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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른 들판 원문보기 글쓴이: 靑原 任基石
갑신정변 ‘3일천하’의 길을 따라
한국역사연구회 최은진(근대사분과)
맑게 갠 하늘과 조금은 뜨거운 햇살, 그래도 걷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날씨임에 틀림없다. 2008년 8월 30일 토요일 오전 11시, 열 분 남짓의 근대사분과 선생님들과 우정총국 앞에 섰다. 작년 뜨거웠던 북촌한옥마을 답사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1년이 지난 오늘은 ‘갑신정변’이라는 사건의 진행을 따라 걸어본다는 주제가 있는 특별한 답사로 더욱 기대에 부풀었다. 더욱이 『갑신정변 연구』의 저자이시기도 한 박은숙 선생님께서 「갑신정변 3일천하의 길을 따라」라는 제목을 붙여서 흔쾌히 안내자로 나셔 주셨다.
갑신정변은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저녁 9시경부터 19일 오후 7시경까지, 정확히 말하여 총 46여 시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이다. ‘3일천하’도 못 되는, ‘2일천하’에 불과한 시간이다. 오늘의 답사 코스이기도 할 갑신정변 주모자들의 이동경로는 우정국 → 일본공사관 → 창덕궁 → 경우궁 → 계동궁(이재원 집) → 창덕궁이었다.
◀ 우정총국. 갑신정변이 시작된 장소로, 현재 체신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최근 발견된 기념우표를 보면 실제 우정국 자체가 개설된 것은 10월 1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이 자리에 도화서, 전의감이 있었다. <ⓒ최은진>
1-1. 갑신정변 첫째 날 ! - 1884년 음 10월 17일(양 12월 4일)
총판(總辦) 홍영식의 주도 아래 우정국 개국 기념 연회가 열렸다. 권력실세와 외국사절 등이날 우정국에 모인 사람은 총 19명. 군영세력으로 전영사 한규직, 후영사 윤태준, 좌영사 이조연, 우영사 민영익과, 개화파 세력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그리고 미국공사, 영국영사 등이었다. 이 자리에 독일영사와 일본공사는 불참하였는데, 특히 일본공사는 사건을 짐작하고 병을 핑계로 전략적으로 자리를 회피한 듯하다.
보름달이 휘황하게 떠올랐던 날이었다.
◀ <ⓒ최은진>
연회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진행되었다. 이미 갑신정변 주모자들은 근처 안동별궁에 8시 반에서 10시 사이에 불을 지를 것을 지시해 둔 상태였다. 드디어 9시 무렵, 별궁이 방화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 박은숙 선생님이 표시해 주신 지도의 선을 따라 갑신정변 주모자들의 이동경로를 재현해 보았다. <ⓒ최은진>
“불이야!”란 소리에 좌중이 소란스러워지자, 미국공사는 “이럴 때 침착해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방화는 실패하였고, 그 대신 옆의 초가에 다시 불이 질러졌다. 당시 방화를 지시 받은 사람과 자객의 명단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 명단중에는 가운데에는 일본인 자객이 4명 정도 섞여 있었을 것이라 한다. 이들은 모두 김옥균의 행랑에 머물고 있었다.
사태 파악을 위해 우정총국 문을 김옥균이 계속 들락날락하게 되었고, 민영익은 아마 이를 수상하게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이미 누군가에게서 “보름 날 큰 변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어떠한 정변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으리라고 전해지는데, 결국 민영익은 일본인 자객 중 한 명에게 칼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살해는 미수에 그쳤다.
◀ 체신기념관 안에 있는 우정총국 개설연회 좌석 배치도. 문 쪽 홍영식부터 시작하여 시계 방향으로 김홍집, 이조연, 민영익, 한규직, 박영효, 영국영사 애스턴(W. G. Aston), 청국영사 천수탕(陳樹棠), 김옥균, 일본서기관 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 윤치호, 미국공사 푸트(Lucius H. Foote) 등이다. <ⓒ최은진>
갑신정변 주모자들의 당시 암호는 ‘천(天)’이었다고 하는데, “天天, 天天”하면서 걸어 다녔다고 하니 ‘천천히’ 침착하게 정변에 임할 것을 의미한 암호가 아니었는가 한다. ‘天’은 그 때 일본어로는 ‘좋다’는 뜻의 ‘요로시이(よろしい)’라고도 발음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암호는 발견되고 있지 않으나, 대개 암호는 한 쪽이 부르면 상대방이 응답하는 형식으로 짝을 이룬다는 점, 또 암호는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암호가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추측이 답사팀에서 제기되었다.
