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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태양계 밖 행성 첫 촬영
태양계 밖 행성이 사상 처음 우주망원경
렌즈에 잡혔다. 또 지구 전체를 다이너마
이트로 덮어 폭발시킨 것과 같은 태양표면
폭발현상도 관측됐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허블우주망원경
을 통해 태양계 외부에 있는 목성 2∼3배
크기의 행성 사진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고 1998년 5월 27일 발표했다.
천문학자들은 수년전 태양계 외부 행성들
의 존재사실을 처음 발견해냈으나, 실제로
그 모양이나 크기를 관측하지는 못했었다.
이번 사진촬영 성공은 허블망원경이 이룩
한 업적 중 가장 위대한 것이며, 천문학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NASA는 1996년 7월 태양의 핵열
폭발로 인한 태양진도 처음 관측됐다고
발표했다.
유럽의 태양-태양권역(SOHO) 우주위성
에 의해 관측된 이 태양진은 분출 에너지
가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 발생한
것의 4만배. 리히터 규모 11.3의 지진이며
전지구 표면에 다이너마이트를 1야드
높이로 덮은 뒤 한꺼번에 폭발시킨 에너지
에 버금가는 것이다.
허블망원경 모습.
▶2015년미국 ‘자수성가형 여성 부자’
14위에 한국계 CEO ‘타이 리’ 선정
▶2015년구자철, 귀국 일정 앞당겨
장애인 선수단과 함께 축구
▶2014년전남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방화
28일 0시 25분쯤 나지막한 야산에 둘러싸인 구릉에 자리한 전남 장성의 효사랑병원(효실천사랑나눔요양병원) 별관 2층 남쪽 끝방 3006호실. 매트리스와 이불, 의료 기기 등 병원 비품을 보관하는 다용도실에서 불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순식간에 유독가스를 뿜으며 복도를 타고 퍼졌다.
불이 나기 직전인 0시 21분쯤 3006호실에는 같은 층 병실 3002호에 입원 중이던 김모(81)씨가 4분여 동안 머물다 나오는 장면이 CCTV에 찍혔다. 이어 화재를 감지해 울리는 비상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비상벨 소리를 들은 본관 당직 간호사는 곧바로 119에 신고했다.
불이 난 별관에서 처음 불을 본 이는 2층 출입구 쪽에 있었던 간호조무사 김모(여·53)씨였다. 김씨는 30여m쯤 떨어진 복도를 따라 불과 연기가 치솟는 남쪽 끝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열자 화마(火魔)는 김모씨에게 몰아쳤다. 김씨는 복도에 쓰러졌고, 결국 숨졌다. 신고를 받고 장성 삼계소방대가 4분 만에 도착했다. 소방대원 2명이 먼저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미 시커먼 연기와 불이 복도를 휘감고 있었다. 건물 밖에서는 소방 호스들이 연기가 나는 2층 건물 내부로 물을 뿜었다.
2층 환자 34명 중 5명은 사실상 거동이 불가능한 와상 환자(누워서 생활해야 하는 환자)였다. 25명은 치매 환자, 나머지는 노인성 질환자로 대부분 자력 탈출이 어려웠다. 이 가운데 7명만 자력으로 2층을 빠져나왔다. 한 소방대원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많아 신속한 대피·구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1층에 있었던 노인 44명은 무사히 대피했다.
초기 불을 진압한 것은 0시 33분. 화재가 발생한 지 8분, 신고가 접수된 지 6분 만이었다. 불을 완전히 진압한 것은 0시 55분. 이 사이 건물 밖 주차장에서는 병원 의료진과 소방대원 등이 급히 옮겨진 노인들을 대상으로 심폐 소생술 등 응급조치를 한 뒤 장성과 인근 광주의 14개 병원으로 옮겼다.
이날 8분이라는 짧은 순간에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은 다량의 유독가스 때문이라고 소방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매트리스 등 침구류가 불에 타면서 발생한 연기는 문이 열린 같은 층 병실 8곳으로 급속히 퍼졌다. 입원 환자 중 상당수는 치매나 노인성 질환 등을 앓고 있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더구나 화재 발생 시각이 모두 잠든 심야여서 초기 대피가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당시 별관 2층에는 간호조무사 1명만 근무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경찰은 밝혔다.
별관 2층에는 출입구가 2개 있었으나 발화 지점 바로 앞 출입구는 이용할 수는 없었고, 사실상 반대편 계단이 유일했다. 2층 외벽 창문에는 방범창이 둘러쳐져 있었다. 소방 관계자는 “2층 방마다 문이 열려 있었고, 어깨 높이의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 개방 상태여서 연기와 유독가스가 급속도로 퍼졌다”고 말했다. 2층 로비와 본관 복도를 연결하는 통로에는 번호키를 눌러야 하는 철문이 설치돼 있었다.
효사랑요양병원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본관과 별관에 병실 53개, 병상 397개를 갖추고 있으며, 내과·정형외과·정신과·한방내과·침구과 등 9개 진료과를 두고 있다. 치매·중풍 등 노인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입원하고 있다.
이사문 효사랑병원 이사장은 이날 “사태를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2007년미국과 이란 27년 만에 공식회담
1980년 이후 전혀 공식 접촉이 없었던 미국과 이란이 27년 만에 처음으로 회담 테이블에서 마주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이후, 양국은 국교가 단절됐다. 주요 의제는 이라크 사태. 그러나 4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양국 회담은 1차 탐색전으로 끝났다고 AP 통신은 보도했다. 하지만,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회담에 앞서, “미국이 이란과 이라크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진전” 이라고 평가했다.
