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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고독 속으로
현종스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소년이 어머니께 말씀드린다.
"어머니, 절에 가서 공부 좀 하고 오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에 있는 버섯공장에서 한 달 동안 일해 번 돈으로 책 몇 권을 마련, 한 해 더 공부해서 장학금을 주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던지 아니면 공무원시험을 볼 생각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공부를 잘하는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어머니였으므로 쉽게 허락하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된다.”
지아비가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신산한 세상살이를 이겨내려는 듯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셨는데, 그날도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담배 연기를 깊이 뿜어냈다.
아들은 어머니의 반대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신심이 깊으셨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절에 자주 가셨고 스님들께 ‘부처님께 이런 축원 좀 올려주세요’소리 한번 요구하지 않고 형편 되는대로 늘 무엇인가 놓고만 오셨던지라, 절에서는 ‘놓고만 가는 보살’이라고 불렸다. 그리곤 늘 염불만 한 분이었다.
2, 3일을 허락하지 않고 있던 어머닌 아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너는 가면 중이 될 것이다.”
염불수행을 많이 했던 어머니는 아들이 절에 들어가면 세간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것이다. 공부를 잘하니, 집안을 좀 일으켜 주었으면 했던 아들이었기에 더욱 절에 들어가는 것을 만류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아들은 깜짝 놀랐다. 시험공부가 목적이었을 뿐 출가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 전 시험공부 마치고 곧 돌아옵니다.”
“그러냐? 그러면 두 달만 있어 보아라.”
두 달만 있어 보아라, 했던 어머니의 예감은 적중했다. 절에 있은 지 두 달이 지나자 가지고 들어갔던 행정학원론이니 경제학개론이니 하는 책들을 뒤로 하고 조사어록 등 불교 책을 읽기 시작했고 절에 오가는 수좌스님들을 보면서 출가의 길을 가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뭉클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출가에의 길로 고무줄 당기듯 끌려들어가던 5월, 소년은 출가를 결정했다. 곧 나주 다보사로 갔다.
몇 달 후, 삼배를 올리고 해인사로 떠나는 청년에게 그곳에 계시던 노스님께서 화두를 주었다. 당시 수좌들 사이에서 ‘천진도인’이라 불렸던 나주 다보사 우화노스님이었다.
“너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누구냐. 생각하면 천리만리도 금방 다녀오고 과거세 미래세도 다닐 수 있으며 늘 말도 하고 듣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신통묘용하지만 잘 속기도 하고 알아채지도 못하는 주인공이 누구인가. 그걸 궁구해보거라.”
그 뒤로 강산이 세 번 바뀌고 난 지금, 화두를 주셨던 노스님을 이렇게 기억한다.
"다보사 절 분위기가 인상에 남아 있어요. 온화하고 따뜻하고 누구나 오면 마음 편안해지고 따뜻해지고, 이것이 부처님 도량이구나, 몸으로 느껴지는 도량이었어요. 돌아보니 노스님의 법력 때문이었습니다. 탐진치가 완전히 없어져 버린 듯한, 한마디로 표현하면 물 흘러가는 듯한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중노릇을 할수록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공경심이 더하고 이상적 모델로 남아있는 분이죠.”
서울 수유리의 삼성암 주지이신 현종스님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스님의 행자시절을 취재갔다가 삼성암에서 정진을 한 인연으로 마음 편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여쭈었다. 스님은 출가 후 동국대와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후학 교육을 담당하다가 불학연구소 소장 소임과 삼성암 주지 소임을 함께 하고 있었다.
스님의 출가동기와 행자시절 이야기를 듣고 나서 33년 전, 마음이라는 그 주인공을 찾으러 떠났던 청년에게, 아니 이미 오십대의 중진스님이 되신 스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었다.
“어떤 것이 제대로 하는 중노릇입니까?”
어떤 원력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함께 여쭤보았는데, 사실 중노릇이란,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람노릇’과 같지 않겠는가.
“어떤 계기로 출가했든 일주문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살면 한 생의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깊이 궁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물음을 갖게 되면 길이 있죠.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인생관과 삶을 사는 데 가장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사유를 거쳐야 합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그것을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있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인생의 근본문제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일어나는 괴로움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부처님도 말씀 하셨으니까요. 세상이 많이 발전하고 휘황찬란 이상적으로 가는 것 같아도 내면이 가진 근본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겠죠.
