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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 휼
약 2:10-13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약 2:10-13 /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킨다 하더라도 어느 한 조목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1) 하나님께서는 ㄴ) 남편 있는 여인과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동시에 살인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여러분이 간음을 해서 결혼의 율법을 어긴 적은 없지만, 사람을 죽였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 되며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ㄴ. 출20:13-14, 참조, 신5:17-18) 12)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였느냐, 행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생각하든 또 어떤 행동을 하든 늘 살피고 주의해서 하십시오. 13) 무자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자비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남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심판을 면해 주실 것입니다.
자유의 율법, 사랑의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입니다(요 13:34).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10-11) 누구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한 조목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긴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8-9). 율법은 모두 지켜야 완성됩니다. 그 중 단 하나만이라도 어기면 율법을 어긴 범법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믿음으로 율법 아래 있는 나는 죽었고 다시 새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드린 영원한 속죄의 제사로 인하여 더 이상 율법으로 인한 정죄는 없습니다(롬 8:1).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12) '자유의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라고 하신 최고의 법을 뜻합니다(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새 계명입니다. 자유의 법은 사람들을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은혜와 긍휼로 인도하는 법입니다(마 5:44; 골 3:12; 요일 3: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경계하여 장차 다가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받을 자처럼 말을 하고 행해야 합니다(고후 5:10).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13) 마태복음 18장 23-35절을 근거로 교훈한 듯합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이제 자유의 율법, 새 계명의 핵심인 긍휼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2장에 나타난 가난함은 부자에 비하여 적게 가진 가난이 아니라 목숨, 생존을 위협하는 절대빈곤을 말합니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해 언제나 긍휼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행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장차 다가올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만합니다.
적용: 당신은 심판의 날에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어떤 긍휼을 실천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플랭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입니다. 건강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거나 ‘내장학(splanchnology)’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단어의 의미를 잘 모를 것입니다. ‘내장학’ 이 창자에 관련된 학문인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저 일시적으로 그들을 동정하신 게 아닙니다. 긍휼이라는 단어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긍휼, 그들의 아픔을 느끼는, 예수께서는 자신의 창자로부터 그들의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약 2:13 / 김용국 목사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가야 할 길이 있고, 해야 할 본분이 있고,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도(道)라고 말을 합니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사도(師道)를 충실하게 지켜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왕도(王道)를 따라 통치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성도(聖道)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도가 진실을 위한 것이고, 왕도가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면, 성도의 길은 거룩 즉 긍휼(矜恤)을 베푸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13절에 [긍휼(mercy)]이라는 단어가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세상에서 어떤 길을 걸어가야 되는지, 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일 이상으로 긍휼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신 이유도 값없이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서 세상을 향해 이런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긍휼을 필요로 하는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최고의 법이 이웃 사랑이라고 한다면 성도인 우리가 꼭 걸어가야 할 길이 바로 긍휼을 베푸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어떻게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권세로부터 우리가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요, 마귀의 종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시퍼런 칼을 갈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감히 그런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입고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아무도 피할 수 없고, 또 [나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지 않았다.]라고 부인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 너무나도 큰 은혜와 긍휼을 힘입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면서 긍휼을 베풀어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실로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마음속 깊이 깨달을 때에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주는 성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주면서 살아가야 되는 두 번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크고 작은 불행들이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그치지를 않고 있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절망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이 가실 줄을 모릅니다.
북한의 현실도 보십시오. 오래 전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러시아 국경에서 붙잡힌 젊은 청년들이 있었는데 붙잡히자 그들이 했던 말이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를 이곳 감옥에 가둬도 좋으니까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않게 해달라.'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얼마나 심한 학대와 고통을 당했으면 스스로 감옥행을 자청했겠습니까? 지금도 토굴 속에서 눈과 비를 피해가면서, 감시의 눈길을 피해가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는 탈북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우리 주변에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춥고 배가 고파서... 쉴 곳이 없어서... 의지할 데가 없어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이런 세상이 제대로 치유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탁월한 정치나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그런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그런 불행들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세상의 불행이 치유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의 불행을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 땅에는 죽음과 고통과 괴로움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불행이 그치지 않고 점점 더 확대되어 가고 있습니다. 재난이 끝났는가 싶으면 또 다른 재난이 닥치고, 한 고비를 넘었는가 싶으면 또 다른 고비가 나타나고, 시련을 이겼는가 싶으면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 이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이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 극복할 수 있는 힘,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있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맛 본 사람들이 불행을 딛고 다시 일어서서 승리했다는 내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는 게 괴로워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누군가의 따뜻한 한 마디의 위로 때문에, 누군가의 사랑이 담긴 도움의 손길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희랍의 유명한 트랜취 대주교가 남긴 말이 있습니다. "은혜는 정죄를 다루나 긍휼은 불행을 다룬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바로 긍휼에 있다. 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이기는 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한 번 선고가 내려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시는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죄 값을 다 치룰 때까지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심판도 이기는 길이 바로 긍휼에 있습니다. 아무리 사형에 해당되는 흉악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사형언도를 받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다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면권을 가진 자가 긍휼을 베풀어서 사형을 면해주면 됩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죽음으로 죄값을 치뤄야 합니다. 법은 단지 우리에게 선고를 내리고, 정죄하고, 옥에다 가두고, 생명을 거두어갈 뿐입니다.
