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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에서 타즈마할의 도시 아그라 까지는 버스로 4시간 거리 와우 카페에서 볼보버스를 예약하고 19일 아침 7시에 뉴델리를 출발, 아그라에 11시경 도착했다.
이틀 자기로 예약한 펄오브 타즈 홈스테이에 짐을 풀고 쉬면서 한 낮의 더위가 약간 누구러 지길 기다린 후에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아그라 포트로 향했다. 붉은 벽돌로 지어 전체적으로 붉게 보이기 때문에 붉은 성이라고 불리우는 이성은 요새이면서 궁전으로도 쓰였다고 하며,
타즈마할을 지은 샤 자한왕이 아들에 의해서 쫓겨난 뒤 죽을 때까지 갇혀 있었든 곳이기도 하다. 또한 건축광이기도한 샤자한 왕이 스스로 개축한 성이다. 이러한 샤자한의 무리한 건설로 인한 국고 낭비가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반란의 구실을 제공한다.
붉은 성은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타즈마할의 건너편에 지어져 있어서 이성에 갇힌 샤 자한은 자신이 지은 타즈마할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애처 왕비 뭄타즈 마할을 그리며 죽어 갔다고 한다.
누룽지를 얇게 넓게 구워 만든 페이퍼 도사, 버스 휴게소에서 점심으로 먹었다.
아그라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메뉴판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타즈마할과 마주 보고 있는 아그라 포트는 1565년경 무굴 제국의 악바르(Akbar) 대제가 세운 곳으로 그의 손자인 샤 자한 왕의 손을 거쳐 재건축되었다.
타즈마할과 거리상으로 가깝고 샤 자한 왕의 슬픈 사연이 있어 아그라에 가면 함께 봐야 할 명소로 알려져 있다.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아그라 포트는 높이 20m, 길이 2.5km의 이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이다. 원형 망루와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난간과 성벽 사이에 해자가 설치된 난공불락의 요새는 오늘날에도 전체의 75%가 군사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견고한 외부와 달리 크고 작은 궁전과 모스크, 정원과 분수대가 어우러진 아그라 포트의 내부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건물들 그리고 야무나 강 건너편에 서있는 타즈마할이 각기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제항기르 궁, 악바르 대제가 어렵게 낳은 아들인 제항기르를 위해 아그라 포트 안에 지은 건물로 힌두와 아프가니스탄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궁의 내부는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수많은 비밀 통로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또한 이 궁전은 여름 궁전과 겨울 궁전으로 나눠져 있는데, 여름 궁전에는 부채질을 해 주는 시녀들이, 겨울에는 따뜻한 물을 순환해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통풍구가 있었다고 한다
악바르 대제는 아들을 위해 궁전을 지을 정도로 아들을 아꼈지만 사실 악바르 대제와 제항기르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 샤자한 왕을 아그라 포트에 가둔 아우랑제브 역시 마찬가지다.
야무나 강 건너 북쪽에서 바라다 보이는 타즈마할
이처럼 왕가의 부자 사이가 좋지 못 했던 이유는 무굴 제국의 후계자 계승 방법 때문이었다. 무굴 제국은 첫째 아들에게 무조건 왕위를 물려 주는 것이 아닌 철저한 능력 검증에 의해 후계자를
결정했는데 이는 혈육 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왕이 된 아들도 그렇지 못한 아들도 항상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개인 군대를 거느렸다. 겉보기엔 화려한 삶이었지만 한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던 이들이 바로 무굴 제국의 왕족이었다.
악바르는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문답과 철학적 담론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손자인 샤 자한(Shāh Jahān, 1592~1666)은 건축에 매혹되었다. ‘세계의 왕’이란 칭호를 얻은 샤 자한은 서쪽의 칸다하르에서 동쪽의 아삼, 북쪽의 파미르고원에서 남쪽의 데칸고원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다. 인도 지배자 중 이토록 거대한 제국을 통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그라성에 있는 디와니암(Diwan-i-Am),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디와니암은 왕의 공개 접견실로 건의사항이나 보고를 들을 때 사용했다. 초기의 목조 건축물을 붉은 사암으로 재건축한 뒤, 백색으로 회칠하여 만들었다. 왕의 개인 접견실인 디와니카스(Diwan-i-Khas)는 1638년 건축되었고, 고위 관리나 외국 대사들을 만날 때 사용했다.