내가 이 길로 갔을 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발생하는 문제가 해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스님이 말씀하신 '이 길'이라는 것은 스님들에겐 출가의 길이요, 재가불자들에겐 수행정진의 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근본문제를 푸는 방법도 거기에 따라서 거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고요함(명상)을 거쳐서, 고요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비추는(통찰하는) 그 길을 통해서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불변하는 길일 것입니다. 그런 것에 대해 인식과 믿음을 가져야죠.“
........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과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고통, 구하고자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 정신과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고통(四苦와 八苦)이겠죠.
우린 그것에 던져진 삶으로 한 시기를 살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로 사바세계에 온 거죠.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 문제를 푸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잘 사는 길이다‘라는 신념, 인생관, 가치관이 확실히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들은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요함, 통찰을 통해야 합니다. 정혜쌍수죠.”
“우선은 문제를 통찰을 해야 하지 않나요?”
“마음이 가라앉지 않으면 통찰이 안되거든요. 마음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통찰하는 거죠. 시끄럽고 헷갈리는 데 통찰이 됩니까?
불교를 알아가는 길은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과정을 겪는데 신과 해, 즉 믿음과 이해는 동시에 이뤄지지요. 깊이 믿게 되면 깊이 이해하게 되고 깊이 이해하게 되면 깊이 믿게 되죠. 상호보완적으로 가면서 저절로 행이 나오는 과정을 겪는 것이죠. 신해가 상호보완적이지만 해에 있어서 계정혜 삼학으로 가는 거죠.
이것을 푸는 데 믿음이 생겼으면 어떤 과정과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갈 것이냐? 그것은 계정혜로 가는 것입니다. 수행은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인데, 마음이 고요해지려면 자기 주변의 정리가 되어져야 하고 생활 질서가 잡혀야 됩니다.
자기 몸을 비롯해서 생활 자체에 질서가 잡히면서 마음의 고요함이 생기고 고요해짐과 동시에 저절로 통찰이 되죠. 고요함 속에 사물이 비추듯이 연기 즉 공, 중도. 이런 것들은 신해행증에서 본다면 해에 해당하겠죠.
계정혜는 신해행증에 다 해당되는 거죠..“
“지난 해 12월 삼성암에서 정진할 때 ‘일념, 무념으로 가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그런 말씀 하셨습니다.”
“그것은 고요함을 거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 고요함은 좌선, 염불. 위빠사나 등 수행을 통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무리한 해석입니까?”
“아니죠.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게 계정혜 삼학이니까요. 고요함속에 깃든 것이 삼학이죠. 일념, 무념이 고요함인데, 계와 정과 혜를 거쳐서 무념이 된다는 거죠.“
“간혹 그런 말들을 합니다. 사회생활하면서 일해서 돈벌어야 하고 자식도 키우고 해야 하는데, 화두들고 염불하고 있으면 문제가 해결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수행과 생활이 동시에 가능한거냐? 하고 묻습니다.“
“물론 가능하죠. 처음에는 스스로가 이러한 방법을 가지고 가면 근본 문제를 확실히 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할애해야죠.“
“시간을요?”
“하루 가운데 시간과 공간을 고정시키면서 백일이든 1년이든 일정한 기간 동안 할애를 해야죠. 수행을 위한 고정적인 시간과 공간을 딱- 못박는 것, 그것이 계예요.
하루에 30분이면 30분, 1시간이면 1시간 조용한 공간에서 수행을 하면 반드시 고요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빨려들듯이 자동적으로 마음이 가라앉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면 확장이 되게 되어있어요. 30분만 해도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아주 고요함과 편안함과 즐거움이 생기기 때문에 점점 힘이 생기죠. 그러면 가용심, 용맹심이 생겨서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게 되어 있어요. 공간적으로는 ‘여기’뿐만 아니라 어딜 가든 되고, 진실로 힘을 얻고 확실한 믿음이 생기죠.
‘이 세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아무 것도 아니구나. 아무리 살아 봐도 진실한 것은 이것밖에 없구나.’하는 쪽으로 가게 되면 훨씬 진실해지고 간절하게 되어서 점점 확장되어지죠. 수행 쪽으로 삶에 비중이 실리면서 수행이 중심이 되고도 일상적인 삶이 유지가 되는 거죠. 살면서도 공부하는 것이 중심이 되는 거죠.”
