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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간의 차별
약 2:1-9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약 2:1-9 / [차별 대우를 하지 말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부자는 친절하게 대하고, 가난한 사람은 얕잡아 본다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가령 여러분의 교회에 값비싼 옷을 두르고 손에 값진 금반지를 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다고 합시다.) 3 그때 여러분이 부자에게는 야단스럽게 떠받들어 교회의 특별석에 앉히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마룻 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결국 여러분은 나쁜 동기에 이끌려 재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택해서 믿음이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선물인 하늘나라를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6) 그런데 여러분은 그 두 사람 가운데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였습니다. 여러분을 구박하고 재판정에 끌고 가는 자는 모두 부자들이라는 것을 잊었습니까? 7) 또 여러분이 받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이름을 비웃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8) `네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듯이 ㄱ) 네 이웃을 사랑하고 도와주라'고 하신 주님의 명을 여러분이 지키고 있다면 참으로 훌륭한 일이겠지요. (ㄱ. 레19:18) 9) 그러나 부자들에게만 친절히 하고 아첨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는 각 개인의 내면화된 차별 관념이 집단 이익에 편승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1) 교회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형제들의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형제란 사랑 안에서 자발적으로 서로 동등한 형제 대우를 행하는 관계입니다. 지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관이 작용하는 구별된 곳입니다. 호칭에 ‘영광의 주’를 덧붙인 것은 주님이 영광으로 나타날 때 지상의 가치나 권위, 모든 것들은 다 의미를 잃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자매와 가족 개념으로 동등하게 대해야 합니다. 차별의 가치관이 작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2-7) 당시 부자가 교회에 오면 좋은 자리를 주고 가난한 사람이 오면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차별이 아니라 자연적 발생적인 차별입니다. 과거 그리스도 밖에서 가졌던 차별 가치관이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대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차별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8-9) 또한 이런 행위는 결국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최고의 법을 어기어 율법의 범법자가 된 것이라고 책망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는 말씀처럼 온전한 속죄의 은혜를 영원히 주셨습니다.
적용: 당신에게는 차별 같은 세속 가치들 중 어떤 것들이 남아 작용하는지 낱낱이 기록해 보세요. 그리고 그것이 교회에 어떤 악영향을 주었는지 숙고해 보세요.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볏’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의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닭의 사명은 자기 벼슬 자랑이 아니고 알을 낳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귀족은 의무를 진다’, 또는“먼저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주변의 약자를 배려하고 자선을 베풀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노블레스’(특권/명예)는 있어도 ‘오블리주’(책임/의무)는 없는 어지러운 상황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빛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이끌어갈 귀족 등불입니다.
< 설 교 >
최고의 법을 지키는 사람들
약 2:1-9 / 성흥모 목사
오늘 읽은 말씀 중에 8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8)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8) 같은 말씀인데, 최고의 법이라고 하였고, 으뜸가는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이 계명은 최고의 법입니다. 그리고 으뜸가는 법입니다. ‘최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바실리코스’라고 하여 “왕의”, “왕에게 속한”, “최고”, “으뜸”이라는 말입니다. 최상이라는 말이요, 왕이 수여하고, 왕적인 위엄을 지니는 법이라는 말입니다. 이 법은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 주신, 최고의 법이요, 으뜸가는 법이요, 반드시 행해야 하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있습니다. 계명이라고 하면 구약의 십계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율법을 요약하고 또 요약하면서 가장 핵심적인 명령으로 정리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계명이 있다면 십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 계명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요13:34-35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강론하시면서 다시 한 번 사랑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요15:12에서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주신 계명이요, 새 계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는데, 당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는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13:1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말, 영어로는 ‘LOVE’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 Lubere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Lubere’라는 말은 기뻐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를 얼마나 기뻐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면 큰 사랑입니다. 기쁨, 이것이 사랑의 척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사랑’이라는 말이 더 좋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애틋이 여기며 위하여 생각해주는 마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양주동박사는 사랑이라는 말은 본래 사량이라는 말이었는데, 발음하기 좋고 쉽게 ‘사랑’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思) 생각할 사, 량(量-헤아릴 량) 생각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각해주고 헤아려주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하면, 정말 좋은 정의입니다.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시고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십니까? 그의 입장에 서서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의 동생 야고보 선생님이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보실 때에도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어디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교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 다이아 반지를 끼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옵니다. 오늘에는 다 좋은 옷을 입고, 들어오시고, 다 부자요, 다 환영받고, 존경받으실 분들입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예배당 앞에 서 있다가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였습니다. 조금 있다 보니 남루한 옷차림의 가난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당신은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요, 성도들이 행할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고 판단하고 옷차림이 남루하다고 무시하면 그곳이 어디 교회입니까? 이것이 예수님이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예전에는 우리 한국교회에도 지게를 지는 지게꾼이 그 지게를 교회 앞마당에 받쳐놓고 예배드리려고 들어옵니다. 옷이 남루합니다. 옷은 땀에 젖어 냄새납니다. 그런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에 오실 때에, 여러 분이 가지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눈이 부시게 오라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깨끗한 옷을 입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옆 앉으시는 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담배를 피우시는 분이 계시면 주일 날 아침에 반드시 샤워하시고 손을 따뜻한 물에 오랫동안 담그시고 비누로 여러 번 씻으시고, 담배 냄새를 제거하고 오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담배 연기가 옷에 절어 있고, 몸에도 깊이 배어 있으면 옆에 앉아 한 시간 예배드려야 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성도로서의 예절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성도들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면 먼저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서 바로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들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스럽게 보이는 사람이 있고,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눈이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의 눈이 바로 되지 못하여, 사람을 차별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스럽게 보고, 어떤 사람은 사랑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에게 이기적인 사랑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풀어주신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기에 이런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 가마니를 쏟아 부어도 한 되도 건지지 못할 거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을 사랑하면 다음에 내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야, 나는 한 되만큼 주었어도 얼마 후에 한 가마니가 되어 돌아올 것 같으니, 사랑하는 척 하는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얄팍한 사랑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가진 사랑의 현주소입니다.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도이신 요한은 사랑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요한 사도의 별명이 “주의 사랑하는 사도”였습니다. 제롬이라는 교부가 전해주는 요한의 일화가 있습니다. 요한은 100세를 살았는데 그가 매우 늙었을 때에 에베소교회에서는 청년들이 노 사도를 의자에 앉힌 채 강단에 올려드리면 “소자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말씀을 언제나 반복하시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제자들과 교부들이 “사도여, 왜 언제나 같은 말씀만 반복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이시다. 그리고 너희가 이것만 행하면 족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의 가장 첫 열매이며,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입니다. 갈5:22-23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열매는 첫 열매가 열려야 두 번째 세 번째 열매가 뒤따라 열리는 법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사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자기가 받은 은사가 가장 좋은 은사라고 자랑하고 시기 질투하면서 소란하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은사를 받았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전12:31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고전13장에서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입니다.
우리 한국고아의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사람입니다. 홀트 양자회의 ‘해리 홀트’라는 분입니다. 해리 홀트씨(1905-1964. 4. 28)는 1905년 미국 사우스다코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오레곤 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회복된 후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1955년 6·25전쟁으로 고통 받는 한국의 어린이에 대한 영화를 보고 한국의 전쟁고아 8명을 입양하여 기독교정신으로 양육하여, 사회사업가, 의사, 교수 등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956년 한국 고아들의 해외입양을 위해 대한구세군 본영 안에 사무실을 개설하고 주로 미국으로 입양을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경기도 고양에 일산원이라는 고아원과 완다학교를 세우고 고아들을 위해 죽기까지 헌신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40년 동안 6만 6000여 명을 해외로 입양시킨 공로를 인정하여, 1995년 그의 부인 ‘버다 홀트’ 여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습니다. 해리 홀트의 묘지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공원묘지에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이었고, 존경하였으면 외국인에게 훈장을 수여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파송된 서구의 여러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는 유일하게 일본사람이 묻혀 있습니다. 그는 소다 가이지와 그의 부인 우에노 다끼입니다.
일본인으로 사회사업가이신 소다 가이지(會田 嘉伊知)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지겐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서울의 우리 동리인 후암동에 가마구라(謙倉) 고아원을 1913년에 창설하였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고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1945년 8. 15 해방될 때까지 운영하면서 고아를 돌아보고 길러내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고아들을 위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쳤습니다. 그가 해방과 더불어 고국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고아원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심하다가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님이시라면 고아들을 잘 돌아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님에게 맡기고 일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1948년에 서울보린원으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습니다. 6.25가 일어나므로 모든 고아들이 흩어졌다가 “영락보린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쟁고아들을 많이 수용하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소다씨가 한국의 고아들을 위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가 청일전쟁 후에 대만에 와서 독일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때에 과로와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있었는데, 그를 조선인 청년이 근처 여관이 데려다 눕히고 여관비까지 부담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로 조선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서울,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어 교사로 취직하였고, 월남 이상재선생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우에노 다끼와 결혼하면서 철저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배신자라는 욕을 먹으면서 한일합방을 반대하고 항의하였습니다. 그가 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남산감리교회를 설립하였고, 고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스파이라는 욕을 먹고, 일본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말을 들으면서 32년 간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1,300명의 고아들을 먹이고 공부시켰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일본 사람이 순수한 기독교정신, 사랑을 가지고 고아를 돌아본 것입니다. 소다씨는 한국을 위하여 살다가 죽겠다고 하나님 앞에 서약하였는데, 그가 죽기 전에 1961년에 영락보린원으로 와서 고아들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1962년 3월 28일에 9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사회장으로 장례를 거행하였고, 그의 유해는 마포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아닌데, 우리 사회장으로 국회의사당 마당에서 장례를 지내고, 우리 정부에서 가장 기쁜 마음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그의 묘비는 크지 않습니다. 묘비 전면에는 “會田嘉以知先生之墓”라고 쓰여 있고, 옆면에 “언 손 풀어주고 쓰린 가슴을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는가 마음 둔 곳 기어늘”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한국을 고향을 생각하며 살아갔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1절을 보시 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의 주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차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말은 설명하지 않다고 잘 아십니다. 차별이라는 말은 ‘차이가 있게 구별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공평하지 못한 대우를 말할 때 차별대우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되었습니다. 5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고, 믿음을 주셨고 부요하게 하셨으며,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니 다 같은 상속자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더 좋은 집에 들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든지, 부유한 사람이든지 가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야고보 선생님은 다시 한 예를 들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고 묻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5-16)라고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2:17에서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 얼마나” 이지은씨가 노래하고 설경옥씨가 작사, 작곡하신 “그 사랑 얼마나”라는 가사는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그 사랑 얼마나 "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감격하고 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았기에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나가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면서 주님이 주신 최고의 법을 이루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공평과 긍휼
약 2:1-13 / 곽창대 목사
오늘 본문의 핵심단어는 ‘경건’입니다. 이 ‘경건’의 헬라어 원어는 종교가 요구하는 의식과 규범을 따르는 생활을 뜻하는데 그냥 종교생활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종교생활에서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신을 섬기는 것이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건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와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신앙생활이 경건입니다.
이렇게 정의한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일반생활과 구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일반생활의 기초로 보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건강하면 일반생활도 건실해집니다. 역으로도 성립됩니다. 일반생활이 난잡하면 신앙생활도 잘 못하고 있다고 보면 정확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두 종류의 경건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헛된 경건과 참된 경건입니다. 가짜 경건과 진짜 경건입니다.
다 닳아버린 건전지도 겉모양은 새 건전지처럼 멀쩡합니다. 그러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가짜 경건이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이 텅 비어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가짜 경건은 주변과 이웃에게 큰 해를 입히기까지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까지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런 자들과 동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런데 사람은 가짜 경건과 진짜 경건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짜 경건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뜻하며 가짜 경건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그릇된 종교생활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무엇을 보고 판단하실까요?달리 표현하면 가짜 경건과 진짜 경건을 구별하는 시금석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느냐의 여부입니다(22, 25절 참조). 즉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그 경건은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며 헛된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경건한 자들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5가지입니다.
1) 스스로 경건하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26절): 신앙생활을 꽤 잘 하고 있다는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먼저 헤아리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자기 혀를 재갈 물려야 한다(26절): 혀를 통제함으로써 악하고 헛된 말을 하는 대신에 선하고 유익한 말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3)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26절):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척하지만 실은 자기를 높이는 것이 위선인데 그 위선에 모두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만은 그 위선에 속지 않으십니다.대신에 위선에 가장 먼저 속는 자는 위선을 행하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위선을 행하는 자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이들에게서 결코 선한 열매를 찾을 수 없습니다.
4)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야 한다(27절):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기꺼이 섬기고 도움으로써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5)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27절): 세상 풍속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권면은 그리 새로운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늘 들어왔던 말씀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습니다.
저는 오늘 신앙생활의 기본이 되는 야고보 사도의 다섯 가지 권면을 하나씩 차례로 해설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다섯 가지의 권면이 서로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씩 나누어 생각하는 것보다 통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야고보서를 계속 강해할 때 이 같은 주제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야고보 사도가 권면한 대로 우리 모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즉 참된 경건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번 강해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야고보 사도는 참된 경건의 원동력을 우리 마음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1:21입니다. 이 구절을 야고보서의 요절로 보아도 괜찮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1:18). 그때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심겨져서 죽었던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마음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죽었던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인 신구약성경 가운데 아주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부분의 말씀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에 심겨진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최초로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우리의 일상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들이 신구약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덧붙여 심겨집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신구약성경의 많은 말씀이 우리 속에 심겨져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우리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 배후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유는 신구약성경을 인간 저자들이 정확하게 기록하도록 감동하신 분이 성령님이시며 그 성경말씀의 일부분을 우리의 마음 판에 새기시는 분도 성령님이십니다. 지난 번 강해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마음에 신구약성경을 새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새겨진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며 새겨진 말씀대로 살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입니다. 즉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동행하고 동역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 곧 말씀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성령님의 충만으로만 가능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표현대로 하면 참된 경건은 말씀의 충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자산입니다. 예를 들어 구구단이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계산하는데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제 어디서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 말씀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를 바르게 살게 합니다. 요약하면 참된 경건의 원동력은 우리의 마음에 심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했을 때 전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의도적으로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흔히 기도하는데 우리가 짓는 대부분의 죄는 알고 지은 죄입니다. 그런 짓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발동하여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데도 우리가 그 말씀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것입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혹 모르고 짓는 죄가 있다면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크게 경책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았을 때라도 우쭐거릴 수 없습니다.이유는 우리 안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작동했기 때문에 그 같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누구도 스스로 경건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진 말씀을 되새기고 그 말씀에 푹 잠겨 살 때에만 비로소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26절에서 말씀하듯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자기의 세 치 혀를 바르게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속이는 위선자로 전락합니다. 이런 자는 가난하고 불쌍한 자가 자기 가까이에 있어도 돌볼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돌보라고 보내신 자들인데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자기 배만 챙기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세상 풍속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런 자는 주일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 같은 경건은 헛것입니다.어쩌면 마음에 심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거듭나지 않은 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무늬만 기독교인이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교회의 명예를 실추하는 장본인입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반드시 구원 받을 것이라고 자만한다면 자신에게 속고 있는 아주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한 자일까요? 오늘의 본문과 깊은 관련이 있는 몇 구절들에서 누가 경건한 성도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 1: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으로부터 복 있다고 인정받는 경건한 성도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되새겨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그런 성도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좋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습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는 말을 할 때마다 감동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읊어대는 것도 아니며 많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저 평범한 몇 마디의 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푹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면 아주 자연스럽고 따뜻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겸손하면서도 즐겁게 이웃을 섬깁니다. 특히 환난 중에 처해있는 고아나 과부는 물론 지금 시급하게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돌봅니다. 그래서 그의 섬김을 보면 꼭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한 성도입니다.
(롬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한 성도는 일상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삽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삽니다. 즉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소극적으로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롬 12:2 전반절). 이 세대란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지배정신이나 주류문화를 말합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세상을 끌고 가는 주류문화와 지배정신의 밑바탕에 정욕과 자랑이 숨어있다고 말씀합니다.
(요일 2:15-16)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말세의 특징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사랑의 왜곡을 강조했습니다.
(딤후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세상의 주류문화와 지배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삶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남도 망하고 자기도 망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망해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지키려면 좋으신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소극적으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롬 12:2중반절).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인이 되도록 우리 편에서 적극적으로 자리를 내어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가정과 직장과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내 생명과 소유와 시간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내 몸과 마음의 주인도 하나님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한 번만 내어드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27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요 성령의 사람인 것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표준임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또 하나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경험하고 살듯이 우리의 마음은 아주 연약합니다. 때로는 완고합니다. 그래서 자주 악에 기울어집니다. 세상의 풍조와 악의 세력이 침범하여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래서 거세게 흐르는 세속의 물결과 악의 세력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심겨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역사로 우리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한 자로 살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 자신에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제 마음에 이미 심겨져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즐거워하고 있는지 그래서 달고 오묘한 그 말씀에 푹 잠겨 살고 있는지 점검해보았습니다. 참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실패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제 마음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 살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르면 다음의 다섯 가지의 모습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1) 교만입니다. 자기가 꽤 경건하다고 생각합니다.
