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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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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1883-1926]
훈격 : 독립장 / 서훈년도 : 1963년
공적개요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항일무장투쟁의 별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후 횡성에서 의병 조직
○민긍호 의진 등과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항전
○만주 망명 후 독립군 참모로 활동하다 순국
2013년 2월의 독립운동가 한상렬(韓相烈)선생 (1876. 4. 2~1926. 9. 19)
◈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항일무장투쟁의 별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한상렬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후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 민긍호 의진 등과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였으며, 만주 망명 후 독립군 참모로 보급품 확보 등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 순국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 되어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밀사를 파견한 광무황제의 책임을 물어 강제로 퇴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1907년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본격화되자 제1연대 1대대 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결로 항거하였으며, 이는 시위대 대원들에 이어 지방 진위대의 봉기로 확산되었고,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되어 후기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원주진위대가 가장 먼저 봉기하였고 그 중심에 민긍호 의병장이 있었다. 한상열 선생은 고향인 강원도 횡성에서 거의하여 지역민을 중심으로 의진을 형성하였다. 선생은 민긍호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약 2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의병진압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자 선생은 근거지인 횡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인 홍천, 원주산간지역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특별편성부대의 배치와 의병에 대한 정찰이 강화되자 선생은 민긍호 의병장과 함께 충주성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일본군의 탄압이 본격화되고, 민긍호 의병장마저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하자 의병활동은 급격히 위축되고 말았다.
이에 만주지역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선생은 이범윤, 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에서 활동하였고, 1915년 창의소(彰義所)를 조직하고 중대장이 되어 경흥지역 일본군 습격 등을 계획하였다. 이후 홍범도가 조직한 대한독립군에 들어가 보급품 확보 및 선전활동, 독립군 소모활동에 투입되었고, 무장단체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여 대한군정부에서는 방화대(放火隊) 제2부장을 역임하는 등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본격적인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들이 다시 조직되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김좌진 장군을 보좌하였다. 선생은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 내 조직인 동우회에서 선전계, 군자금모금계장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에서 의용군이 생길 때 참여하였다.
선생은 의병장으로 강원도 횡성, 홍천 일대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주지역에서는 주로 보급품 확보, 선전활동, 군자금 모집 등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고, 상황에 따라 재편되는 독립군 조직 에도 꾸준히 참여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독립군 활동은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세력의 흉탄에 순국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3.2월의 독립운동가 한상렬 선생
-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항일무장투쟁의 별 -
韓相烈(1876.4.2.~1926.9.19.)
가족을 가슴에 묻은 의병대장,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별이 되다.
한상렬 의병장은 淸州韓氏 節度公派 32세손으로 일명 相悅 字는 文極이다.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개항되던 1876년에 강원도 橫城郡 隅川面 下水南里에서 韓東洙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일어난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이후 만주,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 일본의 침략과 군대해산
190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의도를 나타낸 일본과 한반도로 진출하고자 한 러시아의 갈등은 급기야 전쟁으로 치닫게 되어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전쟁은 러시아가 자랑하던 발틱함대가 일본 해군에 참패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일본으로 기우러졌으며, 더욱이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러시아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가 힘들었다. 이때 미국이 중재를 서 러시아와 일본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침탈을 가속화시켜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 화폐, 황무지개간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의 이익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탈에 대해 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던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도움을 주기로 했던 러시아의 태도변화로 인해 회의장에 참석도 하지 못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이준 선생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의 간섭으로 병력수가 계속 줄어들어 전국적으로 1만 명이 되지 않았던 군대도 새롭게 개혁한다는 미명아래 해산시켰다. 그리하여 서울에 설치되었던 시위대와 지방에 설치되었던 진위대는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해산되었다. 이는 대한제국을 보호국의 차원을 넘어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군대해산 등은 일본의 침략성을 다시금 보여주는 것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 도화선은 군대해산 명령에 따를 수 없었던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의 자결이었다. 그는 “군인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가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애석함이 없다”는 유서를 남겼고 이를 본 시위1연대 1대대원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시위대 병사들은 용맹하게 싸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탄약이 떨어지고, 시위대 봉기에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하지만 시위대의 봉기 소식이 각지로 전파되면서 지방에 있던 진위대 군인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농민들과 함께 의병봉기를 하였다.
