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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
약 2:14-20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약 2:14-20 /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남 돕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신앙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15) 여러분의 친구 한사람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합시다. 16)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이 `참 안됐구려.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는 말만 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따위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17)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한 행실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증명해 내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죽은 것입니다. 18)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믿음만 있으면 될 뿐 아무 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선한 행동도 동시에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선한 행동이 없이는 당신에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동을 보여야만 사람들이 내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9)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런 당신도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믿겠지요? 맞습니다. 악마도 그걸 알고 있기에 공포에 떨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20)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을 작정입니까?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참다운 신앙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을 대조시켜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기에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음을 말합니다. 반면 야고보는 복음 안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비시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14-16) 14절은 조건문으로서 가식적인 믿음을 지적합니다. 만약 믿음이 있노라고 계속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신을 구원하겠는가 묻습니다(요일 3:18). 참된 믿음이란 거듭남에 수반되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변화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자신의 생명과 다른 생명에 우호적인 행위를 시작해 나아갑니다. 인간을 비롯한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들은 먹어야 생존합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 필요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18) 만약 계속해서 행함이 없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참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은 구원의 도구가 아니라 믿음의 증거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나무와 같아서 믿음의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이 "나는 행동으로 내 믿음을 보여 줄 테니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너희도 행함이 없는 믿음 생활을 증명해 보라"라고 요구합니다(18).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20) 죽은 믿음의 대표적인 예는 귀신의 믿음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과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심지어 두려워서 떨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행함 없는 믿음 역시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도 누리지 못합니다.
적용: 당신은 어떤 행함을 통해서 믿음의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매일 믿음으로 실천해야 할 작은 습관들이 있나요?
죄가 무엇입니까?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입니다. 윤리, 도덕으로만 죄를 볼 수 없습니다. 죄의 본질은 방향성입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는 180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뜻대로 살던 삶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180도 돌이키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눈물 한 방울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의지로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지 않고 울기만 하는 것은 ‘후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 설 교 >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야고보서 2장 14-17절 / 김민호 목사
오늘도 지난 주에 이어 부활 이후의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야고보서는 행함에 대해 무척이나 강조하는 책입니다. 말씀을 함께 나누실 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으시고, 믿음의 전신 갑주를 단단히 입으시고, 삶의 현장에서 행함의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어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아멘.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립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아멘.
공동번역이 더 느낌있게 다가 옵니다.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들이 매우 공격적입니다. 야고보서를 기준으로 한다면 믿음보다 행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처럼 여겨 집니다. 이 본문을 이용하여 행함을 계속 강조하다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 기독교의 구원론이 크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을 강조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가리켜서 지푸라기 같은 서신(the letter of straw)이라고 불렀습니다. 루터가 성도들의 삶의 행함를 통한 열매들을 부정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 아닙니다. 루터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거대한 카톨릭 세력과 죽기 살기로 맞서 싸우고 있는 상황 이었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절대절명의 사명을 완수하여야만 했습니다. 루터에게는 행함이라는 다른 주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루터 이후에 활동한 칼빈은 종교개혁 당시 나이가 8살에 불과 했습니다. 칼빈(1509-1564)은 루터(1483-1546)보다 26살이나 나이가 적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릅니다. 저도 매우 동의 합니다. 칼빈은 누구보다도 성령과 삶, 성화와 열매 등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고 특별한 강조를 많이 남긴 신학자였습니다.
칼빈이 말하기를 “우리가 마음 속에 지니고 있다고 하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실제인지 허상인지, 인정 받을 만한지 나만의 착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믿음을 아는 방법은 성령의 열매 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고, 보증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되어가는 이끌림에 순종할 것인지를 계속 우리에게 요구 하십니다. 우리는 그 정당한 요구에 순종으로 응답할 때 성화의 삶으로 진군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너무나도 합당한 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칼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구라도 성경을 읽다 보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또한 그 삶의 행위로 맺은 열매들에 대해 심판자의 판단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결국 믿음의 실체는 열매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이 성경이 삶의 징표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이 있다고 해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말씀드립니다.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 이십니다. 믿음은 십자가의 고귀한 희생과 부활에 의해 생성되었고,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절대로 소멸되거나, 잠식 당하거나, 취소 되거나, 변경되거나, 타협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 만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값없이, 공짜로)로 내어주신, 그 위대한 믿음이이라는 선물은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그 고귀한 믿음을 지켜 주시고, 성장시켜 주시고, 그 믿음의 능력으로 죄와 맞서 싸우며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원동력은 모두다 믿음(믿음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함을 항상 믿음을 앞세우는 건강하고 굳센 믿음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믿음이 있다고 해도 행함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 할 수 있겠습니까?”, 읽으면 읽을 수록 행함으로 인해서 구원이 결정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들이 14절을 읽으실 때 행함에 초점을 두고 읽느냐, 믿음에 초점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실 겁니다. 제가 믿음을 기준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만약 믿음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졌다면, 그 믿음대로 행하셔서 이웃에게 유익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들에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능히(넉넉히, 충분하게) 구원 받는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확신이 되고, 사람들에게 보여져야(증명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진짜로 고백 되었다면, 그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언제 어디에서라도 확실하게 증언(선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완전히 다른 어감으로 들리시죠. 야고보서가 행함에 대해 무척이나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행함을 실천해 갈 수 있는 근본 뿌리가 믿음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지하여 차분하게 읽으시고 묵상하시면 이러한 느낌과 감동을 일깨워 주실 겁니다.
같은 말씀인데도 행함을 중심으로 읽으면 믿음과 충돌하는 공격적인 말씀으로 보이지만, 믿음을 중심으로 읽으면 우리가 얼마나 믿음을 소중히 여기면서 믿음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막중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도가 야고보서에 담겨 있습니다. 행함은 결코 믿음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을 근원(뿌리)에다 심어두고, 그 근원으로부터 행함을 시도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이 능력을 보여 주느냐, 보여주지 못하느냐는 오직 구원 받았다고 하는 성도(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나가도록 적극 도와 주십니다. 누구라도 말씀에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유익한 믿음, 살아 있는 믿음으로 행함의 열매 들을 무수히 맺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가 행함의 열매, 성령을 열매를 맺지 못하는지는 두 가지 이유로 간단하고 확실하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성령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깨달아지고,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여 무언가 조금이나마 해 보려고 하면 그 때뿐입니다. 도돌이표처럼 또 다시 옛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옛사람의 모습으로는 결코 믿음에 기초한 새사람의 행함을 해 나갈 수 없습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신이 성령 받았다고 착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성령을 구하고, 성령 충만을 바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고 했습니다. 내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난 적이 없으면서도, 성령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제일 안타깝고 불쌍한 인생입니다.
둘째 이유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끊임 없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고 길을 안내 해 주십니다. 그래서 회개와, 돌이킴과, 충성과 헌신등에 대해서 말씀이 선포되면 양심이 움찔거리는 자극을 받습니다. 말씀이 들리면 앞으로 더 이상 죄와 거짓과 불순종에서 살지 말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하지만 양심에 찔림이 있음에도, 자신의 의지와 자아의 벽을 넘지 못고,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물들어서 쉽고 편안한 것을 선택하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는 몸을 함부로 사용하며 살아가다 보니 점점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집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불순종 하는 것이 습관화 되다 보면 어느새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되어 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님은 매우 근심하시고, 탄식하시면서도 자꾸만 죄를 선택하는 사람을 도와 줄수가 없게 됩니다. 불순종이 반복되면 믿음이 약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당연히 행함의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말씀 하시며 올바른 길로 인도 하시는데도 듣기를 싫어 하고, 불순종을 거듭하는 사람은 방법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처럼 다 멸망당하고, 다 빼앗기고, 다 불타 없어지고, 노예로 끌려간다는 경고음이 들릴 때까지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진실로 무서운 징계와 심판을 내리실 겁니다.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심각하고 중대한 범죄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으면서도 전혀 행함이 없는 이유는, 성령을 받지 못했거나,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에게 인정 받고 칭찬 받고 성장하는 굳건한 믿음을 지켜가고, 행함을 잘 실천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행함을 실천하는 것인지 15절, 16절을 읽어 드립니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아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평가 할 때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 말은 참 잘하네” 라는 말과 “그사람 말도 참 잘하네” 이 두 마디로 사람의 평가가가 극명하게 대비 됩니다. 말도 잘하는 사람, 말만 잘하는 사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믿음의 그리스도인은 말만 참 잘한다고 비웃음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말도 참 잘하는 칭찬 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죠.
오늘 말씀에 비춰 보면, 말도 참 잘한다는 것은, 믿음도 있고, 믿음 대로 행함의 열매도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말만 참 잘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으로 유익을 전혀 주지 못한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참 된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면, 참된 믿음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주님이 이미 모범을 보여 주신 것처럼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행함으로 섬겨주는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상대할 때에 15절에서와 같이, “늘 평안하세요, 옷이 추워보이네요 좀 따뜻하게 입으셔야 겠어요, 배고프겠다 뭐라도 좀 드셔야 겠네요” 라는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헐 벗고, 양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내 눈에 보인다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자마자 긍휼히(불쌍히) 여기고, 즉시 최선을 다해 도와준 사람이 강도 만나 버려진 사람을 도와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 이었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냐?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 각자에게 묻고 계십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영생에 대해 물었던 율법교사 이야기, 그리고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로마서 말씀에서와 같이, 우리가 행함을 실천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무슨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고, 마주하는 이웃, 동료, 친척이나 지인 들의 형편을 눈여겨 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마음으로, 사랑으로 섬겨주면 그것이 곧 행함의 열매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나같은 죄인을 직접 찾아오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내 삶의 고단한 눈물을 다 닦아주시고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던 그 자비와 은혜를 생각하면 됩니다. 긍휼히 여김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을 잊지 아니하면서 내가 받은 그대로 이웃을 향해 흘려 보내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올바른 행함과 순종의 방향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도 말씀 하시기를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5장에서 보좌에 앉은 임금(예수님)은 의인들(양들)에게 말씀 하시길,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먹을 것 주고, 물을 주고, 옷을 주고, 병간호를 하고, 옥살이 할 때 돌봐 준 것이 곧 내게(임금-예수님)한 것과 같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참으로 별걸 다 기억 하시는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일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직접 하셨던 일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행함으로 살았는지를 심판날에 물어 보실 겁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이웃을 찾아가고,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한 다면, 예수님은 작은 것 하나까지 기억하셨다가 큰 상급으로 칭찬해 주실 겁니다.
상 받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진 믿음의 선물이 너무나 감사해서, 믿음의 은혜에 너무나 감격해서, 믿음의 능력에 너무나 감동 받아서, 신나고 즐겁게 행함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믿음대로 행하였더니 행하여 지더라. 행하였더니 열매 맺더라, 열매 맺엇더니 상을 주시더라, 상 받았더니 천국 백성의 영광을 허락 하시더라, 이것이 구원의 길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천국가는 구원의 시작이자, 과정이자, 완성이 된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 됩니다.
행함에 대한 절정의 말씀이 본문 마지막 말씀 17절에 나옵니다.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아멘. 비슷한 구절인 26절도 읽어 드립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아멘.
행함이 없다면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 들이면 믿음 보다 행함이 중요한 것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행함이 믿음을 좌지우지 하는 것 같습니다. 아 정말 야고보서는 읽을수록 마음이 출렁 거립니다. 자 이 말씀도 행함을 기준으로 보면, 과격하고 급진적인 말씀으로 보이지만, 이 말씀 역시 믿음이라는 기준으로 읽어 본다면 다르게 보입니다. 제가 17절을 믿음의 기준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네가 왜 행함이 없는지 아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왜 두려워하는지 아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슬퍼하는지 아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왜 연약한지 아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무엇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포기하려는지 아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너에게 어떤 믿음이 있느냐, 너에게 썩어질 육체가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살아(부활)나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권세의 믿음이 있지 않느냐, 그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냐 죽어 있는 믿음이냐, 왜 너는 내가 준 믿음을 죽은 믿음으로 숨겨 두고 부끄럽게 하느냐, 그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 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 내 나라와 내 의를 선포하는 믿음 임을 네 스스로 증명하며 살아라, 그것이 내가 너에게 준 믿음의 능력이니라, 명령하노니, 너는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라, 너는 죽은 자의 믿음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믿음을 지닌 나의 사랑하는 자녀이니라, 너는 믿음으로 어서 일어나라. 내가 믿음에 믿음을 더하도록 영원토록 항상 너와 함께 하겠노라” 아멘. 참으로 아멘입니다.
앞서 14절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들도 믿음의 눈으로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믿음의 주인되시는 우리 주님의 강력한 능력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심을 경험 하시게 될 겁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충돌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한 그루의 나무의 성장 과정과 같습니다. 믿음은 뿌리이며 행함은 가지이자 열매입니다. 뿌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시며, 열매는 성령님이 인도하심으로 맺어지는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모두 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저 굳건하게 구원자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올바르게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태도를 취하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 믿음이 굳건 하다면 예수님이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가 떠나지 않을 것이며, 우리 마음에 행함으로 나아가려는 결단과 의지가 굳건 하다면 성령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행함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도록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그리고 성령님께 나의 언행심사 일체를 맡기고 순종하려 한다면 믿음과 행함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성장할 것은 명명 백백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과 동행하면서 행함의 열매들을 맺어가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도 아니요, 나보다 훨씬 의지가 강하시고, 나보다 훨씬 힘이 쎄시고, 나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신 성령 하나님이 믿음을 지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강권적으로 이끌어(인도) 가시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변화되어 가고, 거룩함으로 성화 되어 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갑니다.
마음이 일체 요동하지 않고 굳건하다면 믿음이 먼저냐, 행함이 먼저냐, 믿음이 중요하냐, 행함이 중요하냐는 쳇바퀴 같은 논쟁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이죠. 뭐가 더 필요 합니까? 야고보서는 믿음과 행함의 우열을 주장하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남은 인생 가운데 믿음과 행함으로 성장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최고의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자신의 믿음이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인지 늘 확인하고, 내 믿음을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가십시오. 또 야고보서의 강한 권면의 말씀을 따라,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는 과연 행함의 열매 맺어가기를 순종하고 있는가? 자신에게 계속 물으시면서 믿음과 행함의 풍성한 결실을 향해 한 걸음씩 변화와 성장으로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
약 2:14-26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의 주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행함이 있는 믿음”, “행함으로 그 참됨이 증명되는 믿음”입니다. 이 주제는 사실상 야고보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입니다. 1:22에서 그는 쓰기를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했는데, 그것은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하는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지는 않으면서 말씀을 들은 것만 가지고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본문 14절에서 묻기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합니다.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는 물음에 이어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묻는 것은 그 유익이 다른 것 아닌 구원을 위한 유익을 말하는 것임을 뜻합니다. 믿음은 구원을 위해 유익한 것이어야 하는데 말씀대로 행함은 없이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해가지고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을 위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5-16절에서는 14절에서 제기한 문제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반복하고 있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고 묻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말로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믿음을 가졌다 할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을 위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본문 17절은 앞선 14-16절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결론은 본문 26절에서 오늘 본문 전체의 결론처럼 다시 반복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에게 있어서 영혼 같은 것 즉 믿음을 살아있는 믿음 되게 하는 것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고, 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라는 것이 행함이 없어서 죽은 믿음이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말하는 것이 본문 18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이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란 아마도 예수를 믿지 않거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다 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도전적으로, 아니 도발적으로 말하기를 “나는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당신들이 보는 대로 내 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 신념대로 살고 있는데 당신들은 말로만 예수 믿는다 하지 과연 예수 믿는 사람답게 행하느냐? 어디 한 번 믿는다는 증거를 보여 봐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행함이라는 뜻입니다. 행함이 없이는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도발해올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본문 19-20절을 계속해서 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은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첫 째 가는 믿음입니다. 아무리 다른 모든 성경지식을 갖고 있고 그것을 다 믿는다 해도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확고하지 않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신6:4-9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그런데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렇게 중요해서 귀신들도 그것을 인정하지만 귀신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존재들인 것처럼 그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고 알고만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믿음이 있다 할 수 없고 따라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자는 “허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허탄한 사람”이란 “어리석은 자”, “불쌍한 사람”, “한심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하는 것은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아니,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 그걸 모르다니! 이 한심한 작자야, 내가 알게 해주랴? 내가 그 증거를 보여주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어지는 본문 21-25절에서 행함으로 온전한 믿음을 인정받은 성경의 인물 두 사람을 예로 든 것입니다. 먼저 21-24절에서는 아브라함을 말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빌려 말씀하시기를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사41:8)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고까지 불린 것은 믿음 때문만이 아니고 행함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1-3) 하시는 말씀을 듣고 칠십오 세의 나이에 그 말씀대로 정든 삶의 터를 떠난 아브라함(창12:4)에게서 바울이 믿음을 보았다면 야고보는 믿음의 실천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이 백 살에 얻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창22:2)을 따라 비록 귀하디 귀한 독자이지만 그를 번제로 드리려한 아브라함에게서 바울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하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보았으며 야고보는 그 “말씀을 준행”하는 믿음을 본 것입니다(창22:18). 바울과 야고보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에 관한 바울과 야고보의 말은 서로 다르거나 모순되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와 그 의미를 서로 보완하고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 본문 25절에서는 라합을 예로 듭니다. 라합은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주리라 약속하시고 가라고 명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던 견고한 성 여리고를 공략하기에 앞서 보낸 정탐꾼들이 안전하게 이스라엘 진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숨겨주고 길을 가르쳐주며 힘껏 도와주어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에 공헌한 여인입니다. 그녀가 그렇게 한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만 하고 가만히 팔짱 끼고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그 믿음을 따라 그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을 실행한 것입니다. 그 행함 때문에 그녀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부터 그녀의 의로움을 인정받았고 그녀와 그녀의 온 가족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수6:25). 본문 25-26절을 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서 보는 야고보의 주장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들이 우리 개신교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신칭의론”을 부인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이미 흔히 대립적인 입장에 서있다고 여기기 쉬운 야고보와 바울 사이의 근본적인 일치가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라고 한 약2:8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하는 롬13:10은 근본적으로 같은 복음의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 갈5:6에서 쓰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했습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한 롬3:28 같은 말씀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오늘 본문 자체만으로도 “이신칭의론”은 확고히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산 믿음 즉 참된 믿음이어야 하는데 참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은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이 참 믿음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와 로마서는 서로 대립되는 생각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조화될 수 있고 조화되어야 하는 사고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된 믿음 대신 행함으로 구원을 받기를 애쓰는 사람들에 맞서 말한 것이며, 야고보는 단순히 지적인 동의를 참된 믿음과 혼동하는 사람들에 맞서 말한 것입니다. 즉 바울과 야고보는 각각 싸운 대상이 다른 것입니다. 바울과 야고보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달리 말하면, 행함을 믿음과 나란히 놓고 그 중에 이거냐 저거냐 아니면 둘 다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을 믿음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한 것이나, 20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한 것이나, 26절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행함이 없이 말로만의 믿음, 머리로 알기만 하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참 믿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절에서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했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은 귀신도 다 아는 것인데 그것이 참 믿음이며 그래서 귀신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에로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행해야 하고 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삶의 변화와 선한 행위를 낳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삶의 변화와 선한 행위가 없는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의를 실천하고자 힘쓰는 것은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삶입니다. 특히 우리 장로교회신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깔뱅과 그의 가르침을 이어온 개혁신학은 칭의와 함께 균형 있게 성화를 강조해왔으며 그것은 신학의 발전에 대한 개혁신학의 많은 공헌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얻은 구원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응답하고자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며 의를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한 야고보의 말을 통해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익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5-16절에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한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또한 오늘 우리의 행할 바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지시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 주변의 형제자매에게 무익한 것이 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26절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죽은 믿음이 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볼 때 야고보는 질문-대답-질문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 15-16절, 19절 상반절, 20절, 21절, 25절은 질문의 형식이고 그 중간 중간의 17-18절, 19절 하반절, 22-24절, 26절은 대답의 형식입니다. 이 질문-대답-질문으로 된 고대의 문장형식은 통렬한 비난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관점을 설득시키기 위해 사용하곤 한 것입니다. 즉 야고보는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을 통렬히 비판하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온전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 믿음을 보이리라
약 2:14-26 / 김광일 목사
본문에서 야고보 기자는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의 허구성을 밝히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산 믿음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면서 행함으로만 믿음의 진정성이 입증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되고 행함은 믿음 위에서만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말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있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의 ‘보이리라’는 원어로 ‘데익소’인데 ‘눈앞에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강력한 의지와 확신을 나타내는 직설법 능동태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행함을 통해 반드시 상대방이 보는 눈앞에 자기의 믿음을 제시하겠다는 확신에 찬 모습입니다. 당시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면서도 행위로 부인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구체적인 행위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어떻게 보여야 합니까?