2) 덕스럽지 않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많은 말을 하는데 속을 살펴보면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헐뜯는 말이 대부분입니다.
3) 위선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4) 이웃을 사랑하는데 아주 계산적이고 인색합니다.
5) 세상에 푹 빠져 삽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웃들에게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당당하게 증거 하려면 한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붙잡힙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인생은 안전합니다. 그의 마음은 평화롭습니다. 참 자유를 얻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질서정연한 내면세계를 통해 외면세계도 충실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된 경건은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일상의 모든 생활이다.” 반대로 헛된 경건은 ‘세상의 주류문화와 지배정신을 따라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상의 모든 생활’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푹 잠겨 살아 경건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른 관계를 맺으며
약 2:1-13 / 정영구 목사
야고보서 1장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원리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19절부터 27절 까지는 우리들의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가지고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런데 심어진 말씀을 가지고 산다는 것, 사람의 삶은 내면의 삶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살아야 되는 외부의 삶이 있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과 관계하셨습니다. 사랑은 관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또는 내가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은 관계성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치, 사랑은 영이지만 그 영이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원리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무가 생명력 있는 말씀인 물을 먹고 그 말씀이 위로 올라가서 열매를 맺습니다. 이 열매는 생명의 근원인 물을 통해 맺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열매만 보고 이 열매가 어떻게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말씀이 사랑이고 사랑이라는 관계성으로 나타난다면 그 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관계의 열매들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한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것이 제대로 되어야지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사람을 외모로 보기가 쉽습니다. 외모는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 제일 예쁜지, 누가 제일 진실한지, 누가 제일 착한지, 진, 선, 미라고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또는 누가 가장 힘(능력)이 있을까? 누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까? 를 보는 것입니다. 능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영향력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 영향력도 크겠지만 능력이 있어도 영향력이 없는 사람도 있고 영향력은 있지만 힘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권력을 통해서 사람을 보기도 합니다. 외모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누가 진실하고, 누가 착하고, 누가 아름다운가,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가, 누가 더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진실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 능력 있고 영향력 있고 힘이 있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사람들과 관계하는 첫 번째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굉장히 빠릅니다. 누가 힘이 있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다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진, 선, 미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모를 봐야 합니다. 영모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심모 그 다음에 외모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영모가 아름다운 사람은 심모도 아름답고 덩달아 외모도 아름답습니다. 얼굴이 못생긴 사람도 마음이 예쁘면, 사랑을 하면 인상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모까지는 사람들에게 잘 보여주려 애쓰면 그렇게 되기 때문에 잘 구분할 수 없습니다.
외모라는 것을 다르게 얘기하면 가면입니다. 상대에 따라 자리에 따라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밖에서 내복 입고 다닐 수 없는 것이고 집에서 양복 입고 돌아다녀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가면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또 더 중요한 내 영이 하나님 앞에 또는 사람 앞에 있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영모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외모를 보는 것도 아니고 심모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정신지체아들이 외모도 정상이 아니지만 마음도 비뚤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모도 아니고 외모도 아닌 사람은 영모를 봐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든지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BMW가 신호등이 빨간 불이다가 파란 불로 바뀌었을 때 빨리 출발을 하지 않으면 뒤에 있는 차가 클렉션을 누르지 않고 기다려 주는데 티코가 똑같이 하면 뒤에 있는 차들이 난리가 납니다. 부자가 약속 시간에 늦으면 이해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늦으면 열 받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부자는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가 됩니다. 외모로 사람을 계속 차별하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고 영모를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야고보서 2장에서 말씀합니다.
첫 번째 영광의 주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2:1)’
사람들이 차별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부자한테서는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능력도 영향력도 힘도 좀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지근성입니다. 내가 거지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잘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짜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때문에 잘하는 것과 뭔가 얻어먹으려고 잘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외모는 예의 바른 것인데 예의 바른 이유도 얻어먹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양복입고 있는 거지에게는 만 원을 주고 지저분하게 입고 있는 거지에게는 돈도 안 주고 그냥 가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은 내가 영광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광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영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고 무엇인가 바라지도 않습니다. 서로 그렇게 생각하면 1:1의 관계, 서로 존중해주고 위해주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영광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예전에 교회를 개척할 때 부자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공손해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내 안에 거지근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개척교회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누구를 만나든 축복해주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영광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지 차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오든 가난한 사람이 오든 내가 하나님 안에서 베풀고 섬겨줄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한테 있다고 믿으면 됩니다. 그래야지 차별하지 않습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4절)’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케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않았느냐(5절)’
두 번째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해서 믿음에 부요케 하셨습니다.
약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일수록 다른 영적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보화 보다 더 많은 보화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뒤로 돌아 가’라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거꾸로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의 또 다른 신비이고 역설입니다. 사람의 눈으로만 볼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해서 차별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더 부자일 수 있는 것입니다.
친구 중에 시아버지가 200억 재산이 있는 분인데 천안 시내에서 맨날 휴지를 줍고 돌아다니신다고 합니다. 그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 그 친구에게 200억 재산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의 세계도 그런데 믿음의 세계는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많을수록 그 고난 속에 엄청난 보화가 있는 것인데 어떤 사람은 고난을 피해가고 싶어 하고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고난 속에서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고난 가운데도 보물이 있는 것입니다.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역설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의 역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에 에모리대학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미국의 10개 대학 안에 들어가는 대학인데 이 대학의 엘리총장님이 목사님이신데 언젠가 우리나라 대사로 오신 적이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이 에모리대학에 있는 신학대학을 미국에서 제일 큰 신학대학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원래 돈이 하나도 없는 분이었는데 에모리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중에 지나다니던 길에 만나게 된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서 늘 쓸쓸하게 계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갈 때 마다 대화하고 함께 있어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 분 이름으로 코카콜라의 5%의 주식을 유산으로 남겨주셨다고 합니다. 몇 천만 달러가 되는 그 주식을 에모리대학에 기부해서 대학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작정하고 선행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불쌍한 마음에 같이 얘기했던 것인데 그 분이 코카콜라의 회장이었던 것입니다.
세상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세계는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천사는 날개 달고 멋있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쌀 달라고 교회에 오는 사람일수록 하나님한테 오신 것처럼 대우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 천사는 아닙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는 불쌍한 사람 모양으로 와서 사기 치는 사람도 많습니다. 두 시간 구구절절이 얘기해 놓고 만 원만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혹하는 것도 있지만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그런 사람을 하나님 대하듯이 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역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순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인생에서 꼴찌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뒤로 돌아 가라고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서로 상속자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6절)’
오히려 부자가 더 나를 압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의 사람이 99% 재산을 먹고 99%가 1%를 가지고 나눠 먹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우리나라는 10%가 80% 재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삼성이나 현대가 대부분의 재산을 다 가지고 있는데 삼성, 현대에 관련된 사람은 가족이나 직원을 다 합쳐도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됩니다. 아무튼 나머지 90%는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데 90%가 삼성, 현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삼성이나 현대가 더 세금을 내야하고 자기네들이 번 것만큼 사회에 환원을 해야 되는 것인데 자기네들은 먹으려고 하고 90%한테 계속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합니다. 부자는 우리를 더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회 현상도 그런 것이지만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모를 취하는 모습들입니다. 부자는 다 이해가 되는데 가난한 자들은 무엇을 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다 이해가 되는데 공부 못하는 애들은 뭘 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7절)’
아름다운 이름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나에게 있다는 믿음입니다. 내 이름을 함부로 적들이 부르지 않게 해야 합니다. 부자들이 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반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내 몸 같이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8절)’
모든 사람을 내 아들인 것처럼 대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몸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황금률입니다. 대접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접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가난하다고 차별받으면 분노하는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접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12절)’
법인데 그 법을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다른 사람을 찍어 누르는 율법으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정신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도 질서 있게 품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방종으로 쓰지 않고 그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 자유의 율법으로 써서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을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자기 몸은 누가 안 가르쳐줘도 본능적으로 보호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자식이 위험에 처했다면 자기의 본능을 벗어나서 자식을 구하려고 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오직 사람을 살리는 데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른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하면 정죄하게 되고 방종으로 쓰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 율법대로 하는 것은 내 몸처럼 다른 사람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13절)’
다른 사람을 대우하는 것만큼 대우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13절)’
긍휼은 불쌍히 여겨주는 마음입니다. 공감하고 같이 슬퍼하고, 체휼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차별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려면 영광의 믿음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은 거꾸로 일하실 수 있다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내가 대우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들도 내가 대우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워보면 압니다. 무조건 잘 한다 잘한다만 하면 아이 망칩니다. 무조건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것도 아이를 망치는 길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력은 어떤 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그 때 그 때 마다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자꾸 외모로 취하게 되면 외모지상주의, 차별지상주의가 되는 것이고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관계 안에서 외모로 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와 관계하실 때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똑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관계를 해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5)
옛날에 어떤 왕이 자기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학자 한 사람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겠소? 당신에게 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학자는 서슴없이 한 마디 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요. 왕께서는 나쁜 짓은 하지 마시고 착한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왕은 학자에게서 무엇인가 특별한 가르침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나쁜 짓은 하지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평범한 말을 하니까 왕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왕은 언성을 높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까짓 가르침을 받으려고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나쁜 짓은 하지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소리가 아니요?'
그러자 학자는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나쁜 짓을 하지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은 네 살짜리 어린 아이로부터 여든에 이르는 노인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을 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할/
야고보서의 주제가 바로 행함입니다. 약2:14절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장에서는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 성을 원론적으로 강조한 야고보 사도는 이제 이와 같은 일반적인 원리가 2장부터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하나 하나씩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조차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 무시당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보면, 있는 자 앞에서는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없는 자 앞에서는 거만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한 영혼의 귀중함을 가질 때, 우리는 그 누구를 대하든지 따뜻한 사랑으로 대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귀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아멘!/
▶미국의 명문 스탠포드 대학이 어떻게 건립되었는지 아십니까?
돈 많은 재벌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허버트 대학교 일년을 다니던 중 사고로 죽게 되어 긴 여생을 조금은 쓸쓸하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는 그 많은 재산을 유익한 일에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부부가 둘이 의논하기를 '우리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헌납'하기로 하고, 다음 날 부부는 미국의 명문 허버트 대학을 방문하였습니다. 아들이 이 대학에 다닐 때 무척이나 행복했기에 이 대학을 찾은 것입니다.
정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허름한 옷차림의 두 노인을 본 수위가 그들을 불러 세우고는 불친절하게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노인양반들 지금 어디를 들어가려고 하는 거요?' '총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요' 수위는 아주 경멸하는 태도로 괄시하며 대답하기를 '총장님께서는 댁들을 만날 시간이 없소' 노부부는 수위의 태도에 불쾌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물었습니다.
'대학교를 설립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그러자 퉁명스럽게 말하기를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댁들 같은 사람들이 그건 왜 묻습니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은 노부부는 그 대학에 기부하는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직접 학교를 짓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대학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제일가는 대학중의 하나인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타서 지은 것입니다.
한편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하버드 대학에서는 그 날의 잘못을 반성하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부터 허버트 대학 정문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게 되었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수위 한 사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허버트 대학은 큰 손해를 보았습니다. /할/
▶인도의 정신적인 지주인 간디(1869-1948)가 젊었을 때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온갖 차별과 편견과 냉대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유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성경책을 발견하고 이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간디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그에게 큰 감명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은 간디는 하나님을 위해 그의 일생을 바쳐야겠다는 결심하고는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 미개한 나라이었고 인종차별이 심한 때이었기 때문에 그의 결심은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번번이 교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여러 번 교회를 찾아다니며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원을 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교회당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기 일수였습니다. 간디가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한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경멸한다.'
그는 결국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10억 인구의 인도를 움직이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 때 교회가 간디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않았다면 인도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간디가 기독교의 영향을 인도에 끼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잘못입니까?
▶건국대학교의 명예교수이신 류태영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36년 전라북도 임실이라는 산골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농촌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상 적으로나, 외모적으로는 그리 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을 굳게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주일뿐만 아니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교회는 보잘 것 없는 소년이지만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은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소년이 잘 되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소년의 마음 속에 꿈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농촌출신이니까 어찌하든지 농촌을 한 번 잘 살게 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되겠다. 유학을 가야되겠다.' 이런 꿈이 그의 마음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진 농업국인 덴마크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자기의 꿈을 영어로 적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덴마크로 보내기는 해야 되겠는데 누구에게 보내야 될지 몰랐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제일 높은 사람에게 보내자'고 생각하고 편지봉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프레드리히 9세 국왕 귀하, 코펜하겐, 덴마크'
편지를 보낸 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습니다. 저의 유일한 배경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주께서 저로 하여금 유학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세요'
교인들도 보잘 것 없는 소년의 꿈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더불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 지 40일 만에 답장이 왔습니다. 덴마크 국왕의 보좌관이 쓴 편지였습니다. 자기 나라에 와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편지에는 비행기표까지 함께 넣어왔습니다.
시골뜨기 소년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학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덴마크로 갔습니다. 거기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는 더 배울 것이 없게 되자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또 편지를 썼습니다.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는 키부츠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 뒤 그는 귀국해서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농촌전문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머슴의 아들이었습니다. 시골뜨기였습니다. 구두를 닦으면서 고학을 하던 소년이었습니다. 외모적으로는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소년이 어떻게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겠습니까? 교회가 그를 따뜻하게 사랑으로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온 교우들이 진정 어린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놀라운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외모를 보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며 그를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사실 어떤 시대에든지 사람의 완전 평등을 말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빈부나 신분을 중시하여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물질의 풍요는 신의 축복이요, 가난은 신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은 물질의 부유함을 누릴 뿐 아니라 사회에서 존경과 대우를 받아왔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그 가난하고 육신에 병든 것도 서러운데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정죄 받고, 사회에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유대인들에게서는 더욱 심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로 생각하여 가까이 하지도 않고, 노골적으로 경멸했습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들은 그 부요를 누릴 뿐 아니라 사회에서 존경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들 사는 사회는 의식들이 많이 깨었지만, 여전히 유전은 무죄가 되고, 무전은 유죄가 되는 일이 성행합니다. 이것은 공정해야할 법정에서조차도 여전합니다. 곧 권력 있고 부유한 사람은 큰 죄를 지었음에도 얼마 후에 너그러운 판결을 받아 사면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누가 그를 변호해 줄 사람들도 없기에 그가 무죄함에도 큰 곤혹을 치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과 함께 멸시 천대를 받기 때문에 더 억울한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랑을 말하는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들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차별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악한 일들이 초대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말씀의 검을 빼들었습니다. /할/
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①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 모두 예수의 피로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형제들아' 사도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된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외모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영광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영광의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늘의 영광을 다 내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런 외모도 갖추지를 못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에 의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흠모할 만한 외모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대 전제가 무엇입니까? 우리 영광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모일 때 잘사는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무슨 덕을 보려고 모이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모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인간들의 차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있고 없고, 배우고 못 배우고, 잘났고 못났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믿음 안에서 평등합니다. 그러기에 누구를 판단하거나 선별해서는 안니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가 작은 교회라고 기죽지 마십시오! 이곳에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있습니다. /할/
㉣오늘 주제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할/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하루는 집무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누구를 만나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급히 나오다가 꼭 챙겨야 될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습니다. 백악관 앞에 있는 안내 실을 지나갈 때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내 실에서 근무하는 수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급히 나오다 보니까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는데, 자네는 젊으니까 얼른 가서 가져올 수 있을 걸세. 내 책상 위에 보면 노란 봉투 하나가 있으니 그것을 좀 가져다 주게나'
그래서 수위가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위가 돌아와 보니까 놀랍게도 대통령이 수위인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기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아니 각하께서 이런 하찮은 자리에 앉아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자네가 나를 위해서 대신 일해주는데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서 대신 자리를 좀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얼마나 큰 인물입니까?
그런데 우리 소인배들이 문제입니다. ▶어느 시집 간 딸 자랑을 늘어놓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내 딸은 시집을 참 잘 갔어. 사위가 얼마나 착한지 아침에 출근할 때도 딸이 피곤할까봐 깨우지도 않고 자기가 라면 하나 끓여먹고 출근하지요, 내 딸은 10시쯤 일어나서 미장원가서 오전 내내 있다가 점심시간에 사위 회사식당에 가서 사위와 함께 점심 먹고 집에 와서 한숨 자고 저녁에 사위가 퇴근하면 저녁 먹으러 나가고... 사위가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딸이 하자는 대로 다 하니까 정말 시집을 잘 가서 고생 안하고 살아요'
'그런데 우리 아들 녀석이 장가를 잘못 가서 고생문이 훤하게 열렸지 뭐예요. 글쎄 며느리가 매일 아침 늦잠 자느라고 10시에나 일어나니 아들 녀석이 아침도 못 얻어먹고 출근하고 나면 며느리는 미장원가서 머리하고 점심해먹기 싫다고 남편 회사로 쪼르르 달려가서 점심 먹고 쇼핑하고 집에 와서 또 낮잠을 잔다오. 그리고 저녁에 아들이 들어오면 밥도 안 해놓고 나가서 사먹자고 한다니 집에서 따뜻한 밥 한번 못 얻어먹는 아들이 불쌍해서 죽겠어, 장가잘못 가는 바람에...' 그럽니다.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들의 편견의 일면입니다. /할/
⑴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롬2:11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행10:34-35절에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또한 벧전1:17절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그리고 요7:24절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할/
▶'아름다움의 권력'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움은 권력이 되어 능력과 성격, 대인관계, 결혼, 승진, 여가 등의 개인 생활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참여 등 삶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예쁜 여자, 잘 생긴 남자가 인기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루키즘(lookism)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look이라는 단어에 ism이 합쳐져서 '외모차별주의'라는 말입니다. 외모가 개인간의 우열과 인생의 승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외모에 집착하는 외모지상주의를 뜻하기도 합니다.
