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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격조했습니다. 다들 잘 지내셨지요?
아시다시피 제가 응원하는 부산이 강등을 당한지 이제 5일째 입니다. 한동안 패닉에 빠져있기도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잊어보려고도 했습니다만, 분이 쉬이 가라앉질 않습니다. 더군다나 일부 축구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왜 부산팬들은 저렇게 화를 내냐? or 정몽규 구단주가 없는 형편에 그렇게 투자했으면 할만큼 한거 아니냐?' 등등의 반응을 드러내며 그 화를 부채질하기도 하더군요.
그리하여 부산은 왜 강등을 당했나 글을 써서 일부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화내는지를 알리고, 동시에 제 시름을 풀고자 합니다.
좀 많이 길고, 아직 하 편을 써야되지만, 상편 만이라도 천천히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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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을 쓰기 정말 싫었다. 정확히는 제발 쓰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는 법. 결국 비참한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기왕 이렇게 된 것 한번 파고 들어가보자.
대체 부산의 이름을 달고 뛴 이 팀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를..
Ⅰ. 들어가며
다들 아는 얘기는 생략하도록 하자. 리그 4회 우승에 빛나는 팀, 로얄즈 시절의 영광도 여기서는 잠깐 잊자. 분석의 대상은 2005년 부터 2015년 현재까지로 잡겠다. 즉 부산 아이파크가 '그나마' 마지막으로 우승컵도 들어보고 ACL도 나가며 방귀 좀 끼던 시절부터 현재까지, 10년이란 시간동안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고야 말았는가.. 그 원인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보자.
Ⅱ. 원인 분석
1. 세대의 단절
2005년 7월 10일 부산아시아드 경기장, 당시 부산은 대전과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2005 삼성하우젠 K리그 전기 우승을 달성하였다. 2004년 FA컵 우승 당시만 해도 뽀록 우승이네 아니네 말도 많았고, 2005년 초 진행된 컵대회에서 독보적인 꼴찌를 기록, '역시나 부산은..' 하고 타팀 팬들의 비웃음을 받았던 그 부산이 무려 7승 4무 1패라는 성적으로 전기 리그 타이틀을 가져갔던 것.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선수단 정원이 불과 30명을 겨우넘기던 시절 (선수단이 다 합쳐서 34명인가 그랬을 거다.), ACL을 병행하면서 일구어낸 성적이었다는데 있다.
이 때의 우승 이유로는 많은 것을 꼽아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딱 한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바로 이장관, 김재영 (후에 김재형으로 개명), 윤희준, 이정효, 임관식 등 노장들이 중심축이 되어 선수단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는 점. 훗날 이 때를 회고하는 인터뷰에서도 선수들은 이 점을 우승의 원동력으로 꼽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뷰를 이제 와서 찾으려 하니 만만치 않다. 부득이하게 내가 기억하는 대로 인용하겠다.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 도 있다)
.. 당시 감독 퇴진 운동도 겪었었고, 선수단 분위기도 뒤숭숭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팀인데.. 최고의 인기 구단이었는데..
'뭔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라는 마음으로 선수들을 한데 모았죠.
그러니 연승도 하고, 비길 것 같던 경기도이기면서 우승까지 하지 않았나 ..
