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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의 다리 아래를 살펴보라는 뜻으로, 지금에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잘 돌아다 보고 살펴보라는 말이다.
照 : 비출 조(灬/9)
顧 : 돌아볼 고(頁/12)
脚 : 다리 각(月/7)
下 : 아래 하(一/2)
(유의어)
간각하(看脚下)
출전 : 오등회원(五燈會元) 卷第十九 오조(五祖) 법연(法演)
자신의 다리 아래를 살펴보라는 말로, 지금에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잘 돌아다 보고 살펴보라는 뜻이다.
수행의 과정이나 불자의 길도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수행자로, 불자로 참답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물론 일반인도 이와 같다.
이 성어는 불교 삼불야화(三佛夜話) 나온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불(三佛)은 佛眼; 淸遠禪師, 佛鑑; 慧懃 禪師, 佛果; 克勤禪師이다.
五燈會元 卷第19 五祖法演章
三佛侍師於一亭上夜話, 及歸燈已滅.
삼불(三佛)이 스승 오조 법연(五祖法演) 선사를 모시고 밤에 정자에서 대화를 하다가 거처(居處)로 돌아가는데 등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師於暗中曰; 各人下一轉語.
법연선사가 어둠속에서 '각자 한마디씩 말해 보거라' 하니
佛鑒曰; 彩鳳舞丹霄.
불안은 '채봉이 노을 진 하늘에 춤을 춥니다'라 했고,
佛眼曰; 鐵蛇橫古路。
불감은 '무쇠 뱀이 옛길에 비껴 있습니다' 하고,
佛果曰; 看腳下.
불과가 '발밑을 살펴 보십시오'라 했다.
師曰; 滅吾宗者, 乃克勤爾。
오조 법연선사가 말하기를 '나의 종지(宗旨)를 멸할 자는 바로 극근(佛果 圓悟 克勤)이로구나'라 하였다.
여기 '看腳下(발밑을 살펴보라)'가 '照顧脚下'로 변이되었다. 내 발밑부터 잘 살피어 볼지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기 발밑을 잘 보라는 뜻의 사자성어이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하며, 가깝고 친할수록 보다 신경을 쓰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불교에서는 밖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또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으라는 의미로 신발을 신고 벗는 곳에 '조고각하(照顧脚下)'를 써두기도 한다.
'조고(照顧)'는 제대로 보는 것이나 반성하는 것을, '각하(脚下)'는 발밑, 자기 자신을 뜻한다. 따라서 조고각하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과거 언행을 돌이켜 봐야 함. 또는 가깝고 친한 사람일수록 보다 신경을 쓰고 조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각하조고(脚下照顧)'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자기반성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사자성어로는, 남을 탓하지 않고 잘못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 고쳐나간다는 '반구저기(反求諸己)', 남을 꾸짖기보다 자신을 돌이켜 보고 반성한다는 '내시반청(內視反聽)', 문을 닫고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라는 '폐문사과(閉門思過)',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한다는 '삼성오신(三省吾身)', 성미가 급한 사람은 부드러운 가죽을, 성미가 느린 사람은 팽팽하게 활시위를 맨 활을 지니고 다니며 스스로를 반성하고 수양한다는 '패위패현(佩韋佩弦)'이 있다.
반대되는 뜻의 한자성어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탓하는 데는 총명하다는 '지우책인명(至愚責人明)'이 있으며, 속담으로는 '잘되면 제 탓 못되면 조상 탓'이 있다.
한편, 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의미로, 밖에서 깨달음을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또한 각자 자기 발밑을 살펴보아 신발 벗은 자리를 정갈히 하라는 뜻으로 신발을 신고 벗는 곳에 조고각하를 써두기도 한다.
