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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글을 올려주신 바부바부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쉽지안은일 책이 두권이나 돼는분량 그리고 어려운학문의 작업
결코 쉬운일이 아니지요
나조차도 그필요성을 느끼고 작업을하려고 햇으나 만만하지 안앗기에 오늘낼 오늘낼 하고잇엇답니다
그런대 바부바부님이 이어려운일을 해주어서 큰힘이 돼는군요
아주아주 오랜앳날 호랑이 담배먹을때 저멀리 남쪽나라에선 샴과죽음 인생 이러한문재로 깁은사색과 불타는 정열로서 깁은 철학적샴을산 초인들이 잇엇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리시 또는 선지자라고 불럿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가질것은 다가지고 인생을 살다갓습니다
그리고 세월은 변햇으나 세상은 변하지안아 그때의 그고민을 우리는 하고잇는것 입니다
원시 돌도끼가 총과 미사일로 변햇을뿐 사람은 하나도변하지안아
아직도 우리는 속성과 시간과 미신으로 뭉처잇는것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활동하던 그시기에 우리나라에도 이분과 필적할분이 잇엇습니다 그리고 나도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단지그분은 용과 현무와 봉황과 해태와 주작과 연꼿을 가지고 게신분이엇습니다
이분이 살던시대앤 가림토라는 극치의 글이잇엇으며 학문이 잇엇습니다
군대는 강햇고 사회앤 질서가 잇엇습니다 그리고 유일신이 잇엇습니다
그유일신은 어떤존제가 아니라 비존재엿습니다
리시나 배다의 선지자들은 브라흐만이라 하엿고 우리의 선인깨서는 하나님 이라고 하엿습니다 그리고 이모두는 하나의존제 나에관한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같은것을가지고 이리저리 말을바꾼것에 불과하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잉카의 신화까지 모든것이 같은것을 가지고 애기하고 잇답니다
올바른샴과 올바른인생 올바른방향 이러한것들로 우리도 보람차고 행복하고 알찬샴을 추구합시다
내가 어떤 초월적인 능력을 엇은것은 아니지만 나의숙고와 나의감각이 더나은샴과 보람된인새을위하여 조금이나마 쓰여젓으면 합니다
보고듯고 읽고쓰고 하는가운대 점점가까이 다가갓으면 하는것이 나의 바램입니다
다시한번 바부바부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파니샤드는 인류사상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장정(長征)의 사상적 혁명이었다. 인도라는 정신적인 공간 안에서 우파니샤드는 과거 수천여 년 동안 사람들의 철학과 종교와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불교나 자이나교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생겨난 모든 사상들이 우파니샤드의 영양분을 먹고 생겨나고 자라났으며, 또한 인도의 정통 철학파들로 알려지는 상키야, 요가, 니야야, 베셰시까, 미망사, 베단따등의 이른바 육파(六派)철학도 그들에게 최고의 정통성을 부여해 줄 우파니샤드와의 철학적 맥을 잇기 위해 고심하였다. 심지어는 순수 우파니샤드 철학관을 직접적으로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베단따 철학에 대한 공격과 부정조차도 우파니샤드 철학을 근거로 혹은 축으로 그 주위를 맴돌았다.
하나의 진리를 두고
현명한 자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함이라.
이 유명한 구절처럼 전통적으로 인도의 철학은 '하나의 진리'를 찾기 위한 것이다. '하나의 진리를 두고 현명한 자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설명한다'고 한 이 놀라운 기록은 이미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삼천 오백년 전 꽃핀 인류지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기록의 내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다. 이 진리를 아는 그 어느 자가 독단과 배타(排他)의 길을 갈 것인가.
이러한 베다 전통 속에서 꽃핀 우파니샤드는 특정 종교나 철학을 위한 경전이 아니다. 우파니샤드 안에는 인간이 진정 그 본연의 호기심으로 그 자신에 대하여 던지는 물음이 있고, 세상에 대한 성찰과 스스로 삶의 가치를 깨닫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인간의 투명한 각고(刻苦)가 있다. 따라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구절 구절을 음미하면서 일깨움과 감동을 얻는다. 기독교인, 불교도인, 유교인 혹은 비 종교인, 누구라도 우파니샤드를 부담없이 강독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파니샤드 철학은 그 자체로서 혹은 불교라는 매개를 통하여 인도를 넘어 티벳,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실론, 말레이 반도 등에 직 간접적으로 전파되었다. 불교를 통하여 우파니샤드의 사상이 전파된 곳에서는 우파니샤드 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이해하거나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불교가 워낙 인상 깊은 때문이고, 또한 불교사상이 우파니샤드 사상의 자연스러운 기반위에 있었던 만큼 상당히 닮은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붓다의 사상이 부분적으로는 베다 전통과는 분명 다른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사상은 업과 윤회, 열반등 우파니샤드를 통해 굳게 확립된 특유의 인도철학의 전통속에서 형성되었으나, 우파니샤드의 아뜨만/브라흐만을 부정하고 또한 부패한 힌두 사제(브라만)의 권위를 끌어내리면서 당시 혁명적이기 까지 했던 평등주의를 표방함으로서 이전까지의 베다의 전통적인 흐름에서 뛰쳐나왔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교는 다시 힌두사상의 체계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워낙 포용력이 강한 힌두 사상은 신화를 통하여 붓다를 비슈누의 12 현신(現身)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불교도들을 힌두교도 안으로 포용했다. 실지로 인도내에 아주 극소수로 남은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별 무리없이 '힌두교도'라고 생각한다. 붓다를 섬기니까 힌두교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세계적인 주요 종교로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내에서는 독립적 종교로서의 위치마저도 분명치 않게 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 이상의 것이 있는가 ? 생명은 물질인가, 정신인가 ? 사람이 죽으면 무엇이 남는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 ? 어떻게 생겨났을까 ? 나의 의식은 워낙에 있던 것인가, 어머니의 뱃 속에서 생겨난 것인가 ? 내가 죽으면 나의 의식은 남을 것인가, 육신과 함께 사라질 것인가?........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인류 공통의 난제(難題)인 정신세계와 자아 추구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깊숙히,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추구한 인류사상사의 더 할 수 없이 값진 유산이다. 이러한 문제는 동서양을 통해 누구나 알고 싶어해왔으며 물리학등 과학을 통해 아주 조금씩 밝혀지고는 있지만 아직도 풀지못한 미궁속에 있다. 결국 인간의 모든 지식과 과학은 이러한 '영(0 unya, 불교의 空)'과 같은 추상적 문제에 접근하는 나름대로의 과정일른지 모른다.
BC 1000 - 600년 사이에 쓰여진 주요(초기)우파니샤드들은 당시 인도인들이 놀랄만큼 세밀하고 정밀하게 인간과 자연과 우주에 관하여 분석하고 연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가와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고 정신을 맑게함으로써 '진실'을 알아내고자 애썼던 그들이 그 맑은 정신으로 발견해낸 것은 정신세계 속의 주인이 다름아닌 '나' 자신(j v tman)이라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그 '나'의 가능성은 무한히도 크다는 것, 또한 '나'를 크게 혹은, 작게 만들 수 있는 능력도 '나'에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시대가 소화해내기에 너무 힘든 발견이었다. 결국 그들이 발견한 신비한 '나'의 모습은 신격화되어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 그들의 사고가 '미개'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면서 굳게 경직된 사고방식때문이었다. 현대의 우리들의 사회에서도 그러하듯, 사회전체를 뒤덮고 있는 경직된 사고는 결코 혁명적인 사상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를 신(神)의 이름으로 왜곡하고 인격체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 쉽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초기(B.C. 6 까지) 우파니샤드 이후에는 종교, 종파적인 우파니샤드가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가치를 알리는 데 한몫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인도의 우파니샤드 학자, 철학자이며 한때 인도 부통령을 지낸 바도 있는 라다 끄리쉬난은 우파니샤드를 소개하면서 인간 사상사를 추적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있어서 우파니샤드는 아직도 대단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신비주의적인 독트린에서 페르시아 수피즘의 신비주의를 추적해볼 수 있으며, 신비적이면서도 신학적인 논리의 네오 플라토닉의 독트린과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신비주의, 에카르트, 타울러 그리고 19 세기 신비주의적인 독일 철학자 쇼팬하우워에게 까지 그 사상적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쇼팬하워는 책상에 늘 라틴어로 된 우파니샤드를 놓았고, 잠자리에 들기전에도 습관적으로 책장을 넘기며 탐독하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구절구절이 진정 깊은 마음 속 심원에서 숭고한 사상을 일게하니, 우파니샤드 만큼 그렇게 유익하고 인간을 고양시키는 사상은 없다......우파니샤드는 인간의 최고 지혜의 산물이니 이것이야 말로 곧 인류의 신앙(faith)이 될 것'이라고 찬탄했다.
