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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실수 없도록
약 3:1-12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12 /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남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일에 열을 올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많은 과오를 범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가져야 할 우리 교사들이 악을 행한다면 더 큰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2) 누구든지 자기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일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3) 아무리 큰 말이라도 그 입에 물린 아주 작은 재갈 하나로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4) 또 아무리 큰 배라도 작은 키 하나면 어떤 바람 속에서도 선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5)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매우 작은 것이지만 잘못 놀리면 엄청난 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거대한 숲도 극히 작은 불티 하나로 살라 버릴 수 있지 않습니까? 6) 혀는 불꽃입니다. 혀에는 악이 가득 차 있어 몸 전체에 해독을 끼칩니다. 또 지옥의 불이 타오르고 있어 우리 인생의 행로를 멸망과 재앙의 화염 속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7) 인간은 온갖 짐승과 새와 땅에 기어 다니는 것들과 어류들을 지배해 왔고 또 지배할 수 있습니다. 8) 그러나 자기 혀만은 마음대로 길들이지 못합니다. 혀는 언제나 죽음의 독을 뿜어 내려고 도사리고 있습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어떤 때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를 찬양하고 또 어떤 때는 ㄱ)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을 저주합니다. (ㄱ. 창1:26) 10) 그래서 축복과 저주가 같은 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11) 한 샘에서 단물이 나왔다가 쓴물이 나왔다가 할 수 있습니까? 12) 무화과나무에서 올리브 열매를 따거나 포도나무에서 무화과 열매를 딸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짠 못에서 단물을 퍼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본문에서는 행함에 있어 중요한 부분인 언어에 대한 권면을 합니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2) 당시 선생의 자질이 부족한 자들이 선생이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잘못된 가르침이 많아지고 모범이 되지 못하여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그 중 가장 시급하게 교정되어야 할 것은 언어생활의 문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야고보는 언어생활에 대해 충고하면서 가장 먼저 선생을 향한 경고를 합니다(1). 선생은 언어로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말은 선생이 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노출되어 있는 약점입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짐승을 제어하기 위해 굴레를 씌운 것처럼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2).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3-8) 야고보는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여 혀의 특징에 대해 설명합니다. 짐승을 제어하는 재갈과 배를 운전하는 키를 비유로 작지만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들입니다(3-4). 키는 광풍 속에서도 선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운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환경과 영향 속에서도 인생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말이라도 잘못 사용한다면 작은 불씨가 산을 태우는 것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합니다(5). 이렇게 파괴력이 큰 혀를 제어하는 것이 온갖 짐승을 길들이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7-8). 말에는 죄로 병든 인간의 마음이 투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없이는 혀를 길들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9-12) 야고보는 혀의 이중적인 사용을 이야기 하며 모순적인 신앙생활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가 혀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로 저주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9). 한 샘에서 단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11). 샘은 근원에 따라 한 가지 물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입으로 나오는 말도 근본의 문제입니다. 우리 근본에 선이 있으면 선한 말의 열매가, 악이 있으면 악한 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12). 예수께서도 우리의 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마 12:34-35).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를 돌아보는 것은 우리 안의 마음과 믿음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적용: 당신의 언어 중에 제어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어떤 말입니까?
입술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축복하고 찬송하는 입술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하고 악을 행하는 입술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어디에 속합니까? 저주하고 악을 행하는 입술을 버리고 축복하고 찬송하는 하나의 입술만 가집시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합니다. 천 냥의 크기는 상놈이 양반될 수 있는 큰 돈입니다. 옛날에 상놈이 양반이 되는데 천 냥이면 양반의 신분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말 한 마디로 인생을 바꾸고 신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입술은 큰 자산이고 보화입니다.
< 설 교 >
선생이 되려고 들지 말라
약 3:1-2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그동안 함께 야고보서를 2장을 살폈고 이제 오늘부터 야고보서 3장의 본문을 따라가며 오늘 우리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풀어가는 것은 제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고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도 만만찮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는 경향이 큽니다.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들게되면 어렵다고 불평하며 물러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쉽게 느끼는 필요만 아니라 우리가 쉽게 느끼지 못하는 깊은 곳에 자리한 필요를 채우는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듣는 강해설교는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주제설교처럼 대지를 뚜렷이 1, 2, 3, 4 식으로 전개를 하지 않다가 보니 듣다가 다른 생각을 하면 따라잡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귀를 기울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고 조금 더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이 요구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을 따라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오늘 우리는 교사의 권위가 실추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의 권위가 언제나 짓밟혀온 것은 아닙니다.
특히 신약시대 야고보 선생이 이 편지를 쓰던 때는 달랐습니다. 초대 신앙공동체에서 선생은 매우 존경받는 직책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랍비라고 불리는 선생은 어디서나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의식에 참석해도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하긴 그런 관습은 우리 시대에도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광역시 기관장들이 모인 곳에는 시장님 다음으로는 교육감님이더라고요? 경찰청장님이나 시의회의장도 있지만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수장인 교육감이 두 번째 자리를 잡더라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필요하지만, 사람이 다음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생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선생은 부모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보면 선생의 위치가 중요시되는 것을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직분 가운데 교사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로서 선지자와 교사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교회 중에 세운 직분자를 언급하면서 사도와 선지자 다음에 교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도와 선지자 말고는 교사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은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와 선지자는 한곳에 머물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일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가 사도와 선지자의 일터였습니다. 반면에 교사는 한 지역 교회에서 머물면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거기서 새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기독교의 진리를 처음 받아들인 사람들을 진리로 가르치는 일이였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난 이들에게 자기가 배운 신앙과 지식을 심어 주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사, 당시엔 존경받는 직책인 만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사는 당시에는 인기 직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부모들은 아들 낳으면 “우리 아들도 랍비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큼 랍비, 선생이라는 직분은 존경받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처럼 공채 시험이 있었다면 오늘처럼 응시율이 높았을 것입니다. 100:1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은 연봉이나 직업의 안정성 때문이라면 당시는 시회적인 존경심 때문인 점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하긴 공동체 내에서 존경을 받는 이 직책을 위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자체가 교회를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동기에서 신학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잘못된 동기에서 지원을 한다면 교회에 많은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1.1 말로서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일차적으로 하신 말입니다. 교사의 직무는 주로 말로서 하는 직무입니다. 그러나 모든 선생들이 다 지혜롭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 다른 사람을 세우는 수도 있지만 어떤 이는 넘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경고를 여기서 바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새로운 학기를 앞두고 시원치 않는 교사들은 그만 두라는 말로나 보조교사로도 지원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야고보의 의도는 책임감을 인식하고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하는 호소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주일학교 교사 못 하겠습니다” “나는 구역장 노릇 못하겠습니다.” 하는 구절로 오늘 본문이 오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은 전문적인 직책으로서 선생을 향해서만 하는 말은 아닙니다. 결코 교육의 전문가로서 선생님이 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적으로 임명된 직책의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교훈이 아닙니다. “나는 교사직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나는 이 말씀하고는 거리가 멀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1.2 이 말씀은 오히려 매사에 가르치려 드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전문직으로서 교사뿐 아니라 매사에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 본문은 말합니다.
본문은 다른 이의 허물과 결점은 잘 들추어내고 자기 자신의 허물과 결점은 보지 못하는 우리 모두를 향하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인생의 악습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닌 듯이 내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의 약점을 잡아내는 데는 모두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선생 노릇들을 하지 말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많이 선생이 되려고 날 뛰지 마십시오. 알다시피 선생된 우리는 더 많이 심판 받을 것입니다’” 남을 향해서 “틀렸다”, “맞다”, “잘못했다”, “잘했다”고 끊임없이 판단하기를 좋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왜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까?
2.1 선생노릇 하려고 드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 놓고서는 다음 순간에 그 안 되는 것을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 죄인입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해 놓고는 자기는 하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결국 자기가 말한 것에 따라서 판단해도 죄인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책상 선생 노릇을 하는 자들은 자기가 한 말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인식하고 해야 하지만, 습관적으로 남의 일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이 내뱉은 말로서 자기 심판을 자초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2.2 들은 것을 못 지키는 사람보다도, 가르치고도 못 지키는 사람의 책임은 더 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알다시피 선생된 우리는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경고를 합니다. 이 경고의 목적은 두려워서 아예 입을 다물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발언에 따른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주님 자신이 가르치신 다른 본문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지혜롭고 진실한 청지기 비유를 할 때 주님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않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한 종은 적게 맞느니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7~48)
심판은 누구나 같이 받지만 어떤 심판을 받느냐는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얼마만큼 알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행했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할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그 직무상 도덕적으로 어떤 일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늘 말을 해야 합니다. 혹은 지식적으로 맞고 틀린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도 교사의 직무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생이라는 그 일의 성격상 비판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라면 그냥 늘 가르치려고만 든다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뭐든지 가르치기 좋아하고 시키기 좋아한다고 비난받는 직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중매하기가 쉽지 않은 직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전문인으로서 선을 향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교육도 없이 선생노릇을 하려고 드는 모든 이를 향해서 하는 말입니다.
여기 야고보 선생은 다른 이에게 ‘그래서 안 된다’고 말하면서 자기는 그런 잘못을 범하고, ‘이래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실천하지 않는 모든 선생 노릇하는 자들을 향해서 경고합니다. 자기가 말해 놓고 그것을 행치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2.3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한 말로 인해서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말을 할 때는 그것이 자기 자신을 향해서 정죄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너희 말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고 너희 말로 인하여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세상에 사는 어떤 사람이라도 잘못을 범합니다. 길을 걸어 본 사람치고 넘어진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죄인된 증거로서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리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롬 3:13~14)라고 고발합니다. 사람이 죄인인 것을 확인하려면 그 입을 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같은 진리를 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은데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다”(약 3:2) 모두가 다 실수가 많은 자이지만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온전한 자라고 하는 것은 말로 범하는 죄보다 범하기 쉬운 죄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지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실수조차도 다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야고보 선생의 논지입니다. 어떤 실수보다 말의 실수가 더 범하기 쉽습니다. 어떤 통제보다 혀의 통제가 더 어렵습니다. 여기 합격하면 그는 가히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인은 그 입에서 하는 말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말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찬송하는 시간에, 기도하는 시간에 하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가 집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내뱉는지가 우리의 신앙생활이 얼마만큼 성숙했는지 보여주는 척도가 됩니다. 여러분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특히 손아랫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습니까? 비판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입니까?
3. 우리는 어떻게 혀를 재갈 먹일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나는 말이 많아 좀 제어해야지’. 나는 너무 수다스러워 입에 반창고를 붙이든지 무슨 수를 내야겠다고 아마 한두 번쯤 고민을 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말의 실수 때문에 고민 해 본적이 있다면 이런, 저런 처방을 해보았을 것입니다.
3.1 그렇다고 부자연스런 침묵으로 혀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을 해도 좋은 때는 말을 안 하고 있다가 말을 안해야 되는 때는 말하게 되는 실수를 골라서 할 수도 있습니다. 잘 침묵하다가도 입을 열어서 안 될 결정적인 때에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이런 실수를 좀 줄여야지’ 그래 가지고 사람이 자기 혀를 통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시도해 보신 분이라면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게해서는 되지가 않습니다. 완전을 향한 길은 부자연스런 침묵으로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3.2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 아래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 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이 주님의 뜻과 같이 되고 싶어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렇게 경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마 12:34)
언제 이 말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손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표적이 나타날 때에, 귀신이 쫓겨나고 죄인이 새로워지는 표적이 나타날 때에,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저 사람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지금 저런 일을 하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너희 마음에 가득한 것으로 말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말하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눅 6:45)
더러운 말이 튀어나오는 입이 문제가 아닙니다. 악한 말을 내뱉는 혀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곳에서 “나쁜 생각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곧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이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막7:21-22, 표준새번역)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고 하든지 아니면 열매도 나쁘고 나무도 나쁘다고 말해야 말이 맞습니다. 하는 일은 선하다고 인정하면서 그 일이 어떻게 악한 영을 통해서 나온다고 비난 할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지에 맺히는 열매가 좋으면 좋은 나무입니다. 악한 열매만 맺는다면 나쁜 나무입니다. 그 나무는 베어버려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쁜 말이면 그 마음에 더러운 것이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속에서부터 바꾸어지지 않고는 겉으로 나타나는 말이 바꾸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행동 뿐 아니라 악한 말은 다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죄악입니다. 마음에서부터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3.3 혀를 통제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마음에 선한 것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흠모하고 앙망하십시오. 그 분이 가진 덕스러운 것을 내 마음에 품으십시오. 그리스도가 마음에 가득 있다 보면 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성령으로 은혜로운 것이다 보면, 입을 열면 그 들어 있는 은혜로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의 실수를 누구나 다하고 어떤 죄보다 더 쉽게 짓는 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통제될 때에 우리는 온전한 사람의 자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우리 마음이 충만해 질 때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과 언어, 즉 혀까지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통제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은 생명수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마음에 쌓은 선으로 선한 것이 흘러나올 때 연약한 자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병든 자는 치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던 자는 빛 속으로 옮겨집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말에 실수가 없는 자입니다. "예"라고 할 때 "예"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아니오"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정죄를 면하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아무 일에나 나서기 잘하는 우리들에게 선생노릇을 그만하라고 오늘 본문은 경고합니다. 한날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말에 실수가 없는 저 높은 곳을 향한 신앙의 길을 걷도록 권면합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궁극적인 방안은 마음 밭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통제 아래서 마음에 선한 것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궁극적인 해결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어떤 예물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은 입술의 열매임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경작한 밭의 소출을 감사함으로 드릴 때도 기뻐하시지만 우리의 마음 밭에서 나오는 입술의 열매는 더욱 귀한 예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기대하는 입술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감사와 찬송을 여러분의 입에서 끊어지지 말게 하십시오.
그리고 특정한 절기만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선행과 구제를 하나님은 언제나 기뻐하십니다. 우리 울산교회는 특별한 절기에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선한 목적에 사용하는 전통을 세워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돌아보십시오. 그러나 여기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멘.
말하는 축복
약 3:1-12 / 이필재 목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마음에 있는 생각을 입으로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하나님은 같습니다. 말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수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말씀, 로고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인데 그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갖는 가장 좋은 통로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데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하나님께 말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는데 말에 감정을 투입한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언어가 됩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말로서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말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고 사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고백 종교’라고 합니다. 로마서 10장을 보시면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말 중에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 훈련을 시켜주신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저는 개척교회 시절에,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닌 다섯 개를 하면서 교인들을 어떻게 기도 훈련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저의 목회의 큰 비중을 차지했었습니다. 공중 기도, 대표 기도를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데, 기도 잘못했다고 하나님이 벌주시는 법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편안하게,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하라고 하면서 대표기도 하는 법을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몇 명 없는 개척교회이기 때문에 어느 날 심방을 갔다든지 새벽기도회 같은 모임 때는 예고 없이 미리 말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별안간 기도하시라고 시키는 일을 많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지금까지 한 번도 대표기도를 안 해본 집사님께 “안 집사님! 오늘 기도 한번 해주시기 바랍니다.” 했더니 반응이 얼마나 좋은지 “목사님! 나에게 진작 대표기도를 시키실 것이지….” 이런 반응이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씩씩하게 나오니까 순간적으로 ‘이야! 이 분께 기도시키기를 참 잘했다. 저렇게 기도하고 싶은 사람을 여태까지 몰랐구나.’ 그런데 그 다음부터 그 분에게서 아무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분! 다 같이 눈감고 1분, 2분이 얼마나 진땀났는지 모릅니다. 같이 옆에 계신 권사님은 말이 나와야 되는데 아무 소리도 안하고 가만히 계시니까 “음… 음….” 그런데 그 자리에 장로님도 한 분 계셨습니다. “주여! 주여!” 그런데 한참 아무 말씀 없으시다가 “할렐루야, 아멘!” 그러신 적도 있었습니다.
또, 어느 여 집사님 한분은 저한테 개인 상담 요청을 하셔서 만났는데 아주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나는 목사님이 시키는 봉사 다 하겠습니다. 밥 하라면 밥 할 것이고 청소하라면 청소할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 목사님이 시키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나에게 대표기도 시키지 마십시오. 나는 새벽기도 때 목사님을 쳐다보면 심장이 멎을 거 같습니다. 나 기도시키려고 쳐다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상담을 무시하고 제가 한번 대표기도를 시켰습니다. “집사님,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니까 다들 눈 감을 것 아닙니까? 사실 나도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탁하셨는데 기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기도 시킨 후 이렇게 쳐다보니까 나를 쳐다보시며 입을 씰룩거리시는데 입모양을 보니 안 좋은 소리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도 만났습니다. 옛날에 서울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뜻 있는 사람들이 돈을 좀 내서 기독교 회관을 만들었었습니다. 그 기독교 회관이 뭐냐 하면 지방에서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들 많은데 그런 사람들에게 자격을 주어서 거기서 하숙비 안 받고 재워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끼, 어떤 때는 두 끼 밥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골의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입니다. 공짜 하숙집이 생겼으니 저마다 다 들어오려고 하잖아요? 돈 있는 사람들이 “우리 어렸을 때 공부하기 힘들었으니까 이런 혜택을 주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래서 시작한 일입니다. 일종의 자선 기관인 겁니다. 그래서 가난한 시골 학생들이 와서 혜택을 많이 얻었는데 거기서 생활하려면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예수 안 믿던 청년들이 거기서 혜택을 받으려면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겁니다. 얼마 쯤 예배 참석하고 난 다음에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해야 합니다. 경상도 학생이 한명 있었는데 교회 안다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있으려면 기도를 해야지 어떡합니까? 기도 차례가 되었는데 역시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을 했는데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끙끙 거리다가 경상도 사투리로 “에이, 더러워서 못하겠다!” 나가버렸습니다. 그 친구가 나한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내가 옛날에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창피했었는데 지금은 기도 잘하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언어는 무엇인가? 어떻게 말하며 살아야 하는가? 우선 오늘 성경말씀의 기록자는 야고보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혈육적 친동생입니다. 야고보서가 주는 진리가 있는데 복음에 있어서 구원의 문제가 아닌 성도의 생활면을 강조하는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진리의 뿌리가 아닌 열매 면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 받은 자의 하나의 영적 교양 과목과 같이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살라.”라는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 되어 담임 목사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30년을 한 목회자입니다. 30년 동안 초대교회 목회 경험을 하면서 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생활에 제일 중요한 부분이 뭔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말’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은 말을 조심해야 하고 말을 잘해야 하고 말의 지혜가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첫마디로 그는 자신에 대한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와 같이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은 더 큰 심판을 받는다.” 쉽게 말하면 “목사 되지 말라. 목사들이 죄를 더 많이 짓게 된다. 말해야 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말하고 내가 지키지 못할 때도 있으니까 이게 하나님의 심판이다. 너무 괴롭고 너무 무서우니 가능한 목사 되지 마라.” 이런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2절에 더 실감 있게 말하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설교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다른 사람들은 공감을 못하지만 설교자들은 다 똑같이 공감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어떤 때는 설교하고 나서 교인들 쳐다보기도 힘듭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고 판단될 때가 있습니다.
