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오를 부르심 / 카라바죠 작, (1599-1600), 캔버스유화, 322x340 cm, 로마 콘타렐리 경당
<명품 도자기로 재탄생한 세리 마태오>
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점점 자신의 지난 삶을 뿌듯하게 여기고 대견스런 눈으로 바라봐야 좋은데, 현실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시절의 보송보송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세파에 시달리고 찌든 얼굴이 보기도 싫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것도 없어 서글프고 한심하기도 합니다. 정신적, 영적으로라도 일취월장해서 내적인 자유를 누렸으면 좋으련만 내면은 더 척박해지고 여유도 없습니다.
이런 모습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 있습니다. ‘금가고 깨져 물이 줄줄 새는 낡은 항아리.’
사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하느님 앞에 깨진 항아리 같은 존재입니다. 세월이 준 상처로 여기 저기 금이 가서 물이 줄줄 새는 항아리입니다.
돌아보니 젊은 시절에는 피정 하루만 잘해도 ‘백만 볼트 에너지’가 충전되었습니다. 크게 뉘우치고 의기충전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약발이 잘 먹혀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피정을 해도, 열심히 기도를 해도, 이것저것 추구해 봐도 도대체가 충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뭔가를 지속적으로 채워도 채워도 그 갈증이 충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고민한 결과 금방 답이 나왔습니다. 나는 금가고 깨진 물 항아리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나를 채워도 워낙 금가고 깨진 곳이 많다보니 금방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 있습니다. 깨진 항아리인 나, 채워도 채워도 금방 물이 새어나가는 나, 그럼 어떡할 것인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느님께는 항아리가 깨졌던지 안 깨졌던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안 깨진 항아리보다 깨진 항아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분입니다.
인정할 것은 화끈하게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깨진 항아리인데도 불구하고 안 깨진 항아리인양 자신을 포장하고 살려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하느님께 나아갈 때는 거짓된 나, 포장된 나가 필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 상처입고, 금가고, 물이 줄줄 새는 나의 모습 그대로 하느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많이 깨졌으니, 이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연못에 우리 항아리를 풍덩 담구는 일입니다. 더 이상 물이 샐 일도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억지로 물을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사실 세리 마태오는 깨진 항아리 중에서도 완전 깨진 항아리, 산산조각 나서 다시 추스를 수도 없는 항아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마태오의 조각난 인생을 하나하나 손에 드시고 당신 사랑의 접착제로 그의 인생을 재탄생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 사랑의 손길로 다시 태어난 마태오는 남아있는 인생을 명품 도자기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연민 따뜻함으로 우리 각자의 항아리에 난 상처들이 메꿔지고 치유되는 그런 장소입니다. 무조건적인 환대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치유가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살아가는 한 어쩔 수 없이 깨진 항아리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그분의 관대하심과 선하심을 희망하는 일입니다.
내가 비록 깨진 항아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는 소중한 항아리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기 위해 오셨습니다.
“네가 비록 금가고 깨졌지만 그래도 나에게 너는 소중하다. 너는 가치 있다. 너는 사랑스럽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2013. 7. 5. 금)(마태 9,9-13)
<모두가 똑같은 사람>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그가 세리여서가 아니라 제자로 삼을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실 때 그들의 직업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그가 세리였는데도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편견이고 선입관일 뿐입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즉시 일어나서 따랐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0-11)"
'세리와 죄인'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세리 같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사람들을 구별도, 차별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식사 초대에만 응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의 식사 초대도 받아들이셨고(루카 14,1),
나병 환자의 식사 초대도 받아들이셨습니다(마태 26,6).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면 안 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
그들과 같은 죄인이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2-13)"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입니다.
'의사가 필요한 병든 이'는 '모든 사람'입니다.
누가 건강한 사람이고, 누가 병든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에서
'자비' 라는 말은,
여기서는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실천하는 사랑'을 뜻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돕고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베푸는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풀면 그만큼 받게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나는 베푸는 사람, 저 사람은 받기만 하는 사람'
이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 자체가 교만죄입니다.
진정한 의인은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을 하신 사람입니다.
그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도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진짜 의인은
자기 입으로 '나는 의인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자기가 의인인 줄도 모르고),
또 진짜 의인은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예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 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표현은 예수님께서 죄인만 사랑하신 분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도' 사랑하신 분입니다.
죄인도 사랑하신다는 말은
의인과 죄인을 구별(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리도 사랑하시고, 바리사이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못난 사람도, 잘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 똑같이 사랑받는 '한 사람'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누구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누구는 안 받아들인다는 것,
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 신뢰 가는 의사 >
‘노숙인들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요셉병원 원장 선우경식 박사가 오랜 암투병 끝에 쓰러져 강남성모병원에서 18일 오전 4시 별세했다. 향년 63세.
선우 원장은 지난 2005년 위암 판정을 받은 뒤 3년간에 걸쳐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받아왔으며 잠시 호전돼 진료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병세가 다시 악화하면서 뇌사상태에 빠져 서울 가톨릭대 강남성모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4반세기 동안 무료 의료봉사를 펼쳤던 선우 박사는 ‘극빈자들의 아버지, 영등포 슈바이처’로 불렸다. 1969년 가톨릭의대를 졸업한 선우 원장은 73년 미국으로 건너가 킹스브룩 주이스 메디컬센터에서 3년간 선진 의학을 배웠고 당시 미국의 저명한 병원들로부터 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모두 뿌리치고 귀국했다. 이후 83년 한남대학교 의과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무료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해 운명을 달리하기까지 쉬지 않고 나눔과 봉사의 삶을 살아왔다.