“지난 번 정진 때 스님께선 ‘이것이면 이 세상 누가 뭐래도 전혀 흔들림이 없고 어떤 것에도 꿈쩍하지 않는 태가 하나 생겨 날 수 있도록 용을 써야 된다’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분명한, 흔들림 없는 태가 생길 때까지 용맹정진과 가행정진이 필요하겠군요?”
“시간과 공간이란 것이 결국은 내면에 있는 거죠. 객관적인 것이 아니고요. 그것이 확장되면 내면에 태가 생겨서 흔들림이 없게 되죠.”
“수행을 안 해도 돌아가는 거죠?”
“그 정도 되면 동정일여가 되는 거죠. 거기다가 자면서도 하게 되면 상당히 이상적인 경지에 가까이 간거죠. 보통 잠을 안 자는 수행자들도 꽤 있어요. 잠이라는 것도 습관이기 때문에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 생기게 되면 다니면서도 자고 그러겠죠. 그런 힘이 있는 사람이 꽤 있어요. 평생 동안 매일 철야정진을 하시는 스님도 있습니다. 그런 분은 눈빛이 다릅니다.”
“내면에 분명한 태가 생기기까지는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할 일은 많은데, 한쪽으론 공부하고 싶어서 그런 물리적인 시간을 할애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가끔 가다 활력을 받기 위해서 그런 시간이 필요하죠. 일념, 무념이 되는 사람이 몇 분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많이 되죠. 한 달에 한번쯤은 함께 수행하는 것이 좋고요.”
스님은 공부에 진전이 없으면 용맹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용맹심을 갖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첫째 잠을 덜 자야 합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공부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와의 약속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겠다는 불보살님과의 약속입니다.
반드시 나의 원력이 불보살 원력에 닿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지속적인 수행입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라고 하죠. 3만 번만 계속하면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칩이 하나 생겨요. 자동적으로 돌아가면 속이 텅 비게 되어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수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면서도 실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믿음이 생기면 할애를 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에 한 시간 정도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절대고독의 시간을 가져야죠. '절대고독을 즐기면 온갖 매임에서 풀린다'고 그랬거든요.“
“얽매임에서 풀리려면 절대고독이 전제가 되어야겠네요?”
“절대고독으로 들어가려면 훈련이 반드시 필요해요. 30분 정도 해가지고는 안 되고 적어도 2시간 정도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을 가져야죠. 미친 듯이, 죽도록 두 시간 정도라도 아침에 그렇게 해버리고 완전히 놓아버리는 겁니다.”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부닥친 일을 최대한 잘 하면 되는 거지, 꼭 그런 시간이 필요한가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에게 물어야 됩니다. 이 순간 최대한 잘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더냐고요. 물론 어떤 것이 최대한 잘하는 것이냐 하는 것도 판단 기준이 다르지만, 우선 당신의 마음 상태가 이상적인지 아닌지 두고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했을 때 그렇게 되더냐고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도인이죠. 그 다음에 순간순간 잘하려고 하는 것이 객관성을 가진, 남도 이롭고 나도 이로운 것들인가 하는 점검이 필요할 것이고요.”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다보면 자기 내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개발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수행이라는 것을 이미 놓아버렸어도 돌아가는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 도인이겠지요.”
“그렇게 되는 간단한 방법이 있죠. 목숨을 거는 거죠. 목숨을 걸어야 산다, 그겁니다. 내가 죽는다 해도 불보살님들의 원력 속에 완전히 맡기면 되죠. 수행하다 죽으면 행복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믿음에 맡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겠네요?”
“그렇죠. 믿음에 맡기고 미친듯이 돌진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론처럼 쉽지 않죠. 깊이 들어갈수록 거기에 비례하는 두려움이 엄습하죠.”
“청화큰스님께서 ‘미세한 번뇌가 해일처럼 덮치곤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신 분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미세번뇌는커녕 추번뇌(거친 번뇌)가 수시로 덮쳐와서 괴롭습니다.”
“나도 화를 내곤 하면서 환객患客, 즉 환자나그네, 잠시 왔다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깊은 병을 앓고 있는 나그네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좀 객관적이고 작게 하려고 애쓰죠. 잠시 들려가는 나그네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노력하지만 자꾸 잊어버리죠.
