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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전고(官職典故) 홍문관(弘文館)
신라에서는 상문사(詳文師)라 하다가 ‘통문박사(通文博士)’라 고쳤으며 또 서서원(瑞書院)을 설치하였다.
○ 고려 예종(睿宗)이 대궐 안에 청연각(淸燕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뽑아서 조석으로 경서를 강론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서 청연각이 궐내에 있으므로 학사들의 일직 숙직과 나고 들기가 곤란하다고 하여 그 곁에 별도로 집을 마련하고 이름을 ‘보문(寶文)’이라고 고쳤다. 이어서 홍루(紅樓) 아래 편 남랑(南廊)을 보수하여 학사들이 모여서 강하는 당(堂)으로 하고 당 이름을 ‘정의(精義)’라 하사하였으며, 그 당 좌우에 휴식하는 장소를 만들었다. 거기에 뽑혀 충원된 사람은 모두 당시의 호걸이었다.
또, 숭문관(崇文館)ㆍ홍문관ㆍ수문전(修文殿)ㆍ집현전ㆍ우문관(右文館)ㆍ진현관(進賢館)과 제학(提學)ㆍ학사 등의 관직이 있었다.
○ 세종 2년에 비로소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세종조 조에 상세하다.
○ 세조 2년에 집현전을 폐지하기를 명하였다.
9년에 양성지(梁誠之)의 건의로 서책을 간수하는 내각(內閣)을 홍문관이라 하고, 예문관 봉교 이하의 관원으로서 박사ㆍ저작ㆍ정자(正字)를 겸임시켜서 비각(祕閣) 문서의 출납을 맡게 하고 그 중에서 다만 문신만을 가려서 예문관 응교를 겸임시키고 경연에 참석하게 하였다. 용재(慵齋)가 말하기를, “문관 수십 명을 가려서 겸예문(兼藝文)이라고 일컫고 날마다 불러들여 논사(論思)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 성종 원년에 예문관을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부제학에서 수찬까지 17명이었는데 모든 문한(文翰 외교 문서)ㆍ경연ㆍ기주(記注 기록) 등의 일을 집현전의 예전 예와 꼭 같게 하였다.
10년에 고쳐서, 홍문관을 설치하였는데 영사(領事) 한 사람 정승이 으레 겸하였다. 대제학 한 사람, 제학 한 사람, 모두 다른 벼슬아치가 겸하였다. 부제학ㆍ직제학 전한(典翰)ㆍ응교ㆍ부응교 각 한 사람씩, 교리ㆍ부교리ㆍ수찬(修撰)ㆍ부수찬(副修撰) 각 두 사람씩, 박사(博士)ㆍ저작(著作) 각 한 사람씩, 그리고 정자(正字)가 두 사람이었다. 직제학에서 응교까지를 동벽(東壁), 교리에서 수찬까지를 서벽(西壁), 박사에서 정자까지를 남상(南牀)이라고 일컬었는데 모두 경연을 겸대하였으며, 부제학에서 수찬까지는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성종이 집현전의 예에 의거하여 홍문관을 다시 궁전 곁에 설치하고 문학과 재주와 행실이 특출한 선비 17명을 뽑아서 날마다 교대로 숙직하게 하여 그들을 매우 후대(厚待)하였다. 경사(經史)를 강할 때 도의(道義)로써 풍간(諷諫)하게 하고, 자주 궁중의 술 빚는 법[醞法]을 베풀었다. 또 정원(政院)에 불러 모아 승지들과 대작하게 하였고, 노비를 많이 하사하여 부리게 하였으며, 또 관(館)에서 부리는 하인들은 모두 은패(銀牌)를 차게 하였다. 《용재총화》
○ 연산 11년 을축에 홍문관을 폐지하고 경연을 고쳐 ‘진독(進讀)’이라 하였다. 《문헌비고》에는 진독청이라 하였다. 이어서 관원도 개혁하여 예문관으로서 겸하게 하고 예문관에 봉교 이하 네 사람, 주서(注書) 두 사람을 더 두었다. 《고사촬요》
12년 병인 여름에 4관(館) 박사 이하를 다른 관청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본관(本館)의 직무를 겸하게 하였다. 《고사촬요》
○ 중종 초년에 홍문관을 복구하였는데, 영사 이하는 모두 경연과 춘추관(春秋館)을 겸하게 하였다.