옥스퍼드 1999년 판 20세기 단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루키즘(Lookism)이란 외모를 근거로 한 편견이나 차별을 의미한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는 '루키즘(Lookism)'은 대중매체의 발달로 홍수처럼 확산되어 성형 시장을 한여름 강물처럼 불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냄새가 고약한 아름다운 꽃을 집안에 장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외모가 항상 최고의 덕목은 아닙니다. 마음의 아름다움이 더 큰 힘입니다. /아멘!/
⑵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16:7).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들이 외모로만 판단하여 실수하고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회는 외모 지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채용하면서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으로 삼았던 말입니다. 조선 사대부 집안에서 사위를 고를 때에도 이 기준을 가지고 골랐습니다.
신언서판의 신(身)은 얼굴과 외모와 신체의 건장함을 보는 것입니다. 언(言)은 언변, 곧 말솜씨를 뜻하고, 서(書)란 글씨와 글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판(判)이란 사물의 시비를 바르게 가릴 수 있는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전자보다는 후자로 갈수록 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외모의 그럴듯함보다는 말씨가 더 중요합니다. 언변보다는 글로 표현되는 교양이 더 중요합니다. 사물과 사람을 보는 판단력과 지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세태를 보면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지혜보다는 외적으로 보이는 외모가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고의 천박성이 드러나고 삶의 비천함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서울과 경기지역에 사는 18세 이상의 여성 810명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이 25.8%, 몸매가 18.6%로 둘만 합쳐도 40%가 넘습니다. 그리고 마음씨가 13.5%, 매너가 10% 되는 것을 보면 여성이 여성을 볼 때도 얼굴과 몸매가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남성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얼굴과 몸매라고 대답하는 비율이 70%-80%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잡지를 보면 남자를 보는 눈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 남자배우들에게 '꽃 미남'이라는 외모에 치중하는 말이 유행했다면 최근에는 그 말과 더불어 또 다른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외모와 내면이 일치하는 '훈남'이라는 단어입니다. '완소훈남'이라는 단어는 '완전 소중한 훈훈한 남자'라는 말로 여성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겉만 꾸미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얼굴까지도 수술을 해서라도 고쳐야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얼짱 몸짱 짱짱이 유행입니다. 외모를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먼저 심장을 고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믿/
⑶하나님은 사람들을 골라 쓰실 때 세상의 기준과도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일등도 좋아하시지만 꼴찌도 예민하게 살피십니다.
이것부터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일등을 선택하고 엘리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등 하려고 일류가 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의 방법을 구사하십니다. 오히려 꼴찌와 실패자와 낙오자들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을 삼는데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 중에서 기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가기 전에 미리 '아들들을 모아 놓으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가면서 마음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려는 사람이니 얼마나 잘 생겼을까?' 그런 기대를 하고 상상을 하면서 가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 사람들은 외모와 키를 보지만 나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 말은 선택받는 사람의 외모나 생김새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할/
그래서 이새의 집에 가 보니까 아들들이 다 모였는데 모두 참 잘났습니다. 모두 키가 훤칠하고 생김새가 아주 준수했습니다. 큰아들을 보고 그가 뽕 갔습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과연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실 자가 주님 앞에 있도다.'하고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음 아들도 보니까 또 준수했습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 하니까 또 '아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일곱 아들 모두를 거절하십니다. 이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또 없느냐' 하니까 이새가 말하기를 '말 째가 하나 더 있기는 한대 그 아이는 지금 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 째 아들 다윗은 이 자리에 초청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새에게 여덟 번째 아들이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딸만 일곱 명 낳다가 마지막 8번째 아들을 낳았다면 애지중지하는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들만 일곱 명을 낳다가 여덟 번째도 또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별 볼 일 없는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말 째가 지금 들에서 양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아버지도 그 막내아들은 좀 부족해서 기대도 안하고 그 날 그 자리에 아예 부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그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우선 잘 생긴 것을 따집니다. 그리고 1등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는 2등은 모두 별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소수 외에는 모두 실망 당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회사에서 사원을 뽑을 때도 우선 학교를 보고 성적을 보고 생김새를 보고, 키를 보고 실력을 먼저 봅니다. 모두 외적인 조건을 우선합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자꾸만 사고가 터지고 배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됨의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인데 세상에서는 그것들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배반이 일어나고 속임이 일어나고 불행한 사건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보고 택하시는 방법은 사람들과 다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일등한 사람보다, 엘리트보다 꼴찌를 생각하십니다.
일등 하는 사람도 엘리트도 유능하지만 꼴찌하는 사람에게도 상당한 장점이 있습니다.
꼴찌 하는 자는 공부는 좀 못해도 순박함이 있고 순수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이 있고 마음에 여유가 있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오늘 세상에서는 꼴찌를 무조건 무시하는데 공부 못한 사람이 후에 성공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꼴찌하는자, 가난한자, 배경 없는 사람, 자본 없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크게 성공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배경이 없다고 현재 공부에 쳐진다고 가진 것이 적다고 유산이 없다고 그런 것 때문에 비관하고 침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도 그 아들이 왕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 형들이 훨씬 유능해서 자신 있게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막내아들을 불러다 그에게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모를 보고 생김새를 보고 조건을 먼저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키를 보지 않으시고 그 마음과 중심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희망을 가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작은 겨자씨를 중하게 여기십니다.
겨자씨는 작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는 오늘은 이렇게 작지만 나중에 땅에 심겨지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려고 주님이 '겨자씨를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겨자씨의 중요성은 '작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겨자씨 안에 들어있는 생명력입니다. 그 생명력이 그 겨자씨가 지니고 있는 가치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작지만 이것을 땅에 심으면 크게 자라서 새들이 깃들 만한 은신처가 되고 쉼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양을 따지고 부피를 따지고 크기를 따집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크냐, 얼마나 많으냐, 얼마나 길고 높으냐 하고 물량을 따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더 많이, 더 크게, 더 높게들 지향합니다. 이사를 갔다 하면 몇 평이냐를 따집니다. 서로 크고 높은 것을 자랑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더 커지고 많아지고 높아지고 유명해지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크고 높고 잘 생긴 것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평생 풍부하게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살다보면 때로 한때 배가 고팠던 때가 있었던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요 추억이 됩니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경거망동은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잘생기고 예뻐지고 멋있고 날씬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기왕이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날씬하고 아름다움이 특출해서 그 인생이 참 불행하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잘생기면 누가 이 세상을 웃깁니까? 여러분 TV에 아주 잘생긴 사람이 나와서 웃긴다면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고 이주일씨는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웃겼습니다 오늘 좀 못생겼다고 비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참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많고, 크고, 높고 긴 것만을 따지지 않습니다. 결코 잘생기고, 키 크고, 부하고, 많은 것만 선호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게 들어있는 믿음 속의 생명력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정신이고 순전한 마음이고 맑고 깨끗한 영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그것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신장이나 아름다움이나 준수한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았다면 다윗의 다른 형제들 중에서 뽑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서 보신 것은 외모가 아니고 그의 중심이었고 마음이었고 생각이었고 그의 맑은 영과 삶의 책임감을 보신 것입니다.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 생명을 내놓고 양을 지키는 그 용기 있는 모습을 하나님은 내려다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당신의 백성을 맡기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윗의 마음속에 간직되어진 그 생명력을 보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조건이 좋고 배경이 좋아도 그에게 이 믿음이 없고 용기도 없고 거기에 생명력도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씨가 아무리 크고 실하다 해도 그 속에 생명력이 없다면 그 씨를 어디다 사용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겨자씨를 들고 비유로 교육하신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버려진 작은 돌멩이를 선택'하여 기초 석에 세우십니다.
눅20:17절을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석수장이들이 버린 돌이 때로 요긴한 모퉁이 돌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세상에서 쓸모 없다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때로 하나님이 부르셔서 아주 요긴하게 사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들이 버리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서 훈련시켜 큰 인물을 만드십니다. 예를 들면 무디 같은 경우입니다. 무디는 초등학교 밖에 공부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 무디가 얼마나 무뎠는가 하면 요한복음을 찾으라면 창세기부터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디는 어려서부터 왕따를 당합니다. 친구들이 너를 가까이 하는 것이 창피하다고 무시하고 따돌렸다고 합니다.
그 무디는 말하자면 버려진 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름도 좋아야 합니다. 그 이름이 무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한 시대에 불같이 쓰셨습니다. /할/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그 시대의 낙오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그 시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낙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도 전도사 때 교도소를 방문해서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말주변이 없는지 재소자들로부터 '너는 전도사 하지말고 다른 일이나 하라'고 야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세계적인 전도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를 별과 같이 모래와 같이 자손을 번창하게 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불러내셨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시려면 젊은 사람들을 택하고 체형이 다산체형을 골라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나이 75세 된 아브람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때로 사람들의 생각과 정반대 일 때가 많습니다. /할/
㈃그렇다고 여기서 여러분은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꼴찌만 불러 사용하시는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 없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골라내신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수함이고 충성됨이고 부지런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장점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은 유능함보다는 진실을 보십니다. 재주보다는 진실함을 보시고 겸손함을 보십니다.
엘리트들, 일류 자들, 1등한 사람들은 성적은 좋으나 대부분 교만합니다. 자만합니다. 자기 과신에 빠져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리고 서로 융합을 잘 못합니다. 긍정적인 정신도 부족합니다. 수용력도 적습니다. 사람이 가져야 할 인간성은 1등한 사람이나 엘리트보다는 꼴찌가 훨씬 더 좋습니다.
꼴찌에게는 책임감이 있고 열심히 있고 화합할 줄 알고 더불어 살아가는 마음과 따뜻한 인간애가 있습니다. 그리고 꼴찌들에게는 교만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겸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런 마음을 높이 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자만한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존 맥스웰'이라는 리더십 전문가가 쓴 책 중에 '인재 경영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존 맥스웰'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키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사람을 키우는 일은 기업에서도 국가에서도 교회에서도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람을 키우는데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 마음에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경제전문가들은 경영이라는 말의 개념을 사업이라는 말과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사업은 돈을 벌고 돈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영은 사람을 벌고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업이 잘 됐다.'는 말은 '돈을 벌었다.'는 말이고, '경영이 잘됐다.'는 말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사업가 기질의 사람이 있고, 경영가 기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질이 더 훌륭합니까? 사업의 능력 보다 경영의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을 잘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환경,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할/
그러므로 사업을 잘하는 사업가 보다 경영을 잘하는 경영인의 마인드가 되어야 합니다. 사업가는 망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경영인은 망해도 사람을 얻게 됩니다.
유명한 경영인 '앤드류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나는 나의 비문에 '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쓸 줄 아는 지혜를 지녔던 인물 카네기, 여기 고이 잠들다.'라고 적고 싶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할/
②그 당시 상황을 예로 들어 외모로 판단하는 것을 질책했습니다(2-3).
초대교회에도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사람들이 좋은 자리에 앉도록 하고 가난하고 못 사는 사람이 오면 못 본 체 했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할/
③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4).
⑴'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구별해서 사람을 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사만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로님도 사랑하시고 권사님도 사랑하시고 처음 나온 새 신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배운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끼리 서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됩니다. /아멘!/
⑵'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그 배후에 깔려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사람과 친해지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래서 그 사람이 내게 이득이 될 것으로 판단되면 그와 친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내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눈 아래로 보아버립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얼마나 악합니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9절에서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우리가 잘 아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흑인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서 안내를 하던 백인 집사들이 못 들어가게 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백인교회입니다. 흑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흑인교회로 찾아가세요' 흑인은 어쩔 수 없이 그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되돌아서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교회로 들어가시는 것 같던데 왜 도로 나왔습니까?'
흑인은 슬픈 듯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군요. 실은 나도 백인이 아니라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흑인은 눈을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안보입니다. 그제야 흑인은 그 분이 환상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보고 무시해 버리면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약2: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④하나님은 사람들이 차별하는 가난한 자를 축복하셨습니다(5).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네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⑴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⑵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⑶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⑷그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괄시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가운데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외모를 조금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등소평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국의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키가 컸기 때문에, 그를 거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키는 불과 150cm 남짓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깔볼 수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등소평입니다.
그가 한 번은 닉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등소평은 미국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키가 크고 등소평은 키가 작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그가 자기 손을 올려서 악수를 해야 되는데, 등소평은 절대로 손을 올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키 큰 미국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키 큰 미국 사람들은 악수는 해야 되겠고 어쩔 수 없이 등소평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공손한 모습으로 악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중국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악수를 하시는데 일부러 손을 내리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때 등소평은 '모르는 소리! 내가 13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자네는 잊었는가?'
자기 밑에 13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콧대 높은 미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앞에서는 당연히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외모를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 때도 있습니다. 병들 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갖춘 외모를 우리가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토록 유업으로 받는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이런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약 2:1-9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 앞서는 1장 21절 끝에서 야고보는 쓰기를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이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영향을 주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기만 하지 않고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이 영향을 받아 변하게 해야 말씀을 받았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우리에게서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이 말이라 했습니다. 말의 내용과 사용하는 단어와 억양과 말하는 횟수까지도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우리에게서 또 변하는 것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시험 들게 하는 큰 문제의 하나가 바로 차별의 문제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본문 1-4절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사도 바울은 롬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 이 세대의 악한 풍조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과 악을 분별해야 합니다. 다만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합당치 않다는 뜻으로 야고보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썼으리라 봅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명령을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전1:26-29에서 한 말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과 문벌을 보시고 당신의 백성을 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미련하고 약하며 천하고 멸시받으며 없는 이들을 택하셔서 지혜 있다 하고 강하다 하며 가졌다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려 하셨는데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즉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백성 된 이들 사이에서는 모두가 꼭 같을 뿐이고 아무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명백합니다. 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1:17에 보면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라” 합니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말씀은 모든 재판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않고 귀천을 차별 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들을 외모나 귀천을 따라 차별하는 모든 일은 악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눅6:20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에 있어서 가난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될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 되기가 오히려 쉽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허긴 예수님께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3-24)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거울이 되어야 할 교회에서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야고보는 앞서 1:9-10에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의 눈에 낮아 보이는 사람이나 높아 보이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으심을 분명히 한 바 있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오늘 본문 5절에서는 쓰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 삼으셨는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그들을 차별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 6-7절에서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며 부자를 좋아하다가 당하기 쉬운 위험을 경고합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6절에서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하는 것은 부자들은 그들이 가진 부와 힘을 이용해서 정치적, 사법적 권력을 움직여 가난한 이들을 억누르고 수탈하기 일쑤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에게는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며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기느냐는 것입니다.
7절의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하는 데서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이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이라 부름을 말합니다. 즉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 억압하며 착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에게는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며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 8-9절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권면을 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과 연관시킵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8절의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한 데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할 때의 성경은 레19:18을 가리킵니다.
“최고의 법”이라고 한 말은 직역을 하면 “왕적 율법”입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말씀은 다른 모든 계명보다 윗자리에 있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 조금 뒤인 13절에서 쓰기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함으로써 긍휼 곧 사랑이 주님의 최후의 심판대에서 우리가 살아남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말씀에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 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라” 하시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리라 하셨습니다(마25:34-40). 반대로 주님께서 형제로 여기시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그와 같이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 하리라 하셨습니다. 야고보 또한 그런 차별을 하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본문 9절) 한 것입니다.