그렇다. 이런 선수들이 부산에 있었다. 적어도 2005년 7월 10일, 그 시점 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이 날 이후로 모든 것은 무너져 갔다. 우승의 기억을 전승해줄, 승리에 대한 갈구를 표현해줄, 선수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줄 선수들은 하나 둘 사라졌간 것이다. 김재영 선수의 경우는 부산의 김재영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며 김재형으로 개명 후 전북으로 떠났고, 임관식과 윤희준 선수는 전남으로,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이정효와 이장관 선수 마저 한명은 은퇴, 한명은 인천 행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물론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경기력은 저하되기 마련이고, 결국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부산은 노장들을 사라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재계약 포기라는 명분하에 버렸고, 심지어 그들을 우롱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아직 2007년 구단 측이 이정효/이장관 선수를 '20년 계약' 운운하며 구단의 레전드로 추켜세우던 것을 잊지 않고있으며, 불과 수개월 만에 이장관 선수에게는 은퇴 종용 및 재계약 포기, 이정효 선수에게도 2008시즌 종료 후 계약 포기를 선언했던 장면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단의 처사를 나 뿐만이 아니라, 김용대, 배효성, 김유진, 김태민 등 한창 부산의 주축으로 성장해가던 젊은 선수들도 지켜보았다. 그들은 직감했을 것이다. 부산에 계속 남아있는다면, 저것이 자신들의
미래가 될 것이란 것을.. 그래서 그들은 하나둘 팀을 떠났다. 김용대는 성남으로, 김유진은 일본으로, 배효성은 상무로 입대하면서 전역 후 부산을 떠날 것이라 선언하였고 그 말을 지켰다. 여기에 김태민도 SK로 떠났다. 그렇게 부산은 2005년 전기리그 우승을 이끈 주역들을 불과 3년여만에 대부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 생각에 '부산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왔나'를 물을 때, 첫째로 놓일 원인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승을 경험했지만, 그것을 전승해줄 사람이 구단 내에 아무도 없다는 것.. (2005년의 주역들이 지금도 몇몇은 선수로 활약하고 있으며, 몇몇은 대학 축구부 감독으로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고 있음에도, 이들에게 부산의 구단 수뇌부는 눈길조차 주질 않고 있다..) 이처럼 의도된 우승 세대와 현재 세대의 거대한 단절은 열정과 투혼의 소실로 이어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작금의 부산 선수들에게 2005년의 기억은 '활자화된 역사'일 따름인 것이다. 너희가 지금 그렇게 뛰어서는 안된다는걸, 너희의 유니폼에 박힌 별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는 외침은 오로지 팬들에게서만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말을 선수들과 함께 숨쉬고 생활하며 던질 이들은 모두 부산을 떠났으므로..
2. 방관하는 회장님과 무능력한 실무진의 앙상블
(원래는 회장님 / 프론트 / 지도자로 목차를 나누어서 글을 쓸까 하였으나, 어차피 상호 연관되므로 한 챕터 안에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겠다.)
앞서 1에서 언급한 '세대의 단절'을 보고,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도 있다. .. '세대의 단절, 좋다 이거야. 그런데 K리그에는 아직 부산보다 우승 경험이 없거나, 전통의 명가라는 축적분이 다소 부족한 팀도 많고, 부산 이상으로 젊은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는 팀도 있어. 그런데 걔네들도 부산보다는 훨씬 잘 나가는데?' .. 라고 말이다. 맞다. 부산의 문제는 '세대의 단절',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세대 간 단절이 폭약이라면 기폭장치는 따로 있다. 이제 그 기폭장치에 대한 얘기를 꺼내볼까 한다.
우선 시점을 이안 포터필드 감독 시절로 돌려보자. 이 때 당시 부산은 감독의 파워가 막강한 팀 중 하나였다. 감독의 요청으로 선수단 정복을 만든 것도 이 때부터이며, 선수단 정복에 팀 엠블럼을 큼지막하게 박아넣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여기에 클럽하우스 건립과 전용 연습구장 확보, '부산 U-12 → 신라중 →동래고' 로 이어지는 유소년 시스템 청사진의 구축, 심지어 우승이와 연승이의 마스코트화까지 모두 이안 포터필드 감독 시절의 성과였다. (물론 이러한 성과 외에, 포터필드가 저지른 잘못도 많다. 다만 포터필드의 오점은 여기 주제와 연관성이 적으므로 생략한다.) 여하간 이 당시 포터필드 감독은 구단주의 지지 아래 자기 권한을 늘려갔고, 이에 대해 프론트 측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런 포터필드가 2006년 21경기 연속 무승을 찍고 돌연 사임한다. 제왕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2006ㆍ2007년 즈음부터 부산 아이파크 사무국 내에는 이러저러한 팀 조직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역공헌팀이라든가, 전력강화팀이라든가, 유소년 전담팀이라든가.. 이후 해당 조직의 장으로 부산 태생의 인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꿰차게 된다. 개중에는 아래에서도 언급할 한정국 씨 등 축구인 출신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사실 포터필드 이전까지, 부산은 프론트의 파워가 매우 강한 팀 중 하나였다. 당장 부산 대우 로얄즈 시절의 역사는, 사실상 안종복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안종복 단장의 월권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현대산업개발이 인수한 이후에도 프론트의 월권 경향은 계속되었다. 선수의 영입과 방출, 전술적인 문제까지 프론트가 개입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멀리갈 것도 없이, 2015년 DSD 11 슬로건도 부산의 전술 스타일과 동떨어진 프론트의 작품이었다.) 심지어 어제까지수석코치로 감독의 지시를 받던 사람을 하루 아침에 부단장으로 올려놓으며 선수 영입 등에 있어 감독과 대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만드는 재주도 부렸다. 요컨대 부산은 감독과 프론트 간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프론트가 감독의 상전 노릇을하며 동시에 감독에게 견제를 가해온 셈이다. 그것도 몇십년 동안 말이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는 팀이니 이안 포터필드의 퇴장과 함께, 프론트의 권한은 다시금 늘어나는 쪽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2008년 황선홍 감독이 부임할 즈음에는 대략 단장 (전략기획 및 홍보, 행정) / 전력강화팀 (선수 영입 및 평가) & 유소년 전담팀 (유소년 운영) / 감독 (선수단 관리와 경기 진행) 으로 업무가 분담되는 방식이 자리를 잡기에 이른다. 일단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모양새는 그럴싸했고, 해외 명문 축구팀들도 구조가 저러하다며 소위 선진화 된 구단 행정의 실현이라는 공치사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업무 효율이 바닥을 기었다는 점이다. 당장 예를 들어보자.