이라크에 주재하는 미국의 라이언 크로커(Crocker) 대사와 이란의 하산 카제미(Kazemi) 대사는 28일 오전 바그다드의 미군 보호지대인 ‘그린존’ 에서 만나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 회담 후 크로커 대사는 “이라크 안정화 문제를 의제로 실무적으로 진행됐으며, 대(對)이라크 정책에 있어서 서로 폭넓은 합의가 있었다” 고 밝혔다.
그러나 회담은 상호 신경전이 계속됐던 것으로 전해졌다. 크로커 대사는 “이란측에 대해 ‘지금까지 해오던 행동을 바꿔 (이라크 내) 시아파 무장저항 단체에 대한 자금·훈련·군수 지원을 중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요구했다” 고 했지만, 이란측은 이 같은 주장 자체를 부인했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또 카제미 이란 대사는 회담 중에 자국과 미국, 이라크로 구성되는 ‘3자 안보 체제’ 구축과 미·이란 간 제2차 회담 제의 의사를 밝혔지만, 미 대사는 “추가 회담 여부는 본국에서 별도의 검토를 거친 뒤에야 결정될 문제” 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회담에 앞서 마누셰르 모타키(Mottaki) 이란 외무장관도 “앞으로 미국과의 추가적인 만남은 미국 정부가 이라크전 등에 대해 ‘실패한’ 정책을 자인하고 난 뒤에라야 가능할 것” 이라고 말했다.
▶2005년17대 최연소 의원인
한나라당 김희정 의원 결혼
▶2004년성원-동아그룹 전 회장 등
26명 공적자금 비리 혐의 기소
▶2003년에베레스트 최단시간 등정기록자
셰르파 ‘락파 겔루’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
▶2000년한국 천문연구원 김승리 박사팀, 국내에선 두번째로 소행성 발견
국내 연구진이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는 새로운 소행성을 발견했다. 한국천문연구원은 2000년 7월 4일 “지구접근천체연구팀 김승리 박사팀이 2000년 5월 28일 밤 9시 20분쯤 경북 영천 보현산천문대에서 반사경 지름 1.8m짜리 반사망원경을 이용, 소행성으로 추정되는 천체를 발견했다” 고 밝혔다.
이번 소행성 발견은 지난 1998년 한국천문연구원이 한국 아마추어 천문학회에 의뢰해서 발견한 ‘소행성 1998 SG5’ 이후 국내에서는 두 번째. 김박사는 이 소행성 발견을 국제 천문연맹에 보고했으며, 임시로 ‘소행성 2000 KJ4’ 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 소행성이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소행성이라는 사실을 공인받기까지는 2~3년간의 검증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만약 ‘소행성 2000 KJ4’ 가 국제천문연맹으로부터 새로운 소행성으로 판정받으면, 발견자인 김박사가 소행성 이름을 지을 권한을 부여받는다. ‘소행성 2000 KJ4’ 는 5년 9개월 주기로 태양을 공전하며, 현재 지구로부터 약 3억6000만km(지구-태양간 거리의 2.4배) 떨어져 있고 크기는 약 4km 정도인 것으로 연구팀은 추정하고 있다.
▶1999년항일학생결사 건아단 활동한
백세기 별세
▶1998년 태양계 밖 행성 첫 촬영
▶1998년파키스탄, 인도 핵 실험에 대응해
5차례의 지하 핵 실험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실험 도미노로 냉전 시대의 핵악몽이 되살아났다. 인도의 핵실험(5월 11일과 13일)에 자극받은 파키스탄이 2주만에 대응 핵실험을 강행, 냉전 이후의 세계 신질서는 커다란 위협에 봉착하게 됐다.
1998년 5월 28일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가 5차례의 핵실험 실시 성공 결과를 발표하는 TV연설을 하고 있다.
나와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1998년 5월 28일 TV로 생중계 된 대 국민 연설을 통해 "5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으며 모두 성공적이었다"고 밝혔다. 파키스탄 정부 관리들은 "핵실험이 이날 오후 3시23분쯤 이슬라마바드 남서쪽 5백km에 있는 차가이 구릉지대에서 실시됐으며, 새로 개발한 장거리 가우리 미사일에 핵탄두를 탑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핵확산금지조약(NPT)과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을 거부해온 이들 양국의 핵실험은 또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등 5대 핵보유국이 주도해온 핵질서를 파괴한 것이며 이스라엘 등 잠재 핵보유국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1995년사할린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 발생
1995년 5월 28일 새벽 1시5분 러시아 사할린 섬 북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이날 사할린 북부를 강타한 지진은 주민들 대부분이 곤히 잠든 새벽 1시5분에 발생해, 주민들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깔려 더욱 큰 인명피해를 낳았다.
유주노사할린스크 구조본부의 한 관계자는 "가장 큰 피해가 난 네프테고르스크의 경우 64 가구가 살고있는 5∼7층짜리 아파트 19개동이 무너졌으나 단 한 명도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끔찍한 상황을 전했다.
러시아 정부는 대규모의 구조대원과 장비를 실은 특별기를 모스크바에서 현지로 급파했다. 또 사고지역에 수용시설을 만들어 피해주민들을 긴급 소개시켰으며 의료진들도 속속 현지에 도착, 구조활동에 들어갔다. 사망자 수는 1천9백89명으로 최종집계됐다.
▶1989년백인철 WBA 슈퍼미들급 세계챔피언 획득
백인철 선수가 1989년 5월 28일 베네수엘라의 플렌시오 오벨메이아스와 WBA 슈퍼미들급 타이틀전에서 12회 KO승으로 이겨 챔피언 벨트를 땄다.
그러나 만 1년이 안 된 이듬해 3월30일 프랑스에서 챔피언 벨트를 풀어놓고 왔다. 이때 그가 받은 대전료 35만 달러는 당시 국내 프로복싱선수가 받은 대전료중 최고액이었다.
