고 여기면 지금의 방식을 계속하겠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