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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백작'이라는 낭만적인 제하의 소설이 있다. 일반적인 여느 소설과는 달리 5~60년대 명동을 드나들던 김수영, 박인환 같은 시인을 주축으로한 문인들을 위시하여 소설가 화가 신문 잡지사의 기자 편집자들을 포함하여 소위 문학및 예술계에 종사한다는 이들의 명동 출입상과 다방 카페 주점 음식점등에서 벌어진 이들의 엽기적인 사건들을 묘사한 다큐먼터리소설이다.
4,5년전에 EBS방송에서 인기리에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작가 이봉구씨는 우리들에게 작품이나 명성으로 널리 알려진 바가 없어 참고삼아 인터넷 인물란을 검색해보니 1916년에 출생하여 1983년에 이미 작고하신 것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해방 전후를 통하여 매일신문 서울신문의 기자 생활을 거쳐 자유신문 경향신문의 문화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처음에는 시를 쓰다가 뒤에 소설로 전환하였는데 주로 명동의 선술집이나 다방을 작품배경으로 하여 출입하는 실명인물을 주제로 하여 사소설(私小說)을 주로 섰다고 소개되어 있다. 명동백작은 그의 별명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는 시인 소설가 기자, 화가, 음악가, 건달 ,다방이나 카페의 마담, 주인등을 합하면 아마 족히 백여명에 쉽게 이를 것 같다.
내가 첫직장을 가져서 상경한 해가 1968년 가을이다. 이후 근 30여년을 명동에서 직장생활를 했으니 백작이라는 귀족적인 냄새를 풍기는 과분한 칭호까지는 필요없고 명동찌끼미(지킴이)소리는 들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시나 소설을 쓰는 문인도 아니요 그림이나 음악 연극등에 관련된 예술인도 아니어서 만나는 사람들도 없었을 뿐 아니라 다방이나 음악감상실 카페에 같은 곳과는 거리가 먼 한 중견섬유무역회사의 직원으로서 명동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명승과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는 소문난 이들업소의 흥망 성쇠를 직접 겪으면서 보고 들었기 때문에 이들 유서깊은(?) 업소들을 중심으로 나의 지나간 젊을 때의 명동시절을 회상해 볼까 한다.
내가근무하던 직장이 있었는 빌딩은 당시 서울에서 3대빌딩에 포함된다는 퇴계로 프린스호탤 맞은편에 연해 있는 한일빌딩이었다. 당시 3대빌딩이라 함은 규모와 시설면에서 고급빌딩으로 세번째 손가락안에 든다는 을지로 입구 지금의 롯데 호탤 건너편, 옛 미 문화원옆의 삼성빌딩, 옛 시경옆 북창동의 해남빌딩, 퇴계로의 한일빌딩이었다. 한일빌딩은 대부분의 층을 주로 대한석유공사(주(SK)인수전)에서 임차해 있었으며, 한독약품, 영진약품등 당시에도 지명도가 높은 회사들이 입주해 있어 군소 업체들은 입주하기가 꾀나 어려웠다.
지금의 명동 한복판인 셈이고 얼마전까지 제일백화점및 빌딩이 있는 자리(지금은 ZARA, FOREVE21,Shopping Mall및 M Plaza)엔 명동공원이였다. 숲이 있고 벤취가 있는 시민들이 휴식할 수 있는 아늑한 공원이 아니고 그저 공터에 이름만 명동공원이라 불려지고 있었다. 아마 6.25때 파괴되어 복구되지 않은 채 폐허로 남아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한강변 이촌동이나 강남으로 신개발붐이 일기전엔 명동공원 주변엔 음식점이나 주점, Beer Hall등이 자리하고 있었고 주도로 번화가에는 양복점, 양장점, 양화점등이 있어 우리나라의 최첨단 유행을 창조하는 유행의 산실로 일컬어 졌다.
지금은 자취도 없어졌지만 송옥양장점, GQ양복점,금강, 칠성, 케리브룩 양화점, 한식당 명동 한일관, 충무로의 진고개, 명동입구의 문예서림, OB's Cabin, 유네스코빌딩의 Sky Lounge, Savoy, Metro, ,뒤에 Royal호탤등, 주점과 커피 샆 大蕃 花園등 고급일식집이 많았다. 지금은 명품의류점이나 악세사리 또는 식음료를 겸한 젊은이들에게 인기있는 퓨전식당으로 바뀌어 주말이나 휴일에는 학생들및 일본관광객들로 쇄락해가던 경기가 명동의 엣 명성을 되찾고 있다고 한다.
젊은 청춘시절을 명동에서 다 보내고 이제 60을 넘은 장년으로 옛 동료들과 가끔 명동을 찾아 옛추억을 더듬으며 거닐기도 한다. 아쉬운것은 명동의 유일한 한식당 명동한일관과 충무로 진고개식당, 동해루라는 상호의 중국집등 이름난 먹거리집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점이다.명동 입구의 '취천루'라는 3대째의 중국인만두집이 아직도 옛 명맥을 유지하며 성업중이고 옛 식당이라야 로스구이로 유명한 신정, 명동칼국수집, 오징어섞어찌개집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요사이 찾아가는 집은 '명동돈까스'집이나 백제삼계탕집에서 점심을 하고 부근의 깨끗하고 분위기 있는 'coin' 이라는 카페에 들려 커피를 마시며 옛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내가 가볍게 다니던 Beer Hall ' Hong Kong Center',기분이 내키면 가끔 회사 동료들과 들리던 로얄 나이트 클럽에서 'GOGO'로 밤을 세우고 새벽통금 시간이 풀리면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가서 쓰린 속을 달래고 회사에 출근 한 희미한 옛추억들이 지금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
내가 명동생활을 시작할 때는 이미 해방후 화려한 불야성을 이루며 청춘을 구가하던 명동1세대들의 불우한 단명으로 인한 조기 퇴장과 함께 명동의 명성이 주변 소공동, 무교등으로 옮겨질 때이고 이들 명동 세대들이 마지막으로 한잔술 막걸리를 나누며 낭만을 구가 했다는 명동의 마지막 보루 '은성식당'이 문을 닫은 후이라, 명동의 옛 이야기들이 더이상 구전되지 못하고 전설속으로 묻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지나날의 명동과객의 한 사람으로서 아쉬웁기 한량없다.
사진출처 : 카페 <그때를 아십니까?> 카우보이님 자료 <1966년 4월경 문예서림 간판이 보이는 명동입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