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화의 바다, Blue Ocean과 Red Ocean
집회 35,1-15; 마르 10,28-31 / 연중 제8주간 화요일; 2025.3.4.
저 광대무변한 너른 우주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축복받은 유일무이한 별이 지구입니다. 그리고 생명체의 생존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기와 물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 덕분에 식물이 터를 잡고 동물이 살아가며 이 동식물들을 통해 인간도 생존해 왔습니다.
또한 바다는 육지의 생태계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입니다. 지구는 오대양(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북극해, 남극해)과 육대주(아시아, 유럽,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지만, 지구 표면의 70%를 차지하는 바다의 크기와 넓이 그리고 깊이가 육지를 떠받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바다를 이용해 온 인류의 해양 문명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지만, 겨우 연안의 바다를 주로 이용하는 모양새였고 15세기 이후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먼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깊은 바다에는 접근도 하지 못하고 바다의 해류가 육지의 기후와 기상에 미치는 영향에 종속된 처지입니다.
바다를 통해서 물자와 인구를 교류해 온 문명이 선진 문명이 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선진국치고 바다를 연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여기서 경쟁이 치열한 바다 즉 레드 오션과 경쟁이 시작되지도 않은 바다 즉 블루 오션이 생겨납니다.
복음화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도 블루 오션과 레드 오션이 있습니다. 제한된 인구와 영역을 놓고 서로 교세 경쟁을 벌여온 지난 날의 선교 역사는 레드 오션이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이 넘쳐 나고 소수의 신비가들만 남게 될 인류 역사에서도 그렇고 종교의 천국이라 일컬어지던 대한민국에서도 새로운 입교자를 구하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사회의 인구 증가율은 이제 감소 추세입니다. 본당마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매년 줄어들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보다 중학생들이 더 적고, 고등학생들은 더 적으며, 대학생 나이의 청년들은 아예 찾아보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그만큼 교리실에서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행해 지는 천주교회의 청소년 및 청년 선교 활동은 커다란 벽에 부닥쳤습니다. 하지만 지난 탄핵 국면의 여의도 시위나 남태령 시위에서 확인되었듯이, 복음적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현장에서는 청년들이 넘쳐납니다. 그냥 머릿수만 많은 것이 아니고 갖가지 창의적인 행위들, 예를 들면 형형색색의 응원봉이라든지 좋아하는 노래에 맞추어 춤추는 율동들이 넘쳐납니다. 혹한의 추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밤을 새우는 희생도 마다 하지 않습니다.
이제 눈을 돌려 블루 오션을 찾아야 합니다. 말하자면 양적인 선교 활동이 아니라 질적인 선교 활동에서 복음화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 선포 활동에서 현대적 의미를 찾고, 세상 사람들의 공동선에 부합되는 의미를 구현시키는 실천이 블루 오션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복음적 매력을 살리는 선교 활동이 시대적으로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제의 복음화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 이어서 나온 에피소드입니다. 계명을 잘 지켜왔다고 자부하던 그 청년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에 크게 실망하여 풀이 죽어서 돌아갔던 것과는 달리,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따른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나서서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마르 10,28ㄴ)
이러한 장담이 담고 있는 속뜻은 그러니 자신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에 따른 현세적 보상도 따를 것인지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것이고 이 물음에 대답해 달라는 것이지요. 예의 그 부자 청년이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간 뒤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마르 10,23)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만큼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필수적 조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오기는 했으나, 마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도 싶고 그 보상으로 기대하는 재물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마르 10,26) 하고 투덜거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고 타이르셨습니다.
하느님께는 가능한, 또 그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도 역시 가능한 영원한 생명의 현세적 보상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교회의 경제적 현실이요 이를 누룩이자 겨자씨로 삼아 이룩해야 할 경제 복음화의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공동 소유와 공동 사용의 경제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공동체의 물적 토대 역시 하느님께서 그 모든 재화의 주인이심을 깨닫고 각자의 개인 소유권이 절대적 권리가 아니며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관리하라는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교회의 경제 현실이어야 하고 경제 복음화의 목표입니다.
