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멀다 외 2편
정진혁
너에게 가닿지 못한 이야기는 다 멀었다
눈에 빠져 죽었다
침묵은 보이지 않는 눈의 언저리를 한 바퀴 돌아갔다
바깥이 되었다
눈이 멀어서 밥이 멀고 내가 멀어서 그림자가 멀었다
어떤 눈이 나를 송두리째 담아 갔다
문득 문이 열리고
306동 불이 켜지고
모퉁이 앵두나무에 앵두가 익어 갔다
세상은 공중인데 내 손은 사무적이었다
몇 발자국 세다 보면 길은 끊어지고
손끝에 닿는 대로 기억이 왔다
눈이 고요하였다 끝이 넓었다
나는 고요를 떠다가 손을 씻었다
아카시아 향기 같은 것이 종일 흔들렸다
마음 하나가 눈언저리에 오래 있다 사라졌다
누가 먼눈을 들여다보랴
눈은 멀리서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있다
먼 오후가 가득하였다
아무리 멀어도 더 멀지는 않았다
오른쪽 어깨에는 각이 살고 있다
나는 어느 생의 방파제에서 떨어졌다
실업이 자꾸 나를 밀었다
어깨를 가만히 세우면 어긋난 각들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떨어진 어깨에 모난 말들이 터를 잡았다
깨진 것들은 왜 타인의 얼굴을 하는가
수박은 박살이 나고 병은 깨지고 그해 여름도 산산이 부서졌다
어깨는 어느 생의 모퉁이였다가 나였다가 떨어진 각을 아는 척했다
팔을 들었다 내릴 때마다 각들이 서로 찌르는 소리가 났다
그동안 너무 오래 서성거렸다
걸음걸이가 세모다 표정이 세모다
가슴 언저리에도 세모가 자라기 시작했다
세모를 걸으며 나는 충분히 무모했다
실업은 질기고 캄캄했다
밤마다 도처에 머물던 각들이
일제히 어깨로 달려와 수런거렸다
나는 말수가 적어졌고 대신 각들이 우두둑 소리를 냈다
떨어진 각도를 지우기 위해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았다
나를 놓친 시간은 까맸다
죽은 숫자들이 우글거리는 달력을 떼어 부채질을 했다
그해 여름의 날짜들이 떨어지며 각이 되었다
있잖아요, 분홍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
내 눈과 내 낱말들이 누군가의 한 잎 속에서 산다는 것
당신의 한 잎은 온통 숨결이어서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여서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들 사이여서
날마다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
분홍을 입어요, 분홍을 먹어요, 분홍을 춤춰요
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청평이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 같은 지명을
여기선 다들 분홍이라 불러요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도 나는 분홍이라 불러요
분홍에서만 나를 느낄 수 있으니
뒤집혀도 분홍
분홍과 분홍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둥긂이 되었지요
있잖아요
분홍 한 장을 넘기며 가장 낮은 곳 가장 높은 곳에서
울어 본 적 있나요?
한 잎의 분홍 앞에서 웃어 본 적 있나요
오늘은 분홍이 지는 곳까지 걸어가 봤어요
거기까지 가 보니 당신이 진짜 분홍이었어요
오뉴월 복중 같은 사내 하나가 그 속으로 들어가서는
영 나오지 않았어요
― 정진혁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 / 2022)
정진혁
충북 청주 출생. 공주사범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 시집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2009년 구상문학상 젊은 작가상, 2014년 천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