조고각하는 '삼불야화(三佛夜話)'란 불교 선종(禪宗)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송나라 때 선사(禪師, 선종의 법리에 통달한 승려)였던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는 뛰어난 제자 셋이 있었다. 불감혜근(佛鑑慧懃), 불안청원(佛眼淸遠), 불과원오(佛果圓悟) 이 세 제자를 사람들은 '삼불(三佛)'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오조법연 선사는 세 명의 제자와 밤길을 걷고 있었다. 들고 있던 등불이 갑자기 꺼지자 선사는 제자들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불감혜근은 '채색 바람이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춘다(彩風舞丹霄)'라고, 불안청원(佛眼淸遠)은 '쇠 뱀이 옛길을 건너가네(鐵蛇橫古路)'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불과원오는 '발밑을 보라(照顧脚下)'라고 대답했다. 이후 불과원오가 답했던 조고각하는 불가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펴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는 수행 규칙으로 사용되고 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살피라
법연선사(중국 11세기)께서 혜근, 청원, 원오 세 제자와 밤길을 걷게 되었다. 마침 불어온 세찬 바람에 원오스님이 들고 있던 초롱불이 꺼지고 말았다.
길을 밝혀 주던 등불이 꺼지자,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앞뒤를 분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찌할꼬?' 그 와중에, 말꼬리를 슬쩍 감아올리며 내뱉은 노회한 스승의 말 품새로 미루어, 이참에 제자들의 수행 형편도 더듬어 보자는 속내가 은근하다.
'채색바람이 붉게 물든 노을에 춤춘다' 혜근스님의 세치 혀가 앞섰다. 정취 물씬한 풍경이다. 절창이다.
'쇠 뱀이 옛길을 건넌다' 질세라, 잇따른 청원스님의 언사가 무겁다. 깊고 미묘하여 아득하다.
이러나 저러나 공부가 부실한 중생에겐 어차피 해득이 난감한, 귀신도 곡할 소리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화려하고 묵지근한 도반들의 응대에 눌려, 미적대던 원오스님이 마지못해 입에 머금은 소리를 뱉는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발밑을 비추어 보라는 뜻이다.
쾌재로다. 그래, 살아 있는 말이다. 스승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떻게 이 어둠을 헤쳐 나갈 것인가, 그 방도를 물은 것이다.
어쩌면 하나 마나 한 하문일 터. 어둠 속에서 한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천길 절벽 아래다. 그러니 글자대로 뜻을 잡자면, 발밑을 비추어 살펴보라는 말이다.
그뿐일까? 아무튼,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이후 천여 년 동안 수행자들이 잡도리하여 궁구하게 되는 화두가 된다.
강원이나 선원의 댓돌에는 학인스님들의 새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과, 기둥에 걸린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주련판을 볼 수 있다.
댓돌에 벗어놓은 신발을 보면 그 학인의 마음자리를 알 수 있다. 하얀 고무신이 깔끔하게 갈무리되어 있으면 마음이 정갈하고 잘 정돈된 상태이다.
신발이 널브러져 있으면 신발을 벗는 '지금'의 순간을 놓쳐, 마음자리가 흩트려져 있는 것이다. 수행의 시작은 신발을 제대로 벗어놓는 일부터다.
신발을 잘 벗어놓자면 별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하기에, 조고각하(照顧脚下)의 다른 뜻은 언제 어디서나 아만과 아집을 여위고, 친절한 언행과 겸허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심(下心)을 닦는 일이기도 하다. 수행자에게는 생명과 같은 몸과 마음가짐이다.
하지만 그 화두의 숨은 말속은, 깨달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자신이 서 있는 가까운 발아래(마음자리)를 살피는 일이라는 데 있다.
그 시대의 선(禪)은 지나치게 관념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선풍 속에서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실행이 없는 헛된 선으로 치부된 구두선(口頭禪)을, '지금 바로 여기'의 현실적 문제로 전환한 획기적 계기가 된다.
조고각하(照顧脚下)의 궁극은 서있는 자리마다 마음을 다 잡아, 모든 현상의 본질이 무상하여 실체가 없는 것임을 꿰뚫고, '이 또한 곧 지나갈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허망한 집착으로부터 해방된 마음자리가 '그지없는 한가로움(절대평온)'을 누리게 함이다.
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의 다리 밑을 살펴보라는 뜻으로, 남 탓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이다.
하늘의 별을 연구한다며 위만 보고 걷다가 개울에 빠졌다. 원대한 꿈을 꾸는데 웬 개울이 가로놓여 방해를 한다고 꾸짖을 일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모르고 남 탓을 한다. 그래서 자기 결함은 생각지 않고 애꿎은 사람이나 조건만 탓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 유난히 많다.