마22:34-40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롬13: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하고 갈5:14에서도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차별하지 말라는 권면과 연결시키는 것은 사람을 재산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권력 등의 소유여부에 따라 골라가면서 사랑하는 것은 참 사랑이 아님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죄라고 결론지으며 그 잘못을 한 번 더 힘주어 강조합니다. 본문 9절을 다시 봅니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세상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이 특권을 누리며, 반대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 푸대접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중심교훈의 하나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권면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권면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분명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바로 지키지 않는 것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중 그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온 율법을 다 범한 것이라 한다면 하물며 최고의 법에 어긋나는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짓는 문제가 아닌 한 가난하다는 이유뿐 아니라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행위에는 긍휼 없는 심판이 주어질 것이라고 야고보는 단언합니다. 오늘 본문을 뒤따르는 10-13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힘입어 그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늘 마음에 품고 일체의 차별이 없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신자의 복음
약 2:1-13 / 시 23편 / 한경직 목사
여러 해 전에 내가 신의주 제二 교회에서 시무 할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어떤 청년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니 이 청년은 가난한 가정에서 생장한 청년으로 불행하게도 제일 어린 동생이 중병에 걸렸으나 돈이 없으므로 약을 쓸 서도 없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할 수도 없을 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 동생을 낫게 하여 주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권능 있는 손을 펴사 돈 없는 사람도 죽지 않고 입원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음성을 들려주옵소서』그 후 과연 자기 동생은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청년은 너무도 기뻐서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의 목자는 여호와시니 가난한 내 동생이 산 것처럼
불쌍한 모든 형제 슬플 것 없도다
그런데 자기 백부의 옆집에 모 부호의 아들이 병이 들었습니다. 입원도 하고 약도 쓰고 각색 치료를 다 하였으나 약석(藥石)이 무효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후 그 집에서는 죽은 아들의 옷을 불사른다, 경을 읽는다 야단법석이더라고 썼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목자는 여호와시니!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입니까? 이러한 생각은 가난한 중에서 신앙 생활을 하자는 누구나 다 체험한 사실입니다. 과연 여호와는 가난한 자의 목자이시니, 옛날 애굽에서 말할 수 없는 학정 밑에 벽돌을 굽고 고역 하던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절히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사 저희를 구원하여 주셨고, 베들레헴 어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목동 다윗을 불러 골리앗을 쳐죽이고 불레셋을 물리치시며 저를 들어 이스라엘의 제왕을 삼아 건국하게 하시고, 농촌에서 자라난 가난한 농민 아모스를 불러 정의의 예언자를 삼아서 당시 부패한 상류 계급, 귀족 사회의 죄악을 통격(痛擊)하셨습니다.
신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주님 예수는 무산자의 대표라는 기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나셨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자라나셨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 한마디가 주님이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가난한 과부의 연보를 축복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다가 가난한 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예수님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도 그러하였으니 세리 마태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 역시 갈릴리의 가난한 무산 대중이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도 또한 그러하니 초대 교회 신자들은 부요한 자들이 아니라 거의 무산 대중이 아니면 노예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만 아니라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덕을 세우며 정신적 지도자가 된 이들은 대개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장막을 지으면서 전도하던 사도 바울, 가산과 전토를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일생을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면서 전도하던 바나바, 성(聖)안토니, 성(聖)베네딕트, 성(聖)프랜시스도 청빈한 생활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위대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가난한 사람으로 시작하고 가난한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세기를 통하여 헌신과 희생으로 자라왔으며 영광을 주께 돌렸습니다.
기타 성현들도 역시 가난한 자들이었으니 공자(孔子)는 상가지구(喪家之狗)라는 말을 들었고, 헬라의 가장 지혜 있고 의롭고 선하던 소크라테스는 독배(毒杯)를 마시고 임종할 때 사랑하는 제자 크리토에게『크리토여,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으니 갚아주기를 바란다』하고 운명하였으니 얼마나 가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사람이 사는 것이 그 가산이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말씀이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풍성한 축복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믿음이 풍성하게 하십니다. 본문 五절에 보면『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택(擇)하사 믿음이 풍성하게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오순절 날 성신의 놀라운 역사를 통하여 저들에게 믿음의 풍성함을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폐문불출(廢門不出)의 예루살렘 교회는 전도의 불길이 맹렬히 일어나서 하루에 三천 명씩 회개하는 놀라운 현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사랑이 풍성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믿음의 풍성한 은혜를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사랑의 은혜도 풍성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초대 교회가 오순절 날 믿음의 풍성한 은혜를 받았을 때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사랑의 축복이, 서로 아끼고 서로 위로하는 사랑의 축복이, 물건의 있고 없는 것을 서로 통용하는 유무(有無)상통(相通)하는 사랑의 축복이 저들에게 넘쳤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초대 교회에는 핍절(乏絶)한 사람이 없었다고 사도행전 四장 三十四절은 말합니다.
셋째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십니다. 믿음의 풍성한 은혜가 있고, 사랑의 풍성한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기쁨의 은혜를 하나님은 넘치도록 가난한 자에게 주십니다. 사도행전 四장 三十六절로 三十七절에 보면 초대 교회는 가난한 신자들과 떡을 떼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넷째로, 전도에 열심(熱心)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통하여 전도하십니다. 사도행전 五장 四十二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매일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더라』또 바울은 친히 고린도 후서 六장 十절에서 증거하기를『가난한 자와 같으나 여러 사람을 부요 하게 하고…』하였습니다. 만일 가난한 예수가 없었던들, 만일 가난한 바울이 없었던들, 만일 가난한 베드로가 없었던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소유할 수 있었겠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이 세상에 공자(孔子)나 소크라데스가 없고 도척(盜拓)이나 석숭(石崇)이만 살았던들 이 세상은 어찌 되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가난한 자의 사명입니다. 병자에게 병자로서의 사명이 있는 것같이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사명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들어서 세계를 부요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 가난하여도 그로 말미암아 오는 사명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서울 거리를 지나노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 약, 사탕, 수건 등을 가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사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여러 번 보게 됩니다. 이들이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아우성 처 본 일이 없는 이북 동포들이라 생각할 때 나는 가슴이 바작바작 타올라 저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땅을 내려다보면서 지나가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울지 말고, 가난한 자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전에 부요 할 때 영광을 돌리면 그 이상으로 가난할 때 어떻게 영광을 돌릴까 하는 데 대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교회는 가난한 교회입니다. 三八 사선을 넘어온 전재민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와 같이 가난한 가운데서도 믿음에 부요 하고 사랑에 부요 한 은혜를 받아 전도에 힘있는 교회가 되어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가난한 자의 목자는 여호와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다윗과 함께 노래 부를 수 있는 우리가 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13 / 김경년 목사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려놓은 벽화를 보면 저울에다가 한쪽은 지구를 다른 한쪽은 사람을 올려놓고 무게 중심을 사람이 더 무거운 것으로 기울어지게 그려놓았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가치를 지구 전체 보다 더 큰 것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다양하게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생화학자인 돌프빈더 박사는 몸무게 70킬로그램 정도의 사람을 물질적인 가치로 계산해서 이런 발표를 하였습니다. 사람 몸에 새장 한개를 청소할 수 있는 석회, 못 한개 정도의 철, 커피잔 한잔 정도의 설탕, 세수비누 다섯장 정도의 지방, 성냥 네 갑 정도의 인을 추출할 수 있는데 이것을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2달러 98센트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의 가치를 우리 돈으로 5천원도 안되는 것으로 평가하였습니다.
미국의 예일대학에 한 생물학자는 전혀 다른 각도로 보았습니다. 사람의 몸 속에 있는 단백질, 아미노산, 효소, 호르몬 등과 같은 생화학의 원료가 되는 것을 화폐단위로 계산한다면 6백만불 이상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모두 합쳐서 인체의 수많은 세포들을 만드는데는 6천만불 이상이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세포들을 가지고 살아있는 인간을 만드는데는 이 세상의 있는 돈을 다 써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사람은 돈보다 훨씬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야고보 사도가 살던 당시에는 회당에서 모여서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회당에는 특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좌석을 ‘췌찬’이라고 합니다. 즉 특별석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떤 공연장에 가면 VIP 좌석이 따로 있습니다. 그 좌석에는 아무나 앉을 수 없고 특별한 사람들만 앉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안내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끼고, 부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특별석(췌찬)으로 자리를 안내했습니다.
반대로 회당에 들어올 때 남루한 옷을 입고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서서 예배를 드리든지, 바닥에 앉아서 드리든지 상관치 않았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를 본문 9절에서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가끔 교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둘째 아이가 훨씬 더 예쁩니다”“훨씬 더 낫습니다”
그때마다 “예쁘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하지만 저는 둘 다 예뻐요...”이렇게 말입니다.
사람이 볼 때에는 이 아이보다 저 아이가 더 예쁘고, 더 좋아 보일지 몰라도 부모 입장에서는 모든 자녀가 꼭 같이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요?
사람이 볼 때에는 누가 많이 배우고, 많이 소유하고, 높은 자리에 있고 차등을 들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를 한결같이 사랑하십니다. 누구는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제나 공평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저를 믿는 자마다 ......즉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삼상16:7)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보십니다. 우리를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 자신의 가치는 어떻습니까?
독생자 외아들을 십자가에 희생하기 까지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가치를 낮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우리는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바꾼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값싸게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천하보다 귀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치를 깨달을 때 이웃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여기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최고의 법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최고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가치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알아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 지를 깨달아야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 몸을 사랑할 줄 알아야 가능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라고 했습니다.
즉 네 몸을 사랑하지 못하면 네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 때 이웃의 가치도 함께 인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육교를 건너려고 계단을 오르는데 중간쯤에서 어떤 걸인이 바구니를 놓고 도움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몇푼 안되는 돈을 그 바구니에 넣고 가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내 앞에서 길을 걷던 신사가 저를 보고 “아저씨 저 사람 가짜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속았다는 말에 기분이 불쾌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많이 속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주님을 속였던가?
주님은 내가 그렇게 많이 속였는데도 다 알고도 속아주셨지 않은가? 주님의 사랑을 이제야 좀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삭이 늙어서 야곱에게 축복을 할 때 팔에 털을 붙이고 와서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아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늙어도 아들의 목소리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야곱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속아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웃을 향해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속아주신 것처럼 때로는 알고도 속아주고 때로는 모르고도 속아주면서 계산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순수하게 사랑을 실천할 때 그것이 곧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즉 긍휼이 여기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긍휼이란? “함께”라는 말과 “느낀다”라는 말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함께 느끼는 마음입니다. 다시말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마5:)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마9:13)고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여기에 앉아 예배드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여기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랑받고 존귀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이제 그 긍휼을 우리가 이웃을 향해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긍휼히 여겨 보세요. 직장에서 상하 눈치보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여러분들의 가장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긍휼히 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아이들과 씨름하고 적은 수입으로 살림을 살려고 애쓰며, 시댁과 친정 식구를 챙기고, 아르바이트라고 해서 경제에 보탬이 될려고 몸부림 치는 아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가 긍휼히 여기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참된 예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뉴욕에 라괄디아(1882-1947)라는 판사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뉴욕 시장까지 지낸 훌륭한 분이십니다.
이 분이 판사시절에 한 노인이 빵을 훔쳐 먹다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빵을 훔쳤습니가?”
노인은 “배가 고파서 나도 모르게 빵을 훔쳤습니다”
“당신의 죄는 10달러의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판사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내 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노인의 벌금은 제가 대신 내겠습니다. 이유는 이토록 배가 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메고 있을 때 저는 너무 좋은 음식을 먹고 배고픈 사람들을 돕지 못했습니다.”
판사의 감동적인 고백에 재판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함께 동참하여 즉석에서 47달러를 모금하여 그 노인에게 주었다는 유명한 실화가 남아 있습니다.
결 론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 때 우리 이웃의 가치를 진정으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웃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여 주님의 참 사랑을 실천합시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계십니다. 아멘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4 / 박상훈 목사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삶에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대인관계에서는 어떻게 표현이 되어야 할지를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보면, 있는 자 앞에서는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반면에 없는 자 앞에서는 거만해지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따뜻한 사랑으로 대할 수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귀하게 여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대문호였던 셰익스피어가 한 번은 식사를 하기 위해서 어느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셰익스피어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빗자루를 들고서 마당을 쓸고 있던 종업원 가운데 한 사람이 쓸던 빗자루를 갑자기 집어던졌습니다. 그리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갑작스러운 광경에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얼떨떨해졌습니다.
셰익스피어는 그 종업원에게로 다가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내가 식당 문을 들어서면서 실수한 것이 있는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내게 좀 가르쳐 주게나."
그러자 식당 종업원은 죄송하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 어떠한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제 자신이 너무나 화가 나서 저도 모르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이나 저나 똑같은 남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셨고, 저는 그저 선생님이 지나가는 발자국이나 쓸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저 자신에 대해서 미운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를 들은 셰익스피어는 청년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네나 나나 실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걸세. 생각해 보게나. 자네는 빗자루를 들고서, 나는 펜대를 들고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 우주의 한 부분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자네나 나나 똑같은 것일세."
그 소리를 듣고서 청년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는 자기가 던졌던 빗자루를 다시금 들고서 바닥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상16:7에 보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외모적으로 무엇을 갖추었다고 우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는 내 외모를 이 정도 갖추었으니까 특별해야 돼. 다른 사람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비록 우리가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기죽어 살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우리가 외모를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아름답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의 외모를 보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외모를 갖춘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웃어른을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젊은 자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했습니다. 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외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을 만났습니까? 그러면 더더욱 우리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가 용기를 잃지 않고 힘을 내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대인관계의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원리대로 우리의 대인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사도 야고보는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한 형제된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외모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형제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도 야고보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기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영광의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늘의 영광을 다 내버리고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런 외모도 갖추지를 못하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에 의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흠모할 만한 외모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친히 이 세상에 오실 때 외모를 갖추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도 인정했던 사실입니다. 마22:15∼16을 읽어봅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결단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생각해 봅시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 곧 사람들에게 종교와 도덕과 철학과 삶과 윤리를 가르치던 랍비였습니다. 외모로 보면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가리켜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니고데모야, 너는 거듭나야 한다.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외모적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니고데모를 향해서 예수님은 신앙의 가장 초보가 되는 중생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다음장인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 대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외모적으로 보면 형편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멸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마 배우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 그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흠이 많은 여인이었습니까? 이미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합법적인 남편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남자와 그냥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마리아 여인은 외모적으로 볼 때 얼마나 형편없는 여인이었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나누셨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를 나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는 거듭나라고 말씀하시고, 학식을 갖춘 니고데모를 향해서는 신학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학식을 갖추고 또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모 그 자체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모가 사람을 거듭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친히 외모를 취하고 이 땅에 오지 않으셨고, 또 사람을 대할 때도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누구라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우리가 대하는 사람을 소중하고 귀하게 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건국대학교의 명예교수이신 류태영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36년 전라북도 임실이라는 산골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때 농촌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는, 외모적으로는 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굳세게 의지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하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의지할 곳이 없으니까 집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주일뿐만 아니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교회는 보잘 것 없는 소년이지만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목사님과 성도들은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소년이 잘 되도록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소년의 마음 속에 꿈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농촌출신이니까 어찌하든지 농촌을 한 번 잘 살게 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되겠다. 유학을 가야되겠다." 이런 꿈이 그의 마음 속에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선진 농업국인 덴마크로 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자기의 꿈을 영어로 적어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그 편지를 덴마크로 보내기는 해야 되겠는데 누구에게 보내야 될지 몰랐습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이왕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아들이니까 제일 높은 사람에게 보내자!" 그래서 편지봉투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프레드리히 9세 국왕 귀하, 코펜하겐, 덴마크."
편지를 보낸 뒤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돈도 없고 배경도 없습니다. 저의 유일한 배경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예수님은 저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주께서 저로 하여금 유학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세요."
교인들도 보잘 것 없는 소년의 꿈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더불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지 40일 만에 답장이 왔습니다. 덴마크 국왕의 보좌관이 쓴 편지였습니다. 자기 나라에 와서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편지에는 비행기표까지 함께 넣어왔습니다. 시골뜨기 소년이 하나님의 은혜로 유학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덴마크로 갔습니다. 거기서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는 더 배울 것이 없게 되자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또 편지를 썼습니다. 이스라엘로 갔습니다. 그는 키부츠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그 뒤 그는 귀국해서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농촌전문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머슴의 아들이었습니다. 시골뜨기였습니다. 구두를 닦으면서 고학을 하던 소년이었습니다. 외모적으로는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소년이 어떻게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용기가 생겼겠습니까? 교회가 그를 따뜻하게 사랑으로 품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온 교우들이 진정 어린 마음으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놀라운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의 외모를 보고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부족과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며 그를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도 야고보는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2∼3절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을 보십시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방문객이 찾아왔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새신자 두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손에 금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옛날에는 남자나 여자나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요즘에 사용되는 도장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금가락지를 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부유한 사람입니다. 신분과 지체가 높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외모를 갖출 때로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가 입은 옷은 단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옷을 입고 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옷은 땀에 젖었을 것입니다. 또 그는 밤에 잠을 잘 때도 그 옷을 입고 때로는 땅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옷에는 먼지도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옷은 더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도 야고보가 이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올 때 왜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와서 으스대느냐? 좀 검소하게 옷을 차려입고 와야지!" 이것을 따지고 있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면서 더러운 옷을 입고 왔느냐? 단정하게 빨아 입고 와야지!" 이것을 지금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무슨 허물입니까? 부자가 되어서 외모를 갖추는 것이나, 가난하기에 형편이 되지 못해 외모를 갖추지 못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3절에 있습니다. 3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옛날에는 회당에도 의자들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대부분 바닥에 앉아서 책상다리를 하고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더러는 뒤에 서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안내하는 사람들이 얼른 의자를 내주면서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준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당연히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도 똑같은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안내하는 자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의자도 내주지 않고 또 의자에 앉은 자가 발을 올려놓는 발등상 조차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방석도 준비해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경멸스러운 어투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거기 섰든지 발등상 아래 앉아서 예배를 드리든지 알아서 하시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도 똑같은 친절을 베풀어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 외모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대우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별 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외모에 구분 없이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 속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모에 따라서 사랑과 친절을 구별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이 하루는 집무를 하는 가운데 갑자기 누구를 만나야 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급히 나오다가 꼭 챙겨야 될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습니다. 백악관 앞에 있는 안내실을 지나갈 때 그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내실에서 근무하는 수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급히 나오다 보니까 서류 하나를 빼놓고 왔는데, 자네는 젊으니까 얼른 가서 가져올 수 있을걸세. 내 책상 위에 보면 노란 봉투 하나가 있으니 그것을 좀 가져다 주게나."