첫째로 유익이 있는가
윌리엄 헤추어(William E. Hateher)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마운트 허문(Maunt Hermon) 교회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구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고 막연하기만 하였습니다. 집화를 마치고 혼자서 가는데 친척이 다가와 ”너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자신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친척은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면서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 저 나무에 올라가서 밑으로 뛰어내릴 수 있는가?” 자신이 받아 줄 테니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친척이 받아 줄 힘이 없을 것 같아서 못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친척이 “주님이 팔을 벌리고 계시면 어떻게 하겠느냐?”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뛰어내리겠습니다. 주님은 붙들어 주실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친척은 “그래, 그것이 바로 구원을 얻는 믿음이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께 맡기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통해 구원의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의 ‘유익이 있으리요’는 원어로 ‘오펠로스’인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에 무익하다는 의미입니다. 생명력이 없기에 어떠한 영향력도 주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행함이 있는 믿음은 여러 가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자신이 받는 구원의 유익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말로만 그치는 믿음입니까? 행함이 없는 입술만의 고백입니까? 라합처럼 믿음을 행함으로 옮겨 자신은 물론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실천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고통받는 이웃을 치료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구체적인 일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유익을 불러오는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온전케 하는가
WEC 국제선교회 (Worldwide Evangelization for Christ) 선교사 훈련 가운데 선교본부 지하실을 방문하는 순서가 있다고 합니다. 지하실은 퀴퀴한 냄새가 나고 분위기도 음산합니다. 그런데 그 곳에 여러 개의 선반이 있고 그 위에는 먼지가 쌓인 가방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가방에는 이름과 꼬리표가 붙어 있습니다. 1년 된 가방, 10년이나 20년이상 된 가방들입니다. 가방의 주인들은 선교지로 떠난 선교사들입니다. 지하실에서 옆 방으로 옮겨 가면 벽에 사진들이 붙어 있습니다. 사진 밑에는 의사, 간호사, 목사의 약력이 간단히 적혀 있습니다. 그들은 가방을 맡기고 순교한 선교사들의 사진입니다. 훈련받는 선교사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선교지를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결단을 합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맺어지는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듯이 행함을 보면 믿음의 온전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온전하게 되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여기의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는 원어로 ‘에텔레이오데’인데 ‘완전하게 만들다, 완성하다’라는 뜻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미완성 작품일 뿐이며 영혼이 떠난 육체처럼 허무한 것입니다. 믿음이 행위로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믿음 그 자체가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씨앗 속의 생명이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처럼 행함을 통해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축복의 전제조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 믿음이 온전해졌습니다. 이는 행함만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이라는 증거로 이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더 확실히 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을 바치는 순종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온전한 축복을 구하면서 부분적인 순종에 그치고 있지 않습니까? 입만 움직이고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순종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온전한 믿음을 통해 온전한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셋째로 칭의를 얻는가
1954년 가을 미국 오리건 (Oregon)주의 마을 회관에서 다큐멘타리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6·25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참상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영화가 끝나자 월드 비전의 밥 피어스 (Bob Pearce) 회장이 집회를 인도하면서 전쟁으로 생긴 한국의 고아들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 날 집회에 참석한 농부 부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남편은 혼자 한국에 가서 고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덟 명이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농부였던 그들은 아이들을 키울 만한 능력도 없거니와 입양할 때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국회의 승인을 얻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신문을 통하여 고아들의 사진과 함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미국 방방곡곡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편지가 왔고 남편은 고아들을 계속해서 데려왔습니다. 오리건에 도착하면 고아들을 양자로 삼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일을 시작한 부부가 바로 해리 홀트(Harry Holt)와 버사 홀트(Bertha Marian Holt)부부입니다. 여덟 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시작한 고아 사업이 세계적인 홀트아동복지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24절입니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여기의 ‘의롭다하심을 받고’는 원어로 ‘디카이우타이’인데 ‘지식적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해당됨을 강조합니다. 이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교리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 없는 자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가 행함으로 그 믿음이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행함과 별개가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됩니다. 믿음과 행함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칭해 주셨으며 하나님의 벗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도날드 반하우스(Donald G. Barnhouse) 신학자는 현대 교회에 자폐증 크리스챤(Autistic Christian)이 많다고 지적했습니다. 자폐증은 표현하지 않는 증세를 지닌 발달장애성 질환입니다. 현대 교인의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설교를 잘 듣고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도 많이 읽지만 행동하는 믿음을 볼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신앙고백을 하고 아름다운 선율에 맞추어 찬송을 부르며 일주일에 한 두번 봉사하다가,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들리면 시험에 들어 상처 운운하며 교회를 등지려 하는 것은 아닙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입니다. 어떠한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 무기력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을 보이기 원합니까? 행함의 증거가 없는 죽은 믿음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행함으로 유익을 가져오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행함으로 온전하게 되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을 보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과 행함
약 2:14-26 / 김양인 목사
요즘 기독교인의 약점 가운데 하나는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열의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행함이 부족한 까닭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교리문답을 통과하고 세례를 받고 정규 예배에 참석하니까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과연 이와 같은 것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진실한 증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둘로 나누실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서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기독교인 행세를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실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언뜻 보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서 3장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고,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방금 언급한 구절은 하나같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 선생은 믿음보다 행함을 더 강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행함을 믿음보다 중요하다고 한 것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그 본질상 행함이 함께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기독교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회심의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회심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회심이란 입술로만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예를 들면, 불법적인 방법으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때까지의 불법을 회개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번 돈은 돌려주고 남에게 끼친 손해를 변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한 회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말하기를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 교회 안에는 아직도 진실한 회심을 거치지 않고 예비 신자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지 않고 축복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진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백 퍼센트 지키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실천하려는 열망과 실제적인 노력이 확연히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실질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합니다.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
이 말씀처럼, 야고보 선생은 가난한 형제를 보살펴 주는 여부를 보아서 진실한 믿음인지 형식적인 믿음인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가난한 형제를 보살펴 주는 것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면 야고보 선생은 복음의 진리를 오해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야고보 선생이 말씀하는 요점은,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이 진실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을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데 힘쓰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구제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오히려 그편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행함이 중요한 이유를 야고보 선생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8)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3)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 선생은 두 종류의 신자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하나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주는 신자이고, 다른 하나는 행함이 없는 위선적인 신자입니다. 지금 야고보 선생은 믿음과 행함을 가지고 참 믿음과 거짓 믿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 믿음과 거짓 믿음을 분간하는 기준은 입술의 고백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못하며, 믿는 것을 행함으로써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이사 가기 전에 점쟁이를 찾아가서 길일을 알아보고, 자녀를 결혼시킬 때 궁합을 알아본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습니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믿음의 고백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르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믿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교리적으로 바른 지식이지만,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귀신들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고 떨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믿음이 진실한 것인지 아닌지를 아는 또 하나의 길은 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더라도 귀신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대하여 교리적으로 바르게 알고 믿을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단은 추종자들에게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이제는 계명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23)…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24)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요한일서 2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3)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강조할지라도, 만약에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다면, 이는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믿음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이므로 진실한 믿음을 가졌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거짓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믿음과 행위를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허탄한 사람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와 같고,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둘은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을 때 순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으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재 가운데서라도 이삭을 살려내어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의 절대적인 순종은 믿음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순종을 통해서 자기 믿음을 확증한 것입니다.
이처럼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으로써 자기 믿음을 입증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고보 선생은 기생 라합을 예로 들어서 재차 설명합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벽 위에서 주막을 경영하던 기생이었는데, 하루는 낯선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라합은 한눈에 그들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임을 알아챘으나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지붕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여리고 왕의 사자가 왔을 때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로서인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에게 미치리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라합이 거짓말을 했으니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라합이 얼마나 정직한 여자였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라합의 행함 있는 믿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만일 그녀가 정탐꾼들을 숨겨준 사실이 발각되는 날에는 그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 모두가 반역죄로 몰려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뻔합니다. 더구나 라합의 행동은 자기 민족을 배반한 반역행위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기 민족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으려는 적국의 스파이와 내통한 반역죄는 죄질이 매우 나쁩니다.
그러나 성경은 라합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 이르기를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으며, 야고보서 2장 25절로 26절에는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라합을 행함 있는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평가와 사람의 평가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평가 중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옳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정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뢰하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라합의 행위를 사람들의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태를 파악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도와야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 일로,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을 때, 라합과 그의 친족들은 다 목숨을 건졌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라합의 행위는 동족을 배신한 것이지만, 성경은 라합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라합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과 더불어 믿음의 인물로 인정받습니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준 행함을 통해서 자기의 믿음을 입증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라합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심을 믿었으나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주지 않았다면, 그녀의 믿음은 행함이 뒷받침되지 못했으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 것이요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을 때 영락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말씀과 같이 행함으로써 자기의 믿음이 진실함을 입증했던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 선생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장의사가 와서 죽은 사람을 예쁘게 꾸밉니다. 얼굴에 분도 바르고 머리도 빗기고, 좋은 옷을 입혀서 마치 잠자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러나 실은 주검에 불과합니다. 그 속에 영혼이 없으므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입니다. 입으로 “믿는다”고 하니까 믿음이 있어 보이지만 실은 그런 믿음은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믿음에는 행함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시기를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고 하셨을 때,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미지의 땅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기 전에 이미 행함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난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풉니다. 특히, 한 교회의 지체인 신자들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외면하지 않고 보살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새번역 마 10:42)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행함 있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주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큰일을 할지라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무익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어려움을 만난 성도들을 보살펴 준다면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성도로서 주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먼저, 우리는 각자의 믿음을 행함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씨앗이 생명을 간직한 것인지는 싹이 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씨앗은 아무리 비옥한 땅에 심고 물과 거름을 주어도 싹이 나지 않지만, 산 씨앗은 새싹이 돋아납니다. 믿음이 있지만 연약해서 행함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로 남아있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진실하다고 인정받지 못합니다. 진보를 나타내야 산 믿음이지 그렇지 않다면 거짓된 믿음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처럼 순종하지 못할지라도 작은 것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듯이,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점점 순종의 단계를 높여 나가십시오. 죽은 나무는 자라지 않지만, 산 나무는 끊임없이 자랍니다. 아무쪼록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임을 명심하시고, 철저한 행함을 통하여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믿음을 보이라
약 2:14-26 / 김광일 목사
줄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장대 하나에 의지한 채 밧줄 위에서 온갖 위험한 동작을 해냄으로 유럽과 미국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1859년 6월 30일, 나이아가라폭포에 로프를 설치하고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높이는 48미터, 블론딘의 곡예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은 40파운드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습니다.
드디어 맞은 편에 블론딘이 도착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뒤로 걸어서 건너기, 안대를 하고 건너기, 자전거 타고 건너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폭포 위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곡예가 끝날 때쯤 되자 블론딘이 관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관중들은 “그럼요, 우리는 당신이 사람을 업고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블론딘은 “그러면 내 등에 업혀 나와 같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관중들은 침묵에 잠겼고 블론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지원자가 없다고 판단한 블론딘은 관중가운데 서있던 남자에게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나는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의 등에 업히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블론딘의 등에 몸을 맡겼습니다. 남자를 등에 업은 블론딘은 로프에 올라가 한발 한발 신중하게 내딛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등에 업힌 남자가 생명을 바쳐 자기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듯이 블론딘의 얼굴에는 폭포 건너편에 반드시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선명했습니다. 마침내 블론딘은 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건넜던 남자는 블론딘의 매니저 해리 코드(Harry Colcord)였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실천에 있습니다. 말로만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던 군중들과 48미터 높이의 밧줄 위에서 목숨을 블론딘에게 맡겼던 콜코드의 믿음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말과 생각만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실천하는 믿음입니까?
본문은 성도의 실천적 신앙을 주제로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단지 행함만을 강조하는 서신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고 진정한 믿음인가 진단하는 영적 클리닉의 역할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죽은 믿음을 붙잡고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여기의 ‘보이라’는 원어로 ‘데익손’인데 ‘눈앞에 드러내 보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눈앞에 나타나는 모습을 통해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야고보는 자신도 믿음의 모습을 보이겠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행함을 통해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까?
첫째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조직하고 중국인처럼 살았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선교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중국인의 옷을 입었고, 중국인처럼 머리를 깎았고, 중국말을 하고, 한문을 쓰고, 한문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중국인으로 살았습니다. 테일러가 선교사들을 면접할 때였습니다. “왜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지원자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드슨 테일러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선교사로 나가면 핍박을 받기도 하고, 또 죽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가진 그 정도의 믿음으로는 낙심하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졌기 때문에 갚아야 합니다. 주를 향한 믿음이 있다면 주의 사랑에 붙잡혔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에 보답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당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 대신 죽으신 주님처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사랑할 때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의 ‘유익이 있으리요’는 원어로 ‘오펠로스’인데 ‘믿음이 있다면서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입으로만 고백 할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증거가 보여야 합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입니까?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의 실천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 필요를 채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고 말하면서 고통받는 형제들을 보고 가까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모른척하거나 멀리하고 입으로만 동정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행동하는 모습으로
1995년 미국 오레곤주 유니게 신문에 광고가 실렸습니다. 마을 회관에서 종교 집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을에 사는 부부가 광고를 보고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6·25 사변으로 생긴 한국 고아들의 실상을 알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월드 비전의 회장 밥 피어스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청중들에게 고아들을 돕자고 호소했습니다. 부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은 혼자 한국에 가서 고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여덟 명을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농부였던 그들에게는 많은 아이들을 키울 만한 능력도 없었거니와 당시 미국 법으로는 입양할 때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마침내 국회 승인을 얻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흔하지 않은 이 사건은 신문을 통하여 고아들의 사진과 함께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방방곡곡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편지가 왔고 남편은 더 많은 고아들을 데려왔습니다. 비행기가 오레곤에 도착하자 고아들을 양자로 삼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 부부는 바로 홀트아동복지회의 해리 홀트(Harry Holt) 부부입니다. 여덟 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어렵게 시작한 고아 사업이 세계적인 홀트아동복지회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참된 믿음으로 증명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여기의 ‘행함’은 원어로 ‘에르가’인데 ‘살아 움직이며 나타나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입술만의 고백으로는 결코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도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따르는 온전한 믿음이 온전한 축복의 전제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믿음과 함께 행동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더 온전한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이 따르는 믿음을 요구할 때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전한 복을 구하면서 순종은 부분적으로 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순종하는 행동을 통해 축복의 그릇을 넓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그 증거가 보여야 합니다.