과거에 저와 같은 장로 교단에서, 한 노회에서, 한 지역에서 함께 교제하면서 목회하던 목사님 한 분이 계신데 이 분은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괴짜 목사님으로 유명합니다. 말을 얼마나 함부로 하시는지 그 분이 옆에 계시면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마음이 조마조마 합니다. 이민 교회는 교인도 많지 않은데 주일날 설교하러 올라가서 보면 누가 교회에 왔는지 누가 빠졌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누가 빠졌다 확인이 되면 기도를 합니다. 뭐라고 기도를 하느냐 하면 빠진 사람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박 아무개, 김 아무개 교회 안 나왔습니다. 놀러간 것 같습니다. 만약 정말 놀러갔다면 오늘 다리가 똑 부러지게 해주세요.” 제가 그 기도 받은 사람을 만났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자동차가 없다고 해서 우리 교회에서 사드린 적도 있었는데 “목사님이 말을 그렇게 이상하게 하시면 교인들이 상처를 너무나 많이 받지 않으시나요? 어떻습니까?” 물어봤더니 그 목사의 그 교인입니다. 아무도 상처를 안 받는답니다. “아니, 그렇게 이름을 다 부르면서 다리가 똑 부러지라고 기도했는데 어떻게 상처를 안 받습니까?” 목사님 기도가 응답된 적이 없답니다. 권사님을 보고도 그 목사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권사님! 그렇게 하면 교통사고 나서 죽을 겁니다.” 막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죽는답니다. 오히려 교인들은 목사님의 그런 매너를 천진난만하다고 합니다. 진짜 다리 부러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저렇게 말 안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같이, 악의가 없게 보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을 본인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이 사도들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설교를 안 하면 더 큰 심판을 받습니다. “내가 너를 말씀 전하라고 사도로 세웠는데 왜 전하지 않고 말을 안 하느냐?” 그래서 옛날에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해서 말을 잘 못합니다.” 얼마나 안하려고 했습니까? 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이 데리고 가시잖아요? “무슨 소리냐? 내가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들의 고민이면서도 즐거움입니다. 이제 동기생들이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보다 나이가 4~5년 위의 사람들이 동기생 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설교 안하니까 좋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럴 줄 알았는데 주일날이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다.” 사실 이 깡패는 싸움을 안 하면 주먹이 근질근질 하답니다. 목사는 평생을 설교를 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야고보 감독이 30년 목회 경험에서 이 말을 남긴 것은 성도들이 제일 많은 죄를 입으로 짓습니다. 실제로 입이 무거운 사람은 죄를 덜 짓습니다. 말이 빠른 사람은 항상 구설수에 휘말리게 됩니다. 야고보 감독은 이 점을 지금 강조하는 겁니다. 3절에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 같이 하라.” 말들한테 입을 함부로 못 놀리게 재갈을 물리잖아요? “교회의 시험거리 발생은 항상 입이다.” 더군다나 교인들은 항상 미확인 보도를 많이 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정보가 정확하지 않은데 추리 소설을 써내려 갑니다. 이것이 죄라는 겁니다. 나는 웃기는 말로 농담같이 하지만 상대방은 치명적 손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크리스찬 언어에 절대적 도움을 주는 세 가지 말이 있습니다. 가장 많이 하는 말 첫째가 “회개합니다.”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진리는 자기의 잘못은 인정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첫 번 설교는 “회개하라.”입니다. “너의 잘못을 인정하라.” 이 말씀이었잖아요? 회개의 언어가 훌륭한 사람은 절대 하나님이 버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십자가상의 강도는 회개하는 말 한마디로 순간적 구원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져서 예수님과 함께 그날 낙원에 갔습니다. 이것이 말의 능력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겸손히 회개하는 언어 한마디의 표현이 영원히 지옥에서 고생할 사람을 순간적으로 낙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죄가 많은 다윗을 끝까지 붙들고 가셨는가? 다윗은 회개의 사람입니다. 시편 51편에 보세요.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죄가 한번, 두 번이 아니라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나는 날마다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줄 알면서도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사오니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했고 이 어머니도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어머니도 죄인이요 아버지도 죄인인데 그들이 죄 가운데 나를 잉태해서 죄와 더불어 나와 탄생했으니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항상 죄밖에 짓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이 점을 높이 사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붙잡았습니다. 사실 밧세바 데리고 살았다고 유대인들이 얼마나 다윗 왕을 비난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다윗은 밧세바를 한 번도 원망 안합니다. “내가 죄 짓고 그도 내가 죄 짓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그 죄 때문에 본처의 자식들이 왕권 다툼의 쿠데타를 일으켜서 온갖 난리를 치는데도 굳세게 서서 마침내 밧세바와의 약속 “나 때문에 마음 고생했지? 네 아들에게 왕권을 주겠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영원히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도 그래서 다윗의 왕국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출생을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라고 연결했고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여!” 다윗과 연결했습니다. 말, 인정하는 회개, 그러나 정죄를 일삼는 입은 고난이 많아집니다. 회개하는 입은 하나님의 긍휼이 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하면서 선한 습관은 자꾸 키워나가야 합니다. 나쁜 말은 줄이십시오. 그리고 덕담과 선한 말을 늘이시기 바랍니다. 저는 선진국 사람들에게 하나 배운 것이 있습니다. 선진국 사람들의 우수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삼가는 습관입니다. 지금 어떤 사실이 아주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누가 그 나쁜 것에 대해서 잘 아느냐고 물으면 알고 있으면서도 선진국 사람들은 말 안합니다. 그들이 그때 늘 하는 제스처가 있습니다. “I don't know.” 그렇게 하면 그만입니다. 내가 말함으로 그가 더 어려워지니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르면서도 공개방송을 하잖아요? 이것은 크리스찬 매너로는 아주 나쁜 겁니다. 야고보 감독은 지금 그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두 번째 크리스찬 언어는 “사랑합니다.”입니다. 이건 할수록 좋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수련회를 해 주셨습니다. “너희들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제일 먼저 그 집에 복을 빌라.” 심방이 뭡니까? 복을 빌러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의 언어는 하나님의 복을 불러 오게 되어 있습니다. 괜히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저는 별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예배 다 마쳤는데 남모르는 사람이 날 만나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십니까?” 한 번도 못 본 사람입니다. 나이는 나보다 십여 년 위의 분인데 날 보자마자 90도 각도로 절을 하면서 덥석 두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 “이제야 찾았습니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6·25때 헤어진 친척이신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사촌, 육촌이 다 납북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얼굴도 제 육촌 형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흥분해서 “혹시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저는 이민 온지 10년 된 사람입니다. 제가 10년 동안 좋은 교회, 좋은 목사님을 찾아다녔는데 오늘 찾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칭찬하는 겁니다. 그러니 저는 형제 만난 것보다 더 흥분하게 됐습니다. “와! 이 사람이 과연 나를!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구나!” 그날 하루 종일 흥분했습니다. ‘좋은 교인 하나 만났다!’ 그런데 그 다음주일부터 안 나왔습니다. 그 분은 알고 보니까 교회마다 다니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목사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절대 나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그 사람을 기다립니다. ‘아! 목사들이 이민목회 너무 지쳐있으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하나 써서 돌아가면서 위로하는 은사가 있는 분이다.’ 주일날 마다 기다립니다. 최고로 훌륭하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진실성이 없어도 좋은 말입니다. 사랑하고 좋은 말은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겁니다. 사랑의 언어는 절대 문제가 안 됩니다. 누구든지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을 빌면 그 복이 내게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언어는 계속 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감사합니다.”입니다. 감사의 언어가 풍부한 사람은 사랑 받습니다. 감사할 것은 우리 주변에 항상 있는데 볼 수 있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오늘 주일날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가 달라집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반도의 문제가 세계에서 제일 긴장 속에 있어 늘 마음 아픈데 북한 주민들은 참 불쌍합니다. 저렇게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 정부 자선단체, 개인, 교회 할 것 없이 천문학적 숫자의 북한 돕기를 했다고 항상 신문에 나옵니다. 아주 돈 액수까지 발표 하면서 신문에 내잖아요? 정주영 회장은 소를 천 마리를 사가지고 자동차에 싣고 가서 자동차까지 다 주고 왔다고 신문에 나왔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의 통치자가 한번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요? “남한 정부 자선단체, 남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 감사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때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의 도움을 입었습니다. 우리도 어느 때 돕겠습니다.” 이렇게 한마디가 나왔다면 남북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안함 사건은 이제 합동 조사반, 한국만이 아닌 다른 나라 전문가들이 다 발표했습니다. 이번에 아시아 지도자들도 또 모여서 발표했습니다. 유엔에서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외부 공격에 의해서 배가 이렇게 되었다.” 다만 북한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어제 신문에 다 발표했잖아요? 그러면 공격에 의해서 되었다면 누가 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말 안 해도 다 북한 정부를 지목합니다. ‘공산당 정부는 왜 이렇게 감사를 모를까? 말 한마디 전하면 다 국민 전체가 좋아하고 더 교류가 잘될 텐데…. 툭하면 불바다 소리나 하고 무력하겠다고 앙칼진 방송만 저렇게 해야 할까?’ 저는 이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사랑의 쌀 만 가마 처음 보낼 때 그 일을 성사시킨 사람이 이광덕 목사입니다. 그분은 평생 다른 목회 안하고 북한 돕기만 하신 어른입니다. 저도 많이 협조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 교회 교인입니다. 목회를 안 하시니까 가족들, 딸, 사위, 며느리 할 것 없이 다 우리 교회 교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일을 하시니까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만 가마 처음 보냈었는데 어느 날 북한에 잡혀서 사형 당할지 모른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그 분 빼내는 작업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미국 국회의원들까지 다 동원하고 저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40년 동안 북한 돕기만 하신 분인데 그곳에서 영웅 대접을 해야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연변 과기대 만든 사람이 김진경 총장입니다. 한국, 미국 다 다니면서 모금 해다가 종합 대학을 훌륭하게 만들어놨는데 다 끝나고 총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지금은 평양 과기대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잘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잡혀서 사형수가 되셨었습니다. 그 다음에 용케 풀려나셔서 만났습니다. “아니, 목사님! 목사님 같은 분 거기 가면 영웅 대접을 해야지 죄목이 뭡니까? 왜 그랬답니까?” 그랬더니 발표를 했습니다. “교묘하게 간첩 노릇하지 않았느냐?” 이런 죄목이랍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상대방 정당에 대해서 그렇게 얄팍한 비인격적 인신공격을 끊임없이 하는 정치 풍토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나와서 해주었으면 합니다. 이런 생각이 뉴스 볼 때마다 듭니다. 말이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말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겁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여러분! 크리스찬 매너 가운데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을 지금 집중적으로 야고보 감독이 30년 목회 생활에서 권고하는 겁니다. 우리 입술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가 하면 독이 되기도 하잖아요? “♬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 우리 같이 한번 불러볼까요? “♬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생명이 되신 주 반석이 되신 주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 할렐루야!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버지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말하는 축복을 일평생 회개와 감사와 사랑으로 해나가는 지혜롭고 성령 충만한 아버지 자녀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언어를 선택하라
약 3:1-12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언어를 선택하라” 이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와 형제들과 이웃과 대화하기 위하여 말을 배웁니다. 어린아이들 말 배우는 것 보면 참 신기해요. 키가 자라는 것처럼 말도 쑥쑥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표준어를 배우면 좋은데 시골에서 아주 사투리를 배워서 자기들밖에 못 알아듣는 그런 애들도 있습니다. 저도 아주 시골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 31번지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일꾼들, 노동자들, 농민들이 하는 말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읍내에 내려와서 말을 해보니까 나하고 전혀 다른 말을 해요. 엑센트도 다르고 말투도 다르고 굉장히 부끄러움을 당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남북통일이 되면 제일 어려움이 언어일 것입니다. 우리 남쪽 사람들은 북쪽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북쪽 우리 동포들은 남쪽 동포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애를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만히 세상을 여행하고 다니면서 보면 하나님이 굉장히 취미가 다양하시다 생각되는데 아주 산골짜기에 있는 소수민족도 자기 나라 언어를 다 가지고 있어요. 이런 소수민족은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글 깊숙한 곳에 옷도 안 입고 벌거벗고 있는 족속들도 자기나라 말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서로 대화하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속에 우리 운명을 좌우하는 창조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말을 잘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배워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 부모님과 대화하고 우리 이웃과 대화하고 대화하면 그로써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입술의 말로써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도 하고 파괴가 오고 절망이 다가오기도 하고 축복이 다가오기도 하고 굉장한 능력이 말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을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것처럼 우리도 말을 통해서 여러분 생애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운명에 기쁘고 즐겁고 소망찬 것도 말로써 만들어 놓을 수 있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도 말로써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은 대화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켜서 하는 말이 있고 마귀가 우리에게 사주해서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말은 대화를 할 때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내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그렇게 느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말을 하는 것 보면 이놈의 마귀가 저 입술을 통해서 어떻게 주둥이를 알랑달랑하면서 내게 말을 하느냐. 굉장히 말을 들을 때 선택해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말을 한다고 모두 다 하나님이 대언해서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가 뒤에서 그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는 말을 따라가서는 낭패를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영적인 두 나라가 말을 통해서 나타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령께서도 눈에 안 보이잖아요. 성령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바람이 이리 불고 저리 부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 가운데 계셔도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잡지 못하므로 그냥 성령이 계신 줄만 아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저에게 와서 여러 가지 이야기 할 때 제가 들어보면 ‘아! 하나님이 지금 우리 성도를 통해서 내게 말씀하시는구나.’ 귀를 기울이고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마귀가 낙심시키게 하기 위해서 와서 아주 교묘한 말로 협박과 공갈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당장 알아들어야 합니다. ‘마귀가 날 낙심시키려고 이렇게 말을 하는구나.’ 언제나 두 나라 언어가 우리 주위에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말을 들을 수도 있고 마귀의 말을 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두 나라의 언어
예수님을 믿고 구원 얻은 자는 구원을 받기 전에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대속 구원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전혀 성경 말씀을 안 쓰던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난 다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세상 말은 사라지고 천국 말이 그 사람 입을 통해서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우리가 마음에 깨닫고 난 다음에 입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구나 우리 가슴에 숨겨 있다가 입술로 고백하게 되면 굉장한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생각하고 그를 통해서 우리 뜻을 표시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안 쓰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용서와 의로움을 받은 사람,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와 의로움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또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전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도 평신도 때 목사님이 나가서 전도하라고 해서 전도지 이만큼 들고 나가서 전도하는데 나중에 전도를 마치고 교회 다 오면 기도하는데 얼마나 고함을 치고 기도하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전도할 때 핍박을 받아서 흥분되어서. 마음에 굉장히 상처도 입고 겁도 나고 흥분이 되어서 고함치고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마음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도 무조건하고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난 다음 예수 믿으라고 전도지 주고 그러다가 핍박을 많이 받습니다. 왜 안 받겠다고 하는데 자꾸 주느냐고. “받아서 읽어 보세요.” “너나 읽어라.” 좀처럼 받아서 읽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연관이 있는 사람, 미리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전도를 하는 것이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고 길거리 걸어가는 사람 그냥 붙잡고 전도해서는 핍박을 많이 받고 마음이 잔뜩 상처와 흥분만 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면 전도를 하지 말라고 해도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는데 마음에 새벽기도 가고 철야기도 하고 주일날 예배드리고 하나님 말씀으로 감동을 받고 그러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입에서 하늘나라 말이 자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는 그 구원 얻은 하늘나라 말이 나와요. 죄가 용서받고 의로움을 얻은 말이 나오고 거룩함과 성령충만 받은 말이 나오고 치료와 건강을 받는 기적의 역사에 대한 말도 나오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받은 하나님의 은총의 말도 나오고 부활, 영생, 천국에 가는 말도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하늘나라 언어가 구원받은 사람은 넘쳐 나오는 것을 늘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이 왜 중요하느냐면 운명을 창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사이 신문을 보면 팔자를 고쳐준다는 큰 대문짝만한 광고가 나와 있어요. 팔자를 고친다고. 구자는 못 고치고 팔자는 고친다고 하는데. 전부 거짓말이거든요. 운명을 창조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오는데 하나님이 그 운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여러분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실 뿐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운명을 좌우하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입술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2절로 4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올바르게 말을 하면 몸 전체를 굴레 씌워서 이끌어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우리가 짐승을 재갈 물려서 이끌어가고 큰 배라도 키로써 배를 조정해가는 것처럼 혀를 가지고서 말을 통해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해 간다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혀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혀로써 말한 결과를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얼마나 우리의 말이 무의미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에 있는 말을 입으로 뱉고 난 다음에 말해 버렸으니까 나하고 관계가 없다. 천만에요. 말이 일단 내 입술을 떠나서 나가면 그때로부터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0년 만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생명이 있을 동안에 그 말이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하나님 뜻을 쫓아 생산적인 말을 하면 그것이 나가서 생산적인 일을 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술의 말을 파괴적으로 해놓으면 그것이 나가서 언제나 파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을 중요하게 하면 많은 일에 큰 은혜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는 “말”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어떻게 갚습니까? 그러나 정 그런 것이 없는 것을 우리 조상들이 거짓말로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 “말이 무슨 씨가 됩니까?”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고 입술로 말한 씨는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이외에도 보면 “혀 아래 도끼 들었다.” 말을 하는데 혀 아래 도끼가 들어 있으니까 그 말을 통해서 깊은 상처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 활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화살은 쏘고 난 다음에 가서 주워서 전통에 넣을 수 있지만 말은 하고 난 다음 못 주워 넣는 것입니다.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말하고 입술을 떠난 말은 주워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는 말 속에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이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 3:4~5)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도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면 자신의 말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말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래 말 잘하는 사람은 참기름을 바른 듯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말을 잘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실수가 많아서 그 말로 말미암아 나중에 상처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저같이 말이 둔한 사람은 말을 많이 안 하기 때문에 상처를 많이 안 입는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타락한 인류는 마귀의 손에 잡혀서 살기 때문에 말 자체가 마귀의 나타남을 유도하는 말을 많이 씁니다. 안 믿는 사람 말하는 것은 마귀가 따라서 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말을 많이 합니다. 말 자체가 마귀의 나타남을 유도해서 마귀의 조종을 따르지 중립적인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나오는 좋은 말 아니고 중간쯤 있는 말을 마귀가 말하는데 마귀가 우리에게 말하는데 중립적인 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마귀의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말이 있습니다. 중간에 숨어있는 말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빛을 유도하는 말을 사용하게 하시고 또 마귀는 어둠을 불러오는 말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5절로 6절에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가 우리에게 잘못 전달되면 큰 화재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지옥 불로써 우리를 태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불에 타야지 지옥 불에 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혀를 조심해야 된다.’ 그것 언제든지 생각하고 있어야 됩니다. 혀를 마음대로 내버려 놓고 나가는 대로 두면 혀는 생명보다도 마귀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는 것을 우리가 종종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씨 뿌리는 원리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혀를 하나님께서는 씨 뿌리는 원리로 우리에게 설명한 때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씨는 심는 그대로 거두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씨를 심어놓고 난 다음에 그대로 내버려 놓으면 안 나오지 싶어도 씨는 납니다. 우리 어릴 때는 고구마를 심는데 고구마 줄기를 잘라가지고서 줄을 만들어서 고구마를 심어 놓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형제들이 다 아버님께 가서 아버님, “나도 한고랑 주십시오. 좀 주십시오.” 그러면 기쁘게 주셔요. 고구마 줄을 잘라가지고서 심습니다. 여러분, 고구마는 시골에서 안 자란 사람은 모르는지 몰라도 잡수시는 둥근 고구마 그것을 심지 않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줄기를 잘라서 심어놓고 그 줄기에서 고구마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형제들 가운데 제일 많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심지만 추수할 때는 내 고구마가 제일 적습니다. 왜 그러냐. 매일같이 고구마에 물을 주면서 뽑아봤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고구마가 자랐는가 뽑아보고 또 심고. 3분의 2는 죽고 3분의 1만 사는 것입니다. 우리 형제 중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 물도 잘 안주고 말라 죽게 내버려둔, 게으른 사람의 고구마 줄은 뿌리가 나와서 열매를 맺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심든지 결과는 그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법칙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콩을 심었는데 팥이 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심어놓고 미움이 나도록 하지 않습니다. 축복을 심어놓고 화가 나오도록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꼭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서 기적을 믿고 심어놓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말은 마음 터전에 뿌리는 씨앗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가 기도해도 그렇고 부모와 형제, 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 마음이 밭입니다. 그 마음의 밭에 우리 입의 말로써 뿌리는 것입니다. 내가 직접 말을 해서 내 가슴에 씨를 뿌리는 경우도 있고 친구들이 내 마음에 뿌리는 것도 있고 부모들이 마음에 씨를 뿌려주는 것도 있는데 세계적인 위인들을 보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씨를 뿌린 그 씨가 마음에 뿌리를 내려서 위대한 인물이 되게 만든 케이스가 많습니다. 우리는 누가 심든지 마음속에 씨를 심습니다. 말은 마음터전에 뿌리는 씨앗인데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 우리 말을 하면 그 말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져서 그것이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어제도 한 사람에게 신앙상담을 했는데 굉장히 병이 악화되어서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는 분입니다. 언제 심장이 그칠지 모릅니다. 그런 걱정을 많이 하고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심장이 나쁜 것을 자꾸 생각하면 그 생각이 심장을 더 나쁘게 만든다. 그러니까 말로써 씨앗을 심어라. 무슨 씨앗을 심습니까? 예수님이 주신 치료의 말씀을 입으로 자꾸 하면 네가 내 마음에 치료를 심는다. 우리 마음이 밭이다. 남의 밭이 아니고 내 마음은 내 밭인데 내 마음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심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네가 나음을 입었다.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듣고 있으니까 내 마음에 자꾸 심으면 그것이 힘을 얻어서 심장을 고친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 그러니까 괜찮을까요? 괜찮은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괜찮을까요? 하는 그것도 심어진다. 괜찮고말고. 그래서 저하고 앉아서 똑같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나니’ 합창을 하고 난 다음에 집에 돌아가는데 하루에 30분씩만 아침저녁으로 그렇게 자기 마음에 말로써 심으면 그만한 효과가 나타나게 될 것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사다라는 유적지에서 종려나무 씨앗들이 발견되었는데, 그 씨앗을 알아보니까 2천 년 전의 씨앗이었습니다. 2천 년 전의 씨앗을 화분에 옮겨서 심으니 6주 후에 하나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났다는 것입니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 난 기사인데 2천 년 된 씨앗도 열매를 맺는데 하물며 지금 열흘도 안 된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싱싱한 말이 씨앗을 안 맺을 턱이 있습니까? 꼭 맺습니다. 우리는 말이 우리의 입을 떠나면 책임이란 추가 달린다고 말했었습니다. 일단 말이 내 입에서 떠나면 이루어져야 될 추가 달려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책임과 결과가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5만 번 내지 6만 번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입에 5만 가지, 6만 가지 일을 하는데 그 말을 이웃 사람 들으라고 하기도 하고 나 들으라고도 하는데 정말 주의해야 될 것은 이웃이 나의 마음 밭에 뿌리는 말씀의 씨를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람들이 와서 말하는 것을 마음에 열어놓고 받아들이면 내 마음에 이웃 사람의 씨가 열매를 맺어서 온갖 잘못된 것이 일어나기가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대개 서로 앉아서 이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칭찬하고 격려하고 좋게 말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당장 이 강단에서 내려가서 여러분 중 한사람과 이야기 좀 합시다 하고 아무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면 90%는 “못써요. 그 사람은 이러이러한 결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제가 50년이 넘도록 교회 목회를 했으니까 제직을 임명할 때 집사, 권사, 장로, 목사, 교역자를 선택할 때 말을 해보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 10명 중에 한 명은 좋다고 말할는지 몰라도 9명은 다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중에 사용해 보면 참으로 좋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다른 사람 마음 바탕에 씨를 심는데 잘못된 씨를 심을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3. 이웃이 나의 마음 밭에 뿌리는 씨
이웃이 나의 마음 밭에 뿌리는 씨앗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부모님의 말씀을 받는데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는 말은 그 자식의 가슴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한평생에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야 이 나쁜 놈아, 너는 도둑질이나 해먹고 살아라. 공부를 안 하고 밤낮 인터넷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뭘 하겠느냐?” 그러면 그 마음속에 무엇이 심어지느냐면 도적질하고 먹고 살라는 것이 심어져서 자기가 자기 보고 말합니다. 나는 도적질만 하고 먹고 살아야 된다. 나중에 도적질하고 먹고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거느리고 홀아비가 사는데 그 아들들 보고 이 세상에는 살아갈 수 없는 꿈이 없다. 꿈이 없는 세상이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적당히 살아라. 맏아들 보고 너는 뭐가 되겠느냐 하니까 꿈이 없으니까 될 대로 살지요. 둘째 아들 보고 “너는 뭐가 되겠느냐” 하니까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대학교수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서 처음에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했던 사람이 아버지와 두 아들들을 만나보았는데 아버지가 폐인이 되었고 두 아들 중에 목적이 없다고 한 아들은 공원 벤치에서 자고 기차역전에 가서 얻어먹고 살고 세 번째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고 한 아들은 대학 교수가 되어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이 아들은 대학교수가 될 것을 말했고 맏아들은 홈리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고 아버지는 꿈이 없다니까 꿈이 없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만히 앉아 계시더라도 여러분의 운명과 다른 사람의 운명을 여러분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뿌린다는 것은 굉장한 효과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듣더라도 여러분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서 인생에 꿈을 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 믿고 믿으면 말하게 됩니다. 말하면 그것이 여러분 생활 속에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꿈꾸고 믿고 말하자.’ 그렇게 하면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이 세상에 굉장한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보고 여러분이 직접 이야기하면 여러분 가슴속에 그것이 심어집니다.
신명기 6장 7절에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부모가 자식에게 끊임없이 말을 하면 어릴 때 그 말이 심어져서 나중에 인생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도 굉장한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과 선생이 우리에게 뿌리는 씨앗도 마음속에 받아 드려 자라게 하고 환경이 뿌리는 잡초의 씨앗도 많이 받아들입니다. 길거리에 걸어가면서 환경에 마음대로 뿌리는 씨앗을 받아들여서 운명을 그르치는 일이 많습니다.