지방에서는 강원도 원주에 설치되었던 원주진위대가 가장 먼저 봉기하였는데, 원주진위대 특무정교로 있던 민긍호 의병장이 이끌었다. 그는 강원도 일대에서 가장 큰 연합의병부대를 구성하였으며, 의병운동을 의병전쟁으로 발전하게 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횡성에서 봉기한 한상렬 의병장도 민긍호 의병장의 연합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횡성, 홍천 등의 강원도뿐만 아니라 멀리 충청도지역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2. 원주진위대 해산과 의병봉기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가 군대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는 소식은 그날 오후 원주진위대 군인들에게도 전해졌다. 원주진위대 병사들은 “시위대의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화가 우리에게도 미칠 것이니 어찌 앉아서 죽을 것이냐”면서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대대장 洪裕馨 참령은 부하들을 훈육하며 진정시키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병사들의 반항심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자 홍유형은 8월 2일 소집령을 핑계로 임지를 버리고 서울로 출발하였으나 8월 3일 지평에서 100여 명의 인민들에게 붙잡혀 원주진위대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구받았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홍유형은 여주에 있던 자신의 본집으로 피신해 들어갔다가 상황이 정리된 후 상경해 버렸다.
대대장이 없는 상황에서 해산날인 8월 5일이 밝아왔다. 이미 시위대 소식이후 의병봉기를 결심하였던 민긍호, 김덕제 등은 당일 오후 2시 비상나팔을 불어 장교와 병사들을 집결시키고 의병봉기를 선언하였다. 이 때 의병봉기에 반대하다 체포된 正尉 權泰熙, 副尉 權泰榮·張世鎭·白南肅·李玄珪, 參尉 李顯用과 恩賜金을 받고 의병에 불참한 參校 함영순과 兵卒 김동욱·이만손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병력이 의병봉기에 참여하였다. 그 참여인원은 일본측 파악에 의하면 258명이었고, 귀순자명부를 통해 확인하면 최소 參校 이상의 간부 26명, 병사 163명 총 189명에서 최대 고성분견대 파견 38명과 원주이외의 사졸 43명을 포함하여 270명 정도였다. 여기에는 8월 6일 “本隊 사졸이 軍隊解散의 일에 연유하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우리도 死生을 같이 해야 한다”고 하며 여주분견대장 백남숙의 만류를 뿌리치고 原州로 직행한 여주분견대원들도 포함되어 있는 숫자이다.
그런데 ‘이곳의 한국병 258명은 暴民과 함께 일본인을 덮쳐 약탈을 했다.’, ‘사졸과 시민이 합세하여 무기고를 타파하고’라는 기록에서 보이듯이 의병봉기에는 원주진위대 군인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원주 장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에서 의병봉기에 호응하는 자들이 대거 의병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출범한 의병부대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충주수비대 니노미야(二宮)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정찰대와 교전을 한 의병이 300 여명이었던 것으로 보아 의병봉기 단계에서의 의병규모는 최소 300 여명은 되었다. 이후 격문을 발하여 원주를 비롯한 횡성, 영월 등 각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계속적으로 의병에 가담하는 자가 늘어나 의병부대의 규모는 크게 증가하였다.