한편 갑신정변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로 홍영식이 있다. 아직까지 그의 갑신정변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흡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홍영식의 후손이라는 한 사람이 어느 날 박은숙 선생님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손의 말에 따르면, 갑신정변의 주요 인물로 보통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거론되지만, 홍영식은 늘 그 거론되는 순서가 가장 뒤인 것에서 보듯이 정작 그 주도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되어 온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 관련된 자료가 부족한 한계도 있다.
◀ 체신기념관 내 홍영식의 사진 <ⓒ최은진>
홍영식은 이조참의, 병조참판,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한 홍순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주에 터를 잡았던 그의 집안은 대대로 반골 기질이 짙었던 듯하다. 『매천야록』에는 “홍순목이 홍영식에 대하여, 집안을 위험에 빠뜨릴 인물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대원군은 고종을 홍순목의 집으로 보내 1년간 공부를 시킨 바 있었고, 그러한 친분관계로 홍영식도 요직에 등용될 수 있었다. 또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시 홍순목과 홍영식은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교류하면서 청나라 측과도 우호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홍영식은 1883년 무렵 미국에서 약 1년간 체류하고 난 후 대미관계에 능동적이 되었다. 보빙사(報聘使)로서 당시 미국에 함께 건너갔던 민영익이나 서광범이 미국에서 유럽을 거쳐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보고가 늦어졌던 반면, 홍영식은 바로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미국에서의 문물체험을 보다 선도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윤치호일기』에서와 같이 홍영식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그의 인품은 세인에게 칭송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인품이나 정변 당시 30세라는 나이, 그리고 주변관계로 미루어 볼 때 갑신정변의 주역으로써 그의 영향력이 과소평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이로 치면 김옥균, 박영효 등은 당시 20대 중반이 채 못 되었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서광범이 겉으로 드러나도록 행동대원을 규합하는 등의 일을 맡은 반면에, 홍영식은 그 배후의 핵심적 인물로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홍영식은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이전 아버지와 형에게 편지를 남겼다. 그리고 정변 후 12월 22일, 결국 아버지 홍순목은 자결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의 본처와 홍영식의 부인인 며느리, 손자까지 함께 자결하게 되었다. 한편 홍순목의 큰 아들이었던 홍만식은 감옥에 1년간 구금되었다가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나와서 갑오개혁 이후 등용되었지만, 을사조약 체결 시에 사약을 마시고 자결을 하였다.
이후 홍만식 쪽 후손은 대부분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월북하였고, 홍영식의 후손은 현재 어려운 형편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듣고 답사팀에서는 혹시 이 집안과 인척관계의 인물로 홍범식이나 홍명희가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나왔는데, 확인해본 결과 홍명희의 숙부가 홍영식이었으며, 홍범식은 홍명희의 아버지였다.
한편 참고로 갑신정변 이후 실제 최고형을 받았던 사람의 경우에도 3족이 처형되거나 능지처사된 일은 없었으며, 혹 가족이 처형된다 해도 그 아들과 부인 정도에 그쳤고, 나이가 60대 이상이거나 어린이의 경우 처형을 면해주는 규정이 이미 있었다고 한다.
◀ 풍문여자고등학교 <ⓒ최은진>
벌써 한 시간 가량이 흘러, 일행은 안동별궁 자리였던 근처의 풍문여고로 향했다. 때마침 학생들의 축제인 ‘풍문제’로 한창 들썩이고 있었다.
