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시에는 오죽하면 선조가 "전라도가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하였겠는가...!
"이순신과 전라도민"의 눈부신 연전연승과 "원균과 경상도민"의 치욕적인 패전들은
잘들 아시니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벌어진 "2차진주성 전투"를 언급하고자 한다.
이 전투는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 동안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로..
경상우감사 김륵, 순변사 이빈,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된 의병장 곽재우등이
임금의 명령을 거역하면서 까지 공성전(空城戰)을 주장하면서 일본군관의 전투를
서로 회피하자...선조가 전라도군대에 진주성을 지킬것을 명하게 되는데...
김천일(金千鎰) 창의사(倡義使) (우도 절제사-친아들 상건과 함께한다.)
최경회(崔慶會) 경상 병사(좌도 절제사)
황진(黃進) 충청 병사 도순성장(都巡省將)
장윤(張潤) 사천 현감(좌 의병부장)
임희진(任希進) 해남 의병장(전투대장)
심우신(沈友信) 영광 의병장(전투대장)
이종인(李宗仁) 김해 부사(부장)
고종후(高宗厚) 복수 의병장(복수대장) -호남의병장 고경명의 아들,
오유(吳宥) 복수 의병부장(전투부대장)
민여운(閔汝雲) 비(飛) 의병장(부장)
이계련(李繼璉) 의병장(전투부대장)
강희보(姜希輔) 표(彪) 의병장(부장)
강희열(姜希悅) 분(奮) 의병장(전투대장)-강희보와 강희열은 광양출신으로 형제임,
이잠(李潛) 적기(敵氣) 의병부장
고득뢰(高得賚) 우 의병부장(부장)
양산숙(梁山璹) 공조 좌랑(부장)..등...
(이상의 모든 장수는 전라도 출신으로서 전원이....
전사하거나 진주 남강에 투신하여 자살하게 된다.)
전라도 군대와 민간인 2만7천여명이 머나먼길을 걸어서
진주성에 도착한후....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전략회의을 하게 되는데....
경상도군과 의병대장 곽재우등은 6만이넘는 대군인 일본군이 요구하는데로
성을 비우고 후퇴하자는 공성전(空城戰)을 주장하면서 전투를 반대하였고....
전라도출신 장군들은 성안의 식량도 충분하고 수비하기 좋은 진주성의 지형과
구조를 최대한 이용해서 목숨을 걸고 수성전(守城戰)을 하자면서 격렬하게
대립을 하게된다.
결국...의병장 곽재우등의 경상도 군대는 성밖으로 나가 후방에서 지원공격을
하겠다면서 진주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모두 도망을 가버린다.!
경상도 출신 장수들중에서...
서예원(徐禮元) 진주 목사(전투대장)
김준민(金俊民) 거제 현령(部長)
송제화(宋悌和) 감포 현령(전투대장)
정명세(鄭名世) 해미 현감(전투부대장)
성수경(成守璟) 진주 판관..등 극소수만 진주성에 남게 되는데...
이자들은 도망을 가려는 것을 전라도 출신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이
위협해서 붙잡아둔 탓이다.
이후 전라도 군대는 경상도 군대가 후방에서 지원을 하여준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10일동안... 일본군 6만명의 총공세에 맞서서 주야로 처절하게 싸우면서 이제나 저제나
경상도 군대의 후방공격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도 성밖에서 지원을 약속한
경상도 군대와 의병장 곽재우등은 화살한방 쏘기는 커녕 그림자도 볼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성안의 전라도 군대는 ...
일본군측으로 부터 조선군의 지원은 불가능하니...항복을 하라는 요구를
여러 차례에 걸처서 받았으나...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항전를 계속하다가...
끝까지 지원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상도 군대를 원망하면서...
전원이 통한의 절규속에서...장렬하게 전사하거나...
진주 남강에 투신자살들을 하고 만다.!
성이 함락된후..최경회와 서예원의 시체는 일본군이 남강에서 찾아내서
목을 잘라낸 다음 소금에 절여서 서울 종로 저자거리에 긴창에 꽂아서 전시를 한후..
일본에있는 풍신수길에게 보내진다.!
일본군은 진주성에 입성한후 여자들만 빼고..움직이는 생명체들은
가축까지 포함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2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기간중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투로 기록이 되고 있다.
그 전에..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하기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길....
경상도는 백색(항복-협력자)으로 표시하여서 한명도 죽이지 말라하였고..
전라도는 적색으로 표시하여서 남김없이 모두 죽여서 징표로 코을 베어오라고 하였다.