하지만 긍휼은 이런 정죄를 이기고 심판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해줍니다. 그것이 긍휼의 힘이고 긍휼의 놀라움이고 긍휼의 위대함입니다. 긍휼은 모든 저주와 심판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긍휼을 이길 수 있는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긍휼이야말로 최고의 법인 사랑도 초월하는 최선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사람을 심판으로부터 건져내고 다시 살게 해주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이런 긍휼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십 억의 빚을 지고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원금은 고사하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돈이 될만한 것은 뭐든지 다 팔아서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빈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돈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아옵니다. 하지만 문제는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궁리를 하다 못해 채권자를 찾아가서 사정을 말하면서 조금만 기한을 주시면 열심히 벌어서 갚겠다고 통사정을 합니다. 겨우 허락을 받아 기한이 연장은 되었지만 기한 내에 해결할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색이 다된 얼굴로 빚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채무자를 보고 채권자의 마음에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내가 보니 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빚을 갚을 수가 없겠는데... 저러다가 쓰러지지는 않을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저 사람의 사정을 뻔히 알면서 내가 너무 심하게 하는 거 아닌가.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만약에 내가 그렇게 해준다면 저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겠지. 이왕 받지 못할 거라면 그냥 기분 좋게 모든 빚을 탕감해주자.'
채무자를 긍휼히 여기는 채권자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넓은 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자 곧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채무자를 불러 중대한 선언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빚은 없습니다. 한 푼도 갚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이후로 다 탕감해 주었으니 모든 빚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누가 찾아 와서 '당신의 빚을 다 탕감해 주겠다.' 고 말한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날아갈 듯이 기쁘고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이 사람이 길을 가다가 언젠가 자기에게 돈 백 만원을 빌려간 동업자를 만나게 됩니다. 수십억의 빚을 탕감 받았으면 그게 고마워서라도, 긍휼을 입은 것에 대한 기쁜 마음에서라도 백 만원정도는 그냥 없던 일로 해주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멱살을 잡고 당장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하면서 옥에다가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채권자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괘씸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너무 너무 불쾌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를 잊어버리고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그를 다시 불러다 놓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긍휼을 베풀어 너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으면 너도 마땅히 그를 긍휼히 여겨서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 긍휼로 인해 내가 살게 되었다면 나도 조금이라도 긍휼을 베풀어주면서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긍휼도 베풀지 못했으니 내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나올 생각을 아예 하지도 말아라.'라고 하면서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용서'에 대한 비유로 예수님이 해주신 말씀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긍휼이 없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으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긍휼을 입었습니다. 모든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긍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긍휼하심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그 결과는 긍휼이 없는 심판의 자리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고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무자비하게 굴었으면 모두가 손가락질하면서 '쌤통이다. 아예 망해버릴 것이지...' 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인생을 살면... 무자비하고 냉정하게 살면 언젠가는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는다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긍휼이 없는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셔도 그 뒤에 긍휼을 숨겨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께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내리신다면 이 땅에 살아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율법의 극치가 뭘까요? 바로 ‘긍휼’입니다. 오늘 말씀은 긍휼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세 종류의 사랑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사랑이 있습니다. 높여주는 사랑입니다. ‘존경 또는 공경’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영어로는 respect라고 합니다. 수평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평등한 사랑을 가리켜서 ‘우애’라고 번역을 합니다. 영어로는 friendship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사랑을 가리켜서 ‘긍휼’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mercy라고 하는데 내리사랑입니다. 약자를 향한 강자의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긍휼에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not if’ 입니다. 이 말은 전혀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네가 이렇게 한다면... 만약에 네가 이런 사람이 된다면’ 이런 조건을 하나도 달지 않는 것이 긍휼입니다. 두 번째는, ‘not because’입니다. ‘~때문에’라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세 번째는, ‘not to give and take’입니다. 주고받는 것이 없습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고, 이유도 없고, 보답도 바라지 않는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런 긍휼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뭘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런 긍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인격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부르짖을 때 얼마나 따뜻하게 대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가진 것이 많고 교만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사회적 신분이 아무리 별 볼일 없어도 마음속에 믿음이 있고 진실이 있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예수님은 누구든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고 불쌍히 여겨주셨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얻은 별명이 바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슬픔이 많은 이유는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부족해서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사랑이 부족해서 우리의 삶이 더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에게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으면 거기에 감격이 있고,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쟝발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빵 하나를 훔친 것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여러 번 탈옥을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빵 조각 하나 때문에 19년 형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출옥을 했는데, 그날 밤에 갈 곳도 잘 곳도 없어서 길거리를 헤매다가 어느 신부님 집으로 갑니다. 