비하하는 말이나 낮춤말이 썼지만 '소경이 개천 나무란다',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한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등이고 '가마 밑이 노구솥 밑을 검다 한다'는 한역어 부저소정저(釜底笑鼎底)에서 소개한 바 있다.
수신을 잘 한 선비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도 보통 사람들과 달리 고칠 줄 안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허물을 남 탓하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는다고 반구저기(反求諸己)라 했고,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친다고 지과필개(知過必改)라 했다.
더하여 증자(曾子)는 매일 세 번을 반성한다고 삼성오신(三省吾身)이란 말을 남겼다.
불교에서도 쉬운 비유로 큰 깨달음을 주는 좋은 말이 있다. 항상 자신을 비추어 반성하되(照顧) 자기 발밑부터(脚下) 먼저 하라는 이 성어다.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의 과거 언행을 돌이켜보고 가까운 데를 더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다.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라는 가르침도 있다. 각하조고(脚下照顧)도 같다.
중국 송(宋)나라 때 발간된 선종(禪宗)의 통사 '오등회원(五燈會元)'의 삼불야화(三佛夜話)에서 비롯된 말이다.
선승 보제(普濟)가 혜명(慧明) 등 여러 제자에 명하여 편찬되어 선(禪)의 대의를 밝힌 입문서로 여겨진다는 책이다. 성어가 나오는 부분을 보자.
선승 오조법연(五祖法演)이 자신을 잇는 제자 삼불(三佛)과 함께 밤길을 걷다가 세찬 바람에 등불이 꺼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승이 묻자 불안청원(佛眼淸遠)과 불감혜근(佛鑑慧懃)은 심오한 답을 한 반면 불과극근(佛果克勤)은 '발밑을 살펴 보십시오(看脚下)'라고 말했다.
스승은 자신을 이을 사람은 극근(克勤)이라 했다. 살피는 간(看)이 조고(照顧)로 바뀌어 사용된다.
이 대답을 한 원오극근(圓梧克勤)은 벽암록(碧巖錄)에 가르침이 남아 있다.
수행과정에서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전혀 없는 경지에서는 자신과 가까운 곳부터 해결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험한 말로 싸우고 욕심이 이글거리는 사회에서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과오를 찾는 것은 천주교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펼쳤던 '내 탓이오'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남의 잘못을 신랄히 지적하다가 자신의 똑 같은 잘못이 드러나도 발뺌하는 '내로남불'이 더 기승을 부리는 사회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조고각하(照顧脚下)와 폐호자달(閉戶自撻)
산사(山寺) 입구나 신발을 벗는 곳에는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씌어진 문구를 볼 수 있다.
이 말은 선문답(禪問答)에서 나온 것으로, 한 수좌(首座)가 선사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고 물으니, 선사는 “조고각하(照顧脚下)”라고 대답했다.
조고각하는 ‘발밑을 비추어 돌아보라’는 뜻이다. 신발은 잘 벗어두었는지 돌아온 자취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의 자신의 행위에 대해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에 의하면,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은 “어렸을 때 스스로 일기장을 만들어 두고 모든 언행을 기록해서 스스로 반성하고 잘못이 있으면 문을 닫고 스스로 종아리를 때렸다(有過則輒閉戶自撻)”고 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징계를 하듯 철저한 자기반성만이 새로운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매일 똑같은 방식으로 실험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다”라는 말처럼,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자인 것이다.
공자(孔子)가 제자 안회(顏回)를 좋아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았기(不貳過) 때문이다.
자기 발밑부터 잘 살펴보라
사람은 잘생긴 얼굴을 찌푸리고 사는 것보다는 못난 얼굴이라도 웃는 모습이 아름답다. 주어진 고통을 거부하지 말고, 그 고통을 통해 깨달아 가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인생은 항상 미완성이며,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다. 치질 앓는 고양이 마냥 초라하게 행동하지 말고, 세상과 자신과 인생을 깊이 믿고 신뢰하자. 외로움과 괴로움들을 가슴을 열고 받아들여 보자.
스님들의 신발을 벗는 댓돌 위의 주련이 조고각하(照顧脚下)다. 자기 발밑을 보라는 뜻이다. 사회에서 각하(脚下)는 ‘발 아래’로 해석하지만 불교에서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의미로 읽는다.