○ 궐내에 번 드는 각 관청 관원은 항상 사모(紗帽)를 썼고 감히 갓이나 두건을 쓰지 못하였는데, 옥당과 춘방(春坊 세자시강원) 관원만은 갓을 썼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조종 조에서 일찍이 옥당에 갓을 하사하였더니 그것이 준례가 되었는데, 춘방에서는 자신들도 옥당과 더불어 사체(事體)가 균등한 까닭으로 옥당을 본받았다.” 하였다. 《홍문관지(弘文館志)》
○ 양성지가 소를 올리기를, “가만히 보면 역대의 서적을 혹 명산(名山)에 간수하고 비각(祕閣)에 간수한 것은 유실(遺失)에 대비하여서 영구히 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전조(前朝) 숙종이 경적(經籍)을 간수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책에 찍힌 인장이 어떤 것은 ‘고려국 14엽(대(代)) 신사년 어장서 대송 건중 정국 원년 대요 건통 9년(高麗國十四葉辛巳歲御藏書大宋建中靖國元年大遼乾統九年)’이라 하였고, 어떤 것은 ‘고려국 어장서(高麗國御藏書)’라고 되어 있습니다. 숙종으로부터 지금까지가 3백 63년이 되었으나, 찍은 인장이 어제 찍은 것과 같아서 문헌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지금 궐내에 간수한 만 권 책도 숙종 때에 간수하여 전해진 것이 많습니다. 지금 간수하는 책 뒷면에는 ‘조선국 제6대 계미년 어장서 대명 천순 7년(朝鮮國第六代癸未年御藏書大明天順七年)’이라고 해자(楷字)로, 앞면에는 ‘조선국 어장서’라고 전자(篆字)로 모든 책에 인장을 찍어서 만세에 환하게 보이고, 또 모든 책을 간수한 내각(內閣)을 ‘홍문관’이라고 하여 대제학ㆍ직제학 등의 관원을 두어 예문관의 관원이 겸무하게 하여 책의 출입을 맡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좇아서, 비각 서적을 옛 동궁(東宮) 동편에 있는 작은 집에 간수하고 집 이름을 ‘홍문관’이라고 하여 예문관 봉교 이하의 관원에게 관장하도록 명하였다.
○ 시종(侍從 홍문관원)이 소를 봉해 올리는 일은 이계전(李季甸)에게서 비롯하여 성하여졌다. 세조 명신조에 상세하다.
○ 양성지가 여러 번 소를 봉해 올려서 당시의 일을 논하였다. 세조 명신조에 상세하다.
○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에는 주점(朱點)을 찍는 예가 없었는데, 중종이 어린 나이로 대통을 이었으므로, 보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로소 구절에다가 붉은 점을 찍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였다. 《홍문관지》
○ 가선(嘉善) 품계로 부제학이 된 것은 조원기(趙元紀)로부터 비롯하였다. 중종조 조에 상세하다.