아그라 시내 과일상
아그라 시내 야채상
아그라 시내
샤 자한은 어느 날 시장에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팔고 있던 열아홉 살의 처녀 바누 베감을 보고 한눈에 반해 황비로 맞아들였다. 그녀를 끔찍이 사랑한 황제는 그녀에게 ‘궁전의 꽃’이라는 의미의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란 뜻이다. 뭄타즈 마할은 샤 자한의 두 번째 부인이며 황제의 하렘에는
5000명의 후궁이 있었지만 샤 자한이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은 뭄타즈 마할이 유일하다.
뭄타즈 마할은 샤 자한의 부인이면서 가장 믿음직한 동료였다. 그들은 무굴제국 곳곳을 함께 여행했는데 전쟁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의 질투였을까, 이 세상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던 뭄타즈 마할은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함께 출정한 데칸고원의 전쟁터 근처 천막에서 아이를 낳다가 서른아홉이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17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두 사람 사이엔 14명의 자식이 있었다)
급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에 황제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샤 자한은 하루아침에 머리카락이 백발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아내를 그리워한 황제는 2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고 사후세계에서의 재회를 기약했다.
샤 자한은 뭄타즈 마할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를 지어주겠다고 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2년간에 걸쳐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타즈마할이다. -타즈마할 메인게이트-
각지의 기술자들이 아그라로 모여들었다. 건축가로는 페르시아 출신의 우스타드 이샤와 이란 출신의 이사칸이 초빙되었고 각 분야별로 보르도 · 베네치아 등지의 기술자들이 참가했다. 이 공사에 동원된 건축가와 인부는 2만 명가량이었고 코끼리도 1000마리가 동원되었다. - 타즈마할동문-
건축에는 페르시아 · 중앙아시아 · 우즈베크 · 이탈리아 · 프랑스 · 라자스탄에서 수입된 대리석 · 청금석 · 홍옥석 · 공작석 · 터키석 등의 석재를 사용했고 외벽은 루비 · 사파이어 · 옥과 같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500킬로그램 이상의 금이 사용되었다.
이 모든 경비는 샤 자한이 현금으로 지불했다. 전체 비용은 400~500만 루피로 추측되는데 당시 최고 기술을 가진 석공의 한 달 임금은 9~20루피였다. 그가 타지마할을 건설하면서 지출한 비용 규모는 국가 전체 예산의 5분의 1이었다.
닐 파킨은 영묘(靈廟, mausoleum)인 타즈마할이 인도 · 이슬람 건축의 가장 완벽한 전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첫째, 타즈마할은 샤 자한 가즈(80~82센티미터)를 기준 단위로 삼아 측량함으로써 엄밀한 기하학을 구현할 수 있었다. 둘째, 대칭구도를 일관적으로 관철시켜 중앙 축을 중심으로 한 좌우동형 속에서 각 부분들을 통합했다. 셋째, 자재 · 형태 · 색채에서 아주 세밀한 장식에 이르기까지 질서를 부여했다. 즉, 누구나 감탄을 금치 않는, 좌우대칭의 균형미와 세련미가 넘치는 빼어난 예술적 건축물을 구현한 것이다.
붉은색 사암과 대리석으로 건축한 30미터 높이의 출입문을 지나면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측의 정원 · 연못 · 나무 등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 대칭구조와 건물에 적용한 기하학적 계산의 완벽함은 지금의 건축학자들이 보아도 감탄할 만하다. 이 모든 것은 아주 계획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무굴제국에서는 건축물을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백색 대리석으로 마감한 본당 건물은 지면에서 6~7미터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단의 크기는 한 변의 길이가 96미터인 정사각형이다. 영묘 건물 자체의 크기는 56.7미터의 정사각형이고 바닥 면에서 돔의 정점까지는 57미터에 달한다. 이중의 돔(양파껍질처럼 안쪽 덮개 위에 바깥 덮개가 있는 돔)은 페르시아 양식 그대로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지만 벽돌에 흰 대리석을 씌운 것이다.