안동별궁은 1881년에 건립되었는데, 정변 당시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비어 있었으므로 쉽게 불을 지르려고 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갑신정변 주모자들은 안동별궁에 불을 지르려 했을까? 정궁에 화재를 기도하는 것은 부담스러웠으리라는 점, 또 이 주위에 기와집은 드물고 대부분 초가가 있었기 때문에 시도가 손쉬웠으리라는 점 등이 제기되었다. 또한 안동별궁이 『갑신일록』에 기록되어 있듯이 서광범의 집과 담 사이를 두고 있을 정도로 주모자들의 집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다는 점, 그리고 ‘궁’으로서의 상징성을 살릴 수 있었던 점 때문에 이곳을 도화선의 지점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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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진>
자기황으로 불은 시작되었다. 그 불씨를 당긴 인물은 사관생도였다는 설, 박영효의 하인 중 한 명이었다는 설, 행동대장 중 한 명이었을 것이라는 설 등으로 분분하다. 그러나 결국 안동별궁에서의 화재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 가능하다. 안동별궁 자체는 기와 서너 채 정도였는데 기와집이라 잘 타지 않았던 것일까? 연회장에서 주요 인물들을 직접 처단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에 별궁을 선택하여 방화했지만, 화재 후 바로 별궁으로 몰려든 포졸들을 상대하기에 정변 세력은 수적으로 너무나 열세였기 때문일까? 여기에 더하여 청나라 군대가 5분 대기조로 하여 궁 주변에 있어 경비가 삼엄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을 가능성, 우정총국 개국 축하 연회로 바로 주변에 치안이 더욱 삼엄했을 가능성, 당시 날씨가 문제되었을 가능성 등이 추측되었다.
◀ <ⓒ최은진>
다음으로 답사팀은 교동(현 경운동) 일본공사관 자리인 천도교대교당에 도착하였다.
안동별궁에서 잠깐의 화재가 있은 이후 바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우정국에서 나왔다. 그 후 그들은 일본공사관으로 가서 당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의 정변에 대한 태도를 재차 확인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다케조에가 일시적으로 개화파에게 등을 돌리는 등의 행동을 보인 바 있으므로, 일종의 불신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에 홍영식이 함께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이들을 맞이한 다케조에의 태도이다. 그는 “왜 궁(창덕궁)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왔는가”라는 다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김옥균 등 일행은 곧 이곳을 떠나 9시 20분에서 30분 사이 창덕궁에 들어간 듯하다.
◀ 아직도 풍문여고에는 안동별궁 때의 담장 높이 그대로 개조된 담장이 남아 있다. <ⓒ최은진>
이곳에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박영효의 역할에 대해서이다. 정변 당시 박영효의 집은 이곳 교동에 자리하였다. 박영효는 부마였으므로 그의 집은 ‘궁’으로 불리고 있었는데(왕실 관련 인물이 정궁 바깥에 살 경우 그 집에 ‘궁’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집터는 2,300여평이나 될 정도였고 이곳 외에도 여러 곳에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신정변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의 집이나 현재의 압구정 근처에 있었던 그의 정자에서 정변 모의가 자주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부인 영혜옹주의 묘당이 자리한 경기도 양주에서도 일본인 자객들이나 행동대원들이 모여 모의훈련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구성원들은 ‘충의계(忠義契)’ 등 기존의 단체를 활용하여 모집되었을 것이다. 박영효는 그의 집 2,700여평을 판매하여 얻은 당시 돈 5,000원을 정변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홍영식 역시 본인의 정자를 판매하여 자금을 채우기도 하였는데, 김옥균은 자금지원을 전혀 하지 못한 대신 행랑을 새로 지어 자객들을 불러 모았던 듯하다.
◀ 천도교 대교당. 정변 때 일본 공사관이 있었다. <ⓒ최은진>
갑신정변 ‘3일천하’의 길을 따라【2】
백선례(근대사분과)
1-2. 갑신정변 첫째 날
: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 창덕궁부터
점심을 먹고 드디어 정변의 주요 사건들이 일어났던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창덕궁 이전 코스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소요했지만 어쩌면 본격적인 답사의 시작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른다.
김옥균 등은 이러한 직선 코스를 따라 움직였다. <ⓒ백선례>
표를 끊고 입장하기 전 박은숙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금호문(金虎門)을 먼저 살펴보았다. 정변 당시 김옥균 등은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아닌 이 문으로 들어갔다 하는데, 돈화문은 9시 반 이후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금호문으로 들어간 그들은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進善門)과 숙장문(肅章門)까지의 직선 코스를 통과하였다 한다.
◀숙장문에서 찍은 사진. 앞쪽의 문의 진선문, 진선문 사이로 보이는 작은 문이 금호문이다. 진선문을 지나 오른편엔 인정문(仁政門)과 인정전(仁政殿)이 자리 잡고 있는데, 김옥균 등은 인정전 앞에 폭발물을 묻어두고 30분 후에 폭파하도록 지시한 후 숙장문을 지나 협양문(協陽門)을 통해 ‘편전’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협양문은 희정당(熙政堂) 앞에 있는 문이었다.
