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섬을 보다 / 문태준
저녁에
물결의 혀를 빌려 조금씩 고운 모래톱을 바깥으로 밀어내놓은 작은 섬을 바라본다
외부에서 보는 섬은
새뜰로 가는 길에 있던 돌비석이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고
뒷마당에서 시득시득 말라가다 천천히 무너져내리는 나뭇동 같기도 한데
저녁에
조금씩 바깥으로 흘러보내는 것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 문태준, 『맨발』(북카라반, 2013)
제부도 / 백현국
바다가 보고 싶다는 여자를 데리고
제부도 갯고랑을 걸었다
바지락이나 캐며
같이 살아보면 어떨까
조개구이집에 설거지라도 해주며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비린내 나는 젖은 길을 걷다가
험한 물살을 겪는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물었다
혼잣말처럼 물었다
온몸이 물기뿐인 여자의
치렁치렁한 머리칼 묶어주며
기어코 눈 젖어오는 뻘밭만 보고 있었다
불안한 꿈을 누르고 차오르는 수면
제부도엔 닻을 내리지 못한 꿈이
물때를 따라 왔다 길을 잃고 갇혀 있다
제부도/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는,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의 거리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차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말인가? 이별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제부도/ 류윤모
거기 뭘 두고 왔던가
잃어버린 그 무엇이라도있을것만 같아
들어갔던 사람은
뒤가 돌아보여
한번은 다시 들어가 봐야 하는섬
아쉬운 소설의 결말처럼
묘령의 여인이
젖은 눈으로
하염없이 기다라고 있을 것만 같은
해무海霧에 싸인 제부도
육지와 연이 닿아
글썽이는
가느다란 마음길을
안타까이 이어놓은 섬
그도저도 아니라해도
주당답게
반쯤 마시다 맡겨둔
소줏병이라도 있어
쳐 죽여야 할 조바심에
자나깨나 시달리는 섬 이거나
누군가는 이마위 번뜩이는
날선 수평선을 들어
얽히고 설킨
그 무엇을 일도양단할 일이라도 있어
찾아 들었겠나
철 지난 옷자락에
절망과 우울을
덕지덕지 쳐 바른 저 사내
바다가 보이는 횟집에 앉아
다들 웃고 떠들며
파도의 살점을 집어 들고
쓴 소줏잔 털어 넣는다해도
시끌벅적 술자리
파破하고나면, 쓸쓸
낯선 잠 자리에 들면
사람에 따라서는
눈 속에 박혀
빼버릴수도
지워버릴수도 없는
섬 하나 쯤 떠오르지 않겠는가
제부도/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그러나
닿지는 않는,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의 거리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차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말인가? 이별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무의도 / 공광규
거잠포구 지나 잠진 선착장에서 뱃길 따라
소주 반 병 마시는 사이에 도착하는 섬이 있다
봄에는 파도가 벚나무와 아까시나무에 흰 포말을 올려놓고 가고
가을에는 노을이 나뭇잎을 물들이고 가는 섬
썰물에 가슴을 열어 실미도에 길을 열어주고
갈비뼈를 꺼내 소무의도에 다리를 걸쳐준 섬
사랑을 선택한 남자가 민박집 여자와 소라고둥을 삶으며 산다는
소주 반 병으로 취해도 좋을 섬
육지에서 도망친 갈매기눈썹을 한 여자와 살림을 차려
갈매기처럼 통통한 아이를 낳고 싶은 섬이다
- 공광규, 『담장을 허물다』(창비, 2013)
간월도 / 노향림
간월도에 와
간월암 너무 아득해서 그만두고
높은 돌계단의 해탈문에 이르러
누구나 한번쯤 옷깃 여민다는 그곳도 말고
나지막한 바위섬 아래 갯벌로 걸어내려가리.
하루에 두차례 햇볕 아래 펑퍼짐한 알몸 드러낸
석화 초만원의 나라,
갈고리와 파도가 싱싱한 엇박자로 울리는 세상,
등에 꼽추처럼 짊어진 대바구니 내려놓고
사람들 틈에 나도 퍼질러 앉아
만조도 깜박 잊고 석화를 캐리.