셋째로 구원하는 모습으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Chicken Soup for the Soul)’에 나오는 안소니 로빈(Anthony Robbins)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리던 추수감사절 날, 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한 남자가 음식 바구니와 칠면조 그리고 요리할 냄비까지 담겨있는 상자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낯선 사람은 “저는 당신의 친구가 보내서 왔습니다. 당신이 어떤 도움도 거절할 것이라고 알기 있기에 그분이 저를 보내셨습니다. 복된 추수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니오. 난 이런 걸 받을 수 없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낯선 사람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저에겐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심부름꾼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사라졌습니다. 그 일은 안소니 로빈의 삶에 큰 감동을 남겨 주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겠다.” 열아홉 살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한 안소니 로빈은 추수감사절 의식을 시작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마켓으로 가서 한 집이나 두 집이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음식을 샀고 배달부 차림을 한 후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상자 안에 음식과 함께 그가 경험한 추수감사절의 일을 쓴 쪽지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쪽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선물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당신도 언젠가 형편이 나아질 때 다른 사람을 위해 저와 같은 일을 해 주십시오.” 해마다 실천하는 추수감사절 의식을 통해 안소니는 그동안 자신이 벌은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의 ‘다른 길’은 원어로 ‘헤테라호도’인데 ‘생명을 구원하는 방도’라는 의미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구원하는 행동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라합은 가족들과 함께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고통을 감수하는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보이기 바랍니다. 죽이는 믿음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화석화된 믿음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쟌 월턴(John Walton)은 26살 때까지 되는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았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방황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가운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기라고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말씀을 듣고 그때부터 겨자씨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는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기회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훗날 유명한 실업가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71세에 은퇴할 때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왜 항상 겨자씨를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좌절할 때마다 겨자씨를 꺼내 보면서 나는 과연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는가? 그 믿음의 증거가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며 용기를 얻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실천하는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사랑의 모습을 보이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모습으로 그 믿음을 보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줄타기 곡예사 찰스 블론딘(Charles Blondi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장대 하나에 의지한 채 밧줄 위에서 온갖 위험한 동작을 해냄으로 유럽과 미국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1859년 6월 30일, 나이아가라폭포에 로프를 설치하고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높이는 48미터, 블론딘의 곡예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은 40파운드의 막대기로 균형을 잡은 채 나이아가라폭포를 건너는 그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습니다.
드디어 맞은 편에 블론딘이 도착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뒤로 걸어서 건너기, 안대를 하고 건너기, 자전거 타고 건너기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폭포 위를 자유자재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곡예가 끝날 때쯤 되자 블론딘이 관중을 향해 외쳤습니다. “당신들은 내가 사람을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까?” 관중들은 “그럼요, 우리는 당신이 사람을 업고도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블론딘은 “그러면 내 등에 업혀 나와 같이 폭포를 건너갈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관중들은 침묵에 잠겼고 블론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지원자가 없다고 판단한 블론딘은 관중가운데 서있던 남자에게 “당신은 나를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나는 믿습니다. 기꺼이 당신의 등에 업히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블론딘의 등에 몸을 맡겼습니다. 남자를 등에 업은 블론딘은 로프에 올라가 한발 한발 신중하게 내딛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등에 업힌 남자가 생명을 바쳐 자기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듯이 블론딘의 얼굴에는 폭포 건너편에 반드시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선명했습니다. 마침내 블론딘은 폭포를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론딘의 등에 업혀 폭포를 건넜던 남자는 블론딘의 매니저 해리 코드(Harry Colcord)였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실천에 있습니다. 말로만 블론딘을 믿는다고 소리쳤던 군중들과 48미터 높이의 밧줄 위에서 목숨을 블론딘에게 맡겼던 콜코드의 믿음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말과 생각만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실천하는 믿음입니까?
본문은 성도의 실천적 신앙을 주제로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단지 행함만을 강조하는 서신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고 진정한 믿음인가 진단하는 영적 클리닉의 역할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죽은 믿음을 붙잡고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여기의 ‘보이라’는 원어로 ‘데익손’인데 ‘눈앞에 드러내 보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눈앞에 나타나는 모습을 통해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야고보는 자신도 믿음의 모습을 보이겠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구체적인 행함을 통해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까?
첫째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허드슨 테일러 (James Hudson Taylor)는 중국 내지 선교회를 조직하고 중국인처럼 살았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선교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중국인의 옷을 입었고, 중국인처럼 머리를 깎았고, 중국말을 하고, 한문을 쓰고, 한문으로 성경을 번역하고, 중국인으로 살았습니다. 테일러가 선교사들을 면접할 때였습니다. “왜 선교사로 나가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지원자들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나섰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드슨 테일러가 듣고 싶은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선교사로 나가면 핍박을 받기도 하고, 또 죽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가진 그 정도의 믿음으로는 낙심하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빚을 졌기 때문에 갚아야 합니다. 주를 향한 믿음이 있다면 주의 사랑에 붙잡혔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에 보답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감당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 대신 죽으신 주님처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사랑할 때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의 ‘유익이 있으리요’는 원어로 ‘오펠로스’인데 ‘믿음이 있다면서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입으로만 고백 할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증거가 보여야 합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으로 실천하는 믿음입니까?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의 실천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 필요를 채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다고 말하면서 고통받는 형제들을 보고 가까이 가기는커녕 오히려 모른척하거나 멀리하고 입으로만 동정하고 있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살아있는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행동하는 모습으로
1995년 미국 오레곤주 유니게 신문에 광고가 실렸습니다. 마을 회관에서 종교 집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을에 사는 부부가 광고를 보고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았는데, 6·25 사변으로 생긴 한국 고아들의 실상을 알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였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월드 비전의 회장 밥 피어스가 집회를 인도하면서 청중들에게 고아들을 돕자고 호소했습니다. 부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은 혼자 한국에 가서 고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아내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여덟 명을 데려왔기 때문입니다. 농부였던 그들에게는 많은 아이들을 키울 만한 능력도 없었거니와 당시 미국 법으로는 입양할 때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마침내 국회 승인을 얻는데 성공하였습니다. 흔하지 않은 이 사건은 신문을 통하여 고아들의 사진과 함께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방방곡곡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편지가 왔고 남편은 더 많은 고아들을 데려왔습니다. 비행기가 오레곤에 도착하자 고아들을 양자로 삼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 부부는 바로 홀트아동복지회의 해리 홀트(Harry Holt) 부부입니다. 여덟 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어렵게 시작한 고아 사업이 세계적인 홀트아동복지회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참된 믿음으로 증명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더라.” 여기의 ‘행함’은 원어로 ‘에르가’인데 ‘살아 움직이며 나타나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입술만의 고백으로는 결코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도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행동이 따르는 온전한 믿음이 온전한 축복의 전제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믿음과 함께 행동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더 온전한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이 따르는 믿음을 요구할 때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전한 복을 구하면서 순종은 부분적으로 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순종하는 행동을 통해 축복의 그릇을 넓히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그 증거가 보여야 합니다.
셋째로 구원하는 모습으로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Chicken Soup for the Soul)’에 나오는 안소니 로빈(Anthony Robbins)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리던 추수감사절 날, 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가보니 한 남자가 음식 바구니와 칠면조 그리고 요리할 냄비까지 담겨있는 상자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낯선 사람은 “저는 당신의 친구가 보내서 왔습니다. 당신이 어떤 도움도 거절할 것이라고 알기 있기에 그분이 저를 보내셨습니다. 복된 추수감사절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니오. 난 이런 걸 받을 수 없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낯선 사람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저에겐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심부름꾼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사라졌습니다. 그 일은 안소니 로빈의 삶에 큰 감동을 남겨 주었습니다. “나도 언젠가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같은 일을 하겠다.” 열아홉 살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한 안소니 로빈은 추수감사절 의식을 시작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마켓으로 가서 한 집이나 두 집이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의 음식을 샀고 배달부 차림을 한 후 가난한 이웃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상자 안에 음식과 함께 그가 경험한 추수감사절의 일을 쓴 쪽지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쪽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선물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당신도 언젠가 형편이 나아질 때 다른 사람을 위해 저와 같은 일을 해 주십시오.” 해마다 실천하는 추수감사절 의식을 통해 안소니는 그동안 자신이 벌은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의 ‘다른 길’은 원어로 ‘헤테라호도’인데 ‘생명을 구원하는 방도’라는 의미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구원하는 행동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였습니다. 그 결과 라합은 가족들과 함께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고통을 감수하는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죽이는 믿음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화석화된 믿음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믿음의 모습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쟌 월턴(John Walton)은 26살 때까지 되는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았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방황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 가운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기라고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말씀을 듣고 그때부터 겨자씨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그는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기회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훗날 유명한 실업가로 크게 성공했습니다. 71세에 은퇴할 때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작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왜 항상 겨자씨를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좌절할 때마다 겨자씨를 꺼내 보면서 나는 과연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는가? 그 믿음의 증거가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며 용기를 얻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불신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이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실천하는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사랑의 모습을 보이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행동하는 모습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모습으로 그 믿음을 보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약 2:14-26 / 정필도 목사
자기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대로 살아야 구원받고,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을 생각은 하지 않고 율법대로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했고,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신앙입니다.
성경을 보면,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모두 많은 죄를 범했습니다. 사실,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그 행위로 구원을 얻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전도서 7장 20절에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선한 일만 하고 죄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 9~12절에서는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는데, 신약성경 로마서에서도 똑같이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반율법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다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지 우리의 행실이 올바르다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고, 율법대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이단이고 아주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렇게 반율법주의적인 신앙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십계명 중에 7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간음하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는 우리가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합니까?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은 완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제로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되고, 마음속에서 범한 죄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마음속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차원이 다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서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다 보니 때리고 싶고, 죽이고 싶고 그러다 보니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고 완전한 것입니까.
신구약 성경 전체를 보아도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한 구절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율법은 이제 필요 없고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9~20절에는 「19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면서 남에게 가르치고 주의 일을 하면 천국에서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계명을 안 지키고 제멋대로 살면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시시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평소의 행함은 우리 믿음의 실상을 보여주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은 믿음의 열매가 없으니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해도 실상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사랑합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도 빠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하나님과 관계가 나쁜 사람은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하나도 빠지면 안 되고 세 가지가 온전히 구비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20절에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귀신들은 예수님을 귀신같이 잘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귀신들린 사람은 “다윗의 아들 예수여!”라고 한눈에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갖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은 믿음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구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산 믿음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죽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산 믿음의 사람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고, 죽은 믿음의 사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산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의 말씀대로 알고, 그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행위가 있는 사람이어야 산 믿음의 사람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하지 않는다면, 그는 산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 하는 행위가 있으면 산 믿음의 사람이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예수 안 믿는 척을 하는 사람은 헛똑똑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에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백 퍼센트 그대로 믿고 가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 하면 예수님도 천국에서 “내가 저 사람을 알고, 나의 사람이다.”라고 인정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시인하지도 않고 증거 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가서도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이고, 목사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남한 땅에서도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믿지 않는 척한다면 그런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이고 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산 믿음의 사람은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입으로 시인합니다.
산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산 믿음의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고 부르짖고 맡기고 나아갑니다. 산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습니까. 말씀대로 살면 축복받는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손자인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 3세가 어렸을 때, 부모가 중국 선교사로 가 있고 아이들은 말레이시아에 있는 선교사 자녀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그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 어린 제임스와 형제들은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포로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선교사 부부는 자녀들과 연락을 하지 못한 채 지내야 해서 서로 안타깝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테일러 여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돌보는 것처럼 나도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돌봐 주리라” 제임스의 부모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충성하고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돌봐주겠다는 음성이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그 응답을 받고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몇 년 후에 가족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만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반드시 이루시고 책임지십니다. 귀신이나 미혹의 영이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고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100%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할렐루야!”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바랍니다. 당장 어려운 일이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 응답받고 나아가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산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합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에 「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합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생겨서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18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약 3:17~19)」라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사랑에는 수고와 희생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기쁨으로, 자원해서, 넘치게 바칩니다. 목숨까지도 바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죽도록 충성하고 기쁨으로 순종하고 자원해서 순종합니다.
웩(WEC) 선교회에서는 훈련을 받는 선교사님들을 건물 지하로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지하실이라 퀴퀴한 냄새도 나고 분위기도 음산한데, 지하 창고에는 수십 개의 장이 빼곡하게 있고 칸마다 먼지가 쌓인 짐들이 있었습니다. 그 짐에는 이름과 꼬리표가 하나씩 붙어 있는데, 1년 된 것도 있고 10~20년 된 것도 있었습니다. 자기 짐을 맡기고 선교지로 떠난 선교사님들의 짐들이라고 합니다. 지하창고를 지나 작은 강당으로 가면 벽에 사진들이 붙어 있는데, 사진 밑에는 의사, 간호사, 파일럿 등의 간단한 약력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짐을 맡기고 선교지에 가서 20~30대에 순교한 젊은 선교사님들의 사진이라고 합니다. 선교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이 사진을 보고 자기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도 어떻게 담대하게 선교지로 나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듯이, 행함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입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행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산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의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약 2:14-17 / 정근두 목사 / 찬송 21, 85, 352장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야고보서 강해설교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탄과 연말연시를 앞두고 절기설교를, 그리고 구주대망 2013년 “예배가 기쁨이 되는 해”를 맞이하면서 주제설교를 하다보니 야고보서 강해설교에서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방금 제가 여러분을 무엇이라고 불렀습니까? 저는 여러분을 신자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왜 신자라고 부르지 않고 성도라고 부르는지 아십니까? 사실 모든 신자가 다 성도이고 성도이면 모두 신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라고 부르는 것과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그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신자라고 하면 믿는 사실에 강조점을 둡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예수를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실에 강조점을 둡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제가 신자라고 부르는 대신 성도라고 여러분을 부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대신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음으로 믿는 사실 위에 또 하나의 진리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거룩하게 된 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라고 여러분을 부르기를 즐겨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린 피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거룩한 자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자가 되었기에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성도의 교제의 터전이 되지 못합니다. 삶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이게 될 때 거기에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거룩한 공교회와” 이어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성도의 교제”를 고백합니다.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조직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가 고백하는 교회의 진수입니다.
서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함께 거룩함을 추구해 나가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 “신자 여러분”이라고 하지 않고 주로 “성도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복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의 구원자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대신 처벌 받으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 동시에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답게, 깨끗함을 받은 자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과 생활, 신앙과 행위는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말로는 하는데 행함이 거기 뒤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본문의 위치를 살펴봅시다. 어떤 의미에서 1장 26절과 27절은 야고보서 전체의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 선생의 관심은 신앙의 진위에 있습니다. 거짓 경건과 참 경건을 구별해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 첫 번째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26절이 말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경건한 사람은 자기 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라고 두 번째 시금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것이 경건의 표시라고 합니다.
세 번째 시금석을 여기서 말합니다.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세상 풍조를 따라가지 않는 것, 이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 가지를 1장 26, 27절은 말하고 나서 2장 1절에서 13절에서 계속해서 참 경건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불쌍히 여기는 것임을 역설합니다. 특히 인간 차별이야 말로 거짓 경건의 특색이요 속물근성의 표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장 14절부터 끝 절까지 참 경건은 행동이 뒷받침되는 신앙임을 설명합니다. 구체적인 돕는 행위, 그것이 있어야 참된 경건, 제대로 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3장 1절부터 12절에서는 참 경건은 자기 혀를 제어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1장 26절과 27에서 선언한 야고보서의 주제인 경건의 표지로서 1)혀를 자갈 먹이는 것과 2)어려운 자를 돌아보는 것과 3)자기를 세속에서 지키는 것을 역으로 하나씩 설명해 나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① 속물 근성에서 지킴(2:1-13)
② 구제 행위를 통한 점검(2:14-26)
③ 혀의 제어(3:1-12)
본문은 삶이, 특히 가난한 이를 돌아보는 삶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믿음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울산교회가 교회적으로 얼마나 구제를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풍성한 지난 성탄헌금을 통해서 여러분은 케냐의 지라니 예술학교와 소록도의 영성센터와 어린이재활병원을 위해서, 그리고 총회 사회부를 통해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힘껏 도와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울산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예수 믿고 나서 각자가 어려운 사람들을 얼마나 돌아보았는지 가정단위로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적으로 하는 일을 지난번처럼 힘껏 참여하는 것은 정말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예산의 25%나초과 달성한 쾌거였습니다. 올해는 이제 가정단위로 이웃의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는 일에도 아름다운 시작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 선생의 설교의 진수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 경건한 사람으로 불린 야고보의 설교에 귀를 기울입시다. 오늘 본문을 전체 본문의 흐름과 관련해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바로 앞부분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는 긍휼이 어떤 행위인지 실례를 드는 동시에 긍휼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자비, 친절한 행동이 사랑의 피치 못할 산물인 것처럼 사랑의 행위가 없는 것이 확인되면 그 사람의 신앙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친절한 행위는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가 보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볼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말해서 일상적인 삶에서 사랑하는 행위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 신앙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것은 참 신앙(경건)이 결여된 반박하지 못할 증거임을 본문은 밝힙니다.
14절을 살펴봅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여기에 가상적인 대화가 나옵니다. 저자 야고보와 이 편지를 읽는 신앙의 독자 사이에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야고보가 반박하려고 하는 가상적인 사람을 등장시킵니다. 그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말은 하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신앙과 행동이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질문은 무엇입니까?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답은 무엇입니까?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답은 무엇입니까?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하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배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왜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겠습니까? 교회 중에 누군가 복음을 -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언행을 마음에 두고 하는 질문입니다. 어쩌면 바울이 전한 복음 -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의 순종으로 의롭게 된다는 설교를 듣고 나서 믿는다고 말만 하면 되는 양 살아가는 이들을 겨냥한 듯합니다.
말하자면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면서, 행위로는 그 주장을 전혀 입증하지 못한다면 소용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런 주장은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전혀 무가치한 신앙입니다. 말만 하는 신앙은 신앙이라 불릴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신앙은 있다는 주장에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나아가야 의미가 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돕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은 돕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돕고 싶은 충동을 성령께서 하셨으나 순종하기를 거역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 욕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양심에 말씀하는 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는 삶일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 자신을 성령의 통제 아래, 나의 생각과 행동을 성령의 지배 아래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하기 원하는 바를 실천 여부에 따라 심판받을 것을 마음에 두고 말과 행동을 하라”(약 2:12 - L.B)고 요구합니다.
그러면 이제 둘 째 질문을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답변을 준비하십시오. ①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달리 말해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② “결코 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야고보 선생의 논지를 파악하십시오. 믿음이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고보 선생은 여기서 믿는다고 말만 하는 그런 믿음은 무가치하다는 논지입니다. 말로만 주장하는 믿음은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옛날 교회 안에서 열나게 토론했던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말로 주장하는 그 믿음으로는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구원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십시오. 1장 21절을 보십시오. 야고보 선생에게 있어서 구원은 바울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말씀의 수납이 구원의 관건입니다.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참으로 깨닫는 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너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라”(약 1:21)고 말합니다. 귀로 들은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복종할 때 영혼 구원은 이루어진다고 설파했습니다.
