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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결사를 일으킨 주역인 청담스님(왼쪽)과 성철스님. 뒤쪽의 스님은 진제 종정예하에게 법을 전한 향곡스님. |
1947년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해방 직후 당대의 수좌들이 모여 철저한 참선과 계행(戒行)으로 일관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잔재에 찌든 한국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정법(正法)을 지향하는 종단의 근간을 다진 사건이라는 공통된 평가다. 조계종 전국선원수좌회(공동대표 정찬·현묵스님)와 성철스님의 유지를 계승하는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스님)은 올 가을 봉암사에서 결사 70주년 기념법회를 공동으로 주최할 예정이다.
청담스님, 성철스님, 자운스님, 향곡스님을 비롯한 30여 명의 수좌들이 의기투합했다. 2014년 원적(圓寂)에 든 전 조계종 종정 법전스님은 봉암사 결사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사의 기간은 1947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로 2년6개월 남짓. 비교적 짧은 시간이지만, 종단의 청정가풍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매우 값지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논문 ‘봉암결사의 역사적 의미’에서 “결사의 정신은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되었다”며 “조계종단 재건과 운용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짚었다.
결사는 최고의 선지식이자 절친한 도반이었던 청담스님(1902~1971)과 성철스님(1912~ 1993)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청담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모은 <청담대종사전서>에 의하면 두 스님은 1942년 선학원에서 만나 공동수행을 약속했고 1943년 법주사 복천암에서 함께 수행했다. 독립운동가를 도왔다는 이유로 청담스님이 상주경찰서에 구금되면서 짧게 끝난 ‘2인 결사’는, 1944년 봄 문경 대승사에서 재개됐다.
당초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이 꿈꿨던 건 대규모 종합수행도량인 총림(叢林)의 건설이었다. “지금과 같은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하게 생활할 것, 그럼으로써 납자 풍의 참모습과 말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그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대승사 쌍련선원에 앉아서 하셨다.” 청담스님의 딸인 묘엄스님(전 봉녕사승가대학장, 2011년 입적)이 <고경> 제10호에 남긴 회고다.
총림을 설치하려던 절도 원래는 봉암사가 아니라 청담스님이 선감(禪監)으로 일하던 법보종찰 해인사였다. 해인사가 봉암사보다 사격이 컸다. 그러나 야심찬 계획은 해인사를 장악한 대처승들의 비협조로 무산됐다. 결국 대승사 인근의 봉암사가 대안으로 선택됐다. 우리나라 선불교가 태동한 구산선문의 한곳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이 세워졌던 사찰인 만큼 상징성은 해인사 못지 않았다.
봉암사 결사가 시행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책들’이었다. 1947년 여름 김법룡이란 이름의 거사가 소장하고 있던 불교서적 수천 권을 기증하겠다고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에게 제의했다. 서울로 올라와 불서를 인수한 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봉안하는 사찰을 총림으로 하자’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건네받은 불서를 봉암사로 보냈고 그해 10월 성철스님, 자운스님, 우봉스님, 보문스님 등 4명이 봉암사에 입주했다. 봉암사 결사의 역사적인 출발이다.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봉암사 결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는 모토다.
방부를 들인 수행자들은 비(非)불교적 요소 일체를 없애거나 뜯어고쳤다. 무엇보다 사찰이 점집으로 전락하는 데 기여한 기복신앙이 척결대상이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 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성철스님).” 복을 빌어 달라며 여염집이 부탁하는 불공을 전부 거절했으며 살림은 철저하게 자급자족으로 유지했다. 나무 하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또한 율장에 근거해 관습적으로 유행하던 홍(紅)가사 대신 현재 종단 가사색의 모태인 괴색(壞色)으로 가사를 물들여 수했다. 발우도 목(木)발우를 버리고 철(鐵)발우를 썼다. 이것들은 현재 종단 스님들의 복식(服飾)과 위의(威儀)의 근본이 됐다.