우파니샤드에 담긴 내용이 이렇게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지혜라 할지라도 상징을 많이 사용한 그 표현방법이 우파니샤드를 읽는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상징이라는 것은 평범한 방법으로 그 뜻을 전달할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상징을 통하여 표현할 수 있는 의미 이상의 것을 전달하고자 할 때 사용되는 하나의 독특한 표현방법이다. 시인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시를 짓고, 시를 읽는 사람도 역시 평범한 글에서 느낄 수 없는 어떤 이미지를 바로 그 시를 읽고 난 후 느끼게 된다. 이렇게 글을 논리성을 통해 이해하는 것과 그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우파니샤드를 읽으면서 그러한 상징성의 표현 방법에 일단 익숙해지면 쉽게 그것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독자는 비유와 상징으로 겹겹이 싸여진 우파니샤드의 구절을 읽으면서, 물질로 형상화, 정량화되지 않는, 수 없이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그 '순수의식(cit)', '진리', '브라흐만', '영원한 구원(mok )'을 이해하기 위해 무척 애써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적 감각기관으로 감지되는 물질 세계만이 가치있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굳어진 통념을 이제 우파니샤드를 통해 재고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더구나 물질적 문명이 주는 만족도가 결국 정신적 문명이 주는 만족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정신문명이 그 추구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존재냐, 비존재냐 혹은 진리이냐, 허황된 말장난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그러한 논쟁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해 우리 인류의 이 정신문명에 주목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인류의 역사와 문명이 여기까지 오는데는 물질문명 못지 않게 비물질적 문명 정신문명의 공헌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질의 세계는 물질과 관련된 방법, 즉, 물리적인 방법으로 규명된다. 정신의 세계는 물리적인 방법으로 규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이며, 마치 만원경을 가지고 바로 저 넓은 우주를 관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공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조건, 형상화와 정량화가 가능하다. 정신적 세계에서는 존재가 물질과 달리 그러한 객관적 정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 이외에 적어도 그 비중의 면에서 물질적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
물질적 문명의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고 있는 현대에, 인류는 그 문명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허망하게도 지치고 쫒기며 살고 있다. 과거의 인류는 늘 자연과 더불어, 자연속에서, 자연인으로서 살아왔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과거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아주 작은 소수의 부족들에게도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관심에서 우리의 정신적 유산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서양에서 부터 물질문명의 발전과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우리는 이제 자연이 우리와 함께 해 온 기억을 잊고,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자연의 상징적 의미의 축소는 비례적으로 인간의 상징적 의미의 축소를 야기하였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의 상징적 의미의 축소란 결국 무엇인가. 인간 스스로가 작아져 버린것은 아닌가. 이것이 인간의 소외와 무기력을 만들어내고, 끝없는 좌절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 결국 인간을 궁지에 몰리게 하고 스스로 자연인 인간마저도 물질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파니샤드와 같이 정신적 지혜를 다루는 글은 한 구절구절이 개개인에게 각기 다른 무게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것은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 매우 개인적이고 경험을 중시한다는 특성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특성이 개인에게 만족감과 자유를 주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물질의 세계는 나의 '밖'의 세계요, 정신의 세계는 나의 '안'에 있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원본이 산스끄리트로 되어있으므로 그 비유와 상징까지 원본에 충실하게 우리말로 풀어놓는 것은 역자의 몫이다. 그러나, 겹겹의 비유와 상징을 뚫고 얼마나 투명하게 느끼고 마음 속에 담는가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론서도 수상집도 아닌 이 우파니샤드의 목적은 읽는 이의 마음 속에 맑고 투명한 세상과 자기자신에 대한 지헤를 담게 하는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할 때 까지 우파니샤드 구절은 강을 건너기 위해 필요한 나룻배인 셈이다. 철학과 과학이 더 이상 종교 속의 학문이 아님이 점차 인류에게 알려지고, 종교 밖에서 사는 것도 더 이상 '미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님이 밝혀진 지금, 우리는 과거로 부터 종교성에 묻혀져 버린 독립적 인류사고의 유산을 꺼내어 그것으로 부터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물질만을 가치있는 것이라고 주장해온 덕택에 인간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작동기능이 있어야 평가를 받는다. 고장나면 폐기처분되는 기계와 오늘날의 인간이 닮지 않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물질적 문명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나타난 수 많은 부작용을 겪으며, 이제서야 우리는 가장 인간답게, 가장 자연다운 자연 아래서, 가장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고있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면 이제 이 시대는 바로 '나'에 대한 발굴과 그를 통한 활기에 찬 자신감으로, 자연과 분리될 수 없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노력해야 할 시대이다. 우파니샤드는 우리에게 그러한 꿈을 실현할 자신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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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좋으며 분명하고 군더더기가 없는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태두리에 갓처삽니다 마치 우물속 개구리처럼 우리는같처잇는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다람쥐 챗바퀴처럼 삽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앳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우리의것을 고집하며 나는 이종교의 사람이요 나는 저종교의 사람이요 나는 이단체의 사람이요 나는 저단채의 사람이요 하는 그런아집은 없는지요 나는 이렇개 셍각합니다 챙길것과 찻을것은 다릅니다
챙길것은 자신의 짝이요 자신의 자식이요 자신의 저금통 입니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가까운 브라흐만이며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철학적인 사색과 학문 고상한취미 종교 이러한것들은 직접적이며 먼브라흐만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하는자 그가바로 뿌루쉬입니다 그리고 방황하는자 개채 아트만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모습을봅니다 우리는 경직된 사고의틀에 너무갓친것은 아닌지요
선택의 여지가없는것과 선택의 여지가잇는것 그것은 가까운것과 먼것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한번쯤 돌아보아야 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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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산스끄리트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베다', 정통 육파철학의 각 이론서들과 힌두경전에 속하는 '바그와드 기따', 힌두 신화 '뿌란', 쉬바나 비슈누 신등의 이름을 최고 신으로 노래하는 찬송집 '스또뜨라', 대 서사시 '라마얀'과 '마하바라따', '빤쯔 딴뜨라'등의 설화문학, 세계적으로 고대의 2 대 법전으로 알려져 있는 '마누법전', 불교경전 특히 대승 불교 경전에 속하는 승려 아쉬버 고쉬의 『부처 일대기(Buddhacarita )』, 나가르쥬나의 『중도론 독본(M dhyamika K rik 中道論 讀本)』등, 이 모든 값진 인류의 문화유산들이 모두 산스끄리트로 쓰여진 것들이다.
산스끄리트는 언어학적으로 인도 유럽어족(Indo - European Family)에 속하는 고대 인도어로서 리그베다로 부터 15, 16 C 까지 모든 문헌을 기록하는 '신성한 언어'로 존재했으며, 그 이후 통용어(Speaking Language)로서의 위치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으나 그 풍부한 유산때문에 인도 철학계, 문학계등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학문으로 남아있는 매우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언어이다.
인도 유럽어족은 18 세기 와 19 세기 동안 윌리암 죤스(Sir Wiliam Jones 1746 - 1794), 찰스 윌킨스(Charls Wilkins 1791 - 1867), 헨리 콜부룩(Henry Colebrook,1765 -1832), 윌슨(Horace Hayman Wilson 1789 - 1860), 프란쯔 봅(Franz Bopp 1791 - 1867), 막스 뮬러(Max M ller 1823 - 1900), 뷸러(Buller 1837 - 1898) ,웨버(Weber 1825 - 1901) 등의 그리이스어, 라틴어와의 언어학적 비교연구를 통하여 발굴 확인되었다. 이들 학자들에 의하여 그리이스어, 라틴어, 아베스타어(고대 페르시아어로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아베스타가 이 언어로 젹혀있다), 산스끄리트가 하나의 언어학적 군(群)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던 것이다. 따라서 산스끄리트에서 나온 현대 인도어들과 아베스따어에서 나온 현대 페르시아 계통 언어,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나온 불어, 영어, 독어등 현대 유럽어들이 모두 같은 인도 유럽어족에 속한다.
산스끄리트는 고유의 문자 '데브나그리'를 사용하는데 이 책에서는 원어를 적어야 할 경우에 그 소리값을 영어 로마자로 표기하여 사용하였다.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데브나그리 산스끄리트의 로마자 음역표를 책 뒤에 실었다.
이들 언어들의 모체인 인도유럽어족의 초기 언어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 학자들 간에는 아직도 '중앙 아시아 유래설', '알프스 산맥 동쪽의 유라시아 설', '인도 대륙설'등을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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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깨달음의글 아레아 가림토한글
산스크리트 물론 좋은글 글치고 나쁜글이 어디잇을까요
그중에서도 산스크리트 수만은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한글 그리고 그글의 가치만큼이나 아름다운경전과 주옥같은 주석들 또한 정부문서등 학인의 사상등 조은글만 수록한글이지요
나는 만이배우지 못하여 산스크리트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파니샤드를 통하여 산스크리트의 아름다움을 보앗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와갗은 글이잇다 하고 소개합니다
그것은 가림토 글입니다 나는 이름붓이길 아레아 가림토한글이라고 합니다 아레아 아레를 내려다보는 하나의주채 가림토 땅의모습을가려서 살피는것 한글 하나의글 이것이 아레아 가림토한글입니다
나는 공부의 와중에서 가림토를 알앗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축기의 극치라는것을 알앗습니다 이 아레아 가람토한글은 축기의모습을 그린것입니다 그리고 축기의 과정을나열하고 진행과정을 설명한것입니다 그리고 이모든것을 분류하기를 소리로 분류햇고 다양성을 삼각법으로 붓이고 때엇습니다
영어는 일각법의 글입니다 그리고 만은글들이 일각법 입니다
그러나 한글은 완전한 삼각법입니다 설개도면을 자주접해 보신분들은 일각법과 삼각법이 얼마나다른지 알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위대한것은 이것이 인체의 숨의압축된 경로를그린 다양성의 모습이라는것입니다 그리고 나도 이것을 다모릅니다
너무도 위대한사색과 고행의산물이며 깁이괘뚤어보지 안으면 결코 알수없는것 입니다
아레아한글 시급히 복원돼어야 합니다 또한 이글에는 중성모음이 잇다는것입니다 이것도아니고 저것도아니고 강약을 완충시키는대쓰는 글이 잇다는것입니다 이것은 구한말까지는 잇엇는대
없어젓습니다 그것도 우리시대에 사라진것입니다 가슴아픈일 입니다 우리는 너무만은 무지의태두리에 갓혀잇는것 입니다
아레아 가림토한글은 바로 법신의 자채의몸의글 입니다
1. 아쁘떼 (V. S. Apte)에 따르면 '우빠'(upa)는 '가까이' '니'(ni)는 '아래로' '샤드'(sad)는 '앉는다' 로서, '가깝게 아래로 내려 앉는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조용한 숲속의 수도원에서 우파니샤드의 사상가들이 깊은 명상을 하고 그들이 터득한 지혜를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일을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우파니샤드는 이는 '스승과 제자가 아주 가까이 앉아 즉, 제자가 스승 바로 아래 앉아 전수받는 지식'이라는 말이다. 용어자체가 말해주듯이 우파니샤드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자격을 갖춘 스승에게서 자격을 갖춘 제자가 일대 일로 앉아 진지하게 주고 받는 대화로 전수되는, 아주 신중하고 엄격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2. 샹까라의 해설을 보면 의미는 좀 더 명확해진다. 그는 '우빠'는 '가까이', '니'는 '완전히(확실하게)', 그리고 '샤드'는 '부수다, 깨다.(vi rana)' '얻다, 추구하다(gati)' '마침, 없앰(abhas dana)'의 뜻으로, 우파니샤드는 무지를 알아 '타파'하여 궁극적인 구원의 단계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영원히 '미혹을 없애주는 지식'이라고 샹까라는 풀이하였다.