신부님이 들어오라고 하고 식사를 주는데 쟝발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19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다가 출옥을 했는데 아무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신부님이 “우리 집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얼른 식사를 하세요.” 하면서 귀한 손님이 올 때만 내놓는 금그릇과 은촛대를 켜서 최고의 손님으로 대접하고 새 이불을 깔아주고 잠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잠을 자다가 새벽에 장발장이 잠에서 깨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라고 마음에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를 생각하니까 또 너무 막막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받아주는 사람도 없고 밑천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은촛대와 금그릇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그것만 있으면 그걸 밑천으로 해서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신부님을 배신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러다가 ‘어차피 나는 버린 몸인데. 도둑놈인데...’라고 생각하면서 은촛대를 훔쳐서 나갑니다. 가다가 경찰에게 붙잡히고 맙니다. 경찰이 그를 신부님에게로 데리고 옵니다.
“신부님! 이거 신부님 거 맞죠?” 그때 신부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것은 내가 그에게 준 것입니다. 그가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갔는걸요.” 경찰은 이상했지만 신부님이 그렇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냥 돌아갔습니다. 신부님이 쟝발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쟝발장, 나는 이 은촛대로 당신의 영혼을 샀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세요.” 이 말에 쟝발장이 뉘우치고 마음을 바꾸어서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악한 사람도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바로 위대한 힘이고 능력입니다.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게 해주셨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사 모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긍휼로 채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어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천국으로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긍휼함을 입었으니 그 은혜로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서로 사랑할 때에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긍휼을 베푸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긍휼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은혜가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시민의 대헌장인 팔복을 말씀하실 때에 이런 긍휼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5장 7절에 보시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고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못 본척하고 무관심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함께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함께' 라는 말과 '감정'이라는 말입니다. '함께 느낀다' 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아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오 헨리의 작품 [강도와 신경통]이라는 아주 유명한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루는 어떤 집에 강도가 들어옵니다. 주인에게 총을 내밀면서 '손들어!' 하고 소리치자 깜짝 놀라 손을 번쩍 듭니다. 그런데 한쪽 손만 드는 거예요. 강도가 '왼 손은 왜 안 들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집 주인이 '아 예, 신경통이 좀 있어서요.' 그 때 강도가 '아 그런가, 신경통이라고 그랬지! 그거 아주 골치 아픈 병이야. 나도 그 신경통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신경통 이야기가 나오자 신경통에 대한 대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 때부터 강도가 무엇 때문에 이 집에 들어왔는가를 잊어버리고 신세타령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강도 짓을 하는 이유도 다 신경통 치료를 위해서 하는 거라네.'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언제부터 아팠소?' '대체 무슨 약을 쓰시오?' '어느 병원을 다니시오?' '의사는 누구요?' 신경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날이 훤히 밝아지니까 이 강도가 손을 흔들고 가면서 하는 말이 '날씨가 추워지는데 몸조심 하세요!' 하면서 돌아가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길 때 그들의 불행, 아픔, 슬픔, 수치를 함께 느끼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은 '참으로 안됐다.' '불쌍하다.' 이런 정도의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얼마든지 위로해주고 동정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제로 내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긍휼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로 다가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로 듣는 것하고 실제로 가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때로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보면 '아직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면서 마음이 정말로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긍휼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고통을 당할 때마다 찾아가셔서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고통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어둠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긍휼이 없어서 세상이 점점 더 살벌한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긍휼을 실천한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질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알고 항상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가 더 행복해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긍휼함을 입은 자로서 우리도 항상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내가 긍휼히 여기는 사람임을 확실하게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의 긍휼이 강물처럼 흘러가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심판을 이기는 긍휼
약 2:10-13 / 이장우 목사 / 늘푸른교회(창원시)
우리가 야고보서를 생각하면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함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만약 율법적인 행함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모두 범한 자가 됩니다.
