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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순행자(果舜行者)
이러한 말이 있다. “큰 악인이 머리를 돌리면 크게 선하게 되며, 크게 선한 자가 타락하면 큰 악과 같다.” 요(姚)씨가 바로 처음에는 나빴다가 후에 좋은 것을 배운 예이다. 그는 원래 술 마시고 아편을 흡입하며 여자를 좋아하여 그런 나쁜 사람이 갖가지 어려움을 겪은 후 마침내 세상일의 무상함을 깨닫고 악을 고쳐 선으로 향한 후 일심으로 출가하여 도를 구하여 생사를 해탈하였다.
상인께서 친히 말씀하였다:
불량배의 고난과 참회
과순은 생긴 것이 아난존자와 같은 모습이었으며, 나에게 두 번째로 출가한 제자이다. 비록 배운 것은 없었지만 매우 총명하였다. 그는 삼보에 귀의하기 전에는 빈둥거리며 일하지 않고 지내던 불량배였다. 아편을 흡입하고 마작을 하며, 술 마시고 여자를 좋아하는 무소불위의 가장 나쁜 사람이었다.
그 당시는 일본이 동북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소련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하여 흑하(黑河) 일대에 국방의 공정을 진행하면서 도처에서 노동자를 잡아 강제로 복역을 시켰다. 어느 날 그도 일본군에게 잡혀 그곳으로 가서 노동을 하게 되었다. 낮에는 소나 말같이 일을 하고 밤에는 풀을 이불삼아 덮고 잠을 잤다. 그 안의 생활은 그야말로 인간지옥과 같은 것으로서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당시 노역장 사방에는 강력한 전기철조망으로 둘러쳐져 도망갈 수도 없었으며, 도망가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개에 물려 죽는 사람이 많았다.
비록 전기철조망의 위협이 있었지만 요씨도 언제나 도망갈 기회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꿈을 꾸었다. 한 분의 흰 수염을 한 노인이 꿈속에서 나타나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조금 더 인내해야 해!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어! 시간이 되면 내가 너에게 알려줄 테니, 그때 다시 도망쳐도 늦지 않아.” 그리하여 과순은 그 노인의 말을 믿고 인내하며 시기를 기다렸다.
약 반 개월이 지나자 그 노인이 다시 정말로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오늘 밤에 도망갈 수 있어! 바깥에 흰 개가 한 마리 있으니, 너는 그를 따라가서 도망가거라.” 그는 깨어나서 한 동료에게 말하여 각자 마포자루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과연 그곳에는 흰 개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과순은 노인의 지시에 따라 개를 따라갔다.
흰 개는 전기철조망 곁으로 가서 망을 뛰어넘었다. 과순도 마포자루를 전기철조망에 걸치고 뛰어 넘었다. 그러나 그의 동료는 같은 방법을 사용했는데도 마포에 불이 붙어 도망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단지 그 한사람만 순조롭게 탈출하였으며, 탈출하고 난 뒤 흰 개는 보이지 않았다. 요씨는 산속에서 먹지 못하고 7일 밤낮을 달려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과순의 출가
그는 일본 노역장에서의 그런 고된 경험을 통해서 인생의 고통을 절감하고 출가하여 수도하려고 하였다. 삼연사로 와서 출가하려고 하였으나 방장스님께서 그의 모습을 보고 생활을 위하여 출가하려는 것으로 생각하여 받아주지 않았다.
민국 33년(서기 1944년) 겨울 내가 대남구둔으로 고덕복의 모친의 병을 치료하러 갔었다. 내가 <대비신주>로 가피를 주자 약을 쓰지 않고 완쾌되었다. 다음날 그 일대에 고씨 모친의 병이 나은 기적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요씨도 이 일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많은 등롱과(燈籠果: 동북지방의 과일)를 나에게 공양하였다. 그는 출가하려고 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만약 내가 그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일어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이런 말을 듣고도 벽을 보고 앉아 좌선하면서 그를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본래 제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제자를 받으면 매우 귀찮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방장스님이 그를 제자로 받지 않으려는 일은 몰랐다. 두 시간 후에 내가 머리를 한 번 돌려보니 그는 여전히 땅에 꿇어앉아 있었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나는 네가 이곳에 꿇어앉아 있는 것을 잊고 있었구나. 너는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그가 말하였다. “스님께서 자비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출가하려고 합니다.”
