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 5일, 화산이 위치해 있는 있는 화음시(华阴市)에서 서안으로 출발한다. 화음시가 화산의 북쪽에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음(阴=陰)을 "고려대 중국어 사전"에서 찾아보면, "① 양의 반대인 음, ② 흐리다 ③ 그늘 ④ 산의 북쪽, 강의 남쪽" 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④ "산의 북쪽"의 뜻이다. 화음시는 화산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화음시에서 서안까지는 약 120km, 고속 열차로 약 30분 걸린다. 출발한 기차의 왼쪽 창문으로 위풍당당하고 장엄한 화산이 한 동안 펼쳐진다. 병풍 위에 펼쳐진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화산, 마치 낮 도깨비를 보는 듯 하다.
서안의 볼거리 중 으뜸이라면 병마용일 것이다. 나는 전에 두 번 병마용을 본 적이 있기에, 이번 여행에서는 서안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서안의 교통 중심은 종루(鐘樓)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듯, 서안의 모든 관광지는 종루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고루(鼓樓)가 그 안에 북이 들어있는 건물이듯, 종루(鐘樓)는 그 안에 종이 들어있는 건물이다. 서울에 있는 종로(鍾路)는 종이 있었던 거리의 이름이다. 서울의 종루(鐘樓)는 종각 또는 보신각이다. 종각(鐘閣)과 보신각(普信閣)은 같은 건물이다.
서안의 성은 정확한 직사각형은 아니지만, 대체로 가로가 4,190m, 세로가 2,770m 직사각형의 형태다. 서울의 동대문에서 광화문까지가 약 2,800m이니, 그 크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성의 긴 면이 동대문에서 연세대까지의 거리쯤 될 것이다. 이 성의 높이는 12m, 성의 폭도 12m이다. 성 위에 올라가면 무슨 운동장처럼 넓어 보인다. 성 위에 올라가 걸어서 한 바퀴 돈다는 것은 무리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야 한다. 나는 남문으로 올라갔다.
성 위에 올라 걷다보면, 시 한수를 만나게 된다.
人生得意須盡歡 (인생득의수진환)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인생에서 뜻을 이루었으면 진탕 즐겨라.
금잔이 빈 채로 달과 마주하게 하지 마라.
이 말을 내 식대로 말하면 이렇다. 달빛 아래 친구와 술을 마시면서…
“야, 살다보니, 이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가 잘 산 것 아니냐? 우리 부모들 못 해본 것 다 해본 것 아니냐? 뭘 더 바라냐? 우리에게 무슨 내일이 있냐? 오늘 밤, 진탕 쌔려 먹어 보자!
야, 저 달좀 봐라. 오늘따라 왜 이리 달이 밝으냐? 술맛 죽여준다야. 야, 빈 술잔에 달빛이 고여있네! 너 뭐하냐? 빨리 술 따르라구! 너 꼭 한대 맞아야 술 따르겠냐?”
성에서 내려와 조금 걸으면 비림 박물관에 도착한다. 위의 현판에 있는 글자 “비림” 중, “비”자에서 위에 삐침(丿)이 없다. 비(碑)라고 써야 맞다. 일설에 의하면 임칙서가 좌천되면서 이렇게 썼다고 한다.
삐침(丿)을 사전에 찾아보면 “붓으로 글씨를 쓸 때, 삐침 획을 긋다”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삐침이라는 말은 “丿”의 이름이다. 丿은 똑바르지 못 하고 옆으로 뒤틀려있다. 그래서 “글자 자체가 비틀어져 토라지고 삐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보통 우리가 “그 아이는 삐쳐서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한다”라고 할 때의 “삐치다”는 “마음이 비틀어져 토라지다”의 뜻이다. 결국 글자나 사람이나 똑 바르지 못 하면 삐친 것이다! 어렸을 때 어른 들이, "저 년은 툭하면 삐쳐서 밥도 안 쳐먹고, 저 지랄하고 구석탱이에 앉아서 울고만 있다. 내버려 둬라. 굶어 뒈지건 말건!"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비림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수 많은 비석이 들어 있다. 비의 숲이라기 보다, 비의 바다이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비를 모아다 놓았는지, 실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중에는 머리가 아플 정도이다.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고 했으니, 옛 사람들은 어떤 형태이든지 자신이 이 세상에 왔다 갔음을 알리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어디 한번 주위를 훑어봐라. 몇몇 왕이나 이름 난 정승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지금 누구를 알고 있는가? 다 부질없는 짓이다. 2002년 서울 월드컵 경기 때, 시청 앞에 모인 수 많은 사람들이 광란의 밤을 보냈었다. 그들이 귀가할 때, 앉은 자리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하고 떠났다고, 세계 언론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도 이 세상 떠날 때는 "말 없이, 남김 없이, 깔끔하게" 그렇게 떠나야 한다. 그러나 혹시 모르겠다. 지금 내가 쓰는 이 여행기가 다음 카페에 영원히 남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도 어렵기는 어려운가 보다.
이번 여행에서 한번도 박물관을 가보지 못 하여, 서안 시내에 있는 섬서성 역사 박물관에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장료가 무료이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중국인에게는 무료, 외국인에게는 1인당 53,0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나는 지금까지 중국을 다니면서, 입장료를 낼 때, 중국인과 외국인을 구별해서 받는 곳은 처음 본다. 입장료도 어마어마하게 큰 액수다. 앞으로 중국에서 이런 정책을 계속 펼쳐 나갈지 두고 볼 일이다. 박물관에서 수백장의 사진을 찍었다, 아래 몇 장 올린다.