우선 전력강화팀. 이들의 주요 업무는 선수 영입과 방출, 특히 외국인 선수 영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과거 2008년 이래 전력증강위원회, 2009년 전력강화팀, 2015년 현재는 전력강화실이라 하여 이름만 조금씩 바꾸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즉 2008년부터 2015년 현재까지 8년 동안 부산에 등록된 총 32명 (2008년 5명, 2009년 3명, 2010년 3명, 2011년 5명, 2012년 3명, 2013년 4명, 2014년 4명, 2015년 5명)의 외국인이 전력강화팀의 작품이란 얘기가 된다. (일단 연맹 기록 +내가 기억하는 기준이다. 32명 중에는 재계약해서 재등록된 선수도 있으며, 내가 빼먹은 선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둘 다 크게 많은 숫자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중에 성공했다고 할 만한 선수는 누가 있나? 성공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나마 밥값은 했다할 만한 외국인은 누가 있었나? 닐손주니어, 파그너, 에델, 맥카이.. 꼽아봐야 4명을 넘어가질 않는다. 4/32.. 12.5%의 확률.. 차라리 팬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주고 투표로 선수를 뽑아도 이것보다는 잘하리라 싶을 지경이다. 더군다나 위 성공 사례 중, 닐손주니어는 윤정환 감독이 윤성효 감독에게 직접 추천해줘서 데려온 선수였고, 맥카이는 안익수 감독이 2010년 호주로 전지훈련을 갔다가 점찍어 영입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즉, 위 둘을 빼면 전력강화팀의 성공 확률은2/30, 6.66%로 줄어든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했다.
그러나 위 실패에 대해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승률 6.66%의 감독이라면 당장 경질감이겠지만, 외국인 영입 성공률 6.66%는 면죄부라도 쥐어주는 모양이다. 특히 현재 전력강화실의 장으로 계시는 모 분은, 2006년 부산 아이파크에 입사해 2008년 전력강화위원회 자리에 앉으신 이후 2010년 전력강화팀장을 넘어 사무국장에까지 취임, K리그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K리그팀 사무국장이라는 기록도 세웠으며, 2015년 현재까지 부산에 몸담으며 부산의 강등을 함께하셨다. 여기에 영상만으로 선수를 선택해 실패하지 않겠다며 '이번엔' 브라질까지 다녀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잠깐.. 감독이 시즌 중이나 오프 시즌에 브라질 등지에 가서 선수를 관찰할 여유가 안되니까 만든게 전력강화팀 아니었나? 근데 전력강화팀이 비디오나 보고 선수를 영입했다고? 이럴거면 차라리 감독한테 비디오를 쥐어주고 골라보라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전력강화팀은 대체 무엇때문에 필요한걸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이어서 유소년 부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전력강화팀은 그래도, ‘예산부족’이라는 면죄부가 있다. 항상 쪼달리는 외국인 선수 영입 예산으로 선수를 영입해야 하니, 브라질 갈 돈도 아껴야되고 어쩌고저쩌고..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구석이 있다. 그러나 유소년 쪽은 그런 변명조차 할 수 없다. 부산 아이파크는 정확한 내역을 공개하지 않지만, 매년 운영예산에서 적게는 10% 전후, 많게는 20%를 상회하는 규모의 예산을 유소년 투자에 쏟아부었다. 특히 위에서도 언급한 '부산 U-12 → 신라중 →동래고' 라인업을 구성하던 초창기에는 여느 K리그 빅클럽 못지않은 예산을 유소년에 투자했다. 그러니 여기는 예산 부족이라는 면죄부 조차 없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지 아는가? 지금 부산 유소년은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다. 10년의 세월 동안 공들인 탑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야 한다 이 말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당장 이정협 선수도 있고 구현준, 이청웅, 이창근 등 부산 내 유스 출신들이 많지 않은가?' 라고 말이다. 그렇다. 이러한 자원이 나오긴 했다. 그런데 이 자원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U-12부터 U-18까지 유소년 지도자와 유소년 팀의 안정에 있다. 하지만 2015년 한 해 부산은 유소년 지도자도 팀도 와해되었다. 이유를 설명하겠다.