그의 프로통산 전적은 50전 47승. 47승 가운데 44번이 KO승이다. 슈퍼미들급으로 국내 프로복싱에서는 최중량급이면서도 주먹의 정확도가 높아 `컴퓨터 복서`로 명성을 날렸다.
▶1989년전교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1989년 5월 28일 연세대 도서관앞에서 결성대회를 갖고 선언문을 통해 "민족-민주-인간화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운동을 더욱 뜨겁게 전개해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결성식 장소였던 한양대와 건국대가 경찰에 의해 봉쇄되자 연세대로 결성식 장소를 변경해야 했다.
오후 1시30분경 몇몇의 젊은 교사들이 학생회관 안쪽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뛰쳐 나왔다. 플래카드를 펼치는 순간 80여명의 교사 등 200여명이 모여들었고, 핸드마이크를 든 윤영규 위원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결성 선언문을 낭독했다. 선언문이 낭독되는데 걸린 시간은 채 10분도 되지 않았다. 결성식 10분, 플래카드 2장, 핸드마이크 하나, 교사와 학생 등 200여명 참석에서 보여주듯 결성식은 초라했다.
전교조는 1987년 9월 창립된 전국교사협의회를 모체로 교육법개정운동을 통해 교육환경개선 및 교직원 처우개선, 교원의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운동을 전개해 오다 임의단체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결성을 결의하게 됐다.
이후 1백여일 동안 1천 5백여명의 교사가 교단에서 축출돼 소강국면에 접어들 때까지 교육계와 사회전체에 일대 회오리를 일으켰다. 결국 전교조는 많은 논란속에 교육현실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올바른 교육을 실현하려는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의 움직임을 통해 `교육민주화`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 1988년 오늘!
궁지에 몰린 노태우 -3김 회담!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야권 3당의 총재들과 회담한다.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 등 이른바 3김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5공화국 비리 규명 방안 등이 집중논의됐다.
야권은 한 달 전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5공 비리를 파헤쳐 단죄하겠다는 공약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성취했다.
13대 국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청문회 증언대에 세우는 데 성공한다.
▶1987년세스나기 탄 서독청년, 소련
방공망 뚫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착륙
독일 경비행기 모스크바 착륙!
정체불명의 경비행기 한 대가 소련의 심장부인 모스크바 붉은 광장으로 날아든다.
19살의 독일 청년 마티아스 루스트 군이 몰고 온 경비행기다.
루스트 군이 핀란드를 이륙해 소련 영공 750km 날아 모스크바에 착륙하기까지 '소련군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기록은
잘못된 표현이고, 알고있었으나 '적절한 대응을 전혀 하지 않았다'가 옳은 표현임.
▶1986년올림픽공원 준공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1985년제8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12년 만에 재개
▶1984년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서울올림픽대회 일자 승인
▶1984년인도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충돌 228명 사망
▶1984년세계물리학자 50명
사하로프 석방 요구
▶1983년국무총리실 종합청사로 이전
▶1983년서방 7개국 정상회담 개막
(윌리암스버그)
▶1982년교황 요한 바오로2세 영국 방문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1982년 5월 28일 로마교황으로선 처음으로 근5세기 만에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과 로마 교황청은 153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의 이혼문제 이후 4백48년 동안 단절상태에 있었다.
교황은 첫째 날 영국 버킹검궁의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을 방문, 영국국교회와 가톨릭교회와의 화해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6일간의 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이튿날 교황은 4백48년 간 분리된 가톨릭과 영국국교회 관계에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게 될 기독교통합을 위한 역사적인 합동예배 참석차, 영국국교회의 본산인 캔터베리대성당을 방문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특별승용차에 로버트 랜시 캔터베리대주교 겸 성공회 수장과 나란히 타고 도착, 수천 군중으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요한 바오로2세는 TV로 영국전역에 중계된 강론을 통해 기독교 통합을 강력히 호소하고 이번 합동예배가 사랑을 통해 열매 맺게 되기를 기도했다. 이번 교황의 영국 방문은 기독교 통합을 위한 양대 교단 지도자들의 열망을 상징적으로 과시한 것이었다.
한편, 1980년 10월 17일.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로마교황청을 방문, 로마교황에게 영국방문을 환영한다는 의사를 전한 바 있다.
▶1981년국풍81 개막
▶1980년이란 혁명헌법에 기초한
새 국민의회 개회
▶1980년장훈 선수,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첫 3000안타 기록
재일교포인 롯데 오리온즈 장훈 선수가 1980년 5월 28일 일본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 6회에 우월 2점 홈런을 쳐 일본 프로야구사상 최초의 3천 안타를 기록했다.
`안타 제조기` `타격의 달인`이라고 불렸던
재일교포 장훈 선수.
1959년 4월11일 첫 안타를 기록한 이래 22년간 2618경기에 출전한 끝에 달성한 대기록이었다. `안타 제조기` `타격의 달인`이라고도 불렸던 장훈선수는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 그해에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1961년 첫 수위타자가 됐다. 그는 현역시절 7번이나 수위타자에 올랐다.
그의 통산 안타기록은 1981년 41세로 은퇴할 때까지 총 3,085개였다.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1960~70년대에 일본사회의 신분상 불이익을 받으면서 끝까지 귀화를 거부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1990년에는 야구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야구전당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미국-소련 평화목적
지하핵실험 제한 조약 조인
▶1973년모자보건법 시행령 공포
▶1972년영국왕 에드워드 8세 사망
`심슨 부인과의 사랑`으로 유명한 영국왕 에드워드 8세가 1972년 5월 28일 파리 근교 뇌유쉬르센에서 76세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8세는 조지 5세의 맏아들이자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다.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 8세가 심슨 부인과의 결혼을 위해 1936년 왕위를 동생 조지 6세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이다.
