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 자랑 약 자랑
김 흥 수
내게 하나 뿐인 아버님은 쉰여섯에 돌아가셨다. 아뿔사 늦었다. 직장암 말기였다. 병원 갔을 땐 이미 너무 늦었다. 수술하려고 배를 열어 봤다가 눈물을 머금고 그냥 덮었다. 아버님은 날이 갈수록 빼빼 말라갔다. 나중엔 삼십 육 킬로그램, 작은 아이만 해지더니, 며칠 못 버티고 곧 돌아가셨다.
그 아비에 그 아들(父傳子傳)이라 했던가? 나도 쉰여섯 살엔 웬지 손에 땀이 났다. 그 해는 유난히 다른 해보다 길었다. 혹시라도 저승사자가 날 데리러 오는 게 아닌가 하고 삼백 예순 다섯 날 내내 두려웠다. 그 해내내 사지를 마구 떨었다.
어찌어찌해 아무 탈 없이 그해가 지났다. 그리고 한동안 죽음을 잊어버렸다. 그야말로 시골 흙수저로 태어난 나는, 스무 살까지는 아무런 목숨의 위협은 없었다. 물론 열 두 살 때 벚나무에서 떨어지면 뻗는다는데 안 죽고 버틴 사고는 한 번 있었다.
그런데 내 나이 스무 살. 공주교대 1학년 때 겨울 방학에 나는 꼭 한 번 죽을 뻔 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뱃 속에서 피가 줄줄 샜다. 똥을 누면 이상하게 짜장면 색깔이었다. 피가 새서 소화가 다 돼서 나오는 것이었다. 급기야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서야 급성 위궤양임을 알았다.
이상하게도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피가 멎었다. 다행히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때 아버님은 할아버지 산소를 잘못 써서 그랬다고 그랬다. 부랴부랴 애꿎은 할아버지 산소를 옮기고 나서야 안심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돌이가신 할아버님이 나를 살렸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곤 했다.
누가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내가 진짜로 죽을 뻔한 것은 3년 전(2014년) 내 나이 예순 세 살 때였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운동을 마치고 나는 그대로 뻗었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평소에는 물론 띠 동갑이나 그보다 어린 젊은 친구들과 시합을 하고도 거뜬 거뜬했었다.
또 누가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고 했던가. 나는 30년 넘게 거의 매일 운동을 해 왔다. 그리고 허리 한 번도 안 삐었다. 과격한 운동인 배드민턴 선수들이 잘 걸리는 아킬레스 건 한 번 안 끊어졌다. 배드민턴 앨보 한 번도 안 걸렸다.
그런데 그날(2014년 10월 8일)만은 달랐다. 그날은 마침 오후 봄부터 정성껏 심어 가꾼 고구마를 캐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나는 사전에 여러 친구들에게 고구마를 나눠 주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이미 대 여섯 명의 친구들을 불러 놓은 참이었다.
그 날, 친구들을 태우고 고구마 밭으로 가는 도중에 탈이 났다. 갑자기 뱃 속이 짜르르 하더니 한꺼번에 속이 메스껍고 토하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분명 출혈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참고 고구마 밭까지는 갔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피를 토했다. 시뻘건 피가 나도 모르게 왈칵 목구멍을 넘어 왔다.
그 길로 고구마밭 옆에 주차한 채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진단해 보니 급성 위궤양이었다. 갑자기 위가 빵구가 난 것이었다. 그 새, 수술 기계가 참 좋아졌다. 위 내시경 검사하듯이 입으로 내시경을 집어넣어 모니터를 보면서, 레이저를 쏘아 출혈 부위를 막고 때웠다.
그런데 갑자기 입원 후 그날 밤 자정께 웬 낯모르는 전화가 왔다. 자신은 렉카 차 운전사로 지나가던 차가 고구마 밭 옆에 잘 주차해 놓은 멀쩡한 내 차를 들이 받아 견인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정을 말하고 고구마밭 가까이 사는 친구를 깨워 대신 가보라고 했다. 술취한 상대방 운전사는 내 차를 얼마나 세게 받았는지 아예 폐차를 시켜야 했다. 그 때 그 친구는 지금도 나를 데려가는 대신 내 차를 데려갔다고 얘기한다. 그 후로는 오늘까지 약을 계속 먹으면서, 40여년 만에 재발한 위궤양은 일단 진정되었다.
물론 그 전에 60세 때 갑상선에 3센티 미터가 넘는 혹이 있다고 해서 고민한 적도 있었다. ‘병자랑은 하랬다’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여러 친구들에게 갑상선에 난 혹을 자랑했더니, 서울 영등포에 있는 모 병원을 소개해 줬다. 고주파로 갑상선 치료하면 감쪽같이 나을 수 있다고 알려 줬다. 나는 곧 그 병원에 가서 고주파로 갑상선 혹을 제거하고 목에 수술 자국 하나 없이 지금까지 잘 살아 왔다.