즉..항복하고 협력하는 자들은 살려주고..반항하는 자들은 잔인하게 죽이겠다는..
동서고금의 침략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민심교란 작전이였던 것이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명령은 조선곳곳에 방을 붙여서 민심의 이반을 노렸는데...
경상도군대와 곽재우등이 여기에 부회뇌동을 한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도 일본에는 18만개 이상의 전라도인들의 코가 묻혀 있는 코무덤이 있다.
경상도 뿐만이 아니였다.
1593년 2월(선조 26년) "2차진주성 전투"...4개월전에 경기도 행주산성 전투도 싸울 군대가 없자.. 전라도 광주목사인 권율장군에게 지키게 하여서 권율은 전라감영군사 1만5천명을 이끌고 전라도 출신인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등과 함께 3만명의 일본군과 9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승전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행주대첩이다.
(창의사 김천일은 4개월후..2차진주성 전투에서 아들 상건과 함께 죽게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일본사학자들 중에는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라기 보다는 "전라도와 일본의 전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첫댓글 음... 전라도 지역에 선씨들이 많지요
역사는 원균 장군을 간사하고 비열한 장수로 만들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군인의 우월성을 합리화 시키고자 이순신 장궁 영웅 만들기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선과 악의 차원으로 이순신 장군은 성웅으로 원균을 간사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적이 미미하다 하나 원균도 나라를 위해 싸웠고 장렬히 전사한 인물입니다.
충무공이 이순신장군 뿐만 아니라 김시민 장군도 충무공인걸로 압니다만,기억이 안나는데 또 있을겁니다.선조 자신이 이순신에 대한 열등 의식도 있었지만,조정대신들의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반대한 이유도 상당합니다.그이유로 이순신 장군을 인정하면 자기들은 치졸한 관료들로 남기 때문인데 훗날 성종때에 와서야 충무공으로 인정한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기록하는 자의 뜻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는 것이죠.
이순신은 23전 23승의 대업을 이룬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웅 입니다. 물론 거북선을 건조한 나대용 장군과 기름진 평야의 호남 군사들이 절대다수 이었기에 군세가 열악한 상황에서 뛰어난 지략을 펼친 지휘관으로서 세계적인 거인이며 성웅이 될수 있었습니다.
곽재우 이하 영남 군졸들 때문에 임진왜란때 진수성이 함락되었고 조국강산이 능멸을 당했군요...또한 유능한 충신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군요..저런자들을 후세가 섬기게큼 왜곡하는 처사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또한 다카키마사오[한국명:박정희] 전두환의 공원이나 기념관을 짓는 행위는 역사왜곡과 더불어 온민족을 능멸하는 행위 입니다.
창의사 김천일 장군은 영웅이며 충신입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비열한 졸장 입니다. 그런데 특정지역에서는 곽재우를 영웅시 하고 있습니다.하...이래서야 역사를 바로 세울수나 있겠습니까 또한 통일은 이룰수 있습니까....
다른 가능성 하나는 공성전에나 수성전에서 절대적으로 열세라서 불리할 것을 알고 자신들이 잘 하는 게릴라 전술을 주장한 것은 아닐지?
ㅇㅇㅇ아 남의 사료 가져다가 첨삭해 뻥치는 짓거리 말아라,ㅇ같은 ㅇㅇ야,부산진 정발장군 군사 1,000,고니시 1만 3천이상과 전투,밀양부사 박진+김시민장군 병력 700,권율 2,300,일본군 수 만,당시 조선 육군 군사력 정도를 보여준다,왜구 울산,부산,진해 삼진으로 영남 좌 우 중을 유린하며 북진해 전란의 피해가 격심했다,왜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의령에서 3-4곳 지역 백성들로 2000 정도의 의병을 꾸린 곽재우 장군 의병이다,별시에서 문관들의 멸시를 받은 곽장군은 정부에서 벼슬을 내려도 받지도 않았을 뿐더러 정부에서 이래라 저래라할 명분도 없었다.ㅇㅇㅇ아 당시 군사체계가 제승박략제였다,영남에 병란이 일어나면