야고보서 3장 8절로 12절에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한 샘에서 상반되는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단물과 쓴물이 나오지 않는 것을 알아요. 그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씨앗을 심어 놓으면 다 열매를 맺지 못하고 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니 콩은 콩을 심고 팥은 팥을 심고 벼는 벼를 심고 보리는 보리를 심고 잘 간추려서 심어야지 잡초를 심어놓고 좋은 씨앗이 맺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기르는 자녀들의 가슴속에 온갖 잡초를 심지 말고 한 가지, 한두 가지만 심더라도 집중적으로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있는 집에 대접을 받으러 갔는데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한다고 땀을 펄펄 흘리면서 애를 쓰는데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만 쳐다보고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화가 났습니다. 화닥딱 일어나서 부엌에서 방문을 확 열어 제키면서 “주님, 이게 뭡니까? 나는 부엌에서 음식 준비한다고 죽을 고생을 하는데 이 마리아는 앉아서 말씀만 배우고 있으니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마리아를 명령해서 언니를 도와서 음식 좀 만들게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고생하나 한두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하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으니 뺏기지 아니하리라.” 우리 주님께서도 일 많이 벌려 놓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을 한두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열심히 하라. 그것이 성공을 가져오는 비결이 된다고 했는데 오늘날 아주 머리가 좋고 총명한 사람이라도 너무 많은 일을 벌려 놓으면 그 일에 잡혀서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만 하든지 한 가지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 15장 4절에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온유한 말, 마음에 심는 사람은 생명이 넘쳐나고 패역한 말을 심어 놓으면 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
마음에 좋은 말은 뼈에 양약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어서 마음에 가득하게 채우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양약이 되고 지혜가 되고 총명이 되고 몰약이 되고 재능이 되고 결국 이 말씀이 여러분과 나를 크게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잘 못해서 잘못된 무리가 껴서 잘못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심어 놓으면 우리 마음에 잡초가 무성히 나고 나중에는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가정사역자인 캐롤 레드는 「자녀를 크리스천 리더로 키우는 7가지 원리」라는 책에서 “격려의 힘”이 매우 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제시하는 격려의 방법은 우리가 바로 적용해 볼 수 있는 것인데, 메모지나 카드에 칭찬 한두 문장을 적어서 아이들의 베개 위, 도시락 안, 신발 속, 방문에, 이불 속, 교과서나 성경 갈피에 적어 놓아둔다는 것입니다. 그냥 적어주는 것보다도 조그마한 카드에다가 나는 너를 사랑하다. 네 아버지도 너를 사랑한다. 우리는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될 줄 믿는다. 너 요사이 공부를 열심히 하니까 참 너의 앞날이 희망이 있다. 이렇게 간단한 말을 적어 놓으면 책을 펴다가 보고 그것이 깊은 마음에 인상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칭찬과 격려의 말로써 자녀의 마음 밭에 좋은 씨앗을 뿌리면, 점점 자라서 마침내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자녀를 기를 때 한 자녀 세 사람쯤 기르면 한 짐 짐을 짊어진 것과 같을 것입니다. 세 자녀들을 다 격려해서 훌륭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 여러분은 열심히 애를 쓰고 힘을 써야 될 것인데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격려의 말이 제일 효과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무엇보다도 격려의 말이 아버지가, 어머니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 그 말은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자녀들을 많이 안 낳으니까 그런 걱정도 면하고 마는 것인데 우리 한국에는 자녀들이 결혼해서 자녀를 안 낳으려고 해요. 일본에서는 이제 자녀들을 많이 낳는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일본 사람들에게 자녀 구걸하러 가면 안 될 것이니까 여러분도 자녀들에게 자녀 많이 낳도록 협조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경기도에서 지사님이 날 보고 어린 아이 낳게 하는 총책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왜 내가 책임을 지느냐고 하니까 목사님이 매일같이 설교하는 설교가 텔레비를 통해서, 라디오를 통해서, 또 강단으로 널리 퍼져가니까 제일 젊은이들과도 접촉이 많으므로 그렇게 해줘야지 우리 말은 안 듣습니다. 시집도 안 가려고 하고 애들도 안 낳으려고 하니 우리 장차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 제가 제일 말을 못했어요. 그리고 내가 부흥회를 열 때도 자녀들 낳고 애들 많이 낳으라고 말 안할 때 도지사가 참석해서 나 보고서 “아이고 좀 말을 해달라고 했는데 말을 안 해주네.” 그랬는데. 그런데 실상은 우리 한국 젊은이들이 없어지고 전부 우리 같이 늙은 사람들만 생겨나면 우리나라가 큰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젊은이들을 많이 생산해 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자리를 사표를 냈으니까 이제는 자연인으로 돌아와서 여러분에게 격려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4. 내가 나의 마음 밭에 뿌리는 씨
오늘날 다른 사람들이 내게 말을 뿌려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나의 마음 밭에 씨를 올바르게 뿌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긍정적인 말은 남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 보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를 보고 너 훌륭하다. 너 지혜롭다. 너 건강하다. 너 장사 잘 한다. 그런 효과적인 시인을 하면 굉장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잠언서 6장 2절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여러분을 얽어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자기가 칭찬하는 것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말해야지 자기가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내게 능력 주시므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조용기 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다. 한번 따라 읽어 주십시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나는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말을 안 해줄지라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여러분 입 밖에 나가면 여러분 환경에 역사해서 열매를 맺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하면 된다. 나는 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이래 봐도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로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동행하시면서 축복해 주십니다. 필요한 말을 입에서 계속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이 나가서 여러분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격려하고 또 자기 이웃을 격려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민수기 14장 9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제는 정탐을 할 사람, 열두 명을 택해서 모세가 정탐하고 오라고 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탐하고 와서 긍정적인 말로써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했느냐면 “그들은 우리 먹거리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다른 열 사람은 이렇게 말 안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보다 강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 사람들의 성벽은 높고 장대한 사람들이 살고 우리는 전쟁을 하면 진다. 우리 자녀들이 포로로 잡힐 것이다.” 긍정적인 말도 남고 부정적인 말도 남는 것인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을 한 것을 받아서 그것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가 여호수아와 갈렙이 한 말을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 14:9)
이렇게 여호수아와 갈렙이 긍정적으로 시인한 결과로 이 두 사람은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한 사람은 들어가지 못했었습니다. 말을 바꾸면 인생이 바꾸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다른 것으로 바꾸려고 애를 쓰지 말고 말로써 여러분 인생을 이 자리에서부터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집에 돌아가기 전에 인생부터 바꾸고 출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붙잡고 인도해 줄 인생이 바로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고 “나는 왜 감기만 들면 기침이 나오고 가래가 나오고 왜 빨리 안 낫느냐. 내가 늙어서 이제 이 모양이 되었나. 이제 버림받게 되었나. 왜 이러냐?” 그렇게 하면 더 나빠지지요. 감기가 들려서 집에 드러누워 있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일어서서 걸어 다니게 되고 다른 사람은 폐렴이 든 사람도 있는데 나는 건강한 폐를 가지고 있고 기침이 나와도 사람들 있는데서 큰 기침 안 하고 잔기침만 하니까 좋다고. 좋게 말하면 당장 자기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 제가 말은 어눌하게 하지만 참말을 한 것입니다. 오늘 집에 돌아가기 전에 여러분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하고 칭찬을 하고 격려를 해주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말이 여러분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뿌리는 씨는 인생항로를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가 되므로 여러분을 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절로 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야훼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완전히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자기들에 대한 저주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민수기 14장 28절로 29절에 한번 따라 읽어 주세요.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겠다. 하나님이 여러분 말씀을 듣고 있어요. 나쁜 말을 하면 그대로 들은 대로 해주고 좋은 말을 하면 그대로 좋은 말 들은 대로 해주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마음속에 심어서 입으로 고백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이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긍정적인 말을 계속해서 하나님이 도와주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34편 12절로 13절에 보면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8~10)
오늘 이 말씀을 우리가 다 보면 우리의 입술로써 우리에게 심어 놓은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심어주는 것도 있고 친구들이 심는 것도 있지만 여러분이 혼자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잠자리에 있을 때 아침에 깨어났을 때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 이것이 여러분 인생을 변화시키는데 가장 큰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굉장한 비결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고 내가 칠십 평생을 살겠느냐.” 그러면 칠십에 죽습니다. “아이고 내가 백 살을 살아야지. 백 살을 살아야 돌봐주지.” 입으로 자꾸 말하면 마음속에 그 씨앗이 심어져서 온 전신기관이 백 살 목표로 앞으로 가! 전부 백 살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그대로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술에서 30초 말하는 것이 가슴에서 받아들여서 30년 동안 그것이 복이 되든지 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입에서 나간 말은 불과 30초밖에 되지 않지만, 상대방의 가슴 속에는 30년 동안 남는 말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홧김에 내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결국 파경에 이르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부부관계를 파경에 이르게 하는 말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부부간에 말 몇 마디 때문에 이혼을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까 첫째로, “당신이 하는 게 늘 그렇지. 언제 잘 한 적이 있나?” 아주 평범한 말 같지요? 그러나 듣는 사람은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누가 여러분 남편이 와서 “당신이 하는 게 늘 그렇지.” 언제 그러느냐. 반찬을 만드는데 장찌게가 맛이 없어요. 김치가 맛이 없고 장찌게가 맛이 없어서. “아이고 반찬 좀 잘 만들어야지. 오늘 맛있는데요? 맛있기는 뭐가 맛있어? 당신이 만든 것 늘 그렇지! 아무 맛도 없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 말꼬리가 되어서 서로 원망하게 되고 싸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비난의 말입니다. 둘째는, “너나 잘 해!” 나도 이번에 누구에게 그런 말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집사람에게 사용한 말은 아니에요. 갖다 일러바치지 말아 주세요. 내가 여기에서 설교한 것 갖다 일러 바쳐서 혼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뭐하려고 하다가 이렇게 되었노? 누가 와서 날 보고 자꾸 나비 넥타이를 매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너무 어려 보이니까 젊잖게 긴 넥타이를 하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넥타이 없이 와도 좋다고 했다가 자꾸 잔소리가 많아서 내가 그 사람 보고 너나 잘해! 너나 잘해! 그러니까 나는 목사님 잘 보이라고 내가 했는데 괜히 오해 하네? 오해가 아니라 나를 자꾸 비난하니까 그렇잖느냐. 너나 잘 해라는 말은 비난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부부간에, “주제 파악이나 잘해라!” 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저런 소리하냐. 그것도 들으면 크게 상처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예 말대꾸를 안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체 만 체 해요. ‘너는 너 말 해라. 나는 내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만 조심하면 이혼하지 않을 것도 말을 잘못해서 이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간에도 어떤 말의 씨앗을 뿌리느냐에 따라서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고 원수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이 씨가 되어서 우리에게 생명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역장님, 구역장님 영혼들을 많이 구원하려거든 먼저 그것을 가슴속에서 보고 그 다음에는 바깥에서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사는데 현재 일어나는 일들은 과거에 내 가슴속에서 일어났던 것들이 지금 옷 입고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가슴속에서 바라는 것이 뭡니까? 가슴속에서 기대하는 것을 그림으로 그리십시오. 그냥 하지 말고 그림을 깨끗이 그려 보십시오. 마음의 기대를 그림으로 그려 보시고 그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입술로 흥얼거리고 노래하듯이 흥얼거리고 다니면 그것이 나가서 내일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내일 오늘과 같이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보다 더 나아진 삶을 살 것인데 그것이 어디에서 있느냐. 여러분 가슴속에 지금 들어앉아 있습니다. 씨가 되어서 지금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내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늘 내 가슴속에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을 등한히 보지 말고 깊이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관심을 가지고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훌륭한 교수도 되고 목사도 되고 세일즈맨도 되고 원하는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고 소망 찬 꿈을 꾸며 할 수 있다는 믿음의 말을 하고 말의 고백이 소망이 넘치도록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세상을 살려내는 언어의 힘
약 3:1-12 / 박용래 목사(대전교회)
단편소설 '깊이에의 강요'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 주인 공으로 한 여류 화가가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평론가가 작품을 구경한 후 그림에 대하여 평가를 하기를 "당신 작품은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으나 아직 깊이가 부족하다" 는 말을 합니다.
이 화가는 재능도 보이고 마음에 와 닿는다는 말은 다 잃어버리고 깊이가 부족하다는 말에만 마음이 걸렸습니다. 그녀는 깊이라는 두 글자에 집착을 합니다.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깊이'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술과 약물로 혹사시킵니다. 아름다웠던 모습은 고뇌와 집착으로 엉망이 되어갑니다. 살아갈 의욕을 잃어버린 그녀는 결국 '깊이' 없는 자신의 그림들을 전부 찢어버리고 1백 39m의 높이에서 깊이를 알기 위하여 몸을 아래로 던져버렸습니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작품 이야기입니다.
▣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씨가 됩니다. 그런데 그 씨가 어느 때는 사람에게 활기와 용기, 힘, 기쁨, 소망, 행복을 주는 생명의 씨 역할로 심어질 경우가 있고 어느 때는 절망과, 우울, 슬픔, 고독, 포기 등의 사망의 씨로 심어질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말의 씨는 사람을 살리는 강한 힘을 가질 수도 있고 말의 씨는 사람을 죽이는 강한 힘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언어가 있고 사망의 언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 야고보가 삼십년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이 결국은 말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정의 불화도 말 때문이요, 교회의 분열과 다툼도 결국에는 말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말에 대하여 비유하고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말에 대한 교훈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말에 실수를 줄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말에 대한 실수를 줄여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에 실수가 많으면 흠이 많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말에 실수를 줄이도록 해야 합니다.
▶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인격도 있고 재산도 있고 명예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훌륭한 것을 가졌다고 해도 어쩌다 말 한마디 잘못하고 나면 그 훌륭한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바친 오랜 세월과 각고의 노력이 말 한마디 때문에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말에도 말에 대한 격언이 많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 한마디로 공든 탑을 무너뜨린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 어떤 가정에 결혼 한지 10주년을 맞이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무엇을 가지고 싶어? 이번에는 큰마음 먹고 준비할 테니 부담 없이 말해봐.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은 달랐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오늘 밤 집에 와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두 시간만 들어 주면 그것이 가장 좋은 선물이에요.
남편은 아내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래 오늘밤 내가 집에 일찍 들어가서 당신이 하는 말 원 없이 들어 줄 테니 < 그건 그거고 선물은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
아내는 선물은 사양하고 오늘밤 원 없이 나의 이야기를 2시간만 들어 달라는 것인데 2사간 동안은 내 이야기를 들어 주면서 남편이 할 말이 있다면 그래 맞아, 옳아, 그렇지 세말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어렵지도 아니한 것 그런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딱 2시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 결혼 10주년에 남편이 꽃다발 하나를 가지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란다에 커피를 끌여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내- <여보! 우리 처음에 기차에서 당신하고 만났지요?>
남편- <아니지. 버스에서 만났지? 또 알지도 못하면서 또 우길 거야. 당신은 너무 모르면서 고집만 센 것이 탈이란 말이야.>
아내-<여보 잊었어요. 오늘밤은 두 시간만 맞아, 옳아, 그렇지 하기로 했잖아요.>
남편- 그런데 당신이 잘 모르면서 고집만 부리잖아.
아내- 여보! 오늘밤은 무조건 당신이 나에게 주는 선물은 2시간동안만 그래 맞아, 옳아, 그렇지. 세 마디만 하는 거잖아요. 잊지를 마세요.
남편- 그래 알았어.
아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먼저 내게 프로 포즈 했지요?>
남편- <아니지 당신이 먼저 결혼하자고 편지 보냈잖아?> 그것도 기억 안나는거야.
아내- <여보. 여보. 제발 두 시간만 맞아, 옳아, 그렇게 하기로 했잖아요.>
남편- 남편은 울화가 치밀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결혼 10주년 선물로 주기로 한 말이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아무 말도 않고 두 시간만 들어 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아내가 그 동안 마음에 쌍인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시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들어 주던 남편은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그리고 흐느끼기 시작을 했습니다.
▶► <내가 그 때 농담으로 한 말 가지고 그렇게 몆 일씩 잠을 못 잤나?.
그 때 그런 일 가지고 그렇게 결혼을 후회했나? 그렇게 내가 무심코 한 말이 그토록 당신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아프게 했었나? 무심코 던졌던 말이 당신의 가슴에 그렇게 비수로 꽃혀 상처를 입고 살아왔는가? >
결혼 10년 동안 아내가 남편이 던지는 말의 폭력 때문에 고통당하고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되어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무심코 던진 말 때문에 아내의 가슴 알이 하는 10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아픈 마음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 이제는 남편이 1시간동안 이야기 하고 아내가 무조건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두 시간 아내의 말을 듣고 난후에 남편도 아내에게 그동안 아내의 말 때문에 힘들었던 것을 고백했습니다. 아내는 시댁이나 처가모임이나 친구들 모임 때로는 직장 동료와 상사들 모임에 함께 나가면 항상 말을 많이 하는 편인데, 남편이 생각할 때는 아내의 말이 논리도 없고 쓸데없는 말 때문에 남편은 아내를 미워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함께하는 모임만 돌아오면 남편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내 없이 모임에 나갈 수도 없고 모임에 나가면서는 오늘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만 모임에 참석하면 무심코 내뱉는 아내의 말 때문에 남편은 가슴에 열불이 끌어 올랐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에 대한 실수 때문에 아내를 죽이도록 미워하는 마음과 아내에 대한 분노심을 가지고 아내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외롭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아내도 놀랬습니다.
◈ 이 부부간의 10년이란 결혼생활은 말 때문에 피차 가슴에 멍든 세월을 보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마음에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피차 잘못을 뉘우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부부는 결혼 10 주년에 가장 값진 선물을 주고받는 행복한 밤이었다고 합니다.
▶ 성경에는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목회 가운데 말 때문에 성도들이 상처를 받고 시험 들고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말에 대한 실수를 줄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세상을 죽이는 사망의 언어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야고보는 사람의 혀를 여러 가지로 비유를 했습니다.
(1) 배의 키와 같다고도 비유했습니다.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 요즈음 여격 선도 엄청나게 커서 수백 명의 사람이 타고 물건을 실러 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여객선도 작은 키 하나로 배의 방향과 전체를 안전하게 항구로 운전해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내뱉는 말이 바로 이 배의 키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의 말은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람을 해치게 하며 세상을 파괴하는 사망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방과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혀는 마치 불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 불이 한번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갑니다. 작은 불씨가 엄청난 재산과 생명을 해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한순간의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말 한마디의 여파는 엄청나게 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심코 내뱉는 말은 불을 지르는 것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무서운 것이 말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거짓이나 비방이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사망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말을 했으면 그로 인해 파급되는 영향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정치권에서 퍼트리고 책임을 안지는 말들 때문에 결정적으로 상처를 입고 인격과 생명을 다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3) 혀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3:8-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것들이 잘 사용하면 특효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은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가 되기도 하지만 언어를 잘못 사용하면 사람을 죽이는 독처럼 사망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하며,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리고 말은 손을 넘어서기도 한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만 해치고 죽일 수 있지만 말은 먼데 있는 사람까지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손보다 말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 말은 쏜 화살보다도, 휘두르는 칼보다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화살이나 칼은 방패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이 쏘아대는 살상력은 피할 길이 없습니다.
성도들의 말은 어디를 가든지 약이 되도록 해야지 독이 되도록 하면 안 됩니다.
▣ 노회나 총회에 참석을 해보면 회중이 회장에게 발언하는 것이 공격적이고 심문하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자기의 당회장이 노회장인데 그 교회 당회원이 발언을 하면서 따지듯이 추궁하듯이 발언하면 측은하고 한심스럽게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 교회에서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회를 열면 발언이 거칠어서 꼭 싸우러 나온 사람들같이 따지고 추궁하고 심문하듯이 발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면서 은혜 떨어진다고 회의는 아예 참석하지 아니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교인들의 발언이나 말의 내용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것을 기대하면서 참여한 성도들이 수준이하의 발언을 들으면 그런 회의에 참석하려 하지를 아니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를 말할 때에도 먼저 상대방을 존중해 주고 자신의 의사를 발언합니다. 그 의견도 좋은데 저는 이렇게도 생각한다던지 혹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더욱 좋은 뜻이 있었는지?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상대방의 의견과 생각은 무시하고 자신의 발언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자신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4) 혀는 길들여져야 합니다.
본문 7-8절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이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
▣ 가끔 태국이나 관광지에 가보면 동물 쇼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코끼리 쇼를 하는데 보면 조련사가 코끼리 등에 타고 관광객 앞에 오면 등치 큰 코끼리가 인사를 하고 춤을 추면 사람들이 돈을 코에 물려주면 돈은 등에 탄 조련사에 주고 관광객에게 절을 하고 춤을 주고 재롱을 부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물원이나 곡마단에서 잘 길들여져서 조련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재롱을 떠는 짐승들을 볼 수 있습니다. 원숭이의 재롱 또한 바다의 돌고래까지 조련사에 의해 길들여진 동물이나 물고기의 재롱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나운 호랑이나 곰도 길들여진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기도 합니다. 개는 길들여지면 시장까지 봐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모든 짐승들은 조련사에 의하여 길들여지는데 그런데 사람들의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신의 혀를 다스리기가 쉽지 아니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릇 자기 혀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입술에서 저주의 말을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내 입술에서 파괴의 언어를 제거해야 합니다.
3) 세상을 살려내는 생명의 언어가 있습니다.
▶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거짓된 경건의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떠들어댑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이것은 은혜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함부로 내뱉어지는 말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1장 26절에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사망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생활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경건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찬송도 축복도 말로써 합니다. 그런가 하면 칭찬도 원망, 저주도 말로써 합니다.
히브리말로 '축복'은 '바라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에서 '바라크'라는 말은 '좋은 뜻의 말을 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라크'라고 하면 찬양한다는 말이 되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크 한다'라고 하면 축복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좋은 말을 하면 이것이 찬송입니다. 사람을 향해서 좋은 말을 하면 이것은 축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은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망 한다 망한다 하면 망합니다. 복을 빌면 복이 됩니다. 은혜가 있을 지어다 하면 은혜로워집니다.
▶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은 축복의 말을 합니다. 창조적인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언어의 변화가 행복의 척도입니다. 행복하려면 먼저 말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말이 좋아져야 합니다. 말이 신선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충만한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드럽고 온유한 말을 해야 합니다.
▣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
힘을 내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도록 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힘을 얻을 테이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걱정이 사라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속삭여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기를 얻을 테니까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용기가 생겨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속삭여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기를 얻을 테니까요
조건 없이 용서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로 정말 감격하거든요. 그러면 당신도 용서를 받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푸근해 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또렷하게 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감사를 받게 될 테니까요
아름다워요. 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을 꼭 전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아름다워지게 될 테니까요
사랑해요. 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사랑이 깊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하셔야 해요
그러면 당신도 사랑을 받을 테니까요
사람은 손이나 발로 짓는 죄보다 입으로 짓는 죄가 훨씬 만다고 합니다.