87년 8월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요셉의원을 개원한 이후 영세민,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알코올 중독자 등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이들로부터 ‘슈바이처’라고 칭송받았다. 97년에는 요셉의원을 영등포역 뒤편에 위치한 일명 ‘쪽방촌’으로 옮겨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까지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빈민 42만여 명이 요셉병원을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던 선우 박사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봉사활동을 해왔다. 선우 박사는 시동이 자주 꺼지는 낡은 차를 몰고 다녔으며 주위에서 새 차를 사준다고 해도 “그 돈으로 의약품을 사달라”고 거부할 정도로 봉사에 헌신했다. 선우 박사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았던 몇몇 노숙자들은 재활을 거쳐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도 했다.
선우 박사의 빈소를 찾은 임모(47)씨는 “선우박사는 나를 치료해준 의사가 아니라 나에게 새 삶을 찾게 해준 아버지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약속을 어기고 또 술을 마시고 돌아와도 항상 그 자리에서 나를 받아줬던 덕분에 지금은 일을 하고 어엿한 가장이 될 수 있었다”고 선우 박사를 회상했다.
[발췌: ‘노숙인의 슈바이처 선우경식’ 청진기 내려놓다, 한국일보 이대혁 기자 2008/04/19]
두어 달 전에 축구를 하다가 무릎 연골이 이상해서 사진을 찍어봤더니 연골이 손상되어 다음 주에 수술을 하기로 했습니다. MRI란 것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저는 제 무릎이 어떤 상태인지 모릅니다. 그저 의사가 수술하자니 수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동하다가 다친 무릎만 전문으로 하는 병원이 제가 가는 병원 근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들이 다 거기 와서 수술을 한다는 것입니다. 갈등이 생겼습니다.
귀찮은 것도 있고 또 가톨릭 병원이라 그냥 그 교수님께 수술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조금 안심시킨 것은 그 교수님의 태도였습니다. 농담을 하시는 것입니다.
“뭐 잘 안 되면 그냥 그렇게 사셔야죠. 허허허”
긴장한 사람은 농담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농담에서도 경륜이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으로라도 저를 수술하게 될 의사에게 신뢰를 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도 고 선우경식 선생님은 얼마나 믿음이 가는 분이셨습니까? 전혀 치료를 빌미로 돈을 벌지 않는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그분께 편한 마음으로 자신을 맡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예수님을 보십시오.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로 마태오를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마태오에게 그만큼 믿고 따라도 될 분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세리를 제자로 둔 스승에게 어떠한 비판이 오는지도 잘 아시고 계셨습니다. 역시나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실 때 바리사이들이 불평을 터뜨립니다. 그 때 예수님이 어떠한 시선으로 마태오를 부르고 계셨는지 알려주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예수님은 의사로서 마태오를 부르고 계셨던 것이고, 보통 의사가 아니라 한 마디면 무엇이든지 따를 신뢰가 가는 의사로서 한 죄인을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왕에게 아주 충성스러운 의사가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의사를 시기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 의사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왕이 마시는 컵에 그 의사가 독약을 넣을 것이라는 거짓 편지를 써서 왕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왕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 편지를 읽어주면서 자신이 의사를 믿고 있다는 표시로 컵에 들어 있는 물을 단숨에 마셨습니다. 의사에 대한 알렉산더 왕의 믿음은 순수하고 전폭적이었습니다. 왕도 대단하지만 왕에게 그만한 신뢰를 주었던 의사도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세상에 나가서 모든 이를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도 신뢰받는 의사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장 가난한 곳으로 가서 목숨을 바치신 이태석 신부님을 보십시오. 그들이 어찌 이태석 신부님께 편한 마음으로 자신들을 맡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나의 이익만 챙기는 그런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나를 신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의 이익이 아닌 당신을 위해서 지금이라도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줍시다. 그래야 한 마디만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를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로 삼으시는 마태오는 세리입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백성에게 경멸받았습니다. 이들은 식민 통치를 하는 로마인들의 하수인으로 세금을 거두어 수수료를 챙길 뿐 아니라, 직무상의 권한을 자주 남용하여 부정한 이득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동족을 통치하는 로마 제국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가운데 조국의 불행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이들은 백성이 보기에 한마디로 매국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도 금지되었고, 불결한 짐승이나 부정한 물건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또 어떠한 경우에도 증인으로 설 수 없었으며, 강도나 살인자와 같은 부류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니 죄인 중의 죄인인 세리 마태오를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로 삼으시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를 선발하는 기준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는지’를 제자의 선발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 사람이 얼마나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가 선발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곧, 자신이 죄인이며 그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분께 철저히 매달리지 않으면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식 없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로서 여러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습니까? 정작 우리가 지녀야 할 점은 계명을 잘 지키는 재량보다도, 예수님께 철저히 매달리는 겸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