그래서 수위가 명령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수위가 돌아와 보니까 놀랍게도 대통령이 수위인 자기 자리에 앉아서 자기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아니 각하께서 이런 하찮은 자리에 앉아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링컨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자네가 나를 위해서 대신 일해주는데 내가 자네 자리에 앉아서 대신 자리를 좀 지키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큰 집에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커집니까? 작은 집에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작아집니까?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자리가 높아진 것이지 사람 자체가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두 똑같은 사랑을 받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한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외모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대우하려고 생각하지 맙시다.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대로 친절히 대하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친절히 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누구에게나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어떤 잘못을 범하는지 살펴봅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두 가지 잘못이 나옵니다.
첫째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목사만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로님도 사랑하시고 권사님도 사랑하시고 처음 나온 새신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배운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충청도 사람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경상도 사람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가대원들도 사랑하시거니와 주일학교 교사들도 역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처럼 구별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의자를 내주면서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더러운 옷을 입고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의자도 발등상도 내주지 않고 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그렇게 무시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끼리 서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둘째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그 배후에 깔려있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사람과 친해지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그래서 그 사람이 내게 이득이 될 것으로 판단되면 그와 친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내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그는 눈 아래로 보아버립니다. 그러니 그 생각이 얼마나 악합니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2:9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흑인이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앞에서 안내를 하던 백인 집사들이 못 들어가게 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는 백인교회입니다. 흑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흑인교회로 찾아가세요."
흑인은 어쩔 수 없이 그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되돌아서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방금 교회로 들어가시는 것 같던데 왜 도로 나왔습니까?"
흑인은 슬픈 듯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군요. 실은 나도 백인이 아니라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이렇게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습니다."
흑인은 눈을 들어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흑인은 그 분이 환상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보고 무시해 버리면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2:13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우리가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외모를 갖추지 못한 자를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외모 때문에 그 사람을 무시해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무시해 버리고 마실 것입니다.
세상은 각박합니다. 세상은 살벌합니다. 그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우리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원리, 대인관계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람의 외모에 따라서 차별대우하지 말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면서 누구든지 소홀히 대하지 말고 따뜻한 마음을 품어서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외모를 보지 마십시다. "이 사람 속에도 예수님의 형상이 있구나! 이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구나!" 이것만 생각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말고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입니다.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4 / 이필재 목사
오늘 말씀은 인간 차별 문제입니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하라.” 그런데 야고보 감독이 이 말을 끄집어내고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는데 아마 한 교회에서 30년 목회를 하다가 이 문제가 너무 심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내가 한번 여기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네 가지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를 중앙에 놓고 양 옆과 아래, 위 이렇게 배치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중앙에 있는 나라고 하는 한 주체를 놓고 무엇이 나의 주변의 관계성을 이룰 수 있는가하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위로 하나님이고 옆으로 이웃이고 그 다음에 아래로 물질이고 그 다음에는 나와 나 자신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속에 두 사람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이 네 가지 관계성을 언제나 잘해야 하는데 이 네 가지를 관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가? 예배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만나서 언제나 예배 대상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다음에 이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셨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으로 연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물질은 선하게 쓰라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에 선하게 쓰라.” 이게 관계성이고, 나와 나 자신의 관계는 “내가 내 자신에게 진실하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와 사랑과 진실과 선용으로 내 주변에 네 가지 둘레를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인데 어디에서 관계가 깨지느냐 하면 반대가 될 때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될 사람이 물질을 예배할 때, 그리고 하나님을 이용을 할 때 죄가 되고, 이웃을 사랑으로 연결을 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때, 나 자신이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아니한 이 균형이 깨지는 것이 죄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나 물질과의 관계나 나 자신과의 관계 이 세 가지는 나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 나 자신에게 진실한 문제 이것은 나 혼자 얼마든지 결정하고 나 혼자 얼마든지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만 가지면 넉넉히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나 혼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웃의 문제는 나 혼자 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과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제일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도 이 문제가 너무 커서 이렇게 아주 노골적으로 오픈하고 인간 차별 문제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중요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이 말이 오늘 말씀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함으로 이웃관계가 바로 된다는 이유를 여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방법론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영광의 주라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완성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영광의 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그게 세상에서 볼 때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그 당시에 다 실패자로 여깁니다. 또, 못을 박혀 죽어야 되는 고난의 주요 죽임을 당하신 세상의 평가 기준으로 보면 완전 실패자입니다.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33살 밖에 안 되는 청년이 왕이 된다고 떠들더니 잡혀서 피 흘리고 죽었으니 실패, 죽임을 당하신 고난의 주입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똑같은 주체를 놓고 영광의 주라고 말했는가? 바로 그것이 세상이 보는 관점의 시각과 성도들이 보는 관점의 시각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주는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로서 하나님이 주신 인류 구원의 사명을 다 끝내시고 하늘 보좌 우편의 권세를 얻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영광의 주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세상은 “완전히 갈릴리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나와서 소란을 피우고 임금님이 된다고 야단 피웠는데 그렇게 실패자로 죽고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말하는데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최고의 영광의 주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빌립보 2장 6절에서 11절에 표현하는 말이 나와 있잖아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을 세상에서는 실패로 규정을 하고 우리 믿음의 세계에서는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그러므로” 하면서 그 다음 말이 이어지죠?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느니라.” 그래서 영광의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통일교라는 이단 종파가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주장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그때 오셨던 예수는 십자가 구원, 그것은 인류 구원의 실패다. 잡혀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실패하지 않은 문 씨 어른이 오신 것이다.” 통일교 신학의 포인트는 이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인간 구원의 실패자이다. 십자가에 잡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실패는 성공으로 다시 오실 메시야가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그것이 영광의 주이다.” 통일교와 기독교의 제일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예수는 인간 구원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금 그 당시 사람도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바로 성경은 “그게 영광이다. 그게 최고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공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차이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바로 그 나사렛 예수는 영광의 주이다.”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영광을 얻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다음에 그 영광의 주가 우리에게 무엇을 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그 영광의 주가 큰 선물을 하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선물이 뭐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매우 깊은 신학적 의미 하나를 해결하게 됩니다. 신학에서는 인간의 타락을 말할 때 전적 타락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완전히 타락성 때문에 자신을 구원할 만한 이유가 0.1퍼센트도 없다고 규정을 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면 완전히 타락한 이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는 백성이 되는 것은 어떻게 될 수 있느냐? “100퍼센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규정하는 신학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뭐냐? 내가 그렇게 하나님의 100퍼센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내 마음 가운데 받아들이고 그대로 고백하는 그 자체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하나가 자신을 구원하는 신앙적, 신학적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들은 다 이러한 신학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믿음이라는 것도 잘못하면 내 공로가 개입될 수 있는 이유를 다소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잖아요? 여러분이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사실 선물이 선물다우려면 갚지 말아야 합니다. ‘아! 저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선물을 하나 했으니 나도 선물하자.’ 이것은 원수를 갚은 것이지 선물답지 않습니다. 선물은 그냥 받는 것입니다. 그냥 받고 잊어버리고 살다가 나도 또 똑같은 의미로 해야지 ‘받았으니 주자.’ 이것은 사실상 피곤합니다. 그러니까 그 받은 것을 언제 무엇을 받았다고 다 적어놔야 하잖아요? 왜? 그 사람은 기억해서 “내가 줬는데 너는 왜 안줘?” 이러잖아요? 이런 선물은 주고받지 마십시오. 피곤합니다. 주었으면 끝났고 받았으면 끝나야 선물입니다. 그런데 믿음 자체도 선물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은 내가 갚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갚습니까? 갚을 수 없는 것을 받았습니다. 이런 큰 믿음을 하나님이 그냥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받아서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아무 생각을 할 게 없습니다. 간혹 믿음이 좋은 것을 조금 자랑하고 싶은 그런 충동을 우리가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혀 믿음 없는 사람들의 내용을 보고 조금은 믿음의 교만을 부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마 정리를 하면 예화가 될 거 같습니다. 시골에서는 부모가 가지고 있는 땅을 자녀들에게 재산으로 물려주는 문화를 90퍼센트 이상, 100퍼센트 정도로 자손 유산 상속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더 심합니다. 세계에서 제일로 이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유대인이고 우리 한국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있습니다. 부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물려받은 부자가 있고 자수성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수성가한 부자는 사실 자랑입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데요? “나는 처음부터 고학으로 공부했고 내가 벌어서 지금까지 살았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빛이 납니다. 그런데 물려받은 부자는 사실은 자랑할 게 없잖아요? 아버지가 다 준 거 아닙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서구 문화에서는 물려받지 않으려는 자녀가 더 많습니다. 아버지가 주겠다고 해도 “아닙니다.” 그 퍼센트를 보면 아버지 것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사람이 50퍼센트가 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교육을 시켜주었으면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문화가 서구 사회는 매우 강합니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모이면 이 문제를 서로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집 사준 거냐?” “응.” 그렇다고 하면 “부끄러운 줄 알라.” 그러니까 안 물려받은 자체를 자랑 삼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걸 왜 아버지한테 달라고 하냐?” 집사님 한 분이 저한테 상담하러 오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녀들이 1살, 2살 때 미국을 간 분입니다. 집사님이 성실하게 일하셔서 돈을 많이 모으셔서 아파트도 50세대 살 수 있는 것을 마련해 두시고 아주 부자가 되셨습니다. 때가 되니까 아이들이 다 컸으니 둘을 앉혀놓고 “아버지가 여기 와서 성실하게 일해서 이만큼 재산을 모았다. 이것은 너 갖고 이것은 너 가져라. 너희들이 결혼할 때 되었으니 주겠다. 그러니 그런 줄 알고 이거 가지고 잘 살아라.” 두 아들이 “싫습니다.” 벌레 기어오는 것처럼 거절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대학 공부를 다 시켜주셨으니 우리가 이제 알아서 잘 살겠습니다. 정 필요하다면 동생이 다 가져라.” “나도 필요 없어요. 형이 가져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아들들이 모두 좋아할 줄 알았는데 충격 받으신 겁니다. ‘그러면 내가 뭐하려고 돈을 이렇게 많이 모아두었지? 이놈들 행복하게 해주려고 돈을 모았는데 이놈들이 안 갖는다니!’ 지금도 안 가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는 이 때다.’ 생각하고 “하나님께 바치세요. 그러라고 주신 겁니다.” 그런데 바치지는 않으시더라고요. 문화가 그러니까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재산은 물려받지 않았다는 자기 자신의 자존심을 가지고 싶은 겁니다. “너희들 그 재산 너희 아버지가 다 주신 거잖아.” 말을 못합니다. 그 관점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믿음이 내가 자수성가 한 겁니까? 하나님이 그냥 다 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린 그냥 모르다가 받아버렸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야. 내 자녀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랑할 게 없단 말입니다. 저는 목사가 되었잖아요? 이게 자랑할 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너를 주었잖아? 네가 목사될 자격이 있냐? 너도 보니까 끼가 있어서 꽤 돌아다니는데 내가 그냥 잡아서 준거다.” 그냥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 이 영적인 믿음의 세계는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라.” 자랑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영광의 주가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내 노력은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았다. 주님이 그냥 주신 것이다. 선물 받았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랑할게 없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그랬느냐? “십자가 밖에는 내가 자랑할 게 없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게 없다.”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한 것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면 그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왜냐하면 네가 그렇게 된 것도 다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런데 선물 받아서 무엇을 자랑하느냐?” 부모님이 다 물려준 재산 가지고 “나는 부자다.” 이것은 부끄러움입니다. “나는 믿음이 좋다.” “네가 무엇을 했는데?” 선물인 것입니다. “주님이 많이 주신 것만 기억하라. 자랑할 게 없으니까 외모로 판단할 것이 하나도 없다. 네가 이룬 것은 다 주님이 주신 것이다.” 이렇게 지금 신앙 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외모로 사람을 많이 취합니다.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성경에 저는 생각나는 사람이 한명 있습니다. 제가 이화여대 근처에서 목회할 때 바로 이웃 교회에 목사님이 계셨는데 바로 이웃 교회에 계시니까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인물이 어쩌면 그렇게 험악하지요? 언뜻 보면 험악한데 자세히 보면 진짜 험악합니다. 심한 표현을 하면 불도그 같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인상만 봐도 함부로 덤비지 못합니다. 눈은 실눈에 턱은 얼마나 넓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장 좋아하는 설교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그래도 내가 구수한 데가 있습니다.” 말하는데 그분은 지금도 목회를 잘하십니다. 정말 인상 보고는 그 교회를 안갈 거 같습니다. 그분이 목사된 것에 대해서 그분의 인상을 보면 정말 인상파 목사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이 야고보서를 제일 좋아한다는 겁니다. “외모로 취하지 마십시오. 얼굴 보고 교회에 오십니까?” 이런 식으로 강조하십니다.