그 이유는 11절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살인도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최고의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이고 그 십계명을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이란 8절에서 최고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외모로 차별하였다면 이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 대충 보아 넘기니 나는 살인도 간음도 하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마음의 음욕만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 그것을 이미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살인도 미움이 곧 살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14-15절입니다.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고 미워하였다면 이것은 최고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곧 살인하는 자며 영생에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율법이든, 어떤 행함이든 간에 자기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율법을 항상 늘 완벽하게 지켜야만 합니다.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율법에서 613가지인데 그 율법 중에 612가지를 다 지키고 한 가지를 지키지 못하였다면 이 사람은 복을 받습니까? 저주를 받습니까?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대단한 점수를 쳐 주지만 율법에서는 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말씀 앞에서 자기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아래 놓여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심판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불가능합니다.
로마서 11:31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기에 어떤 인간도 자기의 의로운 행위가 율법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긍휼로만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왜 긍휼로만 구원하시는가 하면 어떤 인간의 자랑도 없애버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아들 홀로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홀로 율법을 저주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를 우리를 위하여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신 저주 받으심 아래 있지 아니하면 그 인간은 늘 율법의 저주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제 율법의 정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이제 정죄가 아니라 자유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는 말씀과 오늘 자유의 율법이란 같은 말씀입니다. 율법이란 우리를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그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그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의 정죄가 없기에 자유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먼저 율법의 정죄를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인간의 죄가 어떤 것인지 그 죄의 깊이를 보면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라는 탄식과 절망이 있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저주 받으심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또 다시 자기 공로를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심판과 긍휼을 동시에 알고 믿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형제를 외모로 차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긍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오직 긍휼뿐입니다.
야고보서 2:12-13절을 봅니다.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저처럼 말고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합니다. 자유의 율법대로란 심판 한다는 말씀은 13절에 나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면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곳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도 결국 인간의 행함으로 긍휼을 베풀어야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이니 행함으로 심판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까?
마태복음 5:7절입니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6:14-15절입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두 곳의 말씀을 보면 인간이 먼저 긍휼히 여기는 선행 조건이 있어야 긍휼을 받는 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구원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을 다 지켜야 되는데 지키다가 어느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다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내용 중에 자기 힘으로 지켜낼 수 있는 말씀이 과연 있습니까? 내일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습니까? 범죄 한 눈을 빼내어 버리고, 손과 발을 찍어버렸습니까? 오른편 뺨을 치는데 왼 뺨을 돌려 되었습니까?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었습니까?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주었습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결국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말씀입니다. 누가 나는 이러한 긍휼을 베푸는 조건이 갖추어 졌기에 긍휼을 받을 만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9: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세리의 집에서 여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실 때에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힐문하였기에 예수님께서 답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긍휼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자기들이 제물의 희생으로 살아간다는 긍휼을 담아야 하는데 제사 지내는 그 율법적인 행위자체를 그들의 의로 여겼기에 그런 제사에는 긍휼히 여김이 담겨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사를 지내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죄인들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자들은 주님의 긍휼, 불쌍히 여겨주심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죽을지언정 자기 자존심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합니까? 처음에 믿을 때는 은혜로 믿지만 믿고 나서는 나의 행함으로 갚아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서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이 바로 주님의 긍휼, 유일하게 심판을 이기고 자랑할 수 있는 긍휼을 발로 차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의 긍휼을 입고 나온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누가 높은가 하는 문제가 나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부자가 왔다고 특별대우하고 가난한 자가 왔다고 무시하게 된다면 그 현장이 주님의 긍휼을 모독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란 주님의 집에서부터 먼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입은 자인지 아닌 지를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주님께 긍휼을 입은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신이 긍휼을 입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긍휼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외모로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시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줄까요? 일곱 번 정도면 되겠습니까? 대단한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만 달란트란 그저 많은 돈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주민들과 베레와 지역 주민 모두가 로마에 세금을 내는데 그 돈이 이백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란 개인의 능력으로 도저히 갚을 수가 없는 금액입니다.