1장 25절을 보십시오. 말씀(율법)을 응시하고 실행하는 삶이 구원을 성취합니다. 순종이 없고 실천이 결여된 곳에 구원이란 없습니다. 순종하는 행동이 없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삶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가 질문하는 대답은 너무 분명합니다.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서 구원은 마지막 구원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믿음은 끝날 심판의 순간에 그를 구원하기에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 명백합니다.
행함이 결여된 믿음은 최후의 심판 자리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믿음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입증되어야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 소망을 주는 믿음은 행동이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주장만 하는 것이 헛됨은 신약 성경에 새롭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선지서를 읽어보십시오. 구약 선지자들은 제물을 드리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아무런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들을 줄기차게 경고하고 정죄해 왔습니다.
이사야서 1장을 보십시오.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 . .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 .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동일한 맥락에서 세례 요한도 회개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각 계층마다 행동해야 할 강령을 선포했습니다.
주님께서도 선언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심판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야고보 역시 앞장 22-27절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행위는 믿음에 있어서 추가된 무엇이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근본적인 표현입니다.
이 진리를 입증하기 위해 본문 15절과 16절은 가상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 처절한 처지에 있는 형제자매가 등장합니다. 이런 상황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당시의 형편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세례요한의 설교가 보여주듯이 한 벌 옷만 가지면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이 없던 시대상을 염두에 두십시오.
겉옷은 당시 사람에게는 낮에는 외출복이요 밤에는 이불로 사용되었습니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한 그곳에서는 헐벗는 고통은 낮에만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 상황에서는 외출복이 시원찮으면 밤이 오면 걱정을 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오히려 밤이 오면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헐벗음만이 고통은 아닙니다. 입을 것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도 없는 법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먼저 헐벗은 가난한 사람을 등장시킨 다음 곧 이어서 같은 신앙 공동체에 속한 또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어떻게 그 상황을 다루는지 눈여겨보십시오. 그 처절한 상황에 있는 이를 향해서 “평안을!” 빌고 있습니다. “평안히 가십시오”, 살롬이라고 유대인다운 예의바른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처절한 형제자매의 상황에서 멀어지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의바른 인사말로 들리지만 실상인 즉 그 상황에서 멀어지겠다는 선언입니다. 말로는 전부 도와주는 척 합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일일이 챙겨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처절한 처지의 형제자매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위선적인 처신에 불과합니다.
유대인의 인사 Shalom은 무슨 뜻입니까? 살롬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때 이룩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인간소외에서 벗어나고, 절대 빈곤에서부터 해방될 때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입을 옷이든 먹을 음식이든 핍절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그 필요로 하는 것을 주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다시 한 번 처음 제기했던 질문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의 결론을 들어봅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되고 유일한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의 가르침은 사도 바울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행함은 추가된 무엇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이 있는 사람에게 숨 쉬는 것이 추가된 무엇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숨을 쉬는 것은 본질적인 행위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 행함이 있는 것은 너무나 본질적인 것입니다. 숨 쉼으로 살아있는 것을 확인하듯이 행함으로 믿음 있음을 확인합니다. 행함이 없는 소위 믿음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행함은 자비의 행동이지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다루지 않습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다른 편이 없이는 무가치합니다. 몸과 영혼이 분리되면 유익이 없듯이 둘 다 함께 존재할 때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영혼이 떠나버린 몸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15절과 16절은 다만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동일한 처신이 가능한지 여러분의 상상력을 사용해 보십시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다만 여러분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여러분이 느끼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어떤 것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여러분이 믿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오직 여러분이 행동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행동으로 입증되고 있습니까?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믿음입니까? 산 믿음입니까? 헛된 믿음입니까? 지금 여기 예배의 자리에서 대답하는 대신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행함과 능력
약 2:!4-17 / 님기완 목사
하나님과 모세는 호렙산에서 만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애굽 땅에 있는 내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 백성들을 인도할 수 있는가? 기가 막혔습니다. 이미 바로의 궁전에 살면서 권력의 힘을 보아왔었습니다. 살인을 하고 공권력에 의해 도망자가 되어 보기도 했습니다. 바로의 막강한 권력, 애굽의 공권력, 군사력을 아는 모세의 입장에서 지금 애굽사람들이 노예로 잘 부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 보내라고 한다는 것은 곧 나를 죽여주십시오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한사코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의 성경 말씀을 읽어 보면 모세가 무조건 못가겠다고 손사래를 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백성을 구원할 계획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그 일을 해야 한다니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가서 이 일을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백성들이 뭐라고 할까? 머리 속에 그려 보았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 분의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겠지? 그러면 내가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하나님께 여쭤봅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좋아! 그렇게 말을 하고 애굽왕 바로에게 갔어. 그런데 바로가 내 말을 듣겠어? 그래서 또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랬더니 여호와께서 지팡이로 뱀을 만들게 하시고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나병이 생기고 다시 넣었다가 꺼내보니 본래 살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런 기적을 행하게 할 것이니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다시 생각해 보니 자기가 원래 성격만 급했지 말을 조리있게 못하는 사람인데 바로에게 가서 말을 잘 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사람입니다. 하고 거절을 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쳐 주리라. 그리고 네 형 아론이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면 기쁜 마음으로 너를 돕도록 하겠다. ”
이렇게 약속을 받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모세가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고작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바로를 겁을 주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게 할 것입니까? 저는 그 정도 능력을 받아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바로에게로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내가 생각 못할 능력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손에 나병이 들고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분이 함께 하시면 이런 일 뿐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헤쳐갈 수 있는 능력을 앞으로도 주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모세는 정말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 때 마다 능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이 그것입니다.
홍해를 가르기도 했습니다. 척박한 사막과 같은 곳에서 백성을 인도하여 먹이고 입히고 마시게 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 하나님의 능력은 무궁무진했습니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지팡이로 뱀을 만들거나 나병이 들게도 하고 낫게도 하는 능력마저 잃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바로에게 가서 말하라는 것 보다 힘든게 있습니다. 바로 전도하는 일입니다.
전도하면 그 사람이 싫어할 까봐 못합니다.
전도를 하려해도 아는 게 없어서 못합니다.
전도를 하려해도 말 재주가 없어서 자신이 없습니다.
전도를 하면 친구들과 관계가 깨어지고 왕따를 당할 까봐 못합니다.
막연하게 전도는 두렵습니다.
나에게는 전도의 은사가 없다는 핑게를 대고 평생을 믿으면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전도를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아마 우리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저 입으로만 전도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을 할 뿐입니다.
전도뿐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모든 일에 우리는 능력이 없어서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주위에 헐벗고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다는 것은 나로 그들을 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나는 가난하고 그들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을 도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입으로만 합니다. 옷을 든든하게 입어서 춥지 않게 하라. 굶지 말고 밥을 먹으라고 말만하고 쓸 것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나도 부족하지만 내게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그 순간부터 내게 그들에게 나누어줄 더 많은 것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 큰 능력이 생겼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을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렙다 과부의 집에 갔습니다. 오랜 가뭄으로 그 집에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엘리야는 다짜고짜 물을 가져오고 먹을 것을 내오라고 했습니다.
그 집에는 마실 물도 넉넉하지 않았거니와 먹을 것은 겨우 자기와 아들 둘이 한 끼 먹을 밀가루와 기름 몇 방울 뿐이었습니다. 엘리야의 명령을 들은 사렙다 과부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마 저라면 먹을 것은 먹고 죽을래도 없습니다. 어디 부자집에 가서 알아보슈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집에 엘리야를 보내서 선지자를 먹여 살리게 하신 것은 선지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집이 가뭄이 끝날 때 까지 먹을 것이 있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 여인이 엘리야를 위해 남은 한주먹의 밀가루로 음식을 만들어 주었을 때 그 여인에게는 가뭄이 끝날 때 까지 굶주리지 않을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음으로 순종하고 믿음으로 행동할 때 나타나고 순종할수록 더욱 커집니다. 가난하고 능력이 없어서 전도도 못하고 구제도 못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도 못하고 나누어주고 베풀어 줄수도 없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지 않고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능력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할수록 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순종하면 우리의 능력은 늘어납니다. 우리의상황이나 주변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명령하시고 감동하시고 의무감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살리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는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은 이제 전도를 더 하지 못하게 되었어!’ ‘바울은 끝났어!’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리어”라고 말했습니다.
빌1:12절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내가 갇혔기 때문에 전도를 못하게 될 줄로 알았더니 도리어 전도를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은 이렇습니다. 시위대란 황제를 호위하고,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감시하고, 로마 도성을 경비하는 특수 부대였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전도를 열심히 하더라도 로마 시위대원들에게 전도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위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전도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3절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시위대 군인들 뿐 아닙니다. 바울을 심문하는 검사와 재판관들, 시위대 감옥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많은 죄수들, 그 중에는 정치범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에는 다니면서 전도했는데, 이제는 앉아서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로마 지도층 안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박해사를 살펴보면 로마의 여러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다가 갑자기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당시 기독교인 비율이 7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역할을 한 것이 “로마 권력층이 예수를 믿었다” 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로마 교회 교인들의 인사를 전합니다.
빌 4:22 “모든 성도들이(로마교회 교인들) 너희에게(빌립보교회 교인들)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니라”
여기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라는 말은 황제의 친척들 내지는 로마 황궁에 있던 고관대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황제의 친척이 믿고, 황제의 어머니와 딸이 믿고, 나중에 황제도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는 그렇게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큰일을 했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능력이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이고 위대한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까? 산 믿음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산에 가면 온양 민속박물관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좋은 그릇이며 가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입던 좋은 옷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자들이 가면 탐낼만한 가구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전시되고 구경거리가 될 뿐 사용되지 않는 물건입니다. 그러니까 그 물건은 살아있는 물건이 아니라 죽은 물건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믿음도 박물관에 모셔둔 믿음인지 모릅니다. 과거에 그런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가진 것도 없는데 구제하라고 하고 시간도 없고 능력도 없는데 봉사하라고 하고 잠도 부족한데 새벽기도 하자고 하고 우리는 짜증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때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는 때입니다.
구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시기 위해 구제하고 헌금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확신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을 주시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살아 역사하는 산 믿음이 되셔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살아있는 믿음
약 2:14-26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는 믿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고, ‘살아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날이 저물어 갈릴리 건너 가버나움을 가시는데,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타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따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갔을 때, 큰 풍랑을 만나 배가 뒤집힐 지경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가셨습니다.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보고 놀라 유령이라 소리치며 무서워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게 된 베드로가 “(마14:28)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라고 하자, 예수께서 “오라” 고 명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내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는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점점 빠져가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며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14:31)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가장 크고 깊어야 할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작다.”는 것은 사실상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원했던 것은 “오라”하신 말씀을 끝까지 전적으로 신뢰하는 ‘참 믿음’, ‘산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것은 믿음의 양, 즉 믿음이 적다, 많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 중에도 그리스도께 대한 변하지 아니하는 믿음, 끝까지 말씀을 신뢰하는 ‘산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였습니다. 어떤 이방 사람,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께 소리질러 간청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7절). 그러나 예수는 들은 체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귀찮을 정도로 따라오며 제발 도와 달라고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습니다. “저 여자를 어떻게 해서 돌려보내시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냉정하게 그 간절한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 가나안 여인은 아마 동족이 아니어 안 된다는 말에 암담했을 것입니다. 병 좀 고쳐 주는데 무슨 인종을 차별하느냐 따지며 대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귀신들린 딸이 너무나 불쌍할 뿐만 아니라 그냥 내버려두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발 앞에 바짝 엎드려 다시금 간청했습니다. “주여, 제발 저를 도와주소서.” 라며 비명에 가까운 절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예수께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들의 떡을 어떻게 개한테 던져 준단 말이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26절). 한 마디로 개같은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 좀 고쳐보겠다고 참으로 참기 어려운 너무나 치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참담해졌을 것입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딸만 아니었다면, 네 눈에는 개밖에 안 보이냐? 살다 보니 재수 옴 붙었다며 침이 탁 밷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같은 예수의 말씀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 체면도 불사한 채 기막힌 말로 간청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실로 그녀는 “주여, 당신의 말씀은 백 번 지당하십니다. 제가 개가 된다한들 어떻겠습니까? 제 딸만 고쳐주신다면 개가 되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제 딸을 살려낼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며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매달렸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말에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흉악히 귀신들렸던 가나안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으면서도 예수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개같은 취급을 받을지라도 예수를 믿고 따를 만한 가치가,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보화가 그에게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예수께서 사람들을 그렇게 취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나안 여자의 믿음을 시험해 보신 것이었습니다. 이 이방 여인은 오직 사랑하는 딸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에게만 집중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를 당한다 해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개같은 취급을 받아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개 취급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굽히지 않는 ‘산 믿음’을 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어떠한 경우를 당하고, 어떠한 말을 듣는다 해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인내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갔습니다. 바로 가나안 여인이 보여준 믿음이 ‘큰 믿음’, 그리고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십니까? ‘산 믿음’으로 사는 생명력 넘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시험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노라면서 믿음이 없다면,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신 줄을 믿지 못한다면, 버림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13:5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날마다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자신의 믿음이 ‘산 믿음’이라면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함이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4-15절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했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걷어내고 그 병자를 침상째 예수님 앞에 달아내려놓았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고 말씀하시자 그 병자는 곧 일어나 침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눅5:17-26)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고 예수님 앞에 나간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의 믿음으로 남을 유익하게 한 ‘산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면서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그 믿음은 아주 가식적(假飾的)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전혀 가치가 없는 거짓이며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노라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서 행함이 전혀 없다면 구원에 있어서 유익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산 믿음’은 행함을 통해 자신과 더불어 남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거기다 대고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이 세 마디 말은 그 사람에게 위로와 유익함이 되지 못하는 전혀 가치가 없는 공허한 말입니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고 ‘네가 알아서 스스로 평안히 하고, 더웁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라고 위로하는 것은 오히려 남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는 죄악입니다.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 주지 않고 스스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떠벌리는 것은 위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일3:18)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산 믿음’은 자신의 믿음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남에게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백부장(1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로마군대의 중견 지휘관)이 찾아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며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종이 병든 것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여 고쳐주고자 했습니다. 이같은 마음 씀씀이는 당시에 주인이 노예에게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의 노예는 사람 축에 들지도 못했습니다. 노예들의 생노병사 희노애락 등은 주인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에 불과했고 물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법적 권리라고는 하나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 주인은 자기가 좋은대로 노예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든지 학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저술가 바로(Varro)는 농업에 대해서 쓰되 농기구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언어를 가진 도구, 언어가 없는 도구, 소리 없는 도구 등인데 <언어를 가진 도구>란 노예를 의미하며, <언어가 없는 도구>란 가축을 말하며 <소리 없는 도구>란 운반수레들을 말합니다. 노예와 짐승 혹은 마차와의 유일한 차이란 노예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낡아서 못쓰는 농기구는 내다 버리는 것처럼 늙고 병든 노예는 주인의 뜻대로 얼마든지 내다 버려 죽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 병든 노예를 불쌍히 여겨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이 백부장은 특별한 인격자였음이 분명합니다. 평소에 노예들을 인격적으로 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감동했던 것은 바로 이 부분, 즉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하찮은 노예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중풍병에 걸려 쓸모도 없는 노예를 얼마든지 내다 버리든가 아니면 죽여도 그만인데, 그를 소중한 한 생명으로 여겨 사랑으로 섬긴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큰 사람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찮은 사람에 대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 곁에 예수는 항상 계십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실 정도로 그 사랑이 지극하십니다. 예수께서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18:10-14)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의 이 백부장은 소자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랑을 겸한 ‘산 믿음’을 가진 진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백부장은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종이 낫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직접 그 집에서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며 그의 거침없는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신앙을 기뻐하시고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어 유대인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 백부장처럼 아무리 이방인일지라도 예수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천국가는데 필요한 것이 국적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백부장처럼 ‘살아 있는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유대인이라 아니라 유대인이 멸시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참으로 백부장은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로 그 믿음은 남을 유익하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이 자기의 종을 그처럼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을 보고,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는 다른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께서 자기 종에게 “일어나라”고 다만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기를, 중풍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기 종에게 가시지 않으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만 말씀 한마디만 해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백부장은 주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었고, 그 말씀의 권위와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권세있는 명령을 발하실 때 종의 질병이 그 한 마디의 명령으로 곧 떠나가고 말 것을 확실히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눈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시는 주님을 전인격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믿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귀하고 숭고한 형태의 ‘산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마라하는 제자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에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후 8일이 지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20:24-29) 어떤 신체적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은 믿음이야말로 복된 믿음, 칭찬받는 믿음입니다. 백부장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지려 하지도 않았고, 예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백부장의 태도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 천지 만물의 주관자로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당시의 많은 군중들이 예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그 무엇을 보여 달라는 그 요청 또한 오늘날 우리들의 요청은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감각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1:1)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인격적인 믿음입니다. 말씀 한 마디에 생사를 걸고 사는 사람이 흔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씀 한 마디를 그대로 생활에 옮기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 2:26). 과연 본문의 백부장은 ‘살아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한 계급 사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구태의연한 권위 의식에 물들지 않고 종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랑의 인격을 소유한 보기 드문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생활 속에서 나타내는 살아있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믿노라 하면서 이러한 실천적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생활 가운데 그와 같은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믿음이요 헛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는 길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예수의 참된 모습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믿음의 삶은 이렇습니다.
(롬12:14-21)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러분에게 여기 이 백부장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사랑을 겸한 겸손한 믿음, 살아있는 믿음’으로 예수께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노라”는 칭찬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는지 여부를 알려면 자기 성격과 성품, 그리고 자기 뜻과 생각을 죽이고 사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갈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믿음으로 이제부터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가 지금 비록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살겠습니다.
(롬8:4)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고 있다면,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여전히 육체가 원하는대로 살고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지 않는, 죽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 가운데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때에는 말씀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하시면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행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자신의 생각이나 뜻을 죽이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살아 있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리셨다고 했습니다.