`세기의 사랑`을 선택한 탓에 에드워드 8세의 재위기간은 고작해야 1년이 채 안된다. 1936년 1월 20일부터 12월 10일까지가 그의 재위기간이다. 독신으로 즉위한 그가 대영제국의 왕위를 포기하고 윈저공으로 돌아간 것은 미국인 이혼녀 심슨과의 결혼을 왕실도, 내각도, 국민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리스 위필드 스펜서 심슨 부인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 듯, 스펜서는 첫 남편의 성이고, 심슨은 두 번째 남편의 성이다. 영국인들은 이혼녀도 윈저공도 환영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심슨 부인이 왕비는커녕 공작 부인이 되는 것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윈저공은 심슨 부인과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에서 결혼해야 했고 그곳에서 죽을때까지 조국을 등진 채 파리에서 살았다. `세기의 사랑`을 추구한 그였지만, 재위 기간중 보인 정치적 식견은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다. 공개적으로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찬사를 보내곤 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8세[ Edward VIII ]
1894. 6. 23 잉글랜드 서리 리치먼드~1972. 5. 28 프랑스 파리.
영국의 왕, 영연방의 수반, 인도의 황제(1936. 1. 20~12. 10 재위).
미국인 월리스 워필드 심프슨과 결혼하기 위해 퇴위했다. 영국 왕 가운데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난 유일한 인물이다.
요크 공작 조지(후에 조지 5세)와 메리 왕자비(후에 메리 왕비)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나 조지가 1910년 5월 6일 즉위한 뒤 웨일스 공(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907~11년 영국 해군에서 훈련받았으나 1914년 8월 6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속되었고 참모장교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20년대 초에는 대영제국의 친선 도모를 위해 두루 여행을 다녔다. 1928년 아버지 조지 5세가 병에 걸린 뒤부터 점차 국사(國事)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2년 실업률이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영국 전역의 임금노동자 클럽을 방문했고 20만 명이 넘는 남자와 여자를 대상으로 실업자 구제 계획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인기는 할아버지 에드워드 7세가 웨일스 공이었을 때 누렸던 인기에 견줄 만큼 높았다.
1930년 조지 5세는 그에게 서닝데일 근처에 있는 왕실 소유의 18세기 저택인 벨비디어 요새를 주었다. 그가 늘 '요새'라고 불렀던 이곳에서 사생활을 누리면서 전적으로 자신의 집이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정원과 산림지에서 열심히 일했고 1930년대에는 원예학, 특히 장미 재배 분야에서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곧 이 요새를 자신이 싫어하게 된 공직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로 생각했다. 또한 이곳에서 개인적인 사교모임을 만들었는데 이 모임에는 통상적 의미의 귀족이라기보다는 그당시 '상류사회' 사람들이 참석했다.
1930년부터 심프슨 부인(→ 윈저 공작부인)과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심프슨 부인은 1927년 미국 해군 대위와 이혼하고 1928년 어니스트 심프슨과 재혼한 상태였다. 심프슨 부부는 개인 사교모임의 일원으로 에드워드와 자주 만났고, 1934년에 에드워드는 심프슨 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가 아버지와 이 문제를 의논해보기도 전인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죽자 그는 왕위에 올랐다.
왕으로서 에드워드 8세는 왕가의 영지에 과감한 경제조치를 취했다. 그해 11월에 의회를 열었고 그뒤 사우스웨일스의 낙후된 지역을 시찰했다. 이 사이 그는 왕가가 심프슨 부인(그녀는 1936년 10월 27일 예비 이혼판결을 받았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가 수장으로 있는 영국국교회와 영국 및 영연방의 확고한 반대에 부딪혔다(그의 유일한 지지자는 당시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윈스턴 처칠이었음). 미국과 유럽 대륙의 신문 잡지들은 심프슨 부인과의 연애사건을 앞다투어 보도했지만 영국 내의 언론은 영국 정부의 설득과 압력 때문에 그가 왕위에서 물러나기 직전까지 조용한 편이었다. 스탠리 볼드윈 총리는 에드워드 8세에게 이혼녀와의 개인적 친분관계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에드워드는 귀천상혼(貴賤相婚) 형식의 결혼을 논의해보려 했으나 12월 2일 볼드윈은 왕에게 이 일이 실행 불가능함을 분명히 했다. 다소 성급하고 강압적으로 언론과 의회에서 모든 문제가 폭로되었던 운명의 날인 12월 3일이 다가왔다. 이튿날 신문에 처음으로 '퇴위'라는 말이 나왔다. 왕은 최종결정을 내렸고 1936년 12월 10일 퇴위 의사를 밝혔다("나 에드워드는 나 자신과 내 후손의 왕위를 포기한다는 취소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음을 선언한다"). 의회는 12월 11일 퇴위 선언 문서를 확인했고 그날 저녁 에드워드는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나는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지 없이는 왕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고 그 무거운 책임을 짊어질 수도 없음을 알았다." 그날밤 그는 유럽 대륙으로 떠나 오스트리아에서 친구들과 함께 몇 개월을 살았고 심프슨 부인이 최종 이혼판결을 받을 때까지 그녀와는 조심스럽게 떨어져 있었다. 1937년 6월 3일 에드워드는 프랑스 샤토드캉데에서 영국국교회 신부의 주례로 심프슨 부인과 결혼했다. 새 왕이 된 조지 6세는 형인 에드워드에게 1936년 12월 12일 윈저 공작작위를 내렸으나 1937년 내각의 충고를 받아들여 새 윈저 공작부인이 남편이 누리는 '전하'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거부했다. 이 결정으로 에드워드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뒤 2년 동안 윈저 공작 부부는 주로 프랑스에 살면서 독일(1937. 10)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를 방문했다. 독일에서 윈저 공작은 나치 관료들의 환대를 받았고 아돌프 히틀러와 면담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공작과 왕가의 불화는 해결되지 못했고 런던을 방문한 뒤 그는 프랑스 담당 연락장교직을 수락했다. 프랑스가 함락되자 마드리드로 갔는데 나치 독일은 에드워드를 왕위에 복위시키고, 그를 이용해 기존 영국 정부에 대항한다는 가상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가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윈스턴 처칠 총리는 그에게 서인도제도에 있는 영국 식민지인 바하마의 총독직을 제공했고 그는 1940~45년 전쟁 동안 이곳에 머물렀다. 1945년 이후에는 파리에서 살았다. 동생 조지 6세의 장례식(1952)과 어머니 메리 왕비의 장례식(1953)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동안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으나 그와 그의 부인이 왕가 일원들과 함께 공식 의식에 참가하도록 처음으로 초대받은 것은 1967년 말버러 하우스에 있는 메리 왕비의 현판 제막식 때였다. 윈저 공작은 부인과 함께 윈저 성 부지 내 프로그모어에 나란히 묻혔다.