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고 돌아가는 중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난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니 백일만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인데 그 돈을 갚지 않는다고 멱살을 잡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조금만 참으면 다 갚아 준다고 하였는데도 그렇게 조치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자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주인은 한 푼도 남김없이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영원토록 갚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벌을 받은 것은 무엇을 행하지 아니한 것입니까?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그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네가 긍휼을 입었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한 지옥형별의 저주에서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 용서를 긍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용서를 받은 사람끼리 세상의 조건을 따라 차별대우 한다면 그런 곳이 어떻게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자를 사람들이 돌로 치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자 모두 다 돌아가 버렸습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 받은 이 여자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심정이 이 용서 받은 여인과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긍휼만 자랑되기를 바랍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성경을 다 어기는 것
야고보서 2:10-13
많은 신앙인들은 ‘늘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므로 반성하고 항상 깨어서 노력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참 겸손한 말로 들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아직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죄인이라는 고백이고, 구원은 아련한 것이라는 고백일 뿐입니다. 아닐 것 같습니까? 무례한 말일까요?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우선 성경대로 살려고 하는데 안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을 육체의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해 보니 그것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려운 것이기에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겸손을 떨지만 그것은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정타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에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다가 어느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면 그것은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라고 못을 박은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육체로 지킨다는 자체가 율법입니다.(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겠다는 것입니다.) 지키려는 성경이 구약이냐 신약이냐에 따라서 율법이 되고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기(예수님 오신 후) 30,000년이라 해도 신약을 행위로 지켜내려 한다면 다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성경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못 지켜냈다면 성경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것이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라고 가르치고 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인 오늘날의 모든 교회와 그 성도들은 모두 성경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사람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내려고 한다면 커피 한 잔을 누구에게 얻어먹은 수익에 대한 십일조까지 내어야 온전한 것이 될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그것까지 계산해서 정확하게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온전히 내는 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항상 기뻐하라고 했는데 어느 한 순간 예외 없이 기쁘고 웃고만 있지 않았다면 전 재산을 교회에 바친들, 해외에 가서 선교를 하든 상관없이 성경을 하나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두 가지만 들이대도 이미 대부분의 교인들,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는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을 하나도 지키지 않은 것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렇듯 율법의 어느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율법을 다 어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앞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에 이어서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차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도를 어긴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성경을 모두 어긴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사랑과 의도로 생을 주신 사람을 차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기준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기준 없는 차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모가, 육신의 삶의 모양이 부자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 차별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기준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은 성경을 전혀 지키지 못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하나를 어긴다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보기 때문에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의 기준이 ‘육신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이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기준이 사람의 외모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중심이 무엇인지를 살핀다면 당연히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중심을 보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 역시 율법을 언급하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행함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모가 아니라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려면 당연히 성경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심겨서 그 의가 생명이 되어 나타나면 다 지켜지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어야 그것이 보이는 것이므로 결국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도가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심판을 이기는 긍휼
약 2:10-13 / 민병석 목사
율법은 인간을 정죄합니다. 율법으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가리키는 증거입니다. 만약 사람이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복음은 설 땅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에서 행함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지만 결코 율법적인 행함을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 하면 본문 10절과 11절에서 인간은 절대로 율법을 법대로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율법적인 의를 얻을 수 있는가.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율법에서 가르쳐 주는 바는 죄는 어떤 죄이든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살인죄는 중한 죄여서 지옥에 가고 거짓말한 죄는 경한 죄여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비중은 다 똑같습니다. 온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이라도 아무리 적은 법이라도 그 하나에 거치게 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는 것이 야고보 사도의 율법관입니다. 무슨 죄를 범해도 죄의 값은 역시 사망인 것입니다.