절라도에서 병력을 이르켜 경상도를 돕는 그런 체계였다,임란 초기 절라도인간들 경상도 유린될때 싸우다 뒤진넘 있드나? 없지 않은가?2차 진주성 전투 절라도가 기를 쓰고 방어해야할 목적은 최후의 보루이자 정부의 뜻이기도 하고 왜넘들에게 유린 당하느니 절라도 내 스스로 지킬려고 목숨날린걸 뭘 그리 대단하다고 지럴이가?임란 초기 곽장군 왜넘들 전술 전략 무기체계 훤히 궤뚤어 진주성 수비는 공멸하자는 말과 다를게 없으니 왜구의 강력한 무기를 효율적으로 이길수 있는 방법을 선택함이 뭐가 그른가? 싸워서 이겨야지 질 전쟁을 왜하니?그니 절라도인들은 바보인겨,죽는 줄 모르고 성안으로 들어가 조총을 먹었으니 안됐지,
知彼知己百戰不殆라 했다,적의 전술 전략을 알고 병력 규모를 알고 병기의 화력 정도를 알았으면 싸워서 이길 전술 전략에 대해 누구나 말할 자격이 있고,이길 길을 찾는 것이 장수의 도리다,ㅇㅇㅇ아 예를 들어 '수군 수장 이순신 장군 진주성 고수해라'했다면 내가 이순신이라면 결코 따르지 않을것이다,장계 내용중 이장군 모함하는 내용중에 적군이 침략해 들어오는대도 출병을 하지 않는다는모함도 한다,이장군 이길 전투 아니면 출전않았다,패배해 괴멸되느니 이길 방법을 찾는건 넘 당연하지 않는가?곽재우 의병장도 마찬가지다,임란초 왜넘들의 전력을 경험했고 저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는 방법을 실전을 통해 익혀왔다,강한 화력을
가진 왜넘들앞에 수성은 미친짓임을 아는데 왜 군사력을 약화시키겠나? 절라도 원래가 뇌하부동의 대명사 아닌가?누가 뭐라하면 우 하는 그 무식한 기질로 목숨을 잃었으니 어디다 하소연 할까?곽장군 뜻에 따라 그 많은 병력으로 진주성 공성으로 하고 전란에 임했다면 왜구 쓸어 내고 일본을 속국으로 삼았을 것이다,까불지 말고 임란 전후 정세와 초기 임란의 정세 조선군의 군세,이 저런걸 좀 알고 글 올려라,년 초부터 절라도인들의 개떡같은 글귀에 귀가 아프다,ㅇㅇ.
당신들은 그당시에도 전라도 경상도라는 지역다툼을 전제로 이애기를 하는건가????????이랬을것이다라는 전제는 역사가 아니다......임란때살던 인간들같이 이야기하는것은 삼가하시길........
秦은 소호금천시 후예인데 망하자 신라로 유민들이 많이 흘러들어갔고,신라,가야도 금천씨 후예임을 자처하니 진과 신라는 한 뿌리다.정말 해괴한 논리가 아닐수 없다,학문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잔말을 짜르고 본질을 흐리려는 전형적인 전라인들의 술책이 한 눈에 들어난다,글지 말고 소호 금천씨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되 어떻게 뻣었는지 밝혀 보시길 그러면 님처럼 간접적으로 신라(경상도) 비난하는 얄굳은 글은 올리지 않을터,곳곳에 올린 절라도인들 글꼬라지 보면 대부분 이런 형태다.보다 못해 댓글로 응수하는 것이니 넘 서운해 마시길.
전라도,경상도. 여기서 마저 논쟁의 씨앗이군요
까불지 말고 임란 공부 더 해라,임란초 젤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왜병과 싸워 경상 우도를 통해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왜구의 3 진 진로를 바꾸어 놓은 분이다,임란초 왜구에 유린되지않고 절라도가 온전했던 점 곽장군의 공이 크다,절라도 생색 그만 내거라 그럴수록 타도인들 절라도 경계하고 멀리한다. 인품과 덕성을 쌓아 빛이 나면 절라도인들 존경 받을것이다, 그러나 지역열등의식에 빠져 타 지역을 폄하하는 쫄필 남기면 남길수록 다른 지역인들로부터 능멸을 당할것이다.
그래바짜 학 만도 못한 100원짜리에 나오시네요 ㅎㅎ...
왜놈 한마리가 가관이 아니구뫄안^^저런게 인간일까....
왜놈 ㅈㅁㅂㅈ냐? 일본놈의 악행을 답습하는 보리문뎅이냐? 아니면 왜놈의 씨앗이냐?
이처럼 좋은글에 안티하는 왜놈은 왕정시대 법으로 능지처참하면 국운이 바로 설것이다...
본인글 6개를 삭제한 운영자는 해명를 하시요...삼태극은 본인글 뿐만아니라 회원님들의 댓글까지 모두 삭제했다는것은 어떤 해명보다 본인들이 짱개들이라고
자인하는 것이니..회원님들은 이들의 실체를 꼭 알아야 합니다...이들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아는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