바닷물이 와 정강이와 허벅지를 서늘히 누르면
일몰에도 가라앉지 않고 뜬 간월암 절집의
깜박이는 둥근 등불 바라보며
시간 앞에 넋 놓고 앉아
시간 따위는 잊어도 좋으리.
화엄은 멀고 수평선에 박힌
석화만큼 이지러진 초승달 앞에
까고 있던 한 소쿠리 비린 목숨 내려놓고
바다 밖으로 해탈하듯 잦아드는
달빛 소리나 귀담아들으리.
- 노향림,『푸른 편지』(창비, 2019)
백령도 / 김윤배
제 가슴이 저렇지요 장산곶 앞바다로
휘돌아나가는 물목은 늘 해무에 갇혀
안타까웠지요 이곳 백령도 사곶리에서
냉면 사리를 뽑으며 사리원 생각 불 밝히면
빤히 건너다보이는 장산곶, 붉은 피 새로이 돌지요
검푸른 물목 웅웅 우는 인당 물길 위에
아련한 낮달, 청이를 맞고 보내며 늙은 가슴
설레서 날마다 저 붉은 바위 끝에 서서
해무 지켜보지요 지켜보다 해무되지요
- 김윤배,『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문학과지성사, 2007)
비래도 / 김선태
ㅡ 작은 엽서 · 25
내 사랑은 다녀갔다, 한 번
다녀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썰물 지듯 세월이 빠져나가고
내 사랑 바다로 가 섬이 되었다.
이미 다녀갔다 내 사랑은, 한 번
사랑의 형식은 그것으로 완벽하다.
- 김선태, 『한 사람이 다녀갔다』(천년의시작, 2017)
비양도 / 이종형
하귀에서 애월까지 구비진 길을 지나
하얀 이 드러낸 어부의 웃음이
생선 비늘처럼 활짝 날리는
한림항도 지나
가슴 찔리기 좋은 각도에 멈춰 선 노을 앞에서
그대를 바라본다
만날 수 없어서 더 애틋한
사랑 하나쯤 있어도 좋겠지
평생 그리워만 해도 좋을
그런 섬 하나쯤 남겨두어도 좋겠지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고
끝내 다다르지 못해도 좋은
촉수 낮은 등불이 하나둘 켜질 때까지
지켜보다 그냥 돌아서도 좋은
- 이종형,『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삶창, 2017)
함박도 / 문인수
경상남도 통영시 미륵도에 딸린 작은 섬.
현재, 열여섯가구에 60대 이상 주민 스무남은명이 산다.
사람의 바다엔 저렇듯 섬이 있고,
섬이 있어 바다가 아름답다.
목에, 동뫼, 우무실, 굼터, 골에, 독발에, 섯바들, 아랫몰, 후력개, 맨주름, 진살에, 나지막, 밭등, 차암박, 함박끝……
노인들은 오늘도 이 섬을 이루는 곳, 곳, 저 여러 이름들을
푸른 함지박 모양으로 한데 모아
그 바다에 다독다독 잘 심어두는 것이다.
- 문인수,『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창비, 2015)
욕지도 / 문인수
섬의 길들은 섬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유동마을 덕동마을 도동마을 대송마을 돌아오는데
내 마음도 꼬아 샛길 치며 꼬리 감추는 길
녹음 속 바람 아래 낮은 지붕들을 묶거나
등이 휜 灣에 내려가 작은 고깃배를 푼다.
혹은 후박나무꽃 향기의 숱한 파도 소리로 풀려서
그 노래가 밀어올린 저 절벽 꼭대기
야생으로 나간 염소들이 몰래 몰려 있다.
섬의 길들은 섬 안으로 되돌아간다.
- 문인수,『동강의 높은 새』(세계사, 2000)
보길도 / 문효치
누워 있던 추억 한 채
일어서서 울먹이더라.
울먹이면서
남해 푸른 물 끌어다가 덮어쌓더라.