단체생활을 위한 일련의 수칙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란 이름으로 정리했다. 규약에는 참선 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 · 자치정신 구현, 청규와 계율 준수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수행방식뿐만 아니라 승가의 의식주 전반에 개혁을 단행한 봉암사 결사는 수행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탔다. 제대로 된 안거도량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수좌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이후 청담스님을 비롯해 향곡 월산 법전 성수 혜암스님 등의 선승이 속속 자리를 잡으면서 1948년 결사대중은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궁극적으로 봉암사 결사는 염결한 삶 덕분에 스님의 대사회적 위상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시대 억불의 악습으로 승려들은 일반인들에게 천시와 반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봉암사 대중 스님들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좌선으로 일관하며 사람들의 불신과 냉대를 조금씩 씻어갔다. 스님은 무속인이 아니라 수행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스님에 대한 삼배(三拜) 문화 역시 봉암사 결사를 통해 자리를 잡았다는 게 정설이다.
결사를 주도하던 성철스님의 불호령이 압권이다.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한테서 법을 배우는 제자야. 법이 거꾸로 되어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 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데, 그게 부처님 법은 아니야! 부처님 법에 신도는 언제나 스님들께 절 세 번을 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 부처님 법대로 스님들에게 절 세 번 하려면 여기 다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여기 오지 말아!(<수다라> 10집, 1995년)”
아쉽게도 결사는 길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한국전쟁이 임박한 혼란기였다. 군경은 빨치산으로 빨치산은 군경으로 변장한 채 봉암사에 잠입해 스님들의 정치적 성향을 떠봤다는 전언이다. 수행은커녕 목숨마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결국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됐다. 그러나 오늘날 종단의 법통을 바로 세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논문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퇴옹 성철의 역할’에서 “불교가 세속의 변화를 따라잡는 길은 세속의 가치와 질서를 초월하여 불교만의 세계를 올곧게 지키는 것”이라며 “그것이 바로 봉암사 결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1970년대 제2차 봉암사 결사 있었다” 서옹스님 조실로 5년간 정진 2015년 여름 문경 김용사 화장암에서 은둔 정진하는 법화스님에게서 취재한 내용이다. 청담스님의 상좌인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1970년대 초반 제2차 봉암사 결사가 있었다. 무장공비의 잦은 출몰과 이념대립으로 1950년 3월 봉암사 결사가 해체되면서 봉암사는 속절없이 쇠락했다. 경찰 출신의 속인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주지 행세를 하며 700만 평의 임야를 팔아먹기도 했다. 법화스님은 “6년간의 소송 끝에 빼앗긴 땅을 전부 되찾은 전 주지 휴정(休情)스님의 공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한국전쟁 당시 홀로 남아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절을 지켰던” 만성(晩惺)스님 역시 되새겨야 할 인물이다. 국립공원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던 1960년대 후반 전국 명산에는 이른바 ‘산판(山坂)’이 횡행했다. 수종 개량이란 명분 아래 나무를 무차별적으로 남벌해 팔아치우는 일이었다. 거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에 조계종 총무원도 묵인하던 터였다. 봉암사가 위치한 희양산도 표적이 됐다. 150만 평에 달하는 사찰림이 통째로 뽑혀나갈 위기에 처했다. 김용사에서 정진하던 법화스님과 도반들은 이에 분개했다. 봉암사로 수행처를 옮길 것을 결의하는 동시에 산판 반대운동에 나섰다. 1970년 봄부터 전개된 제2차 봉암사 결사의 출발이다. 결사 명단에는 법화스님과 함께 낯익은 법명들이 눈에 띈다.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낸 대강백 무비스님과 현직 원로의원인 수좌계 어른 고우스님이다. 영명 법진 법련스님 등이 가담했고 주지엔 현재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인 지유스님이 자리했다. 또한 ‘참사람운동’으로 유명한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스님을 조실로 모셔 점검을 받았다. 스님들은 교구본사인 직지사에 산판 중지를 청원하고 벌목업자들과 싸워가며 기어이 봉암사를 지켜냈다. 1972년 2월 타협을 이뤄냈고 법화스님은 주지로서 역할을 했다. 제2차 결사는 5년가량 지속됐다. 1975년 서옹스님이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면서 서울로 떠났다. 법화스님도 주지를 사임한 뒤 지금의 화장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
[불교신문3262호/2017년1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