‘진심 본정’이라, 진정한 참마음은 본래 고요한 것이니까 고요함을 관하고 있으면 다른 것이 지나가는 그림자처럼 될 텐데. 그게 잘 안되고 속으니까, 쓸 데 없는 꾀를 내서 환자나그네라고 보려고 하죠.”
“살아가면서 무연자비보다는 유연자비가 더 어려움을 느낍니다. 자식, 혹은 곁의 가까운 사람들과의 갈등이 시시때때로 일어납니다.”
“인연은 소중하니까 최선을 다해야죠. 그러나 자식이 어느 정도 성장했으면 중요한 것만 상의하고 던져버려야죠. 힘이 생겨야 역경계를 타고 넘죠. 알아차리고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단순해지면 행복하고 내면을 바라보는 것도 쉬워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객관화됩니다.
마음을 항상 열어놓고 ‘세상사는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지나가는 것이다’그렇게 생각하면서 내면의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가려고 해야죠.”
“수많은 시간 동안 익혀온 무명의 습기를 제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천일기도를 열 번쯤 해야 습기가 떨어진다고 하던데, 맞는 말이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죠. 거기에 대한 원력과 신심이 깊으면 십분의 일로 줄 수도 있고요. 시간이 나한테 있다니까요. 백분의 일로 줄일 수도 있고 수행의 정도에 따라 다르죠. 영가스님 같은 분은 일숙각(一宿覺)이라고 하죠. 하룻밤 자면서 깨달았죠. 물론 오랜 생 동안 어느 정도 익어왔느냐가 중요하지만, 생짜라고 해도 얼마나 독한 마음을 가지고 익히느냐에 따라서 짧은 기간에 익을 수 있는 거죠.”
점심시간을 훨씬 넘기는 것도 모르고 법문에 취해있던 저에게 스님이 이윽고 그러셨다.
"이제 공양하러 갑시다."
마지막으로 스님께 여쭈었다.
“출가란 무엇입니까? 미친듯이 죽도록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출가입니까?”
“출가는 인간의 본래 맑고 밝고 따뜻한 조건 없는 마음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나그네의 길이죠. 미친듯이 죽도록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출가해서 지향해야 할 방법론이고요.”
“그렇다면 세속에 있으면서도 절대고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굳이 출세간하신 이유는 뭐냐고 묻는다면요?”
“남쪽에 심으면 유자가 되고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이 환경적으로 높은 확률로 가는 것이죠. 재가에서도 도를 이룬 예로 방거사나 부설거사 등 본보기가 있지만 그렇게 될 확률이 스님들보다는 훨씬 낮다는 것이죠.”
“수행이라는 것은 순금을 제련하기 위해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세속의 우리는 일주일 혹은 21일, 백일, 삼년 정도 기한을 정해 놓고 용광로에 들어갑니다. 스님들의 출가는 전 생애 동안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봤는데요. 맞습니까?”
“물론이죠. 그런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가는 것이 출가죠. 출발점은 그렇지만 실제로 되느냐, 안 되느냐는 근기와 자기 원력에 따르죠. 스스로 출가해서 그런 용광로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와 확률이 높은 것뿐이지, 진정 목숨을 건 수행의 길로 들어갔을 때 용광로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지요.
수승한 사람들은 행자시절 때 바로 용광로로 들어가서 자신을 제련해나오는 경우도 있죠.”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삼성암에선 곧 백일 동안 철야정진에 들어간다.
백일 동안 매일 밤 9시부터 새벽 4시 반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3백번을 송한다고 하는데, 백일 동안이면 3만 번을 염송하게 된다.
33응신에 대비해 33명과 함께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모기장도 짜야한다는 스님께 어리석은 제가 물었답니다.
“그런데 스님, 잠은 언제 자요?”
-2007년 오월에 현종스님을 인터뷰했는데 2011년 유월, 책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스님께서 갑작스런 병고로 입적하셨다. 지금 여기에서,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하신 현종 스님, 빛으로 다시 오시길 기원드립니다. 164쪽
박원자 <인생을 낭비한 죄> 중에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인생을 살면서 참답게 살지를 못햇으면서도 또 인생을 낭비 하며 살아야 하는지...
dalma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