그러면 왜 야고보 감독은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인간관계, 외모 문제를 들고 나왔는가? 유대 사회가 외모로 들고 나오는 문화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외모 때문에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 주일 예배 때 언급했습니다. 도저히 화목할 수 없는 외모 판단 문화 7가지가 있습니다. 지배자와 비지배자! 로마의 권력 구조였기 때문에 이 사회 이웃 문화가 갈라져 있잖아요? “잘 사는 사람은 누구냐? 로마에 붙어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삭개오를 봐라.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주니까 부자가 되었지 않느냐?” 그러니까 딱 끊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들어가시니까 “선지자라는 사람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도다. 우리도 안 들어가는데….” 갈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가 그 지방에서 그렇게 평가를 받은 것은 그의 외모 때문입니다. 친로마파라는 이름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어가셔서 재미나게 이야기하셨잖아요?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 친로마파도 하나님 잘 믿을 수 있다.” 제가 묻겠습니다. 오늘 여기 교회 나오신 분들 가운데 현재 가지고 있는 재산의 50퍼센트를 하나님께 바치실 분 손드세요. 내가 과거에 이 질문했을 때 손 든 사람은 딱 중학생 한명 있었습니다. ‘이야! 그래도 한 놈 있네?’ 그 학생에게 물어봤습니다. “너 재산 얼마 있냐?” 그랬더니 여기 지금 3천원인가 있는데 이거 절반 충분히 내줄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재산 50퍼센트 내주는 거 못합니다. 아무도 못합니다. 삭개오는 했잖아요? 삭개오 같은 교인 교회 안에서 10퍼센트만 되면 세계 선교 하고도 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밭 팔아서 절반쯤 감추어두었다가 야단맞았죠? 죽었잖아요? 그런 일이 벌어져보세요. 갈보리 교인 이 많은 교인들이 50퍼센트씩 정리하면 은행 차려도 되겠습니다. 저축 은행 하나 차려도 되겠습니다. 평생 못합니다. 한 번도 못합니다. 돈 많은 사람 더 못합니다. 삭개오만 같이 하십시오. 예수 잘 믿는 거 같아도 다 삭개오 밑에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외모잖아요? “저건 친로마파야.” 갈라놓았습니다. 그 다음에 유대인과 비유대인! 이것은 절대로 화목할 수 없는 간격으로 출생적 외모입니다. “너는 출생이 어디야?” “유대인이야.” 유대인 앞에서 비유대인은 사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외모가 유대인인 사람만 취급을 하니까 이게 외모인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만난 사람 가운데 믿음의 큰 최고 칭찬을 받은 사람은 비유대인입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군인입니다. 길에서 만났습니다. 백부장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서 이만한 믿음을 못 만났다.” 믿음의 칭찬 받은 사람은 비유대인입니다. 그래서 “네 소원이 뭐냐?” 그 자리에서 들어주셨잖아요? 백부장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비유대인을 제외시켰습니다. 외모로 판단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너무 심하니까 지금 야고보 감독이 목회를 하다가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로마인들 믿음 좋은 사람 얼마든지 있다. 우리보다 낫다. 얼마든지 와서 예배드려야 한다.” 이방인들 못 들어옵니다. 그 다음에 지역의 외모가 있습니다. “너 어디 출신이야?” “남쪽 예루살렘입니다.” “그렇구나.” “너 어디서 왔어?” “사마리아입니다.” “저리 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치 아니했습니다. 지역적 외모입니다. 또, 남녀 외모가 아주 컸습니다. 같은 유대인일지라도 남자들 앞에 여자들은 인격 평가 절대 못 받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안 되었습니다. 차별 문화입니다. 항상 여인들을 이 문제로 괴롭혔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잖아요? 지금은 여성상위시대라고 하잖아요? 한명숙, 박근혜 당 대표에게 정치 지도자들이 쩔쩔 맵니다. 앞으로 이다음에 갈보리교회 담임 목사를 여자 목사 오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얼마 안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여자에게 인권이 없었습니다.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이 이제는 여자도 상 위에서 밥 먹는 시대라고 합니다. 또,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외모가 있습니다. “저 할례 받지 못한 자가 누구관대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모독하느냐?” 이게 굉장한 우월감입니다. 그런데 할례 중에서도 8일 할례자와 중간 할례자는 또 구분됩니다.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어야 진짜 할례자라고 내세웁니다. 중간 할례자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과 결혼했다면 “이제 너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랬을 때 이방인도 할례를 그때 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게 중간 할례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8일 할례자요” 이 말에 꼼짝도 못했습니다. “8일 만에 할례 받은 자이며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다. 피가 섞인 사람이 아니다.”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외모 몇 가지를 들고 나오잖아요? “학력? 내가 가말리엘 문하생인데?” “하버드 졸업생이야. 까불지 마.” 이게 다 외모입니다. 유대 사회는 완전히 외모 문화입니다. “나는 베냐민 지파야. 족보를 따져 봐. 내가 왕 지파야. 나보다 더 외모 좋은 사람 나와 봐!” 꼼짝 못합니다. 이런 외모 문화입니다. 그 다음에 전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차별하는 것이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유대 문화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악착같이 돈을 법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하면 취급을 못 받습니다. 민족성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돈부터 법니다. 보통 악착이 아닙니다. 누구도 못 당합니다. 유대인은 다 부자 되잖아요? 미국의 최고 부자들은 다 유대인들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큰일이란 말입니다. 갈래갈래 찢어진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그 사람의 주변만 전부 평가를 해서 사람을 평가하니까 이게 교회 안에서 화목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하나도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그렇게 심한 차별화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한국 사람도 유대인 같지는 않아도 비슷합니다. 이 야고보서를 우리가 잘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즘에 우리 한국은 성형수술이 보편 문화가 되었죠? 이것도 외모 중심 문화의 보편성입니다. 저더러 자꾸 묻습니다. “목사님! 성형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이게 죄입니까?” 대답해 주어야 하잖아요? “아름다워지려는 노력은 죄가 아닙니다. 하려면 하십시오. 예쁘게 하고 오십시오.” 저는 그렇게 대답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왜 인간관계가 이렇게 교회 안에서조차 어려워지는가에 대해서 한 가지 지적을 저에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지적하겠습니다. 이것은 야고보 감독이 30년 목회하면서 경험한 것인데 저는 야고보 감독보다도 시간은 더 길게 47년 목회하면서 이것은 참 우리가 조심해야 되겠다 생각합니다. 다른 민족에 비해서 한국 공동체 인간관계의 문제가 어디서 오는가? 미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은 속마음을 쉽게 열지 않습니다. 사무적인 관계는 아주 친숙하게 다 해도 자기의 깊은 속마음은 자기만 간직하고 있는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는 좀 다혈적인 민족성이라서 좋다면 간을 빼준다니까요. 그리고 조금 가다가 빼주었으니 얼마나 아픕니까? 도로 내어놓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나와 친했는데 다른 사람과 친한 거 같으면 그게 싫은 겁니다. 보편성의 인간관계를 하는 사람은 누구와 친해도 상관이 없잖아요? “나하고만 친해라.” 그렇게 하면 안 되잖아요? 이것 때문에 교회 안에 늘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들은 편파적 감정을 너무 많이 갖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별걸 가지고 다 편을 만들고 어쨌든 편 가르기 금메달입니다. 유대인들 7가지 편 가르기를 말씀드렸는데 그게 그 사회의 현실입니다. 우리들도 어떻게 하면 편을 가를까 해서 “우리끼리” 이렇게 편을 가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열고 모두를 내 친구로 넓게 인간관계를 갖지 “쟤하고 놀지마! 나하고만 놀아.” 이런 사람은 언젠가는 자기가 간 빼어준 것 때문에 또 괴로워합니다. 여러분! 미가서 7장 5절을 못 보셨습니까?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성경이 성경입니다. 내 품에 있는 여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 같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괜찮고 간 뿐만 아니라 위장까지 다 빼어주어도 괜찮을 거 같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이게 삶의 지혜입니다. 외형적인 것은 아주 친절하게 모두 다 해도 일정한 거리는 우리가 항상 유지합니다. 우리가 옛날 말에 아주 좋은 말 많이 있었습니다.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 네 흉이 드러날까 함이요 너무 멀리 하지 말라. 너를 원망할까 함이라.”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이런 지혜는 우리가 공동체 생활에서 배워야 합니다. 다 공통적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성을 잘 지켜야 교회가 건강하고 가면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편 가르기를 하면 그것이 모두의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담임 목사인데 예를 들어서 우리 부목사님들이 10명 계신데 내가 양 목사만 좋아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다른 목사들이 ‘무슨 이유일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양 목사로 하여금 오히려 어렵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게 지혜입니다. 우리 야고보서를 다 마친 다음에는 이 문제가 우리 자신에게서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삶의 철학을 이제부터 바꾸겠다.’ 이렇게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원망 받을 것도 없고 누구에게 흉을 잡힐 것도 없습니다. 정말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지 그냥 엊그제 사귀어서 간을 다 빼어주고 후회하고 있으니 이게 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저는 가족적인 교회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은 가족끼리만 그래야지 가족적인 교회를 만들다가는 나중에 가족이 안 될 때 그 원망이 어디로 갑니까? 의를 중심으로 해서 모이는 공동체이어야지 정을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가 되면 날마다 싸운다니까요. 우리는 주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자랑은 십자가뿐이다.” 이것만입니다. 간을 빼어주려면 주님께 빼어드려야지요. 성도의 자부심! “나는 하나님의 자녀의 선물을 받았다. 이 선물을 가지고 평생 영광의 주로 모시자.” 오늘 말씀은 핵심이 거기입니다. 여러분!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생의 역전
약 2:5 / 정동제일교회
“아 하나님의 은혜로”
런던 올림픽 선수들 중에 역전승을 거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예선에선 기록과 순위가 좋지 않았지만 금메달을 딴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 사격의 진종오(33) 선수가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본선 5위에서 막강한 경쟁자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대역전극으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올림픽 개인종목을 2연패한 한국 최초의 선수이며 한국 사격 선수 첫 2관왕이 되었습니다. 한국 올림픽의 전설이 된 진종오 선수, 그의 신조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역전극과 대역전승을 거둔 사람들을 통해서 받는 감동이 크고, 교훈도 많습니다. 인생의 역전, 누구나 다 원하는 바입니다. 최선을 다하며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 인생의 역전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야고보서 2:5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생의 역전’을 거듭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야고보서 2:5 전반의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사도 야고보에게 있어서 당시 교인들은 그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형제들을 책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분명히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사람을 외모도 판단하며 차별했습니다. 만일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회당에 들어오면 좋은 자리에 앉게 하였습니다. 반면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거기 서 있든지 가지 발 아래에 앉으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악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2:1)며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차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물론 가난한 자들이 모두 믿음에 부요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투스 프토쿠스)의 헬라어 표현에서 관사 ‘투스’를 사용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되는 자들이 가난한 자들 중에서도 한정된 자들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자들 중에 한정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하신 최초의 설교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고 하셨습니다. 또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그 제자를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라며 대답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몸소 가난한 자가 되셨으며,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택하심을 받고 믿음에 부요해진 사람은 차별과 좌절 속에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역전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조현석 변리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교 450명 중 꼴찌였습니다. 대학에도 가기 싶고 성공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세 번의 대학시험 낙방 끝에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군대에서 그는 한 군종병의 인도로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저도 공부하고 싶습니다”라며 기도했습니다. 성적은 바닥이고, 집안 형편도 어려운 그가 대학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기도한 이후로는 한 번 읽은 것은 모두 암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는 제대 후 단 2개월 동안 공부를 해서 대학시험을 치뤘습니다. 놀라웁게도 그는 국민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 수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6년간 수업료 전액 면제와 매월 20만원씩 학비보조금도 받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도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공부를 하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로 책을 읽는 족족 다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수석을 놓쳐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국민대 공대 수석 졸업, 87년 제23회 기술고등시험 수석 합격, 그는 특허청 사무관에 임용되어 근무하다가 지우특허법률 사무소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2012년 ‘신지식 특허인’에 선정되었습니다. ‘신지식 특허인’ 조현석 변리사의 인생 역전, 그것은 곧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9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패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역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역전을 맞이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결코 자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역전을 체험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며, 하나님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받게 하십니다.
야고보서 2:5 후반의 말씀입니다.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사도 야고보에게 있어서 당시 교인들은 그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에서 천대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과 질병 등등으로 소외되고 멸시 받았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된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 받을 수 없는 자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택해 주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자, 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더 이상 자기 인생을 비관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는 자신의 약함을 크게 기뻐하며 자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해 주시고,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 받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 첫 번째 축복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누가는 마태와는 달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고 단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눈6:20)라고 했습니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가난한 자는 자칫 잘못하면 좌절과 절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역전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 정인태 회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97년 미국 아웃백 본사로부터 한국 영업권을 취득하여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다음 해 불어 닥친 IMF 때문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높아진 환율로, 수입하는 식자재 비용은 높아지고, 은행 이자는 나날이 불어나며, 얼어 붙은 경기로 매출은 뚝 떨어졌습니다. 어음 만기는 하루 하루 닥쳐오고, 정회장은 화장실에서 수돗물을 틀어 놓고 직원들 몰래 엉엉 울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오리라 기대했지만 그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마음 속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기도를 할수록 외자유치만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IMF로 외국자본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가는 시기에 외자를 유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나의 후원자가 되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기 안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기적적으로 투자자를 만나 30분만에 1300만 달러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한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세금도 정직하게 내고, 음식도 정직하게 만들고, 이익도 정직하게 계산하여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고, 직원과 동료들에게도 정직하게 배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축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매년 매출이 늘어 2005년에는 70개 업소에서 2200억원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 망해가던 아웃백 스테이크하우스를 한국 패밀리레스토랑 업계의 1위로 올려 놓은 정인태 회장의 간증 제목은 ‘망한 회사를 업계 1위로 역전시켜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든든한 후원자로 삼은 정인태 회장의 인생 역전,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나라와 기업을 상속으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로마서 8:28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기업을 상속으로 받게 하십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의 역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역전을 맞이한 사람은 결코 자기가 역전시켰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전시켜 주셨다고 간증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의 역전을 체험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며, 하나님께만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지난 토요일 새벽 런던 올림픽 축구 태극 전사들이 3.4위 전에서 일본팀을 2대0으로 물리치고 동메달을 땄습니다. 사실 그간 일본팀은 3승 1무 1패였고, 한국팀은 2승 1무 1패였습니다. 그런데 한국팀이 통쾌하게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첫 골을 넣자 마다 박주영 선수는 먼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나운서는 박선수가 일본 선수 서너 명을 제치고 골을 성공시키자 원맨쇼를 하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순간 제 마음 속엔 박 선수가 원맨쇼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뛰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생의 역전, 그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나라와 기업을 상속으로 받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생의 역전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약 2:5-7 / 박상훈 목사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사도 야고보는 지금 목회자의 심정으로, 애정 어린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야고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말씀에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이며,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 교인들의 수가 어쩐 일인지 날이 갈수록 점차로 줄어만 갔습니다. 그러니 목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게다가 주변에서 활동하는 갱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마음은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도대체 좋은 일을 한다는 교인들의 수는 나날이 줄어가는데, 어떻게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갱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간단 말인가? 정말 말세는 말세야!"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우연히 갱단의 두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궁금한 듯이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네 교인들의 수는 나날이 줄어가는데, 어떻게 당신네 갱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갑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갱단의 두목은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당신들보다도 사랑이 더 많거든요."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우리들이 갱단의 깡패들보다도 사랑과 의리가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까? 교회가 늘상 부르짖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의 눈에서조차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까?
옛날에 어떤 왕이 자기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학자 한 사람을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겠소? 당신에게 귀한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학자는 서슴없이 한 마디 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지요. 왕께서는 나쁜 짓은 하지 마시고 착한 일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왕은 학자에게서 무엇인가 특별한 가르침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평범한 말을 하니까 왕은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왕은 언성을 높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까짓 가르침을 받으려고 내가 당신을 이곳으로 불렀소?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다 아는 소리가 아니요?"
그러자 학자는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착한 일을 하라는 것은 네 살짜리 어린 아이로부터 여든에 이르는 노인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을 하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은 아닙니다. 쉬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는데서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빈부귀천 물론하고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복을 내려주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도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귀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외모를 바라보지 말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십시다. 우리가 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그를 귀히 여기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 가운데 절로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말씀 속에서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지극히 축복하십니다. 반면에 부자들 가운데서는 횡포를 일삼으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그 사람이 가난하다고 무조건 괄시해 버리고, 그 사람이 부유하다고 해서 무조건 그의 편을 든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소중히 여기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면서 그 누구든지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도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네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택하셨습니다. 둘째,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넷째, 그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괄시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 가운데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외모를 조금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등소평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중국의 거인이었습니다. 그의 키가 컸기 때문에, 그를 거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키는 불과 150cm 남짓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깔볼 수 없도록 만든 장본인이 바로 등소평이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닉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서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등소평은 미국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키가 크고 등소평은 키가 작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그가 자기 손을 올려서 악수를 해야 되는데, 등소평은 절대로 손을 올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키 큰 미국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키 큰 미국 사람들은 악수는 해야 되겠고 어쩔 수 없이 등소평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공손한 모습으로 악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중국 관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악수를 하시는데 일부러 손을 내리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때 등소평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르는 소리! 내가 13억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자네는 잊었는가?"
자기 밑에 13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콧대 높은 미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앞에서는 당연히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언제나 당당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때로는 외모를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 때도 있습니다. 병들 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갖춘 외모를 우리가 갖추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해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토록 유업으로 받는 백성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물론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 속에서 가난 그 자체를 미덕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만 택하시고 부자들은 다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엄연히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삭개오는 새리장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또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에디오피아의 내시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이었습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로서 재력가였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은 부유한 사람도 택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도 택하여 주십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엄청난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의 외모를 판단해서 그가 가난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를 괄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이 부자라고, 내가 갖추지 못한 것을 그 사람이 갖추었다고 해서 우리가 시기하면서 그를 꼴보기 싫어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낮아지고 그는 높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가난에 처한 분이 계십니까? 병든 분이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한 번 역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가난하게 하십니까? 왜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를 병들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려고 하심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그렇게 해서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서 왕자로 있을 때는 세상적으로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때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가 되었을 때, 그는 세상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된 것입니다. 탕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부유할 때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적으로 가난해질 때 되돌아왔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시는 것입니까?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적인 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믿음의 부, 곧 영적인 부가 훨씬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부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를 낮추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 대한 괄시를 질책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괄시하지 아니하시는데,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지는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그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괄시해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회당에서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들어왔습니다. 손에 금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었습니다. 안내하는 자들이 얼른 나가서 그에게 의자를 내주며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의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얼른 앉으라고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외모 때문에 괄시를 당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또 그들 가운데는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외면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고전11:21∼22에 보면 초대 교회의 애찬식에서 있었던 일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각자가 음식을 마련해 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넉넉한 사람은 자기 음식을 충분하게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는 형편이 여의 치를 못해서 자기 먹을 음식도 마련해 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넉넉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넉넉한 사람은 자기가 가져온 음식이라고 해서 자기만 먹었습니다.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불렀지만,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시장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괄시를 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가난한 자를 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지극히 배려해 주셨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니다.
번제를 드릴 때를 생각해 봅시다. 수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고려하셔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도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빚을 내었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7년이 되면 채무가 면제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른바 면제년의 규례였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몸을 종으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종살이하더라도 50년이 지나면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희년의 규례입니다.
한 가지 예만 더 들어보십시다. 밭에서 곡물을 거둘 때 다 추수하지 말고 모퉁이를 일부러 남겨두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고 떨어진 이삭도 도로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의 열매를 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매를 다 따지 말고 남겨두라고 했습니다.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것으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양식을 삼을 수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괄시하지 아니하시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의 형편을 배려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따뜻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결코 괄시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감싸주고 배려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사도 야고보는 부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 하반부와 7절 말씀입니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그 당시 부자들 가운데 있었던 횡포, 그들의 악행을 사도 야고보는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압제입니다. 둘째는 법정에 가서 고소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첫째, 부자들은 사람들을 힘으로 억눌렀습니다. 착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배를 채운 것입니다. 한 가지 실례가 약5: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부자들은 마땅히 품군에게 주어야할 품삯을 주지 않고 착취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자들이 자기 재물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들의 횡포입니다.