III. 베다의 전통과 우파니샤드의 저작시기
세계 최고 문학서인 리그베다로 부터 베다의 전통을 살펴보고 우파니샤드가 등장한 배경지식을 먼저 아는 것이 우파니샤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같다.
우선 베다는 크개 네 종류로 나뉘어있는데,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쥬르베다, 아타르바베다가 그것이다. 각 베다들이 주제별로 명확히 구분되어있는 것은 아니며, 철학적 사고의 습관을 공통적으로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래도 그런 바탕위에 각 베다가 주로 많이 담고 내용을 대충 정리해 본다면, 그 중 리그베다는 가장 오래되었고 내용도 아주 중요한 것으로 그 당시의 우주관, 철학관, 사상관, 생활관, 신관(神觀)등을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 기원전 약 1,500년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사마베다는 리그베다보다 시대적으로 조금 후에 형성된 것으로, 리그베다의 신(神)에 대한 송가들을 일정한 형식으로 묶고 그 찬양(노래)의 방법적인 의미와 해석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아타르바베다는 보다 실제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건강, 장수, 질명의 치료, 죽음등의 문제를 주문(Tantra)으로 풀어준 것이며, 야쥬르베다는 제례의식의 다양한 형식적 관례를 다룬 것이다. 이들은 모두 '베다'(Vedas 혹은 상히따)라고 통칭된다. 물론 이들 베다의 전통은 구전적으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기원전 500년 경의 본문 그대로 남아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다학자들은 베다의 전통이 워낙 엄격하고 제한된 소수에게만 전수되었기 때문에 책에 쓰여질 때까지 그 내려온 시간에 비하면 거의 변형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각 베다에 나오는 제의(祭衣 yaj a)에 관한 상징성의 풀이와 함께 철학적 성격의 내용을 풀이하여 '브라흐마나'로 통칭되는 제의서(Br hm as 祭衣書 ) 그리고 제의의 상징성 해석등에서 벗어나 철학적 성격이 강해지는 베다의 풀이집 '아란야까(숲 속의 지혜)' 그리고 베다로 시작된 특유의 신비적 사상의 결정체인 '우파니샤드'로 그 전통이 내려온다. 베다가 크게 네 가지이고 여러권인 것처럼 이들도 한권의 책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각 베다들과 연관된 수십에서 수백권을 통칭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기원전 1,500년 경부터 기원전 600년 이전에 형성된 것들이고 후기의 몇몇 아란야까나 우파니샤드는 AD 2 세기경까지도 계속해서 지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파니샤드의 저작시기는 대개 1000 BC경부터 300 BC경으로 잡으며 약 200개의 우파니샤드가 현존하는데 그 중 주요 우파니샤드로 꼽히는 18개는 베다시대(기원전 1,500 - 기원전 600)에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것들이다. 그 외 후기의 180여 개 우파니샤드는 먼저 기록된 주요 우파니샤드의 갈래로 쓰여지면서, 철학적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색채를 보여 시바( iva)나 샥띠( akti) 혹은 비슈누(vi u)에 대한 신애(神愛)를 강조하거나 특정 종파의 교리를 싣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외에도 인도 각 지역에서 발굴된 불완전본(本)을 볼 때 상당히 방대한 수량의 우파니샤드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언급한 18개의 '주요 우파니샤드'는 시대별로 고대, 중기,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브리하다란야끄, 찬도겨, 떼이띠리여, 에이뜨레여, 꼬우쉬따끼, 껜이 고대 우파니샤드로, 그 문체는 산문체이다. 까따끄, 이쉬, 쉬베따쉬바따라, 문다끄 의 시기는 중기, 문체는 운문체이며, 쁘러션, 만두껴 우파니샤드의 시기는 후기로 역시 운문체로 되어 있다. 우파니샤드가 처음에는 베다처럼 운문으로 쓰여지다가 산문으로 발전했으리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산스끄리트 문학사를 통틀어 산문과 운문의 적절한 배합은 두드러진 특징중에 하나이다.
우파니샤드의 작자는 특정 인물이 아니다. 모든 베다와 베다 전통의 학문에 있어서 우파니샤드의 성스러운 문구를 쓴 사람은 '리시( i 선지자)'들이라고 하며, 이 선지자들은 '신(神)'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경구(經口)를 적는다고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선지자들은 '요가'라는 정신수행을 통해 우주의 영(靈)으로부터 가르침을 얻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의 '주요 우파니샤드'가 형성되었던 것은 BC 6 C 이전이라고 보는데 이 시기는 세계사상 철학계에 가장 중요한 시기었던 것으로 보인다. 칼 야스퍼스는 BC 800 - 300 의 이 시기를 '축의 시대(Axial Era)' 라고 했는데 이 시대에는 그리이스, 중국, 인도 각국에서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각기 세상과 그 세상 속 이치에 대해 의문을 품은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그리이스에서도 BC 6 - 7 세기경부터 탈레스, BC 6 C 의 아낙시 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BC 5 -4C),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등이 철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으며, 중국의 경우 제자백가의 이 시기에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묵자와 제자백가등 아직까지도 중국사상을 대표하는 대 학자들이 나왔고, 인도에서도 우파니샤드를 쓴 알려지지 않는 많은 선지자, 철학자들과, 우파니샤드를 통해 그 사상을 알 수 있는 우달라까, 아루니, 야져발끼야 등이 활동하였다. 또한 육파(六派)철학과 불교, 자이나교의 철학의 각 시조로 알려지는 까삘, 고우떰, 깐나드, 제미니, 붓다, 리샤브등도 이 시기에 활동하였다.
IV.우파니샤드의 소개와 연구
우파니샤드가 인도를 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페르시아의 왕자 다라시코(Darashikhoh)가 산스끄리트 원본에서 페르시안어로 번역(1656-1657)한 것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에 맨케틸 듀페론이 라틴어(『Oupnekhat』)로 번역하였다. 콜부룩(Cole brook)은 52개의 우파니샤드를 모아 영어로 번역하였다.
1883년과 1887년에 각각 수브라만야와 라가바짜리야가 『108 우파니샤드』를 남 인도어의 하나인 뗄루구어로 편역하였으며, 그 후 여러사람들에 의해 인도의 각 주 언어로 모두 번역되었다. 1897년에는 폴 두센이 독일어로 『60개의 우파니샤드』를 냈고, 이어서 데이비드 흄, 막스뮬러, 힐레브란트, 레누, W .B .예이츠, 라다 끄리쉬난, 스와미 니킬라난드 등이 영어와 유럽의 언어들로 각기 번역하였다. 이후 영어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지구상의 언어로, 수 십 가지 번역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이어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분석, 연구한 저작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 뛰어난 저작 논문들을 들면, 1891년에는 아키발드 에드워드 구흐(Archibald Edward Gough)가 8개의 우파니샤드를 분석한 『우파니샤드 철학』(UPANISHADS)을 발표하였고, 1906년에는 두센(Paul Dussen)도 이 분야의 고전적인 저서 『우파니샤드 철학』(The Philosophy of the Upanishads)을 발표하였다. 1921년 R. D. Ranade가 발표한 『A Constructive Survey of Upanisadic Philosophy』와 1972년 DR. B. R. Sharma의『주요 우파니샤드에 나타난 아뜨만의 개념』(The Concept of tman in the Principal Upani ads)이 발표되면서 우파니샤드가 다루는 주제들 즉, 아뜨만, 브라흐만, 까르마, 윤회, 영원한 구원등에 관한 논문과 저서들이 많이 나왔다. 우파니샤드의 상징성을 연구한 『아란야끄의 상징성과 우파니샤드에의 영향』(Symbolism in the Aranyakas and their Impact on the Upani ads, Usha Grover)등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길게는 반 세기 이전까지 그 저작시기를 거슬러올라가지만 거의가 오늘날의 우파니샤드 연구자들에게도 중요한 자료로 읽히고 있다. 그만큼 인도와 인도사상사를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파니샤드는 건너지 않을 수 없는 강인 셈이다.
최근의 우파니샤드 연구는 점차로 상징과 해석, 비교연구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Turning point』등으로 잘 알려진 물리학자 카프라(Fritjof Capra)의 『물리학의 道』(The Physics of Tao)등에서와 같이 과학으로 접근한 비교연구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물질의 끝을 쫒다보면 결국 우리가 추상적인 것이라 여겨왔던 정신세계로 다가감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나 에너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듯, 또 다시 설명해내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어떤 것들을 계속 설명해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정신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 육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리 정신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무엇이 믿을 만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진정한 '나'를 발견해야 할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V.우파니샤드의 종류
현존하는 우파니샤드는 모두 200개가 넘는다. 그러나 베다전통 안에서 BC 6C 이전에 쓰여진 것들로 보이는 것들만을 따로 '주요 우파니샤드'로 분류한다. 이 이후에 쓰여진 것들은 다소 종교적이거나 종파, 특정 철학파의 사상을 강하게 담고 있는 것이 많고 그 성격이 뿌란(신화)이나 딴뜨라(秘術)에 가깝게 보이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정통으로 여겨지는 이 주요한 우파니샤드들의 수효는 10개, 11개, 18개 등으로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세는데 대개 18개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BC 8 의 불이원론의 철학자인 샹까라가 주석을 단 것은 11개 (이샤, 껜, 까타, 쁘러션, 문다끄, 만두끼야, 떼이띠리여, 에따레여, 찬도겨, 브리하다란야끄, 쉬베따쉬바따르 우파니샤드)이다. 그러나 샹까라는 브라흐머수뜨라('브라흐만 經' , 바드라얀 著)에 주석을 하면서 이 11개의 우파니샤드 외에 꼬우쉬따끼, 자발라, 수발, 뼁갈, 께왈리야 우파니샤드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베단따 철학에서 이들 우파니샤드들과 동격으로 다루고 있는 와즈라수찌, 메이뜨리 우파니샤드까지 하면 18개가 된다.
