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하루를 쪼개어 마무리로서는 참 괜찮은 작품을 인사아트센터 2층 " 충북갤러리"에서 만나고 왔다.
물론 예정되었던 만남들이 꼬이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시간의 흐름은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 남편 최익규 님의 작품도 만나고 작가의 말을 듣기도 하며 더불어 함께 한 친구들과의 시간도 좋았다.
게다가 비슷하게 시간을 낸 친구와는 같은 카페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 함께 하며 시간 나눔을 하였다.
물론 이 친구는 쪼갠 시간의 일부로 만나진 터라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런대로 동시다발의 만남을 즐기는 것도 방법의 하나로서 모두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가질 수밖에.
살다보면 우선 순위가 무엇이었는지 더러 잊고 살기는 하지만 가끔 찾아드는 갤러리 순례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또한 나의 그라운드였던 광화문, 인사동과 충무로는
내 인생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삶자락 흔적터 이기도 해서 잊기는 어려운 장소다.
어쨋거나 한달 전에 있었던 달묵 박영현의 "꼴 연대기" 이후로 다시 찾은 인사동은
연말을 맞이하여 우리나라를 찾아드는 발걸음과 가는 해의 마지막의 짜투리라도 잡으려는
수능이 끝난 입시생들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로 채워지는 발길들로 부산하였다.
당연히 내 발걸음 역시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그 누구보다 먼저 갤러리에 도착하길 바라면서 많이 서둘렀다.
조용한 시간에 작가와 만나 그의 변모된, 변화되었을지도 모를 작품을 먼저 만나고 싶어서다.
들어서는 입구에 그의 작품명 "시간의 흔적들"이 조촐하니 걸려있어 한 컷 촬영하고 작가를 만나러 간다.
들어서 작가와 그의 아내 장초선과 인사를 하고 작품을 한 눈에 조망을 한다.
작품의 결이 달라진 것은 아닌데 그의 작품에 색이 들어와 있고 예전에는 대작이었던 작품들이 주류였다면
이젠 너도너도 쉽게 소장할 수 있도록 대중이 좋아할만한 소품이 조금 들어와 있다.
이는 작가적 입장에서의 변화를 감지하게 되는 일정 부분의 변모상태이기도 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하여 자신과의 사투를 벌여오던 시간을 일반 대중들과도 나누겠다는 말로도 보여지고
색이 들어갔다는 의미는 작가의 정체성과 대중적인 것과의 괴리감을 조금은 덜어낸 듯한 타협의 일종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사실 작가가 제목으로 삼은 "시간의 흔적들"은 단순한 시간을 기록한 작품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광목천을 구입하여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며 작품 제작을 하면서 작가의 인내 속에 함몰된 시간이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가도록 작가가 자리를 내어주면서 함께 한 작업이라고 느껴진다.
"시간의 흔적들"....이 작품 속에서는 사실 작가의 성향, 세계관, 그리고 삶을 관통하는 깊은 내면이 담겨 있음을 알겠다.
지난 번 전시 "한 땀 한 땀"에서 느껴졌던 반복적인 작업과 시간의 흔적을 시각화 한 채 바느질로 선을 만들어 낸 뒤
작가로부터 드러난 삶이 정직하고도 느린 반복이 계속됨을 시각화한 행위는 1차원 속에서 4차원을 느끼게 하였다면
이후의 작품 세계는 색채가 들어간 채색 작업이 눈에 들어오면서 작가 스스로가 뭔가를 내려놓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게 정체성이던 아집이던 자신만의 주관이었던지 간에....
사실 작가 최익규의 작품들은 눈앞에 있는 사물보다 그 사물에 스며든 사건, 기억,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집중을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독특한 작가로서 행보를 하면서 형체나 색채보다 사물이 지닌
보이지 않는 서사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작가 최익규로서 시작된 설치미술가로서의 변화를 보자면 타인인 그 누구에게나 이해받을 수 없는
작가만의 시선으로 이뤄진 작품으로 등장하였다가 어느 순간, 화려하지 않지만 때로는 미니멀하기도 한
유구한 세월을 거너온 광목천을 사용하면서 거기에 바느질이라는 힘을 빌려 자신의 시간을 녹여
그것들이 주는 힘을 모아 늘어놓거나 벽면 전시를 하므로써 작품 모두가 시간을 품은 연속물처럼 느껴지게 하며 새로움이라는 옷을 입혔다.
이는 작가가 겉보다는 속을 중시하며 순간보다는 흐름을 중시하는 성향을 보여주는 결정적 요소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시간의 흔적들" 은 작가가 만드는 작품이라기 보다 시간과 자연이 만들어낸 조형물을 시간에 대한 겸허함으로
작가가 받아들인 결과물에 가깝다고 보여지기도 하여 작가 자신 스스로 내면을 통제하기 보다는 흐름을 존중하여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버리지 않으면서도 약간의 타협 속에서 작품 속에서는 삶의 변화를 느끼게도 한다.
그래서 작품이 더욱 편하게 보이고 작가의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겠다.
또한 작가는 지나간 것들을 애정하며 온기를 느끼는 듯하다.
작가와 대화하는 순간마다 그의 서사, 가족과 특히 아버지에 대한 애정과 애증이 교차 되는 것을 느끼겠으니 말이다.
하여 작가는 과거를 단단히 품지만 상처를 입거나 오래된 기억들까지도 애정을 지닌 채 살아온 모든 흔적을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하지 않은 채 끌어안고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 작가가 천착하는 "흔적"이라는 단어에 숨겨진 작가의 본심은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과해온 삶의 무게를 자신만의 작품으로 번역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지난온 길에 대한 애틋함이 숨어있음을 알겠고 붙잡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음도 알겠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드러난 작품의 설치를 보면서 작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시간을 신뢰하는 작가이자 상처마저도 미학으로 끌어올리는 사람으로서 말보다는 침묵을,
순간보다 흐름을 믿는 내면이 가득한 작가는 과거의 잔향 속에서 삶을 다시 읽어내며
재정비하는 시선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겠다.
작가는 세상을 향해 비난을 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절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 또한 자신이 견뎌야 할 몫임을 나는지라 그저 뒷전에서 조용히 세상을 바라볼 뿐.
죄다 내려놓았다고 여겻지만 여전히 내려지지 않음도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ㄹ아버린 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 하나 쉬운 것은 없지만 에술을 업으로 삼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짧은 시간 작가와의 한담을 마치고 점심을 함께 하는 동안에도 작가의 귀는 열려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진 작가의 뒷모습을 보면서 예술가란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매우 크게 와닿았다.
그리고 그의 아내 역할은 더더욱 어렵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