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학교가 파할 무렵 할아버지가 마중을 나오셨다.
긴 구렛나루 수염을 연신 쓰다듬으시며 흐음 헛기침을 하신다.
누나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또 훌쩍훌쩍 울음을 터트린다.
나이 마흔에 큰아들인 나를 얻어 나를 무척 사랑하셨던 아버님은
당시 해남 황산중학교(사립)를 설립하신후 기성회장직을 맡으시며
국어를 담당하신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아직 학부형 자격도 없으신 분이 무슨 기성회장을 하시냐고
동네분들이나 동료 교사들에게 늘 놀림을 받으셨다.
그런 연유로 난 만 6살도 되기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같은 1학년인 누나는 나보다 한 살 위. 그런데 그 누나는 늘 울보였다.
1956년 당시는 초등학교 1학년도 남녀가 유별해서 남학생 여학생이
줄을 따로 서야 했다. 누나는 내 곁을 떠나 여학생 줄에 서기만 하면
늘 훌쩍거렸다. 나는 그런 누나가 안쓰러워서 선생님 모르게 누나를
내 곁으로 데려오면 그것도 일순간 선생님한테 들켜, 둘 다 야단만
맞고 누나는 흐느끼며 다시 여학생 줄로 돌아갔다.
나는 애가 타고 안절부절 초조한 모습으로 누나를 지켜 보아야만 했다.
그런 나를 보며 선생님은 늘 빙긋이 웃으셨다.
"강아!"
"야! 할아버지!"
"오늘 집에 가서 또 난이 울었다고 일르면 안된다. 알았지."
" 야."
할아버지는 나한테 몇번 다짐을 받고, 큰 손녀가 안쓰러웠던지
논물에 세수를 말끔이 씻기셨다.
누나의 울음 자국도 서서이 사라지고 우리 세 사람은 십리도 넘는 길을
나와 누나는 수다를 떨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 손을 맞잡고 아장아장,
할아버지는 큰 팔자 걸음 어정어정 휘저으시며 집에 도착했다.
싸리로 엮은 우리집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난 기다렸다는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작은 엄마, 오늘 또 난이 울었어 그래서 선생님한테 야단 맞았어"
"뭐라고 또 울었다고 에끼 이 바보같은 가시나야!"
작은 어머니의 금속성 질책뒤에, 곧 바로 할아버지의 긴 장탄식 소리가
내 귓결에 들려왔다.
"강아! 네 이놈 허허 이럴 수가 쯧쯧쯧...."
"허허 원 이런 일이....."
나한테 배신당하고 그렇게 허전해 하시며 실망스러운 모습을 지으시던
그 할아버지가 오늘 따라 몹시도 보고 싶다.
어디 가실 때 무명 도포자락 말쑥하게 차려 입으시고, 신작로에서 버스를
세우실 때는, 아예 두 팔을 벌리시고 버스 앞을 가로막으시던 그 웅장한
구렛나루 수염이 바람에 나부끼던 너무나 멋지고 멋진 할아버지의 얼굴이....
그리고 어디 마실 다녀 오실 때는 거북이빵(당시 붕어빵 대신 굽던 소다에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던 안에 단팥도 없었던 풀빵) 꼭 한 봉지 사오셔서 내
품에 안겨주시던 그 할아버지! 그 신문지 봉지 속의 거북이 빵이 그만 너무
따뜻해서 할아버지의 사랑이 마치 만조(滿潮)시의 바닷물처럼 내 가슴에
가득 스며들던 당시를 생각하면 내 나이 열살 때 헤어진 할아버지를 한 번
다시 보고 싶은, 아니 다시 응석이라도 부려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것은
내가 동심원의 회귀를 바라는 것과는 또 다른 할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넘실대는 사연이기도 하리라.
나도 머지 않아 손자를 볼수 있는 할아버지의 문턱에 들어서는 나이 때문
만은 아닌데, 오늘 밤 나의 뇌파 속 그 어떤 촉수가 할아버지라는 단어를
이리도 요란하게 흔들어대며 나에게 이런 글을 쓰라는 명령을 내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내일 모레 아버님 기제사인 연유인듯도 싶다.
밤이 깊어만 가고 축시가 넘은 시간이다..
울보였던 사촌 누나 난이는 지금 서울서 산다.
초혼에 실패하고 아들 하나랑 같이 사는데 아마 환경이 꽤 어두운 모양이다.
내가 숙부님께 난이 누나 보고 싶다고 말해도, 봐서 뭐하느냐며 다른
말씀을 일체 안하신다.
난이 누나는 어렸을 때 부터 그렇게 울보여서 사는 것도 그런 고단한
삶을 사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첫댓글 그 바쁜 생업 와중에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데도, 주옥같은 수필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