아참 또 하나 맹장 수술 한 번 받았지. 저 재작년 추석 후에 잠자다 깨어 보니 갑자기 왼쪽 배꼽 밑이 하도 아파 때굴때굴 굴렀다. 날이 밝자마자 제자가 원무과 팀장으로 있는 소화과 병원에 가서 맹장 수술을 받았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반드시 배를 가르고 받아야 할 맹장 수술도 복강경 수술로 배꼽 안에 1센티미터를 뚫어 맹장을 떼어내고 두 세 바늘 꿰멘 것이다.
그런데 재작년 발견한 전립선 비대증은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보통 어른들의 전립선은 무게가 20그램 정도라는데 비뇨기과에 가서 초음파검사를 해보니 91그램으로 약 다섯 배나 부풀었단다. 처음엔 수술 안하고 깡으로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하루 밤에 대 여섯 번 잠을 깨어 화장실을 다녀야만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급기야는 수시로 화장실을 다녀야 했다. 어디 외출하는게 영 불안했다. 천안서 서울 가는 한 시간짜리 고속버스를 타는데도 영 못미더웠다. 혹시라도 차가 밀려 연착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해종일 인터넷 서핑을 통해 입원 안 하고도 한 시간이면 수술 끝낸다는 서울 강남의 비뇨기과를 알아냈다. 거기 가서 수술을 받았다. 89그램의 전립선을 70그램 이하로 줄였다. 재작년 한 해는 그냥 잘 버텼다. 그러나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전립선이 잘 자라는 체질이라나 한 해만에 도로 89그램으로 부풀었다.
참다참다 못해 올해 다시 수술대 위에 올랐다. 다시 70 그램 이하로 수술했다. 그 후 그리고도 못 미더워 나는 어찌어찌 병자랑으로 알게된 ‘OK동전 패치’를 붙이고 다닌다. 전립선 부위의 배꼽 밑 단전에다가 늘 자석 파스를 붙이고 다닌다. 자석 하나로는 영 시부정치 않아 파스 한 조각을 오려 자석을 세 개씩이나 달아 늘 붙이고 다닌다.
내가 애용하는 자석 파스는 참 싸다. 그러나 효과 만점이다. 누구나 전문 지식 없이 가까운 약국에 가서 ‘자석 파스를 달래’면 동전 패치를 준다. 허리 통증이건 무릎 통증이건 무조건 통증 부위에 붙이면 된다. 자석 파스는 음이온 및 원적외선 에너지로 불균형한 생체 에너지를 바로잡아 준댄다. 입으로 복용하는 형식이 아니므로 인체에 어떠한 부작용이나 해가 없다는 게 특징이란다.
여지껏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한 평생 병력들이 참으로 보기 싫구나. 누가 골골 팔 십이라고 했던가. 누구나 늙어가면서 병을 데리고 살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만은 내가 겪은 병은 생각할수록 참으로 가혹하다고 느껴진다. 다만 그래도 몸 튼튼 마음 튼튼이라고 했었지. 늘 범사에 감사해온 나는 언체나 정신 줄만은 놓지지 않겠다고 버텨온 내가 스스로 생각할수록 기특하다.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나의 맑은 뇌랑 따뜻한 심장만은 꼭 버텨줬으면 좋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신경림의 시처럼 ‘못난 사람은 얼굴만 봐도 반갑다’ 여기고, 이 작은 지구촌에서 윤동주의 시처럼 ‘항상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항상 약자를 돕고, 정의를 사랑하고, 어디서든 러브 메이커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지.
첫댓글 자석 파스. 좋은 정보군요. 자칭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지인들과 또래들이 많이 있는 나이이므로(나도 이 부류에..) 병과 친구하며 잘 달래며 살아갈 날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맑은 뇌와 따뜻한 심장이 있으므로 러브 메이커로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오랫만에 친구의 글 읽어보네요.
병은 장애는 항상 우리가 달고 다니는 것이니 글쓰는 솜씨로 꾹 참고 지내시구려. 자신이 위로하고 사시구려.
오랫만에^ 푹 빠져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웃으며 읽다보니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본인은 순간순간 얼마나 아프고 당혹스러웠을지~~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 늘~ 건강하시기를
장군님! 전립선비대는 우리 나이엔 그리 낯선 병이 아니라오.
병가어소유(病加於小癒)라고 병은 조금 나았을 때 더 조심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 새겨서 잘 극복하시기를...
오랫만에 카페가 훈훈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는 손가락 관절로 인해 고통 받고 있어요. 우리 나이에 누구나 하나쯤은 같이 가야할 병이 있나봐요. 베드민턴으로 더욱 건강 다지시고 앞으로도 자주 글 올려 주시길 바래요.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