한편, 원주진위대 해산군인과 원주지역민 등으로 의병부대의 진용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민긍호를 비롯한 의병지휘부는 원주진위대의 무기고를 열어 소총 1,600여 정과 탄환 4만 여발을 꺼내어 부대원들을 무장시켰다. 그리고 부대를 4개로 편성하여 각 부대의 지휘관에 민긍호, 김덕제, 손재규, 한갑복이 취임하였다. 또한 각지에서 온 의병부대에도 무기를 나눠주었다. 이는 의병봉기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일어났지만,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발한 원주진위대 해산군인과 지역민들이 연합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전투수행은 원주진위대 해산군인들이 주로 수행하였다. 이들은 봉기 직후 원주읍 우편취급소를 시작으로 原州郡衙, 경찰분견소 등 원주에 설치되었던 주요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또한 원주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에 대한 공격도 감행하여 그들의 가옥을 파괴하고 상가의 물건 등을 압수하여 군수물자로 충당하였다. 의병의 공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財政顧問分署員 1인, 警務顧問分遣所補助員 5인·女 1인, 郵便取扱所員 3인·女 2인, 商人 2인 등 주로 원주에 있던 관리와 상인으로 일본의 침략정책을 지역에서 시행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의병의 공격을 피해 일본군 충주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충주로 피신하고자 원주 동남쪽의 南山으로 도피하였다. 의병들은 이들을 쫓아 원주 남산을 점령하고 계속해서 추격하다가 정찰차 막 원주로 들어가려는 니노미야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충주수비대의 정찰대와 조우하였다. 의병은 약 2시간의 교전 끝에 일본군 몇 명을 사살하고 탄약과 속사포를 노획하였다. 일본군은 원주 서방 고지에 피난해 있던 일본거류민, 경무관 등을 데리고 충주로 패퇴하였다.
일본군과 물리친 의병은 원주 읍내에 주둔하지 않고 인근 산속에 숙영지를 마련하였다. 이는 읍내에서 교전하다 원주 읍민들의 피해를 걱정한 것과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산속진지가 훨씬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의병부대 전술이 이전까지와는 다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의병부대에는 근대식 군대교육을 받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규군 출신의 해산군인들이 참여하면서 전술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객관적인 전력이 일본군에 한참 못 미치는 상황에서 을미의병 때와 같이 대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해서 활동하는 것은 전술상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의병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맞는 전술을 구사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강원도관찰사 황철의 명을 받고 민긍호 의병장을 면담하러 왔던 횡성군수 심흥택과 민긍호 의병장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민긍호 의병장이 횡성군수 심흥택에게 “自己들은 日本軍隊와 對敵하기 어려운 일임은 물론이나 對敵할 수 없을 때는 四散하고 또 틈을 보아 集合하여 暴動하면 如何히 용맹한 일본군대라 할지라도 討伐이 困難할 것이라 생각한다”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의병들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 즉, 소규모 게릴라 부대로 활동하다가 의병장의 명령이 있거나 전술상 필요에 따라 연합하여 전투를 전개하고 다시 흩어져 개별부대로 활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술상의 변화로 의병들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활동하기 좋은 산악지형으로 이동하여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의병부대 상호간 연락을 취할 수 있으면서 군수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는 것도 고려되었다. 즉, 의병부대의 근거지는 산악지형이면서 군수물자를 지원받기 용이하고 의병부대 상호 연락이 가능한 곳에 형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횡성지역은 아주 훌륭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횡성에서 봉기한 한상렬 의병장, 오정묵 의병장 등과 민긍호를 비롯한 원주진위대 중심의 의병부대는 횡성지역에서 연합하여 활동하기에 용의하였던 것이다.
3. 의병장 한상열과 의병전쟁
원주진위대와 지역주민들의 의병봉기 소식은 횡성 등 원주지역 주변으로 퍼져나갔으며, 이에 호응하듯 지역의 포군을 이끌고 의병봉기를 하였다. 횡성지역에서는 수순교 및 포군계장이었던 吳正默, 退吏 한상렬 등이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어 거의토적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포군 수 백 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바로 의병부대의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횡성지역으로 들어온 민긍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한상렬 의병장은 민긍호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약 2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도 전개하였다.