조고각하(照顧脚下)는 진리를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하라는 의미다. 자기 발밑부터 잘 살펴보며 바르고 정의롭게, 기본을 지켜가며 살아가자.
직심(直心)은 곧은 마음, 걸림 없는 마음, 참 마음이다. 7년 가뭄에 비 안 오는 날 없고, 9년 장마에 볕 안 드는 날이 없듯, 아무리 복 없는 사람이라도 궂은일만 계속되지는 않는다. 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상대가 나와 다르더라도 그들을 포용하며 살아간다.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은 인과로 엮여 있어서 한 덩어리이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네가 있다. 내가 없이는 네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스스로를 정화시켜 나가자. 우리는 누가 눈을 깜빡하라 하여 깜박이고, 누가 시켜서 숨을 쉬는 것도 아니다. 자기 스스로 눈도 깜빡이고 숨도 쉬며 냄새도 맡는다.
이처럼 모든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코딱지나 고름이 살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의타심이나 분별 심은 득이 되지 않는다. 분별심으로 진위(眞僞), 선악(善惡), 미추(美醜)로 나누면서 자꾸 따지지 말고, 마음을 내려놓고, 부드럽고, 원만하게 살아가자.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한사람은 반드시 스승이 될 수 있다 하였지만, 불교에서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세 사람 모두가 스승이 된다고 폭넓은 생각을 가르친다.
우리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의 신분과 이미지, 체면을 너무 따지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적이 사격을 가해오면 자세를 바짝 낮춰야 한다. 땅바닥에 엎드려 기는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기지 않으면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
이때는 장군이라도 기는 길만이 살길이다. 길 때는 기어야하며, 긴다고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삶은 창조적 움직임 이어야지, 오랜 습관에 안주하면 자기 내면이 굳어 버린다.
인생길은 하도 꼬불꼬불하고 복잡하여 춘향이 집 찾기보다 힘들어서 코에 단내가 나도록 일을 해도 하루하루 사는 게 버겁지만 자신을 바로 보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하여 얼마든지 삶의 질을 개선해 나갈 수 있다.
최악의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일만 열심히 하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변의 여건이나 빈부귀천에 의하여 삶의 본질이 바뀌지 말아야 한다. 조급하지 마라.
인내는 남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하여 나와 남에 대한 분별을 없앨 수 있다.
나와 남에 대한 분별을 없애는 것은 분노와 원망의 대상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인내심을 발휘하면 자신에게도 이롭고, 남들에게도 악업을 멈추게 하는 이타행이 된다.
스스로의 인내와 노력으로 매일 조금씩 성장해 나가자.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삶이며, 그 삶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는 자기 발밑부터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온다.
나만 잘하면 이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자신이 한 노력의 결과가 다소 나쁘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하지 말자.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의 멸망이 와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역경을 헤치며 꿋꿋하고 활기차게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살아가자.
발밑을 본다
작은 잔디 공간이 있다. 틈을 내어 조심스럽게 이 공간을 걷는다. 걷는 시간은 자유롭다. 팔 다리가 그렇고, 눈길 또한 그렇다.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눈길이 현란해진다.
보아야 할 대상이 위쪽에만 있을까. 발밑도 본다. 해갈이 되지 않아서인지 잔디가 배배 꼬이고 있다. 그 사이로 개미들이 분주하다.
대중처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씨가 있다. 마루 위에 붙어 있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이다. 조고각하는 수행자에게 자기 반성의 뜻으로 마음을 챙기고 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 수행자가 나를 저버리고 상대를 향하여 추구하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남송시대에 대천 보제(大川普濟) 스님이 오등회원(五燈會元)을 편찬하였는데 그 책속에 조고각하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
개미는 수개미, 여왕개미, 일개미로 대별된다. 저 잔디 사이를 분주히 걸으며 먹이를 나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이들의 전열에 작은 파문을 던진다.
모래를 개미집 입구에 한두 알을 놓았다.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일종의 그들만이 아는 경보물질이 분비되었기 때문이다.
큰 턱샘에서 분비되는 경보물질이 엷으면 동료를 끌어 모으고, 짙으면 산산이 흩어져 도망치게 된다. 아마 이들의 거동으로 보아 동료를 모으고 있는 듯하다.
