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그랬어
마치 저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친근했습니다. 책이 아니라 사진을 보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특히 첫 장에서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고 있는 강아지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어린 시절 저와 함께 뒹굴던 그 녀석과 똑같았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멍청한 듯,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는 모습은 바로 강아지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해석이 들어가지 않은 강아지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책 전체가 그랬습니다. 굳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이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삶의 한 부분을 떼어다 놓은 것 같은 현실적인 그림과 글이 어떤 현학적인 해석보다 더 진실했습니다.
맨 첫 장에서 호박 잎이 무성한 돌이네 집이 보입니다. 마당으로 들어가면 돌이가 나무 그늘 밑에서 손이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돌이의 뒷모습이 참 심심해 보입니다. 복실이도 심심한지 그냥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기대가 되었습니다.
심심한 돌이가 함께 놀자고 풀어준 동물들은 신이 나서 뛰어나옵니다. 그림 속 동물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서 저도 신이 났습니다. 특히 염소의 오묘한 눈빛과 독특한 털의 느낌이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항상 나를 주춤하게 했던 그 눈빛 그대로였습니다. 염소가 호박 잎을 뜯어 먹으며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에서는 저도 모르게 움찔 할 정도였습니다.
반면 앞 부분에 있는 돼지의 모습이 약간 아쉬웠습니다. 실제와 똑같을 필요는 없지만, 돼지의 모습에서 만화적인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림을 그리신 분이 혹시 돼지를 실제로 보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습니다. 그러나 뒤에 나오는 감자 파먹는 돼지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악스럽게 감자를 파 먹는 돼지의 표정과 몸짓이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돌이의 마음도 모르고 감자 먹는 데만 정신 팔린 돼지가 얄미워서, 제가 내쫓아 주고 싶을 만큼 생동감 있었습니다.
모든 그림마다 동물들의 자유로운 모습이 보여서 신이 났습니다. 자유롭다는 말도 인간의 인위적인 해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동물 그대로의 습성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호박이며, 배추, 오이 등 갖가지 채소들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서 실제로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동물들이 밭을 헤집고 다닐 때마다 돌이와 복실이는 그림의 구석에만 보입니다. “안 돼. 안 돼.” 라고 말은 하지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돌이와, 캉캉거리며 뛰어다니지만 별 소용없어 보이는 복실이의 모습이, 펄펄 나는 동물들과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돌이와 복실이의 마음이 느껴져서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합니다.
한 바탕 소동을 치른 돌이는 걱정이 되지만 곧 잠이 듭니다. 미워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엄마랑 아빠가 밭에서 돌아오고 돌이는 엄마에게 매달립니다. 혼이 났지만 돌이는 괜찮습니다. “심심해서 그랬어” 라고 말하면, 엄마는 돌이의 엉덩이를 몇 번 두들겨주고 다시 꼭 안아줄 것을 돌이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돌이에게 미안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돌이를 골탕 먹이려고 밭을 헤집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줄을 풀어주고, 우리 밖으로 내보내주니까 원래 자기네들의 모습대로 뛰어다닌 것뿐입니다. 돌이는 동물들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치뤘지만 그것을 모르는 동물들은 마냥 돌이가 반갑기만 합니다.
책장을 덮으면서 돌이네 집에서 함께 놀다가 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책을 펼쳐보니 이야기를 시작하는 맨 첫 장은 바깥에서 집 안을 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은 집 안에서 바깥을 보는 그림으로 끝이 났습니다.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그림이었습니다. 마치 “돌이야 놀자!” 하면서 돌이네 집에 들어 갔다가 “돌이야 안녕.”하면서 집을 나오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비가 옵니다. 시원한 소나기가 호박 잎과 장독대를 때립니다. 마치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났을 때처럼 후련한 느낌이 듭니다. 그 비가 전혀 춥거나 불안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밭에서 돌아온 엄마랑 아빠가 돌이 곁에 있고, 복실이랑 다른 동물 친구들도 곁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돌이네 집의 따스함 덕분에 굵은 빗줄기까지 여유롭습니다.
살아있는 듯한 그림과 함께 감칠맛 나는 글도, 돌이와 마음껏 놀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마치 동시를 읽는 듯한 짧고 운율 있는 말들이 동물들을 쫓아가는 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게 입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설명을 줄이고 대화와 의성, 의태어를 많이 넣어서 매우 생동감 있었습니다.
한번 보고 덮어버릴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심심할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책입니다. 특히 동물들과 채소들을 사실감 있게 그려서, 이것들을 실제로 접해보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