○ 옥당의 상번과 하번이 반드시 면대해서 교대하였다. 명종조에 박계현(朴啓賢)이 번을 들었는데 이준민(李俊民)이 일찍 교대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르기 전에 궁궐 문이 갑자기 닫혔다. 계현이 서문 안에서 한참 기다리니 준민이 천천히 오고 있었다. 계현이 분해서 책망하였더니, 준민이 말에서 미처 내리지도 않고, “이같이 책망하면 나는 돌아간다.” 하면서, 곧 말을 달려 가버렸으므로, 계현은 마침내 나가지 못하였다 한다. 근래에 와서 옥당 관원이 임의로 교대할 사람이 오기 전에 먼저 나가고 간혹 날을 넘겨 번을 궐(闕)하기도 하며, 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은 세도(世道)가 변한 때문이다. 《지봉유설》
○ 이황(李滉)이 응교가 되어서 날마다 경연에 들어갔다. 명종이 사(社 토지의 신)를 세운 본 뜻을 물었으나 이황이 마침 기억하지 못하여서 자세하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러 나와서는 곧 문헌을 상고하여 기록해 가지고 동료에게 말하여서 아뢸 준비를 하도록 하고 나서 병을 핑계하고 사퇴하였으니 그가 직책에 충실함이 이와 같았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
○ 옥당관이 으레 지제교를 겸무하는데 이를 ‘내지제교(內知製敎)’라 하고, 다른 벼슬로서 겸무하는 자는 이를 ‘외지제교(外知製敎)’라 한다. 무릇 시급한 교서는 반드시 옥당관에게 짓도록 명하였다. 선조조에 홍모(洪某)가 옥당관으로 있었는데, 글재주가 졸(拙)하여 교서를 능히 지어 바치지 못하였으므로 곧 벼슬을 사퇴하고 갔으니, 대개 공론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지봉유설》
○ 옥당에 번 드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괴롭게 여겨서 회피하였다. 선조조에 성낙(成洛)이 가장 심하여서 번 차례를 어기고 들지 아니하거나 혹 들었다가도 곧 나갔다. 허봉(許葑)ㆍ김수(金睟)ㆍ김찬(金瓚)ㆍ이성중(李誠中)ㆍ이원익(李元翼)ㆍ김응남(金應男)이 함께 옥당에 있었는데, 서로 약속하기를, “성낙이 만약 번을 들거든 우리는 두어 달 한정하고 교대하지 말도록 하자.” 하였다. 약속이 정해진 뒤에 성낙이 번에 들었는데, 겨우 하루가 되자 또 나가고자 하여 관(館)의 아전을 회초리로 때려서 몹시 잔혹하게 하였다. 아전이 교대할 사람을 찾아서 여러 집을 다녔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이원익에게는 그가 이제 겨우 번에서 나왔으므로 감히 청하지 못하였다. 사태가 급박하여 시험삼아 이원익에게 갔더니 이원익이 처음에는 답하지 않으므로, 아전이 슬피 울면서, “80살 된 늙은 어미가 차가운 옥에 갇혀서 운명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원익이 마침 모친을 모시고 있다가 측은하게 여겨서 허락하였더니, 아전이 문밖으로 뛰어 나가며 손뼉을 치면서, “이 교리는 참 성인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식소록》
○ 옥당에 한 노구솥[鐺]이 있었는데, 술이 닷 되쯤 들었다. 마시는 자가 한 숨에 다 마시면 그 이름을 노구솥에 새겼는데, 오직 김천령(金千齡)ㆍ허봉(許篈)의 이름만이 새겨졌다. 《식소록》
○ 선조조에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성종조에 옥당에 번 든 사람을 때 없이 불러 편전에서 면대하였는데 그것이 ‘독대(獨對)’라는 것입니다. 이 준례를 회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옥당의 관원을 마땅히 수시로 불러볼 것이니, 반드시 책을 가지고 진강(進講)할 것이 아니라 의리만을 토론함이 가하다.” 하였다. 《석담일기》
○ 선조조에 유희춘(柳希春)을 오랫동안 부제학에 임용하여 다른 벼슬로 옮기기를 허락하지 아니하더니, 뒤에 품계가 올라서 자헌(資憲)이 되었다. 정2품을 강등시켜서 부제학에 제수하는 예가 없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유모(柳某)가 부제학에 적임이니 비록 전례가 없더라도 제수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뒤에 김수(金睟)도 자헌(資憲)으로서 특히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니 이 준례를 쓴 것이었다. 《지봉유설》