한상렬 의병장을 비롯한 횡성지역 의병들은 봉기 직후인 8월 7일 군량미, 짚신 등을 요구하며 횡성군수 심흥택을 체포하였다. 횡성군수가 그들에게 군량미와 짚신 등의 군수물품을 지급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被捉되었다가 바로 풀려난 것으로 보아 일정정도 의병들의 요구가 들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이를 통해 한상렬 의병장 등은 의병활동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원주에서 봉기했던 민긍호 의병장이 8월 8일 횡성방면으로 들어와 한상렬 의병장, 오정묵 의병장 등과 연합의병을 구성하였으며, 김덕제 의병장은 평창, 강릉 방향으로 넘어가 영동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8월 5일 원주진위대가 봉기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의병봉기가 각지로 확산되기 전에 재빨리 토벌하고자 8월 6일 서울주둔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시모바야시(下林)소좌를 지휘관으로 한 보병 2중대, 기관총 4문, 공병 1소대로 이루어진 1지대를 편성하였다. 시모바야시(下林)지대는 7일 서울을 출발하여 二水頭, 砥平을 거쳐 10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원주에 주둔한 시모바야시 지대는 원주지역에서 의병을 찾을 수 없자 주변지역에 대한 정찰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토(佐藤)대위는 11중대 1소대를 이끌고 평창방면으로, 스에야스(末安)중위는 1소대를 이끌고 제천방면으로 정찰을 나갔다. 그런데 제천방면으로 나갔던 스에야스 소대가 15일 약 350명의 의병들과 약 4시간 동안 교전하다가 충주로 퇴각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전투는 원주지역으로 내려온 일본군 특별편성부대와 의병과의 첫 전투였으며,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승전을 올린 전투였다. 당시 이 전투를 이끌었던 의병부대는 민긍호 의병부대였는데, 한상열 의병장도 참여하고 있었다. 한상열 의병장은 횡성에서 민긍호 의병장과 연합의병을 구성한 이후 충주성 공략을 위해 민긍호 의병장과 함께 제천, 충주 일대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의병진압을 위해 파견하였던 시모바야시 지대의 행동이 여의치 않고, 의병들이 충주, 제천 일대에서 크게 창궐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응징적 토벌을 위해 추가로 의병진압부대를 편성하였다. 보병 제51연대 아다치(足達)中佐에게 동 연대 제2대대 (2중대 결)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 기관총 4문, 기병 제17연대 제3중대의 1소대, 공병 1소대를 주어 지대를 편성하였던 것이다. 이 아다치 지대는 18일 서울을 출발하여 철도로 조치원까지 이동한 다음 충주로 들어가 주둔하였는데, 충주수비대 및 시모바야시 지대를 지휘하였고, 필요에 따라서는 강릉파견대까지도 지휘하였다.
즉 강원도, 충청도 일대에서 전개되고 있던 의병전쟁을 진압하는 최일선 일본군 부대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51연대에서 사카이자와(境澤)大尉가 인솔하는 1소대를 춘천수비대에 증가하여 그 주력을 洪川 부근으로 진출시켰다. 이로써 원주, 충주, 춘천방면으로 진출한 일본군 진압부대의 배치가 마무리되었다.