벽돌은 당시 널리 사용하던 표준 크기인 19×12.5×3센티미터의 것을 사용했다. 벽돌을 주로 긴 쪽으로 쌓았지만 석회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른 다음 짧은 쪽으로 쌓기도 했다. 둥근 천장은 모르타르를 두텁게 바르고 동심원의 고리들을 만들어 쌓았다. 이 건축기법을 통해 내부에 강화벽을 세우지 않고도 반구형의 내부 돔과 공 모양의 외부 돔을 지지할 수 있었다.
타지마할의 메인 출입구
외부 돔 위에는 9미터 높이의 작은 청동 뾰족탑을 얹었고 돔 전체에는 금박을 입혔다. 돔은 이스탄불 출신의 이스마일 에펜디(Ismail Effendi) 작품. 영묘 정면은 기하학적 형태들이 차분하게 통일된 모습을 보여준다.
타즈마할 건축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단을 쌓을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타지마할의 건설 부지가 강둑의 부드러운 모래 지반이기 때문에 웅장한 건물을 지탱할 토대를 다지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에 건축기술자들은 나무로 통을 만들고 그 안에 고무와 쇠를 채우는 방법을 사용했다.
- 타즈마할에서 바라본 메인 게이트-
이 건축법은 20세기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밝혀졌다. 타즈마할은 토목공학적으로도 수작이다. 경계벽은 평방피트(약 0.093평방미터)당 9톤의 무게를 지탱하는 데 반해 돔 자체의 무게는 1만 3000톤 이상이다. 대리석으로 마감한 구조물을 벽돌과 나무 · 받침대에 박은 쇠테로 보강한 아치가 지탱하고 우물을 이용하여 타지마할을 야무나(Yamuna)강의 범람으로부터 보호한다.
중심부의 기다란 연못에 비쳐 보이는 타지마할의 모습은 그 신비스러움을 더하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타지마할 입구에서 묘까지 250미터의 거리가 한층 멀게 느껴진다. ‘백색의 진주’, ‘꿈의 궁전’으로 불리는 타지마할은 낮에는 흰색으로 보이지만 아침에는 자줏빛, 황혼녘에는 황금빛으로 변하며 시시각각 보랏빛과 푸른빛 등 그 색채가 수없이 변한다. - 타즈마할 동쪽에는 모스크가, 서쪽엔 대칭과 균형을 위한 같은 건물이 있다.-
달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영국 작가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은 타지마할을 방문한 뒤 다음과 같이 적었다. “순수한 모든 것, 성스러운 모든 것, 그리고 불행한 모든 것의 결정이다. 이 건물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뭄타즈 마할의 유해는 한 층 아래의 지하묘에 안장되어 있으며 샤 자한의 유해도 함께 있다. 원래 샤 자한은 야무나강 건너편에 타지마할 같은 자신의 묘를 검정 대리석으로 건설해 견고한 황금다리로 타즈마할과 연결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거창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샤 자한은 국민들의 세금을 올리지 않고 자신이 가진 권력과 재산을 이용해 타지마할을 건설했지만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ēb, 1618~1707)는 샤 자한의 무차별한 재산 낭비가 왕국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왕위를 찬탈했다.
샤 자한은 생애 마지막 8년을 아그라성에서 보냈다. 그래도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소원 하나는 들어주었다. 하얗게 빛나는 위대한 사랑의 증거를 아그라성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아그라성은 악바르가 건설한 성으로 높이 20미터, 폭 2.5킬로미터의 대형 요새였으나 샤 자한이 황제가 된 후 평화정책을 견지해 타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궁전으로 바꾼 것이다.
근래 외벽 문양에서 다음과 같은 글이 발견되었다. “세계가 멸망하고 심판의 날이 다가오면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이 부활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