2011년 9월, 부산 아이파크는 U-18 팀으로 동래고와의 협약을 철회하고, 개성고등학교 (구 부산상업고등학교)축구부와 새로이 업무 협약을 맺는다. 하지만 개성고는 동래고, 부경고 등의 등쌀에 밀려 권역 내에서도 중하위권에 머무는 팀이었던 바, 2012년 K리그 주니어에서 B조 7위를 기록하는 등 앞으로의 험난한 길이 예고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2013년 박진섭 감독이 개성고 지휘봉을 잡으면서 상황은 일신된다. 박감독은 2013년 부임 첫 해, K리그 주니어 준우승(위에도 언급했다시피, 직전해에 동대회 조별예선 7위를 하던 팀이었다.)을 거둔데 이어 이듬해인 2014년에는 협회장배 전국고교축구대회우승 및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준우승을 기록하며 신흥 강호로 급부상한다. 이어 2015년에는 K리그주니어 및 전국고등축구리그 왕중왕전에서 우승 후보로 분류되며, 팀을 안정화 궤도로 올리기까지하였다. 이 모든 것이 3년만에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였다. 그런데..
2015년 7월, 박진섭 감독이 개성고 감독에서 부산 아이파크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된다. 문제는 7월이라는 시점. 이 시기 개성고 졸업반 선수들은 대학 진학 or 프로 진출이 걸린 주요 대회를 앞두고 있었으며, (흔히 여름~가을이 스카우트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대회는 선수들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이듬해 U-18 팀에 진학할 중학교 졸업반 선수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각 팀의 U-18 감독들이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있던차였다. 이러한 시기에 개성고 감독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치루어진 K리그 U18 챔피언십에서 개성고는 1승 3패를 기록하며 조별예선 탈락, 전국체전 2라운드 탈락, 후기 K리그주니어 B조 4위를 기록하며 전국고교축구리그 후기 왕중왕전에 참가 자격도 얻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5년 봄에 치루어진 전기 왕중왕전에서는 8강까지 올랐던 팀이, 후기 왕중왕전은 참가조차 못한 것이다.) 이어 2015년 12월에는 박진섭 수석코치가 개성고 감독 복귀가 아니라, 포항으로 이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렇다. 3년동안 박진섭 감독이 쌓은 모든 것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버린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는 2009년, 당시 부산 아이파크는 U-18 팀으로 동래고 축구부와 협약을 맺고 있었다. 당시 동래고 감독이었던 박형주 씨는 5년 가까운 시간동안 동래고 축구부에 몸담으며 동래고 축구부를 궤도에 올리고 있던 차였는데... 그런데 2009년 겨울, 박형주 씨는 부산 아이파크 윗선과 선수 차출 문제를 놓고 갈등을 벌이다 동래고 감독직을 내려놓고, 포철공고 감독으로 떠나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문제는 아직 동래고 졸업반 선수들의 진로가 정해진 시점이 아니었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박감독 밑에서 중학교 시절부터 키워진 자원이라는 점이었다. 학원축구는 소위 라인이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선수들 입장에서는 대학, 프로 진출까지 믿고 잡아온 동아줄이 하루 아침에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게된 셈. 결국 대부분의 선수들이 대학 진학 등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상당수 축구를 그만두고 만다. 유일한 예외였던 최승인 선수도 동래고를 중퇴하고, 쇼난 벨마레에 입단했다가 K3리그까지 가는 등 상당기간 고생하며 ‘실패한 유망주’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으니, 동래고 학부모와 동문회 등은 부산 측에 강하게 항의하였고, 결국 2011년 동래고와의 협약은 종료되고 말았던바 있다.
