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보면 발해 문왕때하면 발해의 국력이 급속하게 팽창하여 당과 대등한 면모를 발해 스스로 자축할 정도로 압니다.
그런데 보면.. 그런 발해시대의 문왕때 일본과의 외교문서에서의 천손언급에서의 문제를 일본이 제기합니다. 발해고를 보면.. 일본이 아량을 베풀어서 이런 짓을 감히하는것을 용서한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사신은 엎드려 울면서 사죄하죠..
그런데.. 당시 세계최강국으로 다시 부흥한..당과 대등한 입장을 보았던 발해입장에서 일본이라는 존재와의 국력차이는 일본이 강했다라고 위세부릴 상황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8세기에 물론 일본인들 스스로 덴노에 대한 신성화라든지 일본인의 정체성을 갖으면서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했다는둥 하는.. 소리를 들었다는 걸로 아는데요.
발해입장상 고구려의 후예를 분명하게 자처했고 천손의 후예를 강조했다는 점을 볼때 이런 일본의 외교적 무례는 발해입장에서 그대로 두었다는게 개인적으로 의문입니다. 물론 발해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국가자존심 문제에서 내부분열이 일어났기보다는 오히려 단결을 할수 있는 원동력이 될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더욱이 외교적인 문제는 당시 왕인 문왕의 국제적인 위상 문제와 더불어서 내부적인 왕에 대한 신성적 문제와도 연계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천손의 후예를 자처한 것에 대해서 일본이 건방진 태도를 취한 것에 대해서 발해는 분명하게 외교적인 항의를 하고 필요하다면 군사적 대응까지 했어야 정상이었다 봅니다. 이유는 문왕입장에서는 왕권강화를 더 강력하게 가려면 분명하게 전쟁이라는 수단을 이용할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유럽의 경우 봉건제도를 제일먼저 박살낸 프랑스의 경우 왕들이 왕권강화를 위해서 전쟁을 벌였다는 점에서 문왕역시 당과 신라와의 국경안정이 되었다면 오히려 일본에 대한 군사적인 공격을 수행했어야 맞다 봅니다.
그럼으로서 왕권강화와 동시에 일본에게 외교적인 우월을 강조/ 천손의 후예에 대한 명확한 명시를 규정할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왕때에도.. 그이후 4대인 폐왕때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장문휴로 하여금 산둥을 공격하게하고 당과 전면전도 불사하던 발해가 일본에게 그것도 외교적인 우월입장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듭니다.
대국입장에서 사신이 울면서 엎드려 사죄할정도의 문제는 국가위신상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발해고를 보면 왜왕이 발해국왕이 참호(신분에 넘치는 자칭 칭호)라고 천손을 언급한 것에대해서 문제를 삼고 신하의 품계등을 쓰지 않았다하여 예물을 받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발해입장에서는 당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변방의 소국으로 치부될수있는 일본이 그런 점은 안정화된 상태에서의 군사동원에 의한 보복문제를 거론할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정작 현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어떤 사료나 증거로서 나오지 않습니다. 발해고에서 이 문제는 제가 갖고 있는 것에서는 -일만복-이라는 신하소개에서만 나오는 일이라서..
왜 발해는 당시 안정화되고 전승기때중 하나일때 일본조차 우월적 입장에서 굴복시키지 못한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일본의 신라침공까지 민족문제에서 막았다고 생각할때 오히려 이문제는 신라와 더불어서 연합전선을 펼칠수 있고 혹은 현 문제를 두고 지속적인 군사적 압박이라든지 외교적 압박이라든지를 강요해보일수 있는 것 같은데.. 안한 점이 의문이 갑니다.
첫댓글 일본의 자국중심적 기록에 대하여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일본서기를 보아도 천황중심의 화이론적인 망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발해-일본간에 외교관련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양상이였을 것입니다. 예전에 "발해사의 종합적 고찰"이라는 책에 수록된 논문에는 오히려 일본이 발해에 조공국이였음을 조목조목 사료에 근거하여 들고 있더군요. 발해가 일본에 저자세를 취할 이유가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군사가 열세한가요? 문화수준이 낮은가요? 아니면 역사적 전통이 취약한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일본의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군사적 활동을 일본에 벌이지 못한점이 개인적으로 현재까지 이상하게 봅니다. 고구려같으면 당장 군사적 활동으로 최소한 보복이라도 했었어야 맞은데 말이죠.
일본의 속일본기등에 나오는 위의 기록등은 과장된 수사법으로 신빙성은 없으나 뭔가 의미있는 사건이 있었다면 이런 이유가 있었을것으로 추정해볼수 있습니다. 발해에게 일본은 남쪽으로는 당과 동맹을 맺은 신라를 견제할 대상으로 일본이 필요하였다는 사실과 두번째로 무역으로 실리를 추구할지역에 속해 있데비해 일본은 그런것보다는 자국의 느슨한 중앙집권적 통치방식을 천황중심으로 유지해가는 상황이었으므로 천황 우위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고 발해는 일종의 달래기 전법으로 일본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같은 기록이 일인에의해 과장되게남게된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합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입니
당시의 동북아 정세를 위주로 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천손문제가 거론될 당시 당과 신라는 관계복원이 이루어진 시점이었죠.그런 상황에서 일본과의 마찰을 떠 안을 경우 외교적 고립을 감수해야 합니다..당과 관계가 좋아진 신라에게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서 손을 내민다는건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죠...신라와 당의 관계가 안 좋았을때 일본은 신라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고 신라입장에서는 안 들어줄수 없어 들어주었죠..일본은 그런 점을 발해에게 되풀이 했다고 보여집니다..발해의 천손사상을 인정할경우 일본은 주변국의 입장에 놓이게 될수도 있죠..
그와 동시에 발해와 당 발해와 신라의 관계 복원도 고려할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똑같이 복원되는 상황에서 비추어보고 또한 신라와 일본간의 관계가 악화되는 시점들로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 천손사상문제의 외교문서 명기는 분명하게 발해의 위신적 측면에서의 군사적 행동까지 고려하여 왕권강화까지 고려할 문제라 봅니다. 신라와의 연계를 통한 연합전선 구축이라든지 말이죠.
발해와 당, 신라와의 관계복원은 동맹이라기 보다는 휴전의 개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데요..또한 황해와 동해는 그당시의 해양기술로 봤을때는 너무나 다릅니다..
하지만 발해인들이 스스로 동해를 건넜다는 이야기는 대규모 선단이라든지 해상길을 이용해서 무역을 했다는 점을 고려 또한 고구려때 동해역시 내해로 취급받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원정자체는 어려운 일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신당서에 나와있는 일본도..그리 순탄한 길이 아닙니다...또한 속일본기에는 발해와 일본사이를 왕래하는 어려움이 여러차례 나옵니다..
예 발해고에서도 볼수 있었습니다.
저는 발해고의 기록을 근거로 했습니다.
발해가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에 저자세를 취했다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고요. 문왕이 천손을 자임하고 일본에 대해서 장인과 사위 관계를 운운한 것을 일본측이 반발했다는 기사들은 후대 사가들의 곡필인듯 싶은데...
문왕때라면 오히려 발해가 외교적 고립보다는 외교적인 안정을 취했다고 볼수 있는게 아닐까 합니다. 당과도 화친하고 신라와도 화친한 것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