개미에게 친숙함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이름 때문이다. 벌레 충(虫)에 옳을 의(義)를 합하여 개미 의(蟻)가 된다. 저 미물의 이름에 옳을 의(義)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외면하는 인간 군상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빵과 결탁하고 권세를 좇는 사람과 비교해 보면 개미의 삶이 청순하다.
기식이 없는 개미의 제살이가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개미의 이동 행렬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장마가 늦어지는 모양이다.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데도 산새가 날아든다. 나뭇가지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산새 소리가 정신을 맑게 한다. 이따금 씨앗을 넣어 둔 채전 이랑을 후벼놓으면 마음이 걸리기도 한다.
도량의 연못에 물이 없으니 목욕재계 할 수 없어 차선책으로 몸을 단정히 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쉬 이해가 간다. 어쨌든 씨앗에서 고르게 싹이 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어(鳥語)를 해득할 능력은 없다. 그러나 저 쉼 없는 소리는 먹이를 찾는 소리로 들린다. 좁쌀을 판판한 돌 위에 듬뿍 놓았다. 그 옆에는 목을 축이라고 물그릇도 마련해 주었다.
새들이 먹이를 먹었는지 간간이 살펴보아도 감감 무소식이다. 새들이 어디로 이동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혹시 청술레를 찾아 간 것이 아닐까. 지난 해 맛보았던 그 맛을 잊지 않고 배나무 가지에서 단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전작라(門前雀羅)는 방문객이 끊기고 한산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사람의 발길이 뜸하니 자연히 문 앞에는 참새 떼가 놀아 새 잡는 그물이 처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 새들은 판단한 듯하다. 자기들을 잡기 위해 그물을 칠 사람이 아니라 여기고 가까이 다가왔던 것이다. 저 산새의 예지를 인간의 머리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어느 경우에 미물의 조소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이다.
백 보 밖의 사물은 볼 수 있지만 눈에서 가까운 속눈썹은 볼 수 없다. 이 우둔함을 안고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보면 감히 주변의 일을 예단한다는 것이 퍽 어려운 일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더욱 그렇다. 자신을 전제조건으로 상대를 평가한다는 것도 위험스러운 일이다. 자신을 배제하고 보면 사안의 중대성은 딴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은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본질을 흐리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개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여름철에 부지런히 일하여 먹이를 저축하는 개미가 노래만 부르고 한 여름을 난 베짱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면서 훈계를 한다.
조정사원(祖庭事苑)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가 어떤 사람에게 진기한 구슬을 받았다. 이 구슬에 아홉 개의 구멍이 나 있었다. 이 구슬에 실을 꿰려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실을 넣었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누에를 치기 위하여 뽕을 따는 아낙네를 만나게 되었다. 그 길쌈을 하는 아낙네라면 실을 꿰는 방법을 알 것 같아서, 구슬 꿰는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그 아낙네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密爾思之)”. 이 말은 공자에게는 벽력과도 같았다. 조용하다는 뜻의 밀(密)에서 꿀 밀(蜜)을 떠올린 것이다.
‘그렇지!’ 하고 두 무릎을 치고 일어나 개미 한 마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허리에 실을 묶고는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 넣었다. 물론 다른 출구 쪽 구멍에는 꿀을 발라 놓았다. 그 개미는 꿀 냄새를 쫓아가 아홉 굽이를 통과할 수 있었다. 마침내 구슬에 실을 꿸 수 있었다.
배우는 일에 신분의 높낮이, 나이의 많고 적음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야말로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일이다. 배움은 영원한 수직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가면 수평 관계가 되기 쉽다. 자기 성찰이 따르지 않으면 그 시기는 앞당겨지기 마련이다.