내가 말하였다. “너는 무슨 집을 나오려고 하느냐? 너는 집이 있느냐?”
그가 말하였다. “저-저-저는 집이 없습니다.”
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집이 없는데, 더 무슨 집을 나오려고 하느냐? 네가 출가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야! 집에서 도를 닦는 것도 쉽지 않은데, 출가하여 도를 닦는 것은 더욱 어렵다. 소위 생사의 큰일(生死大事)을 아직 밝히지 못하면,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과 같으며, 생사의 큰일을 이미 밝혔으면 더욱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과 같다고 하네.
출가는 고통스런 일이며, 남들이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아야 하며, 남들이 양보하지 못하는 일을 양보해야 하며, 남들이 받지 못하는 고통을 받아야 하며, 남들이 입지 못하는 옷을 입어야 하네. 자기를 굽히고 남을 받들며, 자기의 사사로움은 버리고 남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것이 출가인의 본분이다. 네가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출가할 수 있다.”
그가 말하였다. “이런 일들을 저는 모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너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냐?”
그가 말하였다. “저는 일본군 노역장에서 일을 하면서 그러한 괴로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출가하여 수도하는 것이 그것보다는 절반도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괴로움도 저는 참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였다. “그럼 좋다. 너를 받아들여 출가하도록 하겠다. 너는 이전의 것은 모두 놓아버려라. 마치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처럼 하면 될 것이다.”
나는 당시 그를 위하여 한 수의 게송을 지었다.
생각 생각에 생사의 고통을 잊지 말고,
마음으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게.
허공이 분쇄되어야 불성이 밝혀지며,
본체가 송두리째 탈락되면 본원을 보네.
念念莫忘生死苦, 心心想脫輪回圈.
虛空粉碎明佛性, 通體脫落見本源.
나는 또 그에게 법문하였다.
“현재는 말법시대로서 출가자는 많으나 실제로 행하는 자는 적으며, 불교를 믿는 자는 많으나 도를 이루는 자는 적다. 네가 기왕 진심으로 출가하였으니, 반드시 보리심을 발하고 광대한 원을 세워야 할 것이다. 세차게 부는 바람 가운데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되고, 뜨거운 불속의 정금(精金)이 될 것이며, 다른 날 도(道)를 원만히 이루면, 불교를 크게 빛나게 하여 출가의 첫 뜻을 저버리지 말거라!”
그리하여 나는 그를 데리고 삼연사로 돌아와 출가시켜 사미가 되었으며, 법명을 과순(果舜)이라고 하였다.
과순의 두타행
절에 돌아와서야 그가 왔다 간 것을 알았으며, 그들은 그가 그렇게 가난하다고 모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중들은 나에게 그의 나쁜 점을 말하면서 “당신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받아들여 제자로 만들어? 그는 먹을 밥이 없어서 출가하려는 거야!”
내가 말하였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좋은 것을 배울 수 있어. 그를 봐, 이후의 행동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다시 말해!”
과순은 절에서 밥을 하고 요리를 하였다. 그러나 매일 사람들이 그를 욕하였다. 그는 하는 일에 매우 조심하였으며, 수행에 매우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형사제들이 그와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수시로 그를 괴롭혔다.
그는 나를 따라 출가한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한 벌의 옷만 입고 솜으로 된 옷을 입은 적이 없으며, 솜으로 된 신발도 신은 적이 없었다. 그는 금전계를 지키고, 하루 한 끼만 먹었으며, 항상 좌선하고 눕지 않고 두타행을 행하였다. 나의 모든 제자 가운데 그가 두타행으로는 제일이었다.