(삼상15:26)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대하 24:20)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성도 여러분이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 있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살아 있는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에녹은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옮겨졌습니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어거스틴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것을 행하라.” 행함이 없는 믿음생활은 귀신들이 조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살아 있는 믿음’으로 범사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며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하는 사람들
약 2:14-26 / 박봉수 목사
오래 전 읽었던 필립 스미스라는 사람이 쓴 [교육철학]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이 분은 철학자를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철학을 아는 사람’(knowing Philosophy)과 다른 하나는 ‘철학하는 사람’(doing Philosophy)입니다.
우선 철학을 아는 사람이란 철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철학에 대해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책으로 펴내기도 합니다. 대체로 철학교수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철학하는 사람이란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가 알고 있는 철학적 지식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인생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얻어진 답을 묵묵히 실천해 갑니다.
이분은 철학을 아는 사람과 철학하는 사람의 구체적인 예를 고대 그리스 시대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당시에 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저들을 ‘소피스트’(sophist)라고 불렀습니다. 저들은 열심히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수준 높은 철학적 토론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자기들이 터득한 철학적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이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철학적 지식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산파술이라는 방법으로 제자들이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훈련했습니다. 따로 강의 시간이 없었습니다. 함께 생활하면서 질문을 던졌습니다. 생활 속에서 철학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분은 당시 소피스트들을 철학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철학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아는 사람들은 많은데 철학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철학을 아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그리고 서점에는 철학에 대한 책들이 넘쳐나는데, 정작 철학하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 철학의 문제는 분리에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의 분리입니다. 철학에 대해 많이 알지만 철학을 실천하며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을 아는 사람은 많은데 철학하는 사람은 적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교육학자 가운데 토마스 그룸(Thomas Groome)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비슷한 관점에서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having Faith)과 다른 하나는 ‘신앙하는 사람’(doing Faith)입니다.
우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 예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성훈련을 통해 예수와의 관계에 대한 남다른 체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지식과 영적체험을 가르치고 전합니다.
다음으로 신앙하는 사람은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들을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깊이 생각하고 답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이분은 오늘 기독교의 문제를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많은데 신앙하는 사람이 적다는 데서 찾습니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신앙과 삶이 분리되고 믿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앙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찍이 야고보 사도가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당시 교회 안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신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본문에서 행함의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15절 이하를 보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야말로 말로만 걱정하고 잘될 것이라고 위로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을 가지고만 있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믿음의 열매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하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실제적인 믿음의 열매를 풍성하게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산 믿음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한 번은 그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얼마 안 돼서 이 분이 가게에 드나드는 손님들에게 입이 닳도록 그 목사님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그 목사님이 설교를 참 잘한다고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한 손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어떻게 설교를 하기에 그렇게 칭찬을 합니까? 지난주에는 무슨 내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까?” 이 분이 뜻밖의 답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일에도 가게를 열어야 돼서 교회출석을 하지 못합니다.” 손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교회에 가서 설교도 들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는지 아십니까?” 이 분이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부임한 뒤에 교인들이 외상값을 잘 갚아요....”
그렇습니다. 신앙은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신앙이야 말로 살아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말로 신앙을 말하지만 열매가 없다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그 믿음은 귀신의 것과 같습니다.
19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내용은 귀신들도 그렇게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막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방지역 거라사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 지방 해안에 도착하셨습니다. 막 배에서 내리실 때 귀신들린 사람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절하며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직 아무도 예수님의 정체를 모를 때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일이 없는 때입니다. 나중에 1-2년이 지난 뒤에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무 기뻐하셨고 이 고백의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귀신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영적인 지식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믿음의 역사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봉사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헌금하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그 믿음으로 전도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 믿음은 귀신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귀신의 믿음과 다르려면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신앙하는 사람들
그러면 신앙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신앙의 열매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역동적으로 역사를 나타내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구체적으로 두 사람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예
2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 사도가 창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을 해석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같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사건에 대해 야고보 사도의 해석과 바울 사도의 해석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롬 4장을 보면 바울은 이 사건을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행함 때문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내용에 대해 표현이 다른 것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 믿음을 말하는 것이고,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행함은 단순한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다 행함으로 나타난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신앙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을 보게 됩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신앙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넘어서기 힘든 장벽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바로 내어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내어놓았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아들 이삭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사람의 길로 가지 못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 6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이적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식사 때가 지나 모두들 시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으셨습니다. 그 때 안드레가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은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가지시고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열 두 바구니나 채울 정도로 남았습니다.
이 이적이 가능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한 아이의 ‘내어놓음’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도 자기의 먹거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과감하게 자기 먹거리를 내어놓았습니다. 이 작은 내어놓음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은 할 수 있고 마음은 먹을 수 있지만 행동으로 내어놓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하는 사람들은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이 내어놓음을 통해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 라합의 예
2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 사도는 라합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수 2장에 나오는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합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 땅의 큰 성인 여리고를 정탐하기로 하고 정탐꾼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의 왕이 정탐꾼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라합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 때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탈 없이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수 6장을 보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약속대로 라합과 그 가족들을 살려주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라합이 마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단지 지적인 동의나 감정적인 결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인 라합 ‘돌아섬’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믿은 뒤에 자기 민족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역사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자기 나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반역입니다. 매국적 행동입니다.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기독교 고전 가운데 하나인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책의 한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따라오라는 예수의 부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뜻하며 동시에 모든 법칙과의 단절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단호한 돌아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응답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즉각적이고 단호한 돌아섬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0)
그렇습니다. 신앙한다는 것은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과거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비록 그것이 그동안의 인간관계들을 끊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단호하게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과 신앙한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머리로 동의하고 가슴으로 결심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런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국 마귀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한다는 것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내어놓는 삶을 삽니다. 라합처럼 돌아서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을 갖는 자리에 머물지 말고 신앙하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행동하는 믿음으로 열매를 맺으십시오.
살아있는 믿음
빌 2:14-17 / 이중표 목사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믿는 것이 잘 믿는 것이며 어떻게 믿는 것이 복받는 신앙이 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다시 말하면 행동하는 신앙은 살아있는 것이요,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처럼 보입니다.
성경 속에는 서로 상반되는 신앙의 두 원리가 있습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고 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 원리를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두 사도를 통하여 상반된 원리를 말하고 있을까요? 당시에 유대인 가운데는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 그리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다. 할례를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가 행위를 강조한 것은 믿음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했습니다. 때문에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환난과 핍박과 많은 시련을 겪을지라도 끝까지 사랑과 선행으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손의 바닥과 등처럼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말하지만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냐 죽어있는 믿음이냐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8-10)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선한 일을 하도록 구원받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구원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구원의 근거는 은혜요,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요, 셋째, 선한 일을 위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동하는 믿음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도 유익하고 남도 유익한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자기도 아무 유익이 없고 남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유익하게 하고 남도 유익하게 행동하며 사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오래전에 안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느냐”는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가장 많은 응답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언행일치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인들에 대해 “신앙은 정통인데 행동은 이단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동을 나무로 표현한다면 나무의 뿌리는 믿음이요, 그 열매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듯이 좋은 신앙에서 좋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내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성찰해봐야 합니다.
“너에게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오늘날 실용주의자들은 유익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봐서 유익이 있는 것에 가치를 두고 행동합니다.
사랑의 실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15-16절)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은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진실한 행동을 통해서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런데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서 또 한번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행하는 신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내가 예수 믿고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 예수 믿고 무슨 변화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수십 년 믿어도 전혀 행동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듯이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한 장애자가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건강한 몸으로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데 자기는 장애자라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몸이 불편해서 봉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도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때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네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건강한 얼굴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해라”
그때부터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맞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웃는 얼굴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칭찬에 대한 소망
어느 교회에서 영성 수련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전도사님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영성수련회에 초청했습니다. 그 중에는 척추장애인으로 태어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소녀도 있었습니다. 척추장애인이라 창피해서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었는데 전도사님의 초청으로 영성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세미나 강의를 맡은 교수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고, 산을 보고, 땅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보세요.”
세미나가 끝나자 너도 나도 선한 일을 찾아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소녀는 몸이 불편해서 늦게 겨우 찾은 곳이 쓰레기통 옆이었습니다. ‘쓰레기같은 인간이라 쓰레기통 옆이 주어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곳에 앉아 있는데 한 청년이 쓰레기통 옆으로 와서 쓰레기통을 뒤지더니 캔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서 뭐하세요.” “캔을 줍는 겁니다.” “그것 가지고 뭐하려고 그럽니까?” “이걸 주워다 팔면 양로원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약을 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 소녀는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겠구나’라는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목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를 양로원으로 보내주세요. 장애자들이 있는 곳에 보내주세요. 그곳에 가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목사님은 소녀를 양로원에 보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도우면서 밤이면 그들의 눈이 되어주고 낮이면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었습니다. 오히려 키 크고 건강한 사람보다 키가 작은 소녀가 더 일하기 좋았습니다. 소망을 발견한 그는 노인들에게 천사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척추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파송한 천사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자기 선 자리에서 얼마든지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배우면 배운대로, 약하면 약한대로 선한 일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잃고 선한 일을 행하지 않으므로 내 믿음을 병들게 하고 죽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소망을 품으면 자기 존재를 얼마든지 위대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위대함은 학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배우고도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생긴 얼굴로 못된 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못된 짓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하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최후의 심판은 믿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할 착한 일이 있어야 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눅 6:32-33)
최후에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는 칭찬받는 행동으로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가정에 돌아가면 칭찬받는 자녀가 되십시오. 칭찬받는 시어머니, 칭찬받는 며느리, 칭찬받는 직원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살아있는 믿음은 행동하는 믿음이요, 행동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이웃들에게 선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칭찬받는 존재로 서는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몸이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영혼의 구체적인 증거가 칭찬받는 행동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빌 2:14-18 / 김경호 목사
오늘은 우리 교단에서 드리는 남신도회 주일입니다. 오늘 설교는 남신도 주일의 주제와 본문을 따른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수록 그에 대한 상실의 두려움도 크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그 부모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한쪽으로는 “이 부모가 내게서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하는 공포감도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들은 가끔 “너 그럼 엄마 도망간다”라고 겁을 주기도 합니다. 아이가 당장 말은 잘 들을지 몰라도 이 아이는 극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며 언제나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아이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부모의 큰 잘못입니다. 아이들이 언제 좋은 집을 갖자고 했고, 언제 좋은 음식을 먹자고 했습니까? 그런건 다 어른의 기준이지 아이들은 좋은 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저 마음 편한 집이 아이들에게 좋은 집입니다. 아이들은 짜장면이면 최고의 음식이지요.
이렇게 불안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자녀들은 긴 미래를 보고 삶을 운영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눈 앞의 이익,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는 “우선 편하고 보자. 우선 챙기고 보자”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하게 느끼고 경험한 사람이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도 봉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남신도회의 주제가 “행동하는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자”인데 저는 처음에는 사람의 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의식, 역사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식은 참으로 훌륭한데 그 사람의 개인적 삶이 전혀 따르지 않고 삶의 습관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마음은 훌륭한데 실제 나설 때 전혀 나서지 않는 것 입니다. 어떤 사람이 헌신할 수 있습니까? 주안에서 충분한 사랑을 느끼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 가족의 사랑이겠으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위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누군가의 사랑에 의해서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실천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분인데 놀라운 봉사와 희생을 삶을 사는 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이 어디서 사랑을 받으셨는가하고 따져보면 하나님의 사랑, 신앙의 사랑 뿐이 없으신 분인데 그런 분일수록 타산없이 아주 순수하고 놀라운 사랑의 실천을 하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과학은 신이란 것은 허구의 영역, 아편의 영역 안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치부할지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그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움직이시고 우리의 품성을 바꾸어 가시는 리얼한, 살아 역사하시는 실재이신 분이십니다.
좋은 의식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만나 교훈하려는 자세를 갖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주변의 작은 것 하나에서부터 직접 몸으로 사랑을 실천해 나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를 아이들의 눈 높이에서 같이 하는 것... 집 앞에 골목을 쓰는 것 등등 아주가까운 곳, 지금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부터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어떤 형제 자매가 그날 먹을 것 조차 없는데 누가 아무것도 베풀지 않으면서 그저 말로만 “형제는 가서 몸을 편안히 하고 배불리 먹으시오”라고 하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18절은 아주 논리적인 글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아마 이런 것은 이론으로만 존재하지 실제에서는 그런 사람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만 있는 사람이 어디있고 행함만 있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상태를 가정하고 말합니다. 너는 “행함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일 수는 있지만 행함없이 믿음을 보일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명쾌한 논리입니다
믿음이 충만한 한국사회에 전체 크리스천이 1/4이 넘는다는데도 사회는 점점 사악해져 가기만 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아무도 그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두려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실천이란 거창하고 큰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성서학당 졸업식이 있었습니다만 참 좋은 분들이 많이 오십니다. 그중 한분은 자신의 원대한 인생관, 인생의 마스터플랜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참 멋지게 사시는 분이시고 대단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지금 49세인데 생전 자가용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멀리 상계동 쪽에서 여기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오십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빈병과 가스통 등을 주워다가 (35원 씩 받는 답니다) 팝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모아진 돈은 남을 돕는 데에 전적으로 쓰십니다. 그날도 우리교인도 아니고 졸업하면 끝날 일인데 건축헌금을 준비해서 금일봉으로 전달하셨습니다.
한 주부는 “전 그런 삶을 살지 못해요”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그분이 건강이 좋지 않은 가족들을 위해 그 가족의 삶의 문제에 부딪혀 간절히 기도하며 노력하며 사시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그녀에게는 그것 이상의 실천이 따로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작은 사랑의 실천을 해나가는데서 우리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큰 사랑도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공연히 머리만 앞서서 매일 역사의식 운운하고 지내지만 자신의 삶은 오히려 평균이하의 삶을 살지나 않는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야고보 2:14-19 / 이사례 권사(고 이기풍목사 딸)
개척교회 목사로 시작해서 72세에 여수 경찰서에 수감되시고 2년간 옥고를 당하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기풍 목사와 동역자로서 충실하게 교회를 섬기신 어머니의 일생을 돌아보며 평생 제게 주신 신앙교육을 말씀드리고저 합니다.
아버지는 화평의 은사를 가지신 관용의 사람(어머니 말씀에 의하면)이셨습니다. 집안에서나 교회에서나 해결사노릇을 하시고 내게는 항상 칭찬을 아끼시지 않으셨을 뿐더러 약한 자들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1908년 제주도에 처음 부임하셨을 때 서양사교를 전한다하여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홍수로 물에 떠내려가는 여인을 구하기도 하고, 귀신들린 장영산이란 여인은 기도로 치유되어 전도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엄격하기가 한석봉 어머니 같으시지만 희생과 사랑은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말라리아에 걸려서 예수 믿고 낫자 집안에 반대를 무릎쓰고 예수를 믿었는데, 조산원으로 많은 사람을 전도했고, 특별히 문둥병자들을 위해 늘 밥을 해서 섬겼고, 또 벌교에서는 거지들을 위해 일년동안 옷을 만들어 성탄절에 초청해서 옷을 주고 떡국을 대접하시기도 했고, 겨울 김장철에는 거지들을 위해 김장을 따로 해서 김치를 가져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거지들의 모임인 천사회 회장님이셨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지청구라는 거지 집에 늘 도시락을 싸서 심부름으로 가져다 주기도 했는데, 짜증을 부리며 심부름을 한 나에게 학교에서 선행상이 내려져 마음 속으로 무척 무서웠습니다.
아버지는 늘 교회 개척을 하셔서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이사 품목 중에서 항상 목사관 안방에 길게 쓰인 말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는 말씀의 긴 종이와 "寬容,百忍, 謙遜"의 글을 제일 소중히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어린 나에게 설명하시기를, "관용이란 친구가 뭣이 슬픈가, 고통스러운가, 답답한가를 빨리 알아 내 일로 생각하고 위로하며 슬퍼해 주는 사람이 관용한 사람이고, 백인이란 아주 참기 어려울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생각하며 참아야 하는 것이고, 겸손은 친구가 너 보다 공부를 잘 했을 때 기뻐해 주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나는 교회에서 종 치는일, 사찰 일도 하고 청소도 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먼 곳에서 오시는 눈 먼 노인이 계셨는데 그분의 기뻐서 교회로 오시는 모습은 잊을 수가 없을 뿐더러, 지금도 때로는 교회가 멀어 머뭇 거릴 때에 그분이 내게 호통치는 것 같은 환상을 봅니다. "예수님을 5분이상 잊어버리지 마라" 는 어머니의 말씀을 늘 기억하며 "겸손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도 기억합니다.“네 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30-31). 지금도 주께서는 겸손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당신의 믿음은 건강합니까
야고보서 2:14-22, 창세기 22:9-12 / 안효관 목사
어느 교회에 부자 교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왔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목사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교우님, 병세가 좀 어떻습니까?" 그러자 그는 풀이 죽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있다 원장선생님이 와보셔야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원장선생님이 간호사 한 사람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그 분을 이리저리 진찰하더니, 갑자기 간호사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간호사, 빨리 가서 장의사를 불러 와!" 그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제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원장선생님이 자기를 진찰한 뒤 갑자기 장의사를 불러오라고 한 것을 보면 그의 상태가 아주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목사님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종이와 연필 좀 갖다주세요! 제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려야겠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 제대로 헌금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치니까 겁이 덜컥 난 것입니다. 그는 목사님이 전해주는 종이와 연필을 받아 쥐고서 아라비아 숫자로 1자를 적고 동그라미를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원, 십 만원, 백 만원, 천 만원, 일억, 그는 다시 한 번 숫자를 세어보더니 1억임을 확인하고 난 뒤에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적고서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목사님에게 건네주면서 자기가 그 금액을 헌금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목사님은 갑작스런 일에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그분의 뜻을 존중한다는 뜻으로 감사하게 그 헌금을 약속한 종이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밖에 나갔던 간호사가 젊은 의사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젊은 의사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봐, 장의사! 진찰을 했으면 차트에 기록을 남겨야지, 이렇게 비워놓으면 어떻게 하나. 이 정도는 퇴원시켜도 되잖아. 왜 환자를 붙들어놓고 고생을 시키나. 빨리 퇴원시키게."