▶ 1967년 오늘,
세계 일주 단독 항해성공
영국의 항해모험가 프란시스 치체스터(Francis Chichester)가 탄 작은 요트가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낸다.
예순다섯 살의 모험가가 단독 세계일주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영국 플리머스 항으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바다에 떠있던 배 천여 척에서 세찬 고동소리를 토해내고 항구에 모여든 30만여 명의 영국 국민들이 다 같이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낸다.
그는 9개월 전인 1966년 8월 27일 길이가 15m밖에 되지 않는 '집시 모드 4호'를 타고 영국을 떠났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거쳐 남아메리카를 돌아 대서양을 거슬러 오는 4만5천km의 뱃길을 226일 만에 완주했다.
치체스터는 이 세계일주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1964년아랍 게릴라 조직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창설
이스라엘 건국(1948년 5월)은 중동지역 새로운 화약고의 탄생이었다. 그곳에서 쫓겨난 200여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금방이라도 불붙을 도화선이었다. 아랍인들은 1300여년간 거주해 온 그들의 땅에 이민족, 이종교 국가가 들어섰으니 심기가 편치 않았을 테고, 기원전 15세기에 세워진 자기들 왕국에서 로마군에 쫓겨 유랑하다 2000여년 만에 ‘약속의 땅’으로 되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다.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충돌이 불가피했다. 건국과 함께 포성이 울렸지만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0%를 차지하는 전과를 올렸다. 8년 뒤 다시 격돌했지만 또 이스라엘의 승리였다. 정규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랍인들은 새로운 투쟁 방식을 선택했다. 테러였다.
1964년 5월 28일, 개별로 활동하던 게릴라 조직들이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됐다. 결성은 이스라엘을 불구대천의 적으로 삼고 있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주도했다. 1969년 2월, 아라파트가 PLO의 새 의장으로 선출됐고, PLO는 아라파트의 또 다른 이름이 됐다.
▶1962년미국 주식시장 1929년 이래
주가 대폭락
▶1961년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요강 발표
▶1959년미국,
원숭이를 태운 우주비행에 성공
미국의 주피터 로케트에 실려 580km의 고도까지 올라갔던 원숭이 두 마리가 1959년 5월 28일 장장 1,930km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대서양에서 살아있는 채로 구조됐다.
원숭이를 이용한 우주비행실험은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위한 前단계로 약2년동안 준비됐다. 이 계획을 위해 7명의 후보자가 국립항공우주국(NASA)에 의해 선발됐다. 비행에는 `에이블`이란 이름의 몸무게 7파운드의 벵갈 원숭이와 1파운드의 다람쥐 원숭이 `베이커`가 참여했다. 둘은 우주비행이 생물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자료 수집을 위한 각종 기기와 전선을 몸에 감고 있었다.
에이블은 최대 속도 16,000km까지의 가속이 기본 임무수행에 영향을 주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빨간 불이 켜질 경우 전신기의 키를 누르도록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에이블은 귀환 후 6월 2일 숨졌다.
소련도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를 `스푸트니크 2호`에 실어 궤도로 쏘아 올렸으나 죽어서 지구로 귀환한 바 있다.
▶1957년미국 네바다서 수소폭탄 실험
▶1949년임영신 상공장관
독직사건으로 기소
▶1949년미국 군사고문단 이외의
주한미군 철수발표
1949년 5월 28일 미국무성이 주한 미군가운데 군사고문단을 제외한 미군을 6월말까지 모두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철수발표는 유엔총회 결의(47.11.14)와 소련군의 북한철수 발표(48.12.26)에 따른 조치였지만 실제는 미국의 對극동정책의 일환에 따라 결정된 일이었다.
미국은 이듬해 1월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이른바 `애치슨선언`을 발표해 정책변화를 기정사실화했고, 4월에 체결된 태평양조약에서도 "아시아 대륙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관여를 배제할 것"이라는 항목을 삽입해 이를 뒷받침했다.
