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프레레는 히딩크 감독 영입 당시 히딩크, 에밀 자케 감독에 이은
접촉 대상 3순위였다. 플레멘스 벨스터호프 감독을 보좌하다가 나이
지리아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활약하며 1994년 아프리카 네이션스
컵 준우승, 월드컵 8강의 전과를 올린 경력을 갖고 있다. 1995년부터
는 나이지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금메달,
1998년엔 월드컵 16강 고지를 정복했다.
징크스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나 거듭해서 일어나고 그러면
서도 좀처럼 깨뜨릴 수 없는 현상의 다른 이름이다. 세계 축구계에
는 ‘월드컵 4강 징크스’라는 것이 있다. 4강 중의 한 자리는 늘 깜
짝 놀랄 만한 팀이 차지하는데, 이런 신데렐라 팀은 다음 대회에서
변변한 성적을 내지 못하기 일쑤이고 심지어 지역예선조차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1962년의 칠레나 1966년의 포르투갈까지 거론하진 않더라도 1994년
의 불가리아, 1998년의 크로아티아가 다음 대회에서 어떤 성적을 거
두었는지를 기억해보라. 본프레레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놀라운 성
적을 거둔 감독이다.
다음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축구가 충분한 시간을 마련할 수 없다면,
그리고 한국축구의 현 상황이 비상시국이라면 본프레레만한 적임자
도 없는 셈이다. 성공을 벤치마킹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
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에서 교훈을 끌어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고통스럽다.
언제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일이 틀어졌는지를 조목조목 따져 때로는
자신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수술칼을 들이대야 하기 때문이다. 본프레
레 선임은 쿠엘류의 실패로부터 이끌어낸 선택이다.
2002년 월드컵 직후 부임한 쿠엘류는 중도퇴진하기까지 기대에 못미
치는 성적을 남겼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쿠엘류는 유로 2000에서 포
르투갈을 이끌고 4강 진출의 놀라운 업적을 이룬 감독이다. 준결승
경기인 대(對)프랑스전에서 연장경기 종료 직전 페널티킥을 허용하
며 1-2로 물러섰지만, 당시의 경기 내용은 어느 팀이 이겼더라도 하
등 이상할 것이 없는, 막상막하 일진일퇴의 대접전이었다. 말하자
면, 쿠엘류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을 세계 챔피언 수준으로 조련한
명감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유럽과 한국의 조건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바로 이 지점이 유
럽 출신 축구인들이 한국에 와서 부딪히는 문화적 장벽이다. 유럽의
경우 1부리그 산하에 5부, 6부에 이르는 하위리그가 조직되어 있고,
매 리그는 연말 성적을 토대로 상위팀과 하위팀이 자리를 바꾼다. 두
터운 선수층과 완전경쟁 구도, 이익실현을 통한 축구문화와 축구산업
이 사회제도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기적을 일궈낸 본프레레
이러한 구도는 일종의 국제표준이다. 한국이 국제축구계에서 차지하
는 위상이나 그간에 거둔 성적을 감안하면, 외국인 축구 지도자들은
한국축구의 운영체계가 이러한 표준궤도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다.
쿠엘류는 스타급 선수들을 대상으로 팀을 만드는 데는 탁월한 재능
을 가진 감독이다. 말하자면 이미 완성된 부품을 선별하여 조립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그만한 인물을 다시 찾기 어렵다는 뜻이다.
문제는 한국축구의 여건은 그와 다르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는 감독
자신이 때때로 부품을 직접 깎아야 한다. 감독의 기능과 역할에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감독의 문화적 연착륙을 도와주는
인력이 없었고 기타 여러 측면에서 협회의 지원이 히딩크 감독 때와
는 다소 차이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쿠엘류 감독의 실패는 이러
한 모든 요소가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본프레레가 처했던 비정상적인 상황이란 어떤 것
일까. 예를 들어 아프리카 대표팀이 잉글랜드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갖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다고 치자. 경기 전날, 훈련을 마치고 돌
아왔는데 호텔 방문이 모두 잠겨 있다면? 차일피일 중간정산을 미루
며 결제를 하지 않던 팀 관계자가 현금을 몽땅 들고 사라졌는데 선수
들은 땀에 전 채로 호텔 앞에 주차해놓은 버스에 앉아있다고 하자.