이 명령이 워낙 엄중하고 중요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바를 계승할 수 있도록 배우는 한편으로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습니다.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배움으로써 예수님처럼 복음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기도하는 일을 하고, 교우들끼리의 관계에서는 빵을 떼어 나누는 성사생활을 통해 친교를 이루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재물의 주인이 하느님이 되실 수 있도록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특히 더 필요한 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권을 개방하는 방향으로 재물을 관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재화의 보편 목적 원리’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원리’라고 합니다. 재화를 하느님의 뜻대로 소유 내지 사용하고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를 하느님과의 관계처럼 존중하는 일이 재물을 우상처럼 숭배하지 않고 하느님을 흠숭하는 일이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잣대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 따라서, 초대교회의 실천을 근세에 재현한 선구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협동조합 운동가들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상품은 대량으로 생산하고 판매되어 자본가들의 이익은 크게 증대되었으나 농촌을 탈출하여 도시로 유입되어 대폭 늘어난 노동자들의 사정은 형편 없어 졌습니다. 이른바 빈익빈부익부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엥겔스와 마르크스 같은 노동운동가들은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로버트 오웬, 프랑스의 생시몽과 푸리에, 독일의 라이파이젠, 이탈리아의 마찌니 등은 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각각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 생산자 협동조합 운동, 신용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숱한 시행착오와 토론을 거쳐 확정된 국제 협동조합 연맹의 규칙은 아래와 같이 일곱 가지로 확정되었습니다.
첫째, 협동조합은 자발적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성(性)적 · 사회적 ·인종적 · 정치적 · 종교적 차별 없이 열려있는 조직이다.
둘째, 조합원들은 정책수립과 의사결정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선출된 임원들은 조합원에게 책임을 갖고 봉사한다. 조합원마다 동등한 투표권(1인 1표)를 가지며, 협동조합연합회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조직하고 운영한다.
셋째, 협동조합의 기본 질서는 공정하게 조성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것이다. 자본금의 일부는 조합의 공동재산이며, 출자배당이 있는 경우에 조합원은 출자액에 따라 제한된 배당금을 받는다. 잉여금은 협동조합의 발전을 위해 일부는 배당하지 않고 유보금으로 적립하며, 사업이용 실적에 비례하여 편익을 제공하고, 여타 협동조합 활동지원 등에 배분힌디.
넷째, 협동조합이 다른 조직과 약정을 맺거나 외부에서 자본을 조달할 때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가 보장되고, 협동조합의 자율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다섯 째, 협동조합은 조합원, 선출된 임원, 경영자, 직원들에게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며, 젊은 세대와 여론 지도층에게 협동의 본질과 장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여섯 째, 국내, 국외에서 공통적으로 협력 사업을 전개함으로써 협동조합 운동의 힘을 강화시키고, 조합원에게 효과적으로 봉사한다.
일곱 째, 조합원의 동의를 토대로 조합이 속한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 <출처: 한국 사회적 기업 진흥원>
교우 여러분!
지구의 바다가 우리가 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훨씬 더 깊은 것처럼, 복음화의 바다도 우리 교회가 선교 활동으로 행해 온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습니다. 블루 오션으로 나아갑시다.
교우 여러분!
에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선포하신 진리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허상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이상입니다. 하느님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화의 바다는 레드 오션만이 아니라 블루 오션도 있습니다.
첫댓글 교회 경제론 처음 들었지만 이해하였습니다.
질문-복음 말씀이 "현세에서 박해를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받는 때가 현세? 내세?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주실 때-복을 내려 주시고 번성하라는 것은 현세의 축복을 약속하신 것이지요 ),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번역을 쉽게 풀이해 주십시요
강론 본문의 맥락을 이해하시면, 축복이 시점은 현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기우
“박해도 받겠지만”은, “박해를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이고, “박해를 받더라도
참고 견뎌야 한다.”입니다.
집, 형제, 자매, 어머니, 자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내세에서 큰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은,
‘박해도 받겠지만’의 뒤로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의 복을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매일 미사 책 묵상 집필자 분 글 먼저 읽고
그 다음 두 번째로 복음 해설을 읽는 지방 교구의 소속 (해당 교구 신학교 교수 역임자,유럽 유학파 .신약 전공) 신부님 글입니다
본당 신부님들의 강론에 대하여
강론 준비의 무성의, 독서를 포함한 복음의 강론에 대하여
다른 사제,수도자들에게 듣고 배운 것과 상이할 때
반론이나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아야 된다고 알고 있는데 맞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위에 적은 제 견해를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을 꼼꼼히 읽으시고, 제 강론의 맥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