일본군 특별편성부대의 배치와 의병에 대한 정찰이 강화되고 있던 8월 중순 한상열 의병장은 민긍호 의병장과 함께 충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8월 15일 스에야스 소대를 격파한 후 사기가 드높았던 의병들은 8월 22일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임시 주둔지인 제천을 출발하였다. 제천을 출발은 의병은 부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제천·청풍 가도를, 주력은 제천·주포 가도를 잡아 이동하였다. 그런데 의병부대가 제천에서 충주로 진격하던 그 시점에 충주로 들어왔던 일본군 아다치(足達)지대도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충주에서 제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자칫 중간에서 전투가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의병은 첩보활동을 통해 일본군 아다치 지대의 선발대를 피해 은밀히 충주까지 이동하였다. 23일 충주에 도착한 의병은 오전 11시 30분경 일제히 일본군 충주수비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힌 후 횡성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이처럼 의병봉기 초기인 8월에는 의병들이 일본군에 타격을 입히면서 효과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였고, 일본군은 의병들의 소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우와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부대배치가 완료되고 밀정, 첩보부대의 첩보활동이 쌓이면서 본격적인 의병진압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그 때가 바로 9월이었으며, 이때부터 의병근거지 일대를 중심으로 의병들과 일본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의병들은 봉기 직후부터 의병운동을 장기적으로 이끌기 위해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그 근거지로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활동하기 좋은 산악지형이면서 의병부대 상호간 연락을 취하기 좋고 군수물자를 지원받기 용이한 곳을 선택하였다. 그런 장소로 횡성은 최적의 장소였다. 특히, 봉복사는 덕고산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으면서 앞에는 성골계곡이 뒤로는 덕고산(현 태기산)과 봉복산이 감싸고 있어 지형적으로 부대를 주둔하기 용이한 곳이었다. 더욱이 봉복사 뒤로는 태기산성이 있어 전술운용에 있어 다른 곳보다 유리한 곳이었다. 이런 의병 근거지 마련은 여러 의병장들의 연합할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횡성에서 봉기하였던 한상열 의병장과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횡성으로 들어온 민긍호 의병장이 만남이 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의 의병진압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자 한상열 의병장도 근거지인 횡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인 홍천, 원주산간지역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9월 3일 한상열 의병장을 비롯한 횡성, 원주, 인제 등지에서 모여든 500~600명의 연합의병부대는 홍천군 남 10리 許城 앞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홍천읍 주둔 일본군 20여 명은 의병부대를 공격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참패하였다. 이에 춘천 주둔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하여 지원군 40여 명과 합세하여 다시 의병부대를 기습하였다. 이번에는 의병이 일본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동남쪽으로 후퇴하였고, 일본군은 城前村 100여 호를 불살라 없애고 홍천읍으로 돌아왔다.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한 의병들은 재정비한 다음 7일 새벽 부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홍천읍 북산을, 한 부대는 남산을 점거하여 4~5시간을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횡성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한편,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시모바야시 지대장은 ‘원주 부근의 폭도들은 원래 횡성군 갑천면 갑천리 부근 및 그 동방 약 2리에 있는 봉복사를 근거지로 하여 부근 마을에서 물자를 약탈하고 冬營준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사토(佐藤)대위에게 보병 2소대와 기관총 2문을 주면서 의병토벌을 명령하였다. 이 부대는 22일 횡성에 도착한 후 23일 오후 1시 갑천리 및 봉복사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약 350명을 기습 공격하였다. 당시 봉복사에는 민긍호 의병장, 한상열 의병장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의병 50명이 전사하였고, 의병부대는 東方山地(태기산성 방향-필자주)로 후퇴하였고 봉복사는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한상열 의병장은 봉복사라는 훌륭한 근거지를 상실하였지만 원주, 횡성, 홍천 등지를 이동하면서 의병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이인영 의병장, 심상희 의병장, 민긍호 의병장, 韓尹復 의병장 등과 연합하여 대진을 형성해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횡성과 지평 사이에 있는 毛古谷에 주둔하고 그 근방 고지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여 초병을 배치해 엄중히 경계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때로는 원주, 충주 일대를 공격하면서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주둔한 의병은 1천명이 넘는 大陣이었기에 일본군도 이들의 활동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당시 지평군 상동면 일대에 의병 2천명의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가 일본군에 입수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서울에서 파견된 토벌대가 11월 6일 원주를 출발하여 지평 상동면으로 이동하였다. 