알고 보니까 그 젊은 의사의 성이 장씨였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성이 장씨인 장의사(醫師)를 불렀는데, 이 환자는 죽고 난 뒤에 장례를 치르는 장의사(葬儀社)를 부른 줄 알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입니다. 상황을 판단한 그 교인이 깜짝 놀라 자리에 일어나 앉으면서 목사님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만, 제가 조금 전에 써드린 숫자에서 동그라미 세 개만 지워 주시지요."
물론 우스개로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뭔가 다급할 때에는 대단한 믿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다가도, 상황이 지나고 나면 너무나도 믿음 없는 삶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건강합니까? 여러분은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 2장의 말씀은 건강한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신앙행위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율법적인 어떤 인간의 의를 드러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의 믿음은 행함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요, 헛것이며 죽은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야고보서를 가리켜서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복음의 본질인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마구간에 비유된다면, 야고보서는 마구간 한 구석에 놓여있는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그렇게 좋지 않게 평가한 이유가 있습니다.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을 거부하고 로마서에서 복음의 빛을 발견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오직 은총,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의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는 그에게 별로 좋지 않게 보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개신교는 그런 루터의 사상을 지나치게 수용해서 오직 예수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건 100% 맞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구원받은 믿음이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삶에서 보여지지 않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는 바로 그것을 지적해 주고 있는 서신입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적인 삶의 모습들 속에서는 전혀 믿는 자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것은 거짓된 믿음이라고,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고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그 믿음이 수반되어 나타나는 우리의 삶의 이야기는 없는 공허한 믿음을 말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신앙의 열매들을 맺혀왔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야고보 사도가 바라본다면,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라보신다면, 야고보서에서 책망하고 있는 것처럼 "죽음 믿음" "거짓된 믿음"이라고 책망 받을 믿음은 아니었습니까?
본문 22절에 보면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말씀합니다. '죽은 믿음, 거짓된 믿음, 헛된 믿음'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믿음의 삶이 바로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 온전한 믿음이 바로 건강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믿음이 건강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말보다는 실천하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 - 건강한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우리의 삶에서 말 한마디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때로 말 한 마디 때문에 많은 사람이 용기를 얻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은 없고 말로만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온 것도 아닙니다. "형제나 자매"가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양식을 빌리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교인이 부유한 교인을 찾아와서 '당장 먹을 양식이 없으니 먹을 것 좀 달라'고 할 때, 부유하고 여유 있는 교인이 가난한 사람의 그런 사정을 동정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주지 않고서 말로만 "가서 밥해서 맛있게 드세요. 날씨가 쌀쌀한데 감기 들지 않도록 방 따뜻하게 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게 무슨 사랑이고, 그게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말로 '어떤 음식이 맛이 있고, 어떤 음식이 건강에 좋다'고 자랑을 해도, 그건 자랑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놀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같은 교회 교인들끼리 서로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로만 하는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초대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성경은 "서로 떡을 떼며 교제했다"고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교제했다는 말의 성경언어는 '코이노니아'(koinonia)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가장 소중한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서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필요를 따라서 나눠 갖도록 교회에 같다 바쳤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그것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는 것은 이렇게 서로 형제의 아픔과 고통의 짐을 나눠졌다는 것에서 참 면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넘치는 교회라고 말은 하면서도 형제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형제의 고통을 나물라라 한다면 그건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 가운데 하나가 구제하는 일입니다. 물론 나랏님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굶주리고 있는지, 기름이나 연탄을 뗄 돈이 없어서 추운 겨울에 냉방에서 추위에 떨고 있지는 않는지 계속해서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한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의 생활을 함께 걱정하고,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우리의 것을 나누어서라도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배불리 밥을 먹으면서 밥 한 그릇 나눠주지 않으면서 "밥 잘 먹고 다녀야 한다" 말로만 하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믿음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겨울에도 내복 바람으로 살면서 추위에 떠는 어려운 내 형제를 외면하고서 단지 "날씨가 추운데 방 따뜻하게 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 어찌 믿음 있는 모습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말로 끝나는 신앙이어서는 안됩니다. "밥 잘 드시고 다니세요"라는 말 한마디보다도 쌀 한 되 받아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고, 그게 살아 있는 건강한 믿음입니다. "방 따뜻하게 하고 계세요"라는 말 한마디보다 아무도 몰래 기름 한 말 받아주는 것이 진짜 사랑이고, 그게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실천하는 믿음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입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뭔가 몸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어느 조그마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가게에 찾아오는 사람마다에게 그 동네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님이 "아주 설교를 잘 한다"고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가게 주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가게 주인에게 "당신은 교회에 다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는지 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이 웃으면서 이렇데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 그 목사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이 오신 이후로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외상값을 잘 갚거든요."
여러분,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이 안목사가 설교를 잘하는지,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통해서 이 안 목사가 평가를 받게 됩니다. 어디 안목사뿐이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욕먹이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예수쟁이들 입만 살았다고, 그래서 예수 믿어봐야 다 쓸데 없다고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를 욕먹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살아 있는 믿음, 건강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 교회가 세상 속에서 칭찬이 자자한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건강한 믿음 때문에 이 안목사도 칭찬도 좀 받고요.
두 번째로 온전한 믿음 건강한 믿음은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오래 다녔다고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좋은 믿음, 건강한 믿음은 얼마나 교회에 오래 다녔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건강한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 주지도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으로 인도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물론 이 물음은 믿는다는 대답을 전제로 던져진 질문입니다. 신앙생활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그런 대답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을 훼방하고 믿는 사람들을 유혹해서 시험에 빠지게 만드는데, 그런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니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합니까? 어떤 차이가 있어야 우리의 믿음이 귀신들이 갖는 믿음과 다른 것입니까?
해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 믿음이 그의 삶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거짓을 일삼습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으면서도 성도들을 유혹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을 일삼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살아간다면, 그건 귀신들이 갖는 믿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갖는 믿음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의 수준에 머무는 것은 헛것에 불과한 믿음입니다. "헛것"이라는 말은 곡식이 열매를 맺히지 못하고 껍데기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벼가 누렇게 익어서 추수를 하고 보니까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껍데기만 있습니다. 그게 바로 헛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유일신 신앙은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입니다.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교리를 안다고 해서 훌륭한 믿음이라고 말하거나, 그런 지식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단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에 머물러는 안되고,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자녀임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진정 건강한 믿음,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읽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100세에 낳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에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합니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아들 이삭을 밧줄로 묶어 쌓아놓은 나무단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 이삭을 제물로 잡으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저지시키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죽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삭을 죽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그의 행동을 통해서 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믿음, 건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증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때도 기뻐하시지만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의 삶으로 보여줄 때에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에도 우리를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믿음의 모습을 삶으로 보여줄 때에 우리를 더욱 기뻐하십니다.
미국 빈민가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깁슨이란 사람에게 사람들이 부자된 비결에 대해 물었습니다. 깁슨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 둘째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할 것. 셋째 하나님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말 것. 이게 그 비결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는 듯이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것이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깁슨은 웃으며 다시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누구 나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는 것을 실천하여 성공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 지식은 불필요한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케 되어야 합니다. 행함과 함께 일하는 믿음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톨스토이가 쓴 "세 가지 질문"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왕에게 세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때가 언제인가? 제일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왕은 이 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숲 속에 한 도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 도사를 찾아갔습니다. 도사가 살고 있다는 숲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왕은 신하를 모두 돌려보내고 혼자 도사가 살고 있다는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때마침 도사는 혼자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왕은 도사에게 물었습니다.
"도사님, 제가 도사님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때는 언제입니까?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또 제일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나 도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밭가는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왕이 보니까 그 도사는 너무 늙어서 몸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왕은 자기가 대신해서 그 일을 해주겠다고 말하고는 삽과 괭이를 받아 들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밭을 갈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녁이 되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갑자기 숲 속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왕과 도사 앞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를 자세히 보니까 사나운 맹수의 습격을 받아서 다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왕과 도사는 깜짝 놀라 얼른 부상당한 사람을 도사가 거처하고 있는 암자로 옮겼습니다. 왕은 그날 밤 부상당한 사람을 극진하게 보살펴주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겨우 건졌습니다. 아침이 되자 생명을 건진 사람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서 뜻밖에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폐하, 저는 평소에 폐하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서 이번 기회에 폐하를 죽이기 위해서 뒤쫓아온 자객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제 목숨을 살려주셨으니, 이제는 제 마음 속에 있는 원한이 다 사라졌습니다. 부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왕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래서 어제 자기가 갈았던 밭에서 씨앗을 뿌리고 있는 도사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사님, 도사님 때문에 저의 목숨을 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원수를 제 친구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사님께서는 아직도 저의 세 가지 질문에 대답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제발 좀 가르쳐 주십시오."
도사는 씨앗을 뿌리는 일을 계속 하면서 입을 열어 드디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폐하 스스로가 이미 찾으셨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어제 저를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이미 폐하는 자객의 칼에 맞아서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가시면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나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폐하가 지금 대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간에 그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오늘의 문제이고 지금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삶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백 마디의 말보다도 따뜻하게 내민 손길 하나가 참된 믿음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다 외울만큼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그 많은 지식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형제 하나에게 사랑을 베푸는 바로 그것이 건강한 믿음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세상에 믿음을 증거하고, 많은 지식보다 실천하는 작은 사랑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며 건강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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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크리스천들의 허와 실
약 2:14-26 / 김경호 목사
오늘은 송년주일입니다. 한 해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며 반성해 보는 주일인데 저는 오늘 진보적인 교회라고 하는 우리들의 허와 실에 대해서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에게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이런 진보성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이 안에 정말 말씀 같은 말씀이 있고, 복음 같은 복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상식이 있는 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장점을 들추어 스스로 칭찬하자는 것이 아니고 오늘은 우리들의 허점을 보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은 우리들의 부끄러운 점을 들추어보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하는 것이라기 보다 나를 포함한 우리 진보적 크리스천 모두를 반성해 보는 것입니다.
1. 꿈이 없고 패배의식을 갖기 쉽습니다.
믿음이란 것은 지금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합리적인 생각을 한답시고 도전하거나 꿈을 꾸거나 모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도 없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진보적인 크리스천이 갖는 꿈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꿈이다 보니 쉽게 이루어 질 수도 없습니다. 항상 현상유지에 머무르면 잘하는 일이 되기 쉽습니다. 또 이것이 만성화되어 우리 안에 패배의식이 자리잡기도 합니다.
“진보적인 교회는 잘 안돼, 숫적으로 작을 수 밖에 없어....”우리는 이런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고 그 공동체의 가장 첫 번째 사기는 숫자입니다. 그 주일에 서너명만 더 오면 사기충천하고 서너명만 적게 오면 기가 떨어집니다. 그것을 항상 경험하면서도 “숫자가 중요한 것 아니다” 이렇게 도사처럼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내게 참 가치 있는 것이라면 남에게 전하고 인도할 생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크게 외치지만 사실 그들을 위해 무엇 하나 크게 내 놓지도 못하면서.....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한번 전하지 못한다면....나는 도대체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교회가 전도한다고 서로 교인 빼앗기 경쟁을 하고, 지하철에서 전도한다고 시비 걸듯 소란을 피우는 행위, 띠 두르고 노래하며 소음 일으키는 행위..... 등등 눈살 찌프러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전달하는 열정, 기쁨을 보면서 참 느끼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비난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은 잘못 되었지만 중요한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복음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입니다. ‘저들이 낮 간지러운 전도를 하니 우리는 전도 안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벼룩이 태우려다 초가삼간 사르는 격입니다. 전하지 않는 교회가 어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생명체는 성장하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자란다는 것이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라지 않고 멈추어 있는 공동체 그것은 이미 생명력 자체가 다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 뒤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것은 패배주의입니다.
“내가 아무리 전해도 저들은 미동도 안해. 해 봤자 소용없어. 진보적인 교회는 적어.....”
우리 교회 한 집사님께서 사업을 하시는 분이신데, “내가 보기에 이 교회에서 선포하는 복음은 아주 놀라운 것이다. 이제까지 듣던 것과 전혀 다른 진리가 있다. 정말 새로운 것이고 놀라운 복음이다. 이것을 막 전하고 싶다. 그런데 이 교회는 전하질 않는다. 교회를 알리는 것도 없다. 이것은 마치 생산은 하는데 마켓팅이 없는 기업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새해에는 여러분 열심히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진보적 크리스천은 합리적이지만 순진성이 적습니다.
보수적인 분들은 성수주일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부흥회 때마다 “주일 예배 안 나가고 낚시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은 예, 벼락맞은 죽은 예들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 예배에 안나가며 버틸만큼 심장이 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벼락맞을 까봐 교회 나오는 놈이나, 교회 안나가도 벼락 안 맞을 것을 알아서 안나오는 사람이나.....그 둘의 신앙구조는 똑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 나오는 사람은 오히려 순진하기나 하지요...
보수적인 교인들은 “목사님 제가 퇴직금 받아서 십일조했고 지금은 그 이자로 살아가는데 그 이자에서 또 십일조를 해야됩니까?” “제가 봉급 타서 십일조하고 아이들은 제게 받아 용돈쓰는데 그 아이도 또 십일조해야 됩니까?” 이런 것을 물어봅니다. 그런데 진보적인 크리스천은 “옛날은 제정일치 사회라서 십일조 했지만 요즈음은 국가에 세금 내는데 또 교회에 십일조 해야 합니까? 구약에는 십일조 이야기가 있지만 예수님은 그런 이야기하지 않으셨는데 그래도 십일조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여러분, 어느 교회가 흥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일조 하란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끼니도 못 있는 민중에게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입니까? 마음만 무겁지.... 그러나 부자가 왔을 때 시시하게 십일조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네 가족, 네 친척, 네 목숨까지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본래 십일조의 정신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다 드려야하지만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 중에 1/10만 상징으로 드림으로써 나머지 9/10는 하나님께 물려 내어서 쓰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 수입의 1/10은 나누는 데 쓰겠다 하는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중 나머지 지파는 다 땅을 가졌지만 레위인들 만은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마저 땅을 나눠 가지고 자기 땅을 붙여 먹는다면 이스라엘 12지파는 각자가 따로 사는 부족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땅 없이 각 지파에 흩어져서 그들에게 야훼신앙을 가르치고 제사드리는 일등을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십일조 제도가 생겼습니다. 바로 이 십일조 때문에 그들에게 야훼신앙이 유지되고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교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십일조 제도로 말미암아 교회가 2,000년 세월을 유지해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지 않고 내 것이라며 아까와 할 때, 어디 하나님의 교회가 설자리가 있겠습니까? 자기 수입의 1/10은 이유를 묻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떼어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이 되지 않으면 이웃을 위해서 베풀지 못합니다.
보수적인 교회는 항상 물질이 차고 넘치는데 진보적인 교회는 남에게 꿈질 해야 되고... 이거 무엇인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순진성이 필요합니다. 덮어놓고 계산하지 않고 그 말씀을 지키려는 순진성이 필요하며 이것을 어렸을 때부터 훈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우직해 보이는 1/10제도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각자가 자기 몫을 자기가 다 써버리고 교회도 없고, 이웃도 없고, 나눔도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1/10이란 것은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수입이 적은 사람은 절대 생존의 비용이므로, 수입이 많은 사람은 액수 많기에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내 것을 남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3. 너무나 아는 것은 많은데 실천이 없습니다
어느 진보적인 교회에서 자조섞인 말로 “우리는 모여서 예배 볼 때는 금방 세상이라도 뒤집어엎을 듯 온갖 것을 다 파헤치고 예배 드리지만 예배 후 하는 일은 오직 국수를 같이 삶아 먹고 집에 가는 일이다”고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실천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지 진보적인 교회가 되지 말씀의 자극 강도로 묶여 지려고 하면 자꾸 위선이 될 뿐입니다. 또는 매일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만나기 좋은 맛으로 교회 생활하는 것도 크리스천으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우리교회 선교 부서들이 훌륭하게 있지만 올해 우리들이 얼마나 각 부서별 활동을 성실하게 하였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18절은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러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며 아주 명쾌한 논리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행함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나는 행함을 통해서 그것으로 믿음을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2,23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아브라함의 의로 여기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에 놓고 칼을 빼어드는 자신의 아들을 바치는 행동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냄으로 의롭게 여겨졌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으십니까? 어떻게 응답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훌륭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부르시는 그 음성을 따라나서는 아브라함이 없습니다. 순진하게 그 말씀에 반응해서 따라나갈 사람이...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이제는 누군가 나서서 십자가를 질 사람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제물을 드립니다
빌 2:17 / 강성찬 목사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 그들 가정에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은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축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범죄하여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가인과 아벨부터였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으므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이었으므로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드린 제사에 대한 상반된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습니다. 자신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것을 안 가인은 하나님의 처사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인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책망은 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반항하는 가인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된 책망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열납된 제사를 드린 동생 아벨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죽이려는 생각까지 품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기 위하여 그를 광야로 유혹해 내어 거기서 살해하였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형제간의 살인은 죄가 인간에게 들어와 얼마만큼 파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광야에서 살해했으므로 아무도 본 자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가인의 살인 행위를 보셨으며 하나님의 귀는 아벨의 의로운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첫째 형벌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땅이 그에게 아무런 은혜를 주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형벌은 하나님과 사람을 피하여 숨어 팔아야 하고 항상 정처 없이 방황하며 유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가인의 범죄는 그의 삶을 황폐한 삶으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 히브리서기자는 가인의 제사가 믿음이 없이 드린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 11:4)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을 말합니다.