감독은 선수들에게 일단 야외수영장으로 가서 샤워를 하라고 지시하
고 국제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버럭버럭 악을 쓰며 문제를 해
결한다.
나이지리아에서의 영광과 수모
그리고 올림픽 본선. 아예 8강 진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랬
는지 단순한 사무착오였는지 선수촌에 숙소를 마련하지 못했다면? 부
랴부랴 선수촌 근처의 모텔을 수배하고 인근 중국집 주인에게 사정
해 숙식을 해결한다. 그러다가 4강에 오르자 고위공직자들의 예고 없
는 방문이 줄을 잇는 가운데 훈련 스케줄을 그 사람들에 맞춰 재조정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참을 수 있다고 치자. 방문인사들이 나름대로 작성한 출
전선수 명단을 들이밀며 ‘이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
라’고 협박한다면? 6개월 임금 체불은 수시로 발생하는 일이어서 논
할 가치도 없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그야말
로 기적에 가까운 일 아닌가.
그렇다면 본프레레 감독이 2000년 이후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본프레레 감독 부임 이후 벌어진 이른
바 3류 감독 논쟁이나 그가 카타르, UAE, 나이지리아에서 잇따라 해
고되었다는 사실을 검증해 보자.
3류 감독론이야 개인의 주관적 평가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본프레레
감독이 가는 곳마다 연이어 문제를 일으켰다는 얘기는 그럴듯하게 들
린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정보와 다른 이면의
진실이 있는 법.
1997년 카타르 감독으로 재직할 당시 본프레레의 해임 사유는 98월드
컵 예선에서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에 연패하고 이란과의 친선경
기에서도 대패했다는 것. 그러나 당시 카타르팀 전력으로는 오토 대
제나 자갈로 감독이 팀을 맡았어도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을 이길 수
는 없었으리라는 게 세계 축구계의 평가다.
1999년 11월 나이지리아 감독으로 재부임했다가 2001년 4월21일 시에
라리온에 0-1로 패하며 월드컵 예선 도중에 해고당한 일도 화제였
다. 당시 본프레레는 유럽 출신 선수를 한 명도 쓰지 못했다. 수족
이 잘린 채 경기에 나섰다는 뜻이다. 당시 사정을 말해주는 기막힌
일화가 있으나 미처 사실 확인을 하지 못했기에 따로 적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98월드컵을 전후해 나이지리아에서 그렇게 수모를 당
했다면서 왜 1999년에 다시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탔는가. 모든 얘기
가 본프레레 감독이 지어낸 변명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걸 필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본프레레는 본전 생각이 났을 것이다. 나이지리아 선수들은
그와 1990년부터 한솥밥을 먹은 사이다. 그때까지 투자한 세월이 아
깝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이 구상한 축구철학이 완성단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허정무 코치에게 협박 반 애원 반
1998년 UAE리그로 진출, 알 와다 클럽을 우승으로 이끌고 그 인연으
로 2002년 UAE대표팀을 맡았다가 이내 지휘봉을 놓은 일도 구설에 올
랐다. 그 일만을 놓고 말하자면 본프레레는 정치적 파워게임의 희생
자다.
두 사람의 실력자 사이에 외국선수를 귀화시켜서라도 단기간에 실력
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성적지상주의’와 성적은 나쁘더라도 국내
출신 선수들만으로 팀을 구성해야 한다는 ‘순혈주의’가 평행선을
그으며 사사건건 부딪친다고 하자. 대표팀을 뽑을 때마다 감독의 의
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두 종류의 명단이 각각 다른 경로를 통
해 축구협회로 날아든다면? 담판을 짓되 뜻을 관철할 수 없으면 짐
을 챙겨 깨끗이 물러나는 것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정도? 필자는 허정무 코치 선임을 두고 시비가 일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선임 당시 허정무 코치의 직책이 기술위 부위원장이었으므로
‘자기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뽑았다’는 비난은 나름대로 정당한 근
거를 지닌다. 그러나 기술위원은 모두 명예를 중요시한다. 만약 허정
무 수석코치 선임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하자. 그때 쏟아질 비난이
나 질책은 여타의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혹독할 것이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선임을 강행한 것은 허정무 코치가 최선
의 대안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정무 코치 개인의 입장에선 이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의
였다. 우선 그는 2000~02년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대표팀 코치를 맡는다면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일종의 강등
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가 관장하는 용인 축구센터의 운영
도 본궤도에 올랐고 무엇보다도 국내외 몇몇 프로구단에서 감독직을
제의하고 있는 상태였다. 수입과 소득만을 생각한다면 허정무 코치
는 몇 억원의 현찰을 발로 차버린 것이다. 유로 2004 관전 도중 8강
전을 앞두고 일정을 변경해 급히 귀국해야 했던 일은 거론하지 말
자. 적어도 그가 코치 선임을 위해 자가발전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싫다는 사람, 하기 어렵다는 사람을 붙잡고 마지막까지 마음을 돌리
라고 협박 반 애원 반으로 설득작전을 펼친 것은 기술위원회다. 이것
이 대한축구협회의 원칙이다.