그리고 위의 역사가 지금 현재 반복되고 있다. 즉 10년동안 부산 아이파크는 U-18팀에 엄청난 돈을 부으면서 2번이나 리셋 버튼을 누른 셈이다.
전력강화, 유소년관리에 이어 이번에는 ‘대표이사 및 단장’을 살펴보자.
부산 아이파크의 경우, 2005년부터 2015년까지 크게 다음 정도의 대표이사 및 단장들이 얼굴 마담으로 활동하였다. 우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부산 대표 이사를 맡았던 이준하 씨, 2006년부터 2014년까지 단장을 맡았던 안병모 씨,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대표이사를 맡았던 김원동 씨, 2015년부터 대표 이사를 맡고 있는 변명기 씨, 이상 4명이 그들이다. 이들은 항상 ‘지역 밀착’, ‘관중 증가’, ‘경기력 향상’, ‘상위의 성적’, ‘유소년 시스템 구축’ 등의 목표를 내세우며 취임 일성을 알렸다. 과연 그들은 그 목표를 달성했을까?
우선 이준하 씨를 살펴보자. 그는 불과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대표 이사직을 수행하면서 평균 관중을 7,900명대까지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준하 씨가 취임하기 직전인 2003년, 연고이전 시도 사실이 발각되면서 평균 관중이 14,400명 (2002년) 대에서 2,700명(2003년)까지 쪼그라 들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는 상당한 성과라 할 만 하다. 여기에 2004년 FA컵 우승, 2005년 전기리그 우승과 ACL 4강도 달성하고, 클럽하우스 건립과 신라중 축구부 창단 및 동래고 축구부와의 협약 체결 등을 통해 유스 시스템의 기틀을 다진 것도 이 때였다. 즉, 그나마 위에 언급한 4인방 중에서는 가장 자신이 제시한 목표에 부합하려는모습을 보여주었고, 긍정적인 결과도 내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재임 기간은 너무 짧았다. (2004년 3월~ 2006년 7월)
이어서 안병모 씨를 살펴보자. 그는 현대산업개발이 부산을 인수한 이래, 최장기 단장직 (2006년 8월~ 2015년 1월)을수행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했을까? 우선 평균관중을 살펴보자. 2006시즌 8,000을 노려보던 평관수는 2007시즌 5,012명으로 감소한다. 이후 2008시즌에는 황선홍ㆍ안정환 영입과 가변석 설치 효과로 8,295명으로 평관이 증가하였으나, 2009시즌 7,221명→2010시즌 4,393명→2011시즌 7,242명→2012시즌4,016명→2013시즌 4,035명→2014시즌 3,254명으로 다소의 요동을 거쳐 3천대까지 평균 관중이 쪼그라드는 결과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물론 전반적으로 성적 저조라는 악재가 있었다지만, 안익수 감독 시기나 윤성효 감독 초반기 등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던 시기에도 평관 수치를 이준하 이사 시절만큼 회복시키지 못했고, 4천대에서 7천대로 반짝 증가한 평관 수를 유지하지도 못하는 등 관중 수 증가라는 목표 달성에는 사실상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다행히 경기력 및 성적 측면은, 부침이 심하긴 했지만 6강 플레이오프는 가봤다는 점에서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유소년 시스템 구축은 2011년 동래고 축구부와의 협약 파기 등을 막아내지 못하며, 가히 좋았다고 말하기 힘든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지역 밀착이라는 과제는 장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최장기 재임한 안단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사항이 크다. 과연 9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안단장은 지역 밀착을 위한 장기적인 플랜을 갖고 있긴 했는지, 그리고 유의미한 결과를 창출하긴 했는지 의문이다. 즉 안병모 씨는 6강 플레이오프에 올라봤다는 측면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재임기간 동안 부산 프론트의 무기력함과 자포자기에 가까운 홍보 태도도 개선시키지 못하였고, 스태프 간 인화관리에도 실패, 결국 폭력사태 여파로 불명예 퇴임하는 오점까지 남기며 물러났다.