둘째, 부자들은 법정에 끌고 가서 고소했습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기사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제 2차 전도여행때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점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종은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을 물질적으로 이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은 바울과 실라 일행을 볼 때마다 소리지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당신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기 위해서 온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를 보고 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종은 더 이상 점을 못 치게 되었습니다. 주인들은 돈벌이가 끊겨졌습니다. 그래서 여종의 주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저자 곧 시장에 있는 법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관원들에게 이렇게 고소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성에 와서는 이상한 풍속을 전하면서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과 실라는 옷이 벗겨진 채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여종의 주인들과 법정의 관리들이 다 한통속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자들의 횡포입니다. 힘이 있으니까 법정에 끌고 가서 고소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입니다.
"왜 아니꼬아? 그러면 돈 벌어!"
이것이 바로 부자들이 하는 악행입니다.
셋째, 부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했습니다. 성도는 지극히 존귀한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컫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을 짓밟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자들은 이처럼 사람들을 압제하기도 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소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그 사람이 그저 부자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사람 앞에서 비굴하고 무조건 그의 편을 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괄시해서도 안되고, 그 사람이 부하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그 사람 편을 들어서도 안되고, 그 사람을 꼴보기 싫어해도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 자매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생각하십시다. 그리해서 누구를 대하든지 절대로 소홀히 대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기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 속에 절로 사랑의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빌레몬서의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는 멀리 로마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섭리로 거기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믿음의 감화를 받았습니다. 오네시모는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편지 한 장을 써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서 16절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더 이상 오네시모를 종처럼 노예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외모와는 상관없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외모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사랑 받는 형제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 승동 교회는 백정교회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천대받는 사람들, 외모적으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습니다. 교회연혁을 한 번 읽어보시면 제일 먼저 장로로 장립 받은 사람 가운데 박성춘장로라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백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서 천대받는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축복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을 대할 때 외모를 대하지 말고 그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대하는 심정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꽃을 아름답게 피울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바라볼 때 "야, 승동 교회는 사랑이 절로 꽃피우는 교회구나!"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온 백성들이 우리를 칭송하고,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과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날로 더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약 2:8 / 강성찬 목사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 여승진이란 이가 새 집을 샀습니다. 누군가 집값을 물으니 1천 1만 금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집이 그렇게 비싸냐고 하자, 1만 금으로는 집을 사고, 1천만 금으로는 이웃을 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과의 화목공존을 얼마나 중요시 했던가 손에 잡히는 듯합니다.
중종 때 학자 김정국도 `천금으로 밭을 사고, 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는 시를 남기고 있다 합니다.
지혜의 글에는 "만일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고 가정해 봅니다. 이 아이를 두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아니면 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하느냐? 이에 대해 어떤 사람은 머리가 두 개이니까 두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몸이 하나이니까 한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합니다. 두개의 머리 중 한 머리에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부어 만일 양쪽이 다 뜨겁다고 놀라서 울면 바로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 쪽은 뜨겁다고 우는 반면에 다른 한 쪽은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다면 그것은 두 사람입니다.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도 강도만난 사람에게 진정한 도울 자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지 않는 사람이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참된 이웃은 사랑하는 이웃이 진정한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달동네로 갔습니다. 집집마다 돌면서 기도하고 위로를 하는 등 구제 사업을 했습니다. 어느 날 한 집에 가니까, 어떤 여자가 소아마비를 앓아서 온 팔과 다리가 마른 막대기처럼 빳빳하게 굳어 있는데 너무너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더럽고 냄새도 나지만, '저 사람이 언제 제 때에 따뜻하게 밥을 먹어 보았을까? 언제 따뜻한 물에 목욕 한 번 해 보았을까? 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저 사람에게 저녁을 따뜻하게 지어서 대접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이 언제 목욕을 제대로 한 번 했겠습니까? 예수님도 제자들의 발을 씻겼는데, 제가 목욕을 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하고 서원 기도를 하고 날을 잡아서 차로 그 분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와서 목욕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목욕을 시키면서 벌써 후회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 몰골이 너무 흉해서 쳐다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서원대로 따뜻한 밥을 먹여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 남편이, "당신 정말 천사 같구먼. 당신은 요즘 금세기에 보기 드문 천사 같은 아내야." 하고 칭찬을 하는데, 문제는 그날 저녁에 일어났습니다. 이 부인이 그 여자를 집으로 모셔다 드린 다음에 그 숟가락을 버리려고 하다가 꼭 저주를 받을 것만 같아서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밤새도록 씻은 것입니다. 물론 욕조도 밤새도록 씻었습니다.
자기가 밥 먹고 난 다음에도 수저를 그렇게 씻습니까? 욕조도 그렇게 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욕조를 씻으면서, 설겆이를 하면서 이 부인이 '이것이 위선이구나. 내가 참 더러운 인간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남편에게 사람 마음이 그렇게 추하고 악하더라는 고백을 했답니다.
하늘나라 천사 둘이서 세상에 내려왔는데 한 천사는 가난한 노동자의 모습으로 또 한 천사는 부잣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몇 해 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두 천사는 서로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저 세상은 참으로 살 곳이 못되는 곳이야.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잘 사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힘들고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거든." 이 말을 듣고 있던 두 번째 천사는 이상하다는 듯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상하다. 난 강아지의 모습이었는데도 사람들은 내게 고급 음식을 아끼지 않고 늘 보살펴 주던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기와 어우러져 살아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아." 첫 번째 천사의 탄식이었습니다.
요즘 각 가정에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외아들이나 외동딸인 경우 외로울까봐 일부러 그런 애완동물을 키우는 가 봅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우리 주위에는 생각 외로 어렵고 외로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실 때 서로 도우며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진정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해 최소한 애완동물에게 기울이는 관심의 이상으로 사랑을 나누어야겠기에 하는 이야기입니다.(디럭스바이블- 노동자와 강아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나쁜 일이나 야고보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행위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왜 불합리한가를 설명하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 합니다. '최고한 법'(노몬 바실리콘)은 '왕'의 법'이라는 말입니다. 당시에 로마 황제에 의해 제정된 법은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법이었습니다. 야고보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법은 그 자체가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이 하나님의 법은 다른 율법보다 포괄성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주장하는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레 19:18; 마 22:39). 곧 상대방을 외모로 구별하지 않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가족처럼 도와주며 사랑합시다.
날씨가 매섭게 추웠던 겨울날 하필이면 실외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열차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던 중 옆에서 함께 열차를 기다리던 젊은 어머니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가 추운 날씨 탓인지 꼬옥 끌어안고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순간 열차가 들어오고 추위에 떨고 있던 엄마와 아이는 황급히 열차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이의 어머니는 연신 아이를 쳐다보며 밝은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엄마와 아이가 스쳐 지나간 곳에는 손에서 떨어져 나간 목발을 다시 짚고서 약간의 통증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부끄러운지 이미 닫혀버린 열차 문을 뒤로하고 유유히 다음 칸으로 몸을 옮겼습니다. 타고 내리는 사람들 틈에서 아이에게만 신경을 쓰느라 미쳐 목발을 짚고 있던 청년을 밀친 것을 느끼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는 생각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름다운 세살 인 줄 믿습니다.
이웃의 사랑을 체험한 어떤 분의 간증입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12시가 다 되어 늦게 집에 돌아오면 꺼져있는 연탄불. 아무리 해봐도 16시간 동안 연탄을 갈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아내가 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 집에 돌아오면 아내의 환한 반겨 맞음은 참으로 따뜻함이었는데 아내가 없는 집은 연탄불까지 꺼져버린 싸늘함입니다. 오늘도 집에 들어서자마자 열쇠로 문을 따기보다 먼저 아궁이 뚜껑부터 열어봅니다. '아! 그런데 웬일이냐?' 빨갛게 이글거리며 타고 있는 연탄불. 그리고 따뜻한 열기. 향긋한 냄새(?)...이건 아니고, 누군가가 연탄불을 갈아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3일이나 천사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하 할머니가 갈아놨나? 아니면 옆방? 아니면 인택이네 식구들 중 누구? 아니면 연탄들이 내가 불쌍해서 자기들끼리 스스로 회의를 해서 임무교대를 한 건지...' 누군지도 모르는 분으로부터 3일간이나 따뜻한 도움을 받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삶이란 다른 여러 '정의'가 많지만 나는 이렇게 삶의 정의를 내려 봅니다. “방 구들장 선뜩선뜩. 그 싫은 느낌을 연탄은 제 몸 살을 따끈따끈하게 해주지 않는가. 매일 세수하고 이빨 닦고 발 닦고 걸레 빨 따뜻한 물도 데워주고, 된장찌개 보글보글, 밥해 퍼먹으면서도 연탄의 희생을 생각이나 해 봤는가.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은 나를 산산이 부수는 것이 아닌가. 눈이 내린 아침에 예쁜 아가씨 뾰쪽구두 신고 가다가 미끄러져 엉덩이 깨지면 안 된다고 그나마 남은 재마저 빙판 길에 팍팍 부딪혀 부수어지는 연탄재 같은 것 아닌가. ‘그래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과 연탄이 되어라.’ 고맙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시지만 연탄을 갈아주신 분이어. 부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그리고 연탄 계속 갈아주소서!”( 누구일까, 이 고마움)
두 화가가 기독교 진리의 두 가지 양상을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두 화가 모두 휘몰아치는 폭풍과 성난 파도에 휩싸인 커다란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위기에 빠진 어부가 두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단지 자기만 살려고 발버둥치는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어부가 한 손으로는 십자가를 꽉 잡고서 바다에서 헤어나려고 애쓰는 동료를 구하려고 다른 손을 내미는 그림이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삶이라는 고해'의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그리스도인이 지향할 바를 더 생생히 표현했을까요? 한 손으로 '험한 십자가를 꽉 붙들었다'면 다른 손은 물에 빠져 애타게 구원을 바라는 내 이웃 사람들에게 내밀어 '바다를 놀랍게 지배하시는'예수께로 이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겸손히 내가 먼저 이웃을 사랑합시다.
유명한 흑인 교육가 부커 워싱턴 박사가 앨라배마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한 후 그 지역의 부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백인 부인이 그가 워싱턴 박사인줄 모르고 그냥 지나가는 흑인이려니 해서 멈춰 세우고 몇 달러 줄 테니 장작이나 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총장은 그때 특별한 일이 없었고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장작을 패서 그녀의 벽난로 옆에 차곡차곡 쌓아주었습니다. 일이 다 끝나 그가 돌아간 후 그 집 흑인 하녀가 그를 알아보고 주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그 부인은 너무 부끄럽고 당황해서 다음날 아침에 총장실로 찾아가 백배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부커 워싱턴 총장은 “부인, 괜찮습니다. 저는 가끔 가벼운 육체노동을 좋아합니다. 그뿐입니까. 이웃을 위해 돕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요”하며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 겸손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을 세워주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2)
어느 동네에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 어디론가 이사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식구들을 다 이끌고 다른 동네로 떠나갑니다. 그는 그 동네를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동네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식하고 가난하고 예절도 모르고 욕심은 많고 싸움질만 하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다 못하여 이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같은 시간에 다른 한 사람은 식구들을 데리고 그 동네로 이사해 들어옵니다. 역시 차에 짐을 싣고 그 동네를 떠나가는 그 사람이 살던 집을 사서 그리로 이사를 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동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많이 앓기도 하고 불행하게 산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볼까 하여 이 동네로 이사 오기로 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식구들과 함께 그들을 힘자라는 대로 도와 볼까 합니다" 그 동네를 떠나는 첫째 사람은 좋은 이웃을 찾아서 이사를 가는 것인데, 아마 모르긴 해도 그가 바라는 좋은 이웃을 영원히 찾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헤매거나 실망의 쓴잔을 마시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둘째의 이사 오는 사람은 짐작컨데, 어디를 가든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맡기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부산 사상구 엄궁동의 '외갓집 사골 해장국' 주인 박기인(40)씨는 요즘 손님을 맞을 때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합니다. 박씨에게는 '손님'이라는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라 합니다. 개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는 박씨는 남들처럼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위해 하룻동안 해장국을 서비스했습니다. 그리고 출입구 옆에 성금함도 갖다 놓았습니다. 마음껏 먹고 마음껏 돈을 내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그냥 나가도 되는 '자율 모금'이었습니다. 행사 당일 주방에서 나간 해장국은 모두 200여 그릇. 한 그릇에 4천원이니 어림잡아 80여만 원 어치입니다. 손님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모금함을 제대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나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영업이 끝난 뒤 함을 열어보니 무려 103만 5천원이나 들어있었다 합니다. 박씨는 이날 자선 행사를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쓰려고 했지만 그마저 동네 새마을 부녀회원들이 몰려와 설거지, 홀 서빙을 무료 봉사를 해준 덕분에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동사무소에 "의탁할 곳 없는 어르신네들을 위해 써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 온 박씨는 요즘 30여평 가게에서 사골 해장국보다 더 구수한 인정과 사랑의 내음을 맛보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어느 작가는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이 우리에게 준 예기치 않은 선물은 어려운 이웃을 한 번쯤 더 돌아보며, 그들을 돕는 일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삶의 기쁨은 지극히 평범하고 상투적인 모습을 빌려 우리에게 찾아오곤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삶의 기쁨을 찾아가는 모습도 그러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행20:25)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어느 날 전 재산이 반 크라운(2실링 6펜스)밖에 안 되는데, 마침 가난한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어머니가 몸져 누워있었습니다. 하룻밤을 넘기기 힘든 엄마와 아기였습니다. "이 돈이 1실링짜리 동전 3개와 6펜스 동전 하나라면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 텐데!"하는 생각이 그에게 들었습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로우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권면하면서도 속에서는 "이 위선자, 이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반 크라운을 움켜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그의 가슴속에 울려왔습니다. 마음에 가책을 받은 그는 그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반 크라운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골길을 지나 단칸방으로 걸어오는 발걸음은 그의 빈 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 빌려드린 것이 오래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저는 내일 점심부터 굶어야 합니다." 다음날 우체부 편으로 반 소프린(10실링)의 금화 하나가 우송되어 왔습니다.
쟝발장이 빵 하나를 훔쳐 감옥에 가서 몇 번 탈옥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19년 형을 살고 출옥을 했는데, 그날 밤에 갈 곳도 잘 곳도 없어 길거리를 헤매다가 한 성당에 들어가 “19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나왔는데 아무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신부님이,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식사를 하시오”하며 금 그릇에 은촛대를 켜고 최고의 대접을 하며 새 이불을 깔아 주니 잠을 자다 새벽에 깨어 어떻게 살까 생각하니 막막합니다. 아무도 오라는 사람도 없고 밑천도 없습니다. 은촛대와 금 그릇이 눈에 아른거리며 ‘저것만 가져가면 밑천으로 해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신부를 배반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하다가, ‘어차피 버린 몸인데 도둑인데’ 하고 은촛대를 들고 나가다 경찰에 잡히고 끌려와 “이것, 신부님 것 맞죠?”하니 “그것은 내가 준 것이고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나갔는데요.” 하자 경찰이 나가자 “쟝발장, 나는 은촛대로 당신의 영혼을 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세요.” 이 말을 듣고 쟝발장은 뉘우치고 참된 사람이 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성도로서 이웃을 사랑합시다. 가족처럼 도와주며 겸손히 먼저 사랑하고 하나님께 맡기며 사랑합시다. 이웃 사랑이 최고의 법이라고 합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약 2:8-13 / 박상훈 목사
옛날 어떤 마을에 두 명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한 여자는 자기보다도 열 살이나 연상의 여인이었습니다. 반대로 다른 아내는 자기보다도 열 살이나 연하의 여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은 여자는 아무래도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과 같이 사니까 남들 보기에 조금은 쑥스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자기 남편을 나이가 좀 더 들어 보이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에게 올 때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남편의 머리 속에서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주었습니다. 나이가 적은 여자는 반대였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으로 하여금 좀 더 젊어 보이도록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자기에게 올 때마다 그는 기회가 되는 대로 남편의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주었습니다.
