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나처럼 일찍 일어났습니다. 비가 오는데도 고온다습이라서 에어컨을 잠시도
꺼놓을 수가 없네요. 에스겔 묵상 한개 끝내놓고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교회
수련회를 갈까, 어머니 생신을 갈까 짧은 갈등 끝에 아침을 지어 먹고 커리어 백을
챙겨 6시30분 쯤 집을 나왔습니다. 경부를 탔는데 숙 대 입구까지 1시간 만에 주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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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어요. 제 적토마가 늙긴 했어도 아직 200k를 달립니다. 잘 관리해서 2년은 더 탈
작정입니다. 공휴일이라 그런가, 학원 주차장이 텅 비어 있네요. 아-싸, 전용 주차장처럼
파킹을 했어요. 1층 종로학원, 2층 수학학원, 3층이 우리 미술학원입니다. "에 예공,
아빠 왔다 간다. 1. 침대시트 싱글인데 필요할까봐 2. 집에 있는 책 가져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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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생신이라 남양주로 간다. 혹 저녁 먹을 수 있으면 전화 하렴" 화장실도 학원도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었어요. 수시가 대충 60일 정도 남았을 것입니다. 차를 황학 동
시장 앞에 세워두고 청계천 6가쯤에서 트레킹을 시작했어요. 출발!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걸을 만 하대요. 제가 알기로 청계천은 영조, 정조 임금 때부터 신경을 많이 쓰던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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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도에 복개공사를 완공했고 김 두 한 이나 개코 나오는 거지 소굴이 이 무렵일
것입니다. 이후 5.16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 정희가 복개 천위에 고가도로를 만들어서
‘삼일고가’로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는 광교,
청계6가(동대문야구장 부근) 구간,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청계8가(신설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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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 8가-신답철교 구간이 복개되었다지요. 저는 청계6가
구간 복개를 할 때부터 서울을 들락거리면서 삼일고가가 철거될 때까지 지켜보았습니다.
담양 촌놈이 외가 집을 서울에 둔 덕에 50년을 산 셈입니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손 정목
명예교수는 그의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박통이 외국사절들과 워커힐로 곧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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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기 위해 이 고가를 놓았다는 behind 스토리가 있어요. 청계천 주변의 판잣집들은
복개과정에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맨션 · 상점가가 건설되었지요. 이 과정에서 청계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당한 걸로 압니다.
중구 광교에서 동대문구 용두 동에 이르는 길이 5 ~ 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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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8월 15일에 착공하여 1976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습니다. 청계고가도로 아래의
도로는 청계천로라고 불렸으며, 청계고가는 당시 교통을 분산시키고 교통흐름을 빠르게 하는
근대화의 상징이었지요. 아마도 두레마을 김 진홍 목사가 이곳에서 빈민촌을 했을 것입니다.
2002도에 MB가 시장시절 청계천에 1급 수 물이 흐르게 만들면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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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제가 걷고 있는 청계천이 새로 만들어진 지가 벌써 12년이 되어갑니다.
박 근혜 정부 때까지는 청계천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문재인 정권 이후로 예전만 못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확인해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습니다. 제가 6가부터
광화문 광장 끝까지 트래킹을 했는데 개천에 물 반 고기반입니다. 휴가 때 가본 계곡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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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없더니만 청계천에는 잉어, 열목어, 돌무지, 가물치, 메기 없는 어종이 없었어요.
제가 어림잡아 개천길만 12K정도를 걸었는데 팔뚝만한 잉어를 한 100마리정도 본 것 같습니다.
2년 전 '빛 축제' 때 보았던 것과 또 다른 느낌입니다. 혼 등을 해서 그런가. 지금은 제가 혼 밥,
혼 등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멋진 곳에 언제나 늘 혼자 왔을 까 봐요? 물장구, ‘소나기’ 페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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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 다 해봤어요. 아, 옛날이여! 고기들은 물줄기를 거슬러 가거나 가장자리에서 주로 노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요. 가물치나 메기는 한 마리도 보지 못했어요. 아마도 돌 밑이나 수초 속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MB가 청계천 물을 끓어올 때 뚝섬에서부터 광화문까지 수로를 놓았어요.