이어서 김원동 씨를 살펴보자. 그는 안병모 단장과 함께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부산에 있었다. 출발은 야심찼다. 강원 FC 시절 언론에 괜찮은 조명을 받았고, 한국프로축구연맹 사무총장이라는 경력도 화려했기에 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쉬웠다. 그는 잘생긴 축구 선수들을 전면에 내세워 소녀 팬들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을 관중 증가의 중심 전략으로 삼았다. 그 결과 기존 부산 팬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신규 유입된 소녀 팬덤과 갈등을 빚기에 이른다. 결국 기존 부산 팬덤은 감소하고, 소녀 팬덤 증가세는 미미해지면서 2013시즌 부산의 평균관중 수는 6강 플레이오프 달성에도 불구, 직전 연도에서 불과 19명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어 그는, 13시즌 종료 후 부산의 주축 선수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박종우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았다며 중국으로 이적시켜버렸다. 이는 자신이 천명한 부산의 발전 노선과 완전히 배치되는 선택이었으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것도 단기적으로 봤을 때만 그러했지, 지금에 와서 보면 그다지 고액의 이적은 아니었다. (이적료가 20억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선택은 박종우 선수에게도 부산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만약 박선수가 지금까지 부산에 있었다면, 부산이 강등되는 일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박선수 본인도 국가대표에서 멀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적어도 지금 부산에서 중국으로 이적한다면, 겨우 20억 정도의 제의로는 어림도 없다고 했을 것이다. 여하간 13시즌에 보여준 오판들은, 14시즌 팀의 강등권 전락과 관중 수 감소로 이어져 김원동 이사의 구상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 결국 14시즌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던 김 이사는 성추행 혐의라는 추문을 남긴 채 불명예 퇴진해, 자신의 커리어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변명기 씨를 살펴보자. 그는 2015년 1월, 안병모씨와 김원동 씨의 동반 불명예 퇴진 이후 부산의 대표 이사로 긴급 투입되었다. 하지만 변씨는 SK에서의 생활을 끝으로 1차례 은퇴했던 상황. 구단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상황에 투입되기엔, 다소 아쉬운 인사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리고 2015년 변 이사는 별다른 반향을 이루어내지 못한채 15시즌 평균관중 3,339명 전락, 소속팀의 강등, 박진섭 감독의 포항 행을 막지 못하며 유스 체계가 무너지는 등 모든 부문에서 낙제점을 받고 말았다. SK 시절에는 정열적으로 일처리를 수행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고 하나, 15시즌 부산에서 보여준 행보라고는 DSD Magic 11 구호 발표, 몇 차례의 행사 참가, 그리고 최근의 사과문 발표가 대외적으로 확인 가능한 활동의 전부였다.
이상의 평가를 놓고 보면, 지난 10년 간 부산의 대표 및 단장들은 잠깐의 긍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지난 10년 간 곪아온 부산의 문제점들을 방기하거나, 심지어 각종 추문에 연루되면서 스스로가 문제의 근원이 되는 등 몰락에 일조하는 바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변 이사의 경우는 취임한지 1년도 되지 않은바, 앞으로의 부산 개혁에 대한 분명한 노선의 정립, 구체적인 개혁 방법론 제시, 개혁 작업의 진행 여하에 따라 평가가 반등되길 바랄 뿐이다.
다음은 대외 홍보 및 미디어 관리/선수단관리 등을 담당하는 실무 프론트 차례다.
홍보의 기본이 무엇일까? 나는 단기적으로 고객 만족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고객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축구에 관심이 없는 제3자를 고객으로 만드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기존의 고객을 지키고 이들에게 신뢰받는 것이다. 그래야 신규 고객의 유입과 기존 고객의 고정화로 선순환적인 고객 증가를 꾀할 수 있다. 그러나 부산 홍보 팀은 언제나 기본 전제를 다음과 같이 깔고 들어간다. ‘부산은 야구도시다.축구에 관심이 없다’ 라고.. 그래서 언제나관심이 없는 제3자들을 어떻게 고객으로 유입시킬 것인지에만 집중 한다. 그렇기에 수시로 구민 내지 시민 무료입장 이벤트를 벌이며, 축구가 아닌 잘 생긴 선수들을 내세워 여심을 공략하네 마네 같은 소리를 하며, 언제나 야구를 의식하는 홍보 이벤트를 벌인다. (과거 롯데자이언츠와 업무 협약을 맺고 롯데 응원단장과 치어리더를 데려온 적도 있었고, 부산 자체 치어리더를 고용한 적도 있었으며, 올해 같은 경우는 롯데디스 광고를 걸기도 했다.)