죄는 하나씩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 줍니다. 하나의 죄가 그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종류를 가지고 죄의 경중을 다루거나 시비의 대상으로 오르내리면 안됩니다. 나는 거짓말하는 죄를 범했지만 너는 간음죄를 범했으니 누구 죄가 더 크냐고 시비할 것이 못됩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가 또한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모두 같은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7:3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상대방이 바라보았을 때 무서운 죄로 여긴 것입니다. 살인죄, 간음죄 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눈에는 들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에는 같은 죄이지만 형제를 판단하는 죄가 첨가되었기 때문에 티보다 한 수위인 들보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율법 전체의 죄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경중이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행동 지침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 함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벗어났다는 뜻은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정죄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으로 정죄를 받지 아니하며 율법의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롬8: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정죄를 받으사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진리라면 우리는 결코 율법적인 정죄를 받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말은 율법의 구속을 받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얽매이게 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심판의 두려움으로 우리의 생애를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율법이 두려워 율법을 준수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율법에서 벗어난 일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지침이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정죄나 구속은 받지 않지만 심판을 받을 자처럼 여겨서 말도, 행동도 조심하고 근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유의 율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율법에서 자유 함을 얻은 법으로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 안에서 생활은 하나님 앞에 율법보다 우월한 열매를 맺습니다. 율법의 심판에서 벗어났다고 방종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복음 안에서 심판을 받을 자처럼생각하는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인은 긍휼을 베푸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경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의 과실을 용서해 주고 죄를 관용해 주며 화목하며 먼저 사과하는 모든 일이 긍휼입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생활 지침은 율법에 근거를 두면 안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식의 생활은 하나님의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율법보다 더 온전한 법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법은 자유인의 율법이요 긍휼의 율법입니다. 이런 법을 지킬 수 있는 성도의 생활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긍휼의 힘(사랑의 본질, 긍휼)
약 2:12-13 / 김만종 목사
제가 일을 붙들고 사는 사명을 받았나 봐요. 처음에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했는데,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져 가면서 건강한 교회가 가야 할 길을 가다보니, 일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저는 이름 내는 일 싫구요, 교회가 얼마나 하고 있다고 지역 외에 다른 곳에 드러나는 게 싫어요. 교회가 해야 하니까, 그게 교회가 있는 이유라면, 그냥 묵묵히 섬기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도 어떤 직책도 싫고 그냥 뒤에서 섬겨요. 코스타에서 어쩔 수 없이 맡은 직책이 있는데, 코스타를 살리려다보니 정말 어쩔 수 없이 맡은 거구요.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아 불편하고, 곧 내려 놓을 생각이에요.
대신 주어지는 일이 가치가 있는 일이고, 섬기고 돕는 일이라면 거절을 못하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돕고 싶고 마음을 쓰고 싶어요. 나보다 어려운 선교사들, 사역자들에게는 돈 한 푼 쓰게 하는 게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불편해서, 단 한 푼도 쓰게 하지를 못하겠어요. 그냥 진심으로 해요. 요즘은 우크라이나를 돕는 사역으로 이런 저런 일들이 모이고 있어요.
우리 교회를 세우는 사역도 소홀하지 말아야 하고, 또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해야 할 사역의 지평은 넓어지고, 그러다 보니 힘에 부칠 때가 있습니다. 이번에 우크라이나를 위한 평화콘서트를 했는데요, 제게 물어요. 이런 거 한 번 하려면 재정이 얼마나 들어가냐구요. 염려인지 질책인지 잘은 모르겠는데, 거의 안 들어갔어요. 다 자비량으로 와서 온전히 섬기다 가셨어요. 우리교회에서는 그분들께 3박 4일 머무시는 동안 밥 세 끼 사드린 게 전부에요. 그 외에는 다 몸으로 헌신하며 돕는 거예요. 제게 필요한 건 시간인데, 시간 나눠 쓰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러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잠을 줄이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잠을 줄여도,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도 기쁨이 있어요. 피곤하기는 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힘들다 싶을 때도 있는데, 그래도 그게 마음에 감사와 자유함을 줘요. 진심으로 그래요.
말씀 이해
제가 왜 이런 말로 설교를 시작하냐면요, 우리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묻고, 진심으로 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12절은 이렇게 말씀해요.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2절에는 아주 중요한 지침이 있고,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행동의 지침은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거구요,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은요, 우리가 자유의 율법으로 심판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 설명이 13절까지 이어지는 데요, 그 심판의 기준이 되는 도구가 뭐냐면, 긍휼이에요. 오늘 본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긍휼”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본문이 너무 어렵지 않으세요. 조금 이해가 쉬운 표준새번역을 읽어드릴게요. “12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3 심판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합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실 거예요. ‘자유를 따라 주는 율법’, 이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 율법으로 우리가 심판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한다는 거구요. 그 심판의 기준이, 자비를 베푸는가, 아닌가인데요, 그 자비가 개역개정에서는 “긍휼”이에요. 이제 풀어서 다시 한 번만 설명하면요,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율법이 있는 데, 그 율법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긍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없지만, 긍휼을 행하지 않으면 심판이 있다구요.