라마누자(11 C 한정적 불이원론의 베단따 철학자 )는 마하나라얀 , 꿀리까 우파니샤드등도 언급하고 있지만 이 우파니샤드의 성격은 이미 어느정도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고 그 문체로 보아서도 적어도 BC 6C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맥스뮬러는 샹까라의 11개 우파니샤드의 주석과 메이뜨리 우파니샤드를 더해서 12개를 번역했고 폴 두센 (Paul Duessen)은 60여 개에 이르는 우파니샤드를 번역, 연구했는데 14개를 '주요 우파니샤드'로 잡았으며, 흄은 맥스뮬러의 12개에 만두껴를 더해서 13개, 키스(A.B. KIETH)는 『Religion and Philosophy of the Veda and Upanisad』에서 거기에 마하나라얀 우파니샤드를 더해서 14개로 보았다.
V. 우파니샤드가 다루는 주제들
1)브라흐만
우파니샤드의 주제는 최고의 실재(實在)인 '브라흐만' 혹은 '아뜨만'이며 이 개념의 기원은 리그베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리그베다에는 이 개념이 여러가지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개념은 점차 리그베다, 브라흐마나, 아란여끄를 거쳐 발전해 우파니샤드 시대에 이르러 그 황금기를 맞는다.
리그 베다에 나오는 주요 구절 몇가지를 살펴 보겠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죽음도 불멸도 없었고
밤도 낮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한 존재가 있어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호흡했으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뿌루쉬야말로 모든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것, 앞으로 있을 것도.
불멸의 주인인 그는
곡식을 먹고 그 몸이 자란다.
뿌루셔 에베담 사르밤
여드부떰 엿쯔 바비염
우따므리떠뜨워 스에샤노
여단넨 아띠로허띠
(리그베다 10.90.2. 뿌루쉬 숙뜨)
베다에 보이는 또 하나의 위대한 인류의 발견은 '없음-zero'의 발견이다. 이것은 '없음'이라는 추상적 사고의 씨앗이었으며 눈에 보이는 존재만을 세고 있을 뻔 했던 인류에게 트인 사고의 자유를 준 셈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속에 하나인지 둘인지 알아볼 수 없는 그 유일한 존재만이 스스로의 힘으로 숨쉬고 있었다는 위의 첫 구절은 창조이전의 유일한 존재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두번째 구절은 그 존재의 만 천하에 편재성을 말하고 있다. 위의 '그 하나'와 '뿌루쉬'는 그 지칭하는 대상이 같다. 뿌루쉬는 '육신 안에 들어앉은 주인, 신(神)'이라는 뜻이므로 우주라는 육신안에 들어앉은 신(神)-브라흐만과 또한 다르지 않다.
'브라흐만'이라는 단어는 어근 '브리'(펼쳐지다. 커지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남성 여성 중성 어느 성에도 속하지 않는 전지전능의 완전한 존재이다. '브라흐만'은 모든 세상의 동력이며 원천이다. 그러한 존재를 어떤 말로 이름 지을 수가 없어 '넓게 퍼져 어디든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불렀던 것이다. 야스까(BC 7 고대 문법, 어원론의 대 학자)에 따르면 '자기 자신'인 '아뜨만'이라는 말은 어근 '아뜨'(항상 일정하게 움직이다)와 '아쁘'(퍼지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즉, 아뜨만이란 워낙 '항시 일정하게 움직여 퍼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에서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대공(大空)의 이름이 아뜨만이며, 사람의 육신을 채우고 있는 기(氣)나 호흡 또한 아뜨만이다.
우주의 '나'를 브라흐만이라고 한다면 개체로서의 '나'는 아뜨만이다.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다르지 않으며 이 둘은 하나이다. 우파니샤드는 계속해서 '네가 바로 그이다(따뜨 뜨왐아씨) - 찬도겨 우파니샤드', '나는 브라흐만이다(아함 브라흐머 아스미) - 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라는 진리를 가르친다. 그러나 이 개념을 이것만으로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브라흐만'은 보통 인간의 지혜속에 있지 않고 그 보다 훨씬 밖에, 어떠한 틀로써 잡을 수 없는 무한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아직 알지 못한 그 무엇을 이미 알고 있는 어휘로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 그 브라흐만은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 2.5.19) 것이다. 그래서 이 개념을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에서 '네띠 네띠(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라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접근하였던 것이다. 이 부정적인 표현만이 그 알지 못하는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가장 강한 긍정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2) 세상과 마야, 무지
우파니샤드는 개개인이 세상을 알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을 강권한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볼때 세상은 개별화된 아뜨만이 그 업을 지고 살아야 하는 무대이다. 우파니샤드는 이 무대를 가리켜 '변하는 곳' 혹은 '방황하는 곳'(jagat / sa s ra)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영원하고 안정된 보급자리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영원하지도, 일정하지도 않다고 보는 관점은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의 미시적인 한 인생에 바로 적용되는 관점은 아니다. 다만 한 인생, 인생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거대한 인생의 집합체를 바라보는 바람직한 시각을 갖는것은, 개인이 현생을 살아나가는데 있어 삶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상적인 원칙과 현실이 이처럼 일치하지 않는 것은 현실이 존재하는 날까지 계속될 현상이다.
우파니샤드는 현세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생에 관해서 '일 하면서 평생 살아갈 소망을 갖을 지어다'(이샤 우파니샤드 2) 라고 하여 충실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고 있다. 더우기 이어질 다음 생(生)은 현세에 만들어 놓은 업에 의해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업을 만드는 가에 따라 그렇게 만들어진다 -브리하다란야끄) 결코 현세를 무시하고 구원만을 바라고 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은 물론 브라흐만/아뜨만의 일부분이다. 세상에서 의무를 다하며 (업(業)을 쌓으며) 살지 않고 영원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길고 험한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지 않고, 그저 이미 건너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 없이 많은 세상사와 세상을 사는 개인은 순수 브라흐만의 단계에서 볼때 근원적으로 하나이며 따라서 다른 것이 아니지만, 세상이나 개인 단계에서 볼때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깨어나서 어젯밤에 꿈을 '꿈이었다'고 아는 것처럼 꿈 속에서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었다고 안도하는 경우를 경험한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장자가 꿈을 꾸고 일어나 '내가 나비가 되어 날았는지. 나비가 내가된 것인지 알수 없다'고 한 것 처럼 우리의 인식이란 것은 기껏해야 상대적이다. 이러한 제한된 시각을 생겨나게 하고 '다름'으로 보게 하는 것이 바로 '마야'이다. 마야는 신적(神的) 존재의 환영력(幻影力)으로서 순수한 지혜에 그 베일을 씌움으로서 진실을 환영으로 보게 한다. 즉, '하나'의 진리를 '서로 다른 여럿'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상태가 무지(無智)의 상태이며, 보통 인간의 자리이니 무지 또한 그 자체로서 진리를 가리는 베일 - 마야(m y )-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무지(無智)를 깨고, 맑게 빛나는 '지혜'를 갖출 때 마야의 베일은 걷히고 모든 것이 하나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하나됨'과 '다름'을 정확히 깨닫고 '하나됨'에 지상의 목표를 두게 하여 영원한 구원의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3) 개체아(個體我, j v tman)
우파니샤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인 브라흐만을 깨닫는 일의 주체는 '개체아'이다. 우파니샤드는 이 개체아의 중요성을 '벌과 꿀의 관계(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 II. 5.)'로 지적하고 있다. 개체의 아뜨만은 우주의 아뜨만 없이 그 존재를 유지할 수 없으며, 우주의 아뜨만은 개체의 아뜨만 없이 그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 벌과 꿀에 비유되는 이 둘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개체아(개인)의 주체적인 자아 가능성 발견이 우파니샤드가 제시하는 과정이요, 목적이다.
개체아는 곧 '개인'을 말하는 것이다. '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핵심이다. 내가 바로 그이다.(아함 브라흐마 아스미)를 말하게 될때 그는 수 없이 거쳐온 업과 윤회의 여정을 마치고 고통의 세상이 아닌 희망과 가능성의 세상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내가 바로 그이다'는 다시 '네가 바로 그이다,(떠뜨 뜨왐 아씨)'를 인정하는 범아(梵我)의 시각을 갖추어야 진정한 깨달음이 된다는 것이다. 혼자 무한한 가능성의 총체가 되는 것은 다시 아무것도 아닌 무지(無智)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무지(無智)와 어두운 악업(惡業)의 시작일 뿐이다.
4)업(業)과 윤회(輪廻)
업에 관한 우파니샤드의 언급을 몇가지 들어보자.
'그가 원하는 것마다 만들어지노라.'- 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 1. 4. 15
'그가 행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니, 선업을 쌓으면 그 쌓인 선업으로 인하여 선하게 되고, 악업을 쌓으면 그 쌓은 악업으로 인하여 악하게 되노라.' - 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 4. 4. 5
' 무지의 인간은 그의 업보나 그 생각하는 바에 따라 또 다시 그 자신이 모르는 육신을 입으러 그 세상으로 가리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처럼 왕래하지 않는다. 행함에 따라, 생각하는 바에 따라 각기 그 처지가 다른 것이니.' - 까타 우파니샤드 2. 5. 7
'구도자의 마음속에 있는 욕망들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때 그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될 것이요, 육신을 입은 채로 브라흐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리라.'- 까타 우파니샤드 2. 3. 14
우리는 여기에서 현실에 대한 적극성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주체성을 강조하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혁신적인 면모를 발견한다. 업에 따라 그가 흘러 다니게 될 세상들은 결국 그가 만든 '열매를 먹는 곳', 결과를 겪는 곳임과 동시에 새로운 업을 만들 수 있는, 한편으로는 얽매여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세상이다. 윤회의 목적이 바로 이 업의 결과를 겪는 것, 그리고 새로운 업의 창출인 것이다. 이 업을 계속 만들게 되는 것은 욕망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회를 그치고자 한다면 욕망이 남지 않도록 '마음을 비우는'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버리지 못한 욕망의 끈이 남아있는 한 계속 업(業)을 쌓고 윤회(輪廻)하리라는 것이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이다. 욕망의 끈이 생겨나지 않는 순수한 행위 혹은 업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업, 그것은 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에서 '니시까마 까르마(無慾의 業)' 뿐이라 하였다.