하지만 기존 고객에 대한 대응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 당장 부산아이파크 공식 홈페이지를 들어가보라. 다른 팀 같은 경우는 당연히 있을법한 구단주/대표 인사말, 구단 조직도 소개 같은 기본적인 정보부터 없다. 여기에 선수단 일정 페이지에는 분명 ‘생일’이라는 표시 기호가 존재하지만, 1년 내내 선수단 어느 누구의 생일도 기록되지 않았다. 게다가 과거존재했던 ‘질문게시판’ 같은 공간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려, 팬이 얘기할 공간은 오로지 자유게시판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에는 수많은 성토와 질의사항, 제언 등이 올라오지만 이에 대해 관리자는 자기 입맛에 맞는 글만 골라서 답변을 달았으며 그 답변마저도 지난 9월 이후 멈추어져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페이스북과 트위터 내 공식 계정이 존재하지만, 이곳에 올라오는 정보도 극히 제한적이며, 성의없기까지 하다. (페이스북 계정은 그나마 낫지만, 트위터 계정 관리는 그야말로 목불인견 수준이다. 자세한 사항은 페이스북 계정을 참고하라면서 해당 링크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멘션을 보내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기가 예사다.) 요컨대 이들은 철저하게 비공개와 불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면서 고객 만족과 고객 신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쩌다 제3자가 부산 아이파크에 애정 좀 가져봐야지 하고 마음 먹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더 재밌는 것은 ‘부산은 야구도시’라는 선입견과 ‘비공개와 불통’의 원칙은 철저하게 고수하면서도, 그 외의 것들은 수시로 변한다는 점이다. 즉 홍보가 장기적인 비전이나 방향성 없이, 수시로 바뀐다. 예컨대 과거에는 롯데자이언츠와 업무협약을 맺고 로이스터 감독을 초청해 시축을 시키는 등 상호 상생의 길을 여는듯싶었으나, 2015년에는 언제 그랬냐는듯 롯데자이언츠 디스 광고를 신문 전면광고로 게재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여기에 성지 구덕 운운하며 가끔씩 경기를 가졌지만, 경기 일정 배정에 연속성이 없었다. 즉 구덕에서 경기를 치르기 1주일전에야, ‘이번 경기는 구덕운동장에서 열립니다’ 라며 홍보를 했고, 경기가 끝난 뒤에는 ‘다음에는 언제 또 구덕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겠습니다’ 일언반구의 언급이나 추가적인 홍보 없이 그곳을 버렸다. 또한 구덕운동장에서 경기를 한다면 김주성, 정재권, 안정환, 마니치, 뚜레, 신범철 등 로얄즈 전성기 멤버들을 초청해 사인회를 연다거나 로얄즈와 부산 아이파크의 콜라보 상품을 내놓는다거나 다양하게 홍보 거리를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이들은 어떠한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한거라고는 2008년 정재권 씨의 시축, 2015년 무료입장과 봉지라면 나눠주기가 전부였다.
홍보에 대한 얘기는 더 해봐야 혈압만 오르니 이쯤에서 접어두고, 이번엔 선수단 관리 쪽을 얘기해보자. 선수단 관리는 흔히 감독과 코칭 스태프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프론트들은 선수가 자신의 역량을 모두 쏟아낼 수 있도록 의식주 및 각종 생활 편의를 지원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수단 관리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그런데 지난 12월 6일, 웨슬리 선수의 출국 금지 소식을 통해 부산 프론트는 선수단 관리 쪽에서도 평균 이하의 모습을 노출하고 말았다.
생각 외로 외국인 선수의 세금 문제는 K리그 내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선수와 에이전트 간 계약관계 및 연봉 지급계좌 소유권 문제도 실타래처럼 꼬여있는 브라질 선수의 경우, 특히 더하다. 일례로 과거 포항과 경남 FC에서 활약한 산토스 선수도 포항 시절부터 체납이 누적되어, 경남 시절 고생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경남은 효과적인 업무 처리를 통해 비교적 이른 시일 내에 산토스 선수의 세금 문제를 처리하며, 산토스 선수의 경기력을 원상 복구 시킨바 있다. 그러나 부산은? 8월부터 웨슬리 선수의 세금 문제가 불거져 월급이 차압되는 와중에도 무려 5달 가까운 시간 동안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그리고 웨슬리는 8월 중순까지 8골을 터뜨리며 팀 내 유일한 득점원으로 활약하다, 세금 문제 이후 저조한 경기력과 무득점으로 일관하며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부산 프론트는 끝까지 숨기다, 웨슬리 선수의 출국 금지 기사를 통해서야 비로소 사실을 실토하는 추태를 보여주었다.