남편은 불쌍하게도 이 집에 가서 검은 머리카락을 뽑히고, 저 집에 가서 흰 머리카락을 뽑혀서 번갈아 가며 뽑히기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내들의 등쌀에 남편의 애꿎은 머리카락만 죄다 뽑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얼마가지 않아서 그는 빤질빤질한 대머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두 여인은 자기 남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동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거짓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나를 희생하는 것만이 참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의 서신서에서 종종 참과 거짓을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믿음에도 참 믿음이 있고 거짓 믿음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믿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짓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1:26∼27에 보면 경건에도 참 경건이 있고 거짓 경건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참 경건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는 경건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지 않는 삶은 거짓된 경건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 3:13이하에 보면 지혜에도 참 지혜가 있고 거짓된 지혜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참 지혜입니다. 성결합니다. 언제나 화평을 이룹니다. 그러나 거짓된 지혜도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입니다. 이런 거짓된 지혜가 있는 곳에는 다툼과 시기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늘 소란합니다. 악한 일만 생기게 됩니다.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사랑에도 참 사랑이 있고 거짓 사랑이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때 그것은 참된 사랑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나님께로부터 이러한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사랑도 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해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식으로 차별대우하는 것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사랑을 가장한 이기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결론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외모를 바라보지 말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참된 사랑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8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 말씀은 구약성경 레19:18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이 말씀을 "최고한 법"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가 제정한 법은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감히 황제가 제정한 법은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왕의 왕되신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감히 이 세상에 그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최고한 법입니다. 지고의 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도 이 말씀을 어긋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율법사인 것을 아시고 그에게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더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는 잘도 대답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인정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잘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렇게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그러자 율법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있는 것을 다 빼앗겼습니다. 옷도 벗겨졌습니다. 실컷 맞아서 인사불성이 된 채 길바닥에 누워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도움을 주어야만 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가다 보면 우리 눈앞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보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 사람의 외모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그 사람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고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의 몸과 같이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지 않아도 우리의 몸 돌보기를 저절로 터득합니다. 배고프면 먹입니다. 추우면 옷을 입힙니다. 병들면 약을 먹이기도 하고 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이와 같이 돌보듯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 있으면 그렇게 보살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25:4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돕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13:2∼3에 보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돌보아줄 때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롯도 그러했습니다.
어떤 청년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몇 달을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음에 드는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한다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그는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다행히 서류전형에서 합격을 했습니다. 그는 회사로부터 정해진 날 면접을 보러오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면접 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침부터 잘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넉넉하게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서 차를 몰고 회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도중에 그는 웬 아주머니가 길가에 차를 세우고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우기 위해 쩔쩔 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간이 조금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아주머니 대신에 자기가 펑크난 타이어를 갈아 끼워주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회사로 갔지만 면접이 다 끝나버렸습니다. 그는 인사과를 찾아가서 사정을 했지만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풀이 죽은 채 뒤돌아 서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회사로 출근하세요."
그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웬 아주머니가 웃고 계신데 조금 전에 길가에서 자기가 도움을 주었던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가 바로 그 회사 사장님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셈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할 때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우리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가 최고한 법을 지켜 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거짓된 사랑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결코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가장한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이것을 사도 야고보는 "죄"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외모를 많이 갖춘 사람도 있고, 반면에 외모를 많이 갖추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부자를 만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와 친하게 되면 많은 덕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돈이 필요할 때는 돈을 빌릴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필요하면 보험도 들으라고 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자식들의 취직부탁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만나면 환한 미소를 띄고 인사도 잘합니다. 그리고 온갖 친절을 베풉니다. 이런 것은 참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동기가 불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2:4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반대로 가난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와는 친해보았자 별로 덕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을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도와주기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성가십니다. 그래서 애써 못본 척 외면해 버립니다. 또 꼭 만나야 될 일이 있으면 아예 눈아래 보면서 괄시해 버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명백히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에 위반되는 행동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러한 사람을 범죄자로 단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아니 내가 도적질한 것도 아니고, 간음을 행한 것도 아니고, 살인을 행한 것도 아니고, 그저 사람의 외모를 좀 보고 차별적으로 대했을 뿐인데 그것이 무슨 큰 죄가 됩니까?"
이런 불감정을 사도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단호하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예를 들어서 설명해 봅니다. 여기에 큰 거울이 하나가 있습니다. 쇠망치로 거울의 중앙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큰 거울 전체가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깨져버릴 것입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은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 조항을 어겼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다른 율법도 다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한 가지 실례를 통해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율법을 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렇게 반문합니다.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십니까? 나는 간음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도적질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증거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부모님께 효도했습니다. 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단 한 가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만 어겼을 뿐인데 내가 율법을 범한 자라니요? 정말 섭섭한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겠습니까? 아닙니다. 한 가지를 범하게 되면 그것 역시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세상법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일평생 동안 나라를 위해서 수고를 많이 했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에 실수해서 그가 죄를 범하게 되면 그는 죄인입니다.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야고보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시시한 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한 가지 만으로도 충분한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외모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 긍휼의 마음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면서 그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외모를 보고서 가난하다고 해서 괄시하고 부자라고 해서 아니꼽게 생각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우리 삶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도 야고보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셨으니까,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그 마음을 가지고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우리말 성경은 원문을 직역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대로는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리를 파악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두 권의 책이 놓여있다고 했습니다. 한 권은 생명책입니다. 또 한 권은 행위의 책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생명책에는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의 책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들이 적혀 있겠습니까? 위에서 살펴본 대로 사도 야고보는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율법에 어긋나는 행동과 말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만일 그런 것이 행위의 책에 깨알같이 모두 적혀있다면, 우리는 그 책이 펼쳐지는 순간 절로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범죄자로 정죄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치스러워서 감히 천국 문을 향하여 걸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절로 우리의 발걸음은 그 반대 방향으로 옮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모세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롬8:1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 관한 행위의 책에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거기에는 아무것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는 깨끗이 씻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기록이 되어 있다면 이 말씀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음. 의롭다 하심을 받았음."
그 책은 자동적으로 우리 눈앞에서 덮여질 것입니다. 우리는 큰 감격 가운데 기쁜 마음으로 천국을 향해서 우리의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 기록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외모를 조금 갖추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다. 믿음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입니다. 천국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과 행동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똑같은 원리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품고서, 말도 그렇게 하고 행하기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13절 말씀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했으니까 긍휼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긍휼을 행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율법적인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행위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죄를 이미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심판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행위의 책은 곧 닫혀지고, 우리는 할렐루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그 자녀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들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무궁토록 영생복락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의 결론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서 우리도 누구를 대하든지 간에 그 사람의 외모를 보고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눈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듯이 누구를 대하든지 우리도 그 마음을 품고서 대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괄시하지 마십시다.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꼴보기 싫어하지 마십시다. 부자도 역시 우리가 모르는 남모르는 무거운 짐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사람들도 우리가 긍휼을 품고 대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가운데는 사랑의 아름다운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열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긍휼의 마음을 품고 누구를 대하든지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을 보면서 예수님 앞에 내가 서 있는 심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히 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날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와 가난에 대하여
약 2:9-11 / 인명진 목사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필요한 것은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가난은 행복한 삶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라 생각합니다. 가난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고, 가난 때문에 생의 좌절을 겪어 본 사람에게는 그 강도가 더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는 행복이고, 가난은 불행이라 단정 지으려 합니다. 더욱이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라는 인식이 팽배합니다. 가난이 하나님의 저주라는 인식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팎에 매우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을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생존이 확보되지 않으면 행복하기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절대 가난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사회의 모든 정치적 갈등이나 사회적 갈등의 뿌리를 캐 들어가 보면 결국은 부와 가난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인류가 살아있는 동안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숙제입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표면적으로 빵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성을 고쳐야 해결되는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문제를 비켜 지나가지 않고 아주 정직하게 답변합니다.
저는 조금 생소한 방법으로 부와 가난에 대해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몸을 괴롭히는 육체의 가시, 고질적인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 질병이 안질이라 말하는 분도 있고, 간질이라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바울은 몸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질병을 떠나가게 해달라고 주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했습니다. 받은 은혜가 많으니 더 이상 병 낫기를 구하지 말하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후부터는 몸에 있는 가시를 크게 기뻐하고,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했습니다. 저는 바울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와 가난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습니다. 우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육체의 가시는 반드시 뽑아야 할 아픔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기 때문에 자만하지 못하도록 육체의 가시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원치 않았지만 바울을 위해서는 육체의 가시가 필요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시는 아픔이면서 동시에 은혜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진리로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자 역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대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의 유익함을 위해 동일한 방식으로 대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보기에는 불편하고 억울한 것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아픔 때문에 더 성숙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원하지 않는 가시를, 매우 불만스러운 상황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가시처럼 가난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가 하나님 나라에 가깝고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가 없이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불평등을 극복하는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70년만에 막을 내린 공산주의가 이런 배경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난과 가난한 자가 없는 것이 과연 이상사회일까요? 가난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는 저주의 대상일까요? 가난은 인간을 위해 어쩌면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요? 공산주의는 소유의 균등한 분배를 통해 부자나 가난한 자가 없는 평등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적 방식은 일차적인 지혜에 불과합니다. 매우 평면적인 해결방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신비롭고 다원적이며 입체적입니다.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만,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만 있는것도 허락하시고, 부자에게만 있는 것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공존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부자들만 사는 사회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사회가 과연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사회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눔이 있고 눈물이 있고 사람 사는 맛이 나는 사회일 수 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사회는 부와 가난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부자는 정의롭지 못한 탐욕자로, 가난한 자는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쪽은 자기 재물 지키기에 여념이 없고, 한쪽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불만이 가득합니다. 이런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문제는 불평등의 댓가를 어느 한쪽만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나 가난한 자가 동시에 지불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공존하면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호해주고, 사랑으로 서로를 품는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커다란 감동과 훈훈함이 온 사회를 뒤덮지 않겠습니까?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함께 껴안는 모습 속에서 진한 기쁨과 사랑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사회가 부자들로 가득한 사회보다 균등한 분배로 획일화된 사회보다 훨씬 더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사회보다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공존하는 사회가 하나님의 지혜에 걸맞은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부자를 만드시고, 부자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 부한 자는 낮아지는 법을 배우고, 가난한 자는 높아지는 법을 배우게 하셔서 세상을 치유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책임지는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문제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사람들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하면서, 부자로 사는 것을 정당화합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회피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가 옆에 있는 것을 늘 부담스러워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자들만 사는 동네를 만들어 가난한 자들을 따돌리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또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들에게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마25:45)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가난한 자들에 대한 책임을 다했느냐 다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가난한 자에 대한 책임을 다했는지 여부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잠언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빌려주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만이 들려주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20세기 후반에 신교와 구교를 망라하여 가장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헨리 나우웬을 첫 손가락에 꼽을 것 같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고백을 들어볼까요? 헨리 나우웬은 카톨릭 사제로서도 명망이 있었고, 하버드대학교 상담심리학 교수로서도 세계적인 석학이었습니다. 나우웬은 사제와 교수 자리를 내놓고 캐나다의 데이 브레이크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갔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아담이라는 장애인을 돌보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난생 처음 장애인을 돌보는 일을 맡은 헨리는 아담을 어떻게 돌보아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사제의 자리도, 교수의 자리도, 자신의 명성도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헨리는 도움을 주는 갑이고, 도움을 받는 아담은 을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차 형세가 역전되어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적어도 장애인 공동체 안에서는 아담이 헨리의 선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아담은 헨리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강연을 다닐 때면 꼭 장애인 아담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헨리가 강연할 때마다 아담을 옆자리에 앉혀두고 아담은 인생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선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담이 죽은 후에 헨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아담과 관계를 맺었고, 그는 내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우리의 관계는 내 생애 가장 의미 있는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담의 죽음은 내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는 어떤 책이나 교수 이상으로 나를 예수님의 인격으로 다가가도록 이끌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잠을 깨워주는 전화 벨 소리였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입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형제가 되고, 빈부의 격차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는 길이요, 믿음의 증거하는 길입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없는 사회보다는 가난한 자가 있는 사회가 훨씬 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오해를 받을 여지가 많은 발상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마지노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가난한 자를 형제로, 부한 자를 자매로 동시에 인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시선이 현실화되기에는 인간이 너무나 악합니다. 절대 현실화될 수 없는 하나의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공존과 화해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와 가난은 끝없이 투쟁하고 씨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화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성경이 말씀하는 부와 가난에 대한 지혜를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삼킨다고 통렬하게 말씀합니다. 자본의 거대한 힘 앞에 노동자들의 삶이 저당돼 있고,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자본가들의 목구멍은 가난한 자들의 생존 기반을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자본이 돈을 벌고, 큰 것이 작은 것을 삼키는 것이 당연한 질서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자본이 갑이고, 사람은 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즘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삼킨다는데 있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를 만나면 “생존 기반은 남겨두고 잡아먹어야 개척교회도 살고, 큰 교회도 살지 않느냐?” 볼멘소리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는 교회마저도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하물며 세상이야 말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어떤 이론이나 지혜로도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고, 사회적인 장치를 제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과정은 정의롭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위해 부자를 세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승복하기가 어려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라고 내세우지만 실은 부자들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비아냥거림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를 쌓는 과정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현실적 인식 앞에서 무슨 이야기가 먹혀들겠습니까. 부자를 적대시하고 투쟁하는 것 외에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부와 가난의 문제는 복잡해져버렸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는 결코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소망을 가집니다. 목사인 저마저 소망가지 않으면 누가 이 사회를 향해 희망의 메아리를 들려주겠습니까? 듣는 이가 없겠지만 작은 목소리로라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라는 진실을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기쁨으로 배려하고 돌보고 나누고 존중하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기쁨으로 축복하고 그들의 돌봄을 감사히 받으며, 부자들을 깨우기 위해 나를 가난케 하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육체의 가시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듯, 가난도 사라하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저주의 자리에 빠져든 것 같은 상실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멀리 좀 더 깊이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면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가 너무 아파 빼달라고 간구했지만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때부터 가시가 아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와 같이 가난에 대해서도 한없이 불편하고 억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오히려 가난을 통해 겸손하게 만드시고, 자신을 믿음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신다고 기뻐하며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한 신앙의 사람은 있는데, 왜 가난에 대해서는 내게 유익이라는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를 공존케 함으로써 부자와 가난한 자를 동시에 치유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라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저는 가난에 대해서도 능히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가난 앞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신앙의 세계,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아는 것입니다. 가져서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오늘 서신서 말씀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것이 있습니다. 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까? 아니면 사람을 부패하게 만들고 변질 시키는 시험입니까? 반대로 가난은 무엇입니까? 가난은 나를 순결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능한 나를 드러내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가난은 무능하고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는 부에 대해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야고보 사도가 왜 이런 첨예한 내용을 서신으로 보낸 것일까요? 당시 여러 교회의 가장 큰 시험거리가 부자와 가난자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부를 지키는 과정에서 많은 시험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부의 서열에 따라 목소리의 크기도 달라지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빈부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부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 문제입니다. 가난한 자가 지나치게 부자 되려고 하면 욕심에 빠지고 신앙을 팔아버립니다. 부자가 자기 부를 지키기 위해 모든 정력을 기울이고 있다면 그 또한 욕심에 빠져들고 신앙을 뒤로 밀쳐버립니다. 가난한 사람도 시험에 듭니다. 부자도 시험에 듭니다. 물질 앞에서 시험 드는 것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매 한가지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권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형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풍성한 부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돈이 없다고 기죽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른 봄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있습니다. 산에 피는 진달래가 있고, 정원에는 목련이 핍니다. 진달래는 시골 처녀 같습니다. 반대로 목련은 고고한 귀부인 같습니다. 누구나 목련처럼 인생의 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이 진달래와 같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어야 합니다. 목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진달래도 아름답습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에게 없는 아름다운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여서 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자들과 풍요에서 소외된 가난한 자들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양자 간에는 알력이 생기고 계층이 형성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좀 더 잘 살려고 하는 상승욕구가 있습니다. 부한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들을 살펴보면 양자가 모두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시련은 무엇보다도 물질의 빈곤에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물질의 빈곤으로 인하여 사회 계층으로부터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은 어떤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받기도 어렸습니다. 혹 기회가 온다고 하여도 가난으로 인해 부자들과 같이 그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고 깊은 좌절감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한 자들은 물질의 풍요함이 오히려 시련이 됩니다. 물질의 풍요함은 부자들로 하여금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고 나태 속에 빠지게 만들며, 세상 쾌락에 묻혀 그 영혼이 부패하도록 방치하기 쉬운 것입니다. 부한 자들은 모든 일에 자기중심적으로 되기 쉽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데 소홀하며, 하나님을 잊기 쉬운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성경의 해법은 무엇입니까?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난 때문에 기죽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자는 자신이 하나님에 의하여 부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이라는 어려움이 더욱 겸손하게 만들어주고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더욱 사모 할 수 있는 간절함을 더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가난한 자가 받기가 훨씬 쉽습니다. 부자들보다 신령한 면에 있어서는 훨씬 더 좋은 조건입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는 더욱 땅의 물질에 대하여 지나치게 애착을 가지기보다는 하늘의 유업을 상속받을 자처럼 위에 것을 더 사모하여 깊은 우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부한 자에 성경의 해법이 무엇입니까?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부한 자가 그 부요함으로 인하여 쉽게 생기는 영적 빈곤과 시련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길 뿐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똑같은 형제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판단할 때에 물질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물질로 인해 오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나 물질의 많음을 자랑하는 행동을 포기해야 합니다. 부한 자가 낮아짐을 자랑하는 자리에 갈 수 있다면 세상의 물질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쾌락에 자신을 내어 맡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정함이 없는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심령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물질을 맡기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물질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용하여 다시 물질을 세상에 재분배하면 진실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물질의 소유에 따라 행복이 결정되는 것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소유를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명령합니다. 가난한 자는 높음을 자랑하라.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 이 말씀 지켜 빈부의 갈등을 뛰어넘는 믿음의 이야기를 세상에 유통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