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걸 은사님 추모 글
글쓴이: 운보천방중학교 제자 조정래
매화 피더니 산수유 피고 이어서 목련 피고 다시 벚꽃 흐드러지게 피더니 지금은 진달래 피고 곧이어 산벚꽃 피고 열정이 넘쳐 담을 타넘는 장미가 피는 유월이 올 것이다.
유월 전에는 도솔레파 음정으로 목에 피가 솟도록 밤새우는 쪽박새가 오월을 노래하는데… 운악산 북벽에서 필자는 무려 20년 넘게 가슴이 멍멍하도록 인생 중중한 산속 노숙을 해 왔지만...
"인생 중중"이라는 단어를 나에게 처음으로 가르쳐 주신 분은 중학교 은사이신 이순걸 선생님이시다.
오월 15일은 세종대왕 생신날이기도 하지만 ‘스승의 날’이기도 하다. 오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은 세종대왕이 대한민국의 학문의 스승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럼 운보천방중학교의 스승은 어느 분이실까!
모든 스승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우러러 보고 우리들도 선생님처럼 닮고 싶은 학문적 지향성을 누구나 다 갖고 살겠지만... 5천 년 궁핍에서 박통의 산업경제 폭발로 졸지에 풍족한 삶을 살게 된 요즈음은 솔직히 동창회 모임에 모여서 자기 아파트 얼마짜리라고 돈 자랑만 넘치지 은사님 이야기는 전무한 세월이다.
필자는 쑥맥이보다 한질 떨어지는 쪼데기 수준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순걸 선생님은 한마디로 퇴계 후손답게 담담하신 참 양반스승이셨다. 항상 담담한 웃음으로 제자들을 대하셨고 회초리 한번 들지 않고 제자들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신 분이다.
운보천방중학교도 회초리가 심한 선생님이 있었지만 이순걸 선생님은 단 한 번도 제자들을 회초리로 벌을 주지 아니하셨다. 훈육주임 선생님이셨지만 회초리와는 거리가 멀었고 반대로 상당히 감상적이셨다.
여름철 폭우로 만운못이 넘쳐서 학교 뒤 냇물이 불어 위험하면, 학교 뒤 둑에 올라서서 건너 봉데미산 아래서 큰물을 건너지 못한 현애, 서미, 신양, 매곡 학생들을 하나하나 고함으로 출석 호명하시고,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분이시다. 아날로그 시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추억을 제자들에게 주신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은 매곡 동네서 중학교까지 자전거로 출근하셨는데, 자전거 균형을 얼마나 잘 잡으시는지 핸들을 놓고 뒷짐을 지고도 넘어지지 아니하시고 잘도 타셨다.
운보천방중학교서 국산 새 삼천리자전거를 탄 학생은 우리보다 한 해 선배였던 이규희 학생이었는데, 제자는 삐까번쩍하는 새 삼천리호 자전걸 타도 선생님은 그냥 보통 중고를 잘도 타고 다니셨다.
필자가 운보천방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선생님을 가끔 풍산읍내서도 뵙지만 항상 자전거로 지나치셨고 그때마다 필자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은 이순걸 선생님을 안동여고서도 서너 번 뵈었다. 안동여고서 경북 학생 백일장 대회가 해마다 이루어졌고, 그때마다 선생님은 운보천방 중학생들을 델고 백일장을 나오셨다.
2학년 때 필자가 백일장서 "옹달샘"이라는 제목으로 장원상을 받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데 저만치서 이순걸 선생님은 손을 번쩍 들어, "조정래! 잘했어. 내년에도 장원 해야 된다!" 소리치셨다.
선생님은 필자가 중3 때 청송 주왕산 수학여행기를 적은 글을 보고, “조정래는 글재주가 조오타.”고 칭찬하신 분이셨다.