과순은 수행에 정진하여 그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선정을 닦았다. 대략 반년이 지나자 약간의 지혜가 열렸다. 매번 정에 들어갔으며, 자주 하루 주야를 지나서 정에서 나왔다. 정중에서 그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과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나에게 울면서 절에서는 자기를 괴롭혀서 살 수 없다고 하면서, 움막을 지어 단독으로 수행하기를 하소연하였다. 그래서 그후 용왕묘 옆에 작은 움막을 지어 그곳에서 수행정진하게 하였다.
민국 34년(서기 1945년) 7월15일 우란분절 법회시 나는 제자를 데리고 불전에서 향을 사르면서 발원하였다. “만약 내가 백세까지 살게 되면 전신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하여 무상의 도를 구하리다!” 당시 모든 제자들도 발원하였으며, 과순도 발원하였다.
“제자 과순은 만약 상당한 기연을 만나면 약왕보살(藥王菩薩)을 본받아 부처님께 전신을 불살라 공양 올리겠으며, 백세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관찰해보니 그는 숙세에 그러한 원이 있었음을 알고 그의 소신공양의 발원을 허락하였다.
과순은 계율을 지킬 뿐 아니라 대승의 불법을 수행하였다. 그는 수행하는데 나보다도 더 성실하였으며, 나보다도 더 정진하였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제자였다.
과순의 소신공양
그 후 과순은 장춘 반야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다시 자기의 움막으로 돌아와 수행하였다. 같은 마을의 유(劉)거사와 양(楊)거사는 그를 따라 아침 저녁으로 예불드리고 <대비주(大悲呪)>를 염송하였다. 나중에 유거사는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양거사는 징용되어 팔로군에 참가하여 소식이 두절되었다.
민국 37년(서기 1948년) 7월 어느 날 과순과 고(高)거사가 움막에서 <대비주>를 염송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보니, 양거사가 아닌가.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집 뒤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과순은 대비주를 다 염송하고 집 뒤로 가서 그를 보니 생각지도 않게 한 마리의 여우가 꼬리를 끼고 도망가는 게 아닌가. 아마도 양거사는 전쟁터에서 죽어 그 머리가 여우에게 먹혀서 양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과순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과순은 대비주를 지송하여 이미 위덕(威德)을 갖추어 선정력이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우도 그의 마음을 어지럽힐 방법이 없어서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고는 물러난 것이었다.
과순은 세 가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즉 추워 얼어 죽는 것을 겁내지 않고, 굶어 죽는 것을 겁내지 않고, 가난해 죽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는 최후에는 불에 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는 불로 자기를 태웠다. 그는 원래 나를 따라 운수행각에 나섰다가 심양까지 왔다가 다시 되돌아갔다.
후에 공산당국의 핍박을 받아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민국 38년 4월 18일 그는 백 근의 나무와 세근 반의 콩기름을 준비하여 그 위에 단정히 앉아 그 몸을 태웠다. 그는 스스로 몸을 태우면서 정치스님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 당시 정부에 보여준 것이다. 그는 이 홍진세상이 너무나 괴로운 것을 보고, 중생을 대신하여 괴로운 과보를 받기를 원하였으며, 부처님 앞에서 중생을 위하여 회향하면서 자기의 몸을 불살라 부처님께 공양하였다.
그 다음날 마을 사람이 움막에 큰 불이 일어난 것을 보고 달려가 보니, 과순의 신체는 이미 재로 변하였으나, 여전히 단정히 앉아 있었으며, 오직 심장은 불에 타지 않았다.
그는 진정한 선정력이 있었으며, 이미 도업을 성취했음을 족히 증명한 것이다. 그의 일거일동과 언행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나중에 만불성에서 그에게 영원한 위패를 세워주었으나, 애석하게도 과순의 사진이 없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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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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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마하살
대단한 수행자 입니다 추위 배고픈 가난함,소신공양을 두려워 하지 않았군요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수행자로서 존경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각산 선생님. 이 내용은 어느 책에서 발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부디 댓글 부탁드립니다..... _ () _
나무관세음보살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