대표팀 감독은 꼭 외국인이어야 하는가, 코치 선임의 기준은 무엇인
가라는 질문에 필자는 이렇게 답한다. 외국인이냐 내국인이냐는 어
떤 경우에도 유효한 선택기준이 아니다. 지구인 가운데 그 일을 가
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가 누구인가가 유일하고 분명한
선택기준이다.
“내가 인정할 만한 경기가 아니다”
7월10일 광주에서 본프레레 감독은 바레인을 맞아 한국대표팀 감독
데뷔전을 치렀고 이동국 최진철의 연속골로 2-0의 승리를 거두었다.
“감독인 내가 스스로 인정할 만한 경기를 하지 못했다. 이겼지만 만
족할 수 없다.” 경기 직후 본프레레는 굳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버스에 오르기 전 잠깐 면담한 허정무 코치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
기고도 즐거워하지 않는 건 그들이 그만큼 정직하기 때문이다. 필자
는 그 정직함에 기대를 건다.
전언에 의하면 대표팀은 경기 직전까지 고강도 체력훈련을 거듭했다
고 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선수들의 몸이 다소 무거워 보인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지난 6월28일 필자는 본프레레 감독과 저녁을 함께했다. 디저트를 먹
으면서 당신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슬쩍 물었더니 그는 씨익 웃으면
서 이렇게 답했다. “월드컵 우승은 조금 힘들지 않겠어. 그건 천운
이 따라줘야 하거든.” 이거 진담인가.
“이봐요 장 교수, 어떤 대회든 출전한 감독은 우승하기 위해 전력
을 다하는 거요. 그게 진정한 프로의 세계거든. 물론 나름대로 계산
을 하지만. 예컨대 한국 정도의 시설과 지원이라면 내 야망을 실현
할 재료로는 충분하겠구나 하는. 자신이 없었으면 아예 여기까지 오
지도 않았어.”
이 남자, 정말 큰일을 낼 만한 사람 아닌가.
2006월드컵 결승전이 열릴 베를린 올림픽메인스타디움. 마라토너 손
기정과 남승룡의 영광이 우리를 부른다. 태극기 한 폭을 온몸에 휘감
고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열창할 수 있다면 거기가 세상의 끝
이라 해도 아무런 여한이 없으리라. 그리하여 저 먼 미래를 향해, 본
프레레호여 힘차게 발진하라!冬
첫댓글 ㅋ 좋은 내용 봤습니다.솔직히 저는 본프레레 첫인상이 안조았습니다. 하지만 점점 조아지는군요. 정경호라는 훌륭한 윙포워드도 찾고 한국의 새로운 스타일축구를 삽입하는. 점점조아지고있습니다.ㅋ 본프레레감독님 독일월드컵에서 성공하시길..
이 글 정말 좋습니다. 여기저기 퍼날라주고 싶습니다...
좋은 내용이네요 ^^ 잘 읽었습니다...스크랩해갈께요...
현 축협 기술위원이신 숭실대 문예창작과 교수 장원재씨의 글이군요^__^
본감독 안티여러분~! 일단은 믿어봅시다~!
좋은글인데 장원재교수 쫌 안좋은소문이 있어서;
좋다 .
와! 멋진 글이에요! 감동까지..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