선수와 감독에 대한 이야기는 下편으로넘기고,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구단주 이야기를 좀 하겠다. 정몽규 구단주는 자사의 당기순이익이 800억 가량밖에 안되는 상황에서 100억을 상회하는 예산을 부산 아이파크에 투자했다. 그 점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돈을 쓰기만 했을 뿐, 다른데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흔히 경영의 기본은 사람과 시스템이라고 한다. 그러나 작금의 부산을 보라. 과연 부산에 제대로 된 사람이 있나? 제대로 된 시스템이 있나? 단언컨대 하나도 없다.
재밌는 것은 조직이 이 지경인데, 구단주는 여전히 구름 위를 걷고있는듯 하다는데 있다. 정몽규 구단주는 지난 12월 8일, 사과문 겸 자신의 입장을 발표했다. 구단에 대한 지원을 이어나가겠다는 것, 조속한 승격을 이루어내겠다는것, 유소년 육성에 집중하겠다는 것, 지역밀착형 구단을 만들겠다는것 등을 거론하며 롤모델로 가시와 레이솔과 감바 오사카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기존의 지원 규모인 100억이 아니라 200억, 300억을 들인다 해도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걸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이 짐작하는 바이리라. 또한 유소년 육성에 집중하겠다는 점도 박진섭 감독 건을 보면 코웃음도 안 나올 소리이며, 지역밀착형 구단을 만들겠다는 소리는 현대산업개발이 구단을 인수한 이래 15년동안 반복해온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즉 정몽규 구단주는 구단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정보나 관심이 없이 그저 좋은 말만 읊조렸을 따름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절망적이다.
(下편에서 계속)
첫댓글 부산팬의 아픈 마음이 느껴지는군요. 상당히 화가나실 만한데 정제된 표현으로 굉장히 상세하게 부산의 과거와 현상황을 분석한 글. 힘내십시오.
정독해서 잘 읽었습니다. 기억속 저편에서 잊어가던 옛 일들이 다 떠오르네요. 오랜기간 팀이 무너져가는 모든 이유들이 다 들어있네요. 많이 속상하고 부끄럽지만 앞으로 어떻게 운영 하는지 더 열심히 지켜보려합니다. 下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아..읽는 내내 답답한 마음만...
올시즌 윤성효 감독의 늦은 경질시기와 초보 데니스 감독대행 선임. 그리고 그 대행기간 3개월 동안 사실상 손놓다시피한 구단운영에 의문이 들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그럴수밖에 없었구나싶네요. 좋은 글 정독해서 잙읽었습니다. 힘내시길바랍니다.
정말..백번 공감합니다..글 인쇄해서 아이파크 구단에 보내주고 싶은 만큼...좋은 글입니다...
강등당한 순간부터 구단이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선수들 플레이도 문제점이 많았지만...이 지경까지 방치 시켜놓은 철밥통 사무국장, 단장, 사장 등..수뇌부의 행동을 보자면 울화통이 터집니다..
눈팅하는 부산팬입니다 정독했습니다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아이파크 홈페이지에 백번 보여주고싶은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저도 프런트의 삽질에 한표입니다. 본문대로 팀이 비전과 연속성이 전혀 없어서 그냥 눈앞에 보이는 1년씩 팀 운영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왔지만 이런 식의 운영은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지게 되지요.
성공사례보다는 실패사례에서 배울 점이 더 많은 법이죠...
명색이 기업구단인데 운영이 저딴 식이면...정신 차리고 쇄신하지 않으면 부산을 챌린지에서 좀 오래 보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반대로...모기업의 경영 수준도 의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추천 하나 찍고 하편 기다리겠습니다.
상편만 봐도 암걸릴 것 같은데 심지어 속편이 있다니 같은 축구팬으로 마음이 아프네요. 힘내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