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 본당인 답동 성당은 1889년 7월 1일 설립되었으며, 설립 당시 제물포 본당이었는데 그 후 인천 성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 년의 기해박해 이전이었다. 그 후 이 지역에서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인천, 부평,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다.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 이전이었지만. 조선교구는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이 장차 발전할 것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성당 대지를 물색. 이듬해 7월 본당을 설정하게 되 었다. 당시 페낭신학교에 있다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빌렘(J. Wilhelm) 신부는 대지를 매입하고 성당과 교리실을 건축하려고 계획했으나 용산신학교로 전임되고 말았다. 이어 제3대 주임 마라발(J. Maraval) 신부는 부임 즉시 코스트 신부에게서 성당 설계도롤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 1897년 7월 4일 준고딕 양식의 성당을 축성하였다. 제4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뇌(E. Deneux, 全學俊) 신부는 신자수 증가로 성당이 협소해지자 시잘레(P.Chizallet, 池士元) 신부의 설계도에 따라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을 확장 개축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완공하여, 1937년 6월 30일 서울교구장 라리보 주교 집전으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정면에 3개의 종탑을 갖고 있는 답동 성당은 이전의 서양식 성당과는 달리 벽돌과 돌을 혼용 하였으며. 내부 열주와 2충 바닥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벽돌 구조를 혼 합하였다. 평면 구성은 삼랑식의 장방형으로 신랑과 측랑은 원형 기둥의 열주에 의해 구별이 뚜렷하며. 열주 사이는 원형 아치로 연결되고 열주와 외벽의 반원형 편개주 사이는 리브 없이 외벽 전체와 반원형 볼트로 연결됨으로써 반은 그로인 볼트, 반은 베렐 볼트의 특이한 천장 형태로 되어 있다. 일제 후반기의 성당 건축을 대표하는 답동 성당은 명동 성당 다음가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로 1981년에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1935년 드뇌 신부는 연로하여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임종국(바오로) 신부를 보좌 신부로 맞이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드뇌 신부가 서울 주교관으로 휴양을 감에 따라 임 신부가 최초의 한국인 주임 신부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195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본당에 재임하면서 해방과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로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답동 본당에 큰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대리구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였다. 이에 따라 1959년 11월 16일자로 버크 신부가 6대 본당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임종국 신부는 서울교구로 이임하였다. 1961년 6월 6일, 인천 감목대리구가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W.J.McNaughton, 나길모 羅吉模)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이후 답동 본당은 각 본당의 분리 설립으로 인해 관할 구역 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지만, 전교 활동의 결과, 총 신자수는 언제나 5천명 이상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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