성경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더럽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입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우리의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을 죽게 만들어 버리는 사망의 언어를 버리고 세상을 살리게 하는 생명의 언어를 사용하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들의 언어를 통하여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며 모든 사람을 살려내는 언어의 힘을 가진 성숙한 성도의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의 실수가 없어 온전한 사람
야고보서 3:1-12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 바로 직전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했듯이 야고보는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증명됨을 강조했습니다. 믿음의 증거인 행함은 달리 말하자면 변화와 실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된 어떤 친구를 가리키며 제3자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아마도 “걔 달라졌어”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와 실천을 제일 먼저 보여주는 것이 “말의 다스림”이라고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 한 것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진정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에서 이 “말의 다스림”의 문제를 다시, 그리고 보다 길게 다룹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교회공동체의 건덕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유대인의 문화에서 선생은 매우 가치 있고 존경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유대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생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야고보는 비록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교사들의 책임은 크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행은 다른 이들의 영적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들에게는 다른 교인들에게보다 훨씬 엄격한 판단기준과 철저한 비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들보다 가르치는 이들은 그들의 언행을 더욱 더 신중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한 것은 선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사회나 선생은 필요합니다. 선생이 없는 사회는 막 되먹은 사회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선생이라는 직업이나 지위의 책임이나 중요성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너도 나도 무작정 선생이 되려하지 말라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너도 나도 다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으려 하는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또 우리나라 같이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가는 사람이 많은 나라도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박사학위 받고 나면 서로 다 대학교수가 되려고 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지위에 있을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격과 교양과 품위를 알고 갖추기를 힘쓰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수사회에서 온갖 추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할 말 안 할 말 가리지 못하고 성희롱이나 인격모독적인 막말을 내뱉다가 학생들로부터 반발과 비난을 받고 부끄럽게 강단에서 내려와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것입니다. 꼭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다 말조심을 해야 하고 자기 혀를 잘 단속해야 합니다. 그리고 혀 단속과 말조심에 대한 경각심과 의지를 무너뜨리거나 약화시키는 주범인 술을 삼가야 합니다. 말실수 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제일 잘 내미는 핑계가 사실인지 거짓말인지는 모르지만 “술 취해서”, “술기운에”라는 것입니다. 천편일률적입니다. 그걸 안다면 술자리에 가는 것 자체를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술자리에서 술 한 방울 안 마실 자신이 없거나 먼저 요구하지 않아도 다른 참석자들이 의례히 내 앞에는 술 대신 콜라나 사이다를 미리 갖다 놓을 정도가 되지 않았다면 안 가는 것이 좋습니다. 술은 실수의 가장 확실한 안내자입니다. 술 취하면 제일 먼저 꼬부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혀입니다. 술 취하면 제일 먼저 풀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입의 자물쇠입니다. 그래서 할 말 안 할 말 술술술술 다 나옵니다. 그래서 술입니다. 술 때문에 말의 실수를 잘 하는 사람은 그래서 온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전공분야에서의 실력이나 연관된 영역에 대한 지식으로 보면 교수뿐 아니라 학장이나 총장이나 장관이나 그 이상을 하고도 남을 사람들이 말 한 마디 잘못해 가지고 촉망되던 장래를 망치고 마는 일이 너무나 많은 우리 사회입니다.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기업인도 자기 직원이나 기사에게 막말하다가 국민적 분노를 일으켜 대국민사과를 해야 하고 그 여파로 사업 자체가 기울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일찍이 말실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이 예수 믿고 달라져야 하는 것의 첫 번째로 말조심을 거론했으며, 교회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 교사들뿐 아니라 온 교인이 서로 말조심해야 할 것을 권고한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는 말에서 “굴레 씌운다”는 것은 통제한다, 다스린다, 제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입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능히 자기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입은 말을 내는 신체기관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속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속생각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지식과 사고와 가치관을 말합니다. 따라서 속생각을 드러내는 말은 그 말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기관의 대변인의 말은 곧 그 기관의 공식 입장인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말을 잘 다스려서 실수가 없는 사람은 그의 삶 전체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고 자기 인생의 성공가능성을 훨씬 높이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이 2절에서 한 말을 이어지는 본문 3-5절 상반절에서 여러 가지 비유로 다시 설명합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비유를 봅니다. 말의 입과 그 온 몸의 비유이고, 배의 키와 배의 비유이며, 사람의 혀와 사람 자체의 비유입니다. 첫째는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말이 사람의 말을 잘 듣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배는 아무리 커도 그 작은 키를 잡은 사공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아무리 큰 바람과 파도가 일어도 사공이 키를 잘 잡고 있으면 거기 떠밀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혀가 사람 몸의 한 작은 기관에 불과하지만 그 혀를 잘 놀리면 그 사람을 크게 돋보이게 할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회를 움직이며 나라를 변화시키고 세계에 영향을 주며 역사의 흐름까지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한 말의 뜻이 그것일 것입니다.
작은 혀 하나가 온 몸과 더 나아가 큰 일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설명한 야고보는 이어지는 5절 하반절에서부터 8절까지에서는 그 혀의 부정적이고 악한 영향 또한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언급함으로써 말을 조심해야 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5절 하반절을 봅니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등산객이 부주의해서 버린 작은 담뱃불 하나가 온 숲과 산을 다 태우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혀를 잘못 놀려 일으키는 피해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온 숲을 태우는 불씨 하나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잘못된 혀 놀림은 그 사람의 인격과 명예를 더럽히고 그의 인생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데 그렇게 만드는 혀 놀림은 분명 사람을 지옥으로 가게 만드는 사탄의 역사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혀는 그렇게 위험하기 때문에 잘 다스려야 하지만 그렇게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본문 7-8절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만물보다 위대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배하며 자기 마음대로 길들이고 사용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고 계속 발전시켜 왔지만 막상 자기의 혀 하나는 뜻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이 세상을 더욱 악하고 독한 세상으로 만들어왔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SNS 상에서 얼마나 무섭고 섬뜩하게 하는 독설들이 난무합니까? 인격모독 정도가 아니라 인격살인을 버젓이 수도 없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혀 대신 열 손가락으로 해서 그런지 옛날보다 열 배는 더 악해지고 독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악독한 말을 쏟아내는 혀를 세상 사람들만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조차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될 일이라고 야고보는 탄식하며 말합니다. 본문 9-12절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 말이 나를 가리켜 하는 말은 아닌지 한 번 자신을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한 시간 빼고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누구 흉보고 욕하고 어떻게 하면 혼내줄까 의논하고 그 사람 끌어내리고 밀어내기 위해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들 찾아다니며 모아 작전 세우느라 혀를 쉬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도 모자라 집에 가서까지 전화로, 또는 혀는 낮에 많이 수고했으니 쉬게 하고 열 손 가락을 대신 동원해서 문자메시지로, 카톡으로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입니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한 야고보의 말을 가슴에 새기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최근에 정부의 어느 고위공직자가 국민을 가리켜 “개, 돼지”라고 했다가 파면을 당하게 될 처지에 놓인 사실이 방송과 신문보도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그 일을 국민들이 개탄하고 있는데 또 이미 독설가로 유명한 어느 도지사가 자기를 반대하며 일인시위를 하는 사람을 가리켜 “쓰레기”라고 하고 그 말에 책임을 지겠느냐는 질문에는 “개는 짖어도 열차는 간다”는 말로 응수를 해서 다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허긴 말 한 마디 잘못해서 국민적 분노를 일으킨 인사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정치지도자들이 혹은 노인들을 비하하는 말을 해서, 혹은 여성들을 비하하는 말을 해서, 혹은 특정지역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을 해서 곤욕을 치르고 고위직을 내놓아야 하거나 각종 후보에서 사퇴하거나 더 이상의 출세를 못하고 만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최근에 어떤 국회의원인지 지방자치단체장인지는 그 말 많은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사드>의 배치지역이 성주로 결정되었다니까 자기 선거구 지역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말을 했다가 눈총을 받기도 했습니다. 말의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평소에 바른 생각을 하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며 고운 언어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말을 해야 할 때는 늘 맞는 말인지, 유익한 말인지, 필요한 말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확실하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맞는 말이라도 해서 유익할지 아닐지를 신중히 판단해야 합니다. 또 그 자체로서는 맞는 말이고 유익한 말이라 할지라도 지금 꼭 그 말을 할 필요가 있는지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말의 실수를 하지 않거나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안을 가득 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항상 우리를 다스리게 하며 성령께서 우리를 늘 인도하시기를 간구하며 그를 따르면 우리 각자의 삶은 아름다울 것이고 교회는 안으로 평화로울 뿐 아니라 밖으로는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의 실수가 없어 온전한 사람이 됩시다.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약 3:1-12 / 문성욱 목사
유대인의 한 마을에 세 딸을 가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 딸은, 각기 한 가지씩 흠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 딸은 몹시 게으르고, 둘째 딸은 도벽이 있었고, 막내딸은 남을 헐뜯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들의 결점을 고쳐 주려고 무척 애를 쓰다가 생각 끝에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도저히 제 딸들의 버릇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니 랍비님께서 제 딸들을 1년 동안만 맡아서 버릇을 고쳐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 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랍비는 딸들을 맡기로 했습니다. 세 딸을 맡은 그 랍비는 즉각적으로 그녀들의 단점을 고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일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이제 딸들을 데리러 랍비의 집으로 와서 자신의 딸들과 마주앉았습니다. 첫 번째 딸은 얼른 일어나 다과상을 차려온 뒤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 있기란 정말 고역이에요.” 둘째 딸은 “물건은 돈을 지불하는 맛에 산다는 것을 깨달았어요.”라며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막내딸은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글쎄 랍비님이 여자관계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에요.”하며 스승인 랍비를 헐뜯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이 세상에서 헐뜯는 버릇을 고치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됩니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거대한 배를 작은 키 하나로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처럼, 사람의 입 속에 있는 혀를 제어할 수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확실히 혀가 움직이는 대로 삶이 바뀌어 집니다. 늘 ‘할 수 없다’, ‘끝장났다’라고 말하면 그렇게 좋던 환경도 순식간에 나빠지고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 있지 않아 환경을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때 살리는 말을 해야 하고 말을 통하여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며 생명을 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왜 말을 잘 해야 합니까? 혀의 악함이 있기 때문에 혀를 지키고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뱀은 곧 사탄이요 마귀를 의미했습니다. 뱀은 혀가 두 갈래로 되어있습니다. 입은 하나이면서 혀가 두 개인 동물은 오직 뱀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한 입으로 달콤한 말과 죽이는 말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마귀는 오늘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식구를 마귀 식구로 만드는데 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이간질하게 만들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좋은 사이를 갈라놓게 만들고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이것이 오늘날 사탄의 전술입니다. 우리는 이 전술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혀를 지켜야 합니다.
말이란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수보다 더 날카롭고 흉기보다 더 잔인한 힘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말은 뼈를 쪼갤 수는 없으나 마음은 부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입술의 파수꾼을 세우고 혀의 권세로 환경과 운명을 변화시킵시다. 말을 할 때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이고 전진할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는 말만 합시다. 그러면 삶 속에 성공과 축복과 형통케 되는 역사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첫째, 누구나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2절). 손이나 발보다 말의 속도가 빠릅니다. 그래서 손이나 발이 나가기 전 불쑥 말이 나가는 것입니다. 총소리가 "탕"하고 난 뒤에 총알이 총구를 떠나 날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총알이 목표물을 맞춘 뒤 총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10㎞ 떨어진 목표물이라면 총알은 25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의 속도도 총알과 비슷합니다. 총알이 잘못 맞으면 오발이 되고, 말이 실수하면 전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이 빠르고 급해서 실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3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둘째, 혀는 불과 같습니다(6절). ‘혀는 작은 지체’(5절)라고 했습니다. 흔히 혀의 길이를 ‘세 치’라고 합니다. 세 치 밖에 안 되는 작은 지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는 일은 큽니다. 혀는 말하는 기능과 맛보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혀를 들여다보고 질병유무를 진단합니다. 건강유무 증세가 혀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혀가 건강해야 온몸이 건강합니다. 담뱃불 하나가 산을 태우고 공장을 태우는 것처럼 실수한 말 한마디가 자신의 인격을 망치고 공동체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혀를 제어하고 혀를 조심하지 않으면 큰불이 나서 나도 타죽고 다른 사람도 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6절).
셋째, 혀는 두 기능이 있습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10절)라고 했고,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11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을 지적하고 경고한 말씀인 것입니다. 축복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헐뜯는 말은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연덕스럽게 기도도 잘하고 찬송도 잘하고 아멘도 잘하면서 욕도 잘하고 비난도 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이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란츠는 “우리가 날마다 뱉은 말들이 책으로 출판되지 않을지라도 말세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한 말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말은 자신을 망칠 수도 있고, 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를 파괴할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말로 신앙을 고백할 수도 있고, 예수를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말은 우리 생활에 밀접해 있고 영향력을 끼칩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자살하려는 사람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 한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심지어는 자살하게 합니다. 우리는 말로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 한마디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들은 말 한 마디가 평생 한 사람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혀를 ‘키’에 비유합니다(4절). 키는 배에 비하면 너무나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문제는 키가 조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조정이 안 되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라는 말을 계속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의도한 대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말이 나오면 자기도 그 말에 화를 입고 상대방에게도 고통을 주게 됩니다. 내가 던진 말 한마디가 나의 자녀들에게, 이웃에게 영향력을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제 변해야 됩니다. 특히 말이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축복의 말, 격려의 말, 회복의 말, 칭찬의 말을 하면 메아리 쳐서 내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말을 잘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고 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죽이는 말 살리는 말
약 3:1-12 / 이용효 목사
한 남자가 무단횡단을 하다 하마터면 지나가는 트럭과 충돌할 뻔하였습니다. 화가 난 트럭 운전수는 “야 이 머저리, 바보 같이 멍청하고, 무식하고, 한심한 자식아 눈깔 똑바로 뜨고 다녀”하고 소리쳤습니다. 마침 옆에 있던 아내가 욕을 먹은 남편에게 “저 운전수 당신 잘 아는 사람이예요.?”하고 물었더니 남편이 버럭 화를 내며 “내가 저런 놈과 어떻게 알아” 라고 하자 아내가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당신을 속속들이 그렇게 잘 알고 있어요.” 라고 했습니다. 별 생각 없이 툭 던진 말 한마디로 인하여 부부간에 다툼이 일어나 가정이 파괴되기도 하고, 비난이나 험한 말로 인하여 폭력사건이나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합니다. 된장찌개 끓여 놓고 남편에게 식사하라고 하자 남편이 밥상에 앉아 된장찌개를 먹어 보더니 “그 아무개 엄마 있지, 그 사람 진짜 된장찌개는 잘 만들어 이건 댈 것도 아니야” 라고 한다면 “아~ 그래요 나도 배워야 하겠어요.” 그렇게 말할 부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 여자하고 결혼하지 왜 나하고 했어” “이 사람 속이 그렇게 좁아 그 말에 삐지기는 가만히 보면 당신 친정어머니 닮아서 그래” “뭐 여기서 우리 엄마는 왜 들먹여 당신 엄마는 좋은 줄 알어” “뭐 이게 말이면 다하는 줄 알어” 우당탕!!! 시간이 흘러 부부 싸움은 끝날지 모르지만 상처는 그대로 남아 속에 웅크리고 앉아 피를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간혹 그 사람은 화를 잘 내지만 뒤 끝은 없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지나가겠지만 혈기를 뿜어낸 말/ 가시 돋친 말을 들은 상대방은 가슴에 상처로 오랫동안 남아 쓴 뿌리가 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는 속담이 있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는 속담도 있습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말을 조심하여야만 합니다. 잠언 18:20절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에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1. 말의 능력 오래 전에 한국의 강원도 태백에서 탄광이 매몰되어 6명이 갱도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92시간 만에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갱도를 다시 뚫고 들어가서 보니 5명은 이미 죽었고, 서종엽이라는 광부만 살아 있었습니다. 구조된 그에게 기자들이 “다른 5명은 다 죽었는데, 어떻게 당신만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나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움 속에서 목까지 차올라온 물속에서 공포와 추위 뿐 아니라, 이미 흙이 무너질 때 흙에 깔려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보면서 절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두 아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며 ‘나는 기어코 살아야 해, 그래서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야 해’ 다짐을 했습니다.” 결국 의식을 잃으면서도 계속해서 고백한 그 고백대로 그는 구조되어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말에는 우리의 생명과 삶을 지탱해주고, 환경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우리 혀는 배의 키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07년 5월12일 새벽4시 5분 한국국적 '골든로즈호'가 중국 바이유찬항에서 출항 충남 당진항으로 항해 도중, 중국 대련 남동방 38마일 해상에서 연태항을 출항 대련항으로 항해중인 진셍호와 충돌 후 배는 침몰 되었고 선원16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바다에 항해하는 선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배 후미에 있는 그 작은 키를 잘 조정하면 바른 길을 가지만, 잘못 조정하면 암초에 부딪히든지 다른 배와 충돌하여 큰 손해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치도 안 되는 우리 입의 혀의 역할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남은 인생이 행복할 것인지 불행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복을 받을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 사랑을 받고 살 것인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삶을 살 것인지, 즐거운 인생을 살 것인지 아니면 고통 속에 살아갈 것인지를 우리 혀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또 5절에는 작은 불꽃이 온 산을 태우듯이 <우리 작은 혀의 놀림에 의해 큰 재앙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로 부부 싸움이 일어나 홧김에 불을 지르고 자녀들을 죽이고 동반 자살하는 일이 일어 납니다. 부부싸움의 90% 이상이 말 때문에 일어납니다.
6절에는 부정적인 말은 <우리 인생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지옥 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말이 우리 온 몸도 더럽히고 온 생을 더럽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300미터 쯤 되는 실로 고치를 지어 그 속에 들어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듯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 간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말로 행복의 집을 짓고 있나요? 아니면 불행의 집을 짓고 있나요? 인생에 있어 축복의 집을 짓나요? 아니면 저주의 집을 짓고 있나요? 말은 당신을 바꾸는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2. 죽이는 말 영국의 어느 지방에서 12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나무에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나무는 베드로, 두 번째 나무는 요한, 세 번째 나무는 야고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적은 팻말을 나무 앞에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1년 후에 가서 보니 가룟 유다 나무가 죽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조사해보니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가룟 유다 나무에 계속 저주하다보니 그 말대로 말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말로 나무도 죽일 수 있지만 사람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상대방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독입니다. 병원에 가면 진찰할 때 의사들이 혀를 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혀를 진찰해보면 그 사람의 건강을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나 영적인 상태도 우리의 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혀는 어떻습니까? 병나지 않았습니까? 혹시 함부로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다른 사람에 대해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누구는 사람이 게으르다느니, 어떤 집사는 수입에 비해 너무 돈을 헤프게 쓴다느니, 어느 성도의 자식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느니 어떤 자매 네는 집값이 오르는 바람에 재미를 보았다느니, 하며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하며 여기 저기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벌이 침으로 사람을 쏘면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지만 벌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남의 험담이나 비방하는 것은, 마치 벌이 침을 쏘는 것과 같아 상대방에게도 아픔과 고통을 주지만, 내 영혼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슨 계명입니까? 아홉 번째 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이웃을 비방하지 말고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도로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남에 대해서 중상하거나 악담하거나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이야 식탁을 바꾸든지 가구를 바꾸든지, 남이야 원피스를 얼룩덜룩한 것으로 입든지 반바지를 입든지, 벤츠를 타든지 자전거를 타든지, 남이야 집값이 올랐든지 왜 그런 걸 동네방네 전하려고,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합니까? 저는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사명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은사다‘라는 것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밤낮 모여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치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에도 선생 된 너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선생들이 말을 많이 하다보면 말로 실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자꾸 하다보면 없는 사실에 살을 더 붙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말로 실수하고, 말로 범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혀는 사람을 살리는 ‘이기’(利器)가 될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흉기’(凶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낚시를 하다보면 등에 낚시 바늘이 끼어 올라오는 멍청한 고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낚시 바늘에 걸리는 것은 바로 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범죄 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에 낚이지 않기 위하여 헛소문이라든지 자신도 확실히 모르는 풍설은, 아예 입에 담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죽이는 말 대신에 살리는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에베소서 4:29절 상반 절에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에베소서 5장 3절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더러운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 ‘더러운 것은 아예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잠언 6장 2절에서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네가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입으로 쏟아놓는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우리의 인생을 옭아맵니다. 우리가 하는 말로 내 인생이 얽혀지고, 내가 하는 말로 내 인생이 이끌려 갑니다. 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민수기 14장 28절은,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뱉는 말을 들으시고 그 말대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즉, 우리의 말에 의해 우리의 미래가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에 우리의 인생이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불평과 불만을 우리의 입술에서 사라지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믿음의 말씀과 감사의 말과 축복의 말을 받아 일하셔서 그대로 되게 하시지만, 반대로 마귀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불평 원망 저주와 불신앙의 말을 받아 그대로 환경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부부사이에나 부모 자녀 사이에나 교우들 사이에 절대로 죽이는 말을 사용하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3. 살리는 말 이달 18일자 국민일보 신문에 실린 기사 중 <자연 생명력 굳게 믿은 이 농부> 라는 타이틀로 된 기사는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일본에 사는 <기무라>씨는 세계 최초로 썩지 않는 사과를 개발하여 화재가 되었습니다. 일본 아모리현 이와카마치의 6만평 농장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기무라 아키노리씨는 자연농법이란 책을 읽고 1978년부터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사과를 재배하는 농법을 시작하였습니다. 사과농사를 하면 해충과 벌레들이 달라 들기에 보기에 좋은 사과를 생산하려면 어찌할 수 없이 농약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기무라씨는 농약은커녕 비료도 쓰지 않았습니다. 곧 혹독한 시련이 닥쳤습니다. 나방과 자벌레 등 병충해가 들끓었고 사과나무는 누렇게 말라 죽어갔습니다. 농사를 망치면서 가산이 파탄나자 자살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용기를 내서 새벽에 일어나 사과나무에 붙은 벌레를 손으로 잡고 분무기에 식초를 넣어 뿌리면서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만지면서 <힘들게 해서 미안합니다. 꽃을 안 피워도 열매를 안 맺어도 제발 말라죽지는 말아주셔요> 하고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무리씨의 사과나무에 열리는 야생사과는 놀라울 정도로 맛이 있고 생생한 풍미와 신선한 과즙이 살아 있고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두 조각으로 가른 채 방치해도 몇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고 갈색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 성공담은 NHK방송에서 방송하였고 지난 해 6월에는 책도 나와 일본 논 픽션 부문 1위에 올랐고 1년이 지난 오늘 까지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사가 이 책을 번역하여 <기적의 사과>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실은 내가 아니라 사과나무가 힘을 낸 거지. 이건 겸손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과나무를 돕는 것 정도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나무와 대화 하면서 나무를 어루만져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과나무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살리는 말에 의해 기적의 사과를 생산한다면 우리들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생활 가운데 지속적으로 살리는 말을 한다면 그 말이 얼마나 많은 기적을 불러 오겠습니까? 동대문에 의류업을 통해 성공하신 분이 계신데 이 분의 성공비결을 들어보면 한마디로 사랑한다는 말과 감사의 표현입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직원들의 빈 의자를 보며 미소를 짓고 난 다음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옷의 하나하나 신제품과 샘플들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합니다.“고맙다, 사랑한다, 참 예쁘다”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사랑을 주며 옷에게 말을 하였을 때 그 옷은 날개 돋친 듯이 잘 팔린다는 것입니다.
이해인 시인의 <나를 키우는 말>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이 시에서 고백한 것처럼 비록 행복한 환경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우리의 마음에 행복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 환경까지 주어집니다.
1)믿음의 말을 하십시오. 우리교회에 두 번이나 오셔서 간증하신 류태영교수님은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라는 그의 책에서 초등학교5학년 때부터 늘 암송한 구절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청년시절에 구두닦이를 하면서 쓰레기통을 뒤져 곰팡이 핀 빵을 주워 먹으면서도 빌립보서4:13절 말씀을 입으로 시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분은 13년간 언제나 변함없이 매일 수없이 그 말씀을 반복하여 시인하였더니 그대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시고 네 믿음대로 되라고 선언하셨고 실재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당신의 믿음의 표현이요 믿음 그 자체입니다. 당신이 믿음을 증명하여 보이시려면 믿음의 말을 하시고 기적을 체험하시려면 믿음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2)칭찬의 말을 하십시오. <마크 트웨인>은 “나는 한 번 칭찬을 받으면 두 달간은 잘 지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 년에 여섯 번 칭찬을 받으면 일 년 동안 느끈히 잘 지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당신 그 원피스가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군요” “오늘 밤 당신이 설거지 해 주신 것 너무 고마워요” “당신은 야채 요리를 너무 잘해요 세상에서 제일이야” 말로 칭찬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는 선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칭찬은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보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메랑효과나, 산울림법칙이나,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은 말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잠언 12:25절에는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3)온유한 말을 하십시오. 똑 같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어떤 어투로 하느냐에 따라 두가지 의미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한 옥타브 낮추어 말하고 온유한 말을 하면 상대방이 사랑의 언어로 듣고 축복으로 듣게 되지만 목소리를 높이면 다툼이 일어나게되는 것입니다. 피아노 건반은 눌리면 눌리는 대로 소리를 냅니다. 가볍게 누르면 작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고 힘껏 누르면 크고 강한 소리를 냅니다. 내가 어떤 어투로 말하느냐에 따라 살리는 말이 되기도 하고 죽이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잠언15: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한다”고 하였습니다. 배우자가 몹시 화가 나서 말을 함부로 할 때에도 부드러운 말로 상대하면 분노를 쉽게 가라앉힌다는 말씀입니다.