또 이들 의병을 포위 공격하기 위해 서울에서 일개 중대가 파견되어 협공을 하고자 하였다. 원주수비대에서는 토벌대에 의하여 포위 공격을 받고 도주할 要路를 확보하기 위해 原州郡 地向谷面(현 원주시 지정면) 안창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7일 안창에 주둔한 원주수비대를 횡성군 고모곡면으로 이동하여 그 일대를 수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원주수비대가 횡성으로 이동하는 사이 의병과 토벌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의병이 원주군 부론면과 호매곡면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춘천방면에서도 고모곡에 모인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춘천수비대 보병 1개 소대와 기병 6기로 편성한 토벌대를 편성하여 출병하였다. 7일 고모곡면에 도착하였는데 의병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지평군 龍頭로 나아가다가 서울에서 파견된 토벌대와 만나 함께 상동에 주도하고 있던 의병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였다. 그런데 同地에 集合하였던 의병이 이미 일본군이올 것을 감지하고 삼산리 방향으로 후퇴한 이후였다. 삼산에 주둔한 의병은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장 사카베(坂部)少佐가 이끄는 사카베 지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이후 한상열 의병장 등은 독립적으로 활동하다가 필요에 따라 연합하는 등 일본군의 눈을 피해 활동였다. 그러다가 12월 12일 밀정에 의해 의병들의 행적이 알려졌다. 한상열 의병장은 한갑복 의병장, 윤성옥 의병장, 민긍호 의병장 등과 더불어 銅坪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군에게 알져진 것이었다. 일본군 토벌대는 빠르게 이동하여 13일 정오 횡성을 출발하여 오후 5시 동평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동평을 떠나 각 부대별로 이동하였는데, 민긍호 의병장은 홍천 서석면으로, 나머지 부대는 柳洞과 堂峴으로 이동하였다. 토벌대는 당현에 있는 의병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이동하여 기습공격을 하였다. 이 전투는 약 3시간 동안 이뤄졌는데, 의병은 한갑복 의병장을 비롯하여 약 130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한갑복 의병장의 전사 이후 횡성지역에서 활동하는 의병장들은 수면 밑으로 내려가 활동하였다. 한상열 의병장도 前軍大將 李昌五 中軍大將 金和春 後軍大將 韓相五 등 200 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은밀하게 횡성 동북부에서 홍천일대에 걸쳐 의병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군 토벌대와 수차례 전투를 수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투 외적으로 의병부대의 전투력 확보에도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대에서 의병소모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으며, 이런 그의 활동경력은 이후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민긍호 의병장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살해당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면서 한상열 의병장의 활동이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한상열 의병장은 3월 19일 일본군 토벌대와 홍천군 서석면 청양리에서 교전하여 물리쳤고, 재차 추격하는 일본군을 횡성군 속일리에 서 이하영 등 약 30명의 의병과 협력하여 강경히 저항하였다고 한다. 3월 22일 오전 洪川郡 積面(洪川 東方 約 三里) 부근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치열한 교전을 하였으며, 24일에는 동평 부근에서, 25일은 馬岩 附近에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다 4월 2일에는 홍천군 月雲里 서북에 있는 福洞에서 일본군 횡성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항하였다. 그러자 횡성수비대는 한상렬 의병장의 부인을 포로로 구금시켜 그를 더욱 분노하게 하여 金顯國, 琴基哲과 협력하여 4월 20일 일본군 횡성수비대를 공격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청일면 銅坪里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한상열 의병장은 그 병력이 크게 줄어들어 20명 내외의 의병을 이끌었지만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귀순자에 대한 체포도 그 한가지였다. 그것에 대한 기록을 보면, 5월 23일 오전 3시경 한상열 의병장은 14명의 부하를 이끌고 횡성군 甲川面 銅坪 居住 歸順者 尹命吉, 같은 곳에 거주하고 전에 한상열 의병장의 부하였던 黃千浦 집에 와서 ‘너희들은 무슨 理由로 歸順했는가’를 責問하고 兩人을 捕縛하여 먼저 尹의 左手首와 左足脛에 各各 一個處의 銃貫傷을 입히고 이어 黃의 頭部를 亂打하고 약간의 頭髮을 拔去하고 右 兩人이 携帶하고 있던 免罪文憑을 掠奪한 然後에 目下 橫城 邑內에 避難 中인 朴奉九 朴來文의 空家를 破壞하고 睛日面 兵之坊 方面으로 逃走하였는데 그 行方은 모른다고 한다.