발밑을 보며 개미의 모듬살이에서 배운다. 협동과 헌신 그리고 강인한 삶의 의지를. 그리고 작은 것을 살필 줄 알아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그들의 행동에는 인간이 지니지 못한 지혜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 照(비출 조)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연화발(灬=火; 불꽃)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昭(소, 조)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옛날엔 날일(日; 해)部와 불 화(火)部는 글자로 쓸 때 같이 취급하였기 때문에 昭는 ‘햇빛, 불이 밝다’의 뜻으로 썼다. 나중에 불 화(火)部를 더하여 照(조)라고 써 역시 해와 불의 양쪽 뜻을 나타냈다. 또 구별할 때는 昭(소)를 밝다(형용사), 照(조)를 비치다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照자는 ‘비추다’나 ‘밝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照자는 火(불 화)자와 昭(밝을 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照자의 금문을 보면 단순히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과 召(부를 소)자가 결합되어 있었다. 여기서 召자는 발음역할을 한다. 소전에서는 횃불을 들고 있는 모습이 炅(빛날 경)자로 바뀌게 되었고 해서에서는 昭자와 火자가 결합한 照자가 ‘비추다’를 뜻하게 되었다. 그래서 照(조)는 ①비치다 ②비추다 ③밝다, 환하다 ④견주어 보다 ⑤대조(對照)하다 ⑥알리다 ⑦빛, 햇빛 ⑧영상 ⑨거울 ⑩증서(證書) ⑪증거(證據)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비칠 영(映)이다. 용례로는 단체나 기관 따위에서 어떤 사람의 인적 사항 따위를 관계 기관에 알아보는 것을 조회(照會), 빛으로 밝게 비추는 것 또는 그 빛을 조명(照明), 빛이 비치는 그림자 또는 그림이나 사진 따위에 의한 초상을 조영(照影), 햇빛 따위가 내리쬠 또는 광선 따위를 쬠을 조사(照射), 잘잘못을 보아 살핌을 조찰(照察), 맞은 편에 있는 벽을 조벽(照壁), 틀림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기 위하여 서로 맞추어 살펴 봄을 조열(照閱), 서로 맞대어 보아 살핌을 끝냄을 조흘(照訖), 대조하여 보아 맞는지 안 맞는지를 검토함을 조교(照校), 전례에 비추어 상고함을 조례(照例), 둘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 또는 말과 글의 앞 뒤 따위가 서로 일치하여 잘 어울림을 조응(照應), 대조하여서 봄을 조감(照鑑), 물건을 비추어 보는 거울을 조경(照鏡), 글을 하나하나 맞춰 보면서 베껴 씀을 조등(照謄), 밝게 비치어서 빛남을 조요(照耀), 참고로 맞대 본다는 말을 참조(參照), 둘을 마주 대서 비추어 비교함을 대조(對照),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을 관찰하거나 음미함을 관조(觀照), 더듬어 찾으려고 멀리 내비침을 탐조(探照), 자기 스스로를 반성 관찰하는 일을 자조(自照), 실제의 형상을 그대로 찍어냄을 사조(寫照), 저녁 햇빛을 이르는 말을 낙조(落照), 저녁에 지는 햇빛을 만조(晩照), 간과 쓸개를 내놓고 서로에게 내보인다는 뜻으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귄다는 말을 간담상조(肝膽相照), 자기의 발 밑을 잘 비추어 돌이켜 본다는 뜻으로 가깝고 친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각하조고(脚下照顧) 등에 쓰인다.
▶️ 顧(돌아볼 고)는 ❶형성문자로 顾(고)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머리 혈(頁;머리)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雇(고)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顧자는 '지난날을 돌아보다'나 '방문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顧자는 雇(품 팔 고)자와 頁(머리 혈)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雇자는 戶(지게 호)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것으로 '품을 팔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雇자는 문지방 위로 제비가 날아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비는 봄에 찾아오기 때문에 옛날에는 제비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농사일이 시작됐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렇게 제비가 다시 방문하는 것을 뜻하는 雇자에 頁자가 더해진 顧자는 제비가 다시 방문하듯이 사람이나 생각을 다시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래서 顧(고)는 ①돌아보다 ②지난날을 생각하다 ③돌보다 ④당기다 ⑤돌아가다 ⑥품을 사다(雇) ⑦다만 ⑧생각컨대 ⑨도리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곁눈질할 면(眄), 돌볼 권(眷)이다. 용례로는 물건을 항상 사러 오는 손님을 고객(顧客), 어떤 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직책 또는 그 사람을 고문(顧問), 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을 고명(顧命), 부모가 자식들을 양육함을 고복(顧復), 생각하여 주고 도와 줌을 고조(顧助), 뒷일을 염려하고 꺼림을 고기(顧忌), 다시 돌이켜 헤아림을 고려(顧慮), 돌보아 보호함을 고호(顧護), 돌아다 봄이나 돌이켜 봄을 고면(顧眄), 두루 돌아 봄을 고첨(顧瞻), 돌이켜 뒤를 봄을 고견(顧見), 보살펴 줌이나 남의 허물을 덮음 또는 되돌아보아 생각함을 고념(顧念), 둘러보거나 되돌아 봄이나 이것저것 생각하고 망설임을 고망(顧望), 이미 지난 일을 못 잊어서 그 뒤를 돌아보거나 살핌을 고후(顧後), 마음에 맺히어 잊지 못함을 고련(顧戀), 명예를 돌아보고 의를 생각함을 일컫는 말을 고명사의(顧名思義), 고명을 받은 신하를 일컫는 말을 고명지신(顧命之臣), 편지의 회답도 자세히 살펴 써야 함을 이르는 말을 고답심상(顧答審詳), 음악을 잘못 연주하면 주랑이 곧 알아 차리고 돌아본다는 뜻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을 고곡주랑(顧曲周郞) 등에 쓰인다.
