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한 점
유월 첫 토요일은 즐겨가는 산행은 마음 접고 있었다. 현충일로부터 사흘째 이어진 연휴 집안 조카 결혼 예식장 걸음을 해야 했다. 형제가 많다보니 여러 조카들 가운데 한 녀석으로 공부는 부산에서 마쳤다만 오래 전 해외 파견근무를 거쳐 울산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성년이 되어 제 갈 길 가는 조카가 대견하고 믿음직하다. 새 식구가 되는 조카며느리를 맞이하는 날이다.
이른 아침 진주 여동생 내외가 창원을 거치면서 오라비와 올케를 태워 울산으로 향했다. 고향 의령에 계시는 큰형님 내외분은 큰조카가 모시고 울산으로 향했다. 부산 가덕에 사시는 작은 형님은 서울 사위와 외손자들과 하루 전 경주에서 머물다 울산으로 내려왔다. 칠남매 올케와 시누이가 모처럼 한복을 차려 입는 날이다. 새신랑의 백부와 숙부도 여름날 넥타이에 정장 차림이다.
창원터널을 거쳐 장유로 나가 김해를 거쳐 낙동강을 건너 양산으로 돌아갔다. 그즈음 나는 올봄 근무지가 양산이 아닌 거제가 정해져 감사했다. 내 생각에 양산보다 거제가 근무 여건이 좋을 듯했다. 통도사 앞을 지나 언양에서 울산으로 들어갔다. 울산 들머리 무거동에서 태화강을 건널 무렵 운전대를 잡은 매제에게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내비 안내 경로를 벗어나도록 했다,
예식 시간과는 아직 느긋해 태화강 십리 대숲을 바라보는 카페로 들어 여동생 내외와 커피를 들었다. 찻집을 나서 태화강 강둑에서 대숲과 둔치 공원을 가까이서 조망했다. 주말을 맞아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다수 보였다. 벚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산책로를 걷고 예식이 있는 컨벤션 홀로 갔다. 집안 형님과 아우와 고향 선배들도 다수 만났다. 조카와 손자들도 한 자리에서 만났다.
결혼 예식 문화도 시대 따라 변천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장강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가듯 내 위치는 조카나 손자들에게 떠밀리고 있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거름이 되고 멀리감치서 지켜볼 따름이었다. 격식과 파격이 뒤섞인 예식을 마치고 사진 촬영과 폐백을 받고는 뷔페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형제와 조카와 손자들이 많다보니 오붓하게 한 자리 모여 식사를 못해 아쉬웠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신랑신부에게 다시 축하를 보내고 울산 시내를 빠져 나와 창원으로 복귀했다. 매제는 진주로 향하고 나는 아내와 잠시 틈을 내 백화점에 들렸다. 여름 등산 바지가 한 개 뿐이라 거제에서 필요한 여벌을 하나 더 마련했다. 이후 아직 토요일 저녁이라 나를 기다리는 친구를 만나야 했다. 이웃 아파트단지 상가에서 가끔 회동하는 친구 술자리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 무렵 또 다른 친구가 뵙자는 문자가 날아왔다. 이미 만나고 있는 친구와 같은 교직 동료이지만 서로 성정이 달라 한자리 마주하면 논쟁이 붙기 예사였다. 그래서 중간에 낀 나만 난처해 그 둘을 같이 붙여 놓을 수 없어 가급적 함께 하는 자리를 주선하지 않는다. 나는 먼저 만난 친구와는 말벗이 되는 지인이 마주하고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는 주말이면 앞서 언급한 두 친구를 만날 일정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지 싶었다. 주말이면 경주 산골로 드는 울산 친구가 매실을 따자고 연락이 올지 모른다. 초등 교단에서 관리자가 된 대학 동기들이 부산 기장 어느 호텔에서 만날 거라는 연락이 와 있다. 자생 연구단체에서 정기 모임이 예정 되어 있다. 이러니 창원서 가까이 지내 두 친구가 얼굴을 보자는데 뿌리칠 수 없었다.
창원으로 돌아와 바지를 사다 놓고 곧장 무학상가서 친구를 만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연락이 온 정년을 일 년 남겨둔 또 다른 친구와 접선해 반송시장으로 옮겨갔다. 내가 가끔 들린 시골밥상으로 가 밥상이 아닌 술잔을 들었다. 나는 평소 거기선 곡차를 비웠는데 친구가 맥주를 선호해 나도 같은 잔을 채웠다. 세상을 끌고 가려하지 말고 한 점 모자이크가 되자고 했다. 19.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