6)영원한 구원
'영원한 구원(mok a)'이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있는가. 설사 있다하더라도 우리가 과연 그 윤회의 쳇바퀴 고통을 벗어나 영원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찌 알 수 있을까. 성자 야져발끼야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우리가 몸이 건강하고 재산이 풍족하며 만인의 주인으로 숭앙을 받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게 되었다고 하면, 이 행복감은 저들 세상을 모두 정복한 죽은 조상들의 행복감의 백분의 일일 뿐이다. 이 죽은 조상들의 행복감은 간다르바 세계에서의 행복감의 백분의 일에 불과하며, 간다르바의 행복감은 다시 업의 댓가로 된 신의 행복감의 백분의 일이며, 이 신의 행복감은 (업 없이 본디부터의) 신의 행복감의 백분의 일, 이 신의 행복감은 창조주의 행복감의 백분의 일, 창조주의 행복감은 베다를 알고 죄와 욕망을 털어버린 이의 행복감의 백분의 일일 뿐이다. 이 행복이 지고(至高)의 행복이며, 브라흐만의 세계이다."
쉬베따쉬바따라 우파니샤드는 현실에 대충 만족하고 영원한 구원을 주체적으로 추구하지 않고 시간이나 운명등에 맡기는 것을 '태만(tu i)'이라 하여, 영원한 구원으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로 보았다. 필요성은 못느끼거나, 느껴도 자신이 아닌 그 어떤 힘에 자신을 맞기는 게으른 만족은 자기개발에 가장 큰 장애이다.
'영원한 구원'은 죽어서 선업(善業)의 결과로 얻어지는 만들어진 천국이 아니다. 우파니샤드가 거듭 강조하는 것처럼, 그 스스로가 만든 대로 되리니, 그것은 그가 만든 만큼의 행복의 세계이며, 모든 다양성이 하나로 통일되어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지는 세계이니 개체아(個體我), '나' 스스로 만들어갈 세계인 것이다.
I. 이샤 우파니샤드
II. 껜 우파니샤드
III. 까타 우파니샤드
IV. 쁘러션 우파니샤드
V. 문다끄 우파니샤드
VI. 만두껴 우파니샤드
VII. 에따레여 우파니샤드
VIII. 떼이띠리여 우파니샤드
IX. 챤도겨 우파니샤드
X. 브리하다란야끄 우파니샤드
XI. 쉬베따쉬바따라 우파니샤드
XII. 께왈리여 우파니샤드
XIII. 메이뜨리 우파니샤드
XIV. 수발 우파니샤드
XV. 자발 우파니샤드
XVI. 뼁갈 우파니샤드
XVII. 와즈라수찌 우파니샤드
XVIII. 꼬우쉬따끼 우파니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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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샤 우파니샤드
이 우파니샤드의 이름은 본문의 첫 구절 '이샤바스여 이담 사르밤(이 세상 모든 것은 신으로 덮여있도다)'에서 딴 것이다. 앞 구절만을 따서 '이샤바스여 우파니샤드' 혹은 짧게 '이샤 우파니샤드'라고도 부른다.
베다문학의 계통으로 보면 야주르베다의 와즈스네이 파에 속하며, 그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다. 내용은 현실과 이상의 균형감을 잊지 말것과, 의무(까르마)를 다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아뜨만의 유일성에 대한 교시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분량은 모두 열 여덟 개의 경구만으로 되어 짧지만, 내용면에서는 전체 우파니샤드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핵심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생소한 독자에게는 약간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일단 이 우파니샤드를 이해하면 전체 우파니샤드의 반을 이해한 셈이라 할수 있으니, 우파니샤드를 정독하려고 할때는 이 우파니샤드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지름길인 셈이다. 대개 인도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우파니샤드의 저작 시대 순서를 따르지 않고 이샤 우파니샤드를 가장 앞에 소개하는 것을 통례로 한다.
평온을 위한 낭독
오움- 저것은 완전하고
이것도 또한 완전하도다.
완전함으로부터 완전함이 생겨나노라.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빼내니,
또한 완전함만이 남도다.
평온을 위한 낭독( nti p ha); 각 우파니샤드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부분과 끝나는 부분에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읊는 평온을 위한 낭독이 있다. 이러한 낭독을 함으로서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동시에, 이를 위해 마음의 평온 세상의 평온 그리고 정신적인 평온, 이 세가지 평온의 상태를 염원하는 것이다.
오움 : '오움'의 소리는 아(brahma), 우(Vi u), 머(mahe a). 이 세 소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소리들은 각각 우주 창조의 신 '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그리고 파괴의 신 '마헤쉬 (쉬바)'를 상징한다.-샹까라 그러므로 '오움'의 소리를 내는 것은 우주의 운용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움과 옴은다르다 오움은 발성법 상으로서 나는 소리의풀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위적인 형식이 가미돼엇을때 나는소리이고 움이 아니라 옴은 나도 잘은모릅니다만 나의 이론으로는 한꺼번에 울리는 소리입니다 하주대맥과 중주대맥이 압축돼어 평숨이 진동돼고 그평숨이 터짐이 상주대맥을 밀어붓여서 나는 소리입니다 중주대맥이 법의세게이고 하주데맥이 진리의세게입니다 그리고 상주대맥이 신들의 세게입니다 그리고 이모든것들이 깨질떼 나는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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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ada ) : 우파니샤드에서는 완전함 그 자체인 브라흐만이 곧 아뜨만의 근원이라고 한다. 원문의 '아다허(ada )'는 '저것'이라는 뜻인데 '저 근원으로서의 브라흐만'을 가리키는 말이다.========저것 이것도 브라흐만이고 저것도 브라흐만이다
그러나 완전한 브라흐만자채인 아트만이 고행을하는대 홀로 고행하는자가 올자가 어디에잇으며 갈자가 어디에잇느가
고행을하는자가 꿈꾸는상태도달하면 곳깨어잇는상태라 그때 노는듯즐기는듯하니 노는상대가 곳 상대라 그러나 꿈꾸는자에게 상대가어디잇는가 상대가 없는자에게 상대가나타나니 곳마라 저것저것 하니 저것이마 저것이마 그레서 줄여서 점마라한다
저것이란 우리말로 점마라 하는존제이다==========
이것(idam) : 원전의 '이담(idam)'은 '이것'이라는 뜻으로 '이 행태로서의 브라흐만'을 말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개체 아뜨만과 그 근원인 브라흐만이 '둘이 아니다(advaita)'라고 한다. 이 '둘이 아니다'는 말은, 이미 브라흐만 혹은 아뜨만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불려지고는 있지만 사실은 이 둘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불리워지는 것은 아니라 그 머물러 있는 자리가 고유한 근원의 자리이냐 행태의 자리이냐에 따라서 브라흐만 혹은 아뜨만으로 불리워지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뜨만은 곧 브라흐만이기도 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둘이 아닌' 그리고 '다르지 않은' 브라흐만과 아뜨만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그것'과 '이것'의 인식은 아직 이 둘의 관계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진리를 찾아 출발하는 출발선인 셈이다.=============상대가 잇어야 상대가 존재한다 아직깨닷지 못해 출발하는자가 이것이하나요 이것이하나요 하는 꿈과 상의혼동에서 점마 점마 하다보니 보는주채에대한 혼동이온다
혼동이라는것은 혼이 움직인다는것이다 점마 점마하며 깨엇다가 잠들엇다가 깨엇다가 잠들엇다가 하다보니 보는것의 주체에대하여 혼동이 인다는것이지요 깨엇을때보니 내가아니고 그러다보니 이것도 마이다 이것도마이다 하다보니 임마가 돼엇답니다
보는것의주채인 게체 아트만이 행위로 인하여 저것을보니 저것ㅈ자채도 완전한것이라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빼내엇다고 하는것입니다 이것을흔히 내가곳마이고 마가곳 나라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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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함만이 남도다 : 완전에서 떼어낸 조각은 부분이 아니라 다시 완전이며, 떨어져 나간 자리도 또한 비지 않고 완전하다. 이것이 브라흐만이며, 그 브라흐만에서 나온 브라흐만(혹은 아뜨만)도 완전하므로 근원 브라흐만과 같다. ==========
한가한님이 말하길 시호시호 귀신세게에잇어서 어느것이 귀신이고 어느것이 귀신이 아닌것인가 단순히 속성적인 게념이아니라 깁이 느끼고 반복된것에서 나온 참진리야말로 잇고없슴을떠나고 슬프고 괴로움을 가지는 속성으로부터 자유롭개 해줍니다
상통 천문하고 하달지리가 가능케하는 참진리야말로 완전한것입니다 그리고 이모든 주채는 바로나이니 곳브라흐만은 개채 아트만이라는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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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로지 변하는 것만 있는 세상에, 모든 것은 최고의 존재인 신(神)으로 온통 덮혀 있도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그것을 내 버림으로써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
∥역주 ∥
변하는 것만 있는 세상(jagaty jagat) : 산스끄리트의 '세상'을 일컫는 단어 'jagat'자체가 '변화하는 것'이란 뜻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생겨나고 자라고 죽어 없어지는 변화속에 있다. 즉,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무엇이든, 우리 세상에서는 생겨나면 반드시 없어지는 '변화'를 겪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 변하는것의 주채는 법이다 이법은 시와공으로 돼어잇다 이것을시공간이라고하는대 이것이 변하는것으로 된주채랍니다 그리고 우리모두는 생로병사이전에 모두가 법으로된 채로 잇는것입니다
물질과 비물질에 잇어서 모두가 법으로 되엇으니 이세상은 변하는것만잇는것 입니다=========================
신(神)으로 온통 덮혀 있도다(is v sya) : 여기에서 '신'은 변하는 속성을 가진 세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변하지 않는 신'을 말하는 것이다.변하는것들의 변하지 안는것 그것은 진리이다 진리야말로 변하지 안는것이지요 과거현재 미레에잇어서 불멸인것 그것을 능동적으로 끄집어내니 신이라합니다
그리고 진리야말로 이새상을 덥고잇는것입니다==============
버림으로써(tyaktena): 변하는 세상에 아무것도 욕심낼 것이 없음을 알아 그 세상을 혹은 그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인간들이여***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m g dh kasyaswiddhanam) :무엇이 누구의 것으로 되어있든 '나'에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영원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에 얽매이게 하는 이러한 소유욕을 버리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인간들이여 라고햇답니다 인간이 탐을내지 안아야한다는것은 욕망과 탐욕과 권리를잘알아 자신이 가저야할것 그이상의것을 가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욕망과 탐욕과 권리는 압으로만 내달리는 속성을가지고잇어서 멈출줄을 모른답니다 모든것이 변하는세상에 이런것들로 내달리게돼면 평온은 없답니다
우리는 흔히에기하지요 구천구백 구십석 가진부자가 한석가진자의것을 이런저런 이유로 빼앗는다고 이것은 욕망과 탐욕과 권리의 대표적이지요 그리고 누구나 이런욕망을 가지고잇지요
이런것들은 변하는것들의 주채인 속성이므로 내버려야 한다는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자가 무조건적인 내버림은 아닌것입니다=====================
2.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일백 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 지어다. 인간이여, 그대에게 이 길말고 업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어떠한 다른 길도 없으리니.