관계자가 그러는데 뚝섬 수질 정화조에서 한강 물을 끓어와 수돗물 바로 한 단계 아래까지 거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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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청계천으로 방류한다고 했습니다. 배관공사 때 돈이 많이 들어갔을 것이고 지금은 모터
돌리는 전기세로 한 달 기준 약2000만원을 쓴다고 합디다. 공사비용이 아무리 많이 들어간다고
해도 대통령을 할 수만 있다면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MB가 건설 출신이라 통박을
재는데 유리하였을 것입니다. 고기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물 반 고기반인 어종들이 모두 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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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에서 올라온다고 합니다. 봄이 되면 지금처럼 올라와서 겨울이 되면 다시 내려가 한강까지
거슬러 가나 봐요. 그러고 보면 모든 피조 계는 환경이 갖춰지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같아요.
상권도 비슷한 원리로 봐요. 우선 20년 전만 해도 동대문보다 남대문이 상권이 좋았고, 강북의
핫플은 종로나 명동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광화문 찍고 종각-세운상가-종로5가로 리-턴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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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까 남대문이나 종로 쪽은 완전 나간 집구석 같았습니다. 광화문 천막은 철거한다더니 아직
철거를 못했는지 음향소리가 구판 같습니다. 저 미친놈은 도대체 뭐라는 거야? 음향 데시벨이
너무 높아서 고막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보신각이 문을 열어놔서 한 컷 찍었습니다. 11시에
파고다 공원을 지났는데 대모대열이 모여 있었어요. 태극기가 펄럭이며 ‘임을 위한 행진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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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게 들려왔습니다. 광화문 쪽으로 진행하는 차들은 이제 죽었네요. 나 같으면 중앙선 너머로
차를 돌릴 텐데 유치원 아이들 소풍가듯 말도 잘 듣습니다. 세운상가가 업그레이드를 해서 전철
역사가 생겼어요. 오늘이 광복절이라 파고다 공원에 들릴까도 했지만 다리가 너무 아파서 패스했습니다.
황금보석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 상가들을 지나는데 근처는 아직도 살아있었습니다. 상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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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있는 이모들을 보니까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관철 동에 들어서면서 단성사는 이미
없어진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쪽 극장가를 살펴보았어요, 재다 없어졌더라고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군밤 팔아서 4남매를 공부시킨 어머니를 제가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파고다 공원 지나면서 피카다리도 보질 못했어요. 가만, 오늘 무료급식 하는 날인가 봐요. 혹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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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홀 안을 들여다봤더니 아무리 배고파도 저는 자격 미달같아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녹두 장군 전 봉준 동상에서 한 컷 찍고 영풍 문고에 들어갔어요. 종이 냄새를 맡는데 배가
고파왔습니다. 기독교 종교 란을 찾아 스캔 하는데 30분을 썼습니다. 반가운 이름 이 중수의
호세아서를 보았고, 존스톳트 ‘사도행전’이 겉표지가 쌈박하게 바뀐 것을 확인했어요.
김 서택 목사가 강해 집 몇 권을 더 냈고 김 홍전 박사께서 아직도 신간을 냈더라고요.
고삐 풀린 망아지 박 영선 목사도 이제 나이가 70이 넘었을 것입니다. ‘르네상스의 전쟁
회고록(유발 하라리)’이란 책이 눈에 들어와서 사려고보니 카드를 차에 놓고 왔지 뭡니까?
