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그 공룡능선
맑은 어둠, 달과 별이 총총했다.
새벽 두시, 소공원 통제문이 열렸다. 어둠을 가르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비선대 물소리는 언제나 쉼이 없다. 마등령을 오르는 발걸음엔 헤드랜턴 불빛이 숲속 별이 되었다. 달빛으로 하늘은 은회색이었고, 설악능선은 모두 검다. 설악의 가을밤은 그러했다.
등산은 중력을 역행하는 몸부림이다. 어둠과 돌을 밟고.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심장은 요동치고, 폐는 터질듯하다. 몸에 고통이 밀려오니 마음속은 후회가 덮친다. "집에서 편히 쉴걸, 괜히..."하고. 그래도 올라가야한다. 산과 시절과 더불어 놀고 싶다면.
과거 오색을 출발하여 대청봉을 넘었을 때 무너미고개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공룡으로?' '천불동으로?' 매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천불동을 택했다. 아쉬움이 많았다. 오늘은 고난의 공룡능선 길을 선택했다. 소공원-비선대-공룡능선-천불동-소공원 코스로.
마등령에 도착했다.
바람이 차다. 손끝이 시렸다. 배낭에서 자켓을 꺼내 입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가쁜 숨을 가라앉혔다.
동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설악능선, 반짝이는 속초시, 바다 위 먹구름, 밀감빛 여명, 다시 짙은 남빛 하늘... 마등령의 일출은 숨었지만, 그 후희는 내품속으로 깊게 안겨왔다.
해가 구름밖으로 나왔다. 그 가을햇살은 백두대간 공룡능선과 먼 산야에 튕기며 바스러지고 있었다. 어둠에서 밝음이 이음새 없이 능선과 계곡과 바다에 포개지고 스며들었다. 공룡능선에서 시간은 서두르지 않았고, 머뭇거리지 않았다. 거기에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이 가을 공룡능선의 나무들은 푸르고 강성한 산맥의 힘을 이루던 여름날의 울창함을 내려놓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나무는 저렇게 버림으로써 혹한을 준비하고, 인간은 채움으로써 겨울을 맞이하지 않던가. 나는 지금 이 순간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싶지 않다. 다만 대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싶을 뿐이다. 사랑은 언제나 내어줌과 낮은 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믿기에.
공룡능선은 나한봉, 큰새봉, 1275봉, 신선대를 통과해야한다. 그 공룡길은 증권시장 작전주처럼 급등과 급락을 반복했다. 진폭이 크게. 공룡능선은 어렵고 어려웠다. 하여 그 흐름을 타고 오르내리기 힘겨웠다.
돌계단, 암릉, 단풍, 가끔씩 기품있게 솟아있는 금강송들, 흰구름, 햇살 그리고 바람... 이것들이 비빔밥처럼 섞이고 비벼져, 때로는 우악스럽고 날카롭게, 때로는 장엄하고 부드럽게, 때로는 앙큼하고 우아하게 암봉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채울 곳은 채우고, 비울 곳은 비워주며, 아주 적절하게.
천불동으로 하산했다. 공룡에서 체력을 거의 다 소진했기에 내리막 돌계단길도 만만치 않았다.
천불동계곡은 천봉만암(千峰萬岩)과 청수옥담(淸水玉潭)의 세계였다.잠시 쉴겸 물가에 앉았다.가을햇살이 물속에 살며시 들어앉았다. 물은 금빛을 세상에 회향하고 있었다.
새벽에 올랐던 비선대에 도착했다.
37,200, 트랭글 걸음 수 였다. 몸은 만신창이 된듯 무겁고 버겁다. 허나 눈과 가슴엔 신선대에 앉아 바라본 설악의 자태가 선하다. 출산을 마친 산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공룡능선 또 올거야?"
나는 망설임 없이 즉시 답했다.
"반드시..."
다시 '왜'라고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공룡능선은 고통 마저도 행복하게 하는 신선계'라고.
하산 후 한 잔 술, 인생 최고의 맛이었다.
돌아오는 버스는 미시령길로 들었다. 창밖은 어둠이 함께 달리고 있다. 눈이 감겨왔다. 꿈인듯 생시인듯, 옷을 벗고 누운 울산바위 뒷태의 실루엣이 그윽해 보였다.
2023. 10. 7
첫댓글
심오한 설악의 산행기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