∥역주∥
의무를 다하며 일백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kurvanneva karm i jij vi et atam sam ) : 이 첫 구절은 우리 인간에게, 오래 살 욕심을 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의무'는 베다의 제례행위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베다에서 규정한 인간의 4대 목표를 말한다. 이 네가지 목표는 인생을, 단계적으로 궁극적인 하나의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한 인도인들의 사고방법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그들은 '인간의 도리(다르마)', '가치있는 것의 추구(아르타)','욕망의 추구(까마)', '영원한 구원(목샤)' 이 네가지를 한 평생을 사는 데 있어 목표 혹은 이상으로 삼았다. 인간의 도리란 제 분수와 처지를 알아 지켜야할 의무이며, 가치있는 것의 추구란 재산이나 돈으로 계산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스스로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전혀 가치가 없는 일을 하며 살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궁극적으로 추구해 나갈 목표와 부합되는, 그래서 그에게 만족감을 주는 일을 하며 살아갈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욕망의 추구란 그러한 의미있는 삶을 위해 욕심을 낼 필요가 있고 때에 따라서 물질적, 성적(性的) 욕망까지 추구해야할 필요성을 포함하는 말이다. 영원한 구원은 고통의 굴레를 영원히 벗어보고 싶은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욕망일 것이다.
인간이여 (nare): 스스로 '바로 나'임을 내세우는 자만에 가득찬 인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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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쓰로 나임을내세운 다는것은 그가 속성의 노에라는것이다
속성의 노애 속성의 노에는 부귀 명에 성취욕 이러한것들을위해
욕망 탐욕 권리 이런것들을 둘러쓰고 사는자이다 그리고 그가이룬 물질적 성취를 바라보며 미소짓는다 그러나 그가짓는미소는
변하는것들의 속성이 미소지을뿐 진리나 법과는 아무관게가없다
단지그가 변하는것들의 속성을 추월해갈뿐이다
이것은 빈수레가 요란한것과 같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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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수르들의 악명높은 세계가 있다. 그 곳은 깜깜한 어두움으로 덮힌 곳. 누구든 아뜨만을 알지 못하는 자는, 죽을때마다 이 어두운 세계로 계속해서 떨어질 지어다.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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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르들의 악명높은 세게가잇다
아수르 입을악다문 짐승들의 세게 이것은 독한놈들의 세게이다
입을 악다물고 부귀와 명에와 탐욕을좃는자 짐승과 다를바가없으며 오히려 짐승보다도 못하다
아란곳 나 수란곳짐승 르란 곳태두리 이들이 설치는세게 그런세게는 통제가 잇을리없다 그레서 악명높은 세게라한다
먹는자와 먹히는자 그리고 또 먹히는자 그러한세게가 악명높은 세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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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깜깜한 어둠으로 덥인곳
즉 우리가말하는 무명입니다 독한놈을 독한놈이라하고 착한놈을 착한놈이라하면 그는 어둠을 모른답니다
게채 아트만에게는 독한놈과 착한놈이 없기때문입니다 이미그가 생각하기를 저놈은 독한자이다 저놈은 착한자이다 이미 이렇개 생각한다면 그는 속성에 묵인자이지 법에묵인 뿌루쉬나 그보다 더나은 개채 아트만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뿌루쉬에게는 모든것이 진행형이라 독한놈은 점마요 착한놈은 임마 이기에 그가 놈놈 한다면 그도 아직무명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둡답니다 속성과 뿌루쉬는 전혀다른것 이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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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떨어질지어다.(abhigachanti): '계속해서'라는 것은 아뜨만을 알지 못하는 자는 태어남과 죽음의 윤회만을 거듭할 뿐 그 쳇 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암시이다.그가 스쓰로 나라는 오만으로 속성에 묵이다보니 그 속성이 시간에잡히고나면 그의몸은 법으로가서 흩어지고 마음은 진리로가서 흩어진다
모든것이 흩어지고나면 그는 또다시 어둠의 세게로가야한다
그리고 또다시 속성을가지고 윤회해야한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으로 가는것을 떨어진다고 한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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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 아뜨만은 움직임을 알아챌 수 없는 마음의 속도보다도 더 빠른 유일한 존재로, (눈 귀등) 감각기관들 조차 아뜨만을 잡지 못했으니 그것은 아뜨만이 그들 모두보다 늘 그 가고자 하는 자리에 먼저 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뜨만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진 존재 보다도 더 빠르며, 그가 있음으로해서 공기도 모든 자연의 기능속에서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음이다.
∥역주∥
마음의 속도보다도 더 빠른 (manaso jav yo): 속도로 따지자면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대상에게 가 있는 마음보다 더 빠른 것이 없겠지만, 이미 모든 곳에 편재(偏在)해 있는 아뜨만에게는 그런 속도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 속도가 나기 위해서는 달리는 주체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움직일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아뜨만은 이미 모든 공간안에 골고루 스며들어있으니 그 속도는 무한대인 것이다.
이처럼 속도 역시 초월될 수 있는 사물의 '특성'이므로, 여기에서 속도를 거론하는 것은 모든 것을 초월해 있는 아뜨만을 이해하기 위한 비유일 뿐이다.=============마음과 감각의 소유주인 뿌루쉬가 행위로 인하여 아트만을 측정해보려고하나 이미 아트만이 그의바탕이니 뿌루쉬인 마음이 뭔가 달라젓다하는 것만알뿐 그 주체를 알진못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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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있음으로 해서 공기도, 모든 자연의 기능 속에서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음이다.(tasminnapo m tari v dadh ti) : 여기에서 '공기'는 대공(大空)중에 다니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그 공기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라는 제한된 공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공기가 있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것은 '공기'라는 공간적 끈으로 묶여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간이 존재할 때 물도 흐를 수 있고 불도 타오를 수 있으며 빛도 발할 수 있다. 원문 마지막 부분의 직역('기능들을 나누어준다')처럼 공기는 자연의 기능을 각기 나누워 주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아뜨만 안에서 가능하므로 즉, 위에서 말한 편재(偏在)하는 아뜨만이 모든 기능 뒤에 숨어있으므로 이 아뜨만이라는 존재는 정지해있는 무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5. 아뜨만은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느니라.
∥역주∥
아뜨만의 편재성에 대한 설명이다. 이렇게 세상 안에도 그리고 밖에도 존재하면서 움직이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기도 하는 것, 멀리 있으면서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려고 하면 우리의 사고 영역속에는 혼동이 인다. 아뜨만의 초월성에 비한다면 우리의 사고는 극히 제한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속성에쫏겨 내가낸대 하면서 큰소리치지요 이 내가난대하는것이 움직인다고 하는것이며 쿨쿨자면서 누가업어가도 모르는나를 움직이지 안는다고 하는것입니다 이 세상안에 잇다고하는것은 뿌루쉬가 보고듯고 느끼고하는것이고 이세상박에 잇다고하는것은 꿈꾸는자입니다
6. 아뜨만을 아는 사람은 아뜨만 안에서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보게 되며, 모든 생명체들 속에서 그 아뜨만을 발견하니, 그는 어느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리라.
∥역주∥
아트만안에서 아트만을보고 발견하니
아트만안에서 생명채를 보고 아트만을 발견한다는것은 우리는 법으로된 법채랍니다 이몸이 법으로된 근원아트만인것은 분명하나
근원아트만은 아닌것입니다 돌아다니고 격고 행하는것은 속성에 묵인 무지일뿐입니다 그런대 이무지의 아트만이 물불바람대공으로 이루어진 마음으로 간답니다 그리고 일선에 부딧처 투영됩니다 이것이 상이라고 불리는 생명채 입니다
이 생명채는 무지의 아트만이 보고격은 행위로인하여 달구어집니다 그 달구어진힘으로 탄생하는것 입니다
=====아트만을 발견하니====
이 무지의 아트만이 게속돼는 행위에 대하여 의심을하기 시작합니다
행위와 결과의 사라짐 나고없어짐의 행태에대한 의구심 보는것과 보지안는것의 의심 이러한것들로 의심이 싸이고싸여 마침내
아 나로인하여 이 생명이 삭트고 없어지는구나 하고알개됍니다
그리고 그보는 주채는 광휘로 싸여잇으며 영혼의 몸조차없는 그존재입니다 즉 보는것의 주채를 인식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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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뜨만을 아는 자에게는 모든 생명체가 곧 아뜨만이니, 모두가 같은 아뜨만임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
∥역주∥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ko moha ka oka): 욕심이나 슬픔도 나와 타인의 구별,나에 대한 집착에서 말미암는다. 아뜨만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나면 아집에 의한 고뇌가 사라지고 따라서 욕심이나 슬픔도 사라지게 된다는 말이다. ========
그러나 아주없는 초탈의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만큼만 쓰고 엇고하는 행위는하돼 부질없는 속성에 따르는 아무이득이 없는 그런행위는 하지안으며 그 이득이라는것도 모든존재가 필요한것이면 엇고쓰돼 어떤 특정집단이나 개인을위해서 엇으려 하지아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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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광휘로 빛나는, 영혼의 몸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조금도 흠이 없는, 감각을 느끼는 신경도, 오점도, 죄도 없는, 혁명의 눈을 가진, 모든 것을 아는, 사방 어디든 존재하고 스스로 생겨나는 그 아뜨만은 사방 어디든 이미 가 있도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존재인 그는 창조주들을 위해 각기의 의무들을 적절히 나누어 알려 주었도다.
∥역주∥
이 구절은 아뜨만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언어라는 것은 지극히 한정적이어서 브라흐만 혹은 아뜨만에 대해 설명해낸다는 것은 역시 역부족이지만 우리의 제한적인 사고속에나마 그 존재를 알게하는 목적을 위해 우파니샤드는 이제 그 '한정된 언어의 힘'을 빌리고 있다.