4)과거를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한 그 말과 행동이 너무 가슴에 상처를 주어서 지금까지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고 있어요” 이런 말들은 결국 적의에 찬 말이고 오늘을 과거속으로 끌고 들어가 망치는 말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좋은 점들이 많아요 하지만 이러 이러한 점들은 너무 좋지 않아요 과거에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여 일을 망친 적이 있어요” 이런 말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계속 불행을 돌리는 말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말은 그 자체가 큰 능력입니다. 불과 칼이 이기도 될 수 있고 무기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말은 죽이는 말이 되기도 하고 살리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주님의 도우심과 언어의 훈련을 통해 살리는 말을 하여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행복한 인생이 되고 능력있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평화 사랑
약 3:1-12 / 김동호 목사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여 삶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중국 대학이라고 하는 책에 마태복음 6장 33절과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물에는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이 있나니 곧 먼저 할 것과 나중할 것이라, 사람이 먼저 할 것과 나중할 것을 바로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먼저 할 것을 나중에 하고, 나중에 할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기를 거부하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 보다 먼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더 중히 여겨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 앞세우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사 55:2) 우리는 남보다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입고 마시기 위하여 온 인생을 다 쏟아 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평화인데, 우리는 평화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으며, 더 중요한 것은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알려고 하지 않고 공부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 우리는 평화에 서툴고 그 때문에 우리는 밤낮 불화에 시달리며 하루, 하루를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소원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즈음 주일 날 마다 선포되는 평화에 대한 설교 말씀을 한 번만 듣지 마시고 인터넷이든지 테잎을 통하여 자꾸 반복하여 들으시고 공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삶의 모든 현장 속에 넘치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412장의 찬송이 저와 여러분의 찬송이 되게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 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 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내 영혼의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오늘은 평화에 대한 일곱 번째 설교로서, 오늘 설교의 핵심은 말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평화를 깨트리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길들여지지 않은 불완전한 말을 악과 독으로 심지어는 지옥의 불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도 보면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보면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2절) 평화를 깨는 트러블 메이커의 특징은 우선 말이 많고, 더 나아가 말에 실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기 위하여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말은 사람을 잡습니다. 생사람을 잡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지어서하는 것은 살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 중에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생짜로 거짓말을 만들어 퍼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을 모함하는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좋지 못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 같지 않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에다가 의도적으로 약간의 거짓을 보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거짓말은 이런 거짓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거짓말은 하도 우리가 많이 하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종류의 거짓말들을 하면서 산다는데 우리들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아를 어로 바꿈으로 은근슬쩍 말을 바꾸어 상대방에게 흠집을 내려는 좋지 못한 마음들을 대개 가지고 있습니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마음과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 없이 하는 말입니다. 평화에 대한 설교 중에 한번 다룬 본문입니다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나님은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그 말이 천사와 같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실이 아닌 거짓말 보다 더 무서운 말이 사랑 없는 옳은 말일는지 모릅니다. 사랑 없는 옳은 말이 평화를 깨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옳지 않은 일이 깨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랑 없는 옳은 말이 깨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으로는 사랑한다고 하여도 표현이 잘못되어 사랑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 말도 평화에 있어서 매우 좋지 않은 위험한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은 마음도 중요하지만 표현도 중요합니다. 표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의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의 대부분은 옳은 말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는 말입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대개는 다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그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옳고 바른 말을 무례하게 아이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 우리 부모들이 쉽게 범하는 잘못은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다가 지나쳐서 아이들의 자존심과 인격을 건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는 백전백패입니다. 아이들의 자존심과 인격을 건들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도,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를 위하여 하는 말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을 반항을 하고 뛰쳐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모든 관계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1:20)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하느냐?’입니다.
말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일부러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의 극치는 폭력입니다. 그러나 그 폭력 못지않게 심한 것이 바로 욕입니다.
예수님은 욕을 아주 심하게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은 상대의 인격과 자존심을 모독하는 것으로 살인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할 때 사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실을 예의를 갖추어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부부가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동안 서로 반말을 하지 말고 존댓말을 하자고 약속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반말을 하면 만원씩 벌금을 내자고 하셨답니다. 평소에 잘 안하던 일이어서 서로 벌금을 제법 물었는데 그와 같은 존댓말 게임을 하면서 같은 말을 해도 반말을 하는 것과 존댓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똑 같은 말을 해도 반말을 하면 하기가 싫은데, 똑 같은 말도 존댓말로 하면 순종하게 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옳은 말을 상대방이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뒤에서 수군수군 하는 비방의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9과 30절에 보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은 때 나타나는 죄악들에 대한 구체적인 열거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뒤에서 수군수군 남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 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베드로전서 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에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형제를 뒤에서 수군수군하며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잘못하였을 때 무조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가 잘못하였을 때 그에 대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 17절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정확히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경험적으로 볼 때 평화의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수군수군 거림입니다. 뒤에서 형제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서 이 수군수군거림이 없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함께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해서는 안 되는 말은 저주의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 보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라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목사님들 중에 저주를 무기처럼 사용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닙니다. 저주는 무당들이 보검처럼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모압의 사주를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의 본능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를 핍박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실제로 형제를 저주하기도 하지만, 형제의 어려움과 고난을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 것에 대한 저주라고 해석하고 그렇게 말함으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주는 불화의 언어이고, 축복은 평화의 언어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우리 입과 말 속에서 저주를 몰아내고 축복의 언어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피스메이커로서의 삶을 살려면 우선 말부터 바꾸어야만 합니다. 옛말에도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말로 천 냥 빚을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화의 말이 있고 평화의 말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불화의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에 가기가 있고 독이 있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비단 인터넷 세상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직장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41편 3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 시편 기자의 기도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 입 앞에 하나님의 파수꾼을 세워 내 입술의 문을 지키게 함으로 불화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고 평화의 말만을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온전한 사람
약 3:1-12 / 박기완 목사
야고보서는 1장부터 시작하여 5장까지 구성되어 있는데, 야고보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성도의 믿음을 어떻게 생활로 연결시키느냐"하는 문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전체 주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인데...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3장에서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언어의 생활'을 잘해야 된다고 말씀하습니다.
사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면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때가 언제였고... 반대로 마음이 상하고 괴로울 때는 언제였는지를 돌아보세요.
그것은 대부분이 사람들의 말에 의해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나에게 했느냐에 따라서... 그 말에 의하여 내가 행복하게도 되고 불행하게도 됩니다.
반대로... 내가 한 말에 의해서... 내 말을 들은 그 사람이 행복하게도 되고 불행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이나 여건에 의해서 행복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한 '말'에 의해서... 나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혹은 어떤 칭찬 한 마디만 들어도 모든 피곤함과 고단함이 한순간에 다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번 토한 말은 다시 회수할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땅에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것과 같고, 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거두어 들일 수 없음과도 같이... 우리의 입에서 떠난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잠언 20:19절에서 "두루 다니며 험담하는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 그랬습니다.
1. 혀는 배의 키
오늘 본문 4-5절을 보면, 혀는 배의 키와 같다고 했습니다.
배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 배를 움직이게 하고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작은 키에 달려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혀는 지체 중에 작은 것이지만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씀이죠.
혀를 함부로 놀리는 것은 배의 키를 함부로 놀리는 것과 같아서 인생을 어렵게 하고 결국 파멸에 몰아넣고 만다는 것입니다.
2. 혀는 불
계속해서 6절 말씀을 보면, 혀는 곧 불과 같다고 했습니다.
불은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이지만 잘못 사용하게 되면 엄청난 재난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혀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화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도둑을 맞아도 도둑 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3. 혀의 양면성
그래서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면 혀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혀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의 혀는 죄를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이름은 갖았지만 한 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가 하면 형제를 저주하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10절 말씀은 이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11-12절에서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그랬습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함께 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권속들의 혀는 언제나 찬송과 감사의 말, 선한 말을 하는 데 사용되는 그런 말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말에 재갈 물리듯
그러면, 어떻게 말을 사용해야 할까요?... 우리의 말, 성도의 언어생활을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오늘 3절 말씀을 보면, 우리의 혀는 말에 재갈을 물리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소나 말 같은 동물은 야생성이 있어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 큰 힘으로 마구 날뛰게 되면 큰 피해를 입게 되죠.
그래서 말을 손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을 먹인다고 그랬는데... 재갈은 말의 입에 가로로 넣는 쇠 막대기예요. 소도 코뚜레를 해서 그걸 잡아당기면 아프니까 꼼짝을 못하고 따라오죠.
이와같이 사람이 혀를 바르게 쓰려면...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굴레를 씌우듯이... 그렇게 혀를 조심해서 사용하고 말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10:19절 말씀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혀는 말에 재갈 물리듯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재갈 물리듯 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할 말, 안 할 말... 다 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꼭 필요한 말만 골라서 할 수 있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거든요.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마음에 평강을 잃어 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구 하게 되는 겁니다.
말에도 기쁨과 즐거움이 포함된 말, 사랑이 담긴 축복의 말이 있고... 근심과 걱정이 담긴 말, 저주와 독이 들어 있는 말이 있어요.
사랑이 담긴 말을 들으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되지만... 독이 들어 있는 말을 들으면 근심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기분이 상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사람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강을 잃어버리면 이런 독이 들어있는 말을 마구하게 되고... 심지어는 하나님에게 대하여 원망 불평을 쏟아 놓게 되죠.
성도는 이러한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41:3절 말씀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그랬습니다. 입을 지키는 파숫꾼을 세워달라고 했어요.
산에 올라가서 소리를 질러 보면 그 소리는 내가 한 말이지만 다시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내가 한 말이 산울림이 되어 돌아오듯이... 내가 말하는 대로 그것이 내게로 반드시 돌아옵니다.
남의 흉을 아무리 보아도 그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말한 사람, 그 가정을 비웃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말을 골라서 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12-13절에서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랬어요.
자기가 한 말은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거예요.
저주를 빌면 저주가 돌아오고, 복을 빌면 그 복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5.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말만 골라서... 사랑의 말, 은혜의 말, 사람을 살리는 말만 할 수 있을까요?
먼저는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어떻게 받을 것인가를 생각한 후에 말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 수를 줄어야 합니다.
말이란 많이 하다보면 실수가 있는 법이니... 말을 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많이 들어도 적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9절 말씀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그랬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주장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가는 삶...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찬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결국 성령 충만한 삶인데... 이렇게 말씀으로 가득차 있으면... 이런 사람이 제일 먼저 달라지는 것이... 말이에요. 말... 은혜 받은 사람, 성령 받은 사람... 신앙이 성숙한 사람의 특징은 말이 달라요.
부정적으로 말하던 사람이 긍정적인 말을 하고... 늘 불평하고 원망하던 사람이 감사의 말, 은혜로운 말을 하게 되고... 전에는 말에 독이 들어 있는 악독을 말했는데... 사람을 살리는 말, 사랑이 담긴 말, 평안을 빌어주는 말, 복이 담긴 말만 골라서 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지배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이 오늘도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자녀들을 어릴적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씀했습니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 또 하나님의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이고 문설주와 바깥 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신6:5-9).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매일 시간을 정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Q.T 시간을 갖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 주십니다(행20:32). 말씀이 우리를 복되게 하고,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 가는 겁니다.
출애굽기 13:19절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입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말에 대한 책임과 중요성에 대해서 주님은 36-37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가 한 말에 대해서 심판 날에 전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 나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하여...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약 3:1-12 / 박봉수 목사
기독교는 ‘말’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셨고 그 말씀을 삶으로 이루셔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성령께서 사역자들을 감동하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말을 중요시합니다. 그 말로 영혼이 삽니다. 그 말로 낙심한 심령이 위로를 받습니다. 그 말로 절망 중에 있던 사람이 소망을 찾습니다. 그 말로 갈 길 몰라 방황하던 사람이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말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을 잘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말로 심령에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그 말로 공동체에 큰 갈등을 일으킵니다. 때론 그 말로 영혼을 잘못된 길로 내 몰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거스릅니다. 기독교 본연의 모습을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5절을 보면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했습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큰 불로 번져서 산에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금년도 산림청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산불의 64%가 등산객이나 성묘객들의 실화로 인해 발생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심코 던진 담배꽁초, 생각 없이 지핀 작은 불씨가 온 산을 태우고 또 바람을 타고 대형 산불로 번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내 뱉은 말 한마디가 큰 사고를 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일생을 망칠 수가 있고, 공동체에 큰 갈등의 파고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6절에 더 강도 높은 경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온 산을 다 태우는 산불을 일으킨 그 작은 불은 바로 지옥에서부터 온 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을 죽이고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그 불의한 말은 바로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혀가 사탄의 도구로 쓰임을 받아서 영혼을 죽이고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도구로 쓰임 받아서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를 일으켜야 할 혀가 거꾸로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혀를 길들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처럼 우리 혀를 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을 보면 큰 배도 키를 잘 조정해서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하는 것처럼 우리 혀를 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잘 길들여서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말, 우리가 후회하지 않을 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말을 하도록 하라는 권고입니다.
특히 1절에 선생된 자들일 수록 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일 수록 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했습니다.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말을 조심하기 위해 해야 할일은 무엇일까요?
말하기 전에 생각하자
말을 조심하기 위해서는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화살은 시위를 떠나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녁에 제대로 조준되었다는 판단이 들기 전에는 시위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과녁에 정확하게 맞으리라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시위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은 한 번 우리 입을 떠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하기 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이 내 뜻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지, 이 말이 내가 바라는 결과를 이루어 낼 수 있는지, 혹시 이 말이 누군가를 괴롭게 하지는 않을지, 혹시 이 말이 공동체에 나쁜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원칙 가운데 소위 ‘미란다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찰이 피의자를 검거하기 전, 검사가 피의자를 심문하기 전 피의자에게 미란다 원칙의 내용을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사실과 진술이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알리지 않은 채 수사가 진행된다면 형사소송법상 그 모든 수사 내용은 법정에서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피의자가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기 전에 잘 생각해보고 자신이 없으면 변호사와 상의해서 말하거나 아니면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되면 아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미란다 원칙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보혜사이신 성령님께 여쭤보고 나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유익하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입을 닫고 묵비권을 행사하라는 말입니다.
눅 2장을 보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리아가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습니다. 이 때 천사들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을 알리고 그 아기 예수가 구주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해 주었습니다. 목자들이 마구간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에게 들은 그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눅 2:19를 보면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목자들이 전해 준 이야기를 마음속에 꼭 담아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발설하고 자랑하거나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헤롯에게 발각되어 큰 낭패를 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도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입밖에 꺼내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을 거르자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닙니다. 할 필요가 없는 말, 해서 좋을 것이 없는 말, 심지어 해서는 안 될 말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한강수질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강수질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수종말처리장이라는 것입니다. 한강의 지천에서 한강으로 유입되는 물을 깨끗케 하는 정화시설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축산폐수, 생활하수, 그리고 각종 오수를 정화시킵니다. 그래서 맑은 물만 한강으로 흘려보냅니다.
우리 입에도 이런 정화시설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입에서 말이 나오기 직전 걸러내서 우리가 하는 말이 그리스도인의 말다운 말이 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입에서 걸러내야 할 말은 어떤 말입니까?
첫째, 비난하는 말입니다.
약 4:11을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2:1에서도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 입에서 남을 비판하는 말,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말을 한다면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둘째, 거짓말입니다.
시 101:7에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 입에서 거짓을 말한다면 우리는 결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셋째, 품위 없는 말입니다.
레 20:2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거룩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 입도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설을 삼가야 합니다. 음담패설도 삼가야 합니다. 지나친 은어와 비속어를 삼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는 품위 없는 말들을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말을 해야 합니다.
본문 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말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11을 보면 ‘샘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샘에서는 한 가지 물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또 다른 비유 곧 ‘나무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지 못하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각 나무는 저마다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서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과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적극적으로 우리말을 바꿔가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말로 우리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을 바꾸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말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믿음의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도무지 넘기 힘든 험산준령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산 앞에서 넘어야 할 산이 너무 크다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끝내 그 산을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산을 향해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지를 선포해 보십시오. 그 믿음의 선포가 능력을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끝내 그 산을 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한의사 선생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루는 한 환자가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찾아왔답니다. 얼마 전만해도 활기차게 인생을 살던 분인데 상태가 무척 나빠졌답니다. 진찰해 보니 신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답니다.
이 분이 밝게 웃으면서 말했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 병은 쉽게 나을 것입니다. 미꾸라지를 꾸준히 다려드십시오.” 그리고 보냈답니다. 이분이 믿음을 가지고 가더랍니다.
얼마 후 다시 찾아왔는데 정말 혈색이 달라져서 왔더랍니다. 이번에는 더 밝게 웃으면서 말했답니다. “인생의 모든 걱정을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을 바꿀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이분이 그렇게 해 보겠다고 하고 갔답니다.
얼마 후 다시 찾아왔는데 정말 태도가 달라져서 왔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말에 귀 기울이시고 믿음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의 말입니다.
우리는 인생길을 더불어 걸어갑니다. 때로는 단 둘이 팔짱을 끼고 가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사람이 대열을 이루어 가기도 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함께 가느냐가 인생길의 행-불행을 결정적으로 좌우합니다.
서로 돌아보며 사랑의 말을 나누면 그 인생길은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헐뜯고, 저주하고, 서로 탓한다면 그 인생길은 정말 불행할 것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 모두가 절망 속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인도인들 가슴에 용기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러 일으켰던 것은 의외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간디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길 가에 한 할머니가 길에 엎드려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간디가 가까이 다가가 손수건으로 그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 군요” 이 말이 인도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말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정말 잘하고 있어요.” “당신은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예요.” “힘내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셋째, 소망의 말입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늘 앞길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더더욱 오늘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미래에 대해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주 안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말씀을 세미한 음성으로 듣기 때문에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망을 말하며 살아야 합니다. 소망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연극배우 윤석화씨가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습니다. 그는 이 아이를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작은 평화]라는 책에서 이 아이에게 이런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는 나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선물이었단다. 하늘이 나를 위해 주셨다고, 감히 말하고 싶구나. 네가 나에게 이토록 소중한 선물이 되어주었듯이, 너도 많은 이들에게 선물이 되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소망의 말을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때문에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는 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을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말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말을 조심하세요
약 3:1-12 / 박조준 목사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평범한 마 음을 가진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 이야기하기를 좋아 한다 고 했습니다. 의미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을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대개가 대화 속에서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기가 쉽습니다. 정말 다루기 힘든 것이 우리 의 혀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부터 계속해서 혀와 관련된 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1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 도 더디 하라 고 말했습니다. 같은 장 26절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 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고 했습니다. 2장 12 절에 보면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고 했습니다. 이 렇게 성경을 읽어보면 혀와 관련된 문제로 몇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유대교인들의 열망 중에 하나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교인들은 그 지도자를 아주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선 생인 랍비가 되는 것은 유대교인들의 소망이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었습 니다. 랍비라는 말 자체가 큰 사람, 위대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이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믿 어 그리스도인이 되자 그들이 유대교인이었을 때 랍비를 존경하듯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하였 습니다. 그 존경심은 올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지도자가 되기 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초대교회 안에서 많은 갈등을 빚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성해야 할 교회 안에서 세력 다툼과 자리다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을 이 해하면 오늘 주신 말씀의 뜻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선생 된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선생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책임이 커지는 것이고 책임이 크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심판 도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도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지요?
높은 것을 탐내며 자리다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경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 이하에서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 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이 되는 것은 특권입니다. 그 런데 이것은 특권이 되는 동시에 책임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훌륭 한 교회는 선생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학생, 일꾼, 종이 많은 교회입니다. 지배하려는 사람, 잔 소리 잘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아니라, 겸손한 자세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기를 즐 기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야말로 훌륭한 교회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미 세력 다툼과 자리 싸움이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는 그에 따르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 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들은 특별히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그만큼 말로 인한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습 니다. 이 말의 실수는 지도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 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생애 속에도 치명적인 말의 실수가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은 항상 말로 범죄할 가능성을 안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다 실 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이란 말은 완전이란 말하고는 의미가 다릅니다. 온전이란 말은 성숙이란 말입니다. 말의 실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사람은 그만큼 인격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의 온몸을 굴레 씌운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굴레 라는 말 은 재갈과 함께 말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야생마에게도 재갈을 먹이고 굴레를 씌우면 잘 길들일 수가 있습니다.재갈을 물리지 않고 굴레를 씌우지 않은 야생마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이 얼마나 커다란 파괴와 손실을 가져오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이렇게 말 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몸을 어거하며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에 실수가 없을 때 우리의 온몸은 승리 생활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실수는 우리의 전인격적인 행동이 중대한 잘못을 범하게 하는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 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했습니다. 우리 사람의 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한 것입니 다. 바다 위에 떠있는 큰 배가 작은 키 하나에 의해서 방향이 정해집니다. 굴레는 말을 어거하 고, 키가 배를 조종하는 것처럼, 혀는 우리의 행동을 다스리며 지배할 수 있다고 성경이 가르치 고 있습니다.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혀를 지배하지 못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가장 슬픈 운명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처럼 우리가 깜 짝 놀랄 정도로 과학이 발전하고 있지만 인간의 혀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과학은 발달하지 못하 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 앞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 훈련받기를 원하는 열망이 없이 는 아무도 자기의 혀를 지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시편 141편 3∼4절에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 희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우리도 하루를 시작하면서 매일 시편 기 자와 같이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워주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주소서. 불필요한 말, 무익한 말, 남에게 손해되는 말, 파괴적인 말을 하지 않 게 하소서. 성경은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잠언 10장 19절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고 했고, 잠언 18장 21 절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좌우됩니다. 그러므 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혀는 그 힘이 대단히 크므로 잘 다스리지 않으 면 큰 파괴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혀가 갖는 파괴력이 어떻습니까? 오늘 주신 5∼8절까지의 말씀을 보세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 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혀는 곧 불이라 고 했습니다. 불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 습니다. 지난번 제가 미국에 갔을 때 강한 바람이 부는데 산에 불이 났습니다. 캘리포니아 지역 은 비가 거의 안 오는 사막 지역이기 때문에 사막 지역에 자라는 나무에 불이 붙으니까 삽시간 에 수백만 평의 산이 타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소방 시설을 다 동원했는데도 타기 시작 한 불이 꺼지지 않고 퍼지는데 그 파괴력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우리의 혀는 이 불처럼 큰 파괴 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퍼질 때 그것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의 혀도 다스리기가 너무 어렵 습니다. 성경은 화재가 남긴 그 비참한 현장처럼 혀가 재앙과 상처와 비극을 초래한다고 가르치 고 있습니다. 잠언 16장 27절에서 어떻게 말씀하는가 보세요.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 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 했습니다. 또한 잠언 26장 18절 이하에는 이렇게 말씀했습 니다.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 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툼이 왜 생깁니까? 말쟁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쟁이가 없어지면 평화가 옵니다.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같 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마다 시비를 일으키며 이 불처럼 무서운 파괴력을 주위에 확산시키는 것 입니다.
가령 중상 모략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인격을 파괴합니까? 전에 어느 여자 성도가 돌아 다니면서 자기 교회 목사님을 중상 모략하며 험담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얼마나 무 서운 죄인지도 모르고 목사님을 깎아 내렸습니다. 어느 기회에 이 여성도가 은혜를 받고 자기 목사님을 중상 모략한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고 목사님을 찾아와서 자백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그렇게 나쁜 여자입니다. 사실, 목사님은 그 말을 다 듣고 있으면서도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있었는데 이 여성도가 와서 사실 직고하니까 한참 듣고 있더니 자매님,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목사님 말씀하시 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러면 이 베개 속에 있는 오리털을 골목마다 다니시며 다 뿌리고 돌아오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이 여성도는 목사님이 주신 베개 속의 오리 털을 골목마다 다니며 다 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목사님께 목사님, 목사님이 주신 베개 속의 오리털을 말씀하신 대로 골목마다 다 뿌렸는데요. 이제 또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고생스러우시겠지 만 그 뿌린 오리털을 다시 주워 모으시지요.