이 말씀을 지난주에 함께 나눈 선택적 순종의 위험성에 관한 말씀과 이어서 생각해 볼게요. 지난주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내 맘대로 말씀을 취사선택하고도 그게 괜찮은 듯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어요.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결국은 나에게서 주님을 더 멀게 하고, 결국 주님이 아닌 내 뜻대로 사는 것이거든요. 그러면서도 나는 주님을 섬기고 주님 뜻대로 산다는 착각, 저는 그런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위선이 너무 두려워요. 그렇게 살다가는 우리의 신앙이 진짜 왜곡된 껍데기만 남게 되거든요.
이런 우리에게서 구체적으로 발견 되는 것이, 말도 안 하고 행동도 안 하거나, 또는 말만 하고 행하기는 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오늘 본문은 보고 있는 거예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 구원을 안다, 때로는 감격한다, 그런데, 그런 신자인 우리가 긍휼을 향한 일에 삶이 없는 거예요.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게 우리의 선택적 순종라고 보는 거죠.
자유케 하는 자유의 율법
야고보는 이런 우리의 선택적 신앙을 앞에 두고 심판이라는 단어를 꺼냈어요.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라고 해요. 그런데, 무엇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냐면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해요.
이 “자유의 율법”은 “자유케 하는 율법”이에요. 이 법의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구요. 왜 자유케 한다고 표현하냐면요, 이 율법은 강제나 두려움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안 지키면 벌을 받을까봐 지키는 그런 법이 아니라, 이 법을 지킴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얻고 감사와 기쁨을 얻기 때문이에요. 이 법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지키는 법이 아니라, 이제 죄로부터 구원을 얻은 자들이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이라서 자유의 율법이에요.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자들의 삶의 방향이 되고 길이 되었어요. 그 길에 서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율법이 우리를 심판한다는 게 무슨 말이겠어요. 율법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율법이 어떻게 우리를 자유케하지 못하겠어요. 십자가가 은혜이고,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살았더니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난주 말씀처럼 선택적 신앙을 살고 있다면요. 하나님은 그런 기준을, 내 맘대로 이건 된다, 이건 안 된다, 기준을 주신 적이 없으시니, 하나님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 하나님 기준이 아닌 내 기준, 그렇게 살면 어떨까요. 완전히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조금이라도 주님 앞에 나를 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힘들어질 겁니다. 자신의 신앙이 늘 그 자리인 것이 힘들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서 살다보면 당하게 되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참된 위로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할 거예요. 그저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나만 왜 이러냐고 하소연 할 뿐이죠.
우리가 왜 자유해 지나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불가능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 아닌가요. 그래서 이제 더 이상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권세와 승리, 자유는요,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키신 예수님으로 얻은 거예요. 예수께서 보이신 그 섬김에 의해서, 자기를 죽이시는 그 사랑에 의해서요. 그래서, 우리는 그 안에 있을 때에 완전해집니다. 그 안에 있을 때에 자유해 져요. 그 사랑을 내가 예수와 함께 걸어갈 때 완전해 져요. 그게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약1:25) 이에요.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는 그 자유를 잃게 돼요. 내가 누리는 자유는 가짜가 됩니다. 여전히 심판 안에 있는 것 같은 두려움, 세상에서의 욕망을 사는 사람이 느끼는 불안함을 버리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 누리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더 불안과 절망으로, 평생을 평안 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게 하는지 알잖아요. 우리가 가진 걱정들이 다 그런 거예요. 그게 우리에게 심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행하라
그런데, 13절은 이것을 더 강하고 크게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누군가 긍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어떤 긍휼도 없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실래요. 우리에게 아무런 긍휼도 없이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자신 있으세요.
이 심판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늘 헷갈려요.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배웠어요. 그 구원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어요. 우리가 한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 그럼,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뭘까요. 이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거든요. 오늘 13절에 나오는, 심판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말이 분명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 없는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으면 지금의 우리도 없거든요. 지금 우리에게 긍휼 없는 심판이 다시 임한다면, 여기에 가능성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불가능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세요.
그런데요, 여기에 조건이 붙어 있어요. 우리가 긍휼을 행하지 않을 때에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해요. 여러분, 구원과 심판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거예요.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어요. 구원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져요.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는 어떻게 행하느냐로 파악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 행위는 마음에서 시작돼요. 한 번에 모든 행위가 다 바뀔 수는 없으니, 처음에는 작은 것에서, 감동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마음에서 시작하고 커져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저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 목사는 그 행함에 있어서의 중요한 질문을, “너는 죄에 대해 어떠한가” “너의 삶은 어떠한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해요.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 문제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곳곳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묻고 있어요.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되는 문제라는 걸 진짜 모르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긍휼을 말하는 거예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 없다면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그런데, 심판의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긍휼을 행하는 것”이에요. 이건 우리의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을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우리가 긍휼한 마음으로 행하면, 그게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하게 된다는 가르침이에요.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를 통해 드러나요. 그게 하나님의 인간 설계에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일하세요.