▶1946년미국의 정치가 카터 글래스 사망
▶1940년벨기에 독일에 항복
▶1937년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 사망
▶1931년기구 탐험가 오귀스트 피카르,
기구를 타고 16,940m 상공에 도착
▶1929년미국 영화사상 최초 총천연색
토키영화 `언 위즈 더 쇼`가 뉴욕서 개봉
▶1917년작곡가 김순남 출생
▶1909년미국 연합주 회의
흑인차별대우 철폐를 결정
▶1908년007 제임스 본드를 탄생시킨
영국의 스릴러물 소설가 이언 플레밍 출생
007 원더랜드의 아버지, 이언 플레밍
어려서 ‘제임스 본드’처럼 멋진 스파이가 되길 꿈꿨더라도, 어른이 된 뒤 현실의 쓴맛을 배운 뒤엔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 대체 누구인지를 더 궁금해하는 모양이다. 정말 그런 삶이 가능할까? 007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Ian Fleming, 1908~1964)에 대한 잘못된 정보도 이런 요구에 부응해 만들어진다. 이언 플레밍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한 가짜 정보부터 생선뼈 발라내듯 골라낼 필요가 있다.
이언 플레밍이 첩보원 17F?
이언 플레밍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7F라는 암호명을 가진 첩보원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2007년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국내의 한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뒤 인터넷에 널리 유포된 이야기인데, 대략 이런 줄거리다. 영국 정보국 소속 이언 플레밍 요원은 독창적인 상상력의 소유자로, 기상천외한 방법을 고안해 작전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나치 독일의 서열 3위였던 루돌프 헤스를 영국으로 망명시켜 히틀러 정권을 혼란에 빠뜨리는 작전이었다. 어느 모로나 불가능한 작전이었지만, 17F는 루돌프 헤스가 미신에 광적으로 집착해서 정기적으로 점술가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이용했다. 헤스의 단골 점술가를 매수한 뒤, 그가 영국으로 가야만 한다는 점괘를 제시하게 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후 17F는 여러 첩보 작전의 배후에서 천재적인 지략을 발휘했다고 한다. ‘제임스 본드=이언 플레밍’ 공식을 신봉하는 독자라면 물개 박수라도 치며 좋아할 내용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건 사실이 아니다.
이언 플레밍이 17F였다는 루머는 도날드 맥코믹(Donald McCormick, 1911~1998)이 1994년에 발표한 [17F: The Life of Ian Fleming]라는 책에서 시작된다. 도날드 맥코믹은 러시아, 중국, 일본, 영국, 이스라엘의 첩보 조직에 관한 이십여 편이 넘는 대중 역사서를 펴냈지만, 비공식적인 구술 정보에 과도하게 의지해 신뢰성을 판단하기 어려운 주장을 마구 남발하는 작가였다. 어쨌거나 발표하는 책마다 스캔들을 일으키며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덴 성공했을지 모르나, 사기꾼(Hoax)이라는 악평 역시 상당했던 작가였다. 맥코믹의 이언 플레밍에 대한 책은 그 중에서도 최악의 사례에 속한다. 이언 플레밍이 17F였다는 주장만 하더라도 이언 플레밍 자신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글로 남긴 일이 없다. 17F설에 대해 맥코닉이 내세우는 핵심 근거는 이언 플레밍의 형이자 모험가이며 저명한 작가였던 피터 플레밍(Peter Fleming, 1907~1971)의 증언이지만, 이 또한 구체적인 전후 관계가 교묘하게 뒤틀리고 잘려나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점성술사의 점괘를 이용해서 루돌프 헤스를 망명시켰다는 이야기는 오스틴 파워에나 어울릴 난센스 그 자체다. 안 그래도 헤스의 망명과 자살에 얽힌 이야기에는 온갖 음모론이 난무한다. 루머가 또 다른 루머의 근거가 되며 꼬리에 꼬리를 문다. 불분명한 정보를 과장하고 아전인수 격으로 맥락을 짜 맞춘 맥코믹의 책이 인터넷에선 무조건적인 사실로 수용되고 무차별적으로 정보가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루머의 원출처는 지워진 채, 한국에까지 이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우스꽝스럽게도, 국내의 어떤 필자가 쓴 자기계발서에는 이언 플레밍이 17F였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양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티브한 인재의 비범함을 설명하는 모범 사례로 소개되어 있었다.
이언 플레밍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17F라는 암호명을 가진 첩보원이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진위 여부를 공박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온갖 과장과 상상을 통해 더욱 즐겁게 소비되고 있는 것이 007 시리즈를 둘러싼 대중문화의 양상이다. 그러니 원작자인 이언 플레밍조차 007 시리즈의 대중적 수용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픽션이 된다 해도, 이런 유의 메타 소비 또한 이 시리즈 특유의 활력임을 부정할 순 없겠다.
'골든 아이'에서 총 14권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집필
이언 플레밍 자신이 직접 설명한 바 있으며, 007 팬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제임스 본드의 모델은 패트릭 댈즐-조브(Patrick Dalzel-Job, 1913~2003) 소령과 피터 스미더스(Peter Smithers, 1913~2006) 소령이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정보부 소속 중령이었던 이언 플레밍의 휘하에 있던 요원들이었다.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는 영국 해외정보부(MI6) 소속 예비역 해군 중령으로 설정되어 있다. 전역한 해군 중령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설정은 이언 플레밍의 유일한 동화 [치티치티 뱅뱅(ChittyChitty Bang Bang)]에도 등장한다. 괴짜 탐험가이자 발명가이며 놀라운 능력을 지닌 자동차를 만든 포트씨 역시 예비역 해군 중령이다.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은 [Field Guide of Birds of the West Indies](1936)라는 책을 집필한 조류학자의 이름이었다. 이언 플레밍이 자메이카에서 007을 구상하던 시기, 가까이 두고 즐겨 읽었던 책이었다. 참고로 이 책은 제임스 본드 팬들에겐 매우 유명한 수집 품목 가운데 하나다.