그래서 이 여성도는 자기가 뿌린 오리털을 주워 모 아 보려고 했지만 이미 바람에 다 날아가고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도는 목사님께 가서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제가 골목마다 뿌린 오리털이 벌써 바람에 다 날아가 없어졌습 니다. 이때 목사님이 이 여성도를 향해서 자매님, 바로 그것입니다. 말을 여기 저기 다니며 하 시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 말한 것을 다시 모을 수는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토한 말은 다시 회수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은 그 사람의 인격과 생애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혀의 영향력이 이처 럼 무섭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는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라고 말씀했습니다. 작은 불 꽃이 울창한 숲을 태워버리는 것처럼 비록 우리 지체 중에 작은 혀이지만 이 혀가 온세계를 멸 망시킬 수 있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 의 신앙 생활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6절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의 뜻은 온갖 불의가 혀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혀는 인생의 삶 전체를 망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 다. 우리의 혀로 한 사람의 인격을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혀가 사 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혀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기억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 13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저희 목구멍은 열 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고 말했습니다. 무덤에서 썩은 냄새를 내는 것처럼 우리는 혀를 통해 썩은 냄새를 토하고 있습니까? 나쁜 말을 하는 사람 들의 목은 열린 무덤과 같습니다. 좋은 말을 하지 아니하고 저주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입 에는 독사의 입에 들어있는 것 같은 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사람, 말이 독해 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주의 성전에 들어가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순 간에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지를, 특히 혀로 범죄한 것이 얼마나 많은 지를 깨닫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이 혀로 하나님을 찬 양하고 이웃에게 덕이 되고 유익하고 축복이 되는 말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 를 주고 인격을 파괴하고 중상 모략하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까? 무서운 죄입니다. 이것은 회개 해야 합니다. 그리고 7절 말씀을 보면 혀는 짐승 같다 고 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 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짐승은 어느 정도 길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나운 짐승일수록 잘 길들여 놓으면 그 효용성이 높습니다. 가축을 잘 길들여 놓 으면 생산적인 목적을 위해서 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은 파괴적이고 난폭한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혀는 짐승들보다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잠언 12장 18절에 보면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 칼처럼 찔러 우리의 심장부에 상처를 남길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악인의 혀가 그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의 혀는 상처를 덮어 싸매는 양약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혀는 어떻습니까? 이제 9∼12절을 보십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 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 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 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했 습니다. 여기서는 혀를 샘과 나무에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샘과 나무는 아름답고 신선한 것입 니다. 샘은 우리에게 마실 물을 제공합니다. 전에는 샘물을 길어 마시고, 요리를 하고, 세탁을 하고, 농수로 사용했습니다. 성경에서 샘과 말을 연관시켜 말씀한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 10장 11절에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했습니다. 샘에서 생수가 솟아나는 것처럼 의인의 입에서는 생명의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잠언 13장 14절에는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라 사람으로 사망의 그물을 벗어나게 하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전도 하고 그 메시지를 듣고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면 우리의 입술은 생명의 샘처럼 쓰임을 받은 것 입니다. 또한 야고보는 혀와 나무와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한 나무가 두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 는 것처럼 한 혀를 가지고 축복하는 말과 저주하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성경은 샘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일관성 있는 말을 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별 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말이 이랬다 저랬다 하면 안됩니다. 9절 말씀을 보세요.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라고 말 씀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 은 사람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저주하면 그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저주하는 결 과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얼마나 존귀한 가치가 부여되어 있는지 그 사실을 아셔 야 합니다. 우리 모두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실 수가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입은 하나님을 찬양하다가도 사람을 저주하는 일을 곧잘 합니다. 여기에 대해 서 성경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10절 말씀에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절에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라고 했습니 다. 12절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 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그 나무는 그 열매를 맺고, 그 샘에서는 그 샘 의 물만 나오는 법입니다. 한 나무가 두 가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한 우물에서 두 가지 종류의 물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서도 선과 악이 함께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만일 두 가지가 함께 나오고 있다면 우리 안에 중대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8절에 집사의 자격을 말하면서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했습니다. 집사들은 단정하고 일관성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 니다. 집사뿐이겠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이렇게 말했 다 저렇게 말했다 하는 사람 때문에 분위기가 상하고 영성이 파괴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 다. 그것은 어느 단체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많은 모임이 파괴 되곤 합니다.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 보세요.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 라고 했는데 이것은 집사의 아내나 여자 집사에게 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강조한 것이 말에 대한 것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사실은 교회 안에서 보면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말이 많습니다. 쓸데없이 남을 비난하고, 시기하고, 유익하지 않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여자 편에 더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에 같은 말이라도 툭 해서 다르 고 탁 해서 다르다 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말을 씁니까? 우리의 말 이 놀라운 창조를 가져올 수도, 동시에 커다란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말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혀로 하나 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로 결심하고 소원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기도한 것처럼 나의 반석이시 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 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생산적이고 창조적이 되도록 주님께 기도 드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나쁜 말을 쓰는 사람들과 오래 교제해 보세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말을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기 위해서 좋 은 대화의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 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말이 교정이 되고 순화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지배를 받 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듯이 우리도 성령의 지 배를 받아야 바른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입에서 잘못된 말이 나오 면 어떻게 합니까? 희망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잘못을 고백하고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 고 계속 내 편에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큰 오해를 받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나라가 침묵을 배우기 전에 는 우리는 서로서로 배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9절에 주님은 그 입에 궤사가 없었 다 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혀로 주님의 아름다운 소식을 선포합시 다. 그래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내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작으나 강력한 것
약 3:1-12 / 임영수 목사
사도 야고보는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교사, 또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사도 야고보가 이 문제에 대해 제시하는 해답은 혀를 잘 통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을 표현하는 것이 우리가 입은 옷, 글씨체, 얼굴화장,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나타나는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혀로 표현되는 말을 인격의 표현으로 보고, 그것이 사람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따라서 혀에 대한 온전한 통제는 곧 인격과 행위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의 업적 가운데 중요한 것 한가지는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려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가 들짐승, 새, 기는 짐승, 바다의 생물들을 길들여 생활의 도움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르고 있는 개, 돼지, 소, 말 각종 애완동물, 묘기에 사용되는 각종 짐승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다 길들인 것입니다. 저는 몇 년전에 텔레비젼을 통해서 어느 외국인이 바퀴벌레와 벼룩과 같은 곤충들을 길들여서 묘기를 부리게 하는 것을 보고 매우 감탄했습니다. 인류는 자연을 길들이는 조련사 인가? 감탄할 정도로 각종 생물을 길들여서 그들의 의도대로 그것들을 부리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렇게 길들이는 것을 특별히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에 와서 짐승을 길들이는 조련사를 배출하는 기관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처음부터 그러한 기관에서 길들이는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길들이는 기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능적 재능입니다. 이것은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다 포함됩니다.
인류가 각종 짐승과 바다의 생물을 길들여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길들여 오지 못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것이 '인간의 혀' 라고 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혀는 길들이기 매우 어려운 것으로 판단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그 길들여지지 않는 혀의 위력을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금년 봄에도 우리가 경험했지만 불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금년 여름에 강릉에 갔었는데 지난번 산불로 너무나 많은 나무들이 불에 타서 죽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미국의 12개 지역에 산불이 나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불은 우리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이지만, 한편 통제되지 않는 불은 우리 생명과 재산, 자연에 막대한 피해와 손상을 입힙니다.
사도 야고보는 길들여지지 않는 혀도 불과 같이 우리에게 많은 손상과 피해를 입힌다고 했습니다. 불은 태우지만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혀가 몸을 더럽힌다는 것은 혀를 통해서 나오는 말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오염시킨다는 것이며, 인생의 수레바퀴를 태운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혀를 통해서 나오는 말이 평생을 어둡게 살게 만드는 올무가 되거나 상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서양 속담에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쏜 화살, 쏟아놓은 말, 잃어버린 기회"입니다. 한번 쏟아놓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유형들이 루머, 악의에 찬 말, 근거 없는 이야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불은 가까이 닿는 것을 태우지만 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까지 죽입니다. 그래서 혀는 활이요 그 혀를 통해서 나가는 말은 화살로 비유하게 됩니다.
혀를 통해서 나온 독화살에 맞을 때 사람들은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번민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분개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증오하기도 하고, 공들여 쌓아온 마음의 평정이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 반면에 희망의 화살은 우리를 위로하고, 연약한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워 새로운 생을 시작하게도 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작으나, 강력한 힘을 가진 혀의 이중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 표준새번역 )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샘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겠습니까?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무화과 나무가 올리브 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짠 샘이 단물을 낼 수 없습니다." (11∼12 / 표준새번역)
자연의 질서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다른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나 혀는 그렇지 않습니다. 혀는 장소와 때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을 표현합니다.
같은 혀가 이렇게 단것과 쓴 것을 동시에 쏟아놓는 것은 혀 그 자체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혀를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입니다. 혀를 잘 조종하려면 그것을 조종하는 생각이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본문에 "찬송과 저주", "단물과 쓴 물"이 나옵니다. 이것은 긍정과 부정의 표상입니다. 여기서 단물, 찬송은 치유, 용기, 희망, 기쁨을 주는 말입니다. 반면에 저주, 쓴 물은 상처, 좌절을 주는 말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만나 교제를 맺고 있는 분들 가운데 성숙된 분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비교적 말의 실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말의 실수가 없는 그분들에게 또 다른 공통점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매사에 긍정적입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를 대하든지 상대방에게서 결핍된 것 모자라는 것을 보지 않고 언제나 그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 좋은 점을 보면서 그를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줍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관계에서 뿐 아니라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문제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절망하거나 좌절,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대처해 갑니다.
저의 마음에 늘 스승으로 남아있는 어느 선배 목사님의 경우, 그에게서 귀감으로 삼는 것은 그가 아무리 곤란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것을 거의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 그 분들은 자신만이 절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우리의 생각만이 절대 옳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완전주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주의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이 비판적일 수 있고, 작은 실수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입에서는 자연히 부정적인 언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 그들은 쉽게 그들의 감정에 압도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소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자꾸 키워갑니다. 결국에 가서는 그것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됩니다. 거기서 배출되는 것은 부정적인 말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항상 유지해 갑니다. 마음의 평화가 깨어질 때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분노를 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용서가 있습니다. 분노 가운데서 나오는 언어에는 언제나 상처를 주는 독소가 있습니다. 분노와 관련된 기도문 한 편을 소개해드립니다.
"분노가 솟구칠 때"
분노가 솟구쳐 오릅니다
거의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를까 두렵습니다.
이토록 화가 치밀 줄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저의 감정의 골이 이토록 깊음에 놀랍니다
저의 온몸이 분노로 끓어오름을 느낍니다
땀이 흐르고, 사지가 부들거리고, 목소리가 떨립니다.
부드러운 언어 뒤로 저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분노를 삭힐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몸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음 깊은 속에서 절규할 수 있다면!
여기 당신 앞에
제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분노
타오르는 격정 뿐입니다
이 격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적어도 당신에게는
평온을 가장할 필요도
머리에 일고 잇는 뜨거운 감정의 언어들을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부드럽고 경건한 언어로 감명을 주려고 애쓸 필요도
"화내지 말아라"라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언어에 담을 수 없으리만큼
화가 솟구치고 분노가 밀려옵니다.
저를 받아 주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저를-
당신께 분노를 퍼부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셨듯이.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십시오
제가 타인과 자신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고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도록 살펴주십시오
당신의 사랑의 손길을 제게 얹어 주십시오
제가 거부의 몸짓을 할 때조차도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평온과 고요를 되찾을 때까지.
제가 머무르는 곳에서
저를 만나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을 -
저의 분노, 저의 혼돈
저의 눈물, 저의 죄의식을
받아들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크신 연민 안에
저를 안아 주시고 저를 치유해 주십시오
저의 마음을 부드럽고 고요하게 가다듬어 주십시오
마치 당신의 마음처럼.
우리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이 짧은 생의 기간 동안에 축복이 담긴 말만을 하며 살아도 다 못합니다. 그런데 아무런 창조적 에너지가 담겨지지 않은 저주의 말을 하며 산다는 것은 인생을 그만큼 잘못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혀가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갈 수 있습니다. 말은 생각을 드러내는 통로만은 아닙니다. 말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시켜 가기도 합니다.
" 말은
생각이나 느낌을 드러내는
통로만은 아닙니다.
차라리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가는
견인차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일상의 분위기가
단조롭고 넌더리가 나는 것은
말을 깨끗이 닦아 쓰려는
우리의 의지가 가난해서입니다.
말은 그렇다고 해서
의지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말은
또한 삶의 표현 양식이어서
삶의 원동력이 사그라질 때
빛바랜 낙엽되어
땅위에 내뒹굴기 때문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제시하는 온전한 그리스도인 또는 성숙된 선생의 상은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2)고 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말에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 성숙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과 행함의 일치를 보인 인물을 소개하며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아들을 데리고 간디에게 상담하러 왔습니다. 여인은 간디에게
"자기 아들이 사탕을 너무 많이 먹으니 많이 먹지 않도록 이야기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생각하기를 훌륭하신 분이 아들에게 그러한 충고를 하면 아들이 잘 순종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간디는 여인에게 일주일 후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여인은 아들과 함께 다시 간디를 찾아 왔습니다.
간디는 아들에게 "얘야 사탕을 먹는 것은 몸에 해로우니, 먹지 않도록 해라."고 했습니다.
여인은 간디에게 "별다른 이야기도 아닌데 왜 일주일씩 기다리게 했다가 다시 오게 하여 이제야 말씀하십니까? 그런 이야기라면 그때 해주셨어도 됐을텐데."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나도 실은 그 동안 사탕을 많이 먹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일주 전에 나는 사탕을 끊었지요."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옳은 가르침이라고 해도 자신이 행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복된 소식을 전하고,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혀로 표현되는 언어를 통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 가십니다. 우리는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의 표현이 그 근원으로부터 나오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단물과 쓴물
약 3:1-12 / 박종순 목사
지난주간 "미국에서도 고3은 힘들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쓴 이는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가 폴리테크닉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뉴욕에 있는 공립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는 김승운씨 입니다. 그는 책 속에서 미국 교육의 실태, 교사로 일하며 겪었던 일들, 교민들과 미국교육에 얽힌 이야기들을 수필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온지 6개월 밖에 안된 제프리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돈도 많고 영어도 잘하는 사람들이어서 뉴저지 지역에 집을 정하고, 제프리는 동네 가까이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 등록을 했습니다. 이유는 미국 아이들은 힘있는 아이는 깔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제프리는 이미 한국에서 검은 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학교 다니기 시작한지 한달 후 장기자랑(talent show)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은 노래, 춤, 악기연주로 장기를 자랑했습니다. 제프리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장에 다니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무대로 올라와 옆발차기, 벽돌깨기 등 시범을 보였습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한 학생의 등을 밟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송판을 발로 격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이후 제프리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식당에서 친구들과 둘러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프리가 뽀빠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한 친구들이 비웃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화가 난 제프리가 가장 크게 웃고 놀려대는 마이클에게 주먹을 쥐고 한국에서 하던 대로 한마디했습니다. "넌 죽었어!"(Iwill kill you!) 라고. 그러자 마이클은 조용하게 식탁에 앉았고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마이클은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고 대신 엄마와 변호사가 교장을 찾아와 한국에서 온 검은 띠가 마이클을 죽인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겁이나서 학교에 나올 수 없다며 듣고 보았다는 다른 학생들의 이름을 증인으로 교장에게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제프리를 퇴학시키고 안전이 보장되어야 마이클을 다시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조치가 취해지지 않을 경우 학교와 교육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했습니다.
흔한 농담 “넌 죽었어"라는 말 한마디가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다행히 제프리 엄마가 영어를 잘해 마이클 네 집을 꽃바구니와 선물을 사들고 찾아가 백배 사죄를 하고 문제를 풀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한국사람은 홧김에 "죽이겠다"는 말 한마디했다가 체포돼 보석금 5만 달러를 내고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경우 학교에서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다 걸리면 "너 이자식, 한번만 더 담배 피우다 걸리면 죽을 줄 알아!" "안 피면 되잖아요."로 끝나지만 미국의 경우는 "피터 담배는 몸에 해롭단다. 그러나 정 피우고 싶으면 학교 밖에서 피우렴"이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미국에서 "너 이자식 죽어"라고 했다간 당장 고소당하고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 왜 말 조심을 해야하는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누구나 말에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손이나 발보다 말의 속도가 빠릅니다. 그래서 손이나 발이 나가기 전 불쑥 말이 나가는 것입니다. 총소리가 "탕"하고 난 뒤에 총알이 총구를 떠나 날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총알이 목표물을 맞춘 뒤 총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10㎞ 떨어진 목표물이라면 총알은 25초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의 속도도 총알과 비슷합니다. 총알이 잘못 맞으면 오발이 되고, 말이 실수하면 전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이 빠르고 급해서 실수가 많은 사람들에게 3절은 말씀합니다. "입에 재갈 먹여 온몸을 어거하라"고, 타고 다니는 말을 어거하는 방법은 입에 재갈을 먹이고 재갈에 고삐를 매 말의 행동을 조절하는 것입니다. 고삐를 잡고 잡아당기고 늦추면 재갈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야생마도 재갈만 먹이면 꼼짝 못합니다. 큰 배도 키 하나로 방향을 조정합니다. 내가 내 입을 신앙과 인격과 덕으로 재갈 먹이면 아무 말이나 함부로 지껄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혀는 불과 같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혀는 작은 지체"라고 했습니다. 흔히 혀의 길이를"세 치"라고 합니다. 세 치 밖에 안되는 작은 지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는 일은 큽니다.
혀는 말하는 기능과 맛보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혀가 어눌해지면 말을 더듬고, 혀가 굳어지거나 짤리면 말을 못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혀로 쓴맛, 단맛, 짠맛, 신맛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색맹이 있듯이 미맹(味盲, tasteblind)이 있습니다. 맛을 구분 못하는 것이 미맹입니다. 혀에 병이 생긴 것입니다.
의사들은 혀를 들여다 보고 질병유무를 진단합니다. 혀에 흰색이나 황색 설태가 짙게 끼어 있으면 소화기에 이상이 있고, 혓바닥 색깔이 다색이나 흙갈색으로 변하고 구취가 심하게 나면 티부스 증상이 있는 것이고, 혀 표면에 딸기 증세가 형성돼있으면 성홍열이 있는 것이고, 혀를 내밀었을 때 혀가 떨리고 고정이 되지 않으면 파킨스병이나 신경질환증세가 있는 것이고, 혀가 둔해지면 뇌졸중이나 뇌빈혈 증세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건강유무 증세가 혀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혀가 건강해야 온몸이 건강합니다.
6절을 보면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담뱃불 하나가 산을 태우고 공장을 태우는 것처럼 실수한 말 한마디가 자신의 인격을 망치고 공동체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혀를 어거하고 혀를 조심하지 않으면 큰불이 나서 나도 타죽고 다른 사람도 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날 독일의 시성이라 부르는 괴테 집에 정치가, 문학가, 군인, 실업가 등 괴테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길어지고 얘기가 오가다 보니 자연 음담패설도 나오고, 남의 흉을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괴테가 정색을 하며 "여러분, 종이부스러기나 음식부스러기를 흘리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의 흉이나 음담패설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더러운 말들은 모두 주워 가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그 더러운 것들을 제 집에 가져오지 마십시오. 남의 흉을 보는 것은 공기를 더럽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제임스 고든은 "가장 위대한 말은 하나님이다. 가장 심오한 말은 영혼이다. 가장 부드러운 말은 사랑이다. 가장 어두운 말은 죄다. 가장 더러운 말은 위선이다."라고 했습니다.
유고의 작은 시골마을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수종들던 아이가 실수로 포도주 병을 떨어뜨려 병이 깨지고 포도주가 쏟아졌습니다. 화가 난 신부가 그 아이의 뺨을 때리면서 "다시는 제단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내쫓았습니다. 훗날 그 아이가 유고의 대통령 티토가 된 것입니다. 티토는 다시는 제단에 나타나지 않은 채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신부를 수종들던 아이가 병을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신부는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야 걱정 말아라. 너는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라고 말했습니다. 훗날 그 아이는 "그리스도의 삶" (The Life of Christ)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풀던 쉰 신부가 되었습니다.
혀로 내뱉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희망을 주기도 하고 절망을 주기도 합니다.
3. 혀는 두 기능이 있습니다.
8절을 보면 "혀는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속병이 있으면 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속이 병든 사람, 믿음이 병들고 영혼이 병든 사람의 혀는 독이 밴 말을 뱉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 도다"라고 했고, 11절을 보면 "한 구멍으로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냐"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을 지적하고 경고한 말씀인 것입니다.
축복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은 깨끗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주하고 비난하고 비판하고 헐뜯는 말은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연덕스럽게 기도도 잘하고 찬송도 잘하고 아멘도 잘하면서 욕도 잘하고 비난도 잘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이 이중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란츠는 "우리가 날마다 뱉은 말들이 책으로 출판되지 않을지라도 말세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한 말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덴마크의 저술가 데어도어 라인킹(Theodore Reinking)이라는 저술가는 자신이 쓴 책 속에서 당시 덴마크 국왕 크리스쳔 4세를 헐뜯었다는 이유로 1646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최종 결심에서 국왕은 그에게 "네가 쓴 책을 씹어 삼키든가 사형을 당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라인킹은 하는 수없이 자신의 책을 갈기갈기 찢어 스프에 넣어 꿇인 다음 모조리 씹어먹었다고 합니다.
혀는 자신을 망칠 수도 있고, 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를 파괴할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습니다.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말로 신앙을 고백할 수도 있고, 예수를 부인할 수도 있습니다.
4. 좋은 말을 골라 합시다.
부목사 시절 담임목사님을 지지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이 있는 교회에서 사역한 일이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저를 번갈아 가며 만나자고 찾아오기도 하고 불러냅니다. 와이셔츠를 사주기도 하고, 양말을 사주기도 하고, 불고기를 사주기도 하면서 담임목사님을 흉보고, 사모님을 흉보고, 당시 대학교와 고등학교 다니는 자녀들까지 흉을 봅니다. 그러면서 "박목사님, 조금만 참고 계세요. 목사님 같은 분이 저희 교회 담임목사가 되셔야 해요. 어짜피 당회장 목사는 오래 못가요."라며 저에게 접근을 합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후 정색을 하고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이 얘기 담임목사님한테 다해도 될까요?"
그가 펄쩍 뛰며 "절대 안되지요. 박목사님만 알고 계셔야죠."
"집사님, 절대하면 안될 말을 왜 저한테 하십니까? 절대로 해도 될 말씀만 하시지요. 저는 목사님을 도와드리기 위해 일하는 부목사입니다. 저는 목사님 편입니다."
만일 그 때 제가 그들과 짝짝궁되어 주절거리고 혀를 놀렸더라면 오늘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때 모시고 있었던 담임목사님에게 목사님을 헐뜯고 비난하던 그 사람들의 얘기나 말을 단 한번도 전한 일이 없었습니다.