그게 13b절에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는 능력이에요. 이걸 보이신 게 십자가에요. 우리는 도저히 불가능한 존재였어요. 그런 우리를 이렇게 다시 생명으로 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서 무엇으로 나타나는 가, 이걸 한 단어로 말해서 긍휼이이에요. 그냥 마음에 담긴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기까지의 직접 행하시고 보이신 긍휼이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으면 우리는 그 긍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 긍휼은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는 증거인 거예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가 그 긍휼을 행할 때,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도 더 완전하게 깨닫게 됩니다. 마음으로 감격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이었다면, 우리는 긍휼을 행함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게 돼요. 마치,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더 잘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은 아이를 낳아 길러보면서야 더 잘 느껴지는 것과 같은 걸 거예요. 내가 긍휼한 마음을 갖고 행해보니, 아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깊었구나, 이렇게 뜨거웠구나, 은혜가 이것이구나, 깨닫게 되구요, 그게 결국 이 땅의 모든 심판에서 내가 승리하게 되는 힘이 되고 도구가 되더라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주님을 아는 사람이 나만 붙들고 살면서 심판을 걱정하는 것보다, 긍휼함으로 살면 심판도 이긴다는 데, 왜 안하고 계속 심판만 고민하냐구요.
히브리서 4: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이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긍휼하심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것을 경험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미 그 십자가의 긍휼을 이루셨기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분명히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거든요. 그런데, 부활을 통해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셨다는, 그 하나님께서 내게 그 고난의 십자가로 긍휼을 베푸셨다는 깨달음을 확인 한 순간부터 완전히 변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역사가 시작되고, 그때부터 승리하게 되었어요. 그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시는 긍휼하심이에요.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긍휼은 심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위해 주셨어요. 긍휼을 행하지 못해 당할 심판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긍휼을 행하고 심판을 이기고 승리를 선포하라고 주셨어요. 그게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 율법이에요.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야고보는 우리가 긍휼이라는 단어에 갇혀 생각만 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웃사랑을 긍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요, 긍휼한 마음, 함께 느껴주는 공감, 함께 아파해주는 통감, 그것이 사람다운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사랑해야 해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진심으로 예수께서 내게 하신 그 은혜의 긍휼을 느끼고, 같은 아픔으로 보아주고 찾아가야 해요. 그럴 때 차별하는 마음도 사라지고, 차별대우 받고자 하는 욕심도 사라집니다. 차별의 반대가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사랑의 동의어가 긍휼이에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신앙은 자기 연민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언제부터 신앙이 자기연민 이었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어 주셨는데,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언한 존재들인데, 언제까지 자기연민을 신앙으로 착각하며 살아야 할까요. 이제는 자기연민에서 타인의 생명을 향한, 그들의 삶을 향한 긍휼함을 가질 때,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여러분, 마음을 넓게 가지세요. 이제 공부해서 남 주고, 돈 벌어서 남 주는 삶을 살아야 해요.
그래서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합니다.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실천적인 단어가 ‘긍휼’이라면, 긍휼의 더 구체적인 모습은 “차별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며 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2장 앞부분 전체가 차별하지 말라고 하고, 앞으로 우리가 읽어갈 3장 모든 구절이 긍휼한 마음으로 실제 돌아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주님 앞에서 속을 다 뒤집어서 내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 봤더니, 다 자기 생각, 욕심, 자기의 추구하는 가치만 들어 있고, 또 우리가 걸었던 길을 살펴보니 다 자기와 가족으로만 그쳐 있으면 니제 안 된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을 향해야, 그게 성경이 가르치는 긍휼을 행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믿음, 그 믿음은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행함, 즉 순종으로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순종의 행함은 그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얻은 자가 감격해서, 그 긍휼을 주신 자의 마음을 알아, 그 마음으로 하는 행함입니다.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 하는 거예요. 거기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그 마음에는 감사와 기쁨,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믿음이에요.
우리는 완벽하게 율법에 순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면,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감추시고 기뻐하실 거예요. 그게 성경의 가르침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