▶️ 脚(다리 각)은 ❶형성문자로 腳(각)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육달월(月=肉; 살, 몸)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却(각; 굽어 구부러지다)으로 이루어졌다. 다리는 무릎에서 굽으므로 脚(각)이라 하였다. ❷형성문자로 脚자는 ‘다리’나 ‘(물건의)하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脚자는 ⺼(육달 월)자와 却(물리칠 각)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자와 卻(물리칠 각)자가 결합한 腳(다리 각)자가 쓰였었다. 卻자는 발음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계곡을 지나가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니 발과 관련된 의미를 조금은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腳자는 본래 사람의 ‘종아리’를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허벅지와 종아리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또 해석에서는 腳자가 脚자로 바뀌었다. 그래서 脚(각)은 (1)종아리. 다리 (2)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나눌 때, 전체를 몇 등분(等分)한 그 부분, 등의 뜻으로 ①다리 ②물건의 하부(下部) ③토대가 되는 것 ④다리로 걷는 것같이 보이는 것 ⑤몸둘 곳 ⑥지위(地位) ⑦밟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팔 비(臂)이다. 용례로는 발꿈치를 각근(脚跟), 다리뼈를 각골(脚骨), 다리에 난 털을 각모(脚毛), 다리에 속하는 부분을 각부(脚部), 다리의 테두리 선을 각선(脚線), 다릿심으로 걷는 힘을 각력(脚力), 다리에 동여매는 띠를 각대(脚帶), 사람이나 사물의 어떤 방면에서 있어서의 등장이 눈부실 만큼 찬란히 빛남을 각광(脚光), 연극의 꾸밈새로 무대 모양이나 배우의 대사 따위를 적은 글을 각본(脚本), 본문 밑에 붙인 풀이를 각주(脚註), 걸음으로 품팔이하는 사람 또는 먼길을 다니면서 심부름하는 사람을 각부(脚夫), 발로 밟고 참을 각답(脚踏), 다리가 아픈 병을 각질(脚疾), 다리 아픈 증세를 각통(脚痛), 다리가 저림으로 다리 감각이 없어짐을 각마(脚痲), 발끝으로 발의 앞 끝을 각첨(脚尖), 어떤 목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님을 행각(行脚), 어떤 사물이나 견해나 조건 등에 근거를 두어 그 입장에 섬을 입각(立脚), 튼튼한 다리 또는 잘 걷는 다리를 건각(健脚),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을 교각(橋脚), 외짝 다리로 하나 뿐인 다리를 독각(獨脚), 처지나 지위를 잃음을 실각(失脚), 잎자루나 잎줄기에서 가까운 잎의 부분을 엽각(葉脚), 산기슭으로 산의 비탈이 끝나는 아랫부분을 산각(山脚),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불길을 화각(火脚), 말의 다리로 마각이 드러남을 마각(馬脚), 무쇠처럼 억센 다리를 철각(鐵脚), 벌겋게 드러낸 다리를 적각(赤脚), 비스듬히 걸어가는 일 또는 비스듬히 걷는 걸음걸이를 사각(斜脚), 두 다리를 쌍각(雙脚), 자기의 발 밑을 잘 비추어 돌이켜본다는 뜻으로 가깝고 친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각하조고(脚下照顧), 발이 실제로 땅에 붙었다는 뜻으로 일 처리 솜씨가 착실함을 각답실지(脚踏實地), 말의 다리가 드러난다는 뜻으로 숨기려던 정체가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마각노출(馬脚露出), 다리가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박식한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서주(有脚書廚), 다리가 있는 양춘이라는 뜻으로 널리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유각양춘(有脚陽春) 등에 쓰인다.