이렇듯 한상열 의병장은 강원도 횡성, 홍천 일대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강원도 일대의 의병들이 진압되어 가는 상황에서 만주,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4. 만주지역에서 무장독립운동
한상열이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908년 후반쯤에 만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의병운동이 1908년 3월 민긍호의병장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살해당한 이후 크게 약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상열 의병장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의병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들어가 재기를 시도하였다. 당시 만주, 연해주 지역은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지로 발돋움하고 있는 곳이었다. 의병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유인석 의병장도 1908년 연해주지역으로 망명을 하였으며, 간도관리사를 역임한 이범윤도 이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한상열은 공교회에 가입하여 공교회 포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범윤, 유인석 등이 조직한 聲明會에서 활동하고, 성명회 해체 이후 공교회에 가입한 安鍾奭과 같은 공교회 포교원 閔培植, 이범윤의 부하인 李起林, 張興敬, 金永澤 등과 공모하여 1915년 彰義所를 조직하였다. 한상열은 이 창의소에서 중대장의 직임을 맡아 경흥지역 일본군 습격 등을 계획한다. 이후부터 한상열은 본격적으로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한상열은 창의소를 조직하여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안종석이 체포되고 창의소 조직이 와해되자 홍범도가 조직한 대한독립군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보급품의 확보나 선전활동, 독립군소모활동에 투입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휘하에 있을 때인 1919년 11월 한상열은 결사대 120~170명을 이끌고 局子街에 7리 떨어진 지점 연길현 일면 溝杜 이면 溝에 도착하여 국가자에서 粗布 18필을 구입하고 동복을 새로 만들고 옷은 조선식 周衣(두루마기)로 만들어 보급하였다. 또한 1920년에는 왕청현 나자구에서 홍범도, 전이국 등이 조직한 도독부의 경호국원으로 선임되어 무장항일활동을 이어 갔다.
이후에도 한상열은 무장단체에서 계속적으로 활동하는데, 대한군정부에서는 放火隊 제2부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창의소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된 임무는 보금품의 확보, 무기의 확보, 선전활동, 독립군 소모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그의 활약상을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군의 무기를 구입과정이 있다. 당시 만주지역 독립군들은 러시아를 통해 신식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있었다. 한상열은 의병장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무기구입에 투입되었다. 한상열은 1920년 6월 무기구입을 목적으로 入浦하였다. 그는 김영선이라는 인물이 구입한 무기를 안전하게 만주지역의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였던 것이다. 김영선은 러시아 장교 티에츠크에게 군총 300정, 탄약 수 만발, 폭탄 1천6백개를 순조롭게 구입하였다. 그런데 무기구입비용을 자신의 딸 결혼비용 등 사적으로 사용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러시아 장교인 티에츠크는 무기대금을 받고자 김영선을 압박하였고 이를 해결할 수 없었던 김영선은 잠적을 하였다. 한편 한상열과 함께 무기 구입을 위해 온 秦學新(擅山)은 심복이었으며 동지였던 李光錄(李東煥의 장남)의 배신으로 쫓기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한상열은 상황이 어렵게 되자 일본헌병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중국령으로 잠입하였다.
한편, 만주지역 독립군 단체들이 다시 조직되고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상열은 김좌진 장군을 보좌하였다. 그는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成東武官學校내 조직인 同友會에서 선전계, 군자금모금계장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한상열은 中東線 대표로 북만주에서 의용군이 생길 때 참여하였다. 이 의용군은 간도참변 당시 조직되었던 무장단체 의군부를 중심으로 각지의 유력한 인사들이 다시금 모여 의용군을 새롭게 편성한 것이었다.
한상열은 의병장으로 강원도 횡성, 홍천 일대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만주지역에서는 주로 보급품 확보, 선전활동, 군자금 모집 등 중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상황에 따라 재편되는 독립군 조직내에서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었다.
그의 독립군 활동은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의 공산당원의 흉탄에 순국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자료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
폭도에 관한 편책
조선폭도토벌지
不逞團關係雜件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8·9·10·11·12
오영교・왕현종・심철기 엮음,『원주독립운동사자료집』I-의병관련 정부자료-, 혜안, 2004.
장세윤,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역사공간, 2007.
횡성문화원, 횡성민족운동사, 2003.
첫댓글 글씨체가 바뀌어서 보기가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