영혼의 몸(suk ama ar ra) ː 우파니샤드는 인간의 몸을 세 가지로 보았다. '외피의 몸(sthula ar ra)','영혼의 몸(suk ama ar ra)','근원의 몸(k ra a ar ra)'이 그것인데 '외피의 몸'은 피와 살로 된 몸으로,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생명을 갖지 않고 이 몸에 달린 모든 감각기관들이 그 기능을 상실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영혼의 몸'은 외피의 몸이 생을 살면서 지은 업보를 가지고 윤회의 바퀴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윤회의 쳇바퀴를 도는 것은 이 세가지 몸 중에 '영혼의 몸'이다. 그리고 이 몸은 다시 그 업보에 따라 새로운 외피의 몸을 입고 세상으로 나간다. '근원의 몸'은 윤회의 축으로, 바퀴가 아무리 돌아도 그 바퀴축의 위치나 모양이 바뀌지 않는 것처럼 이 몸도 아무런 변화나 움직임이 없다. 윤회의 목적이 되는 영원한 구원의 순간이 되면 영혼의 몸도 사라지고 오직 이 근원의 몸만 남는다. 이 몸이 바로 어떠한 형태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뜨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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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휘로 빗나는자=======태양이 바로그이다 이것의 모습은 우리가맨눈으로보는 태양이 바로그이다 이것이 바로 무지의 아트만이며
아트만안에서 생명의 싹을튀우는자이다 일선에 의지한생명은 이 무지의 아트만의 빗으로서 태어나는것이다
영혼의몸========이마가 바로 영혼의몸이다 이마는 두개의 존제이다 우리는 항상비교검토한다 사물을 대할때도그렇고 무엇을볼때도 그렇고 행동할때도 그렇다 그리고 결정할때도 이것을 하면 잘될꺼야 아니야 잘못돼면 안돼 하고 고민한다 우리는 이와같은 양면성을 가지고잇다 이 양면성의 주채가 이마이다 이 이마가 이마의 모습을하고 영혼의 몸이 돼기위해서는 아트만안에서 아트만을 발견하는 무지의 아트만이 보는스쓰로를 자각하여 뿌루쉬가 된다 그 뿌루쉬가 두개의 마중에 하나에 들어가면 이때 영혼의 몸이된다 이 영혼의몸은 시간의 연장선에 노인다
조금도 흠이없는=====마가곳 나이고 내가곳마이다 시간의 연장선에 노인영혼의 몸은 무지의 근원아트만이 하던행동을 답습한다
마가곳나이고 무지의 아트만이 나이니 흠이 잇을리가 없지요
감각을느끼는 신경도 죄도없는========마라는영혼의 몸은 감각이 잇는것 같지만 사실은 감각이 없으며 신경이 잇는것같으나 사실은 없으며 죄라고하나 죄를모른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리의몸을 가지지못햇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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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눈을 가진 자(kr ntidars ): 모든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혁명적인 시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자. 이것음바로 옴의 소유자입니다 옴 이것은 두개의 영혼의몸이 부딧처 사라진자리에 남는자입니다 그가 혁명의 눈을 가진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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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존재하는 자(swayambhu): 그 무엇으로 부터도 태어나지 않았으며, 스스로 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자. 이렇게 스스로 생겨나기에, 이 아뜨만의 다른 근원은 없는 것이다.
======== 이미 태어남을 격은자가 스쓰로의 행위로 인하여 다시태어낫으니 그는 스쓰로 존재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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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들을 위해 각기 의무들을 적절히 나누어 주었도다====
======= 근원 아트만인 브라흐만은 창조주인 개채아트만 으로하여금 그에맛는 역할을주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성을 언저주어서 풀개햇다는 것입니다 너는 고기만먹고 살아라 너는 풀만먹고살아라 너는 날아다녀라 너는 기어다녀라 너는 부리를 가지고 살아라 너는 발톱을가지고살아라 그리고나는 운전해서살고 너는 용접하면서 살고 이렇개 의무를 나누어주엇다는 것입니다
그레서 무두가 부분으로 살게헷고 속성을주어 맛겻다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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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무지를 숭배하는 자는 그저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만, 지혜만을 숭배하는 자는 그보다 더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지어다.
∥역주∥
무지(avidhy ) : 말 그대로 '지혜가 없음'의 뜻인데 샹까라는 이것을 '행위,예배의식(karma)'으로 풀이한다. 즉 진정한 지혜를 갖지않고 무조건 예배만하는 사람들이 숭배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다름아닌 무지(無知)의 대상일 뿐이라고 우파니샤드는 말하고 있다.========그리고 우리의 샴자채가 속성의 연속일뿐 순수지해로 혁명의 눈을가진 브라흐만으로 가는길은 아니라는것입니다 우린 대를물리며 같은일을 반복하지요 아버지가 햇던일을 아들이하고 아들이 해던일을 자식이 합니다 아버지가 해던고민을 반복하지요 그리고 모든생명이 게속 그런일을 하지요 돈과명에 권력 이러한것들 분에넘친 소유욕들 그리고 지나친경쟁심 끗없는 너와나의 비교 이러한것들이 무지라는것 입니다============
어둠(tama ) : 무지(無智)가 부르는 것은 '어둠(tama )'이라 하였는데, 이 어둠은 멀리잇는것이 아니라 항상가까이 잇어서
욕망과 속성에 묵여서 진실의 시간을 보지못하고 행위를 반복하면 시간은 무지의 아트만을 묵어서 죽음으로 간답니다
그러나 어떤자는 죽음으로 가기전에 진실을 조금이나마 눈뜨는대
그러한 자들이 말하길 공수레 공수거라 조금만 잘할걸 조금만 참앗더라면 하고 후회하나 이미시간은 그를 부수어 버리니 아무것도 알지못하는 무지의 아트만이 부수어지면 그것은 어둠이라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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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만을 숭배하는 자는 그보다 더 깊은 어둠속으로 빠져들지어다(tato bh ya iva te tamo ya u vidhy ya rat ) : 행위,예배의식을 무시하고 지혜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지혜는 완전한 지혜가 될 수 없고 절름발이 지혜일 뿐이다. 이러한 사람의 지혜는 그에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만을 드러내게 하며, 예배의식에서 보여야 할 정성과 겸손함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의 경우보다 훨씬 구제 불능이다. 지혜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지혜를 깨달을 기회가 아직 남아 있지만, 이미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삐뚤어진 지혜를 빼면 아무것도 없으므로 삐뚤어진 지혜는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구절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과 추구하는 이상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혹은 실천과 깨달음이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이상이나 깨달음이라도 절름발이 구도가 될 뿐이다.
10.'지혜를 통한 것'과 또 하나, '무지를 통한 것'은 이처럼 각기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고, 우리는 우리를 위해 가르쳐 준 현인들에게서 들었느니.
지해를 통한것======행위와 비교와 검토를통하여 틀림이 없이 의심이 없이 안것 그것이 다소불안정하더라도 진리와 비교해보아
빈틈이 없이 안것
무지를 통한것=========무조건적인 맹신과 무조건적인 밋음 그리고 비교검토하지 안는 주입식교육에의한 자아완성 이것은 또다른 속성일뿐이라 무지라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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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현인들에게서 들었느니(iti u ruma dhir n m) : 위의 구절에서 말한 것처럼 이 두가지의 외골된 길은 어둠과, 더욱 깊은 구제되기 어려운 어둠으로 각각 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오랫동안 수 없이 많은 현인들이 모두 그렇게 말해온 바다. 그것도 끊임 없는 내적성찰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알려준 바인 것이다.
11.무지와 지혜를 같이 아는 자는,
무지로써 죽음을 건너고. 지혜로서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로다.
∥역주∥
무지로써 죽음을 건너고(avidhy y mrtyum t rtv ) : 샹까라는 계속해서 무지(無知 - 지혜가 없음)를 '행위, 예배의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무지(無智) 혹은 행위(karma)는 미혹(迷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영원한 구원을 목표로 하는 사람에게 구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완전하며 모든 것인 브라흐만이 이 작은 육체안에서 상대적인 열등감을 가진 인간이 되어 자신의 본모습을 잊고 있는 것은 바로 '무지'때문이라고 한다. 무지 없이는 아뜨만의 개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개인'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때, 무지 없이는 우파니샤드가 제시하고 있는 구원으로 가는 방법인 개인의 '무지타파'가 있을 수 없고 또한 구원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지(혹은 행함)속에 있고 그리고 영원한 구원으로 가는 길은 바로 무지(혹은 행함)를 통해야 (깨야) 할 것이므로, 무지(행함)를 통해야만 죽음이라는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12.'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만 빠져 있는 자는 더욱 깊은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역주∥
눈에 보이는 세상 (asambhuti): 눈에 보이는 자연과 눈에보이는 인연으로인한 생각 그리고실천등입니다 그러나 눈에보이는것은 극히일부랍니다 이것은 지극히 작은것이라 이눈에보이는 감각적인것을 가지고 성추를이룬자는 그가이루엇다고하지만 그것은 속성의과재를 하나푼대 불과하답니다 그러나 깁은어둠이 아니고 그저어둠인것은 그자신은 속성을풀엇으나 그자채도 법에묵여잇어서 마땅히 해야할일은 그가 자신도머르지만 하엿다는것입니다
그것은 결혼을하고 자식을두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다갓기에
그자신은 어둠으로 가지만 끈은남겨두엇기에 그냥 어둠으로 간다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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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sambuti) : 무지와 지해는 다르답니다
눈에보이지 안는존제를 영원하다하여 맹목적으로 추종한다거나
지칠줄 모르는 탐구의열정없이 깁지안은 알음알이로 공부가 끗낫다거나 하는것은 도다른무지이며 그속에는 또다시 속성이 깔려서
스쓰로는 지해를 가젓다하지만 이것은 또다른 무지의연속이랍니다 이것은 멀쩡한눈의 압을가려 보이는것조차도 안보인다고 하기에 구제불능이 돼기쉽고 마땅히 해야할일도 멀리하엿기에 대공을 이어주는 끈조차없어서 어둠보다 더깁은어둠으로 빠진다고 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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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형상화 되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것과 형상화 될 수 없는 무형의 것만 숭배하는 것도, 이처럼 각기 다른 결과를 가져 온다고 우리는 현인들에게서 들었도다.