협양문에서는 당시 이미 개화당에 포섭되어 있던 윤경완(혹은 윤계완이라고도 함)이 전영 50명을 데리고 호위를 서고 있었다. 평상시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주로 낮에 자고 밤에 정사를 보았는데 정변 당일인 10월 17일에는 김옥균이 고종에게 밀린 문서를 모두 바쳐 그날따라 정무에 지친 고종이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미리 조치를 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편전’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희정당은 왕의 침전이며, 희정당 바로 뒤에 자리 잡은 대조전(大造殿)은 왕비의 침전을 말한다. 기록상으로는 협양문까지만 기록되어 있고 편전이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아 어느 쪽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한다.
희정당의 경우 협양문을 지나 바로라는 점, 왕의 침전이면서 집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편전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조전도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정변 기록에 잠자는 고종 옆에 민비가 함께 있었다는 점, 그리고 ‘편전’이라고 지칭했다는 점에서이다. 하지만 당시 엄격한 내외를 따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김옥균 등이 ‘왕비’의 침전까지 들어갔다는 점은 역시 미덥지 못하다. 『윤치호 일기』를 보면 고종이 윤치호를 부를 때마다 민비가 고종의 곁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의 침전인 희정당에 민비가 같이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도 하다.
희정당 앞에서 박은숙 선생님께서 제기한 ‘편전’이 ‘희정당’인가 ‘대조전’인가라는 질문에는 이와 같은 활발한 논의가 오갔다. 물론 당장에 어떤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라는 학문이 가지는 매력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과거의 어떠한 사건도 빈틈없이 완벽한 자료를 남기거나, 완벽히 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역사는 항상 불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편전에서 고종을 깨워 변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린 김옥균 등은 고종과 민비를 모시고 요금문으로 나왔다. 통영전 쪽에서 궁녀 고대수가 터뜨린 폭탄에 고종과 민비는 변란이 있다는 김옥균의 말을 믿게 되었는데, 이 궁녀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덩치도 있고 박색이라 다른 궁녀보다 말 걸기가 수월해 김옥균이 섭외했다고 한다.
변란이 있음을 듣고 자다 깬 고종이 큰 반항 없이 김옥균을 따라나선 것은 그 전에 어느 정도의 양해가 이루어졌던 듯하다. 여기서 잠깐 퀴즈, 요금문으로 가던 도중 고종이 일본 공사관에 쓴 ‘일사래위(日使來衛)’ 조서는 무엇으로 썼을까? 경황없이 나와 붓이나 벼루 같은 걸 챙겼을 리 만무한데 말이다. 정답은 연필! 답사 도중에 실제로 이 퀴즈를 내셨던 임경석 선생님께선 요즘 연필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한다. (선생님의 연필예찬은 뒷풀이에서도 계속되었다~)
◀ 요금문 <ⓒ백선례>
요금문으로 나간 고종과 김옥균 등은 경우궁의 후문으로 경우궁에 들어갔고, 이후 일본 군사가 와서 수위하였다. 여기서 박은숙 선생님께서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셨다. 그들은 왜 경우궁으로 갔을까? 『갑신일록』에는 적은 군사로 수비하기 위해 경우궁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일까? 기록상 경우궁의 규모가 작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경우궁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실제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수비를 위해서 이동했다면 규모의 문제도 있지만, 경우궁의 지형지세를 이용하려 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고 한다.
2. 갑신정변 둘째날! : 1884년 10월 18일(음 12월 5일)
경우궁으로 이동 후 김옥균 등은 고종 알현을 위해 찾아온 한규직, 윤태준, 이조연, 민영목 등을 모두 죽였는데, 심상훈만은 죽이지 않았다. 그는 임오군란 때 민비에게 궐내 소식을 전해주었던 사람이다. 고종이 처소를 경우궁으로 옮긴 후 민비가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요청했을 때는 누군가 상황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 누군가는 심상훈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물론 눈치 빠른 민비가 정황을 짐작하고 환궁을 요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심상훈을 죽이지 않았던 것은 갑신정변 주도자들에겐 정변 실패 후 두고두고 후회로 남았을 듯하다.