그 후 유럽서 귀국 후 인터넷 조선일보에 발표한 글이 자주 기사화되고, 출판사가 원고를 사겠다 하여 지금껏 총 4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지만, 솔직히 동창들은 그 누구도 조정래 책에는 일언급 없었지만 선생님은 제자의 책을 문중회의에서 자랑하시고 문중 인사들이 한 번씩 다 읽어 보도록 권장해 주신 분이셨다.
언젠가 만운못에 밤낚시를 갔더니 옆에 낚시하시던 분이 제가 괴정동서 왔다 하자, "그 동네 조정래 작가가 있다" 하여, 우째 알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집안 어르신이 이순걸 선생님인데, 제자가 지은 책이라고 읽어 보라 하여 읽어 보니 너무 재미있었다고... 그 후 그 책은 이발관에 두고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읽어 보게 되었단다. 이순걸 선생님은 저 같은 순쪼데기급 제자도 타인들에게 자랑하신 분이시다.
허긴 앞서 언급한 중학교 동창들도 조정래 알기를 점박 고스톱 판에 칠싸리 껍질은 고사하고 아무짝도 필요 없는 칠 열짜리로 아는데, ㅋㅋ
그에 비하면 학문이 깊은 이순걸 선생님의 쪼데기급 조정래 자랑은 필자로선 너무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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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걸 선생님 제자가 희제난 해골초 10근을 풍산 장터에 팔아 고무신 신고 청량리로 올라와서 당장 서울 첫날밤 지낼 곳이 없어 오가는 인파 속에서 멍하니 서 있었던 조정래가, 그 후 경북에서 최초로 L1비자를 받아서 캐나다와 미국서 근무하다가 휴가 나올 때 만년필 하나를 사서 이순걸 선생님께 전해 드렸고, 그 후 유럽 근무로 20년 넘게 뵙지 못하다가 귀국 후 풍산 한우 한 세트를 들고 집으로 방문 인사 드렸는데 그 때 나는 무척 놀랐다.
우리가 아는 그 이상으로 이순걸 선생님은 인문학적 지식이 높은 분이셨다. 한마디로 초야에 묻힌 큰 학자셨다. 굳이 씨저울로 비교한다면 운보천방중학교 필자와 같이 나온 전동창들 학식을 다 합쳐도 이순걸 선생님 인문학적 지식을 넘볼 수 없다고 본다.
선생님은 한마디로 박학다식하신 분이셨다. 아마 풍산 지역에서 선생님만큼 지역향토 학문이 높으신 분이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 깨달았다.
그날 신양동 고려말 역사와 서미 정승골 유성룡 대감 이야기는 필자에겐 큰 교훈의 스승과 제자 사이 학문 담소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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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시기 1년 전 스승의 날, 김경환 동창과 같이 이순걸 선생님을 다시 찾아뵙고 즐거운 식사를 대접해 드렸다.
말이 팔십노인이라지만 청년처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두 제자 앞에서 박학한 지식을 바탕으로 50년 만에 정말로 인생중중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날 나눈 대화에서 중학교 시절에는 전혀 못 느꼈던 이순걸 선생님의 참으로 박식하심을 알게 되었다.
그날 맛있는 식사는 김경환 동창이 내고 필자는 별도로 용돈 봉투를 드렸다.
50년 만에 비로소 스승의 날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고, 그리고 1년 후 선생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저개발국가든 개발국가든 그 나라의 정신 줄은 스승이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곁에 있던 스승은 버리고 요상한 중국 모자 뒤집어쓰고 한자 갈기면서 중국 스승 하늘처럼 모시고 삼전도보다 더 굽신거려도 그 누구도 도산 퇴계스승 어록을 마음 깊이 새기는 자들은 드물다.
암튼 필자에게 그런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는 사실적 인문학에 지금도 감사드리며 필을 접는다.
운보천방 중핵교서 선생님에게서 ㅅㅈㅊ 밑에 l 선행모음 탈락을 배웠던
순쪼데기 제자 조정래가 쓰다
2023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