∥역주∥
형상화되어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것(samb v t) : 이런 태도는 모든 것의 근원에 대한 해답마저도 현상세계속에서 찾으려 하기때문에 그 모든 창조, 유지, 파괴의 근원을 '자연'이라고 한다. 그것은 근원이 되는 것의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다.====그리고 수행하는자가 형상화돼어 생명이 돼는것을 숭배하는것은 조으나 여기에 집착하여 즐기기만 한다면 스쓰로의 생을갈아먹는것이요 수행그자채에는 속도가없어 정말로알고 행하는것갗으나 실재로는 별로나가는것이 없다는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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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화 될 수 없는 무형의 것만 숭배하는 것(asambh v t) : 우주의 근본원리는 무형의 유일한 존재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로부터 이 모든 것이 순리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형상화가 가능한 '자연'이 하는 일이다.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허공에 구름잡듯 한다면 이런 태도 역시 저 깊은 구제불능의 수렁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만은 수행자들과 수행자가 아닌자들이 그러하지만 몸으로 행동하지안고 격지안으며 책을펴놋고 암기하고 분석하고 각종시험을처서 점수를매기고 이것이 진실인양 각종감투를 둘러쓰는것은 정말로 진실과는 거리가먼것이라 무형의것만 숭배한다는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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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현상세계와 창조자 브라흐만, 이 둘의 길을 함께 잘 병행할 때, 그는 세상을 숭배함으로써 죽음을 건너고 브라흐만을 숭배함으로써 불멸을 얻으리라.
∥역주∥
지금까지, 양쪽 중 어느 한쪽에 기울게 되면 그것은 안 가느니 못한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참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절대로 현실을 무시하고 있을 수 없음을 교시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숭배하므로서 죽음을건너고 브라흐만을 숭배하므로서 불멸을 엇으리라============
꿈꾸는상태에서 벗어난 개채아트만이 뿌루쉬에서 나고죽는 상태를경험함으로서 새상을 비교분석하게돼고 그러한과정을 통하여
죽음이 현실적 감각과 다르게 와닷는다는것 입니다 뿌루쉬가 깨어나면 곳개체아트만인대 그 개채아트만이 스쓰로 뿌루쉬와 다르지안음을알아 세상의 원인인 브라흐만을 숭배함으로서 나고죽는 근원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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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금빛으로 빛나는 그대 태양으로 브라흐만의 모습이 덮혀 있으니,
오! 태양이여, 참된 진리의 길을 가려는 내가 브라흐만을 볼 수 있도록 그 문을 열어 주오.
∥역주∥
금빗으로 빗나는그대 태양으로 브라흐만의 모습이 덥여잇으니
====어둠이 함몰장으로 들어가고 빗의터널을지나 물과불과 바람과 바다를 지나가면 둥근태양이 잇는데 그태양속에 또 태양을지나가면 두게의 태양이 떨어저 사람의모습을 이루니 이가곳 브라흐만입니다
그리고 이몸의외피와 구조또한 한개의 원속에 두개의 원이잇으니 이둘은 똑갓아 브라흐만이라고 하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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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태양이여 참된진리의길을 가려는나에게 문을열어주오=====
뿌루쉬가 태양속에 잇는나와 결합할려면 아주만은 탐구와 노력이필요한대 더나은공부를 위하여 자기가 자기자신에게 다짐하는 형식으로 말하고 잇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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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오, 세상의 모든 것을 자라게 하는 이여, 오로지 옳은 한 길만을 가는 태양이여, 세상을 통제하며 다스리는 태양이여, 최초의 창조주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이여,
오, 태양이여,
그대의 눈부신 햇살을 걷고 그 진정한 진리의 찬란한 빛을 보게 해주오, 내 그대의 은혜로 그를 볼 수 있도록.
(아, 이제 그 진리를 깨달았도다.)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하는 그 브라흐만은 바로 '나'요.
∥역주∥
오 세상의 모든것을 자라개하는이여 =====개채 아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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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한길만을가는 태양이여=====주천을 말하는것 입니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는것은 방향입니다 소약은 힘을가지고잇으며 마와결합하면 보는것의 주채가됩니다
위에 태양이 잇는것이고 그 태양이 비추니 봄의주채가 보고느끼고 하는것입니다 이것은 방향을 말하는것으로 우리의 주천은 위에서 아레로 일정하게 도는것입니다
세상을 통제하며 다스리는 태양이여==========
이것은 봄과 운용의 강도를 말하는것입니다 태양이 지면과 너무가까우거나 너무머르면 그화기로인해 생명이 죽습니다
연기법이라는것은 불탄 연기의 법이라는것입니다 마치 강한폭발로 인하여 그 파괴력이 둥글게 허공에 퍼지듯 이 해로불리는 소양이 운용을못하면 오히려 생명을 해하게 된답니다 이것은 운용이대한 깁은이해를 요구하는것 입니다
창조주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이여(prajapataya) : 개채아트만에 봄의주채로인하여 생명이태어나고 그 생명을기초로 뿌루쉬인
지마가 태어납니다 이 지마에 의식인 해가들어오면 지마가 지마의역할을하며 시간의 연장선에 노입니다 이것이 스쓰로의 몸에서 쓰스로 낫으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수동적이며 감각적 지감에
반응하지못하여 그의아들이라고 하는것입니다
17.언젠가는 죽을 내 생명이 헛되이 죽지않고 불멸함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나서야 이 내 육체가 불에 타 재가 되도록.
오움 - 의지를 가진 마음이여!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
∥역주∥
이 구절에서는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교시하고 있다. 스스로에게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윤회의 바퀴속으로 다시 들어갈때 영혼의 몸이 가져가는 업(karma)은 인간이 만들기 나름이다. 따라서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지 말고 준비하고 계획하는 초연한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잰가는 죽을 내생명이 헛돼이 죽지안고========
쓰스로 완전한 브라흐만이거나 불멸을 엇지못한 상태에서는 반드시 죽을수박에 없는것입니다 그러나 헛돼이 죽지안는다는것은
모든사람이 맛는 속성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다운죽음 그런 가치잇는죽음을 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속성의 죽음은 죽음이아니라
파멸입니다 그러나 쓰스로 비교검토하고 바라보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또다른 출발입니다 설사 다음생이 개가될지 소가될지 모르나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또다른 연속입니다
불에타 재가되도록======== 시신에 불은 스쓰로 타는것이 아니라 누가붓여주는것입니다 즉 모든이에게 기치잇는죽음 이런죽음을 맛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공부하는자들은 자신의 암을 배풀어야합니다 한평생 한마디도 못하고 공부만하다 죽는것은 또다른 미련함 입니다 자신의 알음알이를 모든사람에게 가르처주고 세상을 밝개 해야한다는것입니다
세상엔 이러한자들이 만습니다 그것이 도를닥고 공부한다고 하지안아도 불의에 항거하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만습니다
이러한 자들도 만은대 하물며 공부하는자가 남보다 나을수도잇고 못할수도 잇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행할수잇는것은 해야한다는것입니다
의지를 가진마음이여 내가한일을 기억하라============
의지를 가진마음 바로마입니다 즉 내가바로 마이다 이것은
이육신이 죽고나면 밋을수 잇는것은 그동안의 수행을통하여 알고잇는만큼 마음의 실채인마가 다음생을 준비하도록 하는 일종의 주문입니다 부처님깨선 말씀하시길 의식이라는것은 배우고 익히고 습득하고 버릇이돼게 하는것이다 하엿습니다
속성의 버릇은 의식이 아닙니다 의식이 주채가돼어 행하고 보고듯고 느끼지안으면 마가돼지 안는답니다 마라는것은 의식의형상화 이기때문입니다 그레서 내가한일을 기억하라 내가한일을 기억하라 하는것 입니다
18.오, 불의 신 아그니여, 우리가 좋은 업보를 쌓을 수 있도록 옳은 길로 이끌어 주오.
오, 신이여 우리의 모든 행위들을 아는 그대여,
사악한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가져가 주오.
그대를 위해 수 없이 경배하느니.
∥역주∥
여기 15∼18 구절은 힌두교의 임종시에 사제가 읊어주는 만뜨라이기도 하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 이와 같아야 할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불의 신 아그니여, 우리가 좋은 업보를 쌓을 수 있도록 옳은 길로 이끌어주오.(agne naya supath r ye ) : =========
입에서 불이나온다 햇습니다 원인이 잇으면 행위가잇고 행위가잇으면 결과가 잇답니다 수행자라고하여 안먹고 안자고 안입고 할수는 없는것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것들은 보시로 엇어지는대
이것이 한두번이 아니고 거듭돼다보면 타성에젓거나 기분적 감가에 휘말려 잘못한것을 잘햇다하고 안된것을 되엇다하고 그렇수가 잇다는것 입니다 인간이란 완전할수 없기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것은 왜곡의 여지가만고 순수하더라도 그결과가 나쁘게 나타날수도 잇답니다 본디 선한마음으로 한행동일지라도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면 나쁜죄를 짓는것 이기에 수행자가 결과가 나빠지지안도록 바라는 마음의표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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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을 위한 낭독
오움- 저것은 완전하고
이것도 또한 완전하도다.
완전함에서 완전함을 빼내니,
또한 완전함만이 남도다.
평온, 평온, 평온.
으음 만이서툴군요 모르갯습니다 얼마나 만족하실런지요
제게너무 만은것은 바라지마세요 이것은 우파니샤드 입니다
이것은 얄굿은 경전이아니라 인류쵀고의 학문입니다
제가 이것을 얼마나 여러분겻으로 가저갈지는 나도모릅니다
그러나 공부하거나 하지안거나 인간이라면 꼭 한번쯤은 알아야할 학문입니다
나는 전문적인 공부를한자가 아니라서 깁고 현란한 설명은 할줄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알고잇는 감각적 범위내애서 쵀선을 다해보갯습니다 너무 부족한 설명이라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제숙씨가 주석을 달은것을 일부는 그대로노아두고 일부는 따라서 붓이고 일부는 전면적으로 삭재 햇습니다
이것은 학문이기 이전에 숙고의 대상이 돼어야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레서 이제숙씨의것을 대부분 살리고자 합니다
내가바라는것은 이 우파니샤드가 여러분겻으로가서 좀더 여러분의 생활에 선택의 폭을넓히길 바랄뿐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