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공리 답사기
유월도 중순에 이르렀다. 열흘이 지나면 하지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앞두고 내가 자리를 주선하는 모임이 하나 있다. 여남은 사람이 모이는 그 자리 나가면 누군 나를 회장님이라 부르기도 한다만 나는 단지 연락책에 지나지 않는다. 오래 전 어느 여학교 근무할 적 만난 교장이 퇴임할 때 그 학교를 먼저 떠난 동료들에게 얼굴을 한 번 뵙자고 서신을 띄움이 계기가 되었다.
모임이 이십 년 가까이 되니 이제 퇴직자가 많고 현직은 네댓뿐이다. 내가 거제로 옮겨오면서 이 모임을 지속하느냐 마느냐 고심하다 계속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휴대폰 문자로 모임 통지를 해도 되겠으나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 겉봉에 모임 주소를 잘라 붙여 칠월 첫 주 금요일 저녁에 뵙자는 내용을 담아 봉했다. 모두 스물한 명에게 편지를 띄우지만 나오는 분은 열 명 안팎이다.
비록 손 글씨는 아닐지라도 워드로 출력된 편지를 일 년에 두 차례 우체국을 찾아 발송한다. 유월 둘째 목요일 퇴근 후 모임을 통지하는 편지를 들고 연초면 우체국에 들렸다. 전에는 우표를 사 풀로 붙였다만 이제 카드 결제로 대신한다. 절차의 편리함은 좋다만 창구에서 손으로 우표에 풀칠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더뎌도 좋으니 우표를 손수 붙이고 싶은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모처럼 연초삼거리로 나간 김에 주변 자연부락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 가운데 한 마을이 다공(茶貢)리였다. 다공리는 연초삼거리에서 하청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다공리를 지난 중리에서 덕치를 넘으면 하청면이었다. 덕치는 펑퍼짐한 산마루로 연초면과 하청면을 나누는 경계였다. 치‘(峙)’는 고개를 이르는 한자로 찻길이 뚫리기 전 그 고개는 높고 크게 보였나보다.
우체국 볼 일을 보고나서 하청으로 가는 국도 5호 찻길엔 보도가 확보되지 않아 연초천을 따라 걸었다. 산기슭에 집들이 들어서고 하천을 따라 형성된 좁은 들판은 논으로 모내기가 끝나 있었다. 그래도 거제에서는 연초면이 농경지가 많은 편이었다. 밭뙈기에는 참깨가 자라고 심어둔 고구마 순은 활착되어 갔다. 옥수수는 잎줄기가 너풀너풀해 수꽃이 피면서 수염이 나오고 있었다.
연초천에는 수생식물이 가득 자랐다. 갈대와 왕골이 무성했다. 거제는 바다와 가까워서인지 하천 습지에 화문석 재료가 되는 왕골이 자랐다. 보가 있어서인지 고인 물에 연잎 크기가 작은 노랑어리연이 가득했다. 노랑어리연은 꽃이 피기는 아직 일렀다. 천변을 따라 걸어 다공마을 앞에 이르니 연꽃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본디 논바닥인데 연근을 심어 생태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다공리 지명 어원이 궁금했다. ‘다공’은 차를 진상해 올렸다는 뜻이다. 연초면 식생을 구체적으로 살피지 못했지만 차가 자생하거나 경작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럼에도 그 연원을 알 수 없지만 오래 전부터 이곳이 왜 다공이라 불리어졌을까? 설령 거제 섬에서 차가 생산되었다고 해도 바다 건너 머나먼 신라 경주나 고려 개경 왕실까지 차를 진상해 올렸다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차는 불교문화와 연관이 깊다. 특히 남방전래설 불교와는 더 그렇다. 인근 남해와 달리 거제는 유서가 깊은 사찰이 없다. 앵산 북쪽 ‘하청북사’라는 폐사지가 있다고 들었다. 다공마을에서 더 깊숙한 곳은 ‘부처골’로 불리는데 근래 불곡사가 들어섰다. 칠원 윤씨 거제 문중 묘역 근처다. 다공마을에 딸린 불곡마을로 들어가 봤다. 절로 올라 법당 뜰에 서성이다 도론마을로 나왔다.
나는 폐사지가 있어 예전 부처님 앞에 차를 올렸을 거라 헤아려봤다. 도론마을에서 물꼬를 돌보고 집으로 가던 여든일곱 살 노인을 만났다. 그분께 다공의 연원을 물었더니 여기는 개오동나무가 자생하는데 그 열매가 한약재로 신장병에 탁월한 효험이 있어 어디로 보내졌을 거라 했다. 이곳이 왜 ‘도론’이라 불리는지 여쭈었더니 예전에 서당이 있어 도덕 윤리를 강론했던 곳이란다. 19.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