光盘行动(광반행동)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도대체 광반행동이 무엇인가? 광반은 중국어로 CD를 말한다. 즉, USB가 나오기 전에 mp3를 듣던 CD다. CD 행동이라! 위의 중국어를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광반행동/절약은 복이다.
모든 식량 한알 한알은 구하기 어려운 것이니, 다른 사람의 노동의 성과를 귀중히 여기는 것이 일종의 미덕이다.
위 사진에서 둥근 것은, 접시이면서 동시에 CD이다. 즉, 식사할 때 판에 아무 것도 없는 CD처럼 음식을 남기지 말고 깨끗이 비우자, 라는 뜻으로 보인다. 또 중국어 "光"은 "빛"이라는 뜻 이외에 "조금도 남지 않다"는 뜻도 있다. 예를 들어 "깨끗이 다 먹었다"라고 할 때, “吃光了”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한국어에서도, "꽝이야!"하면, 아무 것도 없다, 또는 복권 등에 당첨되지 못 했다, 등으로 쓰인다. 결론적으로 위 포스터는, "중국 사람들, 음식 좀 작작 남기더라고, 잉! 농부들이 애써 지은 곡식을 그렇게 버리면 어디 쓰겄어? 저렇게 버리는 것을 보면 미치겠구먼!"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왕에 말 나온 김에, CD 이야기를 좀더 하자. 한국 가요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그들은 "난, 알아요~" 하면서 중얼중얼 댔는데, 그것도 노래라고 하여, 별 미친 놈들 다 있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어느 날 TV를 보고 있는데, 가수 전영록이 나와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새로운 스타일 노래가 전망이 밝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영록은 CD로 음악을 듣는데, 외국 CD 300장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나는 그때 CD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때는 카세트 테입으로 노래를 듣던 시대다. CD라! 그러면 AB는 뭐지? 그때 정말 부러웠다. 그때는 컴퓨터 286, 386도 나오지 않은 그런 시절이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장소는 불야성이다. 대당불야성으로도 불린다. 우리가 어느 장소에서 밤에 불빛이 밝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을 불야성이라고 하는데, 그 출처가 여기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특정 주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할 때 '장안의 화제'라고 하는데, 이것도 바로 서안에서 유래했다. 왜냐하면 서안의 옛 이름이 장안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지를 동반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며, 웃으며, 장난치며 쌀쌀한 밤거리를 걷는다. 어느 곳에서는 아이들이 집단으로 괴성을 지르며 발을 동동거린다. 그러면 분수가 치솟아 오르며, 오색 불빛이 사방으로 퍼진다. 또 어느 곳에 가면 중국의 유명한 시인들의 조각상이 위엄있게 나를 내려다 본다. 그 주위로 검고 푸른 물이 파도 치며 흘러간다. 또 어느 곳에서는 음식을 파는 상인들의 애절한 목소리가 주위를 맴돌다가 검고 푸른 하늘로 사라진다.
어디서 쓸쓸한, 아니 처절한 남자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그는 때로는 노래로, 때로는 말로, 자기 식당에 손님이 오도록 유객행위를 하고 있다. 그의 말은 한탄으로 들리고, 그의 노래는 절규로 들린다. 흰옷 입은 젊은이는 졸기도 하고 깨기도 하면서 캄캄하고 찬 바람부는 거리를 향해 소리를 질러서 손님을 끌어들여야 자기 손에 일당이 떨어진다. 세상은 넓고 하는 일도 가지각색이다. 저 청년의 장래가 여기 대당불야성처럼 밝았으면 좋겠다. 4월 초, 서안의 마지막 밤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족 1>
이번 여행 중 감기에 걸려, 기침, 콧물로 힘들었다. 귀국 후에 병원에 가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약국에 갔다. 간단한 나의 증세를 듣고, 약사는 척하면 삼척처럼, 바로 위에 있는 “感冒灵颗粒”(간마오링컬리)라는 약을 휙 던져주었다. 이 약을 먹는 즉시 감기 증세가 사라졌다. 물론 몇 시간 지나면 감기 증세는 또 나타났다. 왜냐하면, 이 약은 감기 증세 완화제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감기를 치료하는 약은 없다. 감기 증세만 없어도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중국에서 감기 걸렸을 때, 약국에 가서 "간마오 링컬리"라고 외치기 바란다! 한약재로만 제조된 약품이다.
<사족 2>
시안 시내를 관광하기 위해 지도를 샀다. 그러나 이 지도를 보고 어디가 어디인지를 안다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와 비슷했다. 그게 그거고,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거기였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있던 젊은이에게, “나는 한국 사람인데, 청진사로 가려면 어떻게 가면 좋은지요?” 중국어로 물으려고 했다. 내 말을 듣던 그 젊은이는, 자기가 영어를 할 수 있으니, 영어로 대화하자고 말했다. “Good!”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인지, 당연하게인지, 영어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지하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려고 하는데, 지하철이라는 영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청년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줄 알고, "subway?라고 먼저 말했다. 나는 자좀심 엄청 상했다. 또 “그래요?” 라는 뜻의 Really?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是吗?(그래요?)”, 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하여튼 그 사람과 몇 분 동안 이야기 하는데, 중국어 반, 영어 반으로 뒤섞인 말이 내 입에서 나왔다. 놀랍게도 한국어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얼른 두 손으로 나의 두 입술을 오므려 닫았다. 그리고 내 뺨을 한대 치고 내 자신에게 말했다. “어르신, 장하구먼유! 본래 인생이 그런거구먼유? 그런 줄이나 아슈!”
<여행기 시리즈 끝>
첫댓글 곽영을 선생님, 여행기 굉장히 재밌게 읽었습니당!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한가위 선물이었어요. 내년에 중원과 실크로드를 갑니다. 가기 전 다시 읽고 가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