패트릭 댈즐-조브는 퇴역한 뒤, 평범한 교사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상부에 반항하는 기질이나 탁월한 첩보술, 스포츠 실력(스키, 사격, 강하)이나 기계에 능숙한 점(소형 잠수함도 몰았다고 함) 등은 007과 똑같으나, 바람둥이 기질은 전혀 없었다. 피터 스미더스 경은 퇴역한 후에는 정계에 입문하여 EC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은퇴 후에는 어릴 적 꿈이었던 정원사가 되어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원을 꾸몄다고 한다. 그가 꾸민 정원 중 스위스의 비코 모르코테(Vico-Morcote) 정원은 로마 시대 이후 500대 정원 안에 든다고 한다.
이언 플레밍이 17F였다는 루머의 출처인 도날드 맥코믹(Donald McCormick)의 [17F: The Life of Ian Fleming](1994)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은 [Field Guide of Birds of the West Indies](1936)라는 책을 집필한 조류학자의 이름이었다. 이언 플레밍이 자메이카에서 007을 구상하던 시기, 가까이 두고 즐겨 읽었던 책이다.
패트릭 댈즐-조브와 피터 스미더스와 달리 이언 플레밍은 현장에서 작전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1908년 5월 28일 런던에서 태어나 이튼칼리지에서 교육받았고, 독일 뮌헨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로이터 통신사에서 신문 기자로 경력을 쌓았고, 은행에서 증권 중개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해군정보부에서 첩보 분석가로 근무했다. 이 일은 육체적인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이언 플레밍은 스파이가 아니었다. 제임스 본드에게 007이라는 번호가 붙게 된 경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책상물림 보직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그가 처리하는 문서 앞에는 항상 접수번호가 붙었는데, 그 번호가 바로 00이었다. 007의 7은 여왕과의 사적인 소통을 위한 일종의 암호였다고 한다. 그 유례는 무려 엘리자베스 1세의 첩자였던 존 디(John Dee) 박사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기간 내내 지겹도록 보던 숫자가 끝내 소설 속 주인공의 비밀 코드가 된 것이다. 소설에서 코드네임 00은 작전 중 사람을 죽여도 기소되지 않는 초법적인 면제 특권으로 설정되어 있다.
전쟁이 끝난 뒤, 퇴역한 플레밍은 <선데이 타임스>를 발행하는 <켐슬리> 신문사의 외신부장으로 일했다. 그의 사생활과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결혼’이다. 플레밍은 앤 로더미어(Ann Rothermere)라는 상류층 귀부인을 유혹해 결혼에 성공한다. 당시 그녀는 유부녀였고, 플레밍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서 전 남편과 이혼했다. 플레밍은 1954년에 첫 번째 소설 [카지노 로얄(Casino Royal)]을 4주 만에 탈고한다. 제임스 본드가 살인면허를 받기 전의 활약을 담은 작품이다. 이 책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이언 플레밍은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
[카지노 로얄]의 성공 덕분에, 이언 플레밍은 1959년부터 신문사를 사직하고 카리브 해 자메이카의 별장 ‘골든 아이’에 살면서 소설 집필에 몰두했다. 이언 플레밍은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을 즐기고 나서, 오전 3시간 그리고 오후 1시간 동안 6개의 손가락만으로 타자해서 소설을 썼는데, 하루에 2,000단어씩, 두 달에 한 권의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 결과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1년에 1권 꼴로 출간되면서 전 14권(단편집 2권, 장편소설 12권)에 이르게 되지만, 하루에 80개비의 담배를 피우고 끊임없이 술을 마시며 글을 쓰는 바람에 이언 플레밍은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64년 8월 12일 이른 아침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죽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제임스 본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구급차 운전사에게 아침부터 폐를 끼친 걸 무척 미안해했다고 한다.
“폐를 끼쳐 미안해요. 요즘 교통 상황에 빨리 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I am sorry to trouble you chaps. I don't know how you get along so fast with the traffic on the roads these days.)”
1960년대 냉전 시대의 신드롬 007
숀 코너리와 함께 있는 이언 플레밍. 그는 제임스 본드 역할을 숀 코너리보다 로저 무어가 맡길 바랐다고 한다.
추리소설사에서 이언 플레밍은 고전 추리소설의 시대를 지나 첩보 소설의 시대를 열어젖힌 작가로 평가된다. 첩보 소설은 이전 시대의 ‘수수께끼 소설’과 ‘하드보일드 소설’의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다. [카지노 로얄]을 발표하던 시점까지만 해도 이언 플레밍은 자신의 작품을 고전적인 영웅담의 전형이자 ‘하드보일드 액션 활극’쯤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카지노 로얄]의 대중적 성공을 지켜보면서, 이 열광이 냉전 시대의 신드롬임을 간파했다. 그는 시대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007 시리즈의 콘셉트를 분명히 했다.
어떤 의미에서 007의 전 세계적 인기는 이언 플레밍만이 아니라 냉전 시대의 두 축이었던 소련과 미국 양대 강국의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전이 국제적이었듯이 스파이를 영웅시하는 1960년대의 대중문화도 국제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소련에서도 붉은 007 소설이 나왔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에선 제임스 본드가 악당으로 나오고, 그의 상대역으로 소련 영웅 ‘아바쿰 자코프’가 활약한다. 소련에서는 제임스 본드를 맹목적인 살인자이며 서방 측 폭력의 상징이고 부르주아적 생활 방식의 화신으로 간주했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는 제임스 본드를 나치 전범의 후계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러시아인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이자 악당으로 등장하는 007 시리즈에 대한 당연한 반감이었다. 소련판 붉은 007 역시 썩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 이 소설은 시인 예프게니 예프트셍코를 비롯해 소련 문단의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 영웅으로 나오든 007의 인기에 기댄 모방작에 불과하다는 이유였다. 007 시리즈를 강대국의 심리전 무기로 간주하는 국가도 있었다. 1967년 인도네시아에서는 제임스 본드가 주인공인 007 영화뿐만 아니라, 그 아류작을 비롯해 모든 스파이 영화를 금지했다.