제물(뒤시아)은 유대인의 제물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마9: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제물(뒤시아)은 비유적으로, 하나님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사용 합니다
(엡5: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1937년 어느 여름날, 철도 다리의 관리인인 잔 그리피스는 배를 지나가게 하려고 다리를 들어 올린 다음 그의 여덟 살 먹은 아들 그레그와 함께 관망대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갑자기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것은 400명의 승객을 태운 멤피스 특급열차였습니다. 그는 관제탑으로 뛰어가서 다리를 제대로 해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레그가 다리를 들어 올리는 거대한 톱니바퀴 위에 떨어져서 왼쪽 다리가 거대한 기어 사이의 톱니바퀴에 물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그는 아들을 구하느냐, 400명의 승객들을 구하느냐 하는 기로에서 고뇌의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바른손으로 스위치를 힘껏 밀어 제쳤습니다. 열차는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건넜습니다. 잔 그리피스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을 때 열차의 창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정장을 한 사업가가 무심코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이 보였고, 말쑥하게 차려 입은 숙녀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아이들은 가늘고 긴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었습니다.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는 철마를 향해 고함쳤습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내 아들을 바쳤다. 그래도 아무 관심이 없단 말이냐?”열차는 으르렁거리며 질주해 갔고 잔 그리피스의 고함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급행열차를 타고 가는 세상 사람들이여, 낮고 비천한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까?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급행열차를 타고 심판의 종착역으로 달려가던 사람들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제물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타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링컨 같은 사람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물론 사업도 열심히 했을 것이고 법관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세계 정치사에서 성스럽다고까지 할 링컨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노예를 해방하고 미국의 건국사의 초석을 놓았던 그러한 링컨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가 '예스'를 하면 유럽이 전부 '예스'로 진동이 되고, '노'를 하면 유럽이 '노' 쪽으로 진동을 찰 정도로 지진을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개신교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께서 만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아주 불량한 깡패였습니다. 그는 시장에 가는 사람마다 괴롭혔습니다. 장에 가는 사람들이 오늘은 김익두를 안 만나게 해달라고 고사를 지내고 갔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한국 초대 교회의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참회록을 보면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을 다 했습니다. 가장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성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위대한 교육자이시며 위대한 예술가이시며 또한 창조주이시며 부활의 주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생애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격의 모든 병을 낫게 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의 주님께 우리의 생애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연보를 통하여 믿음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빌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더글라스(W. I. Douglas)는 구두 제조업자로 대성한 인물입니다. 성공에 이르기까지 그에게는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는데, 젊은 시절 한 때에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구인광고를 찾아 전전긍긍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수중에 1달러밖에 남지 않게 되는 절박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는데 그날은 주일이었습니다. 헌금함 앞에서, 남아 있는 전 재산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선뜻 50센트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다음 날, 이웃 마을에 일자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기차표를 끊으러 역전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기차 요금은 1달러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50센트로 갈 수 있는 거리까지의 표를 사고 나머지는 걸어갈 양이었습니다. 이윽고 50센트만큼의 거리를 지나 걸어가고 있는데, 역 한 구간도 채 못가서 새로운 구인 광고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편안하고 가벼운 구두제작에 함께 참여할 사람 구함' 그는 단숨에 공장으로 달려가 30분 만에 취업이 되었습니다. 보수도 애당초 목적지보다 주금 5달러를 더 받는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두제조업에 발을 내디딘 더글라스는 성실과 꾸준함 그리고 언제나 아낌없이 최선의 정성을 드리는 그의 신앙으로 인해 대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지금의 500만 달러보다 그 당시 50센트는 내게 더 큰 의미였습니다.' 이렇듯 정성이 담긴 풍성한 예물은 우리의 삶을 넉넉하게 만듭니다.
찬양을 통하여 믿음의 제물을 드리게 됩니다.
[히 13:15-1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전도사님이 늙은 과부의 집을 심방하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진흙탕이 되어 있는 좁은 길을 지나 다 찌그러진 허술한 집을 찾았습니다. 인기척을 들은 흑인 과부가 "거 밖에 누가 왔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방에 들어가 불을 켠 전도사는 방안 풍경에 할말을 잃었습니다. 그 방안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한 여인이 누더기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먹물처럼 새까맣게 변했고, 삶에 찌든 주름살 자국으로 얼기설기 얽었고, 차가운 겨울밤인데도 불도, 빛도 없는 냉냉한 방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성스러운 평화와 신뢰의 신앙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은 끊임없이 "찬양하라, 영광, 할렐루야"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입에서 세상을 저주하며 욕하여도 들어줄 수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의 입술에서는 거룩한 찬양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채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는 것을 통하여 믿음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미국 조지아주에 풀러라는 변호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어느 날 집 없는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을 목격하고 한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리라. 내가 죽기 전에 20채의 집을 지어주겠다.” 풀러변호사는 모든 재산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집없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해비타트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의 모든 도시로 확산됐습니다. 대통령직에서 은퇴한 지미 카터는 톱과 망치가 든 연장가방을 들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집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지부가 생겨 과기처장관을 지낸 정근모씨 등 회원들이 30여채의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이 운동을 통해 총 2만채의 집이 건축됐습니다. 풀러의 진실하고 소박한 꿈이 1천배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이 엄청난 사랑의 폭발을 일으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섬김을 통하여 믿음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믿음의 제물과 섬김'(테뒤시아 카이 레이투 르기아 테스 피스테오스')에서 '제물과 섬김'은 하나의 관사(테)로 수식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물과 섬김'이 '희생적 섬김'을 의미하는 중언법적 표현임을 시사합니다(Kent).
윈스턴 처칠이 어렸을 때 하루는 템즈 강변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때마침 그 곁을 지나가고 있던 가난한 소년 플레밍이 위험을 무릅쓰고 강물 속에 뛰어들어 처칠을 구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큰 봉사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처칠의 할아버지는 귀염둥이 손자 처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 플레밍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플레밍은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당시 영국에서는 의학을 공부하는데 학비가 엄청나게 들므로 보통 서민가정에서는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명문 귀족인 처칠의 할아버지는 플레밍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학비와 기숙사비를 다 지급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봉사입니까? 열심히 의학을 공부한 플레밍은 크게 성공하여 페니실린을 발명해내어 노벨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손자 윈스턴 처칠은 커서 군인이 되어 아프리카에 투입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제2차 세계 대전이었으므로 교통과 통신이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날 만에 들려온 소식으로는 윈스턴 처칠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폐결핵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플레밍은 자기가 발명한 페니실린을 들고 비행기로 아프리카에 달려가 사경을 헤매는 처칠을 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목숨을 되찾은 처칠은 수십 년 후 제2차 세계 대전때 영국 수상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독재자 히틀러의 손에서 영국을 구해내고, 전세계 약속 민족에게 해방과 자유를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서로 도와주고 서로 섬겨주는 봉사라는 것은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며, 또 좋은 사회를 건설해 내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헌신을 통하여 믿음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행하는 모든 희생적인 봉사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린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합니다.
전제는 고대 제사의 관습에서 포도주를 제물에 붓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민 15:7) 전제로 포도주 삼분의 일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
전제를 최초로 드렸던 인물은 야곱이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만났던 곳에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창 35:14).
죽음에 직면한 이삭은 평소 사랑하던 맏아들 에서에게 축복하여 장자권을 넘겨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과 리브가의 계책으로 언약적 축복을 계승한 야곱에게 그 장자권이 돌아갔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곧 피신하게 됩니다.(창27장)
디나 사건은 야곱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심히 근심하는 지경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위기에 봉착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벧엘에 올라가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을 찾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자기 가족뿐 아니라 모든 종들에 이르기까지 이방 신상 즉 모든 우상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의복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대 신앙을 개혁한 야곱 가족은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창 28: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벧엘에 도착한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제물을 바치며 이전의 모든 하나님의 복을 감사하고 칭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감사하고 찬양하는 야곱을 위해 여러 약속들을 해주셨으며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밝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복된 말씀을 들은 야곱은 그 장소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과 기름을 부어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처럼 야곱이 복을 받고 제사 의식을 행한 것은 복주신 하나님께 또한 온전히 헌신하겠다는 신앙 고백을 의미합니다.
전제로 드리겠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순교의 의미로 해석들을 합니다.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리기로 다짐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만 급급해 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생활입니다.
믿음으로 제물을 드리며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빌 2:17-18 / 박상훈 목사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 되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다툼과 허영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원망과 시비도 있었습니다.
빌2:3 말씀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 되기 위해서, 그들 모두는 겸손한 마음을 품고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그들이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겸손을 단계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고, 더 나아가서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자기를 낮추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지극히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실제로 예수님을 본받아서 겸손을 실천하고 있는 세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실례로 들고 있습니다.
자기는 겸손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겸손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자신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오늘 본문 이후에 나오는 말씀에서 디모데를 예로 들고, 이어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예로 들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로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 아들이 된 자로 바울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낸 자였습니다.
바울이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는 모두 다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겸손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간단한 말씀이지만,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겸손을 실천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실제로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낫게 여겼습니다. 바울은 겸손을 실천했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오늘 본문은 “만일”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이 때의 조건절은 일등급입니다(a first-class conditional clause). 헬라어에서 일등급 조건절은 무엇을 가정하기보다는 기정사실을 뜻할 때 사용됩니다.
예컨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빌2:1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면, 이 한 절 말씀 안에 무려 네 개의 일등급 조건절이 사용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 되어야 했습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권면이 있었고,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사랑이 있었으며, 성령님의 교제가 있었고, 또한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긍휼과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어로 일등급 조건절은 우리말의 “만일”보다는 “때문에”라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17절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리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라.”
여기에 나오는 제물과 전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나오는 용어들입니다. 롬12:1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구약시대 성도들처럼, 우리는 짐승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단번에 영원한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갑니다.
아무튼 구약시대의 제사 제도를 이해하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씀하는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삼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살아 있는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불태워드렸습니다.
그런 다음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그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번제물과 소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것을 가리켜 전제라고 칭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제는 제사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때의 전제가 바울의 순교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동사 “전제로 드리다”의 시제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그의 현재 사역을 하나님께 드리는 전제로 표현했습니다.
사실 빌1:19 말씀과 같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간구대로 이번에는 자신이 순교하지 않고 살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2:24 말씀과 같이, 바울은 그가 석방된 후에는 속히 빌립보로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의 전제는 장래에 있을 바울의 순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때의 전제는 바울의 현재 사역, 곧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달음질과 그의 수고를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울의 의도는 분명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섬김, 곧 그들의 사역을 “제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중심은 번제물이나 소제물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제물 위에 살짝 부어드리는 “전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사역보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역을 더 크게, 더 귀하게, 더 낫게 여겼습니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앞서 말씀한 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들인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낫게 여겼던 것입니다.
본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방 사회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또한 믿은 후에 나아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빌1:28 말씀과 같이, 그들 주변에는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빌1:29∼30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당시에도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 주변에 그들을 박해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더 작은 “전제”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더 큰 “제물”이라고 칭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그들을 낫게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겸손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의 하나 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과 전제는 똑같이 한 사람에 의해서 드려집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더 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바울은 더 작은 “전제”로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어떠하든지 그들 모두가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함께 어우러져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 됨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도 늘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깁시다. 아울러 우리 모두도 언제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됩시다. 그리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했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빌립보서 안에는 기쁘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컨대 빌1:3∼4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항상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서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빌1:12∼13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바울이 매여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 사람들도 복음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매임을 보고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착한 뜻으로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는 바울을 비방하며 순수하지 못한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빌1:17∼18 말씀입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처럼 바울은 항상 기뻐했습니다. 물론 그가 처한 환경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가 기뻐하는 또 다른 이유를 밝힙니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이 아니라, 진정한 “때문에”의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 빌2:17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미 말씀드린 대로, 여기에는 헬라어로 일등급 조건절이 사용되었습니다.
원문의 뜻을 좀더 정확하게 살려서 번역을 하면 이와 같습니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리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그러니까 전반부에서는 기쁨의 이유를, 후반부에서는 기쁨의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냈습니다. 많은 물질도 함께 보냈습니다. 여기에 대해 바울은 이와 같이 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전제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와 나는 함께 어우러져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나는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고 싶다.”
바울의 기쁨은 좋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높임을 받거나 잘되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전제로 드리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희생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빌1:20∼21 말씀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자 했습니다. 사나 죽으나 바울은 주의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자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고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짐을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쁨은 유독 바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에게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행5:40∼41 말씀입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이와 같이 바울도 또한 다른 사도들도 모두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게 됨을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와 같은 기쁨을, 곧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드리면서 얻는 기쁨을 누구에게서 배웠겠습니까? 물론 그들은 예수님을 본받았습니다.
히12:2 말씀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드리심을 기뻐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본을 따라서, 바울도 또한 다른 사도들도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진정한 기쁨, 곧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림으로 얻게 되는 영적인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7절 말씀 끝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너희 무리”라는 말씀은 “너희 모두”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하나 되지 못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제는 모두 하나 되어 함께 기뻐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높아지고 많이 가져야 기쁜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런 데서 찾는 기쁨은 덧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자신이 드려질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에게는 진정한 기쁨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기쁨으로 그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도 기쁨으로 우리 자신을 예수님에게 드리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두 언제나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어, 우리 모두가 함께 기뻐하며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충성되게 섬기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태도도 같아야 했습니다.
빌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이와 같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 절에서 바울은 그에게 기쁨이 있음과 아울러 그에게 기쁨이 있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그런 후에 “이와 같이”하면서, 바울은 그의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자기와 같은 태도를 가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겸손을 실천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들도 겸손을 실천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들도 자신들이 제물로 드려짐을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그들도 자기와 함께 기뻐하기를 바랐습니다.
18절 중반에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도 기뻐하고.” 바울은 먼저 자신이 기뻐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그런 후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본을 보이고서 말을 할 때, 그 말은 설득력이 있는 법입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작은 제물로 드려짐으로 예수님이 존귀하게 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이로써 그는 기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오히려 그들도 바울이 보여준 태도와 같이, 자신들이 제물로 드려짐을 기뻐해야 했습니다.
마5:11∼12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을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큰 제물로 드려지기 때문에, 그만큼 그들의 기쁨은 더 커야만 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18절 끝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앞 절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 두 개를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라는 단어와 “기뻐하라”는 단어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함께”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 되지를 못하고, 그들에게는 다툼과 허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기뻐하라”는 단어를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서로 간에 원망과 시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두 단어 곧 “함께”와 “기뻐하라”는 말씀을 늘 명심하기 바랍니다. 먼저 내가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런 후에는 남에게도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겸손을 실천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했습니다. 셋째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태도도 같아야 했습니다.
우리도 겸손을 실천하기 바랍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이 전제로 드려짐을 기뻐하기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 “함께” 또한 “기뻐하며”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잘 섬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성령님께 기쁨을 드리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름다운 동역자
빌 2:19-30 / 이필재 목사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서 ‘도무지 시간이 안 간다.’ 하고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에 보면 “Kill Time”이라고 합니다. 시간을 어떻게 죽이냐? 그런데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시간이 제일 안갑니다. 하나는 병원이고 하나는 감옥입니다. 정말 시간이 안갑니다. 왜 감옥에서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가? 참고 기다리면 다 잘 될 텐데도 자살을 생각하고 감옥에서 죽을 것만 찾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 있는 도구를 다 없이 하잖아요? 끈만 있으면 목을 매려고 하니까 그러는 겁니다. 왜 그러는가? 시간을 이기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 지루하고 지겨운 시간을 도저히 이겨낼 수 있는 마음 조절이 안 되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방에 갇혀서 1초, 2초 가는 게 지긋지긋한 겁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자살 사건이 많이 일어납니다. 입원도, 감옥도 제가 스스로 경험해 본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일도 평생에 한 번도 없었으니까 직접 체험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접 체험은 누구보다도 많이 했습니다. 병원에 항상 심방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솔직히 감옥에도 심방을 많이 갔습니다. 간접 체험은 목회자가 누구보다도 제일 많이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서 어떻게 풀려날 길도 없고 이제는 죽을지 모르는 그런 시간을 지루하게 아주 지겹게 보내고 있는데 그 어려운 시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감옥을 찾아오는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디모데이고 하나는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이 두 사람이 찾아와서 바울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바깥의 소식을 다 전해주고 또 돌봐주고 밥도 해주고 같이 있어주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고 이 두 사람 때문에 로마 감옥의 지루한 과정을 무난히 잘 넘길 수가 있었는데 ‘제일 궁금했던 일이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였습니다. 지금 같이 전화가 있어서 소식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편지도 안 됩니다. 편지도 사람이 직접 손으로 직접 가서 전해 주고 또 가지고 와야 되니 무슨 통신 수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럽의 첫 번째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잘 설립하고 재미나게 목회를 하다가 이렇게 로마 감옥에 와 있으니까 그 소식이 너무나도 궁금한데 디모데하고 에바브로디도가 와서 그 소식을 소상하게 전해주니까 지루함이 해소가 되고 기쁘고 또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을 해서 보내주어서 사식도 잘 먹고 이 두 사람의 역할과 빌립보 교우들의 후원 때문에 로마 감옥을 무난히 초월하게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긴 겁니다.
여러분도 제일 궁금하신 소식이 있습니다. 누가 제일 궁금한가?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이 제일 궁금하실 겁니다. 군대 나간 아들딸이 잘 있는가? 어떤 상황에 있는가? 유학 간 아이들이 잘 있는지? 곁에 있지 아니하는 내 사랑의 대상자에 대해서 사람이 제일 궁금한데 바울은 그 궁금한 것이 빌립보 교인들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에 대한 어떤 소식을 들을 때는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자세히 묻게 되고 알고 싶어 합니다. 저도 손자, 손녀들이 미국에 있으니까 “뒤집었냐?” 이렇게 묻습니다. “기어갔냐?” 이제 돌 때가 되니까 “일어서냐?” “한 발짝 걸었냐?” 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묻게 됩니다. 칼 바르트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랑, 사랑” 그러는데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를 했거든요? 일거일동을 관찰하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가까운 사람과 전화걸 때 순서가 네 가지입니다. 똑같습니다. 전화를 걸면 “어디야? 뭐해? 누구하고 있어? 언제 올 거야?” 이 순서로 말합니다. 바로 관심입니다. 구체적으로 내 머릿속에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언제 올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잖아요?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그의 마음에 이 아름다운 두 동역자가 있어 줌으로써 그 어려운 감옥 생활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바울은 외롭지 않았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동역자 두 사람을 오늘 성경말씀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편지로 두 사람을 천거해서 소식을 전하고 있는 내용을 우리가 본 겁니다.