난잎이나 고사리 작은 키에까지도
얽혀 있는 고산의 노래
꽃가루나 홀씨가 피어
피우피우 날아 오르더라.
바람은 세월의 무게에 눌려
허연 슬픔이 되고
이윽고 물에 내려 첨벙대더라.
동백꽃 터지게 터지게
붉어가더라.
- 문효치, 『남내리 엽서』(문학아카데미, 2001)
삼학도 / 허형만
그리워하는 것은
언제나 섬으로 떠서 흐르나니
오늘도 푸르른 파도를 딛고
깃털 하이얀 물새
하늘 높이 비상하듯
삼학도를 가슴에 품고
삼학도와 함께 떠서 흐르는
사람의 꿈은 아름답다
마침내 햇살도 새로이 살아오고
예전처럼 손을 흔들며
섬을 돌아 나가는 뱃고동 소리
맑은 바람 끝도 생생하게 보이나니.
- 허형만, 『비 잠시 그친 뒤』(문학과지성사, 1999)
무인도 / 이경호
해마다 저 혼자
봄을 기다려 딱 한철
울긋불긋
진달래 치마 차려입고
머리핀을 꽂는 섬
일 년을 기다려
딱 하루
생일상 받아놓고
더덩실
좋아 웃는 노인네 하나
- 이경호,『비탈』(도서출판 애지, 2014)
독도 / 정일근
슬픔을 참으면 시가 되고
눈물을 참으면 노래가 되느니
조국의 시가 되고
국토의 노래가 되는
그대, 우리의 섬이여
그대 더 이상 조국의 막내가 아니라
잠들지 않는 첨병이려니
국토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워정척사려니
내 눈을 뽑아 너에게 주마
내 심장을 꺼내 너에게 주마
오늘은 시가 되지 말고
뜨겁게 분노하라
오늘은 노래가 되지 말고
활화산처럼 포효하라
- 정일근, 『오른손잡이의 슬픔』(도서출판 고요아침, 2005)
어청도 / 박성우
1
군산항에서 나를 버리고 배에 올라야
세 시간 만에 만나주는 서해의 검푸른 고래등
사람들은 그 위에서 쌀을 안치고 그물을 손질한다
2
서녘 해가 마지막 고름 풀어
섬을 알몸으로 안아보고 치맛자락 길게 떠난다
검불로 조개를 구워먹던 악동들은
별 을 달궈놓고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뜨거워진 구들장에 몸을 바꿔 눕다가
별이 미지근해지기 전에
출어를 서두르던 어청도 사내들,
흰수염고래 같은 파도를 끌고 입항하면
그제야 생각난 듯
등 돌려 자던 달이 마저 지워진다
이른 햇발에 걸려든 포말이 튀는 동안
어판장 아낙들은 걸쭉한 입담으로 목을 축인다
어젯밤 이불 속에서 피웠을 해당화
갯바람에 꺼내놓고 호들갑 떨다 보면
금세 손질되고 도막나는 하루가 가뿐하다
주낙에 낚시를 매는 주름살 깊은 노인
줄을 잡아당기는 양 손가락에 들어간 힘이
검버섯 핀 볼에서조차 수평선처럼 팽팽하다
생각하면, 저 짱짱한 매듭 같은 것이
사람들을 군산의 끄트머리 섬에 묶어두었다
- 박성우, 『거미』(창작과비평사, 2002)
외딴 섬 / 천양희
어려운 일은 외짝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실존 때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아직 밟지 않은 수많은 날들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자기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일어설 때까지는 믿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외딴 섬이라는 것을 이제야 겨우 믿게 되었다
- 천양희, 『그녀의 푸른 날들을 위한 시』(북카라반, 2020)
고도(孤島)를 위하여 / 임영조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 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표지 그려진 금표비 꽂고 한 십 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 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세상과 먼 절벽 섬 될까? 한 평생 모로 서서 웃음 참 묘하게 짓는 마애불 같은.
- 임영조,『귀로 웃는 집』(창작과비평사, 1997)
[출처] 주제별 시 모음 327. 「섬」|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