그 뒤에 정경세(鄭經世)ㆍ정엽(鄭曄)ㆍ조익(趙翼)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영조조 조엄(趙儼)에게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 이준경(李浚慶)이 영의정이 되어 도당홍문록(都堂弘文錄)에 추천된 사람의 이름에 권점(圈點)할 때에 그의 아들 이덕열(德悅)의 이름을 붓으로 지워버리면서, “내 자식은 옥당 관원에 적합하지 아니함은 내가 자세히 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사정(私情) 없음을 탄복하였다. 유영경(柳永慶)이 영의정이 되어서 역시 그 아들 업()의 이름을 지워버렸는데, 그때 유업은 이미 이조에 들어가서 좌랑이 되었던 것이다. 공론(公論)이, “이조 낭관(郞官)의 높고 귀함은 옥당보다도 나을 뿐만 아니라 권세도 중하다.이미 이조에 들어간 것은 허락하면서 유독 도당록에는 이름을 지워버렸으니, 소인의 정상이 남김없이 드러났으므로 비록 동고(東皐 준경의 아호)의 흉내를 내고자 하나 누가 허여하랴.” 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도당록에 권점할 때에 정승의 아들이나 손자이면 홍문관의 동벽(東壁 직제학에서 응교까지)과 서벽(西壁 교리에서 수찬까지)이 정승의 위세에 눌려서 감히 이름을 권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모두 점수에 차 뽑히니, 사정이 크게 작용하여 조정의 인사 행정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하담록》
○ 광해조 때 경연에서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말년에 간혹 경연을 폐하셨음은 병환 때문이었습니다. 평시에는 날마다 경연을 열었으므로 번에 들었던 옥당 관원이 비록 부모의 병 기별을 들었다 하더라도 교대할 사람이 오기 전에는 절대로 감히 나가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금란문(金鑾門 홍문관 정문)에 서서 발을 구르며 가슴을 치면서도 교대가 오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나갔습니다. 어버이의 병에도 이와 같았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하였다.
○ 선조가 날마다 경연에 나왔다. 한 학사(學士)가 납패(鑞牌 백철패)를 가리키면서 농담으로 말하기를, “저 납패 속에 몇 차례의 학질이 감춰졌는가.” 하였으니, 대개 날마다 진강하기 곤란함을 가리킨 것이었다. 인조가 초년에는 경연에 부지런히 나왔는데, 병자년 이후에는 병환이 있어서 십여 년이나 경연을 폐지하였으므로 본관(本館 홍문관)의 관원은 다만 일직ㆍ숙직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 한가로운 벼슬을 꼽을 때에 홍문관을 첫째로 쳤다.
○ 인조조에 정경세(鄭經世)의 품계가 정2품에 이르렀는데도 특히 그대로 옥당 장관을 맡게 하여 경서와 사서(史書)를 진강하도록 명하였다. 《공사견문》
○ 인조조에 이명한(李明漢)이 응교가 되고, 소한(昭漢)이 수찬이 되었는데, 명한이 소식(蘇軾)의 옛일을 인용하여 소를 올려 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전례가 있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백주행장(白洲行狀)〉
○ 숙종조에 은잔을 하사하였다. 승정원 조에 상세하다.
○ 국조(國朝)의 이래로 당하관을 패초하기를 명하면 모두 분칠한 패를 사용하였으나, 오직 대각(臺閣)을 부를 때에는 붉은 패를 사용하였다. 영종 39년에 옥당 관원을 부를 때에도 양사(兩司)와 같이 붉은 패를 사용하기를 명하였다.
○ 영종 40년에 임금이 세손(世孫)과 함께 옥당에 와서 친히 어제(御製) 사언시(四言詩) 한 구(句)를 썼는데 ‘운종일당(雲從一堂)’이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세손을 돌아보면서, “문종께서 동궁으로 계실 때에 밤에 옥당에 와서 성삼문을 부를 때에 ‘근보(謹甫)’라고 자를 불렀으므로 지금까지 아름다운 일로 전해 오고 있다.” 하였다.
46년에 임금이 세손과 함께 옥당에 와서 야대(夜對)를 행하고 이어 옥등(玉燈)의 고사(故事)를 물었다. 전부터 6개의 등이 있었으므로 등 두 개를 더 하사하고 번을 든 유신(儒臣)에게는 말[馬]을 주었다.
[출처] 관직전고(官職典故) 홍문관(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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