먼저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 사람입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유대 여자입니다. 아버지가 헬라인인데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모계를 따라서 유대인으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이 모계를 많이 따라갑니다. 우리나라는 아버지 쪽을 따라가는데 유대는 어머니를 따라갑니다. 만약 유대인 남자가 이방 여자와 결혼해서 탄생한 아이는 이방인이 됩니다. 유대인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이방인이 됩니다. 유대인 남자가 만약 한국 여자와 결혼했잖아요? 그러면 아이는 한국인이 됩니다. 모계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유대인 여자가 이방 남자와 아이를 출산하면 유대인이 됩니다. 디모데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계를 따라서 유대인이 된 사람으로서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고 자기는 유대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헬라인 아버지 신앙을 따라가지 않고 어머니를 닮아 훌륭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디모데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헬라 철학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헬라 철학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대의 신앙이 교육된 훌륭한 청년입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디모데를 만나죠? 그래서 관계를 맺게 되고 급기야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멘토’라는 말을 많이 쓰고 ‘롤모델’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 말은 다른 게 아닙니다. ‘내가 저 사람한테 모든 교육을 받고 싶다.’ 멘토링한다고 합니다. 롤모델은 ‘나도 꼭 저 사람과 같이 되고 싶다.’ 그 사람을 모델로 삼아서 내가 그쪽 길로 가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멘토와 롤모델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같은 성격의 내용을 지닌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가 큰 영향을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 지도자! 가끔 대통령 출마한 자들에게 기자들이 묻습니다. “당신이 존경하는 대통령은 누굽니까?” “당신은 대통령이 되면 누구를 롤모델로 생각해서 정치를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겁니다. ‘링컨’이냐, ‘워싱턴’이냐, ‘드골’이냐, ‘이승만’이냐? 누구를 롤모델로? 세상의 훌륭한 대통령 중에 하나를 묻는 겁니다.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의 기업 정신을 이어받느냐?” 교육자도, 예술가도 다 똑같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분야에 롤모델을 정해놓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과 같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롤모델을 정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될 수만 있으면 그의 멘토링을 받아서 영향을 받으라는 겁니다. 여러분! 요즘에 대한민국에서는 미셀콴과 김연아가 환상적 아이스쇼를 보여주었죠? 김연아가 말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미셀콴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나도 미셀콴과 같이 되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존경했다.” 그랬더니 그렇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둘이 환상적인 연기를 펼쳐서 모두를 행복하게 한 연기를 우리가 봤잖아요? 누구든지 같은 분야에서 자기가 아주 존경하고 좋아하는 롤모델이 있습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낳은 사람이 제시 잭슨 목사입니다. 제시 잭슨 목사가 “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롤모델로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다니고 교육을 받고자 했다.” 그러더니 제시 잭슨 목사가 유명해진 겁니다. 바울은 이 분야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을 합니다. “디모데는 내 아들이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을 하지요?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핍박 받는 바울에 대한 인상이 너무 좋았습니다. 거기 가서 전도를 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돌멩이로 때려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죽은 시체를 사람들이 끌고 가서 성 밖에 내치니라.” 그런데 그 현장을 디모데가 어려서 봤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다시 일어나서 절뚝거리면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 ‘아! 나도 이 바울 선생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오늘을 가져온 겁니다.
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말하는 바울에게 진짜 아들 역할을 다 했습니다. 성경에 나옵니다. 얼마나 아들 역할을 했느냐? 전도 여행 때 이 디모데가 항상 따라다녀 동행을 해 주었습니다. 빌립보에서도, 데살로니가에서도, 베뢰아에서도, 고린도, 에베소, 지금 로마 감옥까지 항상 따라다니면서 함께 일을 했고 바울 사도를 도와드렸고, 자기도 도움을 받고 같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라고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살아보니까 멀리 떨어져있는 아들은 아들이 아닙니다.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이 떨어져서 사는 아들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저도 아들이 외국에 사니까 있긴 분명히 있는데, 또 우리 아들은 성격이 얼마나 무심 태평하신지 어떤 때는 제가 계산을 합니다. “일 년에 아버지한테 전화 두 통화만 해주시면 성은이 망극 하오리다.” 항상 내가 못 견디고 안부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아들은 실제적으로 뭐합니까? 제가 감기가 들어서 의사가 “목사님, 수분이 많이 빠졌으니 수액을 좀 맞으세요.” “그러지요.” 그래서 우리 집에 가져와서 집에서 소파에 누워서 수액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아들이 잠깐 한국에 왔습니다. 왔다가 비행기 시간이 되니까 공항으로 가야 되거든요? “야! 빨리 가라. 비행기 놓치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알았습니다.” 그러고 내가 이렇게 수액 맞는 것을 보고 공항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미국에 갔으면 “아빠! 내가 미국 갈 때 아팠었는데 지금 좀 어때요?” 전화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도무지 일주일 동안 전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녕히 가셨느냐고 전화하고 나 수액 뺐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아들은 너무 착한데도 보살피는 데는 무심 태평합니다. LA는 지진이 가끔 납니다. 지진이 난다고 하니까 “야! 지진이 난다고 하니까 빨리 어떻게 해라.” “알아요.” 급한 거도 하나도 없고 천지개벽을 해도 뛰는 거 하나 없고 할아버지 닮은 거 같아요. 아들은 옆에 있어야 아들입니다. 옆에 없는 가족 솔직히 말해서 가족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할 때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게 뭐냐? “시간적으로 지금이다.” 과거는 흘러가 버렸고 미래는 보장이 없고 오늘이라는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또 인생에 있어서 나에게 누가 제일 중요한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만나고 있는 사람은 다 지나갔고 미래는 누굴 만날지 모르고 지금입니다. 이게 현명한 생각 같습니다. 바울이 전세방에서 자취할 때 디모데가 밥해 드렸습니다. 아들 역할을 다 했습니다. 바울이 시력이 안 좋아 글을 쓸 때 옆에서 다 대필했습니다. 여러분! 바울서신 가운데 데살로니가전후서, 고린도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는 디모데가 쓴 겁니다. 불러주고 디모데가 옆에서 다 기록해 준 겁니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참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실제 아들도 이것보다 못합니다. 로마에서 빌립보까지의 세계지도를 펴놓고 거리를 한번 보십시오. 비행기로 가야 합니다. 자동차로 그 거리 힘든 거리입니다. 걸어서 갔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지금 디모데를 빌립보에 가라고 하잖아요? 이게 무슨 장난입니까? 그런데 이 믿음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디모데가 갔잖아요? 어떤 아들이 어떤 아버지의 말을 그만큼 듣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 때문에 외로움도 없고 너무 기쁘고 이런 아들 하나 얻어서 너무 좋은 겁니다. 22절을 우리 다 같이 읽어봅시다. 시작하겠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 다음에 또 한사람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본래 빌립보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목사님이 빌립보 교회를 떠나니까 이 에바브로디도가 교인 가운데 제일 훌륭했습니다. 또 설교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그 교회 담임 목사가 된 겁니다. 그런데 로마의 감옥에 계신다는 바울 사도의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을 해서 담임목사인 에바브로디도에게 가서 좀 돌봐드리고 오라고, 그렇게 고생하시는데 어떡하느냐고 해서 헌금을 가지고 와서 보니까 바울이 너무 고생스러운 말년을 보내며 감옥살이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바울 사도를 혼자 두고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겨울을 바울 선생 돌보기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을 돌보러 간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났습니다.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돌보는 결과가 나온 겁니다. 아주 고생스러웠습니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모두의 근심거리가 되었고 특별히 빌립보 교회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니, 바울 사도도 그렇게 고생스러우신데 우리 에바브로디도 목사님도 병이 나서 지금 죽을 지도 모른데!” 이런 상황이 된 겁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바브로디도 자신도 빌립보 교회도 건강을 위해서 기도를 아주 집중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나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 교회로 보내서 목회하게 하는 과정의 역사를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바울의 심정은 다섯 가지로 오늘 본문에 말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 하면 “이는 나의 형제”라고 말했습니다. 디모데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아마 연령 관계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디모데는 어립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나이가 그렇게 차이가 안 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나이가 나보다 두세 살 아래보고 내 아들 같은 녀석이라고 못하잖아요? 내 형제 같다고 하면 말이 맞잖아요? 그래서 바울 신학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인간관계는 “나의 형제, 자매들이여!” 항상 이런 말이 많이 나타나지요? 이 형제 자매는 아주 좋은 관계인데 이 관계성 때문에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수많은 괴로움과 고난도 참아 넘기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형제의 고난을 덜어주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고 또 나도 그런 도움을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살아가지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이 형제자매라는 관계는 아주 훌륭한 관계인데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그런데 이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로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이는 나와 함께 수고한 자”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하나의 같은 목적을 위해서 함께 가는 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각기 다른 자기 은사 사역을 하고 있죠? 그런데 목적은 언제나 하나입니다. 여선교회에서 바자회를 해서 냉면을 만들고 빈대떡을 부치든지 남자들이 무엇을 깎아 수공예품을 만들어서 팔든지, 또 음악을 하든지 춤을 추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은사대로 움직이는데 목적은 언제나 하나!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도움이 되게 한다는 이 목적 하나를 가지고 우리가 사역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나와 목적이 같다. 그래서 같은 목적을 향해서 함께 가고 있는 거다.” 생애 목적이 같으면 가는 길도 언제나 같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함께 군사된 자”라고 합니다. 군인의 특징은 사사로운 개인 사정은 생각하지 아니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군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군인 사회의 하나의 특별한 법이 있는데 졸병은 희생되어도 대장은 상을 받습니다. 장군의 어깨에 별 하나를 붙여주기 위해서 사병들이 수천 명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쟁 영웅’하면 졸병들이 수만 명이 죽은 겁니다. 그래서 영웅이 된 겁니다. 우리의 대장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상은 예수님이 받도록 하시고 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희생의 길을 간다는 “나와 함께 군사된 자”입니다. 우리가 찬송가에 부르잖아요? “♬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군사 개념입니다. 좋은 것은 주님께, 대장께 다 돌리고 우리는 전선에 나가서 보병 부대로서 일선에 나가서 쓰러지는 “나와 함께 군사된 자” 에바브로디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입니다. 지금 바울의 필요를 다 채워주었잖아요? 돈이 없는데 돈을 가지고 와서 사식을 넣어주면서 건강을 돌봐주고 바울 주변을 다 ‘나의 쓸 것을 돕는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몇 가지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마음의 필요! 나와서 함께 동거해주었잖아요? 사람에게는 이야기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필요한 만큼의 돈을 가지고 왔지요? 궁금한 빌립보 소식을 전해주었지요? “이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나는 완전히 해결이 되었다. 나의 있을 것을 돕는 자!” 그 다음에 그것을 하기 위해서 에바브로디도는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치한이 하나도 마련되지 않은 무법지대 2천 년 전 사회에서 이 동네에서 저 동네에만 갈려도 강도, 도둑떼가 득실거렸는데 빌립보 지방에서 돈 보따리를 둘러메고 걸어서 로마까지 그 먼 거리를 온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입니다. 얼마나 충성스러우면 바울에게 목숨을 걸고 동역자로 도울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 제목이 “아름다운 동역자”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바울을 돌보다가 목숨을 걸고 험한 길을 왔기 때문에 병이 났습니다. 죽을병이 든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으로 회복이 된 겁니다. “그렇게까지 충성을 한 자기의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나와 함께 군사로서 충성한 사람이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일을 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이 아름다운 동역자가 옆에 있어줌으로 인하여 감옥생활이라는 지겹고도 지루한 시간을 매우 기뻐하면서 보낼 수 있는 힘이 주어진 겁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에바브로디도는 나중에 건강해졌습니다. 빌립보로 돌아가서 목회를 훌륭하게 해서 확신하면서 글을 써서 보내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하나의 같은 목적을 향해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의 관계성을 성경이 우리에게 지금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은 누가, 어떤 자리에 있든, 어디를 가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담임 목사를 바울이 하든지 에바브로디도가 하든지 디모데가 하든지 복음만 전해지면 그만이다. 또 헌금도 누가 쓰든 어떻게 썼든 복음 전파만 됐으면 그만이다.” 하나의 목적만 위해서 이 세 사람이 지금 빌립보 교회와 더불어서 함께 손을 잡고 일해 가는 아름다운 동역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오늘 새벽에 준비하다가 조금 눈물을 흘렸습니다. 엉엉 운 것이 아니고 눈물이 좀 났습니다. 제 동기생 하나를 생각하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3학년 때 학교에서 전체 학생이 다 모여서 회장을 뽑는다고 선거를 했습니다. 제가 회장이 되어 총무 하나 임명을 해서 둘이서 학생회를 위해서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회장과 총무가 일을 하다 보니 가까워졌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날마다 모여야 하잖아요? 둘이 만나서 자장면 먹으면서 “오늘 일을 어떻게 하자. 우리 학우의 장학금 어떻게 하자.” 오고 가면서 회의 했습니다. 그런데 둘이 다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개척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교회를 가서 부흥회도 해주고 그 친구가 우리 교회 와서 부흥회도 해주고 여름학교 때 오고가며 해주고 그랬습니다. 말할 수 없이 친해지고 정말 아름다운 동역 관계를 이루었는데 학교 졸업을 며칠 안두고 어떤 분이 그 신학교에 나와서 목사가 되려는 분이 아니고 성경을 좀 알았으면 좋겠다고 다니시던 기업인이 한 분 계셨는데 “이 회장 바쁘지 않으면 내 사무실에 한번 오시오.” “네, 그러지요. 어디 입니까?” 그래서 주소를 주셔서 찾아가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명동 복판입니다. “어휴! 아니, 이 건물이 집사님 겁니까?” “네, 이리 오세요.” “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졸업하고 뭐할 겁니까?” “뭐하기는요? 목회를 해야지요.” “다른 교회 부목사로 가고 그럴 계획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는 다른 교회 부목사로 가면 그 교회 담임목사 곤란해집니다. 처음부터 개척교회 할 계획입니다.” “잘 되었소. 그러면 어디든 개척교회를 하면 첫 번째 교회는 내가 건축해 드리겠소.” “예? 우와!” 나는 그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이요?” “소문 내지 마십시오.” “알았습니다.” 가슴이 뜨거워 흥분했습니다. 사실 개척교회 하는 목사는 그런 사람이 예수님 같이 보입니다. 흥분해서 계획을 하는데 미국갈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미국 갔다 오시오. 기다리고 있겠소.” “감사합니다.” 갔습니다. 그런데 내가 안 오잖아요? 거기서 목회를 하게 된 겁니다. 그분이 미국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할 거요? 나는 약속하고 실없는 소리 안합니다. 나는 말하면 지키는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 이 LA교회가 날마다 부흥하고 확장되어 가니 이 외로운 이민자들을 두고 내가 떠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하시오.” “나 해주시려든 것을 내 친구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그래서 서울 복판에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좋아서 편지, 전화하면서 연애편지 하듯 서로 편지가 한 박스가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는데 아내들이 질투할 만큼 네가 없으면 내가 못산다는 식으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된 게 용어가 “여보”, “당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17년 만에 미국을 한번 왔습니다. 와서 보니까 교회가 크고 미국 처음 와서 여러 가지를 보고 그러니까 미국 올 마음이 있는 겁니다. “이 목사! 미국 올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어? 올 거야?” “오고 싶다.” “만약 당신이 정말 결정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모든 법적 서류는 내가 해줄 거야. 그런데 실없는 소리 하지 말아야 해. 딱 결정해야 해.” “결정했어. 나 좀 미국으로 데리고 와.” “알았어.” 그래서 내가 뭘 제안했는지 아세요? 놀라실 겁니다. “당신이 이제 이 나이에 미국에 와도 개척교회 못해. 나는 벌써 20년 전에 와서 이렇게 이루었어. 그러므로 당신이 이 교회를 맡아. 알았지?” “그러면 이 목사 어떡해?” “나는 이민 교회 노하우가 생겼어. 성경책 하나 들고 가면 나는 자신 있어. 그러니까 이 교회를 맡아. 나는 당신에게 물려주고 나는 또 교회를 개척할 거야. 알았지? 그러므로 이번 주일날 교인들에게 아주 멋진 설교를 해! 알았지?” “그래!” 그래서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다 좋아했습니다. 사실 나와 그 친구 둘이 다니면 사람들이 나보다 그 친구를 더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인격이 따뜻하고 저도 그 사람 만나면 따뜻해서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합니까? 너무 좋고 그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친구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도와주고 싶고 그렇게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둘이만 약속을 하고 이것은 아내들에게는 이야기를 안 하고 “그러면 그렇게 하겠다. 가서 빨리 준비해.” 그리고 “그래, 그렇게 하자. 너무 고맙다.” “걱정 말고! 어디든 같이 가자.” 이렇게 아름다운 동역 관계를 해서 약속을 하고 한국에 와서 죽었습니다. 바로 죽었습니다. 온지 몇 달 만에 죽었습니다. 그날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수요일이었습니다. 설교하러 나가서 설교 못했습니다. 교인들에게 “지난번에 와서 설교했던 내 친구 목사가 오늘 죽었습니다. 내가 너무 슬퍼서 이렇게 말을 더듬고 있으니까 이해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대략 끝내고 “여러분, 기도하시고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이렇게 끝냅니다.” 사무실에 들어가서 서랍에 하모니카 꺼내서 그 친구와 마지막 대화를 하던 산타모니카 모래밭 바닷가 달이 환하게 비치는 곳입니다. 한국을 바라보면서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그것을 내가 10번도 더 하모니카를 불면서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그렇게 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만 영광이면 됐지 이게 무슨….’ 그래서 오늘 이 아름다운 동역 관계를 설교 준비하다가 그때가 생각이 나니까 눈물이 주르륵 났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우리 모두는 지금 아름다운 동역자로 만난 겁니다. 이렇게 바울과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빌립보 교회같이 말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동역자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위해서 사역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동역자가 되어서 이 관계에서 행복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은 저희들의 관계를 아름다운 동역 관계로 인도하여 주셔서 바울, 디모데,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와 함께 이루었던 역사를 이루어 가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복음 역사에 도움 되는 사역자들의 동역 관계가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