그에 비해 1960년대 한국에서 007 시리즈의 인기는 열광 그 자체였다. 1965년에 007 시리즈 전편이 전집 발행됐고 절찬리에 팔려나갔다. 007 시리즈는 극장에 걸릴 때마다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007 시리즈는 방첩물이자 반공물의 일종이었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냉전 시대의 최전선 한국이야말로 007 신드롬이 가장 뜨겁게 달아오를 수 있는 흥행장이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회였다. 김신조가 내려오고 실미도 특공대가 올라가는 한국에서 제임스 본드의 세련된 미소는 현실 도피의 창이자 현실 회귀의 배수구였다. 참고로 007 시리즈 중에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기록된 부분이 있다. [골드 핑거]의 한 대목이다. 악당 골드 핑거의 비정한 하수인 오드잡이 한국인이다.
“만약 살인자가 필요하면 틀림없이 한국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네.”
움베르토 에코는 007 시리즈가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적 편견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언 플레밍은 007 시리즈에 영국 백인 상류층 남성의 판타지를 철저히 반영했는데, 이런 환상의 기제를 구성하는 데 인종주의와 남성우월주의는 붕어빵의 팥소와도 같은 것이었다. 007의 세계에선 누구나 텍스트 내 행동 방식의 대표적인 특성 한 가지를 이름으로 부여받고 전형적으로 행동하는데, 이를테면 골드 핑거의 여비서이며 개인 비행기 조종사의 이름은 발정 난 암고양이를 뜻하는 ‘퍼시(pussy)’다. 이름만 들어도 제임스 본드와 퍼시의 관계가 어떻게 풀리게 될지 짐작이 되지 않은가.
냉전 시대의 종말과 함께 첩보 소설의 시대도 끝나게 된다. 007 시리즈를 리부트하기 위해 여전히 많은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1960년대와 같은 신드롬을 부활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007 시리즈는 원작 소설과 영화에서부터 도날드 맥코믹 식의 루머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방식의 메타 소비의 여지를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는 콘텐츠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와 영화 제작자의 007보다는, 007 시리즈의 다채로운 디테일을 발견하고 새로운 상상력의 파선을 덧붙여 즐기는 독자들의 007을 통해 이언 플레밍 이후의 007의 행로를 기대해보고 싶다.
이언 플레밍의 작품 리스트
1.no.발표연도제목
2.1 1953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
3.2 1954 죽느냐 사느냐 (Live and Let Die)
4.3 1955 문레이커 (Moonraker)
5.4 1956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Diamonds Are Forever)
6.5 195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
7.6 1958 살인번호 (Dr. No)
8.7 1959 골드핑거 (Goldfinger)
9.8 1960 유어 아이즈 온리 (For your Eyes Only)
10.9 1961 썬더 볼 작전 (Thunderball)
11.10 1962 나를 사랑한 스파이 (The Spy Who Loved Me)
12.11 1963 여왕 폐하 대작전 (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13.12 1964 두 번 산다 (You Only Live Twice)
14.13 1965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The Man with the Golden Gun)
15.14 1966 옥토퍼시와 리빙 데이라이트 (Octopussy and The Living Daylights)
▶1905년경부선 철도 개통식
서울을 기점으로 대전·대구·부산을 연결하며 남한을 종단, 관통하는 복선철도인 경부선 개통식이 1905년 5월 28일에 치러졌다.
경부선 철도 개통식
총연장 444.5㎞. 일본은 한국 침략정책 수행의 구체적 발판으로써 5년에 걸친 경부선 부설권 획득공작을 벌여, 1898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을 방문,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면서 성취됐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1901년(고종 38) 영등포와 부산 초량에서 각각 기공식을 거행해 1904년에 완공, 1905년 5월 28일에는 전선(全線)에 걸친 영업이 개시되었다.
▶1901년천주교인·제주도민 ‘충돌’,
신축교난(이재수의 난) 발생
격동의 개항기, 천주교는 정부의 묵인하에 `박해시대`를 마감하고 신앙의 꽃을 피운다. 1886년 체결된 조·불 수호통상조약은 `묵인`을 `공인`으로 발전시켰고, 이 덕분에 천주교는 양지로 올라서게 된다. 대신 토착민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1895년부터 10여년간 전국에서 300여건의 교안(敎案·종교적 충돌)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중 가장 큰 교안이 19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신축교난(辛丑敎難), 세칭 `이재수의 난`이다.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토착문화에 대한 선교사들의 몰이해와 공격적인 선교 방식, 천주교인을 이용한 세금징수관의 과중한 세금부과, 제주도민의 반감을 천주교측으로 돌리려 한 일본인 수산업자의 농간 등 경제적ㆍ문화적 요인들이 중층으로 작용했다. 천주교가 특권세력으로 비치다 보니 그에 편승해 이권을 챙기려는 일부 신도들의 과도한 행동도 상황을 악화시켰다. 도민들은 천주교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이재수를 앞세운 도민들이 제주성을 공격해 들어가자 천주교인들은 제주성을 폐쇄하며 맞섰지만 결국 5월 28일 제주성은 함락됐고 300명(혹은 700명)의 교인들은 잔인한 죽음을 맞았다. 프랑스 함대까지 동원됐지만 봉기는 이미 진압된 뒤였다. 이재수 등은 서울로 압송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천주교측은 이 사건을 신축교난 혹은 신축교안이라 부르고, 주민들은 언제부턴가 ‘이재수의 난’으로 불렀다.
박광수 감독의 영화
`이재수의 난`의 한 장면.
https://youtu.be/cAgPtnlRhaI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