나는 내 입으로 천 마디 만 마디 좋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입으로 천만마디 나쁜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말을 골라합시다. 나쁜 말은 하지 맙시다. 좋은 말, 단말, 맛있는 말, 유익한 말, 은혜로운 말을 합시다.
혀를 길들이라(1)
약 3:1-12 / 안병호 목사
인간의 외상은 쉽게 발견 될 수 있고 치료하면 쉽게 아물어진다. 그러나 말로 입은 상처는 훨씬 더 무섭고, 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 클 수 있다. 그러므로 혀를 길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혀를 길들이려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 문제는 너무 중요해서 두 번에 나누어서 설교하겠다. 오늘은 그 일부로 1-5상반까지만 설교하겠다.
Ⅰ.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고 배우눈 자가 되어야한다(1,2)
야고보는 혀에 대한 교훈을 하면서, 선생이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말로 시작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3:1)
아마 이 말은 선생이라는 직업을 갖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도 선생님이시다. 이 세상을 살아 가는데 끊임 없이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이 필요하다. 아무도 선생 되기를 싫어하면 누가 교육을 시킬 것인가? 교회도 선생이 많이 필요하다. 그러면 여기서 선생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무조건 남을 가르칠려고 하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자기는 배우지 않고 항상 가르치기만 좋아하면 실수 하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말에 실수하지만, 선생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특별히 더 위험에 노출 되어 있다. 선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혀는 강력하고 위험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가르칠려고 하기 전에 먼저 배우기를 원해야 한다. 가르치고자 하면 우리는 교만하기 쉽고 배우고자 하면 겸손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배우기를 원해야할 것이다.우리가 정말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말에 실수가 없어야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에 굴레 씌우리라(3:2)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무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숙함?이나 ?신실함?을 가르킨다. 선생은 무엇보다도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할말 안 할말을 골라서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말에 상처를 받고 넘어지는 사람이 많이 있다. 속 없이 할말 안 할말 함부로 하는 사람들은 가벼운 사람이요 유치한 사람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인격이 자라기 위해서는 언어 사용에 특별히 훈련을 해야한다. 야고보는 사람이 말을 절제 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쉬운 것인 온몸을 절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죄악된 행동이나 충동은 종종 혀에서 불이 붙어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보면 우리는 다 말에 실수가 많다고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말에 실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말에 실수를 함으로 얼마나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는가를 누구나 다 경험했을 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허히 나는 참으로 말에 실수가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말에 실수한 사람도 용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내가 말로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은 쉽게 잊어 버리고 남이 나에게 상처준 말만을 생각하고 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특별히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는 이런 문제로 어려워진 일이 많으니까 서로 돕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우리는 서로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또한 그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한번 마음이 상하면 완전히 토라져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나도 말에 실수가 많은 사람이니까 상대방의 실수도 너그럽게 받아 들여주자. 말꼬리 잡고 항상 다투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될 것이다. 말의 실수는 어떤 성격의 문제도 아니요 매너의 문제도 아니요, 죄의 문제이다. 죄가 있어서 우리가 실수를 했는데 그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그것에 너무 오래 집착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Ⅱ. 말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한다(3-5상)
말한마디로 천냥 빛을 값는다는 말이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야고보는 이렇게말한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禦拒)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3:3-5)
말에 재갈을 물림으로 온몸을 다스린 것처럼 사람도 혀를 통제하면 온 몸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광풍에 밀려가는 배도 아주 작은 키로 사공의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운전하듯이 사람의 혀는 작지만 온몸의 방향을 이끌어 갈 수 있다. 혀가 큰 것을 자랑한다는 말은 혀의 영향이 아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을 잘하고 잘 못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가슴속 깊이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말의 실수를 해 놓고도 쉽게 그 잘못을 잊어 버릴려고하고 또 그 잘못을 합리화 해 버릴려고 한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그것을 그렇게 마음에 두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실수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가슴속 깊이 간직해야 한다. 한번 실수한 말은 쏟아진 물과 같아서 다시 담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문제임으로 이것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말을 할 때마다 내가 한 이 말이 어떤 파장을 가져 올 것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 말을 해야 한다. 특히 화가 났을 때의 말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물론 농담을 할 때도 그 농담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말을 해야 한다. 남이 듣지 않는다고 남의 말을 함부로 하는 것도 조심해야한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함부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실컷 헸는데 그 말이 여과 없이 한마디도 빠지지 않고 옮겨진 경우가 있다. 그 얼마나 민만한 일인가?
내가 대학 시절에 실습시간인데 한 교수가 같은과 동료를 아주 신랄하게 비난을 했다. 그런데 그 비난 받은 교수는 나의 사촌 형이었다. 더 심한 경우는 아주 신랄하게 동료 교수를 비난했는데 그 말을 듣는 사람중에는 그 교수의 아들이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다. 비록 내가 그 사람이 없는데서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이 그 사람에게 그대로 들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말해야한다. 내가 누군가이 말을 한다면 비록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없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해야한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말을 버리고 선한 말을 하려고 애를 써야한다. 말을 잘 함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말을 잘 못함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용기와 소망을 주는 말, 격려와 위로가 되는 말은 얼마나 중요한가?
내가 대학 시절에 교육학 교수가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아마 설교 시간에 몇번 이야기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는데 교장선생이 학생들에게 물었다. 운동장가에 무엇이 있느냐? 어떤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하는 말이 교장 선생님 운동장가에는 프라타나스가 있습니다. 아마 그 대답은 진정으로 교장 선생이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하도 그 아이가 정색을 하고 말을 하니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교장 선생은 아주 큰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 운동장 가에는 프라타나스가 있지! 그 나무가 얼마나 멋있느냐! 너 참 관찰력이 예민하다, 너 정말 훌륭한 아이다. 이렇게 칭찬을 해 주었다고 한다. 원래 그 아이는 문제아이로 공부가 항상 꼴찌고 숙제도 안하고 문제만 일으키는 아이였는데 그 후부터 그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하여 나중에 아주 훌륭한 아이가 되었다고 한다. 영향력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서 깨달은 진리를 말 함으로서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가? 감사하는 말, 찬양하는 말을 많이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망하는 말, 불평하는 말, 비판하는 말, 증오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정말로 큰 죄를 범하는 자요, 그 인생의 장래가 결코 소망이 될 수 없다.
혀를 길들이라(2)
지난 주일에 우리는 혀를 길들이는데 있어서 명심해야 할 두 가지를 말씀 드렸다. 첫째는 가르치는 자가 될려고 하지 말고 배우는 자가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고, 둘 째는 말 한마디가 전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므로 말 한마디라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 드렸다. 오늘은 다른 두 가지 명심해야 할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혀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요, 다음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다운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Ⅰ. 혀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3:5하-8)
혀의 큰 능력은 악한 목적을 위해서 쓰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바로 이 위험을 알았기에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절제되지 않은 언어가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말한다.
첫째 혀는 불과 같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3:5하)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6)
이 불은 작지만 맹렬하고, 멀리 있는 것까지도 모두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불씨는 아주 작지만 몇만 정보의 산의 나무를 다 태우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가? 실로 우리는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혀를 매일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자.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또한 이 불은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고 하였다. ?생의 바퀴?라는 표현은 특이한 표현이다. 야고보는 이 표현을 통해서 인생의 전과정,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사람에게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다 보면 말 한마디로 그렇게 오래 사귀어 오던 친구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고, 가까운 형제간에도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위로의 말이 오히려 큰 상처를 내는 경우도 있다.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도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를 받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실로 말은 불과 같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심 없이 혀를 사용해 왔다면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었는가? 이와 같은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살면서도 아직까지 그래도 큰 사고를 저지르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우리는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혀를 길들여야 하겠다.
특히 교회에서 혀를 사용하는데 아주 조심해야 할 것 하나를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옮기는데 있어서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말을 옮길 때는 대부분 부풀려서 전해지거나 잘못 전해 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가끔 말을 전하는 게임이 있다. 예를 들어 처음 사람이 '빌라도'라는 말을 하고 그 말을 계속 옆에 사람에게 전하게 한다. 그런데 그 말이 마지막에는 '빈 라덴'이라는 말로 와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옮기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군다나 처음 말을 할때는 그 정황이 있는데 그 정황까지는 전하지 못함으로 큰 오해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을 전하고자 할 때는 잘 여과해서 듣는 사람에게 큰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교회는 흔히 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는 말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은 옮겨질 때마다 그 힘이 제곱의 힘으로 파괴력을 발휘한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누가 그러더라는 그 말이 전해 들은 당사자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둘째, 혀는 통제할 수 없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 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사람들이 그들의 혀를 훈련하고 절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7-8)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온 땅을 다스리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창 1장), 그들에게는 혀를 다스리는 능력은 없는 것이다. 오직 혀만 사람의 통제 밖에 있다. 이것은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며, 이것은 마치 독사의 혀와도 같은 것이다. 이 표현은 우리에게 절제되지 않은 언어가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이 시간 각자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혀를 가지고 있으며 그 동안 이 혀로 수 많은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으며 아직도 그 혀를 통제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 안에 모든 악의 근원인 죄를 철저히 제거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죄 값을 치루신 분이시다. 이 예수님 만이 항상 우리의 소망이 되신다.
Ⅱ.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 다운 말을 해야한다 (3:9-12)
야고보는 우리에게 혀를 길들이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절제되지 못한 언어가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혀는 변덕 스러운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일관성이 없는 언어를 예로 들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3:9-10)
하나의 혀로 이와 같이 서로 양립할 수 없고 모순 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어떻게 하나의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순된 언어는 1:8과 4:8에서 책망을 받은 것처럼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절대로 적합한 것이 아니다.
일관성 없는 언어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를 자연의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3:11-12)
모순된 말을 하는 혀는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모순된 언어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워야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단물을 내야하고 감람 나무는 감람 나무를 포도 나무는 포도의 열매를 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그리스도인 다운 말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가지고 비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부정적인 말 상처 준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긍정적인 말을 하자. 어떤 사람은 똑 같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말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말한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야 할 단물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의 어떤 말이 단물을 낼 수 있는가? 나는 기도하는 입술, 전도하는 입술이야말로 단물을 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이 되리라 믿는다. 참으로 기도하는 입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물의 기도로 남편을 변화 시키는 여인을 생각할 때 항상 큰 감명을 받는다. 얼마나 우리는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좀더 심한 말로 버릇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그러나 그런 말을 들어서 변화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오히려 관계만 나빠진다. 그러나 애정을 가지고 기도한 사람은 도무지 변화 될 것 같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놓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에게 많은 말보다 기도하는 엄마의 입술은 반드시 자녀들에게 큰 축복이 되리라 믿는다. 기도하는 엄마의 입술을 통해서 자녀들은 이 악한 세상에서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거룩한 자녀로 성장 하리라 믿는다.
기도는 우리의 혀를 들일 수 있는 가장 효적인 방법이요 기도의 입술은 긍정적인 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믿는다. 파괴적인 혀의 힘을 기도하는 혀로 바꾸어 큰 기적을 맛볼 수 있기를 빈다.
어떤 사람이 죠지 물러를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고아원을 운영하려면 많은 재정이 필요할텐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하였습니까?' 뮬러는 그 사람을 조그마한 방으로 데려가서 구멍이 뚤린 24개의 방석을 보여 주며 '이 방석이 돈이 나온 구멍입니다' 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대답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 많은 사람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이 구멍난 방석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자녀륵 길렀습니까? 이 구멍난 방석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자의반 타의반 기도를 한다. 그러나 평상시에 항상 꾸준히 기도하지 않는다. 참으로 우리가 항상 꾸준히 기도한다면 우리의 혀는 얼마나 잘 길들여질 것인가? 혀를 길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 기도하는 습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단물을 내는 입술은 전도하는 입술이라고 생각한다.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은 바로 복음이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혀는 얼마나 아름다운 혀인지 모른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불행이 온다. 이 모든 불행으로부터 해방 받을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길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 이사야는 복음을 전하는 말이 얼마나 아름 다운가라고 말하였다. 복음은 반드시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믿는 사람도 늘 복음을 들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지 않는가? 사람이 스스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고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만 의지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그 기쁜 소식은 아무리 듣고 또 들어도 오히려 부족하다.
혀를 길들이지 않는다면 그 혀로 말미암아 개인이 파멸을 당하고 가정이 파멸을 당하고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정말 혀를 길들인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특별히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을 명심하자.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보다 배우는 마음을 갖자. 한마디 말의 영향력은 전 인격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한 혀는 물과 같이 무서운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말을 하도록 힘쓰자.
혀! 그 무서운 잠재력
약 3:1-12 / 반태효 목사
말의 능력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입니다. 말과 언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만 주셨습니다. 물론 동물들도 나름대로 의사소통 수단이 있습니다. 위험을 알리기도 하고, 위협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동물들은 문화를 만드는 법도 없고, 발전하는 법이 없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사상을 전하고, 교육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창조과학회에서 나온 좋은 자료가 있습니다. 인류의 기원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의 기원을 찾아 진화론자들은 유인원의 뼈를 조사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인간의 조상이라고 생각되는 가장 오래된 뼈가 나왔는데, 최근에 그 뼈가 사람의 뼈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유인원과 사람의 턱 뼈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구조가 흡사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고 합니다. 유인원의 턱 뼈는 단순해서 사람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됩니다. 외모는 그럴듯한데 사용하는 언어때문에 품격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는 시원치 않은데 그의 언어때문에 돋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일상적인 생활을 위해 5백 단어 정도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의사 소통을 하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지만, 사상을 전달하고 깊은 대화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단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선진화되고 문명화된 나라는 사용하는 단어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개발되지 않고 발달하지 않은 나라일수록 사용하는 언어가 단순합니다. 그만큼 언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말과 우리의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말이 없는 세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말은 우리 생활에 밀접해 있고 영향력을 끼칩니다. 그래서 잠언 18장 21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자살하려는 사람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 한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충격을 주고 심지어는 자살하게 합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본인은 ‘실수’라고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말로 위로를 얻습니다. 말로 힘을 얻습니다. 각자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신앙생활의 기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만큼 말은 우리에게 위로와 능력이 됩니다. 축복도 말로하지만 저주도 말로 합니다. 내적치유 사역을 해 보면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상처는 대부분 말 때문에 받은 상처입니다. 몽둥이나 체벌은 육체에 흔적을 남기고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잘못된 말 한마디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들은 말 한 마디가 평생 한 사람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말의 위력과 능력입니다.
올 한 해를 돌이켜보면 잘한 것도 많지만 후회스러운 일이 참 많습니다. 나쁜 짓 한 것은 별로 기억나지 않더라도 말로 실수한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믿는 사람들은 큰 죄는 별로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로 실족하고 넘어집니다.
먼저 자기를 가르치십시오
1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되지 말라
선생이 되는 것은 좋습니다. 특별히 한 영혼을 양육할 수 있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교사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교사가 대접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은 부모와 랍비가 위험에 빠지면 당연히 랍비부터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나를 낳았지만 랍비는 내 미래를 결정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랍비’라는 말 자체가 ‘큰 자’, ‘위대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랍비를 그만큼 존경했습니다.
우리는 평생에 위대한 스승 한 분만 만나도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불행은 스승의 날에 진심으로 찾아갈 스승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사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야고보는 교사가 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좋은 선생이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이론은 얼마든지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기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대로 자신이 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죽은 믿음의 대명사가 되기 쉽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함이 없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남은 가르치고 간섭하면서도 자신을 가르치지 못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 들이었습니다. 남은 가르치려는 사람, 남 일에 참견하는 사람도 교사 노릇하는 사람입니다. 자격증이 없어도 스스로 교사가 되어서 간섭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먼저 말하려고 하는 일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절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는 말에 실수가 많습니다. 만약 말에 실수가 없다면 그는 온전한 사람입니다. 말을 다스릴 수 있다면 자기 인생 전체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이야기 하면 자기 말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 전체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에 후회가 없이, 상처주는 일 없이, 지혜롭게 말을 해야 합니다.
누가 오해 하더라도 오해하게 한 책임은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상황을 살피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말한 것은 부주의한 것입니다. 다른 의도가 없었을 지라도 듣는 사람이 상처를 받았으면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합니다.
‘혀’에 대한 세 가지 비유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믿는 대로 살 수 있는 비결 중의 하나가 언어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말이 바뀌면 운명이 바뀝니다. 말이 씨앗이 됩니다. 말을 바꾸면 인격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말은 인격의 반영입니다. 속의 것이 나오는 것이 말입니다. 말하는 대로 인격이 형성됩니다. 교만한 말, 더러운 말, 악한 말들을 고쳐가면서 인격을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말을 잘 길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3~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우리의 혀를 ‘재갈’과 ‘키’, ‘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길들이지 않으면 탈 수 없습니다. 말은 길들이고 재갈을 물렸을 때에만 사람이 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침묵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롭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말 할때 항상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무심코 하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항상 준비되고 기도한 말이 나와야 합니다. 불쑥 불쑥 내뱉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지혜롭게 생각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언어를 고쳐야 할 필요가 있고, 말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시간을 투자해서 길들이십시오. 몸을 다듬는 것 이상으로 길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혀를 제어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혀를 ‘키’에 비유합니다. 키는 배에 비하면 너무나 작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배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문제는 키가 조정이 안되는 것입니다. 조정이 안되면 사고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라는 말을 계속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의도한 대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말이 나오면 자기도 그 말에 화를 입고 상대방에게도 고통을 주게 됩니다. 여러분이 던진 말 한마디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이웃에게 영향력을 줍니다.
아무리 큰 불도 작은 불씨에서 시작됩니다. 1871년 미국 시카고에 화재가 났습니다. 그 화재는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7만5천개의 건물이 불에 탔습니다. 1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그 불은 시카고의 작은 농장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불이 온 도시를 태워버렸습니다.
건조한 밀림에 불이 붙으면 아무도 끌 수 없습니다. 큰 비가 와서 스스로 꺼질 때까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불이 되고 맙니다. 이 불과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혀입니다.
말로 망한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평생 쌓았던 경력이 말 한마디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41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자기의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입술을 지키고 다스릴 수 있습니다.
혀 길들이기
6~8절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를 잘 길들여야 합니다. 말에게 재갈을 물리듯, 배의 키를 잡듯이, 불을 다스리듯이 혀를 길들여야 합니다. 6절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모든 악과 더러운 것이 말로 나옵니다. 가족간의 불화가 생기는 이유도 말 때문입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는 우리의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 전체를 불사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혀로부터 출발합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짓는 모든 죄에는 반드시 혀가 있다’. 잘못된 말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불사른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못하는 말은 마귀의 도구가 됩니다. 영적 전쟁의 도구가 뭘까요? 바로 ‘말’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불화살을 쏘는데 그 불화살은 우리를 참소하는 것입니다. 거짓되고 길들여지지 않은 말들이 마귀의 도구가 되고 지옥 불처럼 우리 생애 전체를 망치고 맙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 않은 혀는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동물들을 길들입니다. 심지어는 맹독이 있는 코브라도 길들입니다. 그런데 세 치도 안되는 이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혀가 얼마나 무서운지 8절을 보십시오. 마치 독사의 입에서 나오는 독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의 혀를 길들일 수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는 안됩니다. 입술을 깨물어 보십시오. 혀를 깨물어 보십시오. 그런다고 할 말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말을 하고 맙니다.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입니다.
혀를 길들인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오순절날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다. 사람이 범죄하고 나서 가장 먼저 더러워 진 것이 바로 입입니다. 범죄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바벨탑에서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믿음의 말을 하던 입이 싸우고 원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입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에서 단 하루만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귀담아 들을 말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 친구도 만나 보십시오. 남 모르는 정보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영혼을 시원케 하고, 내 마음에 쉼을 주고 용기를 주고 힘을 주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지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고 거듭나게 하실 때 우리 입술을 길들여질 수 있습니다.
‘입술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제일 먼저 말이 바뀌었습니다. 방언의 주제는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가장 먼저 말이 바뀝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말이 바뀌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가짜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거듭나면 말이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언어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군대의 언어가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만의 언어문화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각 집단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훈련을 받다가 교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았을 때 한 마디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말은 바로 ‘형제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병, 일병이 아닌 형제님이라고 불러주는 교회가 바로 천국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술을 바꾸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9`~12절을 보십시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찬송과 저주를 한 입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이 나왔으면 축복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에서 은혜를 받고 찬양을 했으면 축복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문 밖을 나가자마자 욕을 하고 저주를 한다면 되겠습니까?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가 열립니다. 무화과나무에서 감람열매나 포도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에서 감람열매가 맺히면 그것은 감람나무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저주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입술로 남을 비판하고 상처를 주고 판단하는 말을 한다면 우리는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육신의 속한 사람입니다.
짠 물이 단 물을 결코 낼 수 없습니다. 말이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분명히 거듭난 사람이지만 아직 말이 습관이 되지 않아서 불쑥불쑥 악한 말이 나오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믿은 사람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 말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을 받으십니다. 예배시간에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일상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기도와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이 복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아직 말이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은 내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 바꾸려고 하지 마시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듣는 대로 말하게 됩니다. 욕을 듣고 자랐으면 어느 새 자기 자식에게 욕을 합니다. 더러운 말을 듣고 자라면 더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더러운 말을 차단하십시오. 그리고 안에 있는 더러운 것을 청소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혀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은혜로 충만해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항상 찬양의 말, 격려의 말,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 적극적인 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혀를 관리하는 것이 여러분의 일생을 관리하는 것이요, 여러분의 축복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혀를 지키라
약 3:1-12 / 엄기호 목사
유대인의 한 마을에 세 딸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세 딸은, 각기 한 가지씩 흠을 가지고 있었는데, 첫째 딸은 몹시 게으르고, 둘째 딸은 도벽이 있었고, 막내딸은 남을 헐뜯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들의 결점을 고쳐 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이제 도저히 제 딸들의 버릇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니 랍비님께서 제 딸들을 1년 동안만 맡아서 버릇을 고쳐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인해 랍비는 딸들을 맡기로 했습니다. 세 딸을 맡은 그 랍비는 즉각적으로 그녀들의 단점을 고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먼저 그는 큰딸을 불렀습니다. “너는 내 집에 있는 한,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너를 위해 몸종을 여럿 고용해 놓았으니 너 편한 대로 지내거라.” 이번에는 둘째 딸을 불렀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모두들 나를 신뢰한다. 그러니 너는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거든 무엇이든지 그냥 집어 오도록 해라. 네가 물건들을 그냥 집어 온다 하더라도 아무도 네게 값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랍비는 막내딸을 불렀습니다. “매일 저녁 식사 후, 너는 내 방으로 와서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도록 하거라. 아무 이야기라도 좋다.”
그리고 일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이제 딸들을 데리러 랍비의 집으로 와서 자신의 딸들과 마주앉았습니다. 첫 번째 딸은 얼른 일어나 다과상을 차려온 뒤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안하고 누워 있기란 정말 고역이에요.” 둘째 딸은, “물건은 돈을 지불하는 맛에 산다는 것을 깨달았어요”라며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막내딸은 아버지의 무릎에 올라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글쎄 랍비님이 여자관계가 보통 복잡한 게 아니예요” 하며 스승인 랍비를 헐뜯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이 세상에서 헐뜯는 버릇을 고치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실수가 많습니다. 손과 발이 실수를 하고, 눈과 코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실수하는 일이 제일 흔합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의 큰 뜻을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말을 삼가라” 또는 “혀를 지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지킬 줄 모르면 도적 맞게 되고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성마다 파수꾼을 세워 지키게 하고 지금도 소중한 것을 보관하는 곳이나 중요한 관청에는 반드시 파수꾼을 세워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전으로 삼으사 파수꾼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혀의 권세와 왜 혀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혀의 권세
말에는 권세가 따릅니다.