미래학자인 그가 전쟁 역사를 통해 나의 존재 의미를 묻는 내용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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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와 중세는 뚜렷이 대비되는 시대로 근대는 ‘합리성과 이성’이라면 중세(5-15세기)는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일 때’에만 의미를 가졌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은
근대 이전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요. 정치와 권력관계 측면에서도 중세에는 권력이 분산되어
있어서 왕이란 일개 귀족에 불과 했고, 왕국이란 이름뿐이었어요. 자연히 귀족들은 각 지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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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같은 권력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역사는 우리가 기억할 만한 것들의 이야기인 반면,
개인사는 내가 기억할 만한 이야기라고 하더이다. 하라리가 이미‘사피엔스’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는 이 공백 채워나가기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다리도 아프고 신발이 다 젖어버려서 걷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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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불편했지만 예서 말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돈이 없고 적토마를 매어놓은 곳까지
아직3/1이 남았습니다. 광장 시장을 들려 아이 쇼핑을 했어요. 아크테릭스 바지와 몬추라 점퍼가
신상인지 간지나 보입니다. 아크는 27만원 몬추라는 58만원입니다. 광장시장은 산방친구들이랑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전을 지지는 냄새가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의 유혹에 부채질을 해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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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집에 사람들이 줄을 선 것이 뭔가 색다른 게 있는 모양입니다. 마무트매장을 지나 동대문
곱창골목이 보이는 것이 종로 5가 쯤 될 것입니다. 단골집에 들려 인사를 하고 라이터를 얻어
왔습니다. 서울처럼 볼 것 많은 곳도 없는데 찬찬히 잘 살펴보지 않아서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저도 서울 생활 30년 동안 대충 살다가 집 떠나오면서 거꾸로 서울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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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한양은 삼봉 정도전이 기획자였습니다. 고려 잔당들이 설치는 개경을 벗어나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천도를 계획하고서 옛 양주 고을을 둘러본 후 '바로 여기다!'고 탄성을
발한 곳이 지금 경복궁 터입니다. 북 악을 등지고 남산 너머로 한강을 멀리 내다보는 제경의
지세인 데다 우백호의 인왕산과 좌청룡의 낙산이 양팔로 굳세게 에워싼 형국이라 천시에 호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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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가 이 이상 가는 곳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한데 일제 때 청룡의 목을 잘라 미아리로 넘어
가는 신작로를 내는 바람에 낙산 아래는 지기가 끊겨 가난뱅이의 소굴이 되어버렸다는 믿거나
말거나 풍수 담이 전하는데, 동대문 넘어가는 동숭동과 창신동이 그곳입니다. 지금도 동대문과
창신동일대는 벼룩시장이 서고 있는 것은 우연일까요? 비도 오고 녹초가 돼서 패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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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곳 프리마켓에서 좌판을 깔아봤고 밀리터리 숍을 시작하고는 주말이면 청개 천을
나갔습니다. 일명 도깨비 사장이라고 불리는 프리 마켓(Flea Market)은 추억과 함께 착한 소비“
를 지향하는 서민들의 장터입니다. 제가 왕십리에서 30년 이상 살았는데 황학 동 벼룩시장은
원래 전국의 골동품 집산지였다가 1983년 장안 평에 고미술상가가 조성되면서 점포들이 옮겨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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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부터 청계 천 주변 노상에서 동대문 운동장 그리고 이곳 황학 동 중고품 만물상들이 모여들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현대화는 편리함만을 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MB를 통 만들어 준 청계
천이나 ‘역사박물관’이 생긴 뒤로 동대문이 남대문을 능가하는 상권의 메카가 되긴 했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남대문이 1빠 이었습니다. 용산 미군기지가 있는 이태원에서 남대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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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거리가 아닙니까? 각종 골동품, 중고가구, 가전제품 등 세월의 먼지와 때가 묻은 물건부터
소소한 생필품들까지 이곳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만물시장입니다.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보면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옛날 물건에 빠져, 마치 70년대 과거로 타임 슬립한 기분이 들 정도랍니다.
추억의 LP음반부터 개성 있는 인테리어를 위한 엔 틱 소품까지, 탱크 빼고 없는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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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어려우면 미니스커트 길이가 짧아지고 밀리터리를 찾는다는 말은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최근에는 빈티지 패션을 즐기는 젊은이들이나 데이트 나온 연인들의 짧은 스커트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이곳 도깨비 시장이 나는 좋습니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사람냄새가 나는 곳, 물건에 얽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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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만큼이나 다양한 인간군상이 숨 쉬는 곳, 이곳이 바로 벼룩시장입니다. 염색5000원, 컷4000원
아무리 박리다매라도 남을까요? 설마? 박달나무로 만든 돈 궤짝이 5만원이라는데 살까말까?
2019.8.15.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