새벽 4시경에는 김옥균 등은 고종에 건의하여 각국 공사에 위문단을 파견하였다. 그 후 그들은 바로 인사와 내각 조직에 돌입하였다. 영의정에 이재원, 우의정에 홍영식, 좌우영사에 박영효, 서광범을 임명되었다. 이들은 새벽에 바로 조보(朝報)를 돌렸다.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경우 새벽 6시에 내각 인사를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인사·내각 구성을 보면 좌우영군을 장악하는 특별한 조치가 보이지 않는다. 당시 전후영군은 일본식 훈련을 받은 군대였고, 좌우영군은 청국식 훈련을 받은 군대로, 개화당에게 경계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음에도 좌우영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 또한 갑신정변 주도세력들이 놓친 또 하나의 실패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계동궁터. 현재는 현대사옥 앞에 이러한 표식만 남아있다. <ⓒ백선례>
오전 10시에 고종은 처소를 경우궁 남쪽, 이재원의 집인 계동궁으로 옮겼다. 이후에도 비의 창덕궁 환궁 주장은 계속되었다. 오후에는 고종이 일본 공사를 찾아가 환궁을 요청하니 일본 공사가 이를 수락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후 5시경 고종과 민비는 창덕궁 관물헌으로 환궁하였다. 현재 창덕궁은 제한적 개방이 이루어지고 있어 원하는 대로 다 볼 수 없다. 따라서 희정당 옆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관물헌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고, 다만 대강의 위치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관물헌의 경우 개방은 물론이고 안내 책자에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문 뒤로 왼쪽쯤에 관물헌이 있지 않을까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백선례>
3. 갑신정변 셋째날! : 1884년 10월 19일(양 12월 5일)
이날 10시경에 깁옥균 등은 정령을 작성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오후 3시에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민비는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즉시 도망쳤고 이어 조대비도 도망쳤다. 그러나 북산으로 도망치던 고종만은 7,8차례 붙잡혀 결국 연경당에 잡혀 있었다고 한다. 임오군란 때 이미 암살 고비를 넘긴 민비의 경우 위기 상황에서의 행동이 좀 더 능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도망치던 고종의 모습과 그러한 고종을 몇 번이고 다시 붙잡아두는 김옥균 등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지? 조금은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었을 그 모습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연경당 도주에 실패한 고종은 이곳에 잠시 유폐되어 있었다. <ⓒ백선례>
고종을 연경당에 모셔둔 상황에서 김옥균 등은 왕을 어디로 모실 것인지에 대해 논의했다. 인천으로 모시고 가자는 안에 대해서는 고종이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정변이 청군에게 진압되고 이후의 결말은 알다시피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남아서 고종을 호위했던 홍영식은 그 날 피살되어 후에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흔히 3일 천하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총 46여 시간’에 불과한 짧은 거사였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김옥균 등이 찾아갔을 때 별다른 저항도 없이 따라나서 그들을 묵인하는 듯했던 고종은 왜 다시 청측으로 기울어 청군의 지원을 요청했을까? 이에 대해서도 앞서의 질문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그 중에도 고종은 늘 결정적인 순간마다 마지막까지 여러 장의 카드를 쥐고 선택했던 사람이었다는 의견이 있었다. 즉, 처음에는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았는데 내각 구성과 정령 반포 등 정변의 진행 과정에서 점차 자신이 배제되고, 민심이 이반하자 다시 청나라 쪽으로 맘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긴박했던 갑신정변 당시의 상황 그대로, 당시의 사건 순서를 거의 그대로 밟아가며 진행된 이번 답사를 통해 갑신정변은 교과서나 전공 서적 속에 활자체로 딱딱하게 기록된 사건이 아닌 바로 눈앞에서 실재했던 사건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나 역시 답사기를 쓰면서 갑신정변을 또 다시 활자 안에 묶어버린 셈이 되었지만, 적어도 답사 현장에서의 갑신정변은 더 이상 외워야할 역사적 사건이 아닌 흥미진진한 옛날이야기와 같았던 것이다.(그런 느낌을 이 글에서는 반의반도 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전체 답사 코스를 안내해주시고 설명해주신 박은숙 선생님의 갑신정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답사 내용을 풍부하게 했던 것은 물론이고 간간이 박은숙 선생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적극적으로 다양한 의견을 내 주시던 여러 선생님들 덕분에 답사의 재미, 그리고 역사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자칫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사실들을 지나치지 않고 문제를 제기하며, 그렇게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듣고 본 것만으로도 그 의의가 작지 않은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