말은 창조적 이미지에다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말을 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구체화되지 않고 형태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 되어 입밖에 나오면 형태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짐승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아담 앞으로 데리고 와서 이름을 붙이게 하셨는데, 아담이 짐승과 새와 그리고 물고기에 이름을 붙여 줄 때 성격이 형성되었습니다. 사자는 사납게되고,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가 되었으며, 대통령은 위엄이 넘치고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이처럼 아담의 말이 하나님의 창조에 협동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말에는 창조를 가져오는 영적 힘이 있기 때문에 그 말대로 됩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됩니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거대한 배를 작은 키 하나로 방향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것처럼, 사람의 입 속에 있는 혀를 제어할 수 있으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馬)이 재갈을 당기는 곳으로 움직이고, 배가 키를 조종하는 곳으로 운행하듯이 사람의 삶의 방향은 혀가 움직이는 대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확실히 혀가 움직이는 대로 삶이 바뀌어집니다. 늘 ‘할 수 없다’, ‘끝장났다’라고 말하면 그렇게 좋던 환경도 순식간에 나빠지고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 ‘하면 되다’,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 있지 않아 환경을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혀는 작은 것이지만 그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혀를 늘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때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혀의 권세를 통해 천국을 가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법정에서 말을 해도 검사는 늘 죄인을 죽이는 말을 하고 변호사는 죄인을 살리는 말을 합니다. 유명한 검사 한 분이 아내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은 후에 만인이 우러러보는 그 검사직이 죄의식이 되어 짐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사직하고 변호사 간판을 걸었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통하여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고 생명을 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혀를 잘라버리면 벙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혀를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벙어리가 되어 천국에 가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혀를 왜 지켜야 하나
혀의 악함이 있기 때문에 혀를 지켜야 합니다.
혀가 사탄에게 잡힌 자는 이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뱀은 곧 사탄이요 마귀를 의미했습니다. 뱀은 혀가 두 갈래로 되어있습니다. 입은 하나이면서 혀가 두 개인 동물은 오직 뱀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한 입으로 달콤한 말과 죽이는 말로 사람을 유혹합니다. 본인 앞에서는 좋게 이야기 해놓고는 돌아서서는 나쁘게 이야기합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는 사람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이중인격자 노릇을 합니다.
또 뱀은 턱뼈가 발달하여 그 머리보다 10배나 더 큰 동물도 삼킬 수 있는데 먹이를 한번 물면 찰고무처럼 계속 늘어나 토끼나 염소 등 큰 동물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번 물면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독을 품어냅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은 거짓말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식구를 자기식구로 만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식구를 마귀 식구로 만드는데 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만들고 이간질하게 만들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좋은 사이를 갈라놓게 만들고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이것이 오늘날 사탄의 전술입니다. 우리는 이 전술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혀를 지켜야 합니다.
혀는 이중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혀를 지켜야 합니다.
“죽을까 하노라”는 하와의 말을 듣고 마귀가 자신을 얻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함으로 마귀식구가 되게 했습니다. 말하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이나 교양을 알 수 있습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쓴물과 단물을 낼 수 없듯이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부터 혀의 이중성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혀는 제어되어야 합니다.
혀를 다스리는 사람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참다운 신앙 인격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혀를 제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혀는 우리의 의지로는 제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불을 우리 입술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혀를 제어하는 완전한 방법은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서만이 가능합니다.
지혜의 문서에 보면 말하는 태도와 듣는 태도를 12가지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①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말이 많은 자는 우매자요 그런 자는 허물을 면키 어렵기 때문입니다.
② 과격한 말을 삼가해야 합니다. 노를 격동시키기 때문입니다.
③ 남의 말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④ 말을 급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의인은 할 말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말합니다. 말을 깊이 되씹어 합니다.
⑤ 남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애쓰지도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종이 너를 저주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전 7:21).
⑥ 자랑하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 사이에 좋지 않은 말들이 많아지게 됩니다.
⑦ 허망한 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지 마십시오.
⑧ 경우에 합한 적당한 말만 하시기 바랍니다.
⑨ 선한 말을 많이 하십시오. 그런 말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며, 영혼을 정결케 하고, 양약과 같이 작용합니다.
⑩ 지혜와 명철한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⑪ 말로 호리는 유혹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⑫ 지혜로운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일을 편안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오해를 받기 쉬운 말은 피하고 내가 좀 밑지고, 내가 좀 참고, 상대방을 높이고 상대방 기분을 좋게 합시다.
말이란 형체도 없고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습니다. 그러나 비수보다 더 날카롭고 흉기보다 더 잔인한 힘으로 사람을 괴롭힙니다. 말은 뼈를 쪼갤 수는 없으나 마음은 부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입술의 파수꾼을 세우고 혀의 권세로 환경과 운명을 변화시킵시다. 말을 할 때는 창조적이고 건설적이고 전진할 수 있고 나아질 수 있는 말만 합시다. 그러면 삶 속에 성공과 축복과 형통케 되는 역사가 임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삶으로 말을 하자
약 3:1-12 / 오창우 목사
20세기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 슈바이처 박사! 신학자요, 음악가요, 그 실력이 뛰어난 사람!-그러나 의사공부를 해서 아프리카에 갔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었다.-얼마나 그의 삶이 아름다운지 그를 `성자`라고 불렀다.
한번은 누가 슈바이처 박사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말로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1953년, 많은 사람들이 미국 시카고 역에서 노벨 평화상 받을 분을 기다렸다. 190cm의 큰 키의 슈바이처다. 그는 자기를 기다리던 많은 군중들을 헤치고 어느 나이 많은 흑인여인의 가방을 들어 버스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돌아와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했다. 한 기자는 "이렇게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설교는 내 인생에서 처음 보았다."고 평했다.
말이 중요하다. 이 말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삶으로도 말을 할 수 있다.
후랜시스는 하루에 한번 동네한바퀴를 돈다. 왜 제자가 동네 한바퀴를 도느냐고 묻자, "내 모습이 바로 말이다."
내 모습은 어떤가?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내 모습만 보아도 저 사람처럼 예수 믿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가?
우리가 몸으로 말을 하자고 하는 것은,
① 어려운 때일수록 그렇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자 - 나라독립,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너도 나도 애썼다. 문제는 의견이 너무 많다. 시끄럽다.
요즘은 야인시대를 보는 것 같다. 그때를 보면 안다. 저번에 문선명의 통일교가 정당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하여, 천주교 평화통일 가정당이라 일컫는다. 나라가 시끄럽자, 이단들이 득세를 하고, 정당을 만들었다. 통일교 대책준비 위원회 위원장일을 하고 계신 박준철 목사님이 전화하셨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해 주셔서 듣고 있었지만, 나라가 어려운 때일수록 자기 말이 옳다고 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삶을 보여 주어야한다.
② 이해관계가 얽힐 때 안다.
총회에서 기구개혁이 큰 문제이다. 진행과정에서 위원장으로 일하는 한 부서가 있다.
한달에 한두번 모여 회의를 하는데, 목사님도 계시고, 장로님도 계시고, 나이 많으신 어른들도 계시고, 젊은이도 있다. 회의를 진행하는데, 한 장로님이 계셨다. 그 분이 참 좋았다. 저 분 같은 분이 어디 또 있을까? 그런데, 지난 주간 이런 일이 있었다. 이 분이 계시던 부서의 일을 어떤 분이 하셨다. 내용은 나쁜 이야기가 아니고, 이제 이런 부서도 필요하고 저런 부서도 필요하다란 이야기를 하려는데, 자기 부서 이야기를 꺼내니까, 아니요라고 하면서 -돌아가는 의자인데 - 의자를 돌리면서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당황해서, 사람은 어려울 때 알아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해관계가 얽힐 때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회의가 진행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중재하느라, 보통 30-40분이면 끝나는 회의가, 3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 성경 본문 내용이 그렇다.
그 당시 상황은 로마가 유대를 핍박하고, 유대교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하고, 사면초가로 어려움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다. 밖에서 오는 아픔이 너무나 커서 이것을 감당하기 힘든 것이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1. 먼저 선생이 많이 되지 말자.
1절을 보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했다.
선생은 가르치는 자를 의미한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요3:10) 그런데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말은 가르치는 직분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에서 보듯이, 선생이란 직분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서 바른 말을 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니, 선생은 두려운 마음 갖고 이 직분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이다.
말씀의 전문가들조차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운데,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의미에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의 해석은 이러하다.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는 말은 믿음과 행위의 문제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자만하고 자기 형제를 판단하려는 신앙인들에 대해서 충고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판단을 기준삼아 다른 성도들의 행동을 성급하게 매도하며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보았다.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가? 아니다. 애매한 고난도 우리에게 있지만, 그 친구들이 찾아 와서 네가 죄가 있기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다. 회개하라고 하며 힘들게 만들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데, 홍해바다가 가로 놓였다. 뒤에는 애굽군대가 쫓아 온다. 어렵다. 그래서, 시끄러워 지기 시작한다. 각자 말을 하는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도 없고, 지도자 모세도 없고, 자신만 있는 것이다.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앞두고 정탐군이 돌아와서 보고하자, 각자 자기만 있고, 모세도, 하나님도, 지금까지 지켜주신 불기둥, 구름기둥도 잊어 버리고, 만나와 메추라기도 잊어 버리고, 아말렉 군대를 물리친 승리의 기쁨도 다 잊어 버리고, 원망과 불평과 자기 생각만 있는 것이다.
결국, 사십년 광야생활해서 고통받고 마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나안 땅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헤매고 마는 것이다.
어려울 때는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명확히 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시도하려는 가 하면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 형제를 판단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 성서학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명령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은
1)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2절 말씀을 같이 보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사람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 없다?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완전하지도 못하고 옳지도 못하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뜻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나는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배부름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풍부한 것도 받아 들일 수 있고 가난한 것도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지, 나는 완벽한 사람이다라는 뜻이 아니다.
2) `혀는 능히 길들일수 있는 사람이 없나니`
7-8절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혀는 무서운 것인데, 길들일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혀를 길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끔찍한 것이다. 요즘 소문난 게시판들을 보면, 알지도 못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 많아서 인터넷 게시판에 자유롭게 글 올리는 것을 없애야 한다는 교회가 많다.
요즘 언론이 사람을 얼마나 끔찍하게 만드는지, 아닌 것을 그렇다라고 하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신문에 내곤 한다. 나라가 혼란한 증거다.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그러면 어떤 것이 악이고, 독인가?
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가정을 무너뜨리고, 회사를 무너뜨리고, 민족과 교회까지 무너뜨린다.
제어되지 않은 말, 방향이 없는 배, 지옥불과 같이 태운다고 표현했다.
3-6절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그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혀다.
②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무너뜨린다.
사람을 사람답게 안 만든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 예배 드릴 때에는 찬송이 나오고, 자기와 주장이 안 맞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매도해 버린다. 자기 주장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
8절-11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예배드리고 난 후에 달라지는 것이다. 찬송하는 사람이 계속 하나님을 찬송해야 되는데, 아닌 것이다.
그리고, 비상식적인 것이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어찌 맺겠느냐고 성경은 말한다. 교회에서는 성자 같다가 밖에서는 달라지고, 그것은 안되는 것이다.
12절 말씀을 같이 보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세상의 자연 법칙은 일정하다. 여기서 예배드리고, 밖에서도 예배해야지, 밖에 나가서는 안 믿는 사람처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길들여지지 않은 혀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은 역시 다르다라는 이야기를 하는가? 예수 믿는 사람도 별 것 없네!라는 이야기를 하는가?
여러분은 어떠한가?
야고보 장로는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다.
1장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많이 선생되지 말라`는 것은 우리에게 말에 대해서 주시는 말씀이다. 이런 이야기는 웃으면서 해야지, 헐뜯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말 잘하라는 이야기가 없다. `침묵하라`고 한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다른 것은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말만 해야 한다.
말 많이 하지 말고 침묵이 더 낫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주여 나의 입에 파수군을 세워 주소서`라고 한다.
`하나님이여 내게 학자의 혀를 허락하소서`- 학자는 옳고 그름을 바르게 알아 바른말만 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을 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하라고 했다. "주님, 많이 선생 되지 말고 언제나 내 입을 지켜 주시기 원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2. 어려운 때는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 장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며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탁월한 언어의 능력`이라는 책이 있다. 용혜원 목사님이 쓰신 책인데, 그 책에는 의사소통을 위한 18가지 지침이 있다.
그 18가지 지침 중에 첫 번째가 행동을 말보다 크게 하라는 것이다. 행동을 잘해야 한다. 오늘 성경 13절 말씀을 같이 보자.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옛날 유럽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양을 훔쳐 가는 도둑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양이라고 하는 짐승이 별로 대단하지 않지만, 그 옛날에 양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털 깍아서 옷을 만들어 입고, 젖을 짜서 여러 가지 음식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양을 훔쳐가는 사람은 정말로 나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 양 도둑을 붙잡아 평생 치욕스럽게 하자고, 그 이마에 쉽 티프 라고 양의 s와 도둑의 t를 새겼다. 그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부끄러워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 마을에 남아 살면서 그 마을의 궃은 일들을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나이 많은 노인이 되었다. st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다 죽고, 그 다음 세대가 또 그 다음 세대가 아이를 낳았다. 마을에 사는 한 어린 아이가 아빠에게 물었다. 우리 마을에 사는 저 좋은 아저씨의 이마에 st가 무슨 글씨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의 아버지에게 양도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 아저씨가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칭찬을 하는데, 그 아이를 향해서 양도둑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아저씨는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성자의 st.를 붙여 준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그 다음부터 그 아저씨를 성자라고 불렀다.
우리는 다 죄인되었던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아 의인 된 사람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의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안믿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함이 없기 때문에 의인의 소리를 못 듣는 것이 아닌가?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행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선행으로 말미암아`, `그 지혜의 온유함으로 말미암아`
첫째, 선행으로 행하라.
선행이라는 말은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행이라고 하는 말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다. 선행은 착한 일이다. 누구에게 착한 일을 하는가? 가난한 사람 찾아가고, 병든 사람을 찾아가고, 도와 주는 것을 선행이라고 한다.
부족한 것을 채워 주고, 허물을 가리워 주는 것이 선행이다.
우리는 다 실수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내 선행으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허물을 가리워 주라는 것이다.
창세기 9장에 의인 노아가 방주도 만들고, 구원받았는데,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고 천막 안에서 잠든 것을 보고 아들 함이 비난했다. 허물을 들추어 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뒤로 돌아서서 담요로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웠다.
가리운 사람이 복을 받았다. 가리우는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덮어 주셨다. 예수님에게 몇번 용서할까를 물었을 때,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시편85편2절에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무엇을 행할 것인가? 허물을 가리워주고 부족을 채워주는 선행, 그것이 여러분의 행동이 되기를 바란다.
둘째,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하라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온유하라`, 온유는 약함의 뜻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이고, 예수님의 성품이고, 천국백성이 가져야 할 품성이다.
`온유한 자가 복을 받으리니, 저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복 받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겟세마네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참으로 힘든 일임에는 분명하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다.
"내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기 원합니다."
지난 주간 뉴스를 보는데, 지방에 새로 지은 아파트 촌이 있다. 학교가 생기고, 주민들이 입주를 했다. 학교는 공사중이다. 학교 선생님들과 주민들이 논쟁을 벌이고 항의하는 것이 방송에도 뉴스로 방영이 되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이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는 자녀 교육시키는 곳인데, 우리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자기 권리 찾기? 배워서 남주나? 똑똑한 아이들을 가르키는가? 그것이 과연 나라를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인가?
요즘 지하철 노약자 석에 버젓이 앉아있는 젊은이들, 보란 듯이 껴안고 있는 연인들, 이해가 되는가? 한번은 유치원 아이 둘과 엄마 둘이 지하철에 탔다. 지하철에 탔다가 그 아이들이 서 있는 것이 안 돼 보여서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런데, 속상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두 엄마들이 앉아서 수다를 떠는 것이다.
내가 일어나서 속상한 것이 아니고, 이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내가 일어나니까, "자리 났다. 앉아라."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교육이라는 것이 자기 권리 찾기만 가르친다. 혼란스럽다. 다 자기 말만 옳다고 한다. 부모는 부모의 말이 옳고, 학생은 학생의 말이 옳고 선생님은 선생님의 말이 옳다. 학교에 선생님이 설 자리가 없다. 교장선생님이 설 자리가 없다.
뉴스가 잘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왜 나쁜 이야기만 들추어 내는가? 대구 지하철 참사가 난 후에 "또 지하철 참사가 났습니다." 무엇이 고장이 났는가? 문에 연필이 끼어서 고장이 났다고 한다. 그런 것이 수 차례,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그 때마다 아나운서는 "오늘 또 지하철 사고가 났습니다. 승객들이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철 직원이 이야기하는 것이 짤막하게 나온다. "어떻게 이것이 꼭 고장입니까? 이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무도 그것을 들어 주지 않는다. 일 하나 터지면 그것을 가지고 너는 다 나쁜 것이라고 한다.
예수 믿는 사람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선행으로 도울 일을 찾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온유하게 순종해야 한다. 늘 비판하고 비난하고 자기 권리 찾기만 한다면 요셉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모세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리고 느헤미야가 여호수아가 예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나오겠는가?
성령충만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 모습 닮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마땅히 선행으로 도울 일을 찾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온유하게 순종해야 될 줄로 믿는다.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부모들이 "공사가 그렇게 못 끝났나요?
좀 빨리 하지. 아이들이 등교할 때 힘드니까, 우리가 나와서 등하교 시간을 지켜줍시다."라고 한다면, 이런 일들이 뉴스에 나온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마땅히 행해야 될 줄로 믿는다.
그들의 사정도 모르고, 무조건 자기주장만 내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문제가 날 때마다 큰 소리 내기보다, 선생이 많이 내기보다 선행으로 온유로 행함으로 하라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8절 말씀을 같이 보자.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우리는 화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바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으로 말을 하자.
삶으로 말을 하는 것은
첫째, 자랑하지 말라.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14-16절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혼란이 있고, 악한 일이 있다- 바람직하지 못하다.
땅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람이 귀신의 종노릇하면 안된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자랑하면 거짓말하게 되고, 귀신의 종노릇하게 되고, 혼란과 악한 일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삶으로 말할수 있다는 것이다.
어제, 딸 아이가 병원에 있다가 퇴원했다.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기도 많이 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잘 감당한 줄 믿고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돌아와서 기도하면서, - 그 침대에 하루도 똑바로 다리를 옆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되겠기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도 힘든데, 딸 아이는 오죽하랴 -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생각하고 감사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몇 십년 믿었다, 몇 대째 믿었다. 어떤 사람들은 1대에 그치고, 2대에 그치고, 변덕스럽게 믿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그런 줄로 믿는다. 우리에게는 감사밖에 없다.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만이 살게 하는 것이다.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 17절 말씀을 같이 보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여러분이 성결해야 되는가? 내가 성결해야 되는가? 바로 나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내 죄부터 깨닫게 하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화평하고 - 하나님이 주시는 화평이 생긴다.
관용하고 - 너그럽게 용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기도한다고 다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지혜가 내 것이 되도록 힘쓰기를 바란다. 내일부터 사순절 기도회가 시작된다. 기도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가 탕자를 성자로 만든 것처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위대한 사도로 지도자로 만든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 하늘의 지혜자를 만드는- 그런 사람이 그 생각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선한 행동, 온유한 행동을 나타나게 해 주실 줄로 믿는다. 더 이상 자랑으로 자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캘거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좋아하는 말 가운데, 독일의 신학자 가운데 히틀러에게 항거하다가 젊은 나이로 순교한 본 회퍼 목사님의 말씀이 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 아니라 신실함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신실한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실한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이삭처럼, 요셉처럼, 생명같은 우물을 빼앗기고, 형들에게 팔리워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 선행으로 말하는 사람-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고, 책임지시고 은혜로 함께 해 주실 줄로 믿는다.
이 설교를 마치면서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이 노래가 생각난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줄로 믿는다. 이 한주간도 말로 입술로 말하려 하지 말고 삶으로 행동으로 말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이 교회를 변화시키는 주의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말의 중대성
약 3:1-6 / 피종진 목사
하나님은 창조물 중 유일하게 사람에게만 말(언어)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말을 통해서 서로 의사를 소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우리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도 합니다. 또 축복과 저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보면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 말은 인격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여기에 보면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에 실수가 없이 산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인격적인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신앙을 고백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고,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줍니다.
그러나 비인격적인 말은 ①쉬지 아니하는 악입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인격이 없는 자의 말은 입에서 악이 나옵니다. ②죽이는 독입니다.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시 140:3) 비인격적인 말은 독사의 독처럼 사람을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③거짓된 말입니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시 12:2) ④저주하는 말입니다(출 21:17). 입에서 저주하는 말이 자주 나오는 사람은 비인격자입니다. ⑤원망하는 말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약 5:9) 원망하는 말은 심판을 초래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외모만 보아서는 그분이 인격자인지 비인격자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해보면 바로 구별이 됩니다. 항상 축복된 말, 선한 말, 아름다운 말, 진실하고 정직한 말, 은혜로운 말, 감사하는 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 남의 말을 수용하면서 이해해주는 말을 하는 사람은 인격자입니다. 반면에 말끝마다 원망과 불평, 저주와 악담, 거짓된 말과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은 비인격자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말에 인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은 축복과 저주의 씨앗입니다.
축복된 말을 하면 축복의 씨앗이 되고, 저주의 말을 하면 저주의 씨앗입니다. 그래서 심은대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한 말을 심었으면 그 말 때문에 선한 것이 이루어질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긍정적인 말을 심었으면 안되는 일도 잘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부정된 말을 많이 심게 되면 될 일도 안되고, 좋은 일도 나빠지며, 큰 것도 작아지고, 아름다운 것도 더러워지며, 기쁜 것도 슬퍼지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29에 보면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했고, 베드로전서 3:10에 보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잠언 13;2에 보면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린다고 했고, 그리고 잠 13:3에는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 18:20에 보면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말한 그것은 실제로 우리의 소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선하고 아름다운 말, 믿음과 소망에 가득 찬 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을 많이 심어야 합니다.
특별히 자녀들이 부모에게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저주의 말을 하면 안됩니다. 유대인들의 특징은 자녀들이 잘못해도 절대 저주하는 말은 안합니다. 시편 109:17에 보면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저주하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고 축복된 말만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4에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셋째, 말은 죽이고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혀로 생명 있는 말을 하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게 됩니다. 언제나 축복된 말을 하면 저주 받을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저주의 말을 하면 저주를 받아 죽게 됩니다(막 11:21).
예수님은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무덤에 있던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큰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살리셨고(요 11:43~44),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에도 관에 손을 대시면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시며 말씀으로 살리셨습니다(눅 7:14).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말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행 3:8). 또한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했을 때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행 16:18).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이러한 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막 16:17,18). 여러분도 이 좋은 권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5:20에 보면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말씀을 받은 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저주 받을 자가 축복을 받게 되며, 귀신이 쫓겨나가며, 불안한 ‘정치, 경제, 사회’가 안정되고, 분열된 우리 민족이 하나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의 중대성을 깨달아 항상 축복된 말, 선한 말, 아름다운 말, 진실하고 정직한 말, 은혜로운 말, 감사하는 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말을 하여 슬픔을 당한 자가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고, 저주 받을 자가 축복을 받게 되며, 용기를 잃은 자가 용기를 얻게 되고, 삶을 포기하려고 한 자가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승리하는 역사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