▶️ 下(아래 하)는 ❶지사문자로 丅(하)는 고자(古字)이다. 밑의 것이 위의 것에 덮여 있는 모양이며, 上(상)에 대한 아래, 아래쪽, 낮은 쪽, 나중에 글자 모양을 꾸며 지금 글자체가 되었다. ❷지사문자로 下자는 ‘아래’나 ‘밑’, ‘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下자는 아래를 뜻하기 위해 만든 지사문자(指事文字)이다. 下자의 갑골문을 보면 윗부분은 오목하게 아랫부분은 짧은 획으로 그려져 있었다. 윗부분의 오목한 형태는 넓은 대지를 표현한 것이다. 아래의 짧은 획은 땅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下자는 아래를 가리키고 있다 하여 ‘아래’나 ‘밑’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금문에서 숫자 二(두 이)자와 자주 혼동되었기 때문에 소전에서는 아래의 획을 세운 형태로 바꾸게 되면서 지금의 下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下(하)는 (1)아래. 밑 (2)품질(品質)이나 등급(等級)을 상(上)과 하(下), 또는 上, 中, 下로 나눌 때의 가장 아랫길(끝째). (3)일부 한자로 된 명사(名詞) 다음에 붙이어 ~밑에서, ~아래서의 뜻으로, 그 명사가 조건이나 환경 따위로 됨. 나타냄. ~하에, ~하에서, ~하의 형으로 쓰임 등의 뜻으로 ①아래 ②밑(물체의 아래나 아래쪽) ③뒤, 끝 ④임금 ⑤귀인(貴人)의 거처(居處) ⑥아랫사람 ⑦천한 사람 ⑧하급(下級), 열등(劣等) ⑨조건(條件), 환경(環境) 등을 나타내는 말 ⑩내리다, 낮아지다 ⑪자기를 낮추다 ⑫못하다 ⑬없애다, 제거하다 ⑭물리치다 ⑮손대다, 착수하다 ⑯떨어지다 ⑰항복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낮을 저(低), 낮을 비(卑), 내릴 강(降), 항복할 항(降), 낮출 폄(貶),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윗 상(上), 높을 존(尊), 높을 고(高)이다. 용례로는 공중에서 아래쪽으로 내림을 하강(下降), 값이나 등급 따위가 떨어짐을 하락(下落), 어떤 사람의 도급 맡은 일을 다시 다른 사람이 도거리로 맡거나 맡기는 일을 하청(下請), 아래쪽 부분을 하부(下部), 강이나 내의 흘러가는 물의 아래편을 하류(下流), 산에서 내려옴을 하산(下山), 낮은 자리를 하위(下位), 공부를 끝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옴을 하교(下校), 한 달 가운데서 스무 하룻날부터 그믐날까지의 동안을 하순(下旬),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하오(下午), 차에서 내림을 하차(下車), 위에서 아래로 향함을 하향(下向), 보호를 받는 어떤 세력의 그늘을 산하(傘下),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치적이 나쁜 원을 아래 등급으로 깎아 내림을 폄하(貶下),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을 귀하(貴下), 끌어 내림이나 떨어뜨림을 인하(引下), 원서나 소송 따위를 받지 않고 물리치는 것을 각하(却下), 낮아짐이나 내려감 또는 품질 따위가 떨어짐을 저하(低下),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라는 하석상대(下石上臺), 붓만 대면 문장이 된다는 하필성장(下筆成章), 아랫사람의 사정이나 뜻 등이 막히지 않고 위에 잘 통함을 하정상통(下情上通), 어리석고 못난